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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정신분석은 우리를 상징의 세계로 이끌면서 우리들에게 사물에 관한 더욱더 광범위하고 의미 깊은 이해를 가져다주며, 우리를 거룩성의 문덕으로 데려다 준다. 사실 풍부한 상징들로 가득찬 집단 무의식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원형의 그 강력한 힘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융이 말하는 심리학적이고 상징적인 인식은 원형의 영역을 넘지 못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원천으로 데리고 가지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우리가 얘기한 초월적인 무의식을 통해서 융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태초 이래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의 피조물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으며, 그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끌어 오셨다. 그러나 창조 세계에 드려진 하나님의 모습은 죄 때문에 어두워졌으며, 어두워진 영혼과 일탈한 지성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래서 물질 속에 사로잡힌 창조 세계는 이제 성령의 계시에 접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 인간의 의식은 아직 우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의식과 그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무의식과 완전히 "신비적인 참여"(participation mystique) 상태를 이루며 무의식 속에 잠겨있었다. 즉 육체 속에 들어간 영은 물질 속에 갇혀서 깊숙이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시며 완전히 물질 속에 갇혀있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참을성 있고 교육적인 방법으로 말을 거셨다. 여기에 쓰인 것이 바로 상징이다. 상징은 물질과 영을 이어 주는 매개체였으며, 진리를 담고 있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에게서 상징은 실재 자체로 생각되어 왔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을 보여 주는 징표나 상징으로 되는 것이다. 이 사실에 관해서 다니엘루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일러주시는 신호 체계라고 생각해야 한다 ‥‥ 우리는 이 신호(signe)들을 비인격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신호들은 단순한 하나의 신호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것들을 보여 주시는 이는 어떤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 알맞은 방식으로 이 신호들을 보내고 계시다 ‥‥ 매우 자주 이 신호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온다."

피조물이 물질 속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의식은 이 신호나 상징이 그에게 의미를 가지고 드러날 때 각성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에게는 단순히 물질적인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해 나가야 하는 임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추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인간 생명의 본질이며, 모든 창조 세계의 목적이자 궁극적인 종착점인 것이다. 까마득한 첫날부터 우주 전체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의 창조주를 열망해 왔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부터 말씀은 하나님이었고, 우리 인간과 하나가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되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 안에서 육화될 준비를 해오셨다.

