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  분석과 금욕수련

 

 

 

 

정신분석은 금욕수련과 같은 것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금욕수련이라는 단어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단어는 종종 잘못 알려져 있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욕수련(ascese)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askesis에서 나온 말인데, askesis는 수련(exercise)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련이란 그것이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한 존재 의미가 없다. 그리고 수련이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수단이다. 금욕수련은 그 단어의 보편적인 의미 속에서 영적 수련과 결부되고 있지만, 금욕수련이 그 자체로서 영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인,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들은 그들이 정한 목적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일종의 금욕수련을 한다. 그것은 마치 체육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살을 빼기 위해서 단식이나 어떤 육체적 훈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훈련, 즉 그 어떤 것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행해지는 모든 정기적인 수련은 금욕수련이다. 금욕수련이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어떤 영적인 결과를 가져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수련을 가리켜 왔다. 그런 의미에서 금욕수련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인도 등지에서 시행되었으며, 기독교에서도 시행되어 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금욕수련에 그의 진정한 의미를 돌려주어야 한다.

먹지 않고, 잠자지 않으며, 그의 육체에 시련을 가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리고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살을 빼려고 단식을 하는 것과 종교인이 단식을 하는 것은 외관상으로 볼 때는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결코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체중을 줄이는 문제가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문제라면, 영성 수련의 문제는 하나님이 동력(動力)이 되어서 작용하는 문제이다.

다른 모든 형태의 금욕수련과 기독교적 금욕수련 사이의 크고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적 금욕수련이 단순히 내면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도록 소원이 생기고, 그 소원이 수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은 자기를 통제하는 기술, 자신의 영과 육체를 제어하는 능력을 얻게 하는 기술이 아니다. 더구나 영적인 삶을 살게 해주는 기술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술 없이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이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고 시행할 경우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은 결코 초인(超人)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으며, 우리들에게 자기 비움과 자기 이탈을 요구한다. 하나님 없이 금욕수련을 시행할 경우 사람들은 금욕에만 몰입하게 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되고 말며, 거의 언제나 이기주의나 교만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간의 육체나 본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금욕 자가 그것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외부의 어떤 강압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내면적인 요청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기독교 금욕주의는 결코 정체불명의 우주창조론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 금욕주의는 육체를 부정하지도, 창조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선하기'(1:3~31)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것들을 누리도록 인간에게 주셨기'(디다케, X,3)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와 정신과 의사들로 된 어느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과격한 무시는 언제나 다소간 이원론적인 신조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이 모임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만약에 인간의 육체를 부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그러하듯이 스러져버리고 말 월계관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들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려고 해서가 아니다. 더구나 스토아 학파의 현자(賢者)나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처럼 그들의 욕망을 모두 다 끊어버리고 절대 정적, 즉 무심(無心: apathie)상태나 평정(平靜: atasaxie)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육체를 무시한다거나 육체의 즐거움과 마음의 만족을 멸시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를 통해서 선포된 기쁜 소식은 이미 그의 인격 속에 실현되었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가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금욕에로 초대한 것은 우리에게 모든 욕망을 억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물질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희생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기꺼이 하는 희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희생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결핍이 아니라 개화(開花)이다. 사실 진정한 희생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기꺼운 선물이며, 사랑의 선물이다.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의 목적은, 그러므로, 우리들이 더욱더 하나님의 의지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요약해서 말한다면 "금욕수련이란 그리스도인의 완성의 원천이자 목적인 신적 사랑을 위해서 행해지지 않는 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마찬가지로 금욕수련의 목적도 우리의 생명을 멸절(滅絶)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의 희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사랑의 율법에 충실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만이 빛이고, 모든 거룩함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절제, 순결, 청빈, 순종, 고행 등은 모든 금욕가들이 일반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기독교 금욕가들이 그런 것들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격의 조화나 타협적인 세력에만 도달하려는 금욕수련은 진정한 기독교적 금욕수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을 부추겨주는 신적 은혜의 개입을 기대하지 않는 기독교적인 금욕은 참된 금욕수련이 아니다."

