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영성과 정체성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 79-106

 

 

 

기독교의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은 개혁자들이 쓴 글 안에 가득 차 있다. 기독교가 거듭나고 새 모습으로 다시 빚어져야만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중세의 기독교 양식들이 새로운 시대와 한정된 영역에만 관련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양식들이 곧 진짜 기독교를 왜곡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종교개혁자들의 저술 속에서는 다음의 주제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가야 하며 기독교 복음의 순전한 양식을 다시 소유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말이다. 순전성은 관련성을 드러내는 시금석인즉, 순전한 복음이라면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견고한 영속성(永續性)을 잃지 않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주제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 파오로 지오비오(Paolo Giovio)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역사에서 문화가 '다시 태어났던 위대한 시대- 에서 차지했던 중요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생각이 시대 상황과 맺고 있던 관련성을 깨닫고자 한다.

 

사례 연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낳은 문화의 뿌리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유럽 문화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창조성이 충만했던 시대들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다. 전 세계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1350년부터 1550년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북부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문화의 탁월한 독창성과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시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16세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사실상 서유럽의 모든 지역들이 이 놀라운 열정과 이상(理想)으로부터 감화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에 이런 에너지, 곧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술을 향해 치닫던 흥분이 장엄한 폭발을 일으킨 뒷면에는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복잡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부분을 단 두 개의 라틴어 단어로 얘기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AD FONTES'(원천[源泉]으로). 이탈리아 문화는 오랫동안 명맥이 끊어졌던 로마의 고전 문화를 이어받은 근대의 상속자이자 옹호자로 자신을 간주함으로써, 새로운 목적과 존엄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다. 즉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고대 로마 문화를 근세에 되살린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예술가, 건축가, 시인, 문필가 그리고 신학자들은 바로 이런 이상(理想), 곧 고대 로마를 되살린다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나간 때의 영광과, 문화의 자취라곤 찾을 수 없는 황량한 14세기 이탈리아가 서로 교감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 이로써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새로운 문명의 요람이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탄생지요 요람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이탈리아 작가들은 자신들을 문화의 뿌리, 곧 고전 시대의 로마세계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여겼다. 흐르는 물은 무릇 근원이 순수한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진흙투성이인데다가 고여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물과 같은 당대(當代)의 문화에 만족하지 않고, 가장 순수한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다. 문화의 역사가 갖고 있던 뿌리들을 현재(現在)라는 토양에 옮겨 심어, 그 현재에 시사점을 제공하고 자극하며 나아가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싹이 돋아나게 되었다. 창조성의 분출(噴出)로 인해, 문화의 뿌리들로 돌아감으로써 갖는 잠재 효과들을 생생하고 강력하게 목격하였으며, 나아가 그것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르네상스가 과거를 재발견함으로써 가져온 열광은, 그러나, 고전 문화의 가장 작은 부분만이 회복되었을 뿐이라는 깨달음으로 인해 진정되었다. 그 거대했던 부분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달았다. 남아 있던 그 가장 작은 부분이 르네상스에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로베르토 와이스(Roberto Weiss)는 그가 쓴 (르네상스가 발견한 고전 유물) (Renaissan- ce Discovery of Classical Antiquity)에서, 고대 유물에 대한 흥미와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탈리아에 있던 고대 유적들이 중요한 기여를 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고대 유적들을, 여행자들이 유명한 교회이나 성물(聖物)이 있는 곳을 찾아갈 때 길잡이가 되는 편리한 이정표로, 아니면 고품질의 건축 재료들을 값싸게 제공하는 장소 정도로 치부하였다. 이 장려(壯麗)한 고대 유물들이 과거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 유물들은 그것들이 지금 얼마나 쓸모가 있는가에 가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역사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고대 유적들은 고전 문명 및 문화와 만나는 장소를 제공했다. 폐허가 된 로마의 유적을 이리저리 걸어보고 로마의 문학 작품들을 읽으며 그 시대의 언어를 통달함으로써, 로마의 정신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고대 유물과 기록들에 담긴 역사를 탐구하는 일에 관심이 고조되고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증거가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의 연구를 향한 흥미가 고양되었으니, 이미 그 안에 현대 고고학의 씨앗들이 자라고 있었다. 카이사르(lulius Caesar, BC 100-44)가 건넜던 루비콘 강이 15-l6세기 이탈리아에서 어느 강에 해당하는가 - 피우미치노(the Fiumicino), 피쉬아텔로(the Pisciatello) 그리고 우쏘(the Uso)가 루비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 를 놓고 당시에 벌어졌던 토론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과거는 로마유적의 모습으로, 아니면 건축자, 도굴꾼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고대 유물들의 실제 형상으로 현존(現存)하고 있었다. (1485419, 석관(石棺) 속에서 실제로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던 한 로마소녀의 시신이 그 본보기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 1337년 봄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면서, 최고의 안내서들로 무장한 여행 동료 지오반니 콜로(Giovanni Colonna)와 함께, 그 고대 도시의 유적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녀 볼 기회가 있었다. 