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장  밤의 향해: 영혼의 어두운 밤

 

 

 

 

우리 영혼의 발달 단계 가운데 하나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명명(命名)한 이 단계는 그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 단계의 속성에 관해서 말해 준다. 그것은 이 단계가 무엇보다도 항해라는 사실이다. 즉 이 단계가 하나의 종착역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항해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소 길게 진행될 수도 있는 이 항해 기간 동안 우리 의식은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된다. 의식은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식은 길을 잃고, 버려져 있으며,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줄 아무 빛도 비치지 않는다. 그가 지금 "밤의 항해"를 하고 있다는 깨달음 역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는 다만 두렵고 불안할 뿐이다. 그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항해" 속에서 그의 자아 또는 자아의식의 일부는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이 기간을 지내는 동안 그의 존재는 가공할만한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다. 모든 것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런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지 못한다. 그의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심리적 용광로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그의 존재를 파괴시켜 버릴 수도 있다. 이 시기가 때때로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이 시기에 아무런 자신감도,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게 될 수가 있다. 이 시기는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 자신을 모두 포기하고, 앞으로 도달하게 될 그 단계에 이르는 중간 단계인 것이다. 즉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위대한 "변형"(transmutation)의 시기인 것이다. 이 시기는 모든 신화나 입사식(initiation)이나 종교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희생의 시련기인 것이다. 이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도달한 다음에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시기에 도달해서도 겁을 집어먹고 있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만 있게 된다. 고대 이집트 비의(秘儀)나 율리시즈 신화 또는 연금술 속에서 이 "밤의 항해" 고난은 종종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인류 공통의 자궁인 태모(Magna Mater)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집트 신화 속에서 이에 해당되는 이야기로는 오시리스(Osiris)이야기가 있다. 수확과 풍요의 신인 오시리스는 어둠의 영()인 그의 형제 세트(Seth)에 의해 난자(亂刺)당한 채 관 속에 담겨지고, 이어서 바다에 버려진다. 또한 율리시즈 신화 속에 데메떼르(Démeter) 여신의 딸 꼬레(Koré)는 지하의 신 플뤼톤(Pluton)에게 납치되어 땅 속으로 들어간다. 연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납은 금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용광로 속에 부어진다. 우리는 이런 상징을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서 속에서 요나(Jonas)는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데, 요나는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의 원형이다. 이런 예화는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으나, 여기에서 줄여야 한다. 그러나 이 예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태모(太母)에로의 귀환이다. 즉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영원하고 보편적인 땅인 태모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오시리스가 담겨져 있던 관과 그가 던져진 바다는 모두 어머니의 상징이다. 또한 꼬레가 내려간 세계인 하데스(Hades)는 알곡이 돋아나기 위해서 씨가 뿌려진 땅이고, 납이 끓고 있는 용광로 역시 어머니의 품을 가리키고 있다. 고대인들은 농경을 통해서 재생(再生)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이 영감은 그들에게 미래의 수확을 위해서는 반드시 씨를 뿌려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들에게 이와 관계되는 비의(秘儀)와 입사식(入社式)을 만들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그것이 죽지 않으면 싹으로 돋아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그러므로 모든 "밤의 항해"는 이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 죽음, 이 자기-포기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도 이 사실을 나타내는 표징들은 많이 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더 깊은 인식과 자기-이탈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의 항해"는 존재의 진정한 변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의 죽음은 순전히 지적이고 문학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가끔 극적으로 진행되는 살아있는 실재인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밤의 항해"는 존재의 완전한 변형과 옛 자아의 완전한 죽음을 가져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언제나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 깊은 곳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밤의 항해"는 더욱더 깊이 진행된다. 즉 정신분석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면 그들은 마치 종교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정신분석을 통해서 자기(自己)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거나, 종교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의 무의식이나 하나님은 그의 의식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실 두꺼운 유리 위에 앉은 때나 얼룩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않은 유리 위에 그것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금방 눈에 띄는 것이다. 