"말씀이 성육되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은 결코 돌연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여태까지 이 세상은 그리스도 없이 지내왔으며, 이 순간에 그리스도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태초부터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니엘로 추기경의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상징적인 모습들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표상 가운데 숨겨져 있는 그 많은 외침들과 아우성은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이 욕망들을 드러내 주고 있는가?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이 영원 회기의 향수를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나 그리스 종교는 물론 수많은 비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내밀한 종교의식들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이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말해 준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생명의 원천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각성하면 각성할수록 그의 열망은 더욱더 절실해진다. 그가 더욱더 많이 알면 많이 알게 될수록 그의 창조주를 더욱더 잘 사랑할 수 있으며, 그의 창조주에게로 더욱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신약성서를 예시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고대세계에서부터 상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셨다. 그래서 고대 종교들 특히 비기독교적인 종교들도 이 유일한 진리의 싹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 종교들의 신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이 실재를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을 힐솝(Hilsop)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는 우리 삶의 기초가 되는 원시 체험을 표현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것은 결코 과학 이전의 미숙한 표현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했던 어떤 것을 이미지적인 언어로 바꾸어 나타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 그것은 우리들이 그 속에 참여해서 그 일원이 되고 하나가 되는 사건들을 드라마의 형태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실들을 알게 된다." 한편 뽈-마리드 라 크르와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 우리가 새로운 연합 아래서 살게 하기 위하여 성서는 우리들에게 좀 더 완전한 희생을 요구하는데, 그 희생은 우리의 행동과 제도와 다른 많은 종류의 실제적인 희생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과거에 우리가 지내왔던 희생제도 포함되는데 이것들은 구약성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들이다. 이 희생들 덕분에 우리는 더욱더 정결한 형태의 희생에 대한 개념과 구속(rédemption)의 개념에 가까이 도달할 수가 있다 ‥‥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려는 준비를 암중모색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수렴해 가야 할 지점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그 지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가장 완전한 희생물이며 동시에 사제로 나타나셨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전까지 숨겨져 있던 계시가 하나의 형태로 드러났고,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들에게 똑같은 상징을 사용하시며, 똑같은 것을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는 시련을 견디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을 따라야 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말씀은 언제나 새라는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것은 때때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나타났고, 또 때로는 레다의 학으로 나타났으며,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비둘기로 나타나기도 하셨다. 마찬가지로 땅과 물의 상징은 언제나 밤의 항해 단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오시리스를 탄생시키기 위한 바닷물과 관이 되었건, 코레를 낳기 우한 하데스였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위한 나무 십자가와 무덤이 되었건 간에 말이다. 또한 희생은 언제나 보리나 포도와 연관지어져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희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빵과 포도주에서 완성되었다. 오시리스를 찾기 위한 이시스의 비통은 자기 신랑을 찾으려는 아가서의 그 애절한 몸부림의 전주이다. 모든 세상은 이렇게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이토록 영원하고 영적인 언어를 모르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비유로 말을 한다. 나는 이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숨겨져 있던 비밀을 너희들에게 말할 것이다"(사순절 다음 네 번째 주일 기도문). 성 삐에르크리소로그 역시 그의 설교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행적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셨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서가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 상징 속에서 선포되어왔던 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3-19). 이 말씀은 기독교가 왜 고대사회에서부터 알려져 왔던 모든 상징들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이 상징들이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고 준비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면, 이제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과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으며, 계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나의 실현된 실재로서 우리들이그것을 따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신화는 여러 가지 신호를 사용하면서 실재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가며, 신화를 예시하고 있다. 또한 신호는 신화를 선포하고 있는 예언보다 더욱 깊이 파묻혀 있으며, 더욱 고태적(古太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여태까지의 신화적인 세계와 예언적인 세계가 그려왔던 것들의 궁극적인 종착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역사적인 실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상징에서부터 실재에로의 변형과 이미지에서부터 생명으로의 변형은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졌다. 상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로부터 호루스로 변형해 가는데 이시스 여신이 대단히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듯이, 기독교에서는 마리아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여성은 모두 각각의 전통에서 태모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여성 사이에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이시스가 사람들을 영적인 경지로 이끌어가는 입사식에서 음송되는 고태적이며 신화적인형상인데 반해서, 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나 이시스가 우리 꿈속에 나타난다면 그녀들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정신 속에 깃들어 있던 어떤 같은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시스가 말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 이집트 종교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시스가 품고 있는 의미는 어쨌든 영적인 잉태(孕胎)나 영적인 전망 등과 관계되고 있다. 한편 마리아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려면 우리는 기독교와 기독교 내에서의 마리아의 의미에 관해서 알 필요가 있는데, 이때의 의미는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신화 속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로 여겨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 땅에 살아있었고, 이 땅에서 활동했던 존재였다. 하나님이 태초 이래로 그의 피조물들에게 발전을 이루도록 촉구한 그 영성을 실현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제 계시의 날, 성육의 날은 온 우주에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고대적인 종교관을 가지고서 무의식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가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들의 언어를 통해서 그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육신은 영원한 것이며, 성령에 의해서 깨달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의종교(秘儀宗敎)들이 아직도 상징적이며, 지적인 측면에 머무르고 있는 데 반해서, 그리스도는 참다운 생명을 가져다준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 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다. 그는 결코 우리의 지성만이 발달하여 따라갈 수 있는 어떤 심리적인 발달 단계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우리를 육체와 영혼의 위험한 분열로 이끌어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새롭게 되어서 그의 삶에 참여하기를 촉구하며 우리에게 더 높은 삶의 단계에 도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그의 품 안에 두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존해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이것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모든 종교체험자들이나 정신분석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모든 비의종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수렴된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 속에 통합되는 것이다. 그의 수난과 십자가는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여주며, 우리가 자연 종교를 버리고 그에게로 다가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교리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수님이 사람이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신앙이 없다면 기독교의 신비는 우리 지성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고 만다. 그리하여 성서나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역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고, 시적인 영감이나 형이상학적인 궁구(窮究)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복음이 우파니샤드나 코란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부처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하나의 화신(化神)에 불과하거나 위대한 신비가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정말이지 우리 오성은 우리를 결코 하나님께로 데려다 주지 못한다. 우리 오성은 우리가 논쟁을 그만 두고, 지적인 이해를 포기해야 하는 지점에서 계속해서 논쟁하며,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지성의 포기는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자기희생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가장 미묘한 심리기제 가운데 하나인 지적 교만이 우리를 논리의 그물망 속에 집어넣으며, 추리하는 습관이 있는 이성 속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이 세상일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기를 포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멀리 나아가 있어야 한다.