몇 주 뒤 콜로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트라르카는 고대 도시 로마에 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두려움, 나아가 베르길리우스(Vergilius)와 리비우스(Livius)를 회상하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상상력을 되살려 내고 있다. 페트라르카가 고대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 자신의 감정을 옮겨 실으면서 가졌던 느낌은, 당시 파두아파(the Paduan school)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4세기를 살던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르네상스는 그 자신을 고전 시대의 풍부한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로 간주하였다. 르네상스는 자신이 고전 시대의 유물에 담긴 영광스러운 문화를 통해 당대의 빈곤한 문화를 바꿀 책임을 엄숙하게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고전 문화는 죽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 살아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 고전 시대의 패러다임에 현재를 바꿀 기회를 기꺼이 허락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문화 프로그램이 '원천으로(ad fontes)' 라는 구호 뒤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예술을 자극하는 원천 그 이상의 것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과거는 현재를 밝혀줄 수 있는 것들로, 역사 속에서 고정된 유형들로 간주되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는 이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체 역사를 꼼꼼히 살펴본다면, 그는 같은 유형으로 되풀이되는 인간사의 전형(典型)들을 쉽게 발견할 것이며, 바로 그 인간사 속에서 비록 그 어떤 일도 정확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날마다 우리는 과거 사건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영상이 다시 새로워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고전시대 로마의 역사는 현재를 비춰 줄 잠재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졌다. 그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에 전개된 역사의 발전 양상들과 가능성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도시 국가들에게, 고전 로마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조명해 줄 하나의 본보기였다. 고전 시대를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상속인들은 그 고전 시대 역사의 메아리가 자신이 사는 시대 속에서 발견되리라 기대하였다. '거기 그리고 그때' 가 현재의 '여기 그리고 지금' 을 쉽게 밝혀줄 수 있었다. 고전 시대와 한 몸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이런 자각(自覺)은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던 정치 세력과 군사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던 16세기의 많은 공동체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특별히 중요한 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다. 1494, 프랑스 왕이었던 샤를 7(Charles VII)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였다. 충격파는 그 지역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한창 만발하던 때에 피렌체와 같은 도시들의 정교한 문화들이 소멸될 위협을 받았다. 한 때 프랑스 왕궁에서 피렌체를 대표하였던 마키아벨리는 음울한 어조로 말하기를, 난폭한 힘에 대한 방어책으로 문화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어떤 공동체가 위협을 받으면, 그 공동체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정체성을 재발견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것이 정확히 그 시대에 일어났다. 피렌체는 고대 로마와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저항의지가 굳건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피렌체도 야만인들로부터 약탈당하던 고대 로마와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고대 로마와 이어진 연결 고리들이 공동체의 연대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16세기 초, 특별히 마리그나노(Marignano)에서 스위스인들은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면서 일어났다(1515).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스위스인들은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국제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스위스 연방은 약하디 약한 정치와 문화의 결합체였는데, 심지어 전성기 때에도 외부로부터 존재를 위협 받았으며, 문화 프로그램을 왕성하게 발전시켜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였다.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들(민족의 정체성과 언어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개념으로 치부하였던 에라스무스와 두드러지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민족주의자로서 갖고 있는 이상에 헌신하였으며, 그를 통해 스위스의 정체성은 문단(文壇)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로 인해 확인되었다.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당시의 이야기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연방 형성기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敍事)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유명한 것은 1512년에 확실한 형태를 갖추었던 빌헬름 텔(Wilhelm Tell)의 신화이다. 이 이야기는 스위스 연방의 핵심 가치들이 무엇인지와 그것들이 과거에 어떤 영웅들의 헌신을 통해 지켜졌는지 말해주었다. 나아가 그 가치들은 현대에도 지킬 만한 것들임을 이야기는 암시하고 있다. 스위스가 간직한 가치들의 뿌리를 되새겨 봄으로써, 현대의 빌헬름 텔의 후계자들은 그 가치들을 갱신하고, 재확인하며 수호하는 대열에 초청받는다. 이런 모습은 비단 이탈리아 르네상스 또는 유럽의 종교개혁이라는 세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도 너무나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현대 서구 문화에서 갖고 있는 중요성을 살펴봄으로써 이를 잘 보여줄 수 있다. 그 특별한 예로 현대 미국의 사례를 들겠다.

