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그림자, 선과 악의 문제, 사탄




   융의 심리학은 대부분 대극(對極) 대극(對極): 인간 정신에 있는 서로 정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두 요소. 예를 들어서 의식과 무의식 및 자아와 그림자는 정반대 되는 두 요소이다. 융은 인간 정신이란 이렇게 반대되는 두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역자 주)
의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대극이란 인간의 정신 구조는 두 개의 극(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두 극 사이에서는 보상(補償)작용이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사람들은 인간 정신을 종종 이런 법칙 하에서 보아왔다. 우리는 이 법칙이 그리스에서 에페즈의 헤라클리트(Héraclite d' Ephese)에 의해서 주장된 것을 알고 있다. 헤라클리트는 이 법칙을 플라톤이 그러했듯이 에난시오드로미(énantiodro –mie)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이 법칙은 동양사상에서 음과 양의 상호작용 속에서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융에 의하면 리비도(libido)는 프로이드에게 있어서처럼 더 이상 성적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서는 물론 무의식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정신 에너지의 전체이다. 리비도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정체되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리비도는 언제나 일정하다. 언제나 같은 양을 유지하고 있다. 정신에너지는 손실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의식의 면에서 손실된 것 같이 보이는 에너지는 무의식에서 발견되고, 무의식에서 손실된 듯한 에너지는 의식 속에서 발견된다. 리비도의 이같은 일정성, 다시 말해서 리비도의 이같은 정량성(正量性)은 대극(des oppoes)의 보상 작용 또는 균형 작용 때문에 가능하다. 즉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서로를 보상해주기 때문에 리비도의 전체양은 언제나 일정할 수가 있다. 보상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간 정신은 자동 조절 체계이다. 이 체계는 서로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정신 요소의 쌍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서 의식의 모든 요소들은 무의식 속에서 그것과 정반대되는 짝들을 가지고 있다. 이 반대되는 짝들은 평상시에는 의식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때때로 투사(projection)에 의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투사란 절대적으로 무의식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억압하고 있는 것을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존재들, 즉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른 대상들에게 투사시키기 때문이다. 투사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게 보이는 것들, 우리가 비판하는 것들, 우리가 비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특성들, 그리고 우리를 신경 쓰이게 하며, 우리에게 적대적이라고까지 생각하게 하는 다른 사람의 특성들은 결국 우리의 무의식적 요소들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시켜 놓은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탄하거나, 찬양하거나, 부러워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특성들 역시 우리의 무의식적 요소들을 그 사람에게 투사시켜 놓고 경탄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전인(全人)을 실현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인이란 대극의 통일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투사란 우리가 투사시켜 놓은 것들을 의식해야만 비로소 철회될 수 있다. 그리고 의식화는 특별히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 이론을 반박하려고 하는 어떤 사례가 있다. 게으르기 짝이 없고 덤벙대기를 잘하는 A부인은 꿈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게으르고 덤벙대는 B부인을 보았노라고 이야기했다. B부인이 꿈에 나타나서 어떤 일도 했고, 어떤 일도 했노라고 하나 하나 들춰내면서 그녀는 이 같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B부인에게 투사시킨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B부인은 본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이 말 뒤에는 "나는 그녀처럼 게으르고 덤벙대지는 않습니다"라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투사 대상이 되는 사람이 투사의 내용이 되는 그런 허물들과 특성들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투사시키는 사람 역시 그 허물과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다른 이의 결점에 대해서 우리가 심하게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우리는 그 사태에 대해서 객관적일 수가 없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못보고 지나가기가 쉽다. 우리에게 투사가 생겨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접했을 때이다. 그러나 A부인이 B부인에 대한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A부인의 무의식이 작용해서 A부인은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허물이 그녀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서이다. 꿈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상징들을 보고 있는데, 그 상징들이란 모두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 자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들이다.
   투사 기제(mecanisme)는 기독교에 잘 알려져 있다. 예수님은 복음서 속에서 이것에 관해서 이미 알려주고 있다. "너희는 왜 너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만을 보고 있는가"(마 7:3). 토마스 아 켐피스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 속에 있으면서 여러분들의 심경을 가장 심하게 건드리는 허물들을 여러분들은 가지지 않고, 정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 그러나 우리는 흔히 우리 속에는 더 큰 잘못을 담아두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Imitation, 제1권 제5장, 제2권 제5장).
