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하나님과의 관계

 

 

 

1) 관계 - 하나님의 본질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만나는 인격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독교 영성의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신학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한 주제가 새로운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관심은 기독교 영성과 특별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실천적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에서 초기 교회의 영적 경험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신조는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고백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험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 시대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신에 대한 이해와 구별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과 관계되어 있는 가장 독특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세계가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일 뿐아니라 근원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 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분으로 모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성령의 경험 속에서 체험되고 발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신앙은 그 출발부터 기독교만의 독특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이 삼위일체의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단순한 추론의 조각들이 아니라 기독교적 삶의 참된 근거이다. 삼위일체의 신앙은 하나님이 다른 것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에 대한 가르침이며, 우리가 서로 더불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된 기독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은 상상할 수 없다. 사실 계시의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관계가 가능하도록 인간이 되어 내려오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둘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관계를 제안하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초대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일게 드러내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서 연기와 불 가운데 내려오셨다(19:18~19).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사들과 왕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셨다. 하나님은 예언자와 역사가, 그리고 시인들을 통해 그분의 행동과 말씀을 성경 안에 기록하셨다. 성경이 기록된 말씀이라면, 예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내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2) 기도-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적 요소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기도이다. 영적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그분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든지 기도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가 연약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며 친히 간구 하신다"라고 말씀한다(8:26).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며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인 '기도'(prayer)는 라틴 동사 '프레카리'(precari)로부터 왔는데, 그 의미는 '빌다', '간청하다' 이다. 이 단어는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히파렐'이며, 헬라어로 '프로슈케'인데 그 의미는 역시 청원 또는 간구의 표현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도가 간구 또는 청원,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2:1은 기도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로 표현한다.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은 이네 가지를 기도의 다른 형태로 이해했다. 그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경배, 고백, 헌신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6:9~13; 11:2~4). 구약성경의 시편 역시 기도의 중요한 텍스트로 초기교회부터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것처럼 기도는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근원적으로 기도는 청원이라는 특별한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넓은 의미로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기도가 교제라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관계이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대화 시간이 많아야 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한 태도와 진실한 내용을 담은 대화가 이루어져야 관계가 깊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닳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과 교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기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는 대화이다. 이것은 곧 성경에 나타난 삼일일체 하나님이 '대화적 존재' 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요 인간의 말을 듣기 원하시는 분이다. 마태복음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친구처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2. 하나님과의 대화-말씀 드리기

 

1) 한국교회와 통성기도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는 단연 통성기도일 것이다. 통성기도와 더불어 새벽기도,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기도이다. 이 세 기도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지하는 바처럼 길선주 목사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초기한국교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거룩한 영적사건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하디 선교사에 의해 촉발된 원산 기도부흥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의료선교사인 하디는 한국선교 실패의 원인으로 자기의 교만과 백인 우월주의를 고백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회개의 영이 원산에 임하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길선주 목사를 중심으로 평양에서 1907년 부흥사경회를 준비하였다. 길선주는 1906년 가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는데 500여 명이나 참석하는 큰 기도 모임이 되었고, 선교사들은 이 새벽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907년 당시 현장에 있던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통성기도의 시작과 절정은 다음과 같았다. 1907114일 월요일 저녁설교 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는 회중들에게 통성기도를 요청하였다. 이 선교사가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은 듯하였다. 이 힘의 나타남은 폭공적(暴恐的)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애절한 침통에 사로잡혔다. 각 사람은 마음에 자기의 죄가 자기를 정죄하고 판결하는 느낌을 가지며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통성기도는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새벽5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에는 '새벽기도' '통성기도' 그리고 밤을 새는 '철야기도' 가 연속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다. 이 세 가지 기도는 지금까지 한국교회 영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통성기도라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주여 삼창(三唱)이다. 통성기도를 시작하면서 손을 위로 향하며 '주여' 부르짖는 것이 일반적인 통성기도의 형태이다. 이것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성경적 근거로 다니엘 9:19을 꼽는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이 말씀은 유명한 다니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여 삼창이 기도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다니엘은 포로 된 땅 바벨론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포로 된 이유와 7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게 된 다니엘은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첫 번째 '주여!'는 다니엘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하는 부르짖음이요, 두 번째 '주여!'는 조상들의 죄와 민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세 번째 '주여!'는 다니엘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하나님의 구원하는 경륜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통성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사용하는 '주여 삼창'과는 다르다. 세 번 '주여!' 부르는 다니엘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하나님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하나님의 용서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다니엘은 단순히 목소리를 높인 것이 아니라 간절함을 드린 것이다. 이런 면에서 '주여 삼창''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라고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소리치고 싶은 본능이 있다. 부르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본능적인 일이다. 고난당한 사람이 기도하는 일반적인 자세가 부르짖는 것임을 시편 102편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표제는 '고난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이다. 또한 예레미야 33:3에서도 부르짖는 기도의 강력한기도 능력을 말해 준다. 부르짖는 것은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이고, 간절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 주신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욕망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은 그 원초적인 언어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신다. 우리는 계속되는 기도 속에서 성숙해지며 변화되어 간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욕구를 정화시키셔서 내 필요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하신다. 결국 기도란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아뢰는 원초적 언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원초적 실존이라는 것이다.

