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  무의식과 내면적인 삶

 

 

 

 

분석심리학적 발견들이 많이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무의식의 실재(實在)를 부정하고, 인간이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자신의 무의식적 요소에 관해서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정신분석과 인간의 내면적인 삶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무의식에 대한 불신이나 무의식에 대한 절대적인 무지는 사람들을 합리주의자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의식과 의식의 작용을 과대평가하게 한다. 그래서 많은 종교 속에서 내면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내면적인 삶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기만 한다면 내면적인 삶은 숨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내면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순전히 지적인 추구로 되고 만다. 그때 사람들은 영적인 팽창(inflation spirituelle)을 느끼게 되거나, 내면적인 삶을 대신하고 있는 규칙이나 제의 및 형식으로 포장된 거짓 영성에 도달하고 만다.

오늘날 많은 경우 영혼(ame)과 영(esprit)과 지성(intelligence)은 서로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종종 추상적인 의미로 하나님과 혼동되고 있기도 하다. 이 말들의 추상형-즉 사람들이 신비(mystére)나 순수한 영(Esprit pur)이나 절대자 등으로 지칭하고 있는 단어들-은 인간 지성으로 하여금 수많은 이념(idéologies)들을 만들어내게 한다. 이 이념들은 매우 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보통 하나님과 무관한 것들이다. 종교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융 심리학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더욱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무의식과만 관계할 뿐이다. 융 심리학은 결코 하나의 이념이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의식적인 지성의 산물도 아니다.

무의식에의 몰입은 인간 의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더욱더 깊고, 참다운 내적 삶으로의 길을 열어 놓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석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층에 내려가서 꿈의 상징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들의 무의식의 소리를 듣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정신분석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정신분석의 결과에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고, 기독교 금욕 수련의 본질적인 요건들을 밟아나갈 수 있다. 성서 본문들은 우리를 내면적인 삶에로 거듭거듭 부르고 있다. 내면적인 삶이란, 어떤 이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지적인 삶이나, 의식만의 삶이 아니다. 복음서는 아주 분명하고 단순 명쾌하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그대 내면으로 들어가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외치고 있다. 그는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하늘나라 신랑이 머물기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시오. 그러면 그가 와서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부른 마음에 가서 머무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 1).

정신분석을 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얼핏 보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면적인 삶과 무의식 사이에 아무런 유사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삶에서 더욱더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내면적인 삶과 무의식을 더욱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내적 삶만이 있을 뿐이며, 그 내적인 삶에는 많은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무의식에는 여러 층이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인간 영혼의 성()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석의 목적이 순전히 치료에만 두어지거나, 신앙고백 없는 영적 발달에만 두어질 때, 정신분석은 그 자신을 통일된 존재로 만들어서 마음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 이외에 어느 다른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커다란 반발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통합한다. 정신-신체의학(médcine psycho-somati que)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 관해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서로 다른 많은 기능을 가진 기관(organe)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기관들은 유기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각 기관(심장, , 폐 등)은 그 기관 특유의 기능이 있다.

정신-신체라는 말에서 정신(psyche)이라는 말은 종종 잘못 정의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살펴볼 때, 정신이라는 접두사는 우리의 영혼을 가리킨다. 그런데 영혼은 무엇인가? 영혼(ame)은 종종 영(espht)이나 지성과 혼동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영혼을 어떤 미묘한 물질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에너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제 현대 과학이 영혼의 실체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으며, 그렇게 될 때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세와 관련시켜서 영혼을 말하기도 하고, 비의종교나 미신 또는 요정 이야기 등과 더불어서 인간의 영혼을 언급한다. 최근의 어떤 연구 가운데는 수세기에 걸쳐서 인간의 영혼에 관한 개념이 어떻게 변천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 것이 있는데, 그 연구는 인간의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우리는 철학자의 말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신앙인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각각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육체와 마찬가지로 많은 기능과 기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겉으로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모든 양상들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단 한 가지로, 영혼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이 영혼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만약에 "영혼이 하나의 영적 실체로서 거기에는 지성과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고, 불멸하며, 인간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결합되어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인간 생명의 근본 원리라고 한다면"(5차 라트란 협의회), 인간의 영혼은 개인적 체험의 영역에 남겨지게 된다.

융이 인간 영혼의 심층 차원을 말하면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만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융은 더 깊은 곳에, 또한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의식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영혼의 영역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의 거소, 신비주의의 거소는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거할 때의 거처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이곳은 인간의 정신과 상징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사실 무의식과의 관련 아래서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탐구해낸 결과 얻은 지식과 그것을 신학적이며 신비주의적으로 분석해낸 결과 얻은 지식 사이에는 종()의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단지 차원(次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이며, 그 기능 역시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기관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알게 해줄 뿐이다. 그러나 피분석자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또 원하지도 않으면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영혼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집단무의식에까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의식에 감추어져 있다. 의식이 영혼에 도달하는 데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늘 어둠 속에 있기 마련이다. 정신분석이 하는 일은 의식화를 통하여 그 장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적인 삶을 비추고 있는 더욱더 큰 빛에 의해서 그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분석을 통해서 영혼의 거소(居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정신적인 차원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데려가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 내면의 영혼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신비가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 영혼이 완벽하게 투명한 하나의 수정이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성 속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마치 하늘에 거할 곳이 많은 것과 같다 ‥‥ 사실 우리의 영을 꿰뚫고 들어가 보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밖에 다른 생각들은 별로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고 있듯이 ‥‥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잘못으로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우리들이 어떻게 된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럽고, 가련한 일인가!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들이 그 사실을 여러 차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얼마나 풍성한 것을 담고 있는가 하는 사실과 우리 내면에 그 영혼을 거하게 해 주신 주인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우리 영혼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 우리의 관심은 고작해야 이 다이아몬드의 겉모습이나 이 성의 성벽, 또는 스러져버리고 말 육체에 머물러 있다 ‥‥ 많은 영혼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외벽(外壁)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내면에 들어오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 속에 누가 사는지,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방들이 들어있는지 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묵상기도(oraison)에 관한 책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모름지기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을 보았어야 한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영혼 속에 들어감을 통해서 이다"(아빌라의 테레사, Le Château intérieur, 1. 2).

자기에 관해서 아는 것이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2-1장 무의식과 내면의 삶.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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