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의심, 염려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 145-183.

 

 

 

의심, 불확실함 그리고 염려는 신앙을 마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신앙을 절름발이가 되게 하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전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의심, 불확실함 그리고 염려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러한 영성은 기독교회에 있어 지극히 제한된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얼핏 보면 종교개혁 영성은 현대가 필요한 것들과 제한된 범주에서만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16세기는 확실성의 시대, 신앙과 확신의 시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개혁시대에 동질감을 느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는 의심,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그리고 불안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안 양상들을 알지 못했던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이 어떻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절박하게 찾는 그 무엇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이것은 중요한 반론이기에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대의 인간 실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는 핵전쟁을 통하여 인류가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이라는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 이 두려움은 잠시 후 가라앉았지만, 이번에는 새로 줄지어 나타난 근심거리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류가 환경오염을 통하여 지구라는 행성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 또는 통제할 수 없으리만치 퍼져가는 에이즈 때문에 인류가 멸절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그 예다. 이 외에, 대량 실업 사태와 오래 되고 익숙한 노동 유형의 몰락을 가져올 경기침체가 일어날 위험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 핵가족을 지향하는 가족관 그리고 마약류의 구입 가능성과 그 무분별한 사용이 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전통 생활 방식이 보장하던 안전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톰 울프(Tom Wolfe)의 소설 (허영이라는 모닥불) (The Bonfire of the Vanities)1980년대 후반 뉴욕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이런 문화 양상이 안겨다준 불안감을 뉴욕에서 벌어진 한 뺑소니 사고를 둘러싸고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을 프리즘으로 하여 비추어 봄으로써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를 안전이 보장되었던 시대로 보는 것은 맞는 말 같다. '그 시대 사람들은 태평한 시절을 보냈지? 또 이렇게 생각한다. '그 시대에는 신앙을 갖기가 쉬웠을 거야. 도무지 염려할 게 없었잖아.'

사실 과거가 안전했던 시대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이를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핵전쟁에 따른 대학살을 피해 막을 내린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무시무시한 군사력 증강사업1960년대와 70년대에 서유럽 침공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유럽 사람들은 이런 군사력이 유럽 침공을 불러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시절을 보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시대는 미래에 관해 커다란 불확실성을 그 특징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종교개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우리는 그때를 신앙의 시대로 생각하지만, 사실 속내를 살펴보면 그 시대 역시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확실하기는커녕, 종교개혁은 인간이 갖고 있는 박약함과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심각한 의심들, 회의주의 그리고 우려를 담고 있었다.

