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자기(自己): 통합

 

 

 

 

개성화 과정의 목표인 자기(le soi: the self)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격의 대극들이 점차적인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씩 하나씩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기에 도달한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온전성의 원형인 본래적인 안드로진(androgyn; 남성과 여성이 한 몸으로 되어 있는 신화적 이미지-역자 주)을 회복하는 것이다. 안드로진이란 우리의 내면과 외부가 조화상태에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우주 전체와 조화되어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自己)가 자연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고, 순전히 인간 정신의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는 결코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개념이 아니다. 융은 언제나 자기의 범주를 지키고, 그의 경험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도 인간 삶의 종교적인 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 현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어떤 혼돈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별히 자기(Self) 경우가 그랬다. 융은 예수님이 붓다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은 이였고 비전(秘傳)을 전수받은 이였다는 점에서는 심리학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의 믿음과 성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위와 같은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은 용어 사용의 문제이다. 그러나 융은 언제나 하나님과 자기(自己)를 혼동해서 말한 적이 없다. 용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혼과 영혼의 원형들을 창조하셨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이미지이며, 하나님이라는 이름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성스러운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혼동하는 일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나의 비판자들은 아직 자기 원형이 가지고 있는 성스러운 특성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원형의 성스러운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자기 원형의 신적 능력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상징이 하나님이 아닌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만다라는 어떤 원형에 대한 초월적인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自己)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비슷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신학자는 틀림없이 분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대체물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나의 그런 해석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하고 놀라워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한 사람의 심리학자로서 내가 말하는 하나님은 심리적인 이미지이지 진짜 하나님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기(Self) 역시 인간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심리적인 이미지이며, 어떤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묘사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자기가 서로 비슷한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을 안다. 이 상징들은 너무 비슷해서 구분할 수가 없다. 심리학은 이 이미지들이 우리 삶의 체험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 그리고 이 상징들의 행동과 작용은 우리 삶의 상황 속에서 비교되고 연구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 과연 진짜 하나님을 다른 것과 대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듯이 함부로 다를 수가 있겠는가?나는 하나님을 다른 어떤 대치물로 대체시켜 놓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대체시킬 수 있겠는가? 단추를 잃어버렸다면 그것을 새로 사야지 상상 속에서 상상의 단추로 대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 그것이 살아있는 내 실제 모습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보가 아니다."

결국 융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다만 각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각 시대와 문명과 문화권에 따라서 달라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의 투사상이다. 융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이미지를 통해서 뿐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융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한다면 그가 바로 이 이미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를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내재적인 존재에로 이끌고 가며, 우리의 정신 영역이 더 광범위하고, 더 심오한데도 심리학적인 탐구를 원형적인 차원으로 제한시켜버린다.

자기(自己)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초월적인 무의식이 전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에게 접근할 때, 정신적 팽창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 한 정신분석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신분석이 영성에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기에게 도달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 무의식의 영적인 삶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 정신은 중심축을 잃게 되고,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잘못 하고 있는 여러 다른 충동 속에 녹아버려서 지리멸렬되고 만다. 우리 정신은 그 요소들이 서로 흩어져 있는 퍼즐 놀이(큰 그림을 조각조각 잘라놓고 원래 모습대로 맞추는 놀이-역자 주)와도 같다. 우리 정신을 좀 더 냉철하고, 명료하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서로 대극 관계에 있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무관하게 지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분석이란 이 퍼즐놀이 조각을 매일매일 제자리로 옮겨 놓는 작업이다. 우리의 분석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서로 무관한 듯이 보이는 퍼즐 조각들의 의미는 분명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더 잘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그 전까지 분산되어 있던 의식과 일방적으로 발달해왔던 정신은 인격의 중심을 축으로 해서 가운데로 모아지게 된다. 우리 정신은 다시 중심을 잡게 되고, 수많은 대극적인 요소들이 통합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통합을 향한 재중심화가 바로 자기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재중심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대극의 법칙을 따라서 운행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통합되고 만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정신적인 실현으로서의 자기는 거기까지 작동한다.

