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  아니마-아니무스 : 에로스와 카리타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고찰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집단무의식(inconscient collectif)에 더욱더 깊숙이 들어가게 한다. 그런데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와 같은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우리는 내면적인 체험,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밖에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 영혼의 무의식적 구성 요소가 대극의 법칙(la loi de polarité)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융은 그의 오래고, 끈질긴 연구 체험을 통해서 남성과 여성 속에는 그들의 성()과 반대되는 정신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그는 남성 속에는 수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성(féminité)이 들어 있으며, 여성 속에는 씩씩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남성성(masculinité)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융은 전자를 아니마(anima), 후자를 아니무스(animus)라고 불렸다. 인간 자아의식의 대극적인 축으로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무의식속에 깊이 잠겨서, 자동성(自動性)을 가지고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무의식 속에서 하는 일은 의식이 거의 발달시키지 못했거나 전혀 발달시키지 못한 기능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의식이 사고(pensée), 감정(sentiment),직관(intuition), 감각(sensation) 등 네 가지 기능을 원활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네 가지 기능은 에난시오드로미(énantiodromie) 법칙을 따라서 언제나 하나의 쌍을 이루면서 작용한다. 즉 사고와 감정이 하나의 쌍으로 작용하고, 직관과 감각이 또 다른 쌍을 이루어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융은 사고와 감정을 합리적인 기능, 직관과 감각을 비합리적인 기능이라고 말하였다. 이 네 가지 기능은 서로 대극적인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고(思考)와 감각(感覺)을 많이 발달시켰을 경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과 직관의 기능을 배척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날 이렇게 배척당했던 감정과 직관 기능이 그의 의식적인 삶에서 자기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경우, 이 기능들은 그의 삶 전체를 어떤 심각한 문제 속으로 이끌고 간다. 다만 그가 그의 정신의 모든 상황을 명확하게 각성하고, 그에게서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정신 기능들을 자기 정신의 전체 체계에 통합시켜야만 이 부진한 기능들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문제로 돌아가자.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융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 영혼의 본질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융에 의하면 남성의 영혼은 여성적인 것이고(아니마), 여성의 영혼은 남성적인 것을 알 수 있다(아니무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무의식적 요소들은 외부 세계에 투사(投射)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투사(projection)현상을 아니마-아니무스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매우 복잡하게 나타난다.

안드로진(androgyne: 兩性俱有)에 관한 믿음은 인류에게 매우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존재는 태초에,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서 자웅동체(雌雄同體)였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드로진은 태초의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 죄, 즉 교만 때문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서 그의 통일체(I' unité)도 훼손되고 말았다. 인간이 한편으로는 남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으로 나누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이해로 인간의 실존은 그의 반쪽을 찾아내어 잃어버린 통일체를 이루려는 복구 작업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과 하나가 되고, 여성은 남성과 하나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성을 이루려는 작업은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외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복구 작업이 진정한 것이 되려면, 그 작업은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복구 작업에 나서는 사람들은 그의 정신이 발달해감에 따라서 먼저 그의 내면에 영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각성하고, 그의 영혼을 인식하여, 그 영혼과 하나가 된다. 즉 그의 내면 속에서 태초의 통일체를 복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신화와 설화는 대단히 많다. 그 가운데서 플라톤의 향연(Le Banquet)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일종의 안드로진이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두 종()으로 이루어졌었는데,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안드로진은 오늘날 평판이 좋지 않은 이름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 그들은 공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거동도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들도 그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범한 힘과 기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용감했기 때문에 신들을 공격했다. 호머(Homere)가 에피알트(Ephialte)나 오토스(Otos)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그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오려던 이들에 관해서 읊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제우스는 이 사례에 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다른 신들과 함께 토의했다. 이때 사태는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때 신들은 그들이 지난날 거인족(les géants)을 죽일 때처럼 인간들을 천둥을 가지고 일거에 죽여버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죽여버리면 신들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바치는 제사도, 예배도 받지 못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들은 인간의 이 오만불손한 태도를 용서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제우스는 하나의 편법을 찾아내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인간들이 더 이상 방종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을 죽이지도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들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약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더욱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둘로 쪼갤 경우 그들의 숫자는 두 배로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신체가 그렇게 두 부분으로 분할되면, 나누어진 그 반쪽들은 다른 반쪽들을 그리워하며 나머지 반쪽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 이때 사람들 속에서는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이 움트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그의 본성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이 두 존재를 녹여서 하나로 만들고, 분열되었던 인간의 본성을 치유시키기 때문입니다.'"