   분석 과정 속에서 인간 정신의 대극적 구조에 대한 이해와 투사작용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용하게 작용한다. 우리자신이 지금 투사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투사를 부추기고 있는 투사 대상으로부터 우리 정신은 벗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투사가 철회되는 것이다. 그 결과 투사되었던 무의식의 내용들은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우리 의식에 통합된다. 그리하여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될 수가 있다. 투사 작용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투사 작용 가운데서 그림자의 투사는 가장 중요하다. 그림자(I' ombre)는 자아 의식(le moiconscient)의 정반대편에 있다. 그림자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의 은밀한 처소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인간 존재의 양면성이라는 영원한 갈등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들이나 철학은 물론 시나 문학 같은 예술도 그림자의 존재에 관해서 알고 있다. 인간의 그림자에 관해서 언급한 많은 작품 가운데서 스터븐슨(Stevenson)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Le Docteur Jekyll et Monsieur Hyde)의 예를 들어보자.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사실은 같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격 속에 있는 그림자는 우리를 종종 분열시키며, 이중 인격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스티븐슨은 이 작품 속에서 그 점을 명확하게 그려낸 것이다. 샤미소(Chamisso)의 피터 쉴레밀(Peter Schlemihl) 속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괴테의 파우스트(Faust)에 나오는 메피스토델레스(Mephistophe–les) 역시 그 늙은 학자의 그림자 인격이다. 이 같이 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림자는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림자는 우리 존재의 어두운 측면으로서, 숨겨져 있는 신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무시당해도 좋고, 무의식의 심층에 방치되어 있어도 좋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이렇게 한 결과, 그림자는 우리들에게 많은 정신적 왜곡을 자아냈으며, 지금도 자아내고 있다. 그림자는 설명하기가 매우 미묘한 정신 요소이다. 그래서 융 심리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림자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더욱더 납득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분석을 하다 보면 우리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증거들이 드러난다. 사실 우리가 자기(自己)에게 도달하는 것은 우리 의식만을 통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매우 중요하나 달갑지 않은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올바른 자기 인식에 이르려면, 우리는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건물을 지을 때, 건물의 상층부만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그것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더 어둡고 위험하다. 언젠가 자아를 자신의 페르조나와만 동일시하고, 자신의 그림자는 모두 이웃 사람들에게 투사시켜 버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서 나는 즉시 그의 꿈들이 그의 이러한 상태를 반영해 줄 것이며, 더욱더 깊이 비추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자아 의식은 페르조나에 사로잡혀서 그 자신의 본 모습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에게 합리적으로 되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 이런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꿈이 알려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른다면 그것만이 그가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꿈은 그에
게 그의 인격의 다른 축인 그림자에 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 준다. 이 방식들은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다르다. 그래서 그는 그 모습들을 보고 비웃으며 염두에도 두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를 점점 더 강압하게 되며 그의 마음을 두드린다. 점차 무의식의 언어는 그에게 점점 더 명료하게 된다. 그가 무의식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무의식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자 그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뭐라구? 내가 그럴수가 있다고? 나에게도 그런 허물이 있을 수가 있다니! 내가 그렇게도 욕하고, 나를 그렇게도 거슬르게 했던 다른 사람의 결점이 바로 나의 결점일 수가 있다니!"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무의식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끊임없이 무의식의 가르침을 추구해간다. 무의식의 발견은 처음에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이것이 정신분석의 세례이다. 이때 우리의 자아의식은 진동한다. 이때 우리는 아주 신중해야 한다. 무의식은 꿈 속에서 나타나 끈질기게 우리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많은 모습들을 보여 주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림자를 우리 의식에 모두 통합시킬 때까지 계속된다. 통합이 이뤄지면 페르조나에서는 왜곡된 특성들이 빠져나간다. 페르조나는 힘을 잃게 되고, 그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우리 자아를 눈멀게 하고, 자아에 덧씌워졌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 의식을 돕게 된다. 이와 동시에 우리 그림자의 투사는 덜 위험하고 덜  공격적인 것으로 된다. 그림자의 투사가 모두 철회되려면 몇 개월 동안의 집중적인 분석 작업이 필요하지만, 이때부터 서서히 진행된다. 그림자의 통합은 분석 기간 동안 내내 계속되며, 개인무의식은 물론 집단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집단무의식 속에도 대극의 쌍들은 많이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수 대모(大母: la Magna Mater)와 노현자(老賢者: le vieux sage)등 역시 집단무의식 속에 있는  대극상들인데, 여기에도 그림자가 있을 수 있다.