아마 통성기도는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동안 계속될 것이다. 통성기도는 한국교회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성기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들이 있다. 첫째, 통성기도의 발단이 되었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약 1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100여 년 동안 통성기도의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때의 간절함, 진지함, 절박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둘째, 통성기도는 형태상 청원기도 중심의 기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깊은 내면 성찰을 위해서는 침묵과 묵상이 필요하다. 또한 통성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 중에 하나님에 대한 간청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강렬한 통성기도와 함께 고요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침묵과 기다림도 필요하다.

 

 

2) 방언기도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하는 기도는 무엇일까? 몇 년 전 한 연구소에서 여러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회가 되면 가장 배우고 싶은 기도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질문하였다. 그 결과는 방언기도로 나타났다. 목회와 신학(20079월호)에 실린 설문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 중에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절반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방언기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방언기도'가 성령 은사의 증거이며, 하나님 체험의 증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설문조사에서 신비한 기도 체험으로 꼽은 것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낀 것이며, 두 번째는 방언기도로 나타났다. 많은 경우 방언기도는 성령의 강력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방언기도는 은사를 사모하는 이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방언 은사가 은사의 모든 것도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고전 12:28~3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방언기도에 관심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방언기도는 일반적으로 부르짖는 기도 즉, 통성기도 형식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의 방언이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온 교회가 모여서 방언을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이들을 미쳤다고 오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전 14:23). 이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방언은 소리기도 형태로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방언기도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침묵하면서 할 수도 있다.

방언기도의 의미는 영으로 비밀스럽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모든 기도가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지만 방언은 특히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일반 언어를 사용한다. 말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말은 언제나 표현의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언어로 진정한 마음의 상태나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영의 언어인 방언으로 기도하면 종종 인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방언기도가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는 점에서 많은 지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방언기도의 장점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에 보다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또한 기도가 깊어지는 만큼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기도의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소리쳐 기도해도 비밀이 보장될 수 있다. 또한 성령이 임하는 기도이기에 강력하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방언기도에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방언은 대부분 정상적인 언어 형태가 아니기에 방언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기 쉽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방언 은사가 없는 이들에게 방언은 '새 술에 취한 사람으로 조롱'받거나(2:13) '미쳤다'고 조롱받기도 했다(고전 14:23). , 불필요한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하는 의미나 뜻도 모른 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다. 혹은 방언이 성령의 은사인데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방언을 전수하거나 교육하려는 노력은 자칫 잘못된 영적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방언 은사를 주시고 안 주시고는 전적으로 성령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방언기도에 대해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방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전 14:1). 또한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면 소멸하지 않도록 계속 기도해야 한다(살전 5:19). 그러나 예배 중에 방언이 나올 때는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고 남들에게 오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전 14:23). 방언할 때는 질서를 따라 하고 통역하는 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전 14:27~28). 분명한 것은 방언은 성령의 은사이므로 사모하여 방언과 더불어 하나님과 더 깊은 영적교제를 나누어 가야 할 것이다.