더구나 투명한 수정 위에서는 그 어떤 얼룩도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발달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개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영혼이 발달해서 수용적으로 되면 수용적으로 될수록 그 영혼에는 더욱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마치 영리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성적이 좋도록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계절의 순환에 비겨서 말한다면, "밤의 항해"는 겨울에, 그것을 통한 재생(renaissance)은 봄에 해당된다. 이 이미지는 그래서 많은 신화와 종교, 그리고 입사식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들 신화를 보면 으레 어떤 영(esprit)이 어둡고 추운 나라(겨울)에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데, 그의 귀환은 곧 바로 새로운 태양()의 솟아남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이집트 신화의 호루스(Horus; 새로 솟아난 태양)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호루스는 오시리스가 "밤의 항해" 후에 다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꼬레(Koré)가 하데스에서 다시 솟아 나와서 온 자연이 다시 꽃피게 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추운 지방에서 돌아온 로엥그린(Lohengrin)역시 이렇게 태어나는 존재이다. 미트라종교(Milhraism)에서는 이것이 희생된 소의 피로부터 생겨나는 봄으로 표상된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한 겨울에 태어나서 부활절에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밤의 항해"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어들 속을 항해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아이로부터 성인이 될 때 그렇게 심한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 경우, 그 사람은 그의 존재의 영적인 변형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사회적이며 가족적인 태도를 나이가 들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페르조나나 콤플렉스,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정신적 결함 때문에 "밤의 항해"를 거쳐야 한다. 그 결함들이 청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함들은 그가 의식적으로 그의 태도를 새롭게 바꾸고, 발달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한편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는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밤의 항해"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내면에의 부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때 그런 사람들을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면 대단히 위험하다.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다. 외면적인 발달이 분석가의 요청에 따라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가들은 언제나 그를 믿고 따르는 피분석자의 내면적인 욕구를 존중하고 그에 맞추어서 분석을 진행시켜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회심(回心)이 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경우, "밤의 항해"는 대단히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이때 그는 함부로 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퇴행(退行)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의 정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 무의식의 부정적 요소들은 더욱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고 한다. 이 함정은 종종 너무나 교묘해서 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곧잘 빠져버리고 만다. 우리가 이 함정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퇴행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퇴행을 도약대로 삼아서 그 다음의 발달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물론 이 퇴행이 바람직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종교체험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가까이 나아갈수록,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많은 성인들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la vie en Dieu)이란 안전한 포구(浦口)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밤의 항해"가 이루어질 때, 이 항해는 우리 속에 "영적인 아이"(enfant spirituel)를 낳게 하며, 우리를 진정한 회심에로 이끌고 간다. 기독교에는 이 "어둠 속의 항해"와 유비적인 관계에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들을 모두 열거한다면 성서의 모든 구절들과 기독교 제의의 모든 절차들을 열거해야 한다. 사실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의 이 근본적인 진리, 즉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진리에 흠뻑 젖어 있다. 물론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도 누차 언급한 바 있듯이 기독교는 우리의 자연적인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서에도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영적 갱신에 앞서서 그 개인이나 집단 전체에 어두운 국면이 전개되는 예는 많이 있다. 노아의 홍수라든가 가나안복지 입성에 앞서 있었던 광야 생활과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겪었던 "밤의 항해"였으며,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들어갔던 사건과 욥의 고난 및 시편 기자의 고난은 한 개인이 영적으로 갱신되기 전에 있었던 "밤의 항해"였던 것이다. 정신분석은 현대인들의 무의식 속에서도 신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이 "밤의 항해"와 같은 상징 또는 이미지가 똑같이 나타난다고 말해준다. 그 상징들은 홍수, 사막, 암흑, 고통, 땅 속에 묻혀 있는 것 등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상징들에 언제나 정화(淨化)사상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한 개인이나 민족은 언제나 이러한 시련을 거쳐서 구원받고 있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보내졌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나타나는 노아의 방주는 어머니 뱃속을 표상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여기에서 방주가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무란 어머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새 인류는 이 방주로부터, 성령을 표상하는 비둘기의 메시지 다음에 태어난다.