연금술(alchimie)에도 이런 사상이 나와 있다. 연금술에서 발견되는 왕과 왕비, 해와 달 사이의 모든 작업 과정 역사 융합(conjunctio)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것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과정을 이 상징들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습은 "연금술에서의 안드로진"으로 이미 표명되어 있는 통일체이다. 한편 고대 신비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성혼(神聖婚: hieros-gamos) 사상도 이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기독교 전통에서도 아담과 이브는 본래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문제를 살펴볼 때, 우리 속에는 우리 속으로 돌아가서 통일체를 이루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는 그의 반려자와의 외적인 통일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사랑이 문제시 된다. 둘째는 그 자신의 영혼과의 내면적인 통일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에게는 정신적인 발달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 이 두 측면은 결코 분할되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한쪽이 시련으로 작용하여 다른 쪽이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우리 자신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시키는 한, 그 사람이 우리 눈에 대단히 귀중한 존재로 보이게 되고, 우리가 그에게 상당히 의존적으로 된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라고들 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사랑의 열정에 사로 잡혀서 그 열정에 전적으로 지배받고 있으며, 그가 사랑하는 사람(또는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는 백번 올은 말이다. 이때 그 사람은 그가 자기 영혼의 일부분을 그의 밖에 투사시켜놓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성숙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좀 더 깊은 의미의 문제에 관해서는 눈을 감고 만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에는 열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투사시키고 있는 모습과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특성이 우연찮게도 들어맞는 경우, 그것은 행운에 속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파열은 생겨날 수 있다. 그가 상대방에게 투사시켰던 것들을 거두어들이거나, 어떤 오해 때문에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그 불화가 점점 커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상대방에게 투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경우,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은 그가 오랫동안 꿈 꾸어왔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을 수가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가 바라마지 않던 모습을 이제 더 이상보여주지 않을 경우, 그는 그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해서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회한과 비탄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들들 볶으면서 그 사람이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습들을 되찾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그의 불행의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킨다. 이때 그는 각성해야 한다. 즉 상대방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가 그의 아니마(또는 아니무스)를 그에게 덧입혀서 자기 멋대로 상상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결합에는 언제나 투사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이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언제나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의 그 많은 이별과 이혼, 심지어 범죄까지도 투사라는 마술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실이 정말 어떤가하는 것을 분석해 보는 일이 우리가 이 투사에서 풀려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투사 작용은 우리에게 열정을 가져다주고, 때때로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또한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기도 하며, 놀라운 일을 가져다준다. 어쨌든 투사는 우리의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 즉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자원에서의 사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투사에 관해서 알려면, 실제로 투사 작용을 일으켜 보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투사에 직면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극복하는 대상에 관해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내면에 있는 정욕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그 정욕을 실제로 체험해 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내면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각성하고, 우리 속에 있는 아니마(또는 아니무스)의 실체를 정면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앞에서 우리는 위선적으로 정숙한 척해서도 안 되고, 문제의 성적이며 감각적인 측면을 승화시키려고만 해서도 곤란하다. 오히려 P. 레가메(Régamey)가 말했듯이 있는 그대로 발가벗겨서 마주 보아야 한다. 레가메가 "발가벗긴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가 물질적인 면, 육체적인 면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성화(sanctifier) 시키기 위해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많은 분석가들은 우리가 그림자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려면 우리가 그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살려고 한다면, 그림자는 어느 순간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 그림자를 완전히 각성하고 그것을 우리의 외면적인 삶에서는 물론 정신세계(psychisme) 내에서도 통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그림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림자를 산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우리 바깥에 있는 다른 대상에 투사시켜 놓는 것이며, 또 다른 새로운 콤플렉스들을 낳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를 승화시킨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림자의 승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무리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그림자를 다른 어떤 것으로 치환(置換)시켜 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본래적인 통일체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반대 세력들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그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우리를 발달시키는 매우 훌륭한 수단이 된다. 사랑은 그것이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라도, 다시 말해서 그것이 성욕이나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라도, 사랑은 이미 내적인 조화를 이루려는 무의식적인 추구인 것이다. 사랑의 본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악에서 파생되었거나, 그 본래의 원천에서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인간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로 하나가 됨으로써 사람들은 이상적인 통일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통일체란 그들이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담고 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가 쓴 매우 정교한 변증법을 통해서 이 사실을 기술했다. 그는 사랑에 많은 단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랑은 이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서 우리를 우리의 지성이 인도하는 곳보다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디오티모(Diotime)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사랑이란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와 불멸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사랑이란 우리 육과 영의 아름다음 속에서 태어나는 그 무엇이다 ‥‥ 이 속에서 우리는 신의 역사(役事)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은 생식(生殖)과 수정(受精)을 통해서 불멸성에 참여한다. 하지만 부조화 속에서 우리는 불멸성을 찾아볼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이 신적인 것과 잘 어울리는 반면에 추한 것은 신적인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 그런데 우리는 불멸에 대한 욕망을 선함의 욕망과 분리시킬 수가 없다 ‥‥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든지 사랑의 길이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에서 떠나서 초자연적인 아름다음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이다."