 

 

3) 중보기도

 

'중보기도'는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간다'는 의미이다. , 하나님과 어려움 당한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나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로 무게 중심이 바꿔다. 그런 의미에서 중보기도는 이타적인 기도이다. 중보기도의 성경적 근거는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시다(딤전 2:5).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8:34). 모든 기도가 그러하듯 중보기도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 내 몸 하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인간의 약함과 필요를 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대표적인 중보기도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롯을 위해 한 기도이다(18:22~33). 이 기도는 소돔 가운데 의인 50명에서 10명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결정적으로 빛나는 것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살리신 것'(19:29)이다. 그 밖에 중보기도는 모세의 기도(17:8~13) 에스더의 기도(4:13~16), 민족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9),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 요청 (4:2~4)등 다양하다.

기도를 혼자서 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하기도 한다. 중보기도 역시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고, 집단으로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일컬어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 (19:46)이라 하셨다. 중보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연합하여 기도할 때 힘이 난다. 기도하되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보기도의 응답이 빨리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응답이 더디면 우리는 지치고 낙심되어 기도를 중단하곤 한다. 모든 기도가 그러하지만 특히 중보기도는 오랜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것처럼(18:1)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인가?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위대한 설교가요, 기도의 사람인 조지 버트릭(George A. Buttrick)은 원수들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는 "제가 어리석게도 원수라고 생각하는 아무개를 축복하옵소서. 제가 잘못한 아무개를 축복하옵소서. 그들을 주님의 은혜로 지켜 주시고 저의 쓰라린 상처를 떨쳐 버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권한다. 중보기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커다란 주제부터 지도자나 기업인, 탈북자, 가족이나 친구 등 개인을 위하기까지 다양하다.

중보기도는 아주 훌륭한 기도이지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 교육시키고 활용하고 있다. 이때 유의할 것은 중보기도 팀원들이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중보기도자들은 필요에 의하여 선택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지만, 특권의식을 갖기보다는 섬기는 사람인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중보기도자들끼리 집단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중보기도자들이 일반 교인들과 이질감을 갖지 않도록 당사자들과 지도자들이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4) 중보기도의 실제

 

중보기도는 개인이나 단체로 할 수 있고, 그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중보기도는 준비가 필요하다.

·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본인이 깊이 숙지하고 깨닫는다.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보기도의 사명과 능력 있음을 확신하라.

· 지속적, 효과적으로 중보기도하기 위하여 중보기도 팀 을 구성하라.

· 중보기도 팀 구성을 위한 초기 단계에 중보기도 간증 이나 성경긍부로 동기부여를 하라.

중보기도가 지속되도록 기도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정 하라.

중보기도를 이끌거나 섬길 몇련 리더를 구성하라.

 

둘째, 중보기도는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할 수 있다.

· 중보기도 할 기도제목을 모은다. 기도제목은 개인, 교 회, 나라와 민족, 선교사, 특정 사역, 사역자 등과 관 련하여 다양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는 찬양을 먼저 드리라. 노래와 찬양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역사하시기 시작 하셨다(대하 20:22).

·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계심 을 믿고 묵상하라. 성경은 주님께서 "항상 살아 계셔 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라고 말씀을 주신다 (7:25).

·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약속 하셨고,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고 말씀해주신다(8: 26).

· 숨은 죄를 고백함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우리의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 하셨다(66:18).

기도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때로는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준비된 기도제목이 나 요청받은 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확신을 가지고 기 도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함 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18:20).

