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  부모의 이미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7)

 

인간의 삶에서 부모의 영향은 결정적이다. 그것은 신체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정신적인 측면이나 정서적인 측면과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사람이 성장한 다음에 나타내 보이는 반응의 원천이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에 보고, 알 수 있는 생명체이며, 그에게 생명을 주었고 그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인상을 받으며, 어떤 감정을 체험하고, 가끔 속기도하며, 두려움도 배우고, 희망도 배우게 된다. 어린 아이가 최초에 그의 심리적 내용을 투사하는 것도 그의 부모를 통해서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아니무스(animus)의 원천이고,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아니마(anima)의 원천이다. 때때로 다른 사람이 가족에 끼어들어서 투사의 고리가 넓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투사에도 언제나 최초 투사의 흔적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투사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사람들에게 원형적이며 심오한 관계를 맺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맺어왔던 관계를 청산할 때, 그 결과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그 관계를 끓을 때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운데서 누가 더 중요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즉시 대답할 것이다. 사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어린이의 발달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아동의 발달 영역, 수준, 나이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부부가 하나가 되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남녀의 서로 다른 특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 부부는 어린이의 전체적인 발달에 대단히 유익한 영향을 끼치면서 정신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형체를 이루게 된다. 부모님에게서 이루어진 이 통합을 보고 자란 어린이의 정신 역시 원래적인 대극의 분열 없이 그들의 정신을 통합하게 된다. 그는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라고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장애가 그의 외부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원래부터 행복하게 남성과 여성이 통합되어 있는 "형상"(imago)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장애물의 여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종종 수도사 지원자들의 가정환경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그의 부모님이 화목하게 살지 못했거나 별거했던 지원자들은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었다. 물른 하나님은 이런 인간적인 일상사들을 초월해 계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소명이 진정하고 확고한 것이라면 이런 인간적인 모든 장애들을 극복하고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수도원에서도 이 점을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 사실은 부모님의 관계가 한 사람의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서로가 불화하거나, 별거 중인 부모는 어린이의 정신을 파고들어가 분열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구조 내에 있는 여러 가지 대극적인 요소들은 부조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부조화는 제때 고쳐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은 그들이 나중에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인간의 발달은 세 가지 중요한 국면(局面)을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이 세 국면은 인생의 서로 다른 세 시기인 유년기, 성년기, 노년기와 일치한다. 유년기와 성년기 사이에는 계속해서 맞물려 이어지는 성장기들이 있는데 이 단계에서 어린이들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결국 성인이 된다. 한편 성년기와 노년기 사이에서 사람들은 성장을 멈추고 쇠퇴기를 맞이한다. 이때 그들은 신체적인 면에서는 생동력이 쇠퇴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성숙하게 된다. 그런데 성년기는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 죽음이란, 옳게 이해한다면, 모든 탄생의 종착점이다. 그리고 영원한 삶의 약속이기도하다. 이때 사람은 사실 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존재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하고, 발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모든 성장의 근저에는 자아중심성(egocentrisme)이 자리 잡고 있다. 신생아들도 이때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아무것도 남에게 주지 않고 오직 "취할" 뿐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오직 "먹여 살리는 사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시기에 어린 아이가 보모에게 맡겨진다면 그의 심리 속에는 처음부터 양가감정(ambivalance)이 생겨나며, 이 양가감정은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특별히 이 어린 아이가 보모를 자기 어머니인줄 알고 투사를 일으키면 양가감정은 더욱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아버지에 대한 투사처럼 어머니에 대한 투사도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을 경우 이 투사는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어른들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날 때부터 고아인 어린이 역시 이 투사의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 유아(乳兒)시절은 사람들의 심리 구조에 대단히 중요하고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다. 이 시기는 소위 "구강기(口腔基)"라고 부르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사람들은 보통 자아중심성을 강화하게 된다. 이 시기를 마감하는 이유(離乳)가 급작스럽게 잘못이루어지면 이것은 어린이의 정신에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며 그들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게 된다. 이때 생겨난 정신적 외상(外傷)은 나중에 나타나서 어린 아이의 성격을 파괴시킬 수 있으며, 이 시기에로의 퇴행(구강기적 퇴행)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 한편 이유기를 잘 벗어나온 어린이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에 좀 더 잘 참여하게 된다. 어린이는 이제 어머니의 보살핌을 알게 되며 어머니의 사랑에 자신의 기질(tempérament)에 따라서 반응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융이 "어린이의 세계"(le pays de 1'enfance)라고 명명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는 굉장한 나라이다. 이 세계의 지평선은 나날이 확장된다. 