그러나 자기는 인간 정신의 원형으로서 더욱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통합이 무엇보다도 강력한 내면적 요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몸으로 체험한 다음에, 그리고 이 통합은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통합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통합 그 자체, 다시 말해서 우주 전체의 본래적인 통합 상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즉 전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신 "통합 그 자체"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신분석을 통한 인격의 발달은 우리들에게 우리 삶의 본래적인 원천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부조화와 잘못된 길로부터 출발해서 이제 내면적인 조화를 되찾고, 내재적인 것들로부터 출발해서 초월적인 것들에 도달하며, 인간과 본래적인 통합 상이신 하나님과의 통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전일적인 존재이며, 모든 통합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모든 통합 작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自己)는 전일성의 원형이며, 우리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합의 상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통합을 생겨나게 하는 실재(réalité)이다. 자기 상징은 화해의 상징(symbole de reconciliation)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정신 속에 있는 수많은 대극들을 조화롭게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정신 속에 있는 네 가지 정신 기능들인 사고(pensée)와 감정(Sentiment), 직관(intuition)과 감각(Sensation)을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에로의 길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저 본능적인 피조물이나 영혼을 상실한 존재로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영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을 조화시켜서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긴장을 십자가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골고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고와 감정, 영과 영혼, 의식과 무의식, 아니마와 아니무스, 잘못과 용서 등 모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인정받고 내면적으로 용납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의 '편협한 자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한 껍질은 깨어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주 전체와의 실제적인 관계가 우리의 내면에서, 또한 외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렇게 통합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다시 기독교의 성육신 사상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융에게 있어서 이렇게 대극들을 조화시키는 것이 개성화의 목적인 반면에 영이 물질 속에서 육화되는 기독교의 성육신은 물질이 영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첫 번째 발자국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자기 개념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대극의 통합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통합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물질적인 것의 본질적인 역할은 영적인 것에 의해서 희생되는 것, 다시 말해서 궁극적으로 성화되는 것이다.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은 대단히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 융은 사위성(四位性: quatemité)에 관한 것을 가장 많이 예로 들었다. 특히 사위성과 원형이 합쳐져 있는 만다라의 예를 많이 들었다. 그와 반면에 그는 그의 경험을 통해서 삼위성(三位性: trinté)은 자기의 온전한 충만성(complétude)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삼위성은 오히려-항상 그렇다고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아직 검증 되지 않은 완전성(perfection)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성에는 사위성이 나타내는 전체성에 도달하기 위한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출발점으로 해서 융은 삼위성과 사위성에 관한 상징주의를 많이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겼다. "사위성이 우리 정신의 가장 완전한 모습인 자기의 상징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는데 기독교 교리는 어떻게 해서 지고자(至高者)를 삼위일체로 나타내게 되었을까?"

그래서 융은 그 이래로 "두 가지 작업에 매달렸다. 우선 그는 한 사람의 심리학자로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주장하고자하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다음에 기독교 교리 속에 사위성에 관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가 하는 것에 관하여 탐구하였다." 이런 연구 속에서 융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등 고대 종교 속에 나타난 삼위성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융은 삼위성에 관한 원형을 가지고 삼위일체 개념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그의 잘못이 있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삼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체성인데 그는 삼위일체를 삼위성으로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추(類推)가 심리학적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몰라도 초월적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의 이런 혼동은 너무 결정적인 것이라서 우리를 종종 당혹시키고 있다. 아무리 신앙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삼위일체에 관해서 설명하는 말씀들을 보면, 그에게 하나님의 게시가 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체성에 관해서는 그의 지적 판단으로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융은 신의 내재성과 삼위일체의 상징적인 의미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우리 신앙 속에서 구별되어 생각되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우리의 신앙발달단계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은 이런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투사해 놓은 세 모습으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 융의 주장에 의하면 삼위일체 개념의 기반을 형성하는 원형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심리적인 실재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융이 말하고 있는 삼위일체란 사람들의 주관적인세계가 형이상학적인 수준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주체가 그의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말이다."

