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소년 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다락방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그것은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방은 책과 그림 그리고 20세기 초에나 사용되었을 법한 오래 된 가구들이 즐비해, 내게는 보물 창고나 다름 없었다. 그 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청나게 넓은 저택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던 탓에, 오래 되었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저장고 역할을 해왔다. 이런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 어딘가에는 '그것들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라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다.

그 후 나는 이와 똑같은 태도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思考)에 있어 훌륭한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뢰할 만한 기독교 신학과 영성은 과거의 사상과 가치를 진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앞으로도 의미 있게 사용될 것으로 간주한다. 특별히 고전적 복음주의 영성의

토대를 놓은 '종교개혁 영성' (the spirituality of the Reformation)이 이에 해당한다. '고전적'(classic)이라는 개념은 복잡하고 그 안에 많은 중요한 개념들을 담고 있다. 고전(古典)은 하나의 판단기준이 되며,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하나의 자원으로 남아, 그 의미와 적실성이 그 시대에 소멸되지 않고 다른 시대에도 의미 있게 사용된다.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베토벤의 (3번교향곡 영웅) 그리고 플라톤의 (공화국)이 모두 현대에 와서도 변함없이 이 시대와 적실성을 유지하고 있는 고전들의 본보기이다. 현대에 나온 저술들은 기껏해야 한두 세대 그 소임을 수행할 뿐이지만, 고전은 계속하여 그 생명을 이어가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 영성은 고전적 자원이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가 자기를 이해하도록 돕는 아주 중요한 판단 기준이며, 현대 복음주의의 필요에 부응하는 지속적인 자원으로도 사용된다.

기독교 역사상의 다른 많은 시대들처럼, 종교개혁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위르겐 물트만 Jurgen Moltmann)(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The CrucifIed God, 이 시대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가장 훌륭하게 설명해 놓은 책이다, 한국신학연구소(역간)과 같은 작품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이 갖고 있는 상당한 잠재력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영성은 고전적인 복음주의 영성의 토대를 놓은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종교개혁 영성은 마치 연기로 가득찬 방속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듯, 새롭고 활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우리가 다시 한번 새롭게,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우리의 뿌리인 성경으로 돌아가 상고(詳考)하라고 초대하고 있다.

종교개혁적인 영성은, 여전히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의 삶이라는 현실에 뛰어들려는 현대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대안이다. 왜냐하면 고전적 복음주의 영성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하나의 접근법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실제로 이루신 구속(救贖)에 대한 성경속의 모든 증거들이 일상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도록 해준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고 존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과 관련성을 가지는 책으로 인정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접근법을 격리된 수도원이나 대학이라는 상아탑 속에서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 새로운 접근법들은 근대 초기, 대도시라는 도가니의 열기 속에서 담금질되고 검중된 것들이었다. 시험을 거쳤고 검증도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무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 책은 기독교 영성에 대한 고전적 접근법을 회복하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썼다.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가는 많은 교회들이 영적 갱신을 위해 자신의 복음주의적 뿌리로 되돌아가려고 결심한다면, 이 책은 그 전통이 담고 있는 몇몇 풍성한 유산들을 지금의 상속자들이 선용하게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성장과 발전의 선행 조건이 그 영적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고전적 접근방식을 통해 복음주의 영성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고 선용할 수 있도록 종교개혁의 영성은 재발견되어야만 한다. 현대 미국인의 종교 생활을 살펴본 근래의 많은 조사 결과들이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글에 담긴 생각들을 쉽게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영성이라는 주제에 관해 다른 시대에 나누어졌던 대화를 현대인들이 엿듣도록 돕고자 애썼다. 아무 생각없이 과거로 뒷걸음질치지 않았으며, 기독교 역사상 진실로 창조적이고 흥미로웠던 순간을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감사가 묻어나도록 다루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잊고 억눌러왔던 것을 재발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조각들로 나눠진 우리 세계를 어떻게 다시 하나로 모을지 그 방도(方途)를 배우는 일이다. 이는 또한 개혁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는 작업이며, 종교개혁이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아온 것과 얼마나 다른지 발견하게 한다.

1990년 미국 드루 대학교(Drew University)의 한 강좌에서, 뉴 잉글랜드 지역 출신의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고 일반 신자로 이루어진 청중들을 상대로하며 '종교개혁 영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종교개혁 영성의 본질과 그것이 이 시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되었고, 나아가 목회에 그것을 선용하고 싶어하는 청중들과 함께 이에 관해 탐구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이 강의들이 상당히 뜨거운 반응을 불러오면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과 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드루 대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토머스 오글리트리(Thomas Oetree)(지금은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제임스 올트(James Ault) 주교님과 호의를 베풀어 준 드루 대학교 신학부에도 감사드린다. 또한 그 무렵 프린스턴 신학대학원과 메모리얼 교회, 하버드 대학교에서 했던 공개강연들로부터 관련 자료들을 끌어다가 포함시켰다. 또한 1991년 봄에 캘리포니아주 헐리우드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열렸던 '개혁을 위해 연합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United for Reformation: CURE)' 총회에 제출하기 위해 그 자료를 새로 고쳐 썼다. 거기서 받았던 많은 유익한 조언들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호의를 베풀어 준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종교개혁 영성에 담긴 이런 생각들이 헐리우드에서 통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도 이것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저술에서 인용한 글에 대하여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원전(原典)에 담겨 있는 신선함을 전달하고자 16세기의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원전을 직접 번역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몇몇 부분의 말과 개념들에 대해서는 해석과 함께, 다르게 바꿔 써야만 했다. 원전이 담고 있는 의미에 어떤 왜곡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많이 생각한 끝에, 나는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출처들은 굳이 학문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이런 성격의 작품에는 필요치 않다.

소망이 있다면, 이 책에서 제시된 여러 성찰들을 앞으로 학문 차원에서 완전하게 제시한 책을 쓰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처럼 두드러지게 역동성이 충만하고 창조성이 흘러넘치던 시대의 영성을 완전하게 설명하려면, 가톨릭 복음주의의 풍성하고 귀중한 공헌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나바르의 마거리트(Marguerite do Navarre)와 가스파로 콘타리니(Gasparo Corltarini)와 같은 이들의 저작들도 활용되어야 한다. 아울러 종교개혁 영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이루어지려면, 기독교 전통의 기도와 예배 의식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자원들도 원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에 가장 탁월한 저술가와 사상가들이 달려들었음에도 역사에 의해 '소수'(minor)로 불린 유럽 전역의 개혁자들이 남긴 화려한 유산들을 망라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현재는 다만 꿈일 뿐인 저술을 시작하게 되면, 그 책에서는 모든 참고 문헌과 인용처를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하겠다. 그동안은 이 책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이 갖고 있는 한계들에 대하여 충분히 사과했다고 보고, 이제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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