악한 영을 대적할 필요가 있을 때 원수 마귀를 강력하 게 대적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라.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약속하셨다(4:7).

· 합심하여 기도한 다음 성령께서 더 기도하기 원하시는 것이 없는지 잠시 잠잠히 기다리라. 성령님께서 강권 하시는 기도가 있으면 좀 더 기도하며 기도의 부담이 사라질 때까지 개인이나 상황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 하라.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감사드리며 기도를 마무리하라.

· 기도 모임을 마친 후에도 생활 중에 중보기도에 대한 민감함을 유지하라.

 

 

3. 하나님과의 대화-말씀 듣기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소통이다. 소통은 한쪽의 일방적 독백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 관계이다. 또한 기도는 서로의 관심과 기대, 그리고 친밀감을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도는 말하고, 듣는 소통의 과정이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본질은 오히려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답하는 태도에 있다.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듣는 기도는 일방적인 청원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청한 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나아가 듣는 기도는 광범위한 기도의 자세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참된 근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영적 성숙에 매우 중요하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이다. 영의 눈과 귀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을 통해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이유

 

우리 인생은 날마다 결단을 요구받는다. 우리는 날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고, 결정을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 일상생활 가운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어떤 물건을 사야 하는가?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가? 헌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는가?"와 같은 수많은 질문을 대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 나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삶의 정황 속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날로 더해만 간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환경과 삶에 대한 하늘의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익이라는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사회는 경제, 정의와 인권의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가정은 부부와 자녀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힘들어 한다. 수많은 갈등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성을 동원하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생각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고 성경말씀을 읽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 뿐 아니라 믿는다. 그렇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성경말씀이 이해될 뿐 아니라 삶 속에 실현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이해를 도우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37:7)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어떤 병원, 어떤 의사를 만나야하는가?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하는가? 때때로 생사가 달린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급한 마음에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의 식구들 가운데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찾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려움과 위험 가운에 처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2)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실제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망하느니라"(10:3~5).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 하나하나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양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그렇다면 독특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양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을까?

 

첫째,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대는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성실성에 기초를 둔 기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에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듣는 자의 기본자세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삶을 보여 주셨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에 집중했다. 예수님의 모든 지혜와 말씀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분주함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다. 또한 우리는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개인적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개인적 요구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기보다 하나님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조용하게 기다려야 한다. 시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46:1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기도에 자기 필요를 청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인간의 요구사항을 보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듣지 않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다리는 시간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기교회부터 수많은 신앙인들이 사막과 고요한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시 시끄러운 세상과 문명을 뒤로하고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왕상 19:12).

 

셋째,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 그리고 세속적인 추구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어렵다. 우리의 머릿속이 일과 돈, 자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음성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마음에 모실 때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신다.

자기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순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고 싶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비결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넷째,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죄에서 돌이켜 바르고 정직한 삶, 즉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셨다. 시편은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불의함과 외식을 꾸짖으시고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한 영으로 그분을 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수 있다.

 

다섯째,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길을 인도하시며 갈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믿음으로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답을 가지고 계신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교제를 통해 그분의 뜻을 전달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즉각적인 음성으로 들려주지 않으실 때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즉시 응답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천천히 응답하실 때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응답을 받을 분량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종종 기다림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응답을 늦추기도 하시고 당기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섯째,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간구한 내용이나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들려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을 원하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바라지만, 때론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한다. 디모데후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한다. 기도하는 자가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기도 한다. 항상 우리가 소망하는 것만 듣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일곱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섬겨라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태복음에서 마지막에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서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라고 말씀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현대인들은 보이는 객관적인 실체를 보고 느끼는 과학적인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영적 존재의 임재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다. 나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마음으로 살피며,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마음의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고 듣는 데 첫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몸으로 듣는 기도하기

 

1) 몸에 대한 이해

 