그러나 어린이는 아직도 보살핌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장하고, 발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의존하고, 그에게 자기의 마음을 주고, 신뢰를 보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부모와 떨어져서 살고 있거나, 부모가 없을 때 이 욕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욕구는 그와 같은 나이 또래 다른 어린이들의 투사와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어린이의 세계"가 그의 외부 환경에 의해서 감염되지도 않고, 왜곡되지도 않는다면, 그어린이는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알게되고, 그 자신의 안전을 훼손 받지 않으면서 그의 삶의 첫 번째 체험들을 하게 된다. "어린이의 세계"는 그에게 무한하게 가치가 있는 콤플렉스로 구성되어 있는 어떤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 어린이들은 그의 무의식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불행하게도 종종 왜곡되고, 상처받으며, 초토화되고 만다. 정신분석을 해보면, 어린이들에게서 이 훼손 경험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 발견되곤 한다. 어린이들이 이 세계로부터 빠져나을 때 그들은 흔히 그의 부모에게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를 가장하면서 부모로부터 무작정으로 독립하려고 하거나, 자기주장을 한답시고 무조건적으로 부모로부터 떠나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공격성과 독립심과 원심성(遠心性)은 정상적이며, 필요한 것이다. 그것들은 그들이 "어린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결과 나타난 것이고, 또 그들의 깊은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의 노력이기도 하다. 결국 이 분리는 하나의 심리적 드라마인 것이다.

어린이는 모든 것이 그에게 쉬워 보이고, 모든 것이 따스하며,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 세계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그래야 그는 삶과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청소년이 된 다음에도 이 세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못하거나, 이 세계에서 급격하게 빠져 나오면, 그들은 결코 성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인격의 일부는 이 전단계에 고착되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의 성격과 정신구조와 참이 왜곡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고(思考)의 영역에서는 완전히 성숙되어 있을지라도 감정의 영역에서는 유아적(幼兒的)일수가 있으며, 거꾸로 감정의 영역에서는 완전히 성숙되어 있는데, 사고나 감각의 영역에서는 미처 어린 아이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리비도(libido)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인간 정신의 어떤 기능 하나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퇴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 정신의 발달에 있어서 퇴행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퇴행은 그것이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하는 경우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것이 의식될 경우,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도약대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린이의 서계"와 유아성(幼兒性)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어린 시절의 어느 한 단계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경우, 그것을 유아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나이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구강기에 있는 어린 아이에게 이기주의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한 것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성인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공격성과 독립심과 원심성(excentricit?)은 청소년기에 있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어울리는 특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아성은 하나의 기형이며, "어린이의 세계"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희화화(戱畵化)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삶에 아무런 청량감도 주지 못하고, 자발성도 주지 못한다. 더 이상의 성장을 약속해 주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풍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유아적인 퇴행에 빠지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그렇게 되는 경우 우리의 정신이나 육체 또는 감정의 질서는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 에너지는 일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 발달에서 정지 상태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정신 에너지의 일부가 내면적 혼란으로 막히게 되면 그것은 역류하게 되어 과거 상태로 흘러간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 에너지는 우리 삶에서 어떤 정신적 외상(外傷) 때문에 우리의 존재(存在)전체가 무의식적으로 심하게 흔들렸던 인생의 어떤 시기, 즉 인간 발달 단계 가운데 어느 한 단계에 고착되고 만다. 이렇게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퇴행된 정신 에너지는 우리 정신 속에 있던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거나 새롭게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는 어떤 경우 신경증이나 정신병을 유발하게 된다. 유아성은 이렇게 우리의 인격발달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가 지금 어떤 나이에 접어들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 그는 그 사실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기는커녕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사랑해 주고, 돌보아 주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그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온몸과 온정을 다 바쳐서 해 주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어가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이끌고 가는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욱더 많은 것을 받을수록, 더욱더 많이 요구한다. 그가 이렇게 된데 대해서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그의 환경이 매우 불안해서 쉬 바뀌는 것이면, 그는 더욱더 잘못되게 된다. 그 결과 그는 그런 환경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나서려고 하지도 않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물렁물렁한 사람이 된다. 또한 그는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에게만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그의 곁에 있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의 인격에 병이 든 것이다. 병이 들어도 중병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병이 든 줄 모르고 있으며 그가 병들었음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인 유아성은 그 자체가 유약(柔弱)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 보상으로 오만하거나 독단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이 너무 성숙하기만 할 경우, 여기에서도 비극은 생겨나고, 그 비극의 강도는 더욱더 깊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유아성을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그 자신과 말할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그의 존재는 이 갈등으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기고 상처받게 된다. 