 

집회서는 우리에게 그런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대의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관해서는 파헤치지 말아라.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추론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버렸음이라"(집회 3:20-23).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지성이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환상 속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좀 더 명확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은 지성이 아니다. 오히려 지성이 나아가는 방향이 잘못된 것이고, 지성이 행사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란 성령의 선물이다. 지성이 하나님에게 그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지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루시퍼의 범죄 이래로 인간 지성은 그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유혹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지성은 그 목적을 위해서 행사하려고 하게 되었다. 지성은 이제 그의 살아있는 활력원에서 잘려져서 원줄기에서 분리된 나뭇가지처럼 말라져버리고, 이리저리 거산하게 되었다. 지성은 아직도 무의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의 그 충만성 속에서 살던 때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무한자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고 암중모색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지성(intelligence)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지력(intellect)이나 이성(rais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지력이나 이성은 인간 지성의 왜곡된 형태로서 언제나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고 있다.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인식을 제한하고 있다.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을 파악하려할 뿐, 그것을 넘어서는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책의 글씨가 매우 잘 쓰여 있을 경우 그 글씨를 쓴 필경사의 손재주만을 찬양하고, 글자가 잘 쓰여졌다고 찬탄한다. 정작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눈은 지금 그 글씨를 찬탄하고 있지만 그의 지성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을 아는 사람은 그 글씨의 아름다음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그 글 속에서 지혜까지 읽을 수 있다. 글씨를 보기만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적을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적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을 가져오려고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그 이적사실만을 찬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이적 사실을 찬양하며 동시에 그 사실 속에 담겨져 있는 영을 따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인식 양태가 문제시 되는 것을 본다. 이해(comprendre)와 인식(connaître)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해는 인식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인식되어야지 단순히 이해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의 지성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에 직접 참여하게 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을 단지 이해만 해서 하나님을 우리의 어떤 목적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션물을 발달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는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마리 드 라크르와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지나간 우리 경험은 말해준다. 참으로 지혜는 그런 태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언제나 돌아가는 곳도 그런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우리 지혜의 그 넓은 영역 속에 하나님의 지혜의 보화들을 넘겨받을 수 있다. 우리 지혜는 우리가 이 지혜를 더욱 더 갈고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서 체험한 것들을 이해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그 깊은 갈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속에 지성을 집어 넣으셔서 그런 작업을 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 아니신가? 그렇다면 그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가 하는 사실까지 분별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가 선한 욕망을 따르느냐 아니면 악한 욕망을 따르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성서에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성서에서는 먼저 "지혜의 근원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집회 1:5)라고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3:19)라고 덧붙인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서 지혜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그 지혜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잠언 313절에서는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고 말한다. 집회서에서는 이 사실을 좀 더 길게 설명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옛 성현들의 지혜를 탐구하고, 예언을 연구하는 데 자기 시간을 바친다. 그는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보전하고 비유의 깊은 뜻을 파고든다. 그는 격언의 숨은 뜻을 연구하고, 난해한 비유를 푸는 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벼슬에 올라 군주들을 섬기고, 통치자들 사이에서 중책을 맡는다. 외국을 두루 여행하며 인간 사회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체험으로 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음을 모아 창조주이신 주님께 생각을 돌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온 마음을 바친다. 입을 열면 기도요 자기 죄의 용서를 빈다. 위대하신 주님께서 뜻하신다면 그는 깨우침의 영검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지혜의 말씀을 두루 전할 것이며 주님께 감사 기도를 올릴 것이다. 그는 공정한 판단력과 올바른 지식을 얻을 것이며 주님의 신비를 명상할 것이다"(집회 39:1-7).

이렇게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을 아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것은 우리 지성을 우리의 지능과 혼동하는 꼴이 된다. 또한 그 지성을 지능의 범주 속에 제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지능은 종종 하나님을 어떤 추상적인 존재로 바꿔놓거나, 그들에게 좋아 보이는 어떤 철학적이며 과학적이고 정신적인 이데올로기로 대치시켜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행동들은 우리 지성을 축소시키고, 우리의 겸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이란 우리 지성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리 했듯이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주님, 나의 모든 자유 의지를 받아주시옵소서. 나의 기억과 나의 지성과 나의 의지 전체를 받아주시옵소서. 나에게 속한 모든 것과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옵니다. 나는 이것들 모두를 당신께 드리며, 당신 의지 아래 놓습니다. 나에게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나는 부요해질 것이며, 다른 어느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욜라의 고백이다.

우리 지능은 성육하신 하나님을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것과 혼동해서 자꾸만 하나님을 파헤치려고 한다. 지능의 그런 기능은 우리 삶에 많은 도움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더구나 어떤 우주적인 힘이 신인동형동성론적(anthropomorphique)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격적인 존재이며, 살아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현존은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우리 속에 계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이며, 우리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나눔"이다.