   개인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는 그렇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집단무의식 속에서 발견되는 그림자는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있으며 선과 악이라는 우주적 이원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림자를 통합한다는 것(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면을 통합한다는 것)은 우리 정신 속에서 억압되어 있던 요소들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대극을 다시 찾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 없다면, 우리들에게서 존재의 통일은 불가능하다. 통합의 중요한 역할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결코 그림자에 굴복하고, 그림자에 지배받을 수 없다. 분석을 하는 목적은 대극을 통일시키며, 우리 정신이 대극 가운데 어느 한 요소의 지배적인 우월성을 허용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느 정신 요소의 일방성은 개성화(individuation)의 가장 큰 암초이다.
   우리의 논의를 더 전개시키기 전에 기독교의 금욕 수련에 관해서 살펴보자. 기독교의 금욕수련에서도 그림자의 통합이 이루어지는가? 처음 보기에 이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옥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며 악을 멸시하라고 가르치는 종교 속에서 우리가 여태까지 말한 통합을 어떻게 결부시켜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해서 논하려면 우리는 먼저 기독교의 참된 교리와 기독교를 하나의 도덕 체계로만 보려고 하는 관점을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가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의례를 통해서 나타나고, 성인들이 몸소 실천했고, 교회의 교부들이 설파했던 기독교의 진정한 교리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의 금욕 수련과 그림자의 통합 작업 사이에 아무런 불연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이두 작업 사이에는 그밖에도 많은 유비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우리는 방금 그림자의 통합은 페르조나의 탈피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페르조나는 우리의 교만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며, 일종의 일방성(一方性)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교만(orgueil)은 겸손(humilite)의 반대짝이다. 우리가 페르조나를 벗어버릴 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분석에는 이밖에도 많은 측면이 있다), 우리는 페르조나를 벗는 것이 겸손에 이르는 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겸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림자를 통합해야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기독교인다운 삶과 그가 구속(redemption) 받았다는 사실은 불가분리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무한한 사랑 속에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사역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속에 요약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 속에서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들이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제시해왔던 비의(秘義)를 완성시키러 왔다. 
   어느 누구도 위협을 받지 않고 있었다면, 누군가를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우리 인간들이 위험 가운데 처해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올바른길, 올바른 진리, 올바른 생명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세상은 지금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사위어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 같은 맥락에서 요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그에 의해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요3:17).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죄인들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회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아흔 아홉 사람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한 것을 두고 더 기배할 것이다"(눅 15:7).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알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죄인들은 그의 앞에서 자비를 발견할 것이다. 복음서가 매장마다 강조하는 것도 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의 계명을 선포한 후에 사람들이 그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오자,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간음한 여인만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똑같은 죄인이라고 각성시켜 주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8:3-11). 
   최초의 성녀(聖女)인 막달라 마리아 역시 죄를 많이 지었던 여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낙원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은 강도가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그의 사역을 하는 동안 내내 죄인들을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그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인도하였다.
   "내가 지은 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 당신의 눈에 거스르는 일, 그 일을 내가 행하였나이다."(시 51).
   "당신의 비참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 그리고 주님 앞에서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높이실 것입니다"(약 4:9-10).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서신들 속에 있는 율법의 교훈을 그저 살펴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죄를 저질렀구나 하고 뉘우쳐야 한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등장하는 비유들은 우리가 정말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페르조나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예로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을 살펴보자. 스스로 외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자기에게 허물이나 죄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하거나 회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죄악 된 상태를 깨달아 아는 것이 회개의 첫째가는 조건인데,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각성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죄 된 상태를 알 수 있을까? 물론 정신분석에서 회개(repentir)라는 개념은 없다. 그것은 다만 내재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에서도 깊은 신뢰 속에서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분석과 고해성사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고해성사는 하나의 종교 의례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cf. V. White, op, cit.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정신분석이 결코 종교 수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교수행에서와 같은 노력이 든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에서도 무의식을 통해서 내면적인 삶으로 뚫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느 기독교 수행가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사람들을 겸손에로 이끌어 가며, 주님께로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서, 어느 분석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페르조나에서 벗어나게 하며, 자기(自己)를 알게 해준다고 말했다. 정신분석이 마치 종교처럼 초월적인 차원을 다루지는 않고 있지만, 그것은 각성(prise de conscience)을 요구하며, 이 각성이란 기독교 수행처럼 모든 사람들이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구속(救贖)에 필요불가결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어렵고 위험한 과정이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 영혼에 암초와 같은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빠스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그대의 죄를 인식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혼란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실 것이다"(요 16:8). 기독교는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대 자신의 내면에 내려가서, 그대의 상처 난 본성이 집요하게 달라붙은 그 오래된 누룩을 제거하는 것을 두려워 마시오"(Chevignard, Doctrine de I' Evangile).
