16. 기도 : 삶 자체로서의 기도

기도란 이따금씩 드리는 기도,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와 식사기도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 삶 자체로서의 기도이다.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살전 5:17)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기도는 과학자들의 학문이요 예술가들의 예술과 흡사하다. 예술가들은 진흙이나 물감, 단어나 어조 등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그것들에게 풍성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다루는 재료는 살아있는 인성이다. 그는 기도에 의해서 그것에게 형태를 부여하고 풍성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하는데, 먼저는 기도하는 사람 자신에게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피조된 사물과 현상을 연구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피조물의 창조주에게로 나아간다. 따뜻함이 아니라 따뜻함의 원천이 그의 사랑을 촉진시킨다. 삶의 기능들이 아니라 삶의 근원이, 그의 자아가 아니라 자아 안에 있는 의식의 근원, 즉 자아의 창조주가 그의 사랑을 촉진시킨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완숙한 경지에 이르려면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솜씨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작업을 할 때마다 거룩한 영감을 기다려야 한다면, 그들은 결코 자기 분야에서 필요한 원리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예민한 악기인 바이올린의 비결을 터득하려면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바이올린보다 훨씬 더 예민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기도를 시작하는 측은 우리 인간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한 걸음을 뗀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열 걸음 다가오실 것이다. 주님은 탕자가 아직 먼 곳에 있을 때에 아들을 보고 긍휼히 여겨 달려가서 얼싸 안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눅 15:20).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면, 불확실하지만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자신의 출발이 서툴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끄러워하거나 자신감을 잃을 필요가 없다. 또 원수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단지 환상과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고 우리를 납득시키려한다. 원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기도임을 알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면 글을 읽으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진다. 하나의 언어에 깊이 들어갈수록 그만큼 더 언어를 잘 사용하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된다. 능숙해짐에 따라 즐거움이 증가하며, 능숙함은 연습과 병행한다. 능숙해질수록 연습하는 것도 점점 더 즐거워진다.
기도에 대해서 이외에 달리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도에 착수하기 전에 특별한 신의 영감을 기다리지 말라. 사람은 말하고 생각하도록 피조 되었으며, 아울러 기도하도록 피조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기도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기 때문이다(창 2;15).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안이 아니고 어디에서 에덴동산을 발견할 것인가?
우리도 아담처럼 절제하지 못하여 빼앗긴 에덴동산 때문에 울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화과 나뭇잎과 가죽옷을 입히셨다(창 3:21). 그것은 고난을 수반하는 썩어질 본질이다. 우리와 생명나무에 이르는 좁은 길 사이에는 세상적 욕망의 어두운 불길이 놓여 있으며, 이 욕망을 정복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창 2:7).
그러한 승리를 거두기는 무척 어렵다! 크레테의 앤드류 성인은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 중 단 하나만 범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 시간 그것들 모두를 범한다"고 했다. 우리가 완악하고 끈질긴 죄인의 처지에서 기도해야만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다.
완악한 죄인은 자신의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놀랄 필요가 없다. 기도는 점차 우리의 굳은 마부드럽게 해줄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