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사상의 영향으로 몸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 왔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인간의 몸을 소중히 생각한다. 인간에게 ''이란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 즉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영혼육의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영혼육의 다양한 측면에서 하나님을 인지하고 알아 갈 수 있다. 또한 영혼육의 다층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는 듣고, 보고, 느끼는 몸의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육체적 감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게 하거나 상기시키신다. 우리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들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새들의 노랫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어떤 이는 십자가와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보다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향'(intention)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향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하며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소리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의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찬양하면서 손을 높이 들거나,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찻잔모양으로 만들어 내민다. 또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하나님께 하루를 축복해 달라

고 기도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 얼마든지 우리의 의향을 드러내는 기도를 드리거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2) 몸으로 기도하기

 

기도는 우리의 전인적 활동이다. 기도가 단순히 영의 활동만이라든지 몸의 활동만은 아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영혼육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마치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2:30)하신 것처럼 기도는 영적인 일이며, 정신적인 일인 동시에 몸적인 일이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몸으로 드린다는 의미에서 물리적인 일이다. 나아가 지정의(知情意)의 활용이기에 정신적인 일이기도하다. 또한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영이 드리는 것이기에 영의 일이기도 하다. 기도 중에 영혼육의 역할을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 영적인 부분이 더 활동적일 수 있고, 혹은 정신적인 부분이나 몸적인 부분이 좀 더 강조되는 경우가 있다.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라고 말한다.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몸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나의 나 됨을 일차적으로 몸을 통하여 인지한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나의 이목구비가 형성되고 목소리를 통하여 나의 의사를 표현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몸을 돌보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몸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곤 한다.

사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맘에 들든지 들지 않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몸은 평생 동안 ''를 담고 다닐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아름다움, 사랑과 우정의 기쁨, 성장과 변화의 선물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몸과 함께 먼 곳을 여행했고, 가정의 편안함을 누렸다. 그리고 이 몸과 함께 우리는 성공의 기쁨과 실패와 좌절의 아픔을 맛본다. 우리 몸은 때로 상처받고 치유되고 병들고 건강을 회복하곤 했다. 우리는 이 몸 안에서 태어났고, 이 몸 안에서 병들고 죽을 것이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몸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도의 실제

기도와 몸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컨대 우리 몸이 졸리든지 잠들어 있다면 정상적인 기도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몸의 건강한 컨디션이 건강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건강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충분히 잠을 자라고 권면한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몸의 컨디션뿐만 아니라 몸의 자세 즉, 몸짓도 기도에 영향을 준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기도하는 것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결코 같은 기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잘 드러난다. 때로는 몸짓 자체가 곧 기도이기도 하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추는 것은 곧 기도였다.

이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자세를 취해 보면서 몸으로 기도드리거나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기를 권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몸을 내어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10분에서 20분 정도가 적당하며 혹은 그 이상이어도 좋다. 몸을 통하여 무엇인가 영적인 것이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적당한 시간이면 된다.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무릎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 다려 보라.

십자가 아래에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이 들려주실 음 성이나 손길을 느껴 보라.

· 십자가 아래에서 두 손을 쭉 편 채로 엎드려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몸짓을 드려 보라. 그리고 들려주시는 음 성이나 위로를 느끼고 깨달아 보라.

예배당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편채로 어느 정도 머물러 보라.

· 하나님께 간절함을 올려 드리는 마음으로 두 손을 잡 아 가슴에 언고 시간을 가져 보라.

·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 보라.

·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고 얼굴도 하늘을 바라보라.

· 또한 그때그때 마음에 강동이 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다양한 자세를 취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도의 실제

사무엘하 6:6-21의 말씀을 가지고 실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동안 기뻐 춤을 추면서 두려움 없이 온몸으로 예배드렸다. 아내 미갈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확신했다. 성경에서도 종종 심오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몸짓과 움직임으로 참된 자아를 표현했다.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가져 보라.

 

· 방해받지 않고 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고요한 장소를 찾으라.

