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타자와의 관계

(개인, 사회, 자연)

 

 

1. 타자와의 관계의 핵심원리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는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의 변화를 유발한다. 이는 세상과 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겸비하게 받아들여 '참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참 나''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이며, 하나님의 기쁨인 자'이다. 나는 나를 정죄하는 최후의 심판관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바울 사도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무조건적 수용을 받아들여 나와 나 자신 사이의 화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참 나'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변화, 즉 이타적 관계로의 변화라는 열매를 산출한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타자와의 관계의 변화라는 열매가 없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의 변화의 진실성은 의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확증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만 입증될 수밖에 없다는 성경의 증언이다. ,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하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어떤 종교적 행위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즉 타인과의 이타적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입증하는 징표인 것이다.

이타적 중심성을 지닌 타자와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를 핵심원리로 삼고 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두 가지 핵심원리가 관철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소위 황금률로 알려진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타자와의 관계는 바로 이 황금률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타자를 위한 행위를 식별하는 방법론은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이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그 행동을 식별해 보아야 한다. 그 행동이 참으로 타자가 내게 행했을 때 내가 받고자 원하는 행동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다'는 식별의 결과를 동반한 행동은 이타적인 행동이 된다. '그렇지 않다'는 식별의 결론이 나오면, 그 행동은 실행에 옮기지 말아야 한다. 바로 황금률에 따른 식별을 거친 행동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요구하는 것, 그보다 정확하게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결론에 부합된다.

또 다른 원리는 바울 사도가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이다. 이 행동 원리는 바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이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반드시 관철되어야 하는 원리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취해지는 모든 행동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가의 관점에서 식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실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난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타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으심, 선하심, 사랑, 긍휼, 온유, 겸손, 용서 등을 발견하여 기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그만큼 더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모든 행동을 식별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든 행동의 목적이기도 한다.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모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ha)이다. 그의 모든 신학적 사유, 목회적 활동,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삶을 관철하는 핵심적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핵심원리이다.

 

 

2. 개인과의 관계

 

1) 긍휼

 

타자와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 개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이다. 먼저 개인과의 관계에서 황금률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식별의 통로를 통해 흘러나올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긍휼(compassion)이다. 긍휼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이다. 긍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정(pity)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향한 자신의 행동이 긍휼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동정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긍휼은 긍휼의 행위자와 대상자가 서로 동등한 것이다. 긍휼의 행위자와 대상자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긍휼을 실천하는 자가 "나도 당신과 동일한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긍휼의 대상자에 대해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걸하는 노숙자를 향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동전이나 지폐를 던져 주는 것은 동정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은근히 "나는 당신과 다르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을 전제하거나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긍휼은 노숙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같은 공간에 함께 서서 끌어안는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 또한 동정보다 긍휼을 받기 원한다. 이 점에서 긍휼은 황금률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인 인간에게 동정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긍휼을 보이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생활의 한 원리는 긍휼, 자기를 비워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 긍휼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 가운데 장막을 치고 인간과 함께 생활하신 것이다. 자기를 온전히 비워 인간과의 거리를 없애시고 친히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휼하시는 분, 즉 긍휼 그 자체이신 분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긍휼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에 임재하시고, 역사에 참여하시고, 인간과 깊이 연대하셔서 인간의 고난의 삶에 찾아오시는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 분이다. 이 점에서 긍휼의 참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긍휼을 실천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이 개인, 역사,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한 것처럼, 우리의 긍휼의 실천 또한 개인 대 개인의 차원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적이며 역사적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 , 긍휼의 실천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죄악과 탐욕에 바탕을 둔 불의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 야기된 인간의 고난과 고통을 직면하여 그것들을 해결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긍휼의 실천이 이루어질 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민'이다. 그 의미는 어머니의 떨리는 자궁을 뜻한다. 어머니는 태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자궁의 떨림을 통해서 태아와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긍휼은 타자에 대해 공감적 정서로 밀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긍휼은 타인과 동일한 자리에 서서 타인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자신과 함께 진정 기뻐하고, 자신과 함에 슬퍼해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과부와 고아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을 참된 경건이라 말씀하고 있다.