그는 그의 유아성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유아성에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안에 휩싸이고 좌절감에 젖어들게 되어 결국 그가 마귀에게 사로잡혔다고 믿게 된다. 이때 그에게는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를 전혀 구원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때 악()은 그 사람 자체보다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악의 원인에 관해서 전혀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곧 미칠 지경이 되며, 심한 경우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을 초월하는 힘과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해 있으며, 그가 어떤 폭군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가 그 자신에 관해서 각성하는 것이다. 그 길만이 그가 이 같은 상태에서 빠져 나오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날 유아성(infantilisme)은 대단히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넘어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한 사람이 다시 탄생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현대 사회에서는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도와줄만한 장치가 전혀 없어서 사람들이 유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에게서 이 시기를 원만하게 넘겨주게 했던 입사식(initiation)은 심리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성인의 나이에 도달하게 되면(이 나이는 어느 사람이 청소년기를 완전히 벗어난 시기이다), 인간 발달은 새로운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전에는 그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인간적인 문제들은모두 그에게 들어온다. 사랑에 대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발달은 한 사람이 자아를 벗어버리고, 자기(自己)에게 도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헌신적으로 되며, 성숙하게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성인은 없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사람들 속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갈등들이 수도 없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숙이란 그가 모든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영적인 문제를 심사숙고 하게 되며, 이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인간의 삶에는 서로 다른 두 시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인생의 전반기이다.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에게서는 자아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세상일들에 종사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많은 갈등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시기는 인생의 후반기이다. 이때 사람들은 거꾸로 자아(自我)를 벗어버리고, "()의 자녀"가 된다. 인생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누는 나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언제라고 주장할 수 없겠지만 융은 대체로 서른다섯 살 전후로 잡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에서 사람들이 주로 몰두하게 되는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융 학파 분석가들은 젊은이들은 물론 40대 이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정신분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을 유아성에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퇴행해버린 정신 에너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힘이 일단 풀려나게 되면, 이 힘은 정신적 성숙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신분석을 정신적인 재교육(rééducation), 즉 유아성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게 하는 재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사춘기라는 위태위태한 도량을 넘는 것이며,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젊어질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조건은 사람들이 부모,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모든 금욕 수행법, 그리고 종족들에게서 발견되는 입사식(入社式)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 분리(分離)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분리는 정말 문자 그대로 부모님의 곁을 떠나는 것인가? 물론 대부분의 경우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위하여 부모님의 집을 떠날 때 이 분리가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부모님의 집을 떠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결혼했다고 해서 완전히 성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아직도 환상 속에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유아적인 부부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이런 엉터리 부부들 때문에 이혼을 역시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

결혼을 했으면서도 아직 그들의 삶을 책임 있게 이끌어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인격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 한 그들이 아무리 부모님의 곁을 떠났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어린이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어린이들이 부모님 곁을 떠나서 멀리 사는 것에 불과하며 "자기네 끼리의 삶"을 살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이사 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공격적인 성격을 보이게 되는데, 이것부터가 그들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성숙한 인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들과의 심리적인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코 성년(成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신분석은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들과 다투고 나서 부모님 집의 대문을 "" 소리를 내면서 뛰쳐나간 젊은이들은 아무리 그들이 부모님들로부터 독립되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아직도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나 아버지 콤플렉스(father complex)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부모님의 곁을 떠났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부모님을 그들의 내면에 억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 전체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부모님의 투사(projection)에 묶여 있게 된다. 