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  그대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체계화시켰다고 하는 이 말, 아마도 이 세상이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을 이 경구는 모든 진정한 발달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이 경구는 고대 세계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에도 널리 퍼져있었으며,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운위되었다. 기독교 문헌 가운데서도 자신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문서들은 많이 있다.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본모습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그대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가하는 점에 관해서 전혀 묻지 않을 것이다 ‥‥ 가장 위대하고 진정한 앎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앎에 관해서 탐구해야 한다 ‥‥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탐구할 때, 다른 사람에 관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 그대가 그대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그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고, 그대 자신을 망각한다면, 그대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Imitation, 2, 5). 융의 분석이 이끌고 가는 것은 자기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에 기독교 금욕 수련과 융 심리학 사이의 유사점이 있다. 이 두 방법은 모두 내면적 삶에 대한 부름이며, 모두 자기 인식을 추구한다. 그런데 자기 인식은 자족적 탐구이며, 이기주의적인 내향(內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즉 인간의 의식과 인간 의식과 관계된 문제들을 초월하지 못하는 자아(le moi)에만 매달려 있는 내성(內省)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자아-중심성(egocenthsme)도 아니고, 자아도취(narcissism)도 아니다. 또한 우리 자아가 가지고 있는 많은 가면(假面)들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이 가면들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과 통합되고 있으며, 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에서 이 가면들을 벗겨내려면 많은 아픔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 인식, 즉 심층 존재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려면 이런 아픔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숨겨져 있고, 다른 것에 덧씌워져 있으며, 게다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완만하고, 집요하며, 용기 있는 작업을 요청한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가 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배우게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으로 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대 자신을 알라"는 구호는 우리를 이기주의로 이끌지도 않고, 자아-찬양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인 것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한다. 그래서 아 켐피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대가 내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그대는 내가 어느 만큼까지 내려 갈 수가 있으며, 어느 만큼까지 내려갔었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내가 그것을 몰랐었기 때문이다"(Imitation, 3, 8).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대가 행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자기 탐구에 위험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융은 우리에게 많은 주의를 주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 탐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 심리를 꿰들고 있었던 아빌라의 테레사도 이미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 인식을 기도 위에 두었다. "수많은 노력과 비탄을 통해서 겸손하게 자기 인식에 다다른 어느 하루가 그런 것 없이 기도만하고 지나간 여러 날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보내진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역시 자기 인식 체험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을 예리하게 증언한다. "시편을 읽으면 우리는 자기인식의 체험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혹한 체험인지 알 수 있다. 그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만이 그에게 남겨져 있는 유일한 의지처이고, 능력이라고 생각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의 비참성과 그 자신의 공성(空性) 앞에서 현기증을 느껴 절망의 문턱에 섰을 때이다."

자기 인식에로 이끄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뿌려져 있다. 자기 인식이란 우리가 쓰고 있는 겉만 멀쩡한 허우대를 벗겨버린 인식이며, 문제가 되고 있는 초라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가운데는 기독교적인 금욕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 인식과 융의 분석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 인식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자기 인식만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의 금욕수련에서는 하나님과 더욱더 깊이 하나가 되어서 자기를 인식하려고 하는 데 반해서, 분석에서는 자기를 찾고자 하는 이에게 자기가 조금씩 조금씩 계시되고 있다는 차이밖에 없다.

자기 인식은 우리 내면적인 삶은 물론 우리의 영혼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정신 심층에 도달했느냐, 도달 하지 못했느냐 하는 데 따라서 많은 계층이 있다. 사실 심리분석 초기에 자기 인식은 집단무의식을 꿰들고 들어가며, 그에 따라서 보편적인 인식에로 나아간다. 자기에의 탐구가 일단 시작되면 끝나는 법은 거의 없다. 그것은 분석과 더불어서 더욱더 길어진다. 결국 하나님이나 신비한 영혼에 도달할 때까지 깊어지는 것이다. 자기 인식이 자아로부터 초월을 가져 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초월을 요구하는 것은 위험하고,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다. 분석은 보통 매우 신중하게 수행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자아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련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을 실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정신이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분석가들은 피분석자가 무종교인일 경우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ean de la Croix)과 니체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두 사람은, 자기를 추구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다(le néant)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겸손한 자세로 그의 "허무"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우려고 했던 데 반해서, 니체는 너무 오만했기 때문에 그의 "무성"(無性)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아의 팽창(inflation du moi)을 통하여 자기 방어를 시도했으며, 이것은 결국 그를 정신병으로 몰고 갔다.

많은 신자들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탐구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오만이나 이기심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그 밖의 많은 오류를 정죄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의식 속에 깊숙이 내려가서 그들 본성의 모든 측면이 낱낱이 조명될 때, 그들은 그것에 강렬하게 반발하고, 그것을 그들 자신의 본성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자기를 안다는 것(지적인 과정)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것(영혼의 과정)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매일매일 확인한다. 우리의 영혼은 무의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은 우리 자신을 탐사(探査)하고, 우리를 속속들이 파헤치기 위해서 우리 의식은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상징적 표현들을 찾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 성격의 어떤 특징을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일련의 꿈들을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특징이 우리의 삶과 행동에 실제로 통합되려면 수개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때때로 의식이 무의식의 요소들을 단호하게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분석은 불가능해진다.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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