사랑의 단계에는 무한하게 많은 단계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단계들을 모두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두 종류인 에로스(eros)와 카리타스(caritas)를 구분하는 것이다.

에로스는 자연인(自然人)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으로서 아직 투사(projection)의 영역 아래 있다. 피조물이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에로스는 아름다음과 실수, 기쁨과 고통, 사랑의 성취와 비참함 실연(失戀)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카리타스는 초자연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투사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 땅 위에서의 환상(illusion)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리하여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헌신적인 정화된 사랑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카리타스가 결코 에로스의 억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욕 앞에서 유아적으로 도피하지도 않으며, 인간적인 사랑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 앞에서 퇴행하지도 않는다. 이 사랑은 사랑의 궁극 도달 지점이며, 온전히 성숙한 인간의 모든 기능이 신격화될 때 생겨나는 사랑이다.

에로스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으려면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자기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와 결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머니를 극복해야 한다고 창세기 신화는 말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 진리를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한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우리의 투사 내용들을 우리 인격 속에 통합시킴으로서 그 투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사의 회수 없이 우리가 내면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성숙되어 갈수록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사랑의 역할 및 가지를 좀 더 세밀하게, 좀 더 폭넓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 수준을 측정할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디 ", 당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드리겠소."

유아적인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다만 성적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아니다. 유아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성적인 것에 매우 강하게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아직 의미화 되어 있지 않아서 그들이 그들의 성욕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유용(有用)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욕을 억압하거나, 성욕의 노예가 된다. 또 어떤 경우 성욕을 왜곡시켜서 그들의 영혼에 커다란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카리타스로서의 사랑은 성적인 사랑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모든 투사가 사라진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투사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전혀 모르거나 잘못 아는 사람들은 투사가 그치게 될 때 사랑도 그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투사도 사랑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자유롭게, 정말로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했던 것들을 회수했을 때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희생적인 것이다.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 속에 있다. 하나님은 그가 생명이듯이, 사랑이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님보다 선행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 속에서 먼저 어떤 역할을 맡아 수행했으며,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사랑이 어떤 수준에 머물러 있든지 간에, 그것이 성실하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기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가치가 소멸되어버린 현대 세계에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시되고, 망각되었다. 사랑은 이제 그의 진정한 원천에서 차단되어 길을 잃어버렸고, 물질 속에 갇혀졌다. 사랑의 영적 불씨는 질식당하고, 암혹 속에 갇혀진 듯하다. 그러나 아직 꺼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와 그의 욕망은 우리의 영혼(àme)과 영(esprit)에 그 발걸음을 내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육체가 사랑의 한 요소이며, 사랑의 한 측면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위해서 육체가 배제되어야 하며, 사랑은 오직 우리 영에만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모순된 말이다. 이 말 대신에 우리는, 육체도 거기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육체 역시 우리 존재의 전일성(totalité)을 이루는 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의 사랑에서 육체가 해야 할 역할이 없다면, 그 사랑은 무엇인가가 결여된 사랑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육체가 영을 희생시켜서 우리의 사랑에 지배적인 역할을 할 때 생겨나는 것과 같은 결손 된 사랑인 것이다. 우리 육체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육체는 사랑을 단지 그 속에 가두어 두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의해서 조명(照明)되고, 인도받으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사랑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 이 둘은, 우리 육체가 진정한 사랑에 의해서 올바른 조화를 이를 수 있다면, 하나이다. 인간의 영은 물질 속에서 퇴화되고 갇혀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 영이 물질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물질을 정화시키고, 영성 화시키지 않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하다. 왜냐하면 물질은 결코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신화나, 문학, 예술, 종교는 물론이려니와 통과의례나 점성술도 그 많은 이와 유사한 상징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이 우리의 본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 상을 우리 속에 통합하는 것이 우리가 여태까지 설명해 왔던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사의 철회란 우리의 정신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다시 찾는 작업이 아닌가? 이 부분은 여태까지 우리에게 무의식적이었으며, 우리 바깥에 존재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지 못했던 우리 인격의 일부이다. 이 부분이 일단 풀려나면 이 힘은 우리 속에서 대극(對極)간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며 우리 속에서 "영적인 아이"(enfant spihtuel)를 낳게 해줄 것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 하지만, 우리의 영적 성숙의 조건이 되는 이 내면적인 통일은 자아중심성(egocentriste)이라고 하는 일방적인 내향성(內向性)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기는 커녕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 자아가 죽을 때 우리 자아는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되고, 다른 사람은 우리의 투사로부터 풀려난다. 이러한 투사의 철회야말로 우리의 인격이 활짝 피어날 수 있게 되는 기회이다. 우리 속에서 "영적인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행동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신분석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거짓된 자기"(faux soi)일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우리가 곁으로 어떤 단계에 도달한 듯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한 예로서 우리의 내면적인 발달이 순전히 지적인 측면에서만 이루어 질 때, 그것은 우리를 진정한 "자기"(自己)에로 이끌어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족감(自足感)을 가지게 된다. 이 자족감이란 여태까지의 분석을 통해서 얻어진 심리학 지식으로 포장되어 우리를 그 전보다 더 교묘하게 자만심을 가지게 한다.

"영적인 아이"의 출현은 우리에게 카리타스로서의 사랑을 가질 수 있게 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카리타스로서의 사랑이란 우리의 심리구조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듯이, "영적인 아이"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왕인 독생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한다.