이제야 우리는 16세기 초가 그토록 불확실한 시대였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함께 뒤섞여져 있는 몇 가지 요인들을 구별하여 확인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라는 장()을 살펴보자. 여기서 사물의 질서는 너무나 불안정해 보였으며 과격하고 전혀 예측할 수없는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같은 신학자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로마 제국의 몰락과 비견할만한,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증명할 수 있는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안정된 세계임을 보여주었던 오래되고 익숙한 경계들은 붕괴의 문턱에서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이 기독교 지역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더 이상 당연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1453,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동방의 이슬람교 신자들에 맞서 기독교 지역인 유럽을 지켜주던 마지막보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슬람교가 유럽으로 팽창할 통로가 훤하게 열린 것처럼 보였다. 1520년대에 이르자 많은 유대인들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였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투르크 사람들이 비엔나 문턱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유럽 밖에서 다가오던 위협은 유럽 내에서 새롭게 나타난 불안정 상태로 인해 더욱 커졌다.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그 당시의 깊은 불안감 -르네상스 문화의 안녕(安寧)을 무너뜨릴 것처럼 보였던 프랑스 -이탈리아 전쟁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빛어진- 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서신 속에는 문화에 대한 깊은 우려와 소외감이 배어 있는데, 잔인한 야만 세력이 과거와의 연속성을 붕괴시킬 수도 있어 보였기에 그러하였다. 미래는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는 것, 나아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역사를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하게 하고 연속성을 부여했던 문화적 힘들이 군사력에 덥석 물려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과연 미래의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응집력을 보여주던 다른 사회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옛 문벌들도 상인계층과 수공업장인 계층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옛 문벌 귀족들로부터 상인과 수공업장인 계층으로 권력 이동이 일어나는 현상은 특별히 절대 왕권이 수립되어 가던 왕국의 도시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처럼 보였다. 1499, 취리히(Zurich)에서는 문벌들이 잡고 있던 권력이 마침내 무너졌다. 제네바에서는 1535년까지 그 세력이 유지되었지만 그 또한 그 해에 이르러 일어난 혁명의 소용돌이에 끝내 휩쓸리고 말았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귀족 가문들의 기득권과 긴밀하게 연결된 채, 전통을 안정시켰던 힘 역시, 가문들이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안정을 담보하는 보루였던 교회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종교개혁이 힘을 얻게 되면서 오랫동안 그 지역을 하나로 묶는 세력이었던 가톨릭 교회도 자기 나름의 강령과 관심사를 가진, 국가 교회라는 하나의 느슨한 연합체로 퇴락해 가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체결된 국왕-교회 협약(the Concordat of Bologna, 1517)에 따라 프랑스 교회를 교황이 아닌 국가의 통제 아래 두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뒤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경우처럼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탐욕스러운 군주였던 헨리 8세의 주도 아래 잉글랜드교회는 로마 교회와 오랫동안 맺어 왔던 평온한 유대 관계를 끊어버리고 나름의 강령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그 시대에 이르러 국가 간의 전쟁 -유럽인들에게 늘 연중행사처럼 벌어지던 일- 에 또 하나의 새로운 위협(종교 전쟁)이 추가될 것이 확실해졌다. 개신교가 확산되면서, 그 확산이 남긴 자취를 따라 유럽 전역에 걸쳐 분쟁의 위험이 발생했다. 역사에 선례가 없을 정도로 넓은 범위에서 격렬하게 전개될 투쟁과도 같았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전야(前夜)에 영국 정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과 흡사한 긴장감이 16세기 중엽의 유럽을 뒤덮었다.

사회의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이 이처럼 분명해지면서, 그와 연계되어 정치 이론에도 새로운 발전이 일어났다. 중세는 그 시대적 특징으로, 사회 구조란 영원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물의 질서가 하나님 바로 그분의 손을 통해 제정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그 질서의 항구성(恒久性)과 균형을 보장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새롭고도 급진성을 띤 사상이 많이 생겨나게 된다. 즉 사회 질서는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무너져 내리고 있는 벼랑의 가장자리에 두 눈을 가린 채 선 것과 같은 어떤 불안감이, 성속(聖俗)을 불문하고 16세기 초에 발표되었던 많은 저술들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불안감은 유럽의 왕국에 자리하던 도시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도시들은 유럽의 사회 구조가 변하고 있음을 관찰하는 관측소 역할을 했다. 유럽의 문화와 경제가 서로 교차하는 십자로(十字路)에 자리했던 그 도시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던 엄청난 발전 양상들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비록 숨이 막힐 정도로 억압하던 것이었지만, 도시를 안정시켰던 옛 귀족 문벌들의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 깊은 불안감, 불확실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당시 도시들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회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처럼 퇴락의 길로 빠져 들었다는 느낌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더구나 도시민들에게 찾아온 질병의 충격파까지 가세하면서, 취리히 전체 인구 가운데 적어도 4분의 1, 아니 어쩌면 3분의 1에 이르는 사람들이 1519년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칼빈은 그런 양상들, 특히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 진행되던 부분들에 특히 민감했다. 상황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와 쇠락의 틀 속에 고착되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유럽 전역에 걸쳐 사회 구조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고 음울하게 내다봤다. 어린 자녀들은 이제 더 이상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모멸했다. 전쟁은 더 길어지고 더 잔인해졌다. 치안 판사들(magistrates)은 정작 정의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성범죄 -강간, 근친상간, 간통 그리고 음란한 유혹- 는 날로 늘어가기만 하였다. 종교에 대한 지식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서에 대한가장 초보적인 개념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무신론은 점점 성장하여 특히 교육받은 전문 직업 계층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칼빈은 로마가톨릭교의 강팍한 고집보다도 오히려 무신론의 성장을 더욱 염려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많은 주교들조차 나아갈 길을 잃어버 린 채 세속의 사고방식에 백기(白旗)를 들면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글로 쓰고 가르치는 모든 내용이 그릇된 것이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장차 주어질 생명과 마지막 날의 부활을 말하는 교리들은 단지 신화일 뿐이다' 라고 외치는 형편이었다.

