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6-4-9to17
'보임(현시, vision)' 
 
보임이라 하니 상상의 보임으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지성의 보임'이다. 
 
어느 누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탈혼에서 신비스러운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탈혼이 아니라 체질이 약한 사람들에게나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자연적 쇄약일 것이다.
어떤 정신적인 압력이 자연 본성에 가해지는 경우 이와같은 허탈한  상태가 오는 것인데, 이런 것은 탈혼과는 아무런 상관이없다. 
 
탈혼 상태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통째로 앗아가셔서 당신을 위한 당신의 것, 아주 당신의 신부로 삼아버리시고 몸소 얻은 당신의 나라의 한 조각을 보여주신다고 믿어세요. 
 
그 한 조각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위대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라서 모두 다 큰 것이다. 
 
바야흐로 하나님은 능력이나 감각이나 그 무엇이 행여 해살을 놓을세라, 모든 문을 즉시 닫으라 명하시고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당신이 계시는 지밀의 방문만을 열어두게 하신다. 
 
님을 찾은 신부는 세상에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끝없이 즐기게 될 보화에 비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역겨운 쓰레기일 따름이다. 
 
은혜는 주께서 내리시고 싶은 그 사람에게 내리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대로 우리도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누구에게든지 은혜를 주신다.
받아야할 사람이 있으면 주시고 싶은 것만이 당신의 소원일 따름, 가멸진(실속 있게 넉넉한) 은혜가 축날 까닭은 없다. 
 
어떤 경우는 감각이 모두 갑자기 마비되고, 마치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손과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며, 숨을 쉬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 되는 수도 있다. 이것은 잠간뿐 오래 계속 되지는 안는다. 
 
탈혼 상태에서 약간 벗어나면 몸은 차차 원기를 회복하게 되고, 마치 다시 죽기 위하여 되살아나 영혼의 생명력을 보다 더 왕성하게 만들어주는 듯이 보인다.
아뭏던 탈혼 상태는 오래 가는 법이 없다. 
 
탈혼 상태가 끝나더라도 마음은 흘린 채로,  얼은 빠진 채로, 이렇게 되기를 하루 아니면 며칠을 두고 계속 하는데, 의지는 사랑을 깨치기 위해서만 있는듯이, 그 사랑은 깊이 깨달아도 일채 피조물에 대한 애착은 외면한 채  잠든 상태로 있는 것이다. 
 
영혼이 완전히 자기에게로 돌아 왔을 때  남는 것은 부끄러움이요, 불 같은 욕망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온갖 방법을 다 써서라도 당신을 섬시고 싶어하는 그 열망인 것이다.  
 
하나님 섬길 강한 열망이 생기고, 찬미하고, 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오르고,  그만큼 사랑의 힘이 크기 때문에 순교자들이 당하시든 그 고통을 예사롭게 여기시던 사실을 환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신비롭게 받는 사람들은 귀한 은혜로 모시지만, 혹시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받게 될 경우 부끄러움과 스스럼을 못 견딜 정도로 느끼게 마련인데, 그것은 탈혼 상태를 즐기고 있던 영혼이 깨어나자마자 남들이 이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못된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겸손이 부족한 탓으로 볼수도 있다. 
 
"걱정할 것 없다. 사람들이 나를 찬미 하든지 아니면 내게 불평할 것이다. 하여간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육체나 명예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쯤은 상관없다. 하나 영혼만은 그렇지 않다. 그 영혼이 무엄하게 죄를 지어서 그 사랑하는 님을 떠나지 않는 한, 당신은 온 세상 아니 온 지옥과 맞서시어 그를 지켜주실 것이다. 
 
                       2014. 10. 22.
               고려수도원  박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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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