특별히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는 우리가 여태까지 설명한 이 은총에 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도 사랑을 두 가지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또는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고, 다음으로는 이웃과 피조물을 위한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머무른다면,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사랑의 원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랑이란 그 목표인 하나님께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그리스도의 이 이중적인 명령은 사랑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의 진수가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에는 아무 복잡한 것도, 분열된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대상에만 복잡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원천은 하나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받은 은사에 따라서, 그의 본성에 따라서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이런 모양이나 저런 모양으로 베푸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인간의 사랑 속에 담겨진 신적 속성을 자신 있게 주장하며, 점차 물질화 되어가는 사람들 속에 사랑의 그 타오르고 빛나는 불꽃을 계속 살아나게 하려고 권고와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마치 태양으로부터 햇빛이 나오듯이 신적인 마음으로부터 사랑이 직접 흘러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비위나 맞추려고 하는 사탕발림의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진지하고, 죽기까지 자기를 내어 주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그의 한없는 자비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게 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리들, 즉 성육신, 성찬식, 그리스도의 고난, 구속(救贖), 부활 등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증언하는 교리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초라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 교리는 이와 같이 사랑에 매우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대로라면 인간 사이의 결합인 결혼역시 성례(聖禮)의 경지에까지 고양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예수님은 이미 가나의 결혼식 잔치에서 결혼을 성화(聖化)시키신바 있다. 예수님은 이 결혼 잔치에서 그의 첫 번께 기적을 보이셨으며, 나중에 생기게 되는 성찬식을 예비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볼 때, 우리는 에로스적인 측면에서의 사랑도 하나님께 봉헌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인증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니 기독교에서 이혼을 금하고 있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19:6).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 같으시고, 신실하시다. 결혼 관계가 결코 훼손될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랑이 이처럼 깊은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심오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독교에서 결혼을 이토록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합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5:28-33).

교회의 결혼식 예문 기도에도 이 같은 기독교 교리가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다; ", 하나님, 당신은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모든 남편과 아내를 서로 뗄 수 없는 도움의 관계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남편들에게 여자의 몸의 원리가 되도록 하셨고, 우리에게 이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통일체를 이루기를 즐거워하십니다 ‥‥ 오 하나님, 모든 아내들은 당신을 인하여 남편과 하나 되었으며, 제일 긴요한 결합체를 이루고 있습니다"(결혼식 예문).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사랑이 어떤 환상이나 투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성숙한 사랑을 지향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을 한 차원 더 높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 이런 사랑은 그렇게 많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순결을 지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혼으로 치닫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결혼의 이상을 지켜나가려면 우리의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욕구가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좀 더 현실적인 가르침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려면 우리는 먼저 인간에게 있어서 영이 하는 역할은 무엇이고, 육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따져 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육체가 거부된다면, 육체는 억압 때문에 강박증에까지 이르러 우리 삶을 온통 뒤흔들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깊이 헤아리지 않고 육체의 요청에 넘어가 버리면, 우리는 육체의 노예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육체가 발달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물질적인 측면, 즉 우리 육체는 더러운 것으로 정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용납되고, 우리 삶에서 올바른 자리를 차지해야한다.