 

 

현대 문화에 나타나고 있는 뿌리 되찾기: 미국

 

미국의 역사는 종교개혁 영성에 큰 중요성을 갖고 있는 한 가지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된 사람들에겐 뿌리야말로 중요한 문제다.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크고 뚜렷하지 못한 문화에 정복당할 위험에 직면한 민족들은 이에 저항하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는가? 자신들만이 가진 독특성을 강조함으로써 저항을 표출하는 것이다. 한 민족이 자신의 독특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민족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그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이는 곧 세상에서 그 민족의 자리와 목적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인 루이스 심슨(Lewis Simpson)(남부가 되찾을 기억과 역사) (The Southern Recoverf of Memory and History)라는 자신의 수필에서, 점점 더 많은 공장 굴뚝이 미국 남부를 뒤덮어 가면서 소외의 고통을 맛보던 많은 현대 남부인들에게, 전원의 정취로 그득했던 옛적 남부의 환상(幻想)이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심슨이 지적하듯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나 자신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던 (과거와 이어진) 생명의 끈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월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소설들 속에서처럼, 남부인들이 쏟아낸 많은 문학 작품들을 뒤덮고 있다. 메마르고 무언가 만들어낼 힘을 잃어버린 사회 속에서 문화라는 오아시스를 되찾기 위해, 소외라는 느낌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새로운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문화의 뿌리를 회복함으로써 과거는 현재에도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 포크너가 강조하였던 원리처럼, '과거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에,진실로 과거의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미국을 보면 이런 현상을 널리 추적할 수 있다. 자신들의 문화가 가진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열심인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커다란 헌신과 열정을 쏟으면서, 자신들의 뿌리가 아일랜드에 있음을 기억하는 축제를 연다. ()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은 아일랜드공화국의 수도인 더블린(Dublin)보다 오히려 뉴욕에서 더 열렬하게 지켜진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독특함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의 경우에도 똑같은 진리가 적용되는데, 그 공동체에서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한다.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1970년대에 발표한 소설 (뿌리) (Rooti)는 이와 같이 과거에 뿌리를 두었음을 깨닫는 의식(意識)을 향하여 심오하면서도 감성을 파고드는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과거의 뿌리를 되짚어보는 것은 현재의 정체성을 보존하는데 도움을 준다. 지금 여기 있는 당신이 누구인가는,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당신이 유래한곳이 있었기에 그 모습이 된 것이다.

루이스 심슨은 현대 미국을 가리켜, 뿌리도 없이 고립되어 버린 의식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기만을 추구하느라 정작 기억과 역사와 맺은 언약은 폐지된 곳'으로 묘사하였다. 개리슨 케일러가 꾸며낸 작은 도시 레이크와 비곤(lake Wobegon)이 현대의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호소력을 발휘한 이유가 어쩌면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케일러는 1980년대에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쇼에서, 뭔가에 소속되어 있고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추억을 공유하고,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의식 세계를 깊이 다룬바있다. 레이크와 비곤은 사람들이 그 곳에 뿌리를 내린 채, 그 곳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는 곳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모습이 결코 현대 미국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문화 분석가들은 정작 이것들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많은 미국인들이 바라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안녕과 영성의 안정을 얻으려면, 개인이든 사회든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소속되고자 목말라한다. 청소년들이 폭력배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은 결국 그것을 통해 소속되었다는 의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가정 문제, 학업 문제 등이 있고, 자신들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조직에서 만큼은 아니다.

