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6-11-1to12
하나님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갈수록 더 깨우쳐지는 한 편, 그 님을 멀리 두고 가까이 누릴 수 없는 자신을 살펴볼 때 욕망이 더욱더욱 치솟기 때문이고,  또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기 때문이다. 
 
초조와 눈물과 한숨과 격정이 때때로 있게 된다.  이것은 지금 말하려는 다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차라리 아직도 연기나는 불과 같아서 괴롭기는 하여도 견딜만한 것이다. 
 
영혼이 안으로부터 타오르고 있을 때 가끔 '죽음이 몹씨 더디 오는구나'하는 생각이 스쳐가고 그런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마치 불화살처럼, 그러나 어디서 오는지 모를 충격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충격은 영혼의 심부,  그 속의 속을 아프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 안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이것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존재한다는 의식마저 가질 수 없게 된다.
일순간에 능력이 마비 되어서 고통을 더하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오성은 예민한 기능을 발휘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부재가 얼마나 쓰라린가를 영혼이 깨닫기 위함인 것이다. 
 
이 아픔은 몸에 있지 않고 영혼은 깊은 속에 있기 때문에, 억센 고생을 견디는데 익숙해진 사람이라도 별도리가 없다. 
 
이 고통이, 세상의 고통과 비애가 아무리 크다 해도 여기서 당하는 고생보다 작다 생각되지만, 그래도 영혼은 이 고생이 귀함을 깨달아서 자기는 이를 겪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자비로 구원과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신분으로 우리를 불러주신만큼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임을 깊이 알아 들으라 하시는 당신의 뜻에서 그런 것이다. 
 
그가 당하는 고생은 심한 고비가 같지 않다. 오래가보았자 세 시간 아니면 네 시간이다. 어느 때는 15분 밖에 안되는 데도 당하는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
그때 고통이 얼마나 심했든지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고 테레사 수녀는 말한다. 
 
이 고통은 쓰라린다. 하지만  영혼이 받는 효과는 엄청나고, 어떠한 고생이 닥처올지라도 무서움이 없게 해 준다. 그럴지라도 주께서 원하시기 전에는 그 고생이 되돌아오게 할 아무런 도리가 없다. 
 
고생을 당할 때 세상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에 대한 애착을 한결 더 끊어 버린다. 조물주만이 자기를 위로하시고 흐뭇하게 하실 수 있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로를 주시는 만큼 벌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영혼의 길에는 두 가지 죽을 위험이 있다.
1) 저(낮은) 고통으로써, 정말로 위험이라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2) 과도한 희열로서, 영혼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기진맥진이 되어 당장이라도 육체에서 뛰쳐나갈 것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게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여러분은 이러한 은혜를 청할 때,  야고보와 요한에게 한 것처럼 "당신들은 내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하신 까닭을 아시 것이다. "예, 마시겠습니다" 할 것이다(막  10:38). 그리고 하나님은 용기가 필요하다 싶은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항상 이런 영혼들을 지켜주시며, 그들이 박해와 비방을 당할 때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듯이 (눅 7:44 참조), 바로 당신이 말 아니면 일로 대답해 주신다.
결국 그들이 죽기 전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 찬양. 
 
                                                                                                   2014. 10.  29.
                                                                                            고려수도원  박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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