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

 

 

 

 

1960년대 말부터 세계 신학계에서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취리히의 분석심리학자 C. G. 융이 신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사실 융의 심리학은 그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S. 프로이드의 수제자이며 프로이트가 그를 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사상과는 너무 다른 면이 많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명료하고, 분석적이라면 융의 분석심리학은 때때로 모순되는 듯하며, 통합적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많은 이들에게 어떤 정신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명료한 도구(道具)를 제공할 수 있지만, 융의 분석 심리학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그 정신현상 앞에서 주의 깊게 고려하고, 관찰하게" 한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고 대단히 실용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현대 과학기술 사회에서는 융의 분석심리학이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거인(巨人)의 사상이 그렇게 다른 이유는 그들이 서로 다른 심리학적 유형(psychological type)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융이 내향적 사고형으로서 객관적 대상 가운데서 나타나는 주관적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으며, 무의식의 원천에서부터 사고하고자 했다면, 프로이트는 내향적 감정형으로서 매우 분화된 감정을 가지고, 내적인 기준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지만 때때로 객관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자료에 압도되어 그것들을 모두 몇 가지되지 않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융은 그 자신이 그의 설명이 때때로 모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정신현상, 인간의 영혼은 본래 그런 것으로서 명료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의 사상과 융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원인론적(原因論的) 입장에서 어떤 정신현상이 "왜 생겨났는가하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그 현상에 접근해 갔다면,융은 목적른적(目的論的)입장에서 "그 현상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가?"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것에 접근해 갔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람의 꿈이나 노이로제 증상을 접근하는 데 있어서 프로이트는 그 꿈이나 증상은 그의 내면에 있는 어떤 숨겨진 욕망이 원인이 되어서 그런 현상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을 찾아가는 데 반해서, 융은 그 현상이란 어떤 것을 지향(志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실현을 고찰해 가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이후 융의 심리학이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사상이 새로운 시대의 영성(spirituality)을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 2차대전 이후의 전화복구 다음에 펼쳐지는 새 시대, 3의 물결이라고 하는 정보혁명 또는 기술혁명의 새 시대는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사회적 영성과는 또 다른 영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부현상이 단순명료화 될수록 인간의 무의식은 더욱더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컴퓨터 게임에 많이 나타나는 미로(迷路)나 요즘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요괴인간은 이런 현대인들의 무의식 세계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런 세계는 프로이트의 명료한 설명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융의 집단무의식(inconscient collectif) 개념이 주목받는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은 본래 요괴들의 세계, 귀신과 도깨비의 세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프랑스의 분석심리학자 에르나 반 드 빙켈은 기독교의 영성을 C.G. 융의 분석심리학을 가지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영성수련에서 대단히 중요시되는 금욕수련과 정신의 분석 사이를 비교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융에게 있어서 정신분석의 목적은 본래 치료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정신 속에 있는 수많은 대극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반 드 빙켈은 개성화(융 분석의 궁극적 목표) 과정에 있어서 "밤의 항해" 단계가 대단히 중요한 단계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들어가서 무의식의 모호한 힘들을 경험하고, 그 힘들을 극복하여 영혼을 정화(淨化)시키는 것이 매우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금욕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금욕수행이란 본래 사람들이 그들의 허물과 죄, 욕망 등을 초극(超克)하려고 모든 감각적인 것들을 절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욕수행자들은 금욕을 통하여 그의 모든 욕망과 죄로부터 벗어난다. 그의 영혼이 정화되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정신 속에서 그를 분열시키고 있던 욕망의 충돌, 대극의 충돌은 사라지고 만다. 통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 드 벵켈은 "밤의 항해"에 초점을 맞춰서 융의 개성화과정과 기독교 영성의 금욕수련을 비교 고찰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는 새로운 영성을 갈구하고 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이며, 실용적이기만 하고, 외부지향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근본적인 의미를 주고, 삶의 보람을 주며, 급변하는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이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내면세계에 들어가서 그런 세계를 조명(照明)하고 있다면, 융은 사람들의 꿈분석과 신화분석, 설화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힘과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과 분석심리학이 곁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분야 같이 보이지만 그 둘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국 같은 지향점인 것이다. 에르나 반 드 빙켈이 책 속에서 이 두 다른 분야의 학문이 어떻게 이것을 추구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는 그 위치가 점점 변두리로 밀려가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그 전처럼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궁극적인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고, 헛된 환상을 심어 주면서 명맥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가 이러고만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기독교의 참다운 보고(寶庫)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이 환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 넣고, 끊어진 힘줄을 다시 이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기독교 내부에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위대한 영성가들은 에스겔이 환상에서 보았던 그 삶을 실제로 살았으며, 아무리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원천에서 생수를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어떤 땅 속에 보화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는 그의 모든 재화를 팔아서 그 맡을 사며,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산다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영성은 현재 침체되어 있는 듯한 기독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땅 속에 묻혀 있는 보화이고, 융의 분석 심리학은 이 영성을 현대적인 언어로 설명해 주고, 그것을 파낼 수 있는 귀중한 삽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현대기술문명의 눈부신 발달 앞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는 기독교회가 분석심리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010. 6.

봉담에서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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