물질과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쓰는 방식이다. 우리가 육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육신이 목적이 아니라 고난과 죄의 구속을 통한 부활이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물질적인 육체는 우리가 우리의 지상적인 삶을 정화시키는 시련을 이해하고 용납할 때 영광스러운 부활로 부름 받는 것이다. 우리 육체는 우리의 성화과정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동역자이다. 그리고 우리 육체는 영혼의 타오르는 불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 없이 살 수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육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는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réalité)이다. 우리 영이 담겨진 질그릇이다. 영은 우리 육체에 씨를 뿌리고, 그 씨를 죽여 싹이 돋게 하고, 육체를 경작한다. 그것은 마치 비옥한 땅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술가가 물질을 가지고 작업하듯이, 영은 육체 속에서 작업한다. 영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카라르의 대리석을 망치로 힘껏 두들겨서 작품을 만들거나, 일본의 예인(藝人)들이 스칠 듯 말듯 미세한 움직임으로 작업을 하듯이 우리 육체에 작업을 한다. 또한 영은 때로는 보석 세공사가 보석 세공을 하들이 우리 육체를 격렬하게 파헤치며, 때로는 열심히 우리 삶을 재단한다. 마치 반 고흐의 화폭에 햇빛이 작열하거나, 중세기 네덜란드의 채색 삽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열심히, 그리고 꼼꼼하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몸이 영의 작용에 순종하는 것은 예술작품의 재료들이 예술가의 손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러나 죄는 우리가 축을 벗으며, 본래의 원천에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영의 권유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영을 따르지 않으며, 영에 반항하고, 영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육체는 영의 도구가 되고, 영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그리고 영의 역할은 결코 우리 육체를 굴복시키거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육체를 지혜롭게 교육하고 이해하여 우리 육체가 더욱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육체가 우리 영에 봉사해야 한다면, 우리 영은 우리 육체가 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육체의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상징은 이 사실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바람-즉 영을 의미한다-은 그의 대극상(對極相)인 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았다. 그런데 물질과 육체는 최초의 상징인 땅을 가리키고 있다. 땅처럼 물질과 육체는 수용적이고, 유연하다. 그리고 우리 육체가 영의 방문을 달갑게 생각한다면 우리 육체는 많은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땅에 바람의 개입이 없을 때 땅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듯이 육체에 아무런 영적인 개입이 없을 때 육체는 아무것도 이를 수가 없다. 물질과 육체는 땅처럼 자기희생적인 요소인 것이다. 바람은 희생제의 제관이고, 땅은 희생제의 대상인 것이다. 모든 희생이 물질을 정화시키기 위한 시련이며, 우리 옛 자아를 더욱더 철저하게 벗기는 시련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생이란 결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을 통한 분리는 우리를 한 걸음 더 큰 연합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희생이라는 말의 기독교적인 의미는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성화시키는 것이지 물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은 영혼을 살찌우는 데 반해서 억압은 영혼에 해독을 끼친다"(G.띠봉). 여기에 탈육(deincamation)적인 개념은 아무데도 없다. 성육의 개념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어떻게 탈육이 가능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절대로 가치 평가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육체는 죄의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성령을 받았을 때 마리아는 그의 내면이 온통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대 내면의 열매다"라는 말이 있다. 정결한 여성이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이때 당황하지 않고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성령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수태하기 위하여 전인적인 존재 속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때 마리아가 느꼈던 전율은 그녀의 가슴을 흔들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영혼을 침체시키지도 않았다. 마리아는 이기적이지도 않았고, 허영에 들뜨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랑에 가득차서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 두 여자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오갔는가? 이 두 여자는 어떤 철학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는가? 아니면 어떤 중요한 개념들이나 느낌들을 주고받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때 일어난 일은 엘리자베스의 뱃속에 있던 선구자 요한이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성령을 만나고서 몸을 떨면서 생명의 각성을 했던 것이다. 성령이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내정이 온통 뒤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할 떼면 우리의 육체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반박할 수 없는 실례를 보게 된다. 이때 마리아에게 터져 나온 "마리아 찬가"는 이 사실을 말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언이다(1:46-55).