그들이 용감하게 부모님으로부터 뛰쳐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들로부터 도피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의 분리란 "문자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징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든지 수도원에 들어간다든지 해서 겉으로는 아무리 요란하게 부모님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심리적인 분리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심리적인 분리란 결코 부모님들과 단순하게 헤어짐으로써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님들과 깊이 화해한 다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즉 그들의 내면에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합시켜야만, 다시 말해서 그들의 내면에 원초적인 가치(valeurs primordiales)를 받아들여야만 그들은 부모님과 실제적으로 분리될 수 있고, 그 결과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부모님과의 분리는 흔히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의 세계"를 떠나는 것이며, 어린이의 세계는 또한 어머니의 품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심리적인 탯줄을 끊어버려야 한다. 이 심리적인 탯줄을 끊는다는 것이 상징적으로는 어머니와의 분리로 표현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몇 가지 상징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든 상징의 원천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그 중 두 가지는 남성적인 것으로서 공기(air)와 불(feu)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여성적인 것으로서 물(eau)과 땅(terre)이다. 이 넷은 거의 언제나 대극(對極)의 법칙에 따라서 하나의 쌍을 짓고 있다. 즉 공기와 땅, 불과 물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남성적인 요소로서, 공기는 긍정적이고, 활동적이며, 번식적(fécondant)이다. 그래서 아버지, 남성, (), (), 이성(理性)을 나타낸다. 여성적인 요소로서 땅은 수용적이고, 수동적이며, 풍성하다. 그래서 어머니, 여성, 여신, 영혼(靈魂). 직관을 나타낸다. 이 요소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을 때,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땅이 없는 공기는 존재할 수 없으며, 공기 없는 땅은 불모지일 뿐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주 창조 신화나 그 밖의 신화들은 이 남-여성의 결합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원초적인 결합상인 공기-(또는 공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알기쉽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생산적인 남성적 요소와 수용적인 여성적 요소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이 법칙은 심리학이나 상징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실제적이고 진리이다. 그러면 이제 잠시 여성적인 요소인 물과 땅을 생각해 보자. 물과 땅은 태초로부터 언제나 태모(Magna Mater: 모든 것의 어머니 상징) 이었다. 사실 물과 땅은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으로서 씨를 받고, 배아(胚芽)를 보호하며, 그것을 낳게 한다. 많은 우주창생신화에서 물이나 땅은 우주의 자궁(子宮)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eau-mère) 이미지는 많은 신화와 종교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중요 상징처럼 물과 땅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땅은 씨앗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자라게 하며, 결국 그것을 탄생시키는 풍부한 자궁인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땅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썩게 하며, 파괴시키고, 변질시켜버리는 괴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물과 땅은 무엇인가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죽여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죽음이란 존재 형태의 변화 또는 변형으로서,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여성적인 요소가 가지고 있는 이 이중적인 상징주의는 모든 상징과 그 상징에서 생겨난 이미지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태모(太母: Magna Mater)나 여신들 및 인간의 어머니에게도 이 이중적인 상징주의가 예외는 아니다. 말하자면 태모는 무엇인가를 보호하고, 발달시키는 양육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삼켜버리고, 잡아먹는, 계모이며 칼리-두르가(Kali-Doura: 힌두 신화에 나오는 검은색의 죽음의 여신)를 닮은 "탐식자"(貪食者) 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신화들을 보면, 영웅들이 정복해야 하는 부정적이며, 불길한 여신들과 마귀들, 마녀들, 요괴들 및 못된 요정들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어머니의 부정적인 측면, 즉 그림자 측면의 의인화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모습이 한 인물에 의해서 동시에 표출되는 법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이미지들은 긍정적인 것으로, 다른 이미지들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논의에서도 여성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상징주의는 똑같이 작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투사될 수 있다. 만약에 이 상징적인 의미가 어떤 한 인물, 예를 들어서 어머니에게 투사될 때, 그것은 사람들에게 양가적(兩價的)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사람들은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성적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이 상징주의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상징의 이 모호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는 어떤 경우 "암닭 같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자식들을 무조건적으로 감싸고, 돌보려고만 해서, 자식들이 문자 그대로 그녀 속에 감금되어버리고 마는 수가 있다. 또 다른 경우 어머니는 "계모 같은 어머니"가 되어서 자식들에게 질투를 느끼고, 고약하게 굴어서 자식들의 성장을 막아버리는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서도 사람들이 "어린이의 세계",즉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유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들은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감정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이 투사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은 그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각성해야 이루어진다(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투사란 언제나 무의식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종종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많은 신화 속에서 어느 영웅이 괴물 또는 용과 싸우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 괴물 또는 용은 상징적으로 말해서 어머니를 나타내고, 괴물과의 싸움은 영웅인 아들의 해방 투쟁을 의미한다. 어떻게 어머니가 괴물이나 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수차례씩이나 말했다. 