   성경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 근본적인 진리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겸손해야 하며, 겸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기의 심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뽈-마리 들라크르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에 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알고 계시다. 우리의 곤경과, 필요 그리고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관해서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우리의 처지에 관해서 깊이 깨닫고, 우리가 겸손해지기를 바라고 계신다." Paul-Marie de la Croix, L' Ancient Testament: Source de vie spirituelle, p. 146.
 겸손은 자기 인식과 함께 영적인 삶의 두 원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성 어거스틴 역시 겸손의 중요성에 관해서 "주님의 말씀"에 관한 그의 열 번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대하게 되고자 하십니까? 먼저 지극히 작은 자가 되십시오. 높고 큰 건물을 짓고자 하십니까? 먼저 기초가 잘 다져져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더욱더 위대하게 되고, 건물의 높이를 더욱더 높이 올리려면, 우리는 스스로 서야 하고, 기초를 더욱더 깊이 파야합니다 ‥‥ 사실 건물은 깊이 파인 기초 위에 올라가야하고, 기초를 파는 사람은 그 깊이 속에 더욱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건축 공사는 그 깊이를 다지고, 깊이가 다져진 다음 건축물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내려가 우리의 결점과 약점에 직면하는 것이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ce de Loyola)가 저술한 영신수련(Exercices Spirituelles)의 기반이 기도 하다.
   토니 볼프(Toni Wolfi) 역시 어떤 논문 속에서 그림자에 관해서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그림자는 인간 정신의 한 부분으로서, 의식의 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의식의 활동 가운데 떠오르지도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악성(惡性)과 나태성 및 결함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한 개인의 자아와 반대되는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페르조나가 어떤 사람이 외부의 집단적인 가치에 따라서 그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보이고자 하는 모든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듯이, 그림자 역시 집단적인 본성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사심 없는 행동 속에 사실은 이기적인 동기가 들어있을 때, 감정이 매우 고양된 상태에서 비난을 마구 퍼부을 때, 비열한 행동을 할 때 나타난다 ‥‥그림자의 통합은 우리가 우리인격에 객관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되는 첫걸음이 된다." Amai Teillard Symbolisme du rive(꿈의 상징주의)에서 재인용.

   우리가 집단무의식과 만날 때, 선과 악의 문제와도 어절 수 없이 만나게 된다. 만약에 한 개인의 그림자가 집단적인 악과 동일시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림자를 우리 정신에 통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악(惡)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림자의 통합이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그 죄에 물들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복합적이다. 그리고 각 사람들은 그들이 억압해 놓은 정신적인 요소들을 통합하지 않는 한, 본래적인 통일체를 이를 수가 없다. 인간의 정신적 요소 가운데서 억압된 것들은 모두 무의식 속에 모여 있다. 그것들은 우리 의식 속에서 심각한 편견을 야기 시킨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떤 거추장스런 정신요소들을 억압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해야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초월은 이미 억압해 놓은 정신요소들을 직면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영(靈)은 우리의 본능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본능들을 지배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교육시키고" 이끌기 위해서이다. 악이 억압되어 있으면, 그것은 계속 악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드러나려고 한다. 그러나 악이 의식에 옮겨지면 그 힘을 잃게 된다. 그것은 빛이 커짐에 따라서 어둠이 약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둠은 빛이 지배하는 곳에서 버틸 수가 없다. 이에 관해서 호스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을 무시하거나, 악과 직면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사람들을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맞수와 대면할 때에만 우리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으며, 무기를 꺼내들 수 있다  ‥‥선이란 이처럼 집요한 악과 대면해야만 생겨난다 ‥‥선행(善行)이란 우리가 가혹한 악들을 경험해 보아야만 나올 수 있는데, 그때의 선행은 우리 정신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 사람들은 그가 헤쳐 나왔던 어둠 속의 터널이 그를 광명으로 인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거기에는 의심할 바 없는 빛만 있을 뿐이다. 이빛이 아무리 밝아도 그 전의 터널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탄생의 기쁨이 아무리 클지라도 해산의 고통을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이 빛은 그 전에 있었던 시련에 의미를 부여한다. 즉 통합되고 수용된 악으로부터 선이창출(創出)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겪고 있는 악만이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S. J. Hostie, op. cit, p. 174 ; C. G. Jung, Die Beziehungen der Psychotherapie zur Seetsorge, pp. 34-36,1932.