긍휼은 타인의 연약함과 고난에 마음이 이끌리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손실이나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능력이다. 긍휼은 타인과의 교제와 연약한 자와의 연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게 만든다. 따라서 긍휼은 오늘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쟁이란 가치를 넘어선다. 경쟁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입증함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경쟁을 통한 자신의 존재가치의 실현은 쉽게 무너진다. 참된 존재가치는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하나님, 타인과의 교제, 타인을 섬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경쟁으로 가득한 거짓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 행각의 38년 된 병자를 연못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게 해 주는 방식, 즉 경쟁의 논리에 따라 치유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치유하심으로 참된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이렇듯 참된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경쟁이 아닌 긍휼인 것이다.

 

2) 환대

 

환대란 용어는 손님과 주인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라틴어 호스페스(hospes)에서 유래되었다. 이 라틴어의 배후에는 '환영을 받은 혹은 환영을 하는 나그네, 이방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제노스(xenos)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환대는 나그네,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한 은혜를 의미하며, 상호성을 그 특징으로 지닌다. 헨리 나우웬은 환대를 "낯선 이가 들어와서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환대는 우선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안에 당신을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당신도 우리 안에 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대는 낯선 이를 우리의 공간 안에 받아들여 우리의 방식대로 그를 돕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환대는 독일어로는 '가스프로인트샤프트'(Gastfreundschaft)인데, 이 말의 의미는 '손님을 위한 우정'이다. 네덜란드어로는 '하스토레이하이트'(Gasforijheid)인데 '손님의 자유'라는 뜻이다. 따라서 환대는 우리의 공간 안에 낯선 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 안에서 낯선 이가 자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지내면서 우정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낯선 이를 집 안으로 맞아들인다는 일차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이 동료 인간에 대해 지녀야 할 기본적인 관계적 태도를 뜻한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신앙적 의무라고 성경은 말한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명한다. 그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제사장들이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제사장들에게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라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유리하는 나그네, 아람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율법은 명한다. 이는 바로 너희가 누구였는가를 잊지 말고,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것이다.

신약성경도 환대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하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참 본향으로 여기고 그 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나그네와 순례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대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고 나그네를 잘 환대하여야한다. 환대는 초대교회의 감독이 지녀야 할 자격 요건 중 하나였다. 또한 신약성경은 환대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비전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환대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이웃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환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타인은 적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 타인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복된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환대를 개인 관계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실천해야 한다

 

3) 영혼의 친구 되기와 영성지도 실천

 

개인과의 관계에서 긍휼과 환대를 종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바로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영혼의 친구는 영성지도의 켈틱 전통에 따른 표현이다. 산드라 슈나이더스에 따르면 영성지도는 일대일 관계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능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적 만남을 통하여 동료 그리스도인이 영적생활의 영역에서 성숙해 가도록 돕는다. 영성지도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지도자와 피지도자와의 인격적 만남은 오직 피지도자의 영적성숙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는다. 월리엄 코놀리와 월리엄 베리의 정의에 따르면 영성지도는 "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도움"이다. 이 도움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사소통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도록, 또한 의사소통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과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지도를 구하는 동료 그리스도인(피지도자)은 영적 여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피지도자는 영적 여정의 순례자다.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대이다. 환대가 없다면 순례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영성지도는 영성지도자가 영적여정의 순례를 하고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초대하여 물리적, 그리고 영적공간을 만들어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고, 동료 그리스도인이 그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주의를 집중하여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도록 도와주고,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친구(피지도자=순례자)를 맞이하는 따뜻한 '환대의 마음', 영혼의 친구의 신발을 신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긍휼', 오직 영혼의 친구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타적 마음'이다.