칼빈은 자신이 '지극히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노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재앙과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토해내는 신음소리였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전개되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들이 마지막 30-40년 동안에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특별히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은 비단 칼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인류 문명이 바닥으로 떨어진 때였다. 대체 무슨 희망이 거기에 있었겠는가? 그토록 어두운 시대에 과연 계속하여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존재했을까? 그런 시대에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었겠는가? 사실 그 무엇보다도 사회의 많은 계층에서 과연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하는지 근본에서부터 고민하는 불안감이 감지되었다. 기독교의 미래는 의문투성이처럼 보였지만 이는 단지 이슬람 세력이 동유럽을 침공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럽의 교회는 내부적으로 부딪치던 많은 위협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 세기가 다 가기 전에 기독교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을 것처럼, 미래는 오로지 하나님의 알려지지 않은 섭리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목록은 상당히 확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점은 분명하다. 종교개혁 영성은 자기 자신의 미래, 나아가 문화 전반의 미래에 대한 우려라는 역병에 걸려 있던 교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 교회에서 종교개혁 영성은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관심사 및 두려움과 공명하면서, 단순히 생존 차원이 아닌 귀중한 가치들을 던져주고 있다.

이처럼 불확실성의 분위기가 감돌던 때에 종교개혁을 이끌던 저술가들이 의심이라는 문제를 다루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은 신앙에 얽힌 문제들과 관련하여 모든 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확신에 찬 인물로 생각되는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신앙을 정의한 것을 보면, 확실히 이런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신앙이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확고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앎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운 약속의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나아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하시고 우리의 심장에 인치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제야 비로소 신앙을 올바로 정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신학의 차원에서 확실성을 갖는다 하여 심리적으로도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것은 신자 자신들이 의심과 근심에 맞서 끊임없이 씨름해야 한다는 말과 완전히 통하는 말이다.

 

신앙은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어야 한다고 우리가 강조할 때, 우리는 추호도 의심이 없는 확실성 또는 어떤 염려도 없는 견고함 같은 것을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신자들은 자신에게 신앙이 없는 것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떤 훼방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양심을 소유한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설령 신자들이 많은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또는 떠나가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점은 칼빈이 마가복음 924-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 을 주석한 내용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믿노라고 선언하면서도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한다. 이 두 말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와 똑같은 일을 내면에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완벽한 신앙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하기에 결국 우리는 모두 비록 일부분이나마 불신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의 믿음이 작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신자의 반열에 세워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부분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믿음 없음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며, 나아가 그 믿음 없음에 맞서 싸우면서 그것을 바로 잡아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피하여 안식처를 찾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고, 몇몇 사람만이 그저 중간 정도 되는 믿음을, 나아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조그만 분량의 믿음을 갖는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할 것이다.

 

어쩌면 칼빈은 그 자신도 단지 '조그만 분량의 믿음만을' 소유한자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곧 믿음의 삶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혹독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신앙교리를 주석하면서 에드워드 다우이(Edward A. Dowey)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칼빈이 내린 믿음의 정의가 그가 말한대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을 의미한다면 그런 믿음은 결코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칼빈의 뜻을 존중하면서, 현존하는 믿음을 '그 믿음이 결국 승리할지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늘 공격당하는, 견고하고 확실한 어떤 지식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은 신앙을 지탱해 준다. 여기서 소망이란 이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모순과 실망스러운 것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 볼 때 결국 녹아 없어지면서 그 끝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화신하며 고대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점을 제네바 요리문답서에서 천명하고 있다.