즉 청소년들에게 어머니는 긍정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일시적으로나마 작용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투쟁 끝에 이루어지는 괴물의 죽음(어머니의 죽음)은 종종 칼이나 창 등 찌르는 무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이것의 현대적인 표현은 아마 권총이 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청소년들의 공격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무기들은 동시에 그들의 성기(性器)로 상징되는 남성의 자기주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화 속에서 어머니를 죽이는 행동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청소년들이 그들의 남성다움을 가지고서 어머니를 극복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이 정신적인 발달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결국 어머니 살해는 청소년들이 유아적인 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원형적인 상징인 것이다. 이 상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이나 잔인성은 모든 청소년들이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들의 내면 속에서 실제로 벌이고 있는 내면적 투쟁의 강렬함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우리는 젊은이들이 왜 꿈 속에서나 공상 속에서 어머니를 죽이거나, 어머니를 사로잡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주제들은 실제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지만, 청소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깊은 내면적인 요청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들이 만약에 상징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오해나 범죄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머니로터의 분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하는 사실을 살펴보자.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탐구하기에 앞서서 상징이란, 그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상징을 실제로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매우 혼돈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상징은 언제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이나 괴물을 만나고, 그 괴물을 죽이는 상징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발달의 두 시기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두 시기를 문자 그대로 체험하는 법은 극히 드물기는 하다. 이것은 오히려 모든 종교의 내면적인 교리에서나 나타나는 재생의 교리를 나타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분석을 해보면 우리는 우리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이런 신화를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청소년들을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공격적인 행동은 우리들이 유아성에서 벗어나 남성에게로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화나 설화는 물론 민담 속에서 주인공인 영웅은 괴물과 싸우고 그 괴물을 무찌른 다음에야 비로소 그의 아니마(순결한 처녀나 공주로 나타나는 여인상)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융의 심리학 용어로 해석해 보면, 이 사실은 우리가 아니마(또는 아니무스)와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즉 어린 시절로부터 분리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어머니를 죽이고, 어머니를 무찌르는 것은 상징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심리적인 사실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것은 주목해야만 할 정도로 의미 변화를 보이게 되며,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집단무의식에 관해서 알지 못했던 프로이드에게서 어머니의 죽음이나 어머니 극복이라는 주제는 어머니 개인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한 사람이 정신적 발달을 이루기 위해서 근친상간적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축소,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융은 집단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으므로 근친상간적 문제를 좀 더 넓은 지평에서 우리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위대한 원형 가운데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실제로 발견되고 있는 근친상간의 감정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기에 담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를 간파해야 한다. 즉 그 상징의 빛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근친상간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우리는 그가 꾼 꿈을 분석하여, 그 반응이란 그가 좀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머니(어린 시절)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부름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근친상간이 명백하게 보일 경우, 우리는 무한한 인내를 기울여서 한 사람을 그의 어머니에게 붙들어 매고 있는 유아적인 동기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석은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태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어머니에게도 초점이 맞추어져서 행해져야 한다. 우리가 이 개인무의식의 문제를 집단무의식의 문제로 변화시켜 해석할 수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머지않아 구원받게 된다. 우리가 앞에서 어떤 소년 또는 소녀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융이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와 극복은 남성에게는 물론 여성에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 문제가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나, 보편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사실 분석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여성들 역시 이 까다로운 문제에 봉착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가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통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금기는 이런 분리를 상징하고 있는 영원한 원형(原型)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관해서 이미 많이 말해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머니 콤플렉스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여성들 역시 정신적인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로 대표되는 어린이의 세계와 싸워야하고, 거듭나기 위해서 어머니를 정복하고, 극복해야 한다. 상징의 의미는 영원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징을 이해할 수 있고,상징을 그의 몸으로 살 수 있다. 어머니와의 싸움이라고 하는 원형적인 상징은 그 의미가 청소년에게서와 성인에게서 결코 같은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두 시기에서 삶의 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서 이 상징을 그가 그 자신은 그의 부모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와 같은 각성 위에서 사회에 제대로 적용하기 위하여 그가 그의 어린 시절 및 유아적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계에서 투쟁의 원형(I' archetype du combat)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한 위상에서 다른 위상으로 옮겨질 때마다 그는 이런 현태의 투쟁이나 저런 형태의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싸움을 한 사람이 성숙한 인격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원형의 깊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의미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유아 시절에서 벗어난다거나, 어머니의 품을 떠난다거나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신화나 설화에 나오는 용이나 괴물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무의식의 상징이다. 