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단 한번만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이에 대한 탐구욕을 한없이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교황 성 그레고리

 

 

우리는 지금 스위스의 쥐리히에서 살았던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모두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심리학을 기독교의 영성과의 관련 아래에서 다루고자 한다.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융이 이룩해 놓은 모든 작업들은 여태까지 인류가 쌓아온 인간에 관한 인식의 전체적인 틀 속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융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오는 그 많은 왜곡과 비판 및 잘못된 판단들을 피할 수가 있다. 융은 그 자신이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모든 학설들을 기존의 인식들 위에서 구축하려고 했으며, 인간의 실제적인 경험 위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융은 인간에 관한 수많은 심리학적인 발견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무의식(incondscient collectif)이나 원형(arcchétype)같은 독창적인 발견들을 통해서 현대 심리학에 엄청난 발전을 가지고 왔다. 즉 이들 개념들을 통해서 심리학의 영역을 괄목할만하게 확장시켰으며, 심화시켰다.

오랜 세월 동안의 연구와 그 자신의 경험 및 작업을 통해서 융은 인간의 정신(la psyché)은 의식과 무의식의 전일체(全一體)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하였다. 즉 이 전일체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인간이 관여되고 있는 모든 일에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성과 관계되는 모든 일은 다 심리학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다고 융은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작업이 포괄주의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실제로 융은 그의 이러한 입장 때문에 다른 심리학자들이 다루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신화(神話)나 연금술(鍊金術)은 물론 영지주의(靈智主義)나 종교의 영역까지도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그리고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그가 이런 주제들을 다를 때 그는 이 주제들을 그 자체만을 위해서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이 주제들이 인간 심리의 어떤 중요한 문제들을 보여줄 때에만 탐구하였다. 인간 심리에 대한 탐구야말로 이 대가(大家)의 모든 작업의 중심에 위치한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신적인 사실(le fait psychologique)"만이 중요하였다. 그것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드러나건, 성적인 측면에서 드러나건, 사회적인 측면에서 드러나건, 그것도 아니면 형이상학이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드러나건, 어쨌든 그것이 인간의 정신적인 사실로 나타나기만 하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고, 연구해볼 만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들 문제에서 관찰한 것은 이 문제들이 품고 있는 의미와, 정신적 가치였다. 철학자나 형이상학자, 신학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 현상들을 고찰하였듯이, 그는 한 사람의 심리학자로서 이 문제들을 관찰하였다.

융의 작업은 명실상부하게 현대 심리학의 총화(總和)였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사람들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융의 심리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정수(精髓)를 꿰뚫고 들어가려면, 우리는 그의 심리학이 서 있는 지평과 같은 지평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의 심리학을 순전히 주지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한다면, 우리는 그의 심리학에서 온통 혼돈되고, 뒤죽박죽으로 된 모습만을 보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의 심리학에는 여러 가지 모순된 진술이 들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심리학이 인간 정신의 엄청나게 복잡한 현상들과 그에 관한 방대한 관찰 결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인간의 정신에는 내적 균질성(homogénéit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 옛날 테세우스로 하여금 미궁(迷宮)속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우리 정신의 균질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융의 심리학은 우리가 단지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심리학은 어떤 체계나 이론의 구성, 또는 하나의 지적 종합(synthé -seintellectuelle)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의 삶의 각 단계에서 그의 몸으로 직접 겪었던 살아 있는 체험의 한 부분이다.

그의 심리학에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발달되어간다. 왜냐하면 융은 정신에 대한 분석이란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융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실제적인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결과들이 그가 앞서 주장했던 내용과 어느 정도 다를지라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발표하였다. 융의 이러한 모순된 주장들은 인간에 관해서 깊이 알고 있는 심리학자들의 눈에는 단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모든 문제들이 인간의 삶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이며, 인간의 삶이란 본래 우리들에게 계속적인 탐구를 촉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융의 작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융의 작업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어떤 허점이 있기까지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순전히 철학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융의 이론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순전히 형이상학적이기만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이 썩 흡족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더구나 신학자들은 그의 이론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으며, 그래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과 계속 발전해 갈 수 있는 역동성이 간혹 그의 이론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융의 이론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가 가진 지적 배경이나 영적 배경들을 가지고, 융의 이론 가운데서 자기가 동화시킬 수 있는 것만을 동화시키기 때문에 종종 그의 이론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융의 심리학이 무신론적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서,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심리학이 신비적이라고 주장한다. 어떤이들에게 있어서 그의 심리학이 영지주의적으로 비치고 있는 데 반해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동양종교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에 대한 이런 모든 지적들은 옳기도 하며, 동시에 그르기도 하다. 그것이 옳은 이유는 융이 한 사람의 심리학자로서 앞서 지적된 모든 영역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답변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비쳐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그른 이유는 융이 이 각각의 영역들을 하나의 전체와 분리시켜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융은 어디까지나 이 모든 문제들을 인간 정신의 전체와 더불어서 연구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만 이 문제들이 의미 있었던 것이다. 융의 작업에서 상징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상징에 대한 생각은 우리에게 어떤 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상징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그 어떤 설명보다도 명확하게 말해 준다. 이 우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옛날 옛날에 사막 속에 어느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앞 못보는 맹인이었다. 어느 위대한 왕이 그의 군대와 함께 그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왕은 무지무지하게 큰 코끼리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맹인들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그 무지무지하게 큰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동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 동물을 만져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십 수 명이나 되는 그 마을 사람들은 왕의 행렬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왕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서는 왕에게 그 무지무지하게 큰 코끼리를 만져보고 궁구(窮究)해 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떤 이는 코끼리의 다리통을 만졌다. 어떤 이는 코끼리의 발을 만졌다. 또 다른 이는 꼬리를 만졌다. 사람들은 어떤 맹인이 코끼리의 귀를 만져 볼 수 있도록 작은 사다리를 가져다 놓았다. 사람들은 또 다른 맹인을 들어 올려 코끼리의 등에 태우고는 그 일대를 한 바퀴 돌게 해 주었다.

이 모든 맹인들은 자기네들이 알아낸 코끼리에 대한 정보에 의기양양해져서 그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네들은 모두 그놈의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빨리 들어 보려고 조바심 쳐댔다. 맨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것은 커다란 관이다. 그것은 힘차게 들려 올려지며 또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그 놈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맹인이 말하였다. '그놈은 털로 감싸여져 있는 통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맹인이 주장하였다. '아니야, 그건 마치 벽과도 같아. 왜 그 털로 덮여져 있는 성벽 같은 것 말이야.' 귀를 만져보았던 네번째 맹인이 말하였다. '벽 같다니, 어림없는 소리 말아. 그놈은 성긴 털들이 많이 난 양털로 짠 작은 양탄자 같은 것이야 그리고 그놈은 사람이 손으로 만지기라도 하면 움찔거리곤 하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맹인이 일갈하였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놈은 산 같은 놈이야. 그리고 그놈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우리들은 이 책의 앞머리에서 우리들이 앞으로 융의 그 방대한 작업을 상세하게 연구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치 그 마을의 맹인들처럼 우리들은 그 많은 관점들 가운데서 어느 한 관점만을 골라서 살펴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우리들과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했던 분석 체험의결과를 일반 사람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들을 기독교에로 회심하게 이끌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분석체험의 과정과 기독교의 금욕수행 사이에 있는 관계 그 유사하고 다른 관계성-8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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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