 융이 지적하고 있는 악의 이 긍정적인 측면은 기독교 교리와 배치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도 악은 선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의 비유는 이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이 비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본성의 복합성을 훌륭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선과 악은 우리 각자 속에 서로 구분할 수 없으리만치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역시 그 점을 이렇게 말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8-21). 
   바울의 이러한 개탄은 우리에게 페르조나의 문제와 그림자의 투사 및 통합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통찰이다. 여기에 관해서 르롱(P. Long)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각 사람은 우리가 생긴 대로 살아간다. 우리가 생긴 것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의 각 상황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며, 앞으로도 더 살아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미가 집을 지어 스스로를 가두고 있듯이, 우리들 역시 우리 주위에 보호체계를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의 바른 것으로 비치는 겉모습들은 모두 정교하기는 하지만 허약한 책략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평가할 때 본래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해 달라고 요구하며,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때도 그러려고 한다. 
   선(善)이란 오직 하나님에게 밖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절대를 추구하고 있는 순례자를 모방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라는 괴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없애려면 빛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면 더 어두워지게 된다." P.Ldong, 1957.2.10일의 방송 담화.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이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에게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서 목을 잘라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C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p.93.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들도 융 심리학과 기독교교리 사이의 유비성에 관해서 말한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도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진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굴에 병이 든 것이 아닌가? 누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밀가루가 부패한 것이 아닌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일관되게 악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구속(rédemption)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악이 없었다면, 인간은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 제의에서도 "하나님은 악을 취하여 선으로 만드신다"고 선포한다. 이것이 잘 알려진 기독교의 역설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빛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둠을 거쳐야 한다"(per tenebras ad lucem)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분석 역시 이 근원적인 진리를 체험하게 한다. 즉 우리가 일어서려면 우리는 그림자를 통하여 우리 내면 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신학이 서로 갈라지는 듯이 보이는 중요한 분기점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악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자동성이 있으며, 선의 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악에는 그 나름대로 특성이 있으며 강력한 힘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악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이 결핍된 것(privadoni)이다. 이렇게 악에 대해서 기독교와 융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 두 학설에 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이 두 학설 사이에는 서로 융화될 수 없는 불일치가 있다기 보다는 어떤 오해가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점에 관해서 빅터 화이트(V. White)와 레이몽 호스티(R. Hostie)는 신학적 통찰을 가지고 파헤친 적이 있다. V. White, God and the unconscious, London: The Harvill Press, 1952; R. Hostie, Du Mythe á la ReIigion, Paris; Etudes carmé-litaines, 1955.
 
   이 세상에 악이 실재하며 많은 파괴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융은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설명하는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의 존재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의 결핍" 사상은 결코 악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의 본질을 부정한 적도 없고, 악을 어떤 부족(不足)이나 일탈(deviadon)로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호스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의 대표인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시퍼(Lucifer)는 타락한 다음에도 천사였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선하고 완전한 천사의 본성은 그가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피조된 목적, 특별히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내면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본성과 다른 결정을 내림으로써 언제나 하나님께 반항하였다." R. Hostie, op. cit, p. 177.
12) C. G. Jung, "Pr?face", V. White, op. cit, pp. xix-xx.

   여기에서 볼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의 결핍" 사상과 융이 말하고 있는 악의 사상이 배치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주장할 때, 그 사상은 악이 일시적으로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상에서 부정한 것은 악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선의 결핍" 사상은 악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융이 "일시적인 존재"(temporel)와 "본질적인 존재"(l' essentiel) 사이를 혼동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융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선의 결핍' 사상은 우리 경험의 영역에서 살펴볼 때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현상, 즉 악에 대한 개념이나 관념에 관한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실체에 관한 것은 아니다 ‥‥ 요즘 제기되고 있는 사상으로서, 악은 "선의 해체"라고 하는 사상 역시 내 생각을 바꾸게 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달걀이 썩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신선한 달걀처럼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C. G. Jung, "Pr?face", V. White, op. cit, pp. xix-xx.