삼위성이란 언제나 서로 다른 세 가지 요소들? 즉 세 사람이나, 서로 다른 세 본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남성과 여성 및 그 남성과 여성을 중재해 줄 수 있는 중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고대 신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그 유명한 삼신론 역시 신, 여신, 아들 신 등 세 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신()에게 아무리 비슷한 운명이 닥쳐올지라도 이 세 신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존재로 그 운명을 극복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이와 전혀 다르다. 여기에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고, 남성과 여성을 통합한 존재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은 오직 한 존재이고, 하나의 본질, 즉 신의 본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어떻게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가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오성(entendement)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이며, 하나님의 신비인 것이다. 삼위일체와 삼위성의 본질적인 차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글로는 "성 아타나시우스의 상징"(Symbole de Saint Athanas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글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즉 우리는 그 안에 삼위성이 통합되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본질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성부 하나님의 위격과 성자 하나님의 위격, 성령 하나님의 위격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모두 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에게서는 그 영광이 언제나 똑같고, 위엄이 똑같이 영원하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이런 분이시다.

성부는 피조되지 않으셨다. 성자도 피조되지 않으셨다. 성령 역시 피조된 분이 아니시다. 성부는 무한하시고,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시다. 성부는 영원하시고,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시다.

그러나 세 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한 분이 영원하신 것이다. 세 분이 피조되지 않으신 것이 아니며, 세 분이 무한하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한 분만이 피조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분만이 무한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부는 전능하시다. 성자도 전능하시다. 성령도 전능하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능하신 분이 셋인 것은 아니다. 오직 한 분만이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성부이시다. 하나님은 성자이시다.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세 분이 계신 것은 아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성부는 구주이시다. 성자도 구주이시다. 성령도 구주이시다. 그러나 우리 구주가 세 분이 될 수는 없다. 오직 한 분 구주밖에 없다.

우리는 기독교 진리를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구주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세 분이시고, 우리 구주가 세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부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 피조되지도 않았으며, 어느 누구로부터 태어나지도 않았다.