· 다윗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자신의 내면 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내라. 만일 내면에서 다른 감정이 솟아오른다면 그러한 감정도 몸 동작으로 표현 해 보라.

· 몸 동작은 천천히 걷기, 무릎 꿇기, 두 손을 하늘로 향 하기, 땅바닥에 엎드리기, 혹은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볼 수도 있다. 그때그때 내면의 감정에 따라 몸을 움 직여 보라.

· 때로는 내면의 감동을 따라 춤을 추어 보라. 춤을 추 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춤은 몸과 마음을 자유롭 게 하는 힘이 있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마음의 흐름 도 인지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가도록 움직여 보 라.

· 몸과 마음이 평안해질 때까지 자신의 감정과 몸의 움 직임에 충실하라.

·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거나 느끼게 하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몸으로 감사드리고 기도를 마친 후 그것을 기록하라.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의 실제 (자연묵상기도)

시편 19편은 다윗의 시편이다. 일찍이 C. S. 루이스는 "이 시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이며, 가장 위대한 서정시 중의 하나다."라고 극찬하였다. 시편 19편의 전반부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광대함과 오묘함을 잘 그려 준다. 칼뱅은 자연을 하나님이 지은 극장이며 하나님을 정관(靜觀)할 수 있는 거울로 본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야외극장을 자연인들은 눈이 어두워서 볼 수 없지만, 기독교인들은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감상하여야 한다(1:20). 여기에서 자연묵상과 자연과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위대한 많은 영성가들은 자연묵상을 깊이 하였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나 로렌스형제의 "나목의 묵상"은 자연묵상의 가능성을 잘 보여 준다.

시편 104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시편 104편을 중심으로 자연묵상기도에 대한 지침을 살펴보자.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시편기자는 땅과 하늘에 있는 피조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 바다와 땅과 산들, 그곳에 살고 있는 각각의 동물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오감과 상상력을 통해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완전함에 감탄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피조세계를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 자연을 묵상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으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마음껏 보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높이는 찬송을 조용히 부르며 마음을 가다듬으라. "참 아름다워라""주 하나님 지 으신 모든 세계"와 같은 찬송이 좋은 예이다.

·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묵상할 준비가 되었으면 천천히 걷거나 한곳에 머물러 자연을 관찰하며 그 안에 숨겨 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느껴 보라(1:20).

· 이때 우리 몸의 오감각인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을 다 동원해 보라. 마음과 몸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 럽게 관찰하라. 나무나 꽃을 자세히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향기를 맡거나, 색깔과 빛을 보거나, 크고 작음을 볼 수 있다. 혹은 크고 작은 소리를 듣거나, 높은 하늘이나 낮은 땅을 볼 수도 있다. 혹은 단단함 과 부드러움을 만져 보고 느낄 수도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 리면서 오감을 통하여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마음에 담고 숙고하며 묵상하라. 찬송가 "참 아름다워라"2절 가사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침 해 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과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 있음을 고백한 다. 3절 가사에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 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을 듣는다고 고백하고 있 다.

· 감사함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라.

· 묵상하며 깨닫거나 느낀 것들을 노트에 적어 보라, 그 것은 시나 수필이 될 수 있고, 그림이나 노래가 될 수 도 있다.

· 가능하면 묵상의 대상을 한 번만 묵상하지 말고 시간 을 두고 연속적으로 묵상하라. 그러면 또 다른 변화 속에서 더 깊은 묵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성을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된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 (렉시오 디비나)

 