이 점을 약간 다른 방향으로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만일 어떤 무리가 자신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낄 경우, 그들은 자신의 문화적인 개성을 지키려고 온 힘을 쏟는다. 그런 위험은 몇 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마치 가족들이 경영하는 작은 회사가 거대한 기업에 넘어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처럼, 자신이 더 큰 전체 속으로 흡수되어 버릴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북미(北美)에 사는 에이레 출신들에게는 이 말이 확실히 들어맞는다. 아니면 마치 1930-40년대에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그랬던 경우처럼, 그들을 제거하는데 뿌리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로부터 거센 탄압을 받을 수 있다. 그 위협이 실제적이든 아니면 그저 상상 속의 위협에 불과하든, 그 결과는 똑같다. 그 무리는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보존하려고 내부 결속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이일에 실패하면 다른 문화 속으로 흡수되는 위험을 맞게 되고, 이제까지 그들을 지탱하던 전통을 망각하는 것이 된다.

1960년대에 미국의 많은 정치 사회 분야 저술가들은 여러 가지 문화가 뒤섞여 있는 다문화사회가 등장할 것을 말한 바 있다. 그 저술가들은, 마치 하나의 용광로처럼 사회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 요소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같은 모습을 가진 결과물을 내놓을 것을 말하려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그 이미지는 바뀌었다. 뒤섞여진 샐러드는 현대 문화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아무런 특성도 없이 획일성을 띠는 지구촌 문화 속에 잠긴다는 생각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용광로' 라는 이미지가 지속된다면, 문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은 관심 밖의 일이 될 것이며, 더 심하면 진실로 통합된 다문화사회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만 될 것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와 같은 모습을 지혜롭게 포기함으로써, 더 현실성 있고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접근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각각의 문화는 자신이 들어가 있는 더 큰 문화에 나름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자신의 독특함을 잃지 않고 있다. 이 모델은 그런 하나하나의 문화들이 가진 개성과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그 뿌리를 주의 깊고 신중하게 기억 속으로 되살려 내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르네상스와 미국의 현대 문화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주제가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뿌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어디로부터 유래하였는지 그 연원을 알 수 있는 통찰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거 문화의 풍성함을 빈곤함이 뒤덮고 있는 현재에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미래의 목표들을 얼핏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지평들을 융합시키는 것이 역사가들의 과업이며, 이를 통해 과거가 현재와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의 뿌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연속성을 깨닫고,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아울러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견고하게 역사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현대 미국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례 연구를 통해, 과거가 정체성을 부여하고 높이는 일에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잠시 시간을 할애하였다. 나는 이제 종교개혁 영성이 갖고 있는 이 중요한 측면 - , 과거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흡입하고 그 과거로부터 도전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 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놓았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이 종교개혁 영성의 핵심이다. 때문에 종교개혁을 '신앙의 순전한 뿌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자신의 근원을 기억할 때에야 -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다시 생각해 낸다'는 의미와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 비로소 자신의 목적과 소명에 충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가다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 테마 가운데 하나는 중세 시대가 흘러가는 동안 교회가 갈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중세라는 시대는 세속의 질서 안에 교회가 휩쓸려 들어가면서 교회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관심사들이 그 질서에 압도당한 때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오히려 그처럼 세속 질서 안으로 쓸려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중세 교회의 역사는 속세의 일에 교회의 재력을 과용(過用)하고 개인이 지나치게 세상사에 관여함으로써 무슨 일이 생길지 알려 주고 있다. 어쩌면 하나의 경고처럼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교황권은 세속 권력의 정점에 이르렀다. 교회의 은행업 체계는 차라리 현대의 다국적 기업을 중세에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에 가까울 정도였다. 실제로 1520년에 마르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던 교황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유명 인사였으며, 자신보다 더 탁월했던 많은 경쟁자들을 공공연히 매수하여 교황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치와 돈의 힘이 펼쳐지는 중심에는 부패의 징조들이 자리했다. 교회가 세속의 일에 지나치게 휩쓸려 들어가면서 동맥경화에 걸린 것이다. 겉보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이런 모습이 댓가를 치르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교황권의 찬란함이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점점 더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와 열망할 목적을 다시 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교회 안에서, 심지어 고위성직자들 사이에서도 표출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어떤 새 모델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델은 신약 성경 속의 초대 교회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교회의 근원에 비추어 근대 교회를 심판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아가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들이 고전 시대의 지평과 15세기의 지평을 유합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처럼, 종교 개혁자들도 신약 성경 때와 16세기의 지평을 융합하려고 시도하였다. 기독교회의 토대가 되는 사건들로 돌아감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순전한 뿌리들을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개혁자들은 논증하였다. 진흙투성인데다 고인 채 썩어 있던 중세 후기 교회라는 물은 꿀꺽꿀꺽 마실 수 없었지만, 기독교가 싱싱한 젊음을 간직하던 시절의 순수하고 시원한 샘물은 한 모금씩 마실 수 있었다.