   그러므로 융이 기독교의 "선의 결핍" 사상을 비판한 것은 그가 "선의 결핍" 사상을 오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의 결핍" 사상이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고 선만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악은 근본적으로 선이 결핍되어 있어서 악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악에는 아무런 존재론적인 본질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의 결핍" 사상과 융의 악 개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정신에 관해서 융이 달걀에 비유해서 추론(推論)한 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어떤 사람의 정신이 지금 잘못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다른 멀쩡한 사람의 정신처럼 지금 똑같이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융의 이 추론은 오직 창조의 측면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융이 실재한다고 주장한 것은 악에 의해서 감염된 대상(또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감염된 악은 악 자체의 발단이 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즉 악이 어떤 달걀과 어떤 정신을 손상시킬 수 있는지는 몰라도, 모든 달걀과 모든 정신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탄이 된 천사 루시퍼가 계속해서 천사로 남아 있다는 호스터(Hostie)의 말은 달걀이 아무리 썩었을지라도 달걀은 달걀일 따름이지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악은 그것이 감염시키는 대상의 본질을 결코 변경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악이 결코 하나의 본질이 아니고, 그것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악이 하나의 본질이라면, 악은 그가 감염시키는 대상을 악으로 변환(transformation)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달걀이 변질되었다면, 변질된 달걀의 본질은 신선한 달걀의 본질과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되었을 것이고, 사탄의 실재(réalité)는 루시퍼의 실재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의 일탈(deviation)이며 존재(Esse)의 변모(deformation)이다. 
   융의 사상과 기독교 전통 사상 사이의 대치점이 가장 첨예하게 보이는 것은 이처럼 악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악의 문제는 신론과 연관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사상 사이에 더욱더 미묘한 차이를 야기 시킨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그는 진이고 선이며 미이다. 그는 또한 사랑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의 본질이며 존재이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출 3:14). 하나님은 완전한 통일체로서 이 세상 만물을 능력 가운데서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악은 모든 신적인 것들과 반대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하나님이 부재하고, 루시퍼의 죄가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사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인 루시퍼는 하나의 피조물로 그 창조자에게 복종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 교만이란 자아의 남용 또는 자아 찬양의 원천이다. 거기에서 모든 타락이 생겨난다. 빛의 천사 루시퍼는 이렇게 해서 어둠의 천사 사탄이 되었다. 그러나 천사로서의 그의 본질은 변화되지 않았다. 다만 그 지향점이 변화되었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는 대신 하나님을 거부했다. 좀 더 미묘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거부했다. 악(일탈, 잘못된 지향)이란 본래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에게 주신 자유로부터 생겨난다. 자유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은 또한 가장 비극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하시며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루시퍼-사탄의 뒤를 이어서 모든 피조계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거쳐 죄에 연루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성인들은 우리 모두가 연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러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런 연대성은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에 의해서 확증된다. 즉 융의 집단무의식 사상은 이 연대성을 경험적으로 입증해 준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본질적인 실존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천사, 인간)의 속성을 지닌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는 아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오란 사랑의 결핍이며, 병은 건강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같은 식으로 죽음은 생명이 없는 것이고, 왜곡된 것은 건전한 것이 부족한 것이며, 전쟁은 평화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서 악이란 그 자체가 종착점(終着點)이 아니다. 하나의 진행 과정이며, 더 큰 선에 이르는 데 필요한 시련일 뿐이다. 그래서 호스티(Hostie)는 "사람이 충분히 성장하는 데 있어서 악은 선에 이르는 중간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R. Hostie, op. cit, p, 174.
 루시퍼가 없다면 원죄가 없었을 것이고, 인간의 구속(救贖)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 필요조차 없고, 하나님이 그들로부터 아무런 선도 도모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악을 교정하구 선한 사람들의 덕을 더욱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Saint Augustin, Trait? sur les psaimies.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의 진화의 비의(秘義)의 핵심에 있다. 즉 새사람 예수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옛사람 아담이 죽는 국면을 보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그 점을 지적할 뿐이다. 융에게 이어서도 "악은 신경증적인 정신에서 비롯된 정신적 힘으로서 아무런 존재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구 결국 더 큰 선에 흡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R. Hostie, op. cit, p. 174.