이 따뜻한 환대의 마음을 가진 영성지도자가 있을 때에 비로소 영성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에 신뢰관계가 생기고, 그 신뢰관계로 말미암아 피지도자가 자신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영혼의 친구의 신발을 신고 피지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긍휼은 지도자의 공감적 경청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피지도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지도자의 이타적 마음은 피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하나님체험을 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의 이끌어내는 경청을 가능하게 해 주며, 또한 피지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의 관조적 경청을 가능하게 해 준다.

 

 

3. 사회와의 관계

 

그리스도인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핵심원리인 황금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은 개인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관철되어야할 원리이다. 사회 안에서의 이 원리들의 실천 방안으로 우선 네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이웃의 재발견과 이웃 사랑,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하향운동, 관조적 의사결정이다.

 

1) 이웃의 재발견과 이웃 사랑의 실천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으로 축약될 수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는 오직 그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의 참된 증거가 종교적 예식과 행위들에 있지 않고 이웃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그렇기에 참된 하나님 사랑의 증거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고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므로, 결국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징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 즉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재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웃이 누구인가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 이웃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웃에 대한 이해는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되묻는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에는 이웃의 정의가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결국에는 자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발견되는 이웃은 자신을 중심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웃은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정의된다.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 것이다. 그러니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이며 나는 그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이웃은 나와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이다. 강도 만난 자가 자신의 혈족이나 가까운 이웃이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에서 본 강도 만난 자는 모르는 자, 낯선 이, 즉 이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 직무 수행 쪽을 택하고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을 것이다.

강도 만난 자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최후 심판에 관한 양과 염소의 비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곧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푼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된 자는 양의 편에 속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은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영생에 관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것은 바로 황금률의 실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강도 만난 자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므로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황금률의 실천이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이 되는 것이며, 달리 말해 강도만난 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현존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2)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실천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 즉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과부와 고아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마땅히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한다는 윤리적 당위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가난한 자가 돌보는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일견하는 은총을 제공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본질인즉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열쇠를 얻는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직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탈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돕는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교회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초대교회는 극심한 박해의 시기를 종말론적 희망과 구원의 효과적인 보증으로 강조되었던 형제적 사랑의 실천으로 이겨 냈다. 클레멘트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은 구원이란 주제와 함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랑의 실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부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가난 자체를 칭송하지는 않았지만,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초기 수도원운동 또한 자발적 가난의 실천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초기수도원운동의 가난의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약의 두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부자 청년을 부르신 말씀(19:21)과 형제애의 사랑으로 하나가 된 예루살렘 공동체에 관한 말씀(2:44; 4:32~35)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에게는 세상의 부에 대한 전적 포기가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성도들이 구제에 열심을 내도록 북돋았다. 제롬과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상속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상속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리스도와 부를 나누도록 권면했다. 노라의 폴리누스는 그의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볼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발견되며, 모든 궁핍한 사람들 안에서 만져지고, 환영받은 모든 나그네들 가운데서 환대받는다고 답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리스도와의 연대로 간주해 왔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한 교회의 자발적 가난의 실천은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에서 제공한 "세 종류의 사람들"의 묵상에 등장하는 세 번째 사람의 부류여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획득한 재물로부터 초연해진 마음을 얻기 원하지만 일평생 아무런 구체적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획득된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초연한 마음을 얻기 원한다. 그리고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그렇게 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하면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 이 사람은 재물을 자신이 관리한 채 적당한 양의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재물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면 거부한다. 세번째 종류의 사람은 획득한 재물에 대한 초연한 마음을 얻기를 원한다. 이 사람은 재물을 자신이 관리하여 사용하든지, 아니면 재물을 포기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신 바를 따를 뿐이며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자 하는 갈망만이 이 사람이 재물을 사용하거나 혹은 포기하거나 하는 유일한 동기이다.