원천에서 나오는 싱싱한 샘물을 한 모금 마신다는 것은 강력한 이상(理想)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서야 비로소 나타난 새로운 이상은 아니었다. 수도원에 몸담고 있던 12세기 프랑스의 저술가들도, 장차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일어났던 옥스퍼드 운동에 가담한 저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그런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세 후기 교회가 내세웠던 의심스러운 방법과 목표들에 신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그러한 이상들이 활용될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이미 문명의 원천으로 돌아간다는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그 뒤를 잇는 사람들이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지성과 문화적인 면으로 그 사상에 신뢰성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기대감을 갖고, 일어날 일을 한껏 고대하면서 성경을 읽었다. 본문 뒤에 하나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경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사람이 뒤바뀌는 경험이요, 교회가 공동으로 기억 속에 갖고 있던 경험이었다. 츠빙글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감으로써 철저하게 거듭난 기독교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태도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를 위해과거에 대한 기억과 역사의 회복이 필요했다. 또 하나의 구성 부분은 너무나 다른 모습의 교회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현재의 교회에 맞서 싸우기로 한 굳은 결심이었다. 마치 한 연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사이의 시들해진 관계를 되살리기 위해 연애하던 시절의 연서(戀書)들을 상대에게 증거로 들이밀 수 있듯이, 종교 개혁자들도 그 기억이 이제는 꺼져가는 잔불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면서 새 불씨가 될 것을 소망하였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는 비록 깨져 버렸지만 과거의 기억 및 전통과 맺었던 계약을 되살리는 것이었으며, 그를 통해 종교가 만들어내는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재생과 갱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먼저 현재를 심판하고 비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만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각자 매우 다른 기대를 갖고 성경에 있는 그들의 뿌리로 되돌아갔다. 루터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중세 교회의 신학과 영성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츠빙글리는 초기 신앙 공동체와 윤리 및 종교 차원의 연대를 형성한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자신이 살던 바로 그 시대에 사도 시대의 교회 구조를 재창출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자신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장자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권리증서를 되찾는 것이고 가능성이라는 환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그것은 피곤하여 기운이 빠져버린 신앙으로 하여금 활력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이 시작되었던 그 오아시스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편안한 듯 하지만 고인채 썩어 있는 확실함 속에 안주하던 중세 후기 종교에 화약통을 갖다놓고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추구한 방식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한 개혁자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셨던 사건을 자신이 살던 시대를 향하여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제시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의 뿌리를 다시 생각해내다: 성찬(聖餐)

 

앞부분에서, 나는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초기 스위스 연방의 경우를 들어 과거의 이야기에 호소하는 것이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지적하였었다. 츠빙글리가 주님의 만찬, 곧 성찬에 대하여 설파한 이론은 바로 이런 배경에 비추어 평가해야 한다. (나는 성찬[eucharist]을 성례[聖禮, saciament]를 가리키는데 사용할 것이다. 츠빙글리 자신은 '기억, '기념', 또는 '만찬 같은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였다.) 츠빙글리는 성찬이 기독교 공동체의 토대가 되는 사건을 이야기한다고 확언한다. 성찬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에 있는 가치와 열망들에 실체를 부여하고, 공동체가 한 몸이라는 자각과 공동체의 목적의식을 높이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츠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스위스 연방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던 사건들과 비교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1388년 나헌펠스(Nahefels)전투에서 누구보다도 연방을 심하게 억압하던 사람들(오스트리아인들)을 확실하게 물리침으로써 비로소 스위스 연방이 계속 존재하게 되었다고 여긴다. 이 전투에서 스위스 연방의 첫 구성원이었던 세 개의 칸톤(canton) 출신 병사들은 공동체를 향한 자신들의 충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입은 겉옷 소매에 하얀 십자가들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이 모양은 오늘날 스위스 국기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지역에서 온 병사들이었기에, 자칫 자신들의 명분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얀 십자가는 그들이 같은 편임을 인식하게 했다.