질문을 다시 해 보자. 정신분석이란 금욕수련과 같은 것인가? 우리가 기독교적인 금욕수련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밖에는 답변할 수가 없다. 그러나 피분석자가 기독교인이고, 그가 이 분석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 정신분석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금욕수련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신분석이 기독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융 학파의 정신분석은 대부분의 경우 금욕수련과 동일시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수련 과정이고, 그속에서 자기(自己)를 인식할 수 있으며, 진정한 발달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으로 영적 수련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분명히 분석은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밖에서 부과되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체험되는 기술이다. 각자의 내면적인 삶을 통해서 금욕수련의 요소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금욕수련에는 어떤 표준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체계도, 이론적인 공식도 없다. 그 이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금욕수련에 관한 것들은 금욕 수행가들의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서 그들 각자 각자에게 알려진다. 이렇게 해서 발견된 것들만이 그 탐구자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깊은 층에 대한 탐구로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 금욕수련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인 현상 앞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비기독교적인 피분석자는 분석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또한 어떤 경우에는 원하지도 않으면서 영혼의 심층에 도달하게 되고, 기독교적인 금욕가들은 그들이 금욕을 시작할 때 지니고 있었던 상징의 의미와 무관하게 외적인 금욕수련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융 학파의 분석은 그것이 제대로 학습되기만 하면, 그들이 지금 어떤 신앙 고백을 하고 있든지 간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의 정수(精隨)를 밝혀 줄 수 있으며, 지금 다만 하나의 기호(sign)나 내용 없는 습관들로 남아 있는 기독교 진리를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별로 놀라운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석의 역할이며, 인간 영혼을 탐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상징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 있는 체험을 하게 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는 죽은 것이라고 융은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기독교 상징은 다만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그리스도 체험은 기억 속에만 응고되어 있게 되며, 의식(儀式)이나 동작이 따르게 되지만 그 속에 아무런 생동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 가톨릭 신부이자 융 연구가인 레이몽 호스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의 상징은 종교체험이 너무 강렬하게 될 때, 안전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종교 상징이 종교인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 만큼, 그 대가도 만만치 않다. 종교 상징은 모든 종류의 종교적 표현들을 그 속에 수용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종교체험을 조금씩 조금씩 빈약하게 만들고 있다. 종교체험의 내용을 교리화한 종교 교리는 그 체험의 과거에 묻혀지게 됨에 따라서 점차 그 내용이 비어가게 된다. 융이 보기에 종교의 쇠퇴는 언제나 이런 풍화작용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많은 사제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무기력하게 된 기독교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신앙이란 단순히 하나의 도덕도 아니고, 경직된 예식도 아니며, 하나의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기독교회에서 수행되어 왔고, 그 시대에는 알맞은 것으로 여겨져 왔던 금욕수행이 이제 더 이상 현대에는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인류는 이제 진화했으며, 모든 것들은 변했다. 20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이제 더 이상 은둔시대나 중세, 16세기나 18세기 기독교인들과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반응도 다르고,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수단도 다르다. 금욕이란 너무 내재적(內在的)인 것이다. 그것의 본질, 그것의 정신은 그대로 남겨 둔 채, 그 수행 과정은 변하고, 진화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레가메이(Regame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의식과 실생활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삶의 진리를 찾으면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짜증을 느끼고 있다. 사순절 기간이 이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이 시기에 교회의식은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다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한껏 노력한다. 그러나 교회 의식 속에서 재현시키고자 했던 것이 우리의 실제 행동 속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못한다. 우스꽝스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의식의 주제에만 붙들어 매놓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의식(儀式)이란 삶의 전체적이고 통합된 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은 20세기에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목회자와 정신과 의사 그룹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점차 그들의 육체에 있어서는 땅과, 그들의 사고에 있어서는 존재(I' Etre), 신앙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무관해지고 있다. 그 근본으로부터 뿌리 뽑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양심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정(怒定)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점차 그들의 본성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그들의 환경과 계급과 당파, 그리고 본능의 영향력 아래 넘겨지고 있다 ‥‥ 우리 시대의 이와 같은 혁명적 변화는 인간 존재의 상태 및 기독교 금욕의 문제와 더불어서 우리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 진정한 금욕 수련은 결코 위에서부터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신앙과 본성의 두 차원을 고려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금욕수련의 역사성을 감안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없이 시행되는 금욕수련은 우리에게 재난을 가져오거나, 아무도 시행할 수 없는 규칙들만을 나열해서 위선에 빠지게 되고 만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금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금욕을 수행할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자발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자유롭게 되려면, 성인(成人)이 되어야 한다. 분석이란 성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는 정신적인 재교육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석을 통해서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자유 없이 선택은 있을 수가 없다. 기독교 금욕수련은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고통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인으로서의 선택인 것이다. "우리는 슬픈 색조를 띠고 있으며, 우울하고, 회의적이며 우스꽝스러운 금욕을 신중하게 물리쳐야 한다"고 몽쉐이유는 말하고 있다. 같은 의미에서 요긴 뒤 크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금욕 수행이란 결코 속죄의 고행이 아니다 ‥‥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본성을 다시 일으켜서, 그 본성이 제 방향을 찾아 나가도록 하는 것이며,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노력이다 ‥‥ 금욕수련이란 질서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분석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분석적 인식의 도움으로 교회가 기독교 역사에서 금욕수련이 여태까지 해왔던 것을 현대인에게 다시 점차적으로 적용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신분석 역시 그것이 자기 인식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한 일종의 금욕 수행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결코 심리적인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심리적인 것은 그것이 인간의 영혼(ame)탐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하나"이기 때문에 형이상학과 근접한 거리에 있다. 우리 시대의 심리학이 인간 정신의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측면만을 연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 정신의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측면을 결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융의 심리학은 우리에게 이 두 측면을 연합해주는 듯하다. 융의 분석은 인간 정신의 내재적 특성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초월에로 이끌고 있으며, 인간의 내면적인 삶과 그 삶의 요청에 관해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금욕수련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을 살펴보면서 그 관계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분석 작업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무의식이 드러내 보이고, 계시하는 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신화와 종교, 종교의식과 상징을 통해서 그의 피조물들에게 늘 권면해 왔고, 요구해 왔던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분석이 신적 진리에 이르는 최상의 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정신분석과 금욕수련은 인간의 정신 발달을 도모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파헤쳐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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