1) 렉시오 디비나란 무엇인가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 '무엇을 구하는것''누구를 구하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 기도가 '청원기도'라면 후자의 대표적기도가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읽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다'라는 뜻의 'lectio''신성한, 신적인'이라는 뜻의 'divina' 의 결합어이다. 우리말로는 '영적독서'(spiritual reading), '성독(聖讀)', 혹은 '말씀묵상기도''말씀으로 기도하기'라고 할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의 기원은 초기교부와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며 최초의 문헌기록은 6세기의 '베네딕트 규칙'이다. 규칙서 48장은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렉시오 디비나를 할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렉시오 디비나란 일반 독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성경적 배경은 신명기 6:4~9'쉐마' (들으라)와 수문 앞 광장의 사경회라 불리는 느헤미야 8장에 있다. 에스라는 특별히 제작된 나무 강단에 서서 말씀을 낭독하였다. 이전에 유대인들은 나무 단에서 희생제물을 불태우며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이때부터 말씀을 읽고 들으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희생제물 대신 말씀낭독이라는 새로운 예배형식이 등장한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설교가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낭독하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21)라고 하셨다. 이것은 700년 전 구약의 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현재화시킨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한 의미는 어제의 말씀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오늘의 말씀'으로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현재화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땅에서 하늘까지 잇닿은 사닥다리 꿈을 꾸었다. 곧 하늘사다리를 꿈꾼 것이다. 이 사닥다리 꿈은 후대의 많은 이들에게 깊은 묵상의 소재가 되었다. 야곱의 꿈은 어떻게 하면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뵐 수 있을까, 하늘 사닥다리는 무엇일까라는 숙제를 남겨 두었다.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이 이 사닥다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12세기 인물로 카르투지오회 원장을 지낸 귀고(Guigo) 2세는 묵상 중에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의 네 단계로 깨달았다. 본래 렉시오 디비나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귀고 2세가 정리한 네 과정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전해진다.

귀고는 '독서'는 온힘을 집중하여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이며, '묵상'은 이성을 가지고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지식을 찾는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이라 했다. 또한 '기도'는 선을 얻고 악을 막아 내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헌신이며, '관상'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져 거기에 머무는 단계로 이때 "영혼은 한없는 감미로움의 기쁨을 맛보게된다."고 말한다. 특별히 여기에서 '관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체험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림, 지성소 체험, 하나님과 깊은 연합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기도자가 하나님과 점점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임재 체험을 인간의 단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는 '관상'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곤 하였다. 이렇게 렉시오 디비나란 성경말씀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케 하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2) 말씀으로 기도하기(렉시오 디비나)와 큐티(Q.T.)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다는 점에서 '큐티'와 렉시오 디비나는 비슷하다. 성경을 덮어놓고 기도하는 '일반적인 기도'에 비해 큐티와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한다는 점에서 큰 차별성이 없다. 그러나 두 기도가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두 기도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 렉시오 디비나는 초기교부와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이 유럽 수도원 전통으로 통하여 이어져 왔다. 반면 큐티는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무디의 영향을 받은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의 경건훈련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한국교회 상황에서 큐티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실용적으로 단순화시킨 면이 있다.

둘째, 두 기도가 추구하는 모델이 약간 다르다. 큐티는 주로 PRESS, SPACE 방법을 사용한다. PRESS'짧게 기도하기' (Prayer for amoment), '말씀 읽기' (Read His Word), '말씀묵상' (Examine His Word) '말씀의 결과로 다시 기도하기' (Say back to God), 발견한 사실 나누기' (Share with others what you have found)의 머리글자이다. , '짧은 시작기도, 말씀 읽기, 묵상, 기도, 발견한 사실 나누기와 적용' 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큐티의 지향점은 적용이라는 구체성, 즉 삶과 사람과 땅을 향한다. 따라서 이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구체성이라는 한계를 또한 갖기도 한다. 반면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이라는 흐름을 갖는다. 렉시오 디비나가 추구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관상이라는 초월성, 즉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두 기도의 차이점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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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40pixel, 세로 275pixel 그림 1

그림 p74 추가생성해서 입력바람.