이 승리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기에 해마다 전장(戰場)을 순례하며 승리를 기념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자각시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스위스의 칸톤들(츠빙글리 당시에는 12개였다)은 사실상 독립국들이었고 스위스에 대한 충성을 망각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순례 여정은, 각 칸톤에서 온 대표자들이 함께 모여 과거에 연대를 통해 어떻게 자유가 보장되었는가와 나아가 미래에 누릴 자유 역시 그들의 단결에 달려 있음을 확인하면서, 한 몸을 이룬 스위스에 대한 충성심을 새롭게 하는 연례 행사였다.

이것을 유추하여, 츠빙글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옷에 하얀 십자가를 꿰매어 단다면, 그는 자신이 연방의 한 구성원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다. 또 만일 그가 나헌펠스를 순례하며 조상들에게 주어진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면, 그는 자신이 진실로 연방의 한 지체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세례의 표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는 것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나아가 그 가르침을 따라 삶을 살아가기로 단호하게 결심한 사람이다. 또 주를 기리는 만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회중들 앞에서 그가 중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뻐하고 나아가 그 죽으심 때문에 그분께 감사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두 가지를 주장하였다.

첫째, 스위스군()은 충성의 표지(標識)로 하얀 십자가가 새겨진 옷을 입었는데 이는 스위스 연방과 연방이 상징하는 모든 것에 충성한다는 점을 만인 앞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헌펠스에서 벌어진 사건들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그 공동체의 가치와 열망들까지 포함하여- 와 하나로 묶여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충성을 만인 앞에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확인 행위이며 그를 통해 신자들은 신앙공동체, 나아가 그 공동체의 가치 및 열망들과 맺은 연대를 확인한다.

둘째, 스위스 연방을 존재하게 하면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사건(나헌펠스 전투)은 충성의 표지로 되새겨지고 있다. 나헌펠스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그것이 이 시대에 갖는 중요성이 확인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 결과로 태어난 공동체가 계속 이어가길 원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준다. 이 이야기야말로 공동체를 함께 묶어주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목표를 설정한다. (현대 경영학의 여러 연구 결과는 한 기업체의 응집력을 확보하는데 목표에 대한 일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은 기독교회를 있게 하고 그 교회의 가치와 신앙 체계들을 형성하였던 역사의 한 사건을 교회를 향한 헌신의 표지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성찬은 기독교회가 세워지는 결과를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 교회와 거기 속한 지체들 그리고 교회의 가치들을 향한 신자의 충성을 공중 앞에 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되새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것은 츠빙글리가 성찬의 목적으로 이해했던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신자들 상호간에 헌신하고 있음을 만인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함께 묶어주는 -한편으로는 지체와 지체끼리,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끈을 확인하는 것이다.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 역시 그가 쓴 참된 말씀의 해설 (Exposition of the True Words, 1525)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포도주가든 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여 감사함으로 마시는 잔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되새기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을 믿는 우리 모두를 한 몸으로 묶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중요한 것은 외콜람파디우스가 라틴어에서 나온 용어인 'confede- rans.를 이 '하나로 묶는' 과정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와 똑같은 용어가 스위스 연방의 결합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성찬은 기독교의 뿌리로 되돌아감 -곧 신자의 삶과 교회의 생명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중요성을 되새기고 나아가 되찾아오는 것- 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확언하건대 여기에 교회의 원천이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정체성과 그 선교의 근원이 있다. 교회는 바로 여기로 되돌아가야 하며 처음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그 구속의 댓가를 되새겨 봄으로써 교회는 그것이 없다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묶어주고, 나아가 그들을 견고한 한 몸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대신에 공동체의 충성을 담보하는 다른 끈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 -곧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는 것- 를 망각한 것이다. 츠빙글리에게, 기독교의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잠시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고대 로마의 건축 유적들이 당대에 현존한다는 사실은 르네상스 시대를 살던 사상가들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여기에 과거 -여전히 현재를 빚어낼 수 있는 어떤 과거- 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츠윙글리는 그 유적과 너무나 같은 방식으로 성찬을 다루었다. 성찬은 기억을 일깨운다. 그것은 과거의 뿌리들을 되새기게 하며,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 뿌리들을 다시 얻으려고 도전하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신자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재차 발견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이 끊임없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의 역사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드시고, 부르셨으며 존속하게 하셨는지- 를 되새기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담은 이야기를 배워야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한 문학 교수가 한 사람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미국 남가주의 한 유력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이 교수는 오클라호마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카이오와 인디언(Kiowa Indian)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소년 시절에 자기 부족에 얽힌 이야기를 스스로 어떻게 배웠는지 말해 주었다. 어느 날 동튼 직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깨워 한 노파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그를 거기에 놓아둔 다음, 그날 오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 하루가 다가도록 노파는 소년에게 카이오와 부족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파는 엘로우스톤 강(Yellowstone River) 옆에서 시작되었던 부족의 기원과, 그 뒤 어떻게 남쪽으로 옮겨 왔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노파는 소년에게 자신들이 직면했던 많은 역경들 -다른 부족과 벌였던 전쟁들과 겨울에 평원을 휩쓸던 엄청난 눈보라들- 을 말했다. 또 노파는 카이오와 부족이 살아오면서 누렸던 영광들 -커다란 들소를 사냥했던 이야기, 야생마들을 길들였던 이야기 그리고 그 말들을 타던 용감한 사람들의 기예(技藝)- 을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노파는 백인들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노파는 소년에게, 한 때는 자랑스러웠던 자기 부족이 백인 군인들의 손에 강제 이주를 당해 그 곳에서 굶주림과 궁핍함에 시달렸던 굴욕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노파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마침내 오을라호마의 한 거주 지역에 치욕스럽게 갇힌 처지가 된 사연을 들려줌으로써 끝을 맺었다.

