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상징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집단무의식과 접촉할 수 있는가?그것은 상징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제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상징을 통해서 그 자신을 드러낸다. 융에 의하면 상징은 원형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우리는 원형을 직접적으로는 만날 수가 없다. 우리가 원형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간접적으로, 특별히 상징을 통해서 뿐이다." 프라이의 말이다. 상징이란 일종의 언어이다. 그것은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어떤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을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상징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인 언어나 단어들로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이 원시인이나 미개인의 언어로서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밝은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더구나 거기에는 중세적인 미신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상징은 수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살아있다. 상징은 이 세상의 창조와 함께 생겨났다. 우리들이 선사부족과 고대 사회의 민중들과 이집트, 페르샤, 그리스, 크레타 민족 및 갈대아 사람들과 로마인들의 문물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상징이 존재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아프리카 흑인들이나 아시아의 중국, 라오스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림1_p30.jpg



 

상징은 어느 곳에서나 꼭같은 언어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상징들은 변하지 않고 있으며, 그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말이다. 변하는 것은 다만 어떤 심리적 사건을 표출하는 수단들이다. 즉 상징의 이미지와 그 해석은 그 상징이 통용되고 있는 시대, 장소, 문화 및 그 문화의 성숙도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으나 그 본질은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상징(le symbole)과 기호(le signe)의 차이에 관해서 구별해 두어야 한다. <그림 l>은 융이 생각했던 정신의 구조를 나타낸다. <그림 2>에서 우리는 상징이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인 집단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원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징이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내면에 대해서 오랫동안 탐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징에 관해서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호는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지각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 의식이 분석 작업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심층에 내려가 상징과 만나는 것도 바로 이 기호 덕분이다. 하지만 기호에는 상징에서와 달리 어떤 생명력이나 힘이 없다. 상징만이 우리를 돕고, 구원할 수 있다.

 

그림2_p31.jpg



 

융과 그의 제자들은 위대한 원초적 상징을 만나고,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상징을 연구하거나 분석하거나 지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체험자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험이 입증하고 있듯이, "진리란 언제나 우리의 내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메르인이나, 아카드인, 이집트인, 그리스인들은 물론 유태인들을 살펴볼 때 위대한 진리는 언제나 상징의 도움으로 밝혀진다. 그것은 나일 강 유역 사람들의 작품인 <사자의 서>(努死者)를 보든지, 티베트의 <바르도 퇴돌>(Bardo Th?do1)을 보든지, 그리스의 신비서(伸臂書)<헤르메스 트리스메지스트>(Hermes Trism?giste)를 보든지, 히브리의 신비철학서인 <카발>(Kabbale)을 보든지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성문학(聖文學)이나 기독교의 성서를 보아도,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는 상징이라고 하는 영원한 언어를 가지고 그의 수많은 비유들을 개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상징언어가 언제나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상징은 유태의 예언자나 점장이나 마술사처럼 하나님의 상징적인 메시지를 해득하여 그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언어로 통역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우리 인간의 의식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공개적인 의미, 또는 외면적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소위 "문자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 양태이다. 이런 인식은 우리가 사물을 지적으로 인식할 때 사용된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인식을 매우 폭넓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현실적인 것, 구체적인 것, 합리적인 것, 의식적인 것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인식은 어떤 경우 우리의 이성에서 나온 것, 논리에서 나온 것들을 의심하거나, 불신할 때도 있다. 이 인식은 <그림 1>에서의 의식 영역이나 개인무의식 영역에 속한다.

둘째로 비밀스러운 의미 또는 내면적 의미가 있다. 이 인식은 상징의 도움으로 인식자들을 집단무의식에 이끌어감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더 깊이 궁구하게 하고, 더욱더 풍부하게 한다. 이 인식은 우리들에게 보편적인 의미의 존재를 알려주며 진리와 하나 되는 것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림 1>에서 볼 때 집단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세 번째로 성스러운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진리 그 자체와 관련을 맺게 한다. <그림 1>에서 볼 때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면적인 의미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직관교육을 통해서 내면적인 의미에 대한 인식 능력도 개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스러운 의미에는 우리 힘으로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여태까지 상징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왔으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 속에 비도덕적인 힘이 들어있으며, 마술사와 사탄도 무의식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양가적(雨價的)이며, 매혹적인 영역을 탐험하기 전에 이 영역에 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무의식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무의식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위대한 발견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몇몇 개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집단무의식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었다.

상징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초월하고 있으며, 우리의 감각도 초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이나 감각은 결코 상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직관만이 파악할 수 있다.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징의 의미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먼저 그 상징에 관해서 매우 다양한 연구를 오랫동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상징을 몸으로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1-3장 상징주의.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