우리는 이런 구조를 요나에게서도 발견한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갇힌 것은 그가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방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감금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1:3-5). 선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서 각자 그들의 하나님께 애원했다. 그러나 이때 요나는 그 배 밑창에서 잠을 잤다. 선장이 요나를 깨워서 그들과 함께 기도드리자고 했다. 얼마 후 요나가 이모든 사태에 대해서 책임 있는 것으로 제비 뽑히자 요나는 선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12) ‥‥‥ 여호와는 큰 물고기를 시켜서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였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과 삼일 낮을 지낸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그의 하나님 야훼께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2:2-6).

절망에 가까운 이 탄식은 결코 문학적이거나 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과 영 전체가 겪은 산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외침인 것이다. 이런 체험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똑같이 이렇게 외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가 이런 지경에 처해 있으면 그가 겪고 있는 일들을 합리적인 언설(言說)로 말할 것 같지는 않다. 누구라도 상징이라는 영원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밤의 항해"가 가지고 있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 항해 중에 있는 사람을 정신분석이나 신비주의에서 발견되는 "어두운 밤"에서 보다 훨씬 더 짙은 어둠 속에 잠기게 한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에게 개인적인 정화(淨化)를 이루게 해주는 것은 그들의 체험 속에서 발견되는 ''이라는 요소이다. 그들은 이 밤 속에서 그들의 삶을 뒤흔드는 시련이 왜 찾아왔는가 하는 사실을 따지기를 그만두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멀어졌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태까지 그의 영혼은 그를 어떤 목표에 인도해 주리라고 생각되는 길을 따라왔다. 그가 떼어놓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아무리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그 발자국들은 그를 그 목표에 다가가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듯이 생각된다. 여태까지 이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정화 작업에 깃들어진 선의(善意)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너무 자의적이며, 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것은 그의 계획을 틀어지게 하고, 고통과 불안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 밤인 것이다 ‥‥ 그의 영혼이 그 자신의 빛만 가지고서는 결코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서는 안 되는 그것이 그에게 계시되는 것은 바로 이 ''의 암흑 속에서인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도 이렇게까지 깊은 경지에 이르는 어둠이 찾아오지는 않지만, 이것과 비슷한 단계가 찾아오기는 한다. 이 단계에서 피분석자는 갑자기 그가 왜 분석을 받고 있는지, 무의식이 무엇인지,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하게 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그에게서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이 "어두운 밤"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어둠 속에서 부르짖었던 외침도 욥이나 요나의 외침만큼이나 가슴 저미는 외침이다. 예레미야 애가를 보면 예레미야의 영혼은 이 깊은 어둠 속을 들어간다. 이 어둠 속에서 그는 그 후에 나타나는 수많은 신비가들이 토해내는 목소리로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는 것과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행위를 규탄하고 있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3:4-17). 시편 기자도 우리 삶의 이 깊은 고뇌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심연 속에서 나는 야훼께 부르짖고 있습니다"라는 절규가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빛이 숨어 있는 곳은 언제나 어둠이 가장 짙게 깔려있는 그곳이다. 우리는 우리 삶 어느 곳에서나 대극(對極)의 역설을 발견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바로 이 대극의 법칙 위에 서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시편 22:11~13).

이 말씀을 분석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집단무의식의 상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 말씀은 또한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22:14~15).