성자 하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만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것(procéder)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 성부만 계시지 세 분 성부가 계신 것이 아니다. 세 분 성자가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 성자만 계시고, 세 분 성령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 성령만 계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서 어느 분이 더 먼저 계셨고, 어느 분이 나중에 계신 것은 전혀 없으며, 어느 분이 더 위대하시고, 어느 분이 덜 위대하신 것도 전혀 없다. 세 분이 모두 동시에 영원하시고, 위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삼위일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전일성을 찬양하고, 전일성으로 나타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다른 종교의 삼위성과 혼동했기 때문에 융이 삼위일체 교리 속에서 다른 종교의 삼위성 체계 속에 나타나기 마련인 여성적인 요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놀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사위성만이 모든 것을 통합하고 있는 완전한 원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완전해지기 위해서 삼위일체에 결여된 제4의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융에게 있어서 제4의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원형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어느 것 하나라고 딱 잘라서 말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잠재성이 매우 풍부하고, 양면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가 하나님이고, 밝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4의 요소는 그의 대극인 사탄, 즉 어두운 그림자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주장했으며,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던 악에 관한 이론인 "선의 결핍"(privatio boni)에 관해서 융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논의해야 한다. 융은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악은 본질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악은 하나님 안에 선과 독같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하나님 안에서 선과 악을 분리시켰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 속에서 수 세기 동안 인간의 정신 안에서 이와 비슷한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의 존재에 있는 열등한 요소는 악이며, 그것이 악인 한 그것은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밖에 존재해야 한다. 융은 왜 언제나 이렇게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만 살펴보고 초월적인 측면은 살펴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그가 언제나 관심을 인간에게 두었고 인간에게서 그의 논의를 시작했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융의 생각에 의하면 선과 악은 인간의 정신 속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융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시며, 인간의 영혼에 그의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융은 삼위일체 교리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의 원리 또는 물질적이며, 여성적인 원리가 빠져있는 삼위성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빛과 남성의 원리가 있으며, 아래에는 물질과 여성적인 원리가 있다. 그 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둘의 중재자인 성자, 즉 중보자가 있다. 그런데 완전성과 성취는 삼위일체에 네 번째 원리가 도입될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그녀의 물질적인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던 것이다(여기서 융은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몽소승천한 가톨릭 교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역자 주). 이처럼 하늘의 왕과 왕비는 아들에 의해서 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네 번째 요소는 사탄이 될 수도 있고, 성모 마리아가 될 수도 있다. 즉 모든 원형상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양가적(ambivalence)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원형적인 것들 속에 있는 양가성은 남성적인 상징 속에서는 공기나 불 가운데 어느 하나로, 또한 여성적인 상징 속에서는 땅이나 물 가운데 어느 하나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이 양가성이 동시에 남성적인 원리(공기)인 사탄이나 여성적인 원리()인 마리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어떤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구분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융이 말하는 자기와 사위성 및 삼위일체 개념에 어떤 혼동이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혼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혼동과 불명확함은 우리가 이 세 개념을 모두 그 개념들이 각각 서 있는 존재의 지평 위에 서게 할 때 사라진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지평 위에서 파악해야 하고, 피조물들은 피조물에 맞는 지평 위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융이 이 후자를 내재적인 차원, 인간적인 차원, 우주적인 차원에서 밖에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융은 그의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혼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그 주제를 거기에 맞게 한정시켜야 하고, 만약 심리학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주제나 신앙 또는 신앙에 관계되는 진술을 할 때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융이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설정했던 출발점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여 해석했다. 하나님에 관해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에 관해서 연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그 교리가 표방하는 정신적이며 상징적인 내용 위에 있는 것을 파악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단지 사람들이 "정신 구조에 대한 언술" 로서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오해가 생겨나고 심각한 혼동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은 단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성찬식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현존의 실재성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 교리 역시 인간의 정신 구조를 나타내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교리는 오히려 우리를 그 상징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하는 진리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융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들에 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오해에 관해서 비판함으로써 그 오류를 바로 잡으려고 할 수는 있는 일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는 레오나르(P. A. Léonard)가 쓴 논문 한편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논문에서 레오나르는 모든 심리적인 사실은 그 사실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분리되어서 그 사실만을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그 사실과 대상 전체를 같이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나 신비주의와 관계되는 심리적인 사실은 그 체험의 초월적 대상인 하나님과 결코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레오나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종교현상은 거기에 아무리 심리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연관시키지 않고서는 그것을 모두 언급할 수가 없다. 철학사가 철학자에 관한 언급을 통해서만 기술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발달사도 신비주의자들의 체험을 통해서 밖에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비주의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 나름대로 어쨌든 하나님을 함축적으로나마 증거 하는 것이다." 다시 융에게로 돌아가자면, 기독교 신앙에 관한 융의 근본적인 오류는 그가 비록 성실한 학자로서 종교에 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어떤 천재적인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 실재성에 관해서 융이 지적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어거스틴의 학설에 관해서 비판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위에서 많이 언급했다. 또한 그가 사탄에 관해서 말을 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와 대적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의 아들이며 사탄과는 구별되는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사위성에 관해서 말을 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그 문제에 관해서 좀 더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삼위일체에 관해서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융에게 있어서 사위성이란 언제나 피조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전일성(全一性)을 나타내는 원형이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은 융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상징은 신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위성이란 우주 속에서 신적인 것을 나타내는 어떤 표현이지 하나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참으로 사위성이란 이 세상에 나타난 신의 모습이며, 신의 이 세상적인 실현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위성은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이며, 피조물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생각해야지 하나님 자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사위성이 종종 하나님 자체와 동일시되며, 내용물이 종종내용 그 자체와 혼동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구성물과 본질 자체를 구분해야 한다.

사위성의 상징과 자기의 상징이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상징과 동일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용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이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 무의식에서 생겨나는 상징과 초월적인 무의식에서 생겨나는 상징 사이의 유사성에 관해서 지적한 바 있으며, 집단무의식의 상징이 초월적인 무의식에 해당되는 상징을 불러일으키며, 초월적인 무의식의 상징이 집단무의식의 상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위성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인데 반해서 삼위일체란 하나의 이미지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esse)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으며, 자기(自己)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하나님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융의 약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융이 아무리 그 자신을 변호하고 있을지라도 그가 이 둘 사이를 종종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데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바로 이 둘 사이의 경계선에 있다. 따라서 자기가 이 둘 사이에 어느 하나에 멈추는 경우 자기는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지를 초월해야 한다. 사실 인간의 전일성은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적인 존재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로 초월하게 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전일성의 상징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하나님 자신의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우리들에게 하나의 상징으로부터 참다운 실체에로 이행하는 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삼위일체와 삼위성을 제대로 구분하기만 하면 우리는 쉽사리 그 두 개념은 모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삼위일체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며, 전일성을 이루고 있는 절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그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창조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실체이다. 사위성이나 자기까지 모두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 속에는 성모 마리아 역시 전일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삼위일체가 좀 더 온전해지려면 그 안에 물질적인 원리와 여성적인 원리를 통합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며, 하나의 통합을 이룬 것이라면 이제 더 통합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 문제에 관한 기독교적인 응답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전일성을 언급할 때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심리학적인 투사의 문제를 초월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답변은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속(rédemption)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계를 구원하시고자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자의 형태로 성령의 중재에 의해서 마리아 속에 성육하셨다.