한 사람이 그 자신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 정복하고, 극복해야 하는 무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용이니 괴물이니 하는 것은 태모(Magna Mater)를 나타낸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그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우주적인 어머니의 상징인 것이다. 여기에서 땅이나 물의 상징 역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땅인-어머니(Terre-Mere : 地母)는 성장하고 있는 존재를 받아들여서 싹틔우고 있는 그곳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태모(太母: 태모란 우리의 자연적 어머니가 승화된 모습이 아니다. 또 다른 개념이다)의 품속에서이다. 이때 사람들은 "거듭나기 위해서 죽는다." 이렇게 삼켜지고 다시 내뱉어지는 과정을 융은 "밤의 항해"(la traversée noctume)라고 불렀다. 그것은 태양이 저녁이 되면 바다에 잠겼다가, 아침이 되어 다시 동쪽 하늘에 새로운 태양으로 되어서 떠오르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좀 더 개진하기 전에 잠시 공격성(agressivite)에 관해서 언급해 보자.

우리는 공격성이란 유아 또는 청소년들에게서 정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발달 위기의 징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인에게서 나타날 때, 그것은 거꾸로 유아적 퇴행이며, 고착인 것이다. 그러면 이 공격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일까? 여태까지 이 질문에 관해서 많은 답변이 행해졌다. 그리고 그 답변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고통(la souffrance)이라는 의미를 첨가시켜서 좀 더 넓게 접근하고자 한다. 앞에서 우리는 성인이 되는 것은 매우 힘들고, 또 많은 수고가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성인이 될 때, 한 고비를 넘겼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성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도피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도피(lafte)란 퇴행이나 거부, 즉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인 고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피란 속으로는 그렇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만 어떤 것을 과장되게 흥분하여 받아들이는 태도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예로써 어떤 사람은 현실과 유리되어 학문이나 영성 등 고상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사람은 감각적인 것이나 일탈된 행동을 추구하기도 하며 악으로 떨어져버리기도 한다. 도피란 대부분의 경우, 무엇인가를 극복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며, 좌절된 시도이고, 해방되지 못한 절망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피에서는 인생의 괴롭고, 적대적인 측면에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인생의 고통스럽고, 어두운 측면, 그러나 그가 싸워야만 하는 측면에서 도주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을 해보면, 소위 어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문제와 맞부딪치지 않고 매일 도망 다니기 때문에 결국 병에 걸리게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은 삶의 깊은 차원에 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그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개인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든지, 그 모든 문제를 지적으로나 철학적으로만 관찰하고는 그 문제를 지배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 삶의 문제를 모두 십자가에 투사해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높은 영성을 추구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건, 저런 형태로 나타나건 무의식적으로는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장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란 대단히 심각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문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깊이 다루지 않겠다. 다만 고통과 공격성이 겹쳐지는 부분에만 조명을 하겠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성은 그 사람이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소멸된다고 우리는 여러 차례 말해왔다. 결국 우리의 공격성이란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우리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인도자로 생각할 때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고통의 문제와 직면하지 않는 한 아무런 영적인 발달도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후쉐(Suzanne Fouché)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일꾼이 쟁기를 힘껏 움켜잡고 밭을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통을 그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또는 그의 삶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을 그의 삶에 동화시키는 것이고, 이용하는 것이며, 드디어는 변화시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주장하고 있는 "밤의 항해"(la traversée noctrume)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들에게 이 문제, 즉 고통에 직면하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게 하고, 우리가 여태까지 생각해 왔던 가치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 문제를 깊이 다루기 전에 먼저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린이의 세계"와 분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자. 사실 정신분석에서는 이 문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서에도 우리가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대단히 많다. 그 모든 구절들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지만,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야훼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누가 이 말씀보다 더 명확하게 우리 인간의 영적 발달에 관해서 언급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모두 그의 부모님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 짝인 아내를 만나서 그녀와 함께 또 다른 통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는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내면에서 그 자신의 영혼인 아니마(anima)를 발견하여, 그 아니마와 하나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그의 아니마와 하나였다. 즉 본래적인 통일체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때문이다(1:27).