 

 

셋째, 큐티가 몰입 성향의 기도라면 렉시오 디비나는 초월 성향의 기도이다. 모든 기도자는 '몰입''초월'의 관계에서 고민한다. 몰입과 초월은 한마디로 자기를 뛰어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몰입형 기도는 자기 생각을 정당화시키며 자기 생각에 집착하려 한다. 큐티가 적용이라는 구체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성경이 자기주장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유해룡은 "진정한 기도는 부적절한 집착(inordinate attach -ment)에서 벗어나서 참된 애착(authenticattachment)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렉시오 디비나는 초월 지향적인 성향의 기도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기도자가 지향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보다는 하나님 자신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으로 기도하면서 "무엇을 깨달을까? 내 삶의 무엇을 변화시킬까? 어떻게 설교 준비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더 머물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는다. ,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쪼개기보다는, 말씀이 나를 쪼개고 관통하게 하는 기도이다. 이런 점에서 큐티가 훌륭한 말씀묵상기도인 것은 틀림없으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깊은 임재 안에 머물게 하는 관상적 큐티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말씀으로 기도하기(렉시오 디비나)의 실제

렉시오 디비나는 흔히 '독서(말씀 읽기), 묵상, 기도, 관상'의 네 단계로 진행된다. 또한 기도를 마친 후 기도를 되돌아보는 반추를 할 수 있다.

 

독서

성경말씀을 읽는 방법은 통독과 속독, 묵독과 낭독, 다독과 정독 등 다앙하다.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성경 읽기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 장소와 시간 : 성경 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공 간을 정한다. 시간은 최소한 30분 정도로 앞뒤로 방해 되지 않는 시간을 정한다.

준비기도(마음가짐) :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을 갖는다. 외적 고요보다도 내적 고요함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한 마음을 갖는다. 고요한 마음 을 갖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찬송을 한두 곡 조용히 부 르거나 십자가를 조용히 응시해도 좋다.

 

성경 읽기

성경을 읽을 때 정해진 절대적인 원칙은 없다. 전통적인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성경 읽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소리 내어 읽거나(음독,音讀)혹은 소리 없이 조용히 묵독(默讀)할 수 있다.

· 정해진 본문을 작은 소리로 반복해서 3~5번 읖조리며 읽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묵독할 수도 있다.

소리가 귀를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도록 읽는다. 마치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듯이 천천히 읽는다.

· 성경말씀 중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나 이미지 가 있기까지 계속 읽는다.

 

묵상

· 마음에 와 닿은 구절, 단어, 이미지의 의미와 뜻을 깊 이 숙고한다.

· 묵상하는 과정에서 마치 손의 압점에 수지침을 놓듯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다면 그 점에 특히 유의한 다.

·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통해 이해력과 기억력과 상상 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으려는 자세를 가져 라.

 

기도

· 묵상하는 동안 마음에서 느껴지고 깨달아진 것을 있는 그대로, 영혼이 공명되듯이 오롯이 하나님께 올려 드 린다.

· 회개나 반성에 대한 것이라면 회개의 영을 올려 드린 다.

· 기쁨이나 새로운 결심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올려 드린 다.

 

관상

· 깊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기쁨, 감사, 임재를 깊이 누리며 맛본다.

· 이때는 대개 수동적인 상태이므로 고요히 하나님의 이 끄심 안에 머무는 것이 좋다.

 

기도 돌아보기-기도반추(祈禱反芻)

기도반추는 말씀으로 기도하기의 끝 부분에 드리는 마무리 부분이다. 기도는 일회적으로 마치기도 하지만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반추의 일차적 의미는 기도의 마무리이며 이차적 의미는 다음에 이어서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기도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다.

주기도나 감사기도 혹은 찬송으로 기도를 마친 후에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하게 기록한다.

· 나에게 특별히 다가온 단어나 말씀이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지 기록한다.

· 이때 어떠한 느낌이나 깨달음, 혹은 내면의 움직임이 무엇인지 기록한다.

· 다음 기도에서 다시 반복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기 록하였다가 이어서 기도한다.

· 나에게 다가온 은혜의 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삶으 로 나아간다.

 

 

 

 2-1 하나님과의 관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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