우리 몸의 반응과 동작들은 우리 영적인 삶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들 모두가 기도인 것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 안에서 우리의 육체적인 태도가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십니까(고전 4:19).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의 극진하신 사랑을 가지고 우리 몸 전체 속에 들어오신다. 그러나 이때 생겨나는 어려움은 우리 육체가 더욱더 정화될 때 생길 수 있는 어려움 보다 한결 덜 심한 것이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1:15). 여기서 우리는 모든 영적인 삶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신비인 정결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 문제에 관해서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라는 사실만 말해두자. 정결은 잘못된 점잖음이나 수줍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적인 덕성으로서 강하고 균형 잡힌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결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높은 인식이나 지혜와 관계있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물질과 영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교부들이나 교회 박사들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빵과 포도주를 변형시켜서 그의 육체와 피를 나타내게 했으며, 보리와 포도 넝쿨을 가지고 그의 현존을 본질적으로 말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있는 어떤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정신이 그가 아는 것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것으로 올라가게 하려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 옮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체험해 볼 수 있는 진리로 그의 몸을 불사르고, 그의 몸을 훈훈하게 덥히려 하는 것이며,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에 의해서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하게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심지어는 교회에 늘 출석하는 성실한 기독교인들까지도 신비주의의 용어가 이 점에 있어서 그렇게 "열정적"인 것을 발견하고서는 종종 깜짝 놀라고 가끔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은 한편으로는 우리 몸과 영혼의 관계에 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본성이 대단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들을 그렇게밖에 다루지 못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생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으면 그것이 어디서 생겨난 감동이든지간에 그와 비슷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쓰는 말에 있어서도 우리가 어떤 단어를 발음하면 그에 해당되는 물질적인 가정이나 영적인 감정이 불러일으켜진다. 언제나 우리 영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나 스스로를 들어내기 위해서 어떤 감각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이 비슷해 보이거나, 어떤 단어의 발음이 그 내용과 비슷하게 들릴지라도 그 자극이 처음 주어졌을 때의 의미와 원천 및 결과와는 언제나 같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지은 것으로서 사랑의 불타는 내용을 담고 있는 시구는 우리에게 어떤 감각적인 것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깨우쳐 줄 뿐이다. "당신은 왜 나에게 그토록 자비로운 사랑으로 은총을 베푸시나이까? 당신의 가슴에 묶여있는 나의 가슴은 사랑으로 불타오릅니다 ‥‥ 나를 당신 곁에 받아들여주십시오. 오 사랑이시여, 나를 언제나 품어주십시오. 사랑이시여, 나를 당신의 진리와 지고한 자비로 당신 안에서 변화시켜 주십시오."(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사랑의 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언어의 원천은 모두 이성인들의 언어 속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만 이 언어들을 빌려서 쓰고, 이 언어들을 왜곡하고 있을 뿐이다. 초월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이 부름을 알지 못하고, 사랑의 오고감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자연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할 뿐이다. 여기에서 오해가 생겨나고, 사랑이 부당하게 비판받는다. 우리가 신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면 이런 사랑에 관해서도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사랑에 관해서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의 노래를 들어보자.