사위성이 창조, 즉 성령에 의해서 이미 알려져 있던 이 땅(laterre)을 나타내고 있다면, 마리아는 대지인 성모(la terre-Vierge), 즉 창조 이전의 대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위성은 모든 피조된 것들인 하늘의 땅, 천체, 천사들, 아담과 이브, 인류 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성은 아직 창조되지 않았으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대지인 성모(la Terre-Vierge)를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다. 대지인 성모와 천지창조는 땅의 상징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측면인 것이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이 세상의 왕자이다. 그러나 그는 창조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천사적인 본성 때문에 지하적인 존재로 될 수는 없다. 언제나 공기(air)의 상징계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악의 원리이며, 교사자(敎唆者)이며, 유혹자이다. 그러나 그는 피조물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는 한 악을 만들어낼 수 없다. 교사는 물론 유혹할 수도 없다. 오직 죄 많은 피조물이 그의 꼬임에 넘어갈 때에만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물질적인 요소로 되어 있지 않다. 영적인 요소로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할 때는 언제나 악을 제안하면서 악을 도모한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아무 것도 실제로는 행할 수 없으며, 그가 꼬이는 대상의 동의가 없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인류라는 종()은 아담과 이브의 죄와 연대(連帶)되어있다. 그러데 때 묻은 존재에게서는 깨끗한 것이 전혀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라는 종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대지인 성모를 통해서 다시 나게 하셨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때가 묻지 않은 여성 원리이며, "영의 그릇"이며, "거룩한 장미"이며, "새벽별"이고, "천사들의 여왕"인 것이다.

태모(Magna Mata)인 성 처녀에게로의 복귀는 성모 마리아 이전에도 모든 종교나 입사식(initiation)에서 이와 같은 성격의 구원을 상징 언어로 나타내기 위해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마리아는 이 신화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완수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던 것이다. 여기서 이 주제에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밤의 항해"를 통한 정화 주제를 첨가시켜서 말한다면, "순결한 땅에로의 귀환 없이는 아무런 재생(再生)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 이 사실은 우리가 우주적인 어머니 안에서 다시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의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 사실을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면 벗어버릴수록 더욱더 깨끗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더욱더 잘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나님과 더욱더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정화를 위한 시련들은 이 목적 외에 다른 어느 목적도 거기에 있을 수가 없다.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 그리고 밤의 항해는 모두 마리아 안에서, 마리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마리아가 포함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제4의 요소를 첨가시켜서 창조를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융이 말하는 자기(自己)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우리는 자기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그릇"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그 자신을 사람들에게 인도하기 위해서 굳이 정신분석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단지 종교의 길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길은 대단히 많이 있으며, 우리가 그 길들을 모두 다닐 수도 없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많은 길 가운데 하나이며, 아직 진창 속에 빠져있고, 하나님의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통해서 매우 유용하고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가장 어둡고, 가장 왜곡되어 있는 길들을 깨끗하게 치울 수 있다. 그러면서 그 길을 밝게 하고, 곧게 하며, 정화시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 옛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껍질을 벗겨 버릴 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신앙의 복된 측면에 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에게서 빛이 소멸될 때 신비까지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죽어버린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무런 출구도 없다."

깨어져 있고, 분열되어 있으며, 중심이 되는 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전일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다시 발견하며, 새로운 인격의 중심 위에 에너지를 모으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심리적이며, 자연적인 차원을 벗어나는 작업이 아닐지라도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일단 인간적으로 치유되면, 그들은 다시 인격발달 과정을 밟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 은혜에 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극의 통합은 그들로 하여금 신적인 통일을 이를 수 있게 해준다.