어둠이 깃들기 직전, 소년의 아버지가 그를 데리러 왔다. 노파의 집을 떠나면서 그가 말한 그때의 자신의 심정은 내 마음속 깊이 뿌리내렸다. '내가 그 노파의 집을 떠날 때 나는 한 사람의 카이오와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에 얽힌 이야기를 배웠으며, 그가 바로 부족의 계승자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배우기 전에, 그는 단지 이름뿐인 카이오와 부족의 한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명실상부한 한사람의 카이오와 부족민이 된 것이다.

츠빙글리의 접근법은 마치 그 카이오와 노파의 접근법과 같다. 그는 성찬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상과 자신 사이의 연관성을 확증하고 싶다면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던 이야기를 강력하면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보라고 말한다. 성찬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을 기록한 성경의 서사를 읽게 하는 하나의 렌즈를 제공한다. 성찬은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곧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서술하는 이야기에 속한 자들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의 역사라는 대지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깊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들을 신앙 공동체와, 나아가 그 공동체에 속한 하나하나의 지체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나아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문화가 비록 불안정하다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흔들리지 않음을 확신하면서 안식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이 주어졌다. 그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다시 소유해야한다.

 

 

결론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과거는 현재를 조명하고 해석하며 나아가 그 모습을 바꾸는 능력도 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은, 단순히 그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현재를 해석하고 거기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기에 그 관련성이 있다.

다시 한 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살펴보도록 하자. 르네상스는 어쩌면 유럽 문화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조성이 넘쳐흘렀던 시대였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삶에 새로운 생명과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베르토 바이스(Roberto Weiss)가 말했듯이, 그것은 과거가 남긴 자취와 그 문화가 실제로 접촉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과거는 정체된 채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중세 유럽의 대기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이 문화유산과 씨름함으로써 탁월한 창조성과 독창성의 시대는 막을 열었다. 다른 시대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나의 탁월한 예를 든다면 아마도 1833년에 잉글랜드 국교회 안에서 시작되었던 옥스퍼드운동(the Oxford Movement)을 들수 있을 것이다.