 

"나는 살고 있지만 내 속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죽은 이래 나는 내 밖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래로 나는 주님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 나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나의 가슴을 바쳤을 때,

주님은 내 가슴에 이 문구를 새겨놓았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나는 갑자기 어떤 찌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투창이었습니다.

주님은 내 안에서 어떤 놀라운 큰일을 하셨습니다.

나를 찌른 그 상처로.

그 상처가 비록 치명적인 것이며,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주었을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화살을 쏘았습니다.

내 영혼은 내 영혼의 창조주와 하나 되는 계약을 맺었습니 다.

그 이후 나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랑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하나님께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은 나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사랑의 것입니다.

 

사랑으로 불타는 가슴은 행복하여라.

그는 하나님께만 눈길을 주고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 사랑의 타오르는 불꽃이여,

그대는 얼마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그렇게도 살며시 헤

집고 있는가?

, 달콤한 화상(火傷)!

, 감미로운 상처!

, 부드러 운 손길,

섬세 한 접촉이여!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시며,

생명을 위하여 나를 제물로 드리게 하여

내 모든 빛을 갚아주셨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깊은 동굴 속에서

빛나고 있는 불꽃이여

그대는 나에게 지극히 사랑하는 이의 특별한 빛과 따스함을 가져다 줍니다 살아있는 불꽃

 

이 세상에 아가서보다 더 열열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가 있을까? 그러나 아가서에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그리는 영혼의 사랑이다. 거기에서 노래되는 말은 이 땅의 단어들이지만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또 다른 차원에서 인식을 상기해 보자.

 

"그는 나에게 입을 맞춥니다.

나의 사랑하는 임은 내 가습 사이에 있는 몰약 봉지 같아라.

건포도 과자로 내 힘을 돋구어 주어요.

사과를 주어요. 기운 좀 차리게요.

사랑하다가 나는 병이 들었어요.

그는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시고,

오른 팔로는 나를 안아 주십니다.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합니다.

그가 남겨놓은 자취는 불길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으며,

강물도 그 사랑의 불길을 잡을 수 없습니다."

(아가서)

 

성령은 곧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의 불길로 사로잡는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카리타스로서의 사랑은 결코 하나님과 분리될 수가 없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지체인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전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자아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밖으로 널리 퍼지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헌신적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실제로 사랑하게 하며, 우리가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해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8, 13).