그러나 가슴을 찌르는 듯한 이 외침 옆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믿음과 구원의 소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시편 40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읊고 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40:1~3)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시편 구절은 대단히 많이 있다. 이제 시편을 그만 뒤지고 욥기를 살펴보자. 욥기 전체는 "밤의 항해"가 그 주제로 되어 있다. 욥과 더불어서 우리는 소위 "의인의 고난"이라는 신비스러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욥은 그의 영혼이 정화되기 위해서 가장 깊은 비탄에 잠겼던 인물이다. 욥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의 가족, 재산, 건강, 친구,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까지 빼앗겼다. 욥은 혼자였다. 가공할만하게도 혼자였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7:1-6). 욥이 외친 소리이다.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이 서사문학의 중요한 모티브는 밤과 어둠이다. 그런데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랄지 못한다면, 욥이 당한 이 시련은 아무런 의미도 있을 수 없고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그럴 수가 없다. 우리 영혼이 이 고통을 거치면서도 거듭날 수 없다면 그것은 차라리 이 고통의 절정에서 사위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막다른 경지에까지 밀어 넣으신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부서지고, 소멸되려고 한다. 우리 영혼은 그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태에서 느껴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도덕적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그를 버린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그의 영혼을 괴롭힌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말로도 이 상태를 표현해 낼 수가 없다. 이 상태는 고통의 극치인 것이다. 그 자신의 실체까지도 모두 으깨어진 그 존재는 이제 액화(液化)되어버린다. 이때 고통을 받는 것은 그의 육체만이 아니다. 그의 영혼 역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있다. 그 영혼의 고통이 없다면, 그의 육체의 고통은 그리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실체를 보시고자 한다. 그의 영혼을 당신의 불로 태우시고, 살리시는 것이다.

"밤의 항해"는 아무리 잘 묘사해도 결코 제대로 묘사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려면, 그것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 이 단계를 체험해 보지 않고 욥기나 시편, 예레미야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소용이 없다. 고작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밤의 항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이나 철학적인 측면 또는 문학적인 미() 밖에 없다. 그래서 뽈마리 드 라 크르와(Paul-mane de la Croix)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욥의 절망과 회한의 절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정말 막다른 골목에 처해보고, 치료 불가능한 우울 속에 빠져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신약성서에도 이에 대한 비유는 많이 있다. 왜냐하면 "밤의 항해"란 매우 의미심장하고 가치 있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성육신과 부활로 표상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떻게 보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밤의 항해"이다. 하나님 자신이 물질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거룩하게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밤의 항해"이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나사렛에 은거(隱居)하신 것이나,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것,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찬 기도, 그의 수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무덤에 갇힘, 음부로의 하강 등 복음서와 기독교 전례에서 발견되는 이 모든 사실들과 상징은 "밤의 항해"를 말해 주고 있다. 어쩌면 사순절과 부활절에 연관되어 있는 모든 본문 구절들도 이에 맞붙여야하는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 없이는 아무런 기쁨도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기독교 교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성서의 본문을 글자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들어가 우리 몸으로 그 수난을 당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1:21-24). 분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을 행할 때 우리는 단순한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영화관에 앉아서 필름이 돌아가는 것을 맥없이 바라보듯이 자기 꿈이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나 행동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적용 없이 꿈의 해석은 아무 소용도 없고, 우리 삶을 더 낫게 하지 못한다. "밤의 항해"와 같은 시련은 그것이 우리의 영과 육을 변형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창조적일 수가 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얼마나 애통의 용광로에 넣고 시련을 겪게 하며, 그때마다 얼마나 많이 그들에게 찾아가시는가하는 사실을 말해 준다(40:10). 우리의 영혼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 자신이 정화되며, 신적인 삶에 자신을 개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의 심층에 내려갈 때뿐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우리 삶은 정화된다. 우리 삶은 언제나 우리 삶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내면적 요청을 따라서 그 모든 정황(情況)에 직면해야 한다"고 뽈-마리 드 라 크르와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통들은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많이 겪을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그것들이 깊을지라도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영혼에 걸림돌이 될 정도로까지 깊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잔인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이 행위 앞에서 우리 영혼은 비로소 어두운 밤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이것만이 우리 영혼을 변형시킬 수 있는 정화 작용을 하게 하는 것이다 ‥‥ 우리 영혼은 죽음 속에 내려가 보아야만 진정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다."