정신분석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말해서 초신자들이나 이미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유용하고 구원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경험은 말해 준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면 성령은 왜 이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 병을 고쳐 주시며, 우리가 길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를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비는 그 성령이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 안에서 이 형상을 재구성하고 있는 자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오히려 우리들이 통합된 영혼을 가지고 우리 삶의 원초적인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우리 창조주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은 당신 이름을 찬양할 수 있도록 내 영혼을 통합하여 주셨나이다"(시편 85).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일성은 단순한 통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통합을 의미한다. 이 통합은 절대적인 것이다. 우리 경험은 이것을 지울 수 없으며, 이 통합은 우리의 오성을 넘어가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 모두 그렇듯이 이 통합은 우리가 우리 신앙을 가지고 파악해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 심리학이 이 통합에 관해서 탐구하고자한다면 심리학은 반드시 그 자신을 초월과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이끌어 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체험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서 종교적인 사실을 연구한다는 것은 우리 몸의 심장을 도외시하고서 피의 순환에 관해서 연구하고, 허파를 생각하지 않고서 호흡현상을 연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은 우리를 우리의 의식적인 지성이 애써서 설명하고자 하는 신비의 영역으로 단번에 데리고 간다.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자기(Self)란 그 도달 과정에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필요로 하는 개성화 과정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우리 속의 "영적인 아이"(enfant spirituel)는 밤의 항해를 거치지 않고서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합일 역시 우리가 어렵고 힘든 정화작업과 변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렇게 그 궁극적인 종착점에 도달하려면 변형에 필요한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일러 주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자연적인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상태로 나아가고,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 이행하며, 자기의 통합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에로 나아가려면 시련과 고난과 희생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정신분석은 그 실현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정화와 변형의 상징인 십자가는 동시에 그 절정과 부활의 싱징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모든 인류, 특별히 각자 한 사람 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합일은 우리에게 그 전에 심리학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자아 통합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그래서 예수님은 수난을 받으시기전, 하나님께 모든 사람들의 통합에 관해서 간절히 비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라고 편지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은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으며,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듯이 하나님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서에서는 흔히 결혼의 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과 비겨서 형상화하고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남편들이여, 그대의 아내를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시오"라고 권고하며, 결혼식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신비 속에서 혼인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으로 미리 형상화하시면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 사상에서 이러한 내면적인 통합은 언제나 금욕과 결부시켜서 말해져 왔으며, 많은 상징과 예화들을 통해서 형상화되어왔다. 성찬식 역시 이런 사상을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성찬식에서 모든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같이 나나누며 친교를 나누어 하나가 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몸과 피를 주시면서 그 안에 대단히 많은 분열된 요소가 결국에는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물질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많은 밀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밀가루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의 그 많은 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포도주입니다." 안티옥의 이냐스(Ignace d' Antioche)역시 "당신의 통합을 잘 간직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커다란 재산입니다"라고 말하고있으며, 성 시프리안(Seint Cyprien)은 하나님을 가리켜서 "우리를 통합시켜 주시는 주"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도 "이 통합 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며, 이 통합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고, 이 통합 속에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은 안정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평화 속에서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죄인들로 이루어진 이 땅의 교회도 지금 이곳에서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통합의 길에 나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이의 형제애는 우리가 이 통합을 이루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모두는 물방울 하나가 바닷물에 녹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 통합의 길에서 교회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밤의 항해를 해야 하고, 자기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작은 자아"가 죽고, 우주적이며 영적인 자아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격으로의 재생은 성서에서 옛 사람의 죽음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부활로 표상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3-11).

죄가 지배하는 곳에 하나님은 당신의 정결함을 가져다 놓으시고, 어둠이 깊은 곳 마다 빛이 비추어진다. 그 전까지 황폐했던 곳에 하나님의 현존이 함께 하시고 이제 영혼이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긍정적이며, 신적인 역사, 그리고 이런 놀라운 재창조, 처음의 창조보다 더욱더 놀라운 창조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

 

 

 2-8장 자기 - 통합.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