또 마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4~48)

그래서 빼랭(J.-M. Perrin) 신부는 "사랑은 모든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또 신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우리의 감정과 기쁨은 물론 우리의 의무와 근심까지 신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들로 하여금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몸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가슴을 이웃에게 열게 해주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산꼭대기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표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마치 친한 친구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말씀을 나눌 것이다 ‥‥ 라꼬르데르 신부는 '내가 하나님의 선성을 믿고 있듯이 나는 인간의 사랑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데 반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항상 실망시키지는 않는다는 데 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 인간이란 그가 매우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의 질그릇 같은 몸으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랑은 축복받은 것이다. 그는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지하게 사랑하며, 부패하기 쉬운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사랑을 한다. 또한 언젠가 끝나버리고 말 시간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랑을 믿고 있으며, 이런 사랑들을 알고 있다."

특별히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카리타스로서의 사랑은 에로스를 초월한다. 그리고 이 초월은 우리 내면의 꾸준하고, 힘든 노력을 통해서 평생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 그래서 라꼬르데르 신부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길은 사람이 그 위에 머무르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길 위에는 아무것도 완전한 것이 없다. 아무것도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복음의 온전한 견지에서 볼 때, 진정한 사랑이란 매우 드물게 존재하며,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절대적인 사랑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는 우리의 노력이 진지하고 너그러운 것이기만 하다면, 우리의 불완전한 노력을 보충시켜 주실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투사(projection)를 뛰어넘으며, 자유롭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우리 삶의 자연적인 차원, 즉 정신에 관여하면서, 우리가 투사를 철회하도록 도와주며, 우리를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 즉 초자연적인 삶의 영역으로 이끌어간다. 정신분석이 우리 삶의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요청을 어느 정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이 교회로 하여금 우리 정신의 여러 가지 얽힌 맥락들을 따라가고, 규명해낼 수 있는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카리타스는 어느 정도 사랑의 최고봉인 순결성을 나타낸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이는 도달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랑이다. 정결과 순결은 하나님과의 관련 아래서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들이다. 이것들은 결코 당위적이거나 과시적인 수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과 그의 창조주 사이에서 스스로 결심하는 것이다. 아무도 이것을 밖에서 부과할 수가 없다. 자신의 선택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억압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성에 대한 문제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아직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그의 완전한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하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의식한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아성이란 단지 아직 검증되지 못한 순결성만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순결성이란 높은 경지에서의 성숙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육체의 본성과 육체의 욕망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거기에 대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의 순결 표방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자연히 우리 삶은 우리 삶 자체의 모호함과 비열함에 빠져들어 초라한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유아성이란 모호성과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모호함이란 언제나 우리가 잘못된 이상주의로 치장된 어떤 것에 무의식적이며, 과도하게 집착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순결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자기 몸을 잘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앞으로 그의 본능과 싸우고, 본능을 통제하며, 다스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본능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들이 더 큰 사랑을 위한 디딤돌이 되게 하고, 더 본질적인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준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의 부름은 결코 우리 본성을 분쇄하도록 하지 않는다. 동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결코 성적인 불구자들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그 열정 덕분이다. 사도 바울이나, 십자가의 성 요한,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성 이냐시오 로욜라 등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얼마나 열정적인 기질의 사람들이었는가?

이런 의미에서 띠봉(G. Thibon)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인간의 성()은 운명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선택아래 놓여 있다. 영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고 극복하거나, 영의 죄 때문에 방탕의 길로 나아가는 길 둘 밖에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우리 리비도가 내면적인 필요에 의해서 우리 내면의 대극을 조화시켜서 변화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 길,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인 순결성은 정신분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초자연적인 길이다. 그것은 결코 좌절도, 착취도, 거세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그의 영혼이 만개(滿開)하는 것이다. 독신자들은 하나님과 결혼한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그들의 모든 노력의 목적이다. 순결성이란 일종의 금욕이다. 그것은 육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와 관계한다. 즉 마음과 생각과 영혼 모두가 순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빼랭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순결의 가치를 말한다고 해서 우리 육체와 마음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순결이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하나의 길로서, 순결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좀 더 높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신 속에서 행해져야만 가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정상 가까이에 와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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