같은 창세기에 이런 말씀도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에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월적인 측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발달하고, 새로운 나라로 찾아가며, 성숙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이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정신분석 역시 그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복음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사춘기 때 그의 부모님 곁을 떠나서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의 부모님들이 자기 아들이 없어졌다고 걱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때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하였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2:49)라고 대답하지 않았는가? 내 아버지 집에서 해야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성인(成人)이 되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또한 마태복음 821~22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또한 누가복음에도 이것과 같은 맥락의 구절이 나와 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61-62). 그러나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22). 이 말씀은 진정한 영적 발달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마태복음 1037-39절까지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말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7-39).

영적인 삶을 위해서 우리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성서보다 더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사실 복음서는 이러한 필요성에 관해서, 즉 부모로부터의 분리에 관해서 난폭할 정도로까지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관한 구절을 마태복음 1034-36절에서 칼과 칼날의 상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4-36).

이 말씀의 의미는 더욱더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태복음에서 말한 검은 그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육신의 어머니를 꿰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영()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어머니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혼과 영을 쪼갠다는 말은 자기 내면에서 새 사람을 낳게 하기 위해서 그의 옛 사람이 그의 환경과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투쟁을 의미한다. 이 모든 사실은 "밤의 항해"이며, "밤의 항해"라는 표현은 이 모든 투쟁들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영혼의 평화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평화는 앞에서 말한 그 어려운 내적 투쟁을 거쳐야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청은 절대적이다. 하나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에서부터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가 예수와 함께 길을 갈 때에 예수는 몸을 돌려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5-27).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마가복음 834절부터 3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8:34-36).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정신분석은 자연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준비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의 분리, "어린이의 세계"로부터의 절연이 심리학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절단은 단지 문자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높은 담장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든지, 외국에 나가서 산다든지 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때때로 발견하게 되는 수도사들의 유아성(幼兒性)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그들이 "문자적으로만"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정신은 아직도 통합되지 않고 어머니나 아버지의 상을 그들의 상급자나 종교적인 인물 또는 사제들에게 투사시킨 채 여전히 어린아이들로 남아있는 것이다. 기독교 성인(聖人)들과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의존관계가 가져 올 수 있는 해악을 생각할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점은 그 사실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버렀노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떼어버리기 어려운 관계는 바로 부모님과의 관계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살던 고장을 떠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분리 작업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 물론 부모님으로부터의 분리가 부모님과의 육체적인 거리와 비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었던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 분리가 잠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 발달 과정에서 아무리 일시적으로는 그의 가족과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그들의 가족과 다시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자 수도자에게 있어서, 그녀가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그의 부모님들을 만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아무런 분리(分離)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아직 불완전하며, 어떤 경우 그녀의 영혼에 병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영()의 자유를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마음의 완전한 평화를 맛볼 수가 없다. 그녀는 치유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그녀의 가족들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 병에서 나을 수가 없고 수도 생활에도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이 병에서 나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내 생각으로는-그녀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까지 그녀의 부모님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내면적 자유는 그녀가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서 얻을 수가 있다. 드디어 그녀가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그것이 그녀에게 십자가로 작용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면, 그때 그녀는 그녀의 부모님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때에야 비로소 부모님과의 만남이 그녀의 영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유익할 수가 있다. 이 말은 물론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그의 영혼이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매어 있으며, 이 세상을 떠나서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람들이 유아적인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발달하려면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서를 보면 이것과 정반대되는 구절들도 있다. 특별히 십계명예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5:16). 또한 레위기 209절에는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라는 말씀이 나와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부모들과 분리되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모님들과 화해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과 진정으로 분리되면 분리될수록 그 사람을 더욱더 깊이 존경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상징적인 의미에서 "분리"되어 있으면, 분리되어 있을수록 더 경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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