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페르조나와 오만

 

 

 

 

의식이 완전히 탐사될 때 분석 과정에서 제일 처음에 만나게 되는 것이 페르조나(persona)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조나라는 말은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의미했다. 융 심리학에서 이 말은 우리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지 않게 하고 그 위에 쓴 마스크(假面)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의 배우들이 그 가면을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연극 속에서 맡은 역할과 그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의식적으로 구분시켰었던 데 반해서, 융이 말하고 있는 페르조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위험은 크지 않다. 우리가 그 페르조나를 꼭 필요한 경우, 또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활용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벗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페르조나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페르조나와 동일시 하게 된다. 위험은 이때 시작된다. 융이 말한 페르조나는 이렇게 의식적으로 썼다 벗었다 하는 가면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가면이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점차적으로 감춰버리는 가면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하는데, 페르조나의, 경우에도 이 말이 해당된다. 옷이 수도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 옷이 수도승을 만들고 있다.

페르조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자아(自我)와 외계(外界)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 또는 그의 기능이 그의 인격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삐에르나 자끄나 프랑스와즈가 아니다. 장군님이나 변호사님이나 교수님인 것이다. 페르조나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작용할 때 그것은 사람들에게 덜 유해하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자아와 심층적인 삶 사이에서 작용할 때는 문제가 된다. 어했든 페르조나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건, 내면적인 것이건 우리 인격의 본모습은 아니다. 페르조나는 때때로 우리에게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일들을 수행하게 한다. 여기에서 때때로 견딜 수 없는 긴장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페르조나가 우리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들을 하게하기 때문이다. 페르조나가 뚜렷할 때, 그것을 분간하기는 쉽다. 거기에는 무의식의 요소들도 많지 않다. 연설을 하고 있는 연사나 수업 중인 선생님처럼 이 때의 페르조나는 이때 어떤 제복을 입고 있는 듯하다. 당사자들에게서 이 때의 페르조나는 꼭뚝각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페르조나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작용할 경우, 그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페르조나는 꿈 속에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모든 정신 요소가 그렇듯이 변형돼서 나타난다. 때때로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페르조나를 분석 과정 동안 내내 볼 수 있다. 개인무의식에서는 물론집단무의식 속에서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파고들어가면 페르조나는 좀 더 미묘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이유는 페르조나가 언제나 우리의 교만 또는 자부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만과 그의 동료인 이기심은 언제나 정신적 왜곡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의식의 전횡(專橫)과 자아의 과격한 요구, 맹목성, 자기 인식의 거부 등은 모두 페르조나의 중요한 모티브들이다. 페르조나는 사람들의 자아가 팽창되어 있는 곳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자아가 과도하게 축소되어 있는 곳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겸손이나 거짓 자비, 잘못된 열등감 속에서도 페르조나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페르조나의 한 유형(type)이라면, 완고한 여인 역시 페르조나의 또 다른 유형이다. 페르조나의 문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참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참되려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완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우리에게 부과된 과업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든 단순한 것이든 간에 우리에게 부과된 과업을 과도한 애정이나 과도한 겸손 없이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페르조나의 다양한 요소들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 주면서, 무의식을 알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이 어디 있는가 하는 사실을 알 때, 우리 약점을 고칠 수가 있다. 사실 이러한 각성은 페르조나에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모든 요소에 해당된다. 무의식은 상징을 통해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밝혀내려고 한다. 분석 과정에서 얻게 되는 인식을 지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태까지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요소들이 나타나면서 환자의 상태를 낫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유시키고, 구원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각성만으로는 부족하다. 각성된 의식은 끊임없이 작용해야 한다. 의식이 무의식의 요소들에 무엇인가를 작용시키려면 의식은 무의식에 관해서 알아야 하며, 무의식의 요소들이 의식에 다가와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에 관해서 알아야 하며, 무의식의 요소들이 의식에 다가와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에 관해서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분석이란 의식에 무엇인가를 가르치면서 의지력(意志力)을 재교육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이 첫 단계는 우리에게 다시금 기독교 금욕수련과의 유비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금욕수련에서처럼 무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며 교만의 결과에 관해서 알게 한다. 정신분석은 때때로 무의식의 도움을 받아서 교만의 정체를 올바르게 추적해 갈 수 있으며, 기독교 금욕수련이 다다를 수 없는 교만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헤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교만의 뿌리에까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의 원천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 속에서 우리 자신의 허영은 한없이 찬양될 수밖에 없다. 교만의 진정한 원천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거부는 자아의 이기적인 요구를 낳고 있으며, 이런 개인주의는 또 다시 지성만을 강조하고 영혼의 욕구에는 귀를 막아버린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많아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 인간은 퇴화하고, 자신의 자아 속에 감춰지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창조주인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게 된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는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된 피조물인 로봇 인간에게서 생겨난다. 교만의 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루시퍼(Lucifer)가 지었던 죄이다. 루시퍼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사탄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무의식이 페르조나의 반대편에 있는 그림자(ombre)를 보여 준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2-3장 페르조나와 오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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