 

3) 둘라키(하향)운동의 실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둘라키의 원리이다. 둘라키는 종의 의미를 지닌 둘로스(δολος)라는 헬라어와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하이어라키(hierarchy)의 결합어이다. 둘라키의 원리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는 말씀에 기초한 원리이다. , 섬기는 자가 높아진다는 원리이다. 이 둘라키의 원리는 예수께서도 직접 실천하신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뛰어난 이름이 된 것은 둘라키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셨다. 가장 낮아져 섬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둘라키라면 교회의 현존 양식은 상향운동이 아니라 하향운동이 되어야한다. 헨리 나우웬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많이들은 격려의 말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것과 함께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이러한 상향운동을 장려하는 말은 성경에서 일체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표한다. 하향운동은 예수께서 자신의 비워 성육신하신 자기 비움(kenosis)의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하향운동은 가난한 사람들, 고난당한 사람들, 주변부 인생들, 죄수들, 난민들, 외국인 노동자들, 고문당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노숙자들, 죽어 가는 사람들, 즉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하나 되는 운동이다.

 

4) 관조적 의사결정 실천

 

사회가 경제적으로 양극화되고, 정치적으로도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양극화가 심화되면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이 폭력적이 되기 쉽다. 교회는 사회에 비폭력적인 의사결정 과정의 모범을 보이고, 그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비폭력적 의사결정 과정의 핵심에는 관조적 의사결정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관조적 의사결정은 침묵의 중요성과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의 추구를 두 축으로 하는 의사결정이다. 또한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된다. 그러나 토론이 격해지면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토론한다. 그러다 다시 토론이 격해지면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토론은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유익되는가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가의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사회에서의 토론은 보다 더 큰 공동선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관조적 의사결정 과정이 사회의 주도적 문화로 자리 잡으면, 사회는 훨씬 비폭력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자연과의 관계

 

1) 하나님의 영광의 발견

 

하나님의 영광의 성서적 의미는 고난당하는 백성들 한복판에 현현한 하나님의 임재와 행동이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온전한 극치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다(고전 10:31). 여기서 영광은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목적으로 세상의 허물과 죄악을 공유하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2세기 주교이며 신학자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함축하여 "글로리아 데이 비벤스 호모"(Gloria Dei vivens homo)라는 경구를 제시한다. 이 경구는 하나님의 영광은 각 개인을 포함한 전 인류가 왜곡과 억눌림이 없이 온전히 충일한 생명으로 살아가는데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념의 확장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온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왜곡과 억눌림 없이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온전한 생명의 충일함으로 살아가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해야 한다. 개혁교회 종교개혁자인 칼뱅은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라고 주장했다. 우주 자연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만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러므로 자연의 훼손과 그에 따른 피조물들의 신음과 한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약화시키며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2) 생명의 연대성 실천

 

오늘날 기독교 영성이 심각하게 직면한 도전은 모더니즘에서 나온 과장되고 배타적인 인간 중심의 사고이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지구를 대상화시켰다. 마치 인간은 자신이 지구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을 초월한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지구의 땅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통제하고 조종하고 변경시켰다. 이러한 자연의 파괴와 생명의 신음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 또한 지구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혹은 단일성 안에 속한 한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좀 더 확장하면 태양을 형님, 달을 누이라고 부른 프란시스코의 비전처럼 인간은 우주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안에 속한한 가족이라는 의식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범신론적 세계관이나 자연의 힘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낭만적인 세계관으로의 퇴행적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전환은 참된 성서적 관점의 회복을 의미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일성과 상호적 내적 연결성을 지닌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 준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지닌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은 자연의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성찬적 현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 인간은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지탱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돌봄의 몫을 나누어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피조세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세계의 한 일부이면서 동시에 피조세계를 위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세계의 청지기일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의 동반자(companion)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세상을, 즉 모든 피조세계를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이에 맞는 인간과 자연은 유기체적 생명의 연대성과 구원의 연대성을 지닌 동반자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그 인식에 걸맞는 실천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2-3 타자와의 관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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