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인간 정신에 대한 분석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융 심리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몇 가지 본질적인 개념들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정신분석에 관해서 살펴보자.

정신분석이란 과연 무엇인가?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정신분석을 해서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정신분석은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정신분석이란 오직 신경증환자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정신분석이란 신경증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기능도 없는 것으로 믿는다.

모든 종류의 정신분석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정신 상태에 혼란이 온 사람들에게 균형을 잡아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프로이드와 애들러의 정신분석이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치료시키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융의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과 정신분석에 관한 새로운 장을 밝혀주고 있다. 왜냐하면 융은 정신분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치료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성숙의 측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치료적인 측면은 잘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경우 정신분석은 환자들(신경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인격의 성숙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하지만 정신분석이 인간의 영적인 발달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차 강조하고 있듯이 융은 그가 발견해 낸 많은 심리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정신의 분석을 통하여 사람들을 성령(Esprit)에로 되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융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이제 더 이상 신경증 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의 길을 찾아나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실 정신분석은 그것이 치료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영적 발달을 위한 것이냐 하는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그렇게 뚜렷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그렇게 분리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융의 사상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영적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영적인 가치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면, 그들 존재의 조화를 이를 수가 없다. 신경증이라는 것도 그 개인의 의식과 영원한 가치 사이에 균열이 생겼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인 것이다. 따라서 융에 의하면 삶의 부적응은 그것이 신경증 환자의 직업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든, 가정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든, 성 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든 모두 그에게 신경증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생겨난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사람에게 신경증이 생겼을 경우, 그는 그의 신경증 때문에 삶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가 삶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경증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권력욕구와 관계가 있는 성()생활은 종종 신경증환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이 깊은 차원에서 성령 자체이신 생명의 씨와 부조화 관계에 있거나 관계 두절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융의 심리학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이나 애들러의 심리학보다-그들의 심리학을 부정하지는 않지만-더 멀리 나아가고 있으며, 인간 정신의 더 깊은 층까지 다루고 있다. 융은 그의 연구를 진척시켜 나가면서 신경증 발병 초기에는 물론 인간의 정신 전체에 영적인 문제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않을 수 없었다"라는 말을 썼다. 그 이유는 융으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한 것은 그 자신의 심리학자로서의 과학적인 경험이었지, 선험적이며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들 때문에 심리학은 이제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적어도 20세기에 있어서는-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비록 여태까지 전혀 상상해 보지 못했던 내용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태까지 아직 다루어 보지 못했던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신경증의 원인은-그것이 성적인 문제이건 권력욕에 관한 것이건-인간적인 측면이나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탐구밖에 이뤄지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심리학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고작해야 그 원인을 추적해서 "에 불과한 것"이라고 환원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영적인 원인을 도입할 수 있게 되어서, 정신적인 문제의 탐구 영역은 여태까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며, 성령의 측면에서까지 다루어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각도에서 볼 때, 융 학파의 분석은 인간 존재를 조화(調和)와 전일성(全一性)에로 이끌어 가는 길()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심리학은 단순히 인간 정신의 분석자체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전일성 속에서 존재의 조화를 이루는 것, 즉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충만함 속에서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융은 자기(le Soi; the Self)라고 불렀다. 이 자기(自己)는 분석을 통해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융은 분석이 완료되었을 때, 모든 것은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이 주장이 정말 옳은 주장이라는 사실을 종종 확인하였다.

분석의 목적은, 물론 피분석자의 나이, 문화, 성숙도, 인격 및 그의 욕망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목적은 인간적이거나 사회적인 차원을 넘지 않는다. 즉 그것은 현실에 적용하거나, 환경에 적용하며, 일하고,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적용할 수 있게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목적은 철학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에까지 미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목적은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넘어가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분석의 목적들을 모두 검토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의 모든 목적들이 "자기"(le Soi)를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들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것을 함유(含有)하고 있는 것으로서, 분석을 뛰어넘고 있다. "자기"는 모든 분석의 종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그 자체로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물론 우주나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존재의 완전성을 실현시킨 것이다. 융은 어떻게 해서 분석의 목적을 그렇게 확장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었는가? 즉 분석의 목적이 의학적으로는 정신치료의 방편이 될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는가? 이 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융이 말하고 있는 집단무의식의 개념과 원형 및 상징주의에 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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