 

신앙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반면 소망은 그분이 당신의 실재(實在)를 분명하게 보여주실 그 순간을 기다린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반면 소망은 그분이 늘 우리를 향하여 아버지로 행동하실 것임을 믿는다.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는다. 반면 소망은 그 영원한 생명이 눈앞에 드러날 그 날을 앙망한다. 신앙은 소망이 의지하고 서 있는 기초이다. 반면 소망은 신앙을 양육하며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영성은 의심과 염려의 문제를 어떻게 말하였을까? 이처럼 불확실성이 지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종교개혁은 전장에 군사들을 배치하는 경우처럼, 어떤 자원들을 펼쳐 놓을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토론을 시작하려면 신앙의 본질 그 자체를 종교개혁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아야할지 모른다.

 

 

신앙의 본질

 

고전 복음주의의 신앙 이해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마르틴 루터이다.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루터의 교리(9장을 보라)가 신앙을 만들었고, 우리가 옳게 이해했다면 이 교리가 그의 영성과 신학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루터가 말하는 근본 요지는 '첫 인류의 타락(1-3)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점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맺고 있는 올바른 관계이다(15:6).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 사는 것이다.

루터의 신앙관과 관련하여 종교개혁 영성에 특별히 중요한 것 세 가지를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이들 하나하나는 칼빈과 같은 루터 이후의 저술가들이 뽑아내어 발전시킨 것들인데, 바로 여기서 종교개혁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루터가 근본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신앙은 순수하게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격과 관련된 것이다.

2.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3. 신앙은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첫째, 신앙이란 단순히 역사를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역사가 믿을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죄인들이라도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역사의 세부 사실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 자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비추어 충분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pro nobis) 나셨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셨으며,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루터는 이 점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주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신앙을 말했다. 그 첫째는 이와 같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서가 기록하며 선포하는 바로 그 사람임을 믿지만, 정작 그가 당신 자신을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당신은 그것을 그분께로부터 받을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그는 다른 사람 (베드로나 바울처럼, 또 신앙이 강하고 거룩한 사람들처럼)을 위해 온 사람임이 틀림없어. 그런데 그가 나를 위해 왔다고? 성인(聖人)들이나 바랄 법한 그 모든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받을 것을 확신하고 기대할 수 있다고? 이런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그리스도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하며 그에게 속한 것을 털끝만큼도 맛보지 못한다. 그런 신앙은 기쁨을 느낄 수 없으며, 그분의 사랑 또는 그를 향한 사랑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련된 신앙일 뿐이지 그분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신앙은 단 하나다. 단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성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사람임을 믿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당신이 믿는 것이다.

 

둘째는 '신뢰' (믿고 맡긴다, fiducia)라는 뜻을 가진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루터가 사용하였던 항해의 비유가 가리키듯, 신뢰라는 관념은 종교개혁의 신앙개념에서 두드러진 것이다.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것은 신앙에 달려 있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당장 저 바다를 건너가야 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몸을 믿고 맡길 배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과 같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배 위에 올라타려고 하지도 않고 바다를 건너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단지 어떤 것이 참이라고 믿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 믿음 위에서 늘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며 그 믿음에 의지하는 것이다. 루터의 비유를 사용해 보자. 신앙은 단지 한 척의 배가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배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배에 자신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에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요구받는가? 우리는 단순히 신앙을 믿도록 요구받는가? 이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요구받는가? 루터가 보기에 그 대답은 명쾌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 나아가 그런 것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실과 신실하심을 믿고 기꺼이 그것들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로지 가장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만을 철저히 믿고 거기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약속하신 분이 가장 신실하게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는 우리 죄를 고백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죄를 고백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영화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고백이 가치 있거나 적절하기 때문에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우리로 그렇게 할 만한 어떤 가치나 적절함도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가 약속하신 것이 진실이며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단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만큼 강할 뿐이다.