   그러나 기독교의 계시와 무관한 융은 이 문제에서 하나의 타협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는 한 기독교 교리와 아무런 저촉도 없도록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리학에서 초월의 영역과 관계되는 부분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심리학은 참을 수 없고, 수상쩍은 것이 된다. 사실 선과 악의 원초적 대립에 관한 원형(原型)은 예수님과 사탄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그의 심리학이 언제나 대극 개념들로 되어 있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과 사탄은 대립되게 되며, 이때 이 둘에는 똑같은 가치와 힘을 가지고 있다. 원형의 영역, 다시 말해서 상징과 이미지로써만 언급될 때는 충분히 논의 가능한 이 사상은 신학의 영역에서 논의될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조물에 내재해 있는 이원성(dualite)을 하나님(또는 예수님)에게 투사시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마치 융과 양으로 나눠서 대극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실이 그렇다면 인류의 진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정신적 통합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통합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 영혼의 통합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통합을 목표로 나아갈 수 있는가? 융은 예수님과 사탄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같은 비중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성자가 성부에 공존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잘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또한 이 생각은 우리가 나중에 다루게 될 삼위일체 사상에 저촉되는 신학적 오류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이란 우리의 지성이 아무리 천재적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인간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심리학의 한계 속에서만 논의해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통합적인 존재이다. 이원성 또는 다원성이란 피조계의 질서에 속한 것이지, 창조주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선악의 피안에 관해서 알 수도 없고, 우리의 죄를 스스로 사할 수도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정도의 인식에 도달하면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가장 미묘한 영적 범죄를 짓게 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게 되어 아담과 이브 같이 죄를 짓게 된다. 
   플라톤의 변증학이란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분명하게 표명했다. 그는 언젠가 그의 지성이 오히려 걸림돌이될 뿐, 그가 탐구하고자 하는 진리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직관적 인식", 다시 말해서 좀 더 직접적으로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다. 융 역시 피조계의 영역, 즉 심리학의 영역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까지 더 나아가지 않고 이쯤에서 판단 유보를 하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무의식의 좀 더 깊은 층들을 탐구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융은 실제 이렇게 파고들어서 프로이드와 애들러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집단무의식을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 의식에 전혀 알려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융이 말한 부분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 무의식 속에는 우리 의식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 틀림없이 들어 있다. 그 부분은 아마 우리 정신의 핵(核)으로서, 신적인 핵(noyau divin)일 것이다. 우리 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듯이 이 핵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 핵과 융이 집단무의식이라고 부른 층 사이에 우리가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부분은 아빌라의 테레사를 비롯한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그 존재를 말해왔던 부분이다. 우리는 그 부분을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그림 3을 보시오).우리가 어떤 상징을 볼 때, 그 상징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라면 그 상징은 우리 정신의 내면에 있는 이 층들을 통하여 지나간다. 



   그리하여 우리 인식은 확장되고,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초월적 무의식과 집단무의식 사이에는 원형의 세계와 개인무의식 사이만큼의 차이가 있다. 상징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우리가 어떤 상징의 의미를 해독하였을 때, 그 상징은 우리의 인식을 더욱더 깊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상징과 모든 원형이 살아있고, 실제적인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때까지 그 인식 작용이 계속된다. 이처럼 우리는 상징 언어를 통해서 이 내면적인 생명과 하나님께 다가간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 지성 만으로서는 이러한 체험을 할 수가 없다. 