우리 지성에는 지적인 특성과 직관적인 특성과 감각적인 특성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 걸림돌이 되기는커녕 우리 신앙을 북돋워 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사람들은 우리 신앙의 발달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탄생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으며, 그 실행 방법에 관해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종종 어떤 통속적인 종교성과 혼동하고 있는데 영적 탄생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영적 탄생이란 오히려 우리가 성숙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들을 사용하여 개성을 이루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탄생을 통해서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유아성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창조주에게 전적인 신뢰를 바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성숙한 사람들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영혼의 단순성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찬 자기포기를 ‥‥ 다시 발견하고, 다시 얻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이런 선물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어린이의 상태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간해서는 다시 그 상태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많은 시련을 거쳐야만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귀중한 선물들을 받을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밤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또 다른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다고 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무지한 사람이나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성이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의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겸손과 사랑과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융은 그가 1948113일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그가 결코 인간의 지능과 신앙을 혼동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편지 속에서 우리는 또한 신앙에 대한 융의 주장까지도 읽어 볼 수가 있다. "나는 결코 도그마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도그마는 대단히 권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도그마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신앙이란 은혜의 선물입니다. 신앙이 은혜의 선물인 한 나는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심리학은 다른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그 연구 대상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 연구의 대상은 인간 정신 전체이다. 그런데 인간 정신에는 인간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측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적인 측면을 인간의 유기체적이며, 생리적이고, 지적인 측면들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듯이, 신적인 측면은 하나님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 그 정신현상들에 관한 연구가 온전해지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을 연구한다고 해서 인간 정신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측면을 제외해 버리고 연구한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한 연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종교적인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정신적 사실은 인간 정신의 내재적인 관점에서만 연구할 때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동양 종교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그 동양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동양 종교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트만이나 도(), 그리고 쿤다리니나 시바 등에 관해서 알고 있어야만 그것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 현상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에도 기독교의 지나간 여러 세기 동안에 형성된 기독교 나름대로의 개념들이 있으며, 교리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심리체험을 해석하려면 기독교 교리에 관한 존중이 먼저 필요하다. 결코 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소한 그들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단순한 개인적 신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융은 그가 기독교의 도그마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도그마의 내용까지 받아들인 것 같지 않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서의 악-이것이 기독교 교리까지는 되지 않지만-은 결코 악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 개념은 불완전한 삼위성과 동일시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 대적자인 사탄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그러나 융은 이런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보자. 심리학은 모든 종교현상을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연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인간적인 차원에 신적인 차원을 통합시키고, 그것이 동양 종교가 되었건 서양 종교가 되었건 간에 그 종교가 그 동안 형성시켜 놓은 교리나 개념들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연구를 할 때 과학적이며 생리적인 자료들을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다른 모든 과학과 마찬가지로 신학 나름대로의 개념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신학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신학의 언어를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신앙 고백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마치 언어학자가 어떤 언어를 연구할 때 그 언어의 일반문법과 구문법 및 어휘들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신앙이 없이 분석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본질이 상실되어버리고, 망각되기 쉬우며, 다른 목적으로까지 해석될 수가 있다. 얼마나 많은 소종파들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기독교 교파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

동양종교와 고대 비의종교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과 정신분석에 정통해 있는 사람들은 요기들이 수행하고 있는 엄격한 금욕수련과 신비적인 시련 및 밤의 항해와 같은 고난을 그 수련자들의 첫 자아가 죽어야 하는 희생으로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용납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에서 희생과 관계되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 관해서 심한 반발을 보인다. 그들은 영적인 재생과 새로운 존재에 관해서 말을 하지만 기독교의 금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금욕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우리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은 상징을 지적으로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상징이 그들의 존재 속에서 살아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면 그의 자아가 다시 튀어나와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떤

지적인 것과 상징만 가지고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그를 따르며,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고 우리를 초대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 영혼에 그의 말씀을 계시하시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와 빛과 생명이 된다. 이때 우리 지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논박하지 않게 되며, 그 말씀을 실현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일종의 금욕이 된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정신분석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금욕과 같은 것이다. 금욕이란 우리에게서 영혼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고, 우리 존재가 통합되지 않는 한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금욕을 수행하지 못하고 우리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유(Mailloux)"신경증 환자들은 치유되지 않는 한 진정한 금욕을 수행할 수가 없다. 절름발이가 경주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경증 환자는 그들의 덕을 쌓기 위해서 수련할 수 없는 것이다."

금욕이 없이는 성숙이 있을 수 없다. 정신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대극들을 통합시키고, 우리 영혼을 재구성하게 함으로써 성숙과정을 돕는다. 또한 정신분석은 우리들에게 금욕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금욕을 받아들이게 하며, 우리 정신이 좀 더 만개하게 하기 위해서 금욕수련에 더 힘쓰게 해 준다. 왜냐하면 정신분석과 금욕수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출발점은 다르지만 모두 우리 정신발달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성경구절은 우리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1:3).

 

 

 2-9장 상징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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