 

신앙의 효험은 우리가 믿는 강도(强度)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믿는 그분이 신뢰할 만한 분인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 믿음이 연약하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보배, 똑같은 그리스도를 갖고 있다.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이 각자 백 굴덴(Gulden)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한사람은 그 돈을 종이 주머니에 담아 놓을 수 있고, 다른 한사람은 쇠로 만든 금고에 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점이 있다할지라도 두 사람은 똑같은 보배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당신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도, 당신과 나의 신앙이 강한가 약한가에 상관없이 똑같은 분이시다.

 

신앙의 내용은 적어도 신앙자체의 강렬함 만큼, 아니 어쩌면 그 강렬함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을 열정을 다해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단지 조금만이라도 믿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 하지만 믿고 맡긴다는 신뢰는 우연히, 이따금씩 나타나는 태도가 아니다. 루터가 보기에는,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믿고 의지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항상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기독교 영성에서 너무나 중요한 한 가지를 제시한다. 신앙은 그저 이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부터 그랬다. 그것은 의지의 행위다. 비록 지식에 비추어 의심스러운 점들과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을 신뢰하겠다는 단호한 마음이 곧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진지하게 결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믿음을 향한 의지는 이런 결심과 의지의 행위가 윌 모르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하면서 우리의 확신을 빼앗는 증거와 자주 충들을 일으키게 된다. 지성과 의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툼은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직접 비롯된 산물이다. 지성은 그 판단을 내릴 때 주로 이성과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과연 이성과 경험이 신학 자원으로 신뢰할 만한가라는 질문을 종교개혁 영성이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그 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셋째는 신앙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리가 상당히 깊이있게 다루어야 할 만큼 기독교 영성에서 중요한 점이다. 신자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는가? 기독교영성의 역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커다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신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삶의 본보기이며, 그 본보기는 신자들에게 자신을 닳도록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를 닮는다' (Imitatio Christi)라는 주제는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근대의 헌신(Devotio Modems)으로 알려진 영성의 부흥을 주창하였던 저술가들에겐 특히 중요했다. 신자들은 아버지께서 모든 덕()의 본보기로서 이 땅에 보내셨던 그리스도를, 자기 억제(self-mortification), 겸비함, 자기 포기(sef-mortiation) 그리고 이 세상을 경멸하는 것을 통하여 닮아가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자신의 삶 전체가 그분을 따라가도록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안에서 루터의 선배요 스승이었던 요한 폰 쉬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역시, 이와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본보기이며, 그 본보기를 좇아 나는 일하고 고난 받으며 나아가 목숨까지 바치려고 한다. 그분은 누구도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본보기로, 그 안에서는 인생에서 선한 모든 것, 고난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쓸모 있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삶, 고난 그리고 죽음을 좇아 행동하고 고난 받으며 죽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올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16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특히 로테르담(Rotterdam)의 에라스무스가 끼친 영향을 통하여 새로운 영향을 받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특별히 근대의 헌신(Devotio Modema)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수도원 운동을 벌이던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the Common life)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조국 화란에 각별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신자가 그리스도라는 본을 닮아가는 것을 그리스도의 철학 (philos- phia christi)이라는 말로 가리킨다. 에라스무스는 복음서가 무엇보다도 우선 '그리스도의 법'(lex christi) -바꾸어 말하면, 지켜져야 할 무엇- 이라고 말한다. 마르틴 부처 (Martin Bucer)처럼 에라스무스에게 공감을 표시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신자가 그리스도라는 본을 따르는 데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그러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세우셨던 새로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모습을 담은 영성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신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탐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는데,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종교개혁 영성에서 가장 독특한 모습 중 하나를 든다면, 이는 곧 신앙으로 말미암아 신자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에서 신자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시는 만남이 일어남을 종교개혁이 줄기차게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이 만남은 인격적인 차원에서 강력하게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멀리 떨어져계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면서 우리의 모습을 내면으로부터 바꾸신다.