   이제 다시 예수님과 사탄의 대극 문제에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앞에서 이 문제에서 예수님과 사탄이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과 천사, 즉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인 천사가 대극을 이룬다는 사실을 거듭 말해 왔다. 이렇게 될 때 사탄은 본래 자기의 자리로 되돌아오며,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의 피조물이 된다. 이때 우리는 이 세상의 지배자(les Princes dece Monde)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꼬득이고 있는 신격(神格)의 참칭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상징을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상징의 실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상징의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사탄"의 구조를 생각할 때와 "예수님-또 다른 천사"의 구조를 생각할 때는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만 하나의 원형일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정한 종교체험을 한 다음에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을 깨달아야만 우리는 선악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선악이란 피조계의 문제일 뿐, 하나님은 그 문제를 초월해 계시다. 우리 인간의 발달도 궁극에 가서는 선악의 이분법에 매달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은 우리 죄 많은 피조물에 속해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죄를 우리 자신의 전체성 속에 통합시킨다면 우리는 악이 하나님 속에서 완전히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깨닫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결코 찬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는 세 가지 양태가 있다. 그것들은 외적 인식(comiaissance exotéque), 내적 인식(connais –sance esoterique), 성스러운 인식(connaissance sacree)이다. 또한 우리 무의식에 있는 세 가지 영역에 관해서도 말하였다.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초월적 무의식예 관해서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상징은 인식의 이 세 양태에서 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 영역에서도 똑같이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상징은 우리에게 언제나 더 참된 진리를 가르쳐준다. 상징이 진리의 원천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개인무의식으로부터 집단무의식으로 이끌어 가는 상징이 우리를 또한 초월적 무의식으로까지 이끌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상징은 우리를 상징의 이미지나 개념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 접근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상징의 원천이며, 모든 것의 원천인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진리에로 이끌고 간다.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앞을 지나갔는데,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겨우 "오래된 교회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만약에 감수성이 예민했다면 "아름다운 교회로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그는 원시 기독교 시대의 석관(石槁)을 보았는데 그 앞에 멈춰 서지 않았다. 그림들이 그를 더 끌었다. 색깔들이 "오래된 돌들"보다 그를 더욱더 매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주제들 이외에는 별로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여러차례 강연을 듣고, 강의를 들은 후 그는 그 교회 앞에 서서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교회를 그 시대에 가져다 놓고 다른 나라에 있는 건축물들과 비교하면서 그 교회의 건축 상 특징을 지적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정확하게 그 건축물에 대해서 미학적 비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물관에서도 원시 기독교시대 석관은 그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석관의 역사와 예술적 가치 및 그 석관에 낮게 돋을 새김 해 놓은 무치에 관해서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석관 위에 새겨진 이미지나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이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이다"라거나, "저것은 사자 굴속에 있는 다니엘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의 외적인 교양 수준을 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이런 외적인 의미를 떠나서 이 작품들 속에 깃들어 있는 더 깊은 의미에 관해서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때 그에게는 새로운 탐구가 시작된다. 이런 외적 인식 위에 좀 더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인식이 덧붙여지게 된다. 그것이 내적인식이다. 내적 인식에서 상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사람들은 하나의 작품과 관련해서 그것의 역사적 의미, 미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를 뛰어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그 작품 속에는 아무것도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의 인식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원시 기독교 시대 예수를 연구할 때도 작용하게 된다. 이 인식은 그에게 상징의 숨겨진 의미를 보여줄 수 있다. 이때 그는 이 의미들이 이 지구상의 모든 시대에 어느 지역에서나 존재했었음을 알게 된다. 집단무의식이 이 탐구 과정에서 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진리는 그 자체가 생명이다. 그리고 생명은 이때 더 이상 아무런 이미지(image)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이 직접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초월적 무의식(inconscient transcendantal)이 개입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무의식이란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고, 미분화되어 있는 잠재적인 정신 에너지다. 모든 형태(form)는 그 속에 담겨 있다. 무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형태를 만들 수가 없다. 밖에서 받아들일 수가 있을 뿐이다. 무의식은 가치  중립적이다. 무의식은 사탄으로부터 그 형태를 받아들여서 형상화될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형태를 받아들여 형상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아무런 인도 없이 무의식의 이 미궁(labyrinth)을 헤맬 때 말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위험은 우리가 무의식 속을 더욱더 깊이 내려갈 때 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월적 무의식에 접근해 갈 때, 우리 영혼이 이런 위험 속에서 미혹(迷惑)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침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우리 영혼의 탐구과정에 이런 걸림돌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해 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비전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비전인지 하는 것과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현존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충고(conseil)를 주었다. 그런데 비전(vision)이란 우리가 초월적 무의식에 도달했다고 해서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재해 있으면서 아직 감각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전이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집단무의식에 속한 것들을 체험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초월적 무의식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초월적 무의식이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 지성과 감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무의식에 대한 체험은 대단히 개인적이고, 전달 불가능한 체험이다. 융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체험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체험에 관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 존재 전체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때 사람들은 엄청난 계시를 체험하여, 그 힘 때문에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땅에 거꾸러져 바울이 되었듯이 강력한 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도 아래 무의식의 내면에 내려갈 때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적대적인 장애물들을 없애버릴 수가 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