옥스퍼드운동은 그 영감을 사도 시대의 교회로부터 끌어왔다. 19세기 당시의 교회와 이상(理想)의 구현체로 역사 속에 투영되는 사도들의 교회를 비판자의 시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대단히 창조적인 작업임이 증명되었다. 그 작업은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신앙생활에 르네상스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자극제로 작용했다. 이는 역사 속의 뿌리로부터 현재가 도전을 받고 자양분을 공급받도록 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과거라는 뿌리는 현재의 성찰과 회상, 나아가 미래의 변형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하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유사한 비교 관계가 존재한다. 나는 이 점을 상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기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과 영성 분야에서 일어나는 가장 흥미진진한 일들에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토대가 되었던 신앙의 자원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과 맞물려 있으려는 의지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히 종교개혁 영성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방향이며, 그 방향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의 두 지평을 융합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면 오늘날 많은 북미 -호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의식, 곧 자신들에게 뿌리가 없다는 자각으로 돌아가 보자. 구약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주제, '네가 떨어져 나온 반석을 바라보라' 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심지어 아직 그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 성숙되지 않은 사회 속에서도, 기독교 신자와 공동체는 어떤 소속감과 깊은 영성의 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아니 회복해야만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2천 년 전, 곧 첫 번째 복된 금요일과 첫 번째 부활의 날에 있었던 위대한 사건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기억 및 역사와 맺은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우리가 거하는 처소에 금이 가 있다 할지라도 역사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되찾는 것이다. 요컨대 이는 비록 삶이라는 흙이 그 깊이가 얕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그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뿌리들은 연속성과 안정성을 얻는 데 중요하다. 그것은 성장과 성숙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형편들을 길러낸다. 어떤 전통이 지속되면서 역사 속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전통의 상속자들이 그것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그 공동체 안에는 틀림없이 신중함과 연속성이 자리하게 된다. 자신의 뿌리에 충실하다는 것이 곧 시대의 요구 및 기회들과 상관없이 산다는 말은 아니다. 얼핏 보면 뿌리에 존경심을 보이는 것이 창조성의 숨통을 죄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하게 남은 채 사고(思考)의 자유를 부인하는 교리지상주의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또한 헌신을 동반하지 않은 어떤 전통을 향한 사고의 자유는 자칫 닻줄이 끊어진 채 이리저리 떠도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0세기는 우리에게 한 사회가 전통의 억제에서 풀려났을 때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례들을 풍부하게 보여주었다. 나치 독일, 스탈린주의자가 판치던 소비에트 연방 등은 전통과 단절함으로써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사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월터 벤저민(Walter Benjamin)이 썼던 역사철학의 명제들(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r)은 한 문명사회가 자신의 전통 가치들과 인연을 끊을 때 등장할 전체주의 체제에서 자신이 느꼈던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뿌리와 인연을 끊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사(文化史)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한 번 끊어진 뿌리들을 다시 되찾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 그처럼 과격하게 전통과 인연을 끊다보면, 한 세대도 채 넘기지 못할 정치적, 신학적인 실험들로 끝맺게 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혁명은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논증으로 인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혁명은 로마의 공화정 속에서 실현되었던 공화주의(republicanism)라는 고전 관념을 되찾고자 한 것이었다. 혁명이 사용한 방법들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그 혁명이 목표로 삼았던 것들은 온통전통 안에 있던 것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역설은 목표를 위해 철저하게 혁명성을 띤 수단을 동원하였으면서도, 정작 그 목표는 철저하게 전통 안에 있던 것이었다는 점이다. 서양 문화사를 어느 정도 공부하고 보니, 전통이란 사상들을 계속하여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하는 종교개혁 연구의 한 측면으로 화제를 바꾸어 보자. 근세는 기독교의 통일성에 관해 전 영역에 걸쳐 새로운 관심을 보인 시대였다. 종교개혁 영성이 갖고 있던 이런 요소를 탐구해 봄으로써 우리는 대담하면서도 과격한, 그러면서도 흥분을 자아내는 발걸음을 뗄 수 있다. 곧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곧바로 신앙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그 활력을 다시 경험하고, 나아가 신약 성경 면면이 그토록 생동감 있게 증언하는 그 신앙을 현대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열을 조장하는 불화의 시대를 헤치고 그 시대와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돌아가야 하며 나아가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 상황에 그 십자가가 갖는 의미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와 신앙 사이에 놓여 있던 거름종이는 이제 제거되어야만 한다. 기독교회는 미래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기위해 그가 이전에 출발했던 옷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 근본을 살펴 볼 때, 기독교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뿌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 밑으로 돌아가 우리의 신앙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의 다락방으로 되돌아가 우리의 이상과 사명을 되찾는 것이다. 토머스 엘리엇(T. S. Eliot)이 남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귀가 있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인즉,

우리의 모든 탐험이 다다를 종착점은

우리가 출발했던 그곳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되는 것이리라

 

이 말은 어쩌면 16세기에 등장했던 기독교의 뿌리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성일 수 있는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등장하고 있다.

 

  ref3_기독교의 영성과 정체성.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