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무의식과 원형

 

 

 

융이 1912-1913년 사이에 발견해 낸 집단무의식 개념은 그가 그 이후에 발견하게 될 다른 심리학 개념들-우리 세대보다 앞으로의 세대가 더 높이 평가하게 될-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무의식에 관해서 전혀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극단적인 물질주의나 편협한 과학 만능주의, 그리고 과격한 합리주의는 모두 무의식과의 접촉결여에서 생겨난 것들이며, 이 같은 결여에서 의식의 비대화 현상이 생겨난다.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은 현대 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해독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융이 그의 체험을 통해서 강력하게 입증하고 있듯이-"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오래 된 것이며, 인간 의식은 이 본원적인 원천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의식의 "참된 뿌리"는 무의식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의식과의 접촉을 그만 둘 때, 우리의 정신은 불구가 되며,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제 인간 정신은 균형을 잃게 되고, 뿌리를 상실한 나무열매처럼 비적 말라버리고 말았다. 현대 문명은 물질적으로는 대단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매우 궁핍하며, 메말라 있다. 어쩌면 그것은 물질적인 발전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지식인들, 시인들은 이 사실을 매일매일 외치고 있는데, 이러한 경보(警報)는 아무리 울려 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과 영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현대인들에게는 내면적인 삶이 없고, 내면적인 삶에 대한 주의도 없으며, 영성도 없다고 불평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들은 의식(儀式)에만 무의미하게 매달려 있으며, 모든 항에서 내용은 없고 빈형식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현대 문명의 핵심 속에서, 그리고 교회의 가운데로부터 혁신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벌써 오래 저부터 시작된 이 균열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세기 말의 퇴폐주의 시대 이래 생겨난 것 같다. 현대인들이 그들의 본래적인 정신적 원천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결과, 그들은 이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잘못된 자유만을 추구하는 싸르트르적인 세계에 내 던져졌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수많은 이단 종파나 제의 등을 통해서 이 자유를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융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탈의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식적인 차원을 무시하거나, 무의식적인 차원 자체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이 의식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내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이란 억압된 욕망들과, 이루어지지 못한 성욕들과, 위험하거나 잘못된 본능의 창고라고는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그런 견해들은 옳지도 않고 부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융의 연구 결과 그런 설익은 사상들은 이제 더 이상 버텨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무의식에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이 담겨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무의식은 인간 존재의 긍정적인 힘까지도 놀라우리만치 내포(內包)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에는 인간의 창조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인간의 가장 진정한 가치와 가장 선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무의식에는 아무리 사용해도 더 이상 고갈되지 않는 해방의 능력과 구원의 힘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모든 예술작품들과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발견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발명들과 신비체험들까지도 그 뿌리를 무의식에 두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합리주의자들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인간의 무의식보다 무척 협소하다. 더구나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란 참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있는 것으로서 유한하기 짝이 없고 피상적이기 짝이 없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 경계가 무한하며, 그 내용이 고갈되지 않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으며, 지속(持續)을 초월하고 있다. 무의식은 의식의 원천이며, 기반이다. 의식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형성되어 왔으며, 발달하여 왔다. 인간의 자아(le moi)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아는 성장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아의 역할은 매우 미묘하고,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자아가 그의 무의식과 직면(直面)하여, 그의 무의식이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탐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그런 사람은 정신분석을 받게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정신분석 과정에서는 그의 자아가 계속해서 그의 무의식과 대면(大面)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역사적으로 항상 무의식에 저항해 왔으며, 무의식의 가치는 언제나 인정받지 못했다 ‥‥ 그래서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추론적(推論的)이기만 한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의 무의식과 대면할 때, 공황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공포는 그들이 자신의 정신적 요소를 너무 소외시켰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무의식을 하나의 수동적인 대상처럼 분석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성에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合理性)에 맞아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을 그가 원하는 대로 작용하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실재(實在)처럼 경험한다면 그것은 유럽의 보통 사람의 수준을 넘어가며 보통 이상의 능력과 용기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융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의 한 영역까지 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망각했거나 억압해버린 영역과 그 밖에 그와 비슷한 영역들이었다. 이 영역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는 영역으로서 기껏해야 한 사람의 "가족사"(家族史)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융은 이 무의식을 개인무의식이라고 불렀다. 이 영역은 프로이드가 전의식(préconscient)이라고 불렀던 것과 데쓰와(Dessoir)가 심층의식(Subconscient)이라고 불렀던 것이 합쳐진 영역이다. 개인무의식(1' inconscient personnel)은 개인적인 자아 또는 사회적인 자아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융은 이 영역보다 훨씬 깊은 층을 발견하였다. 그가 집단무의식(I' inconscient collectif)라고 부른 층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집단무의식에 도달하려면, 분석 등에 의해서 무의식의 개인적인 층은 벗겨지고, 분석되고, 의식화되어야 한다. 이 집단무의식은 개인의 과거만을 담고 있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과거나 미래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집단무의식 덕분에 시간과 공간과 인종을 초월해서 이 보편적인 세계와 접촉할 수가 있다. 융과 그의 스승 프로이드를 결별시킨 것은 이 집단무의식의 발견이었다. 집단무의식의 발견은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는 물론 유사-심리학(para-psychologie)연구에 있어서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광범위한 지평을 열어주었다. 집단무의식은 원형(archetype)의 영역-원형이란 본래 플라톤이 사용했던 단어인데 융이 플라톤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이다. 원형이란 사람들이 "타고 나는 관념"(ideeim- iee)은 아니다. 원형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힘(force)이다. 그것은 형태(forme)의 창조자로서, 그 자신이 하나의 형태는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궁(子宮)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 아이를 형성(形成)시키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듯이, 형태를 형성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원형이란 하나의 잠재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그가 창조한 형태(또는 유형; forme)보다 먼저 존재한다. "원형이란 인간의 신체적인 사실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에 관계되는 일들이 어떻게 영혼에 의해서 체험되는가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융은 주장하였다. 또한 융은 "우리의 신체 기관이 인간 발달의 긴 과정의 결과이듯이, 원형은 인간의 까마득한 시원(始原)에서부터 있어 왔던 인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전체성 체험의 결과 생겨난 산물이다"라고 말하였다. 같은 취지에서 G.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신체 기관의 법칙을 어기는 사람, 예를 들어서 소화 기관이나 시각 기관의 작용 법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 기관에 병이 나듯이, 원형(原型)의 법칙을 어기는 사람 역시 정신적으로 병이 들게 마련이다."

욜란드 야코비에게 있어서 원형이란 "영원한 것의 현존"(étemelle présence)이다. 왜냐하면 원형이란 인간 역사의 가장 먼 원시시대 때부터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은 "인간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이 강력하고 영적인 실체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런데 이 실체는 각 개인의 존재 구조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재생된다." 말하자면 집단무의식은 일종의 기억으로서, 본래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기억이다. 우리 인간의 의식이 우주의 살아 있는 힘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집단무의식에 의해서이고, 이 집단무의식 속에서이다. 그래서 융에 의하면, 집단무의식은 하나의 질서이며, 내적 조직이다. 우리가 "이 무의식과 원활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 삶에 어떤 위기가 찾아올 때 이 무의식 속에서 피난처를 찾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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