우리를 변형시키는 영혼의 정화 작용에 대한 사상은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이 사상에 신약성서는 희열에 찬 부활사상을 첨가시키고 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고난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되고,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허물과 잘못과 죄를 정화시키는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역시, 그것이 아무리 잔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기쁨으로 안내해 주는 절차였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탄은 결국 주에 대한 찬양(Alleluia)으로 응답되고,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치유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의 부활사상,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의 전적인 변형사상은 정화(purification)사상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만 초점을 맞추고, 고난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오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 이와 같은 사상은 로마서에서도 발견된다. 로마서 64절부터 6절 사이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4-6).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씨앗이 땅에 떨어져야 한다는 이 사상은 성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많은 신비사상가들의 저서 속에서도 발견된다. 즉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은 가르멜의 산길 이나 어둔 밤이라든지, 아빌라의 테레사의 이나, 아기-예수의 테레사(Thérèse de I' Enfant-Jésus)의 글 속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가톨릭 종교개혁자 이냐시오 로욜라 역시 유명한 영신수련(Exercices spihtuelle) 속에서 이 사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영신수련의 서두에서부터 로욜라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요구한다. 그 다음에 그는 우리 영혼이 용감하게 우리 내면에 내려가서 우리의 내적인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라고 권유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가장 섬세한 생명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악의 가장 내밀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내면의 무질서나 결함들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것들이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해야 한다. 그것은 다만 우리 속에 어떤 잘못된 음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확인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속에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왜 존재하고 있는지 파헤쳐야 하며, 우리 영혼의 심층을 파고들어서, 옛 자아의 형체를 부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겸손이라는 든든한 기초가 세워지고, 그 위에 새로운 삶이 건립될 수 있는 것이다. 융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그림자"의 여러 측면들을 각성(prise de conscience)하고, 그것들을 통합(intégra- tion)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신수련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의 지도 아래서 수행된다. 영신수련 과정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나아간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자 그 길을 들어서는 것은 참으로 ""을 지나가는 작업이다.

정신분석에서 거치게 되는 "어둠 속의 항해"는 영신수련에서의 항해만큼 깊을 수는 없다. 그것은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어두운 밤"과 비교해서 그 영적 깊이나 높이에까지 다다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도 인간적인측면에서 그것을 미리 준비하게 해 주며, 미리 형상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초자연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이 우리 영혼과 더 깊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 영혼을 체험하듯이, 무의식이 우리 존재를 체험하고 변형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융이 "정신분석이란 일종의 구원이다"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정신분석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분석이란 실제로 영적 발달을 위한 부름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깨우치고, 당신께로 부르시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처럼 "밤의 항해"에서도 우리 영혼과 하나님, 또는 우리 영혼과 무의식 사이에서는 긴밀한 협조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 의식(leconscient)에서는 일종의 수동성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의식은 무의식의 충고를 따라가야 하며, 무의식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사로잡음 앞에서 겸손하게 꿇어 엎드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수동성과 굴복은 이상하게도 우리 자신에게 대단히 역동적인 작용을 한다.

"하나님의 선물과 인간의 행동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일관된 법칙이다. 이런 법칙을 따라서 우리 영혼이 정화됨으로써 우리 내면에는 새로운 기초가 다져진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정화 작용 역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협업(協業)의 열매가 아닌가? 정말 하나님이 이 과정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 역시 정화과청 전체 속에서 완전히 수동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

신비주의에서 "어두운 밤"이 영원한 부활을 위해서 신비주의자들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 간다면, 정신분석에서 "밤의 항해"(traverses nocturne)는 자기(自己)의 상징인 "영적인 어린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변형시킨다. 그런데 의식과 무의식의 하나 됨은 우리가 남성인 경우 우리의 아니마(anima)를 통합시키지 않는 한-여성인 경우 아니무스(animus)-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영혼의 변형에 관해서 살펴보려면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관해서 먼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2-6장 밤의 항해-영혼의 어두운 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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