루터는 이 원리를 그가 1520년에 썼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신앙은 마치 한 신부가 자신의 신랑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듯이, 영혼(soul)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은 이 신비를 통하여 한 몸이 된다(5:31-32). 그들이 만일 한 몸이고 나아가 그 혼인이 실제라면 -사실 이야말로 모든 혼인 가운데 가장 완전하며 인간의 혼인은 유일하게 참된 이 혼인의 모습을 빈약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그들(신랑과 신부)이 가진 모든 것이 좋든 나쁘든 공동 소유가 되는 결과가 뒤따른다. 그리하여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그것을 자랑하며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소유로 그것을 주장하실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며 나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은혜, 생명 그리고 구원이 충만하신 분이다. 인간의 영혼은 죄, 사망 그리고 정죄(定罪)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신앙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게 하자. , 사망 그리고 정죄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 생명 그리고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의 막연한 집합체를 이루는 교리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혼인 반지' (루터)이며, 그리스도와 신자가 서로 헌신하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자의 전인(全人)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며, 뒤이어 그리스도께서 신자 속에 실제로 인격으로 현존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와 함께 일했던 필립 멜란히톤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그가 은혜로 주시는 것들을 아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은혜로운 것들 -죄의 용서, 의롭다 여기심 그리고 소망- 을 신자에게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칼빈은 분명하게 이 점을 주장한다.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임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이 은혜로 베푸시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신에게 참여하는 사람들로 만드신다.' 그리스도는 '단지 이해와 상상으로 얻어지는 분이 아니다. 약속하신 바대로 그를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보고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며 즐거워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칼빈은 단언한다.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 하였으므로 이제 의심이라는 문제를 살펴보겠다.

 

 

의심 및 불확실성과 씨름하다

 

종교개혁자들은 거듭거듭 한 가지 단순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동시에 의심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심이 곧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아니다. 신앙은 믿지 않는 것처럼 의지의 행위이다. 신앙은 언젠가는 기독교가 모든 의심들을 물리치고 진리임이 드러나게 되리라고 견고한 확신을 갖고 고대하면서, 기독교가 진리인 것처럼 살아가기로 진지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믿고 맡긴다(신뢰, fiducia)는 모습을 강조했음을 기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런 접근법이 어쩔 수 없이 의지와 지성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성이 자신의 결론을 끌어낼 때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의지와 지성 사이에 빚어질 수도 있는 어떤 충돌로 나아가는 것이다.

종교개혁 영성은 이런 종류의 의심과 염려에 맞서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개발하였다. 첫째는 이성과 경험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성 또는 경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들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믿을만한 유혹을 받아야겠는가? 둘째, 의지의 행위로 간주된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강조하는 것이었다. 의심은 우리 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신뢰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이다. 첫 번째 접근법은 특별히 루터와 결부된 것이며 두 번째 접근법은 칼빈과 특별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는 이를 하나하나 살펴 볼 것이다.

아마도 종교개혁 영성이 가장 큰 염려를 표명한 대상은 신앙의 경험사이의 긴장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한다. 삶 속에서 나의 신앙에 도전장을 내미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과연 나는 어느 정도의 확신 또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신앙과 경험은 풀리지 않는 긴장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런 긴장은 압력을 받으면 붕괴될 것이라는 위협을 던져준다. 종교개혁 시대에 새롭고 급박한 과제로 떠올랐던 기독교 영성의 중심 문제는 서로 대적자(對敵者)가 될 소지가 있는 이 세력들을 어떻게 안정된 균형 속에 붙잡아 둘 것인가의 문제였다. 어쩌면 여기서 쟁점이 되는 문제를 '믿음의 연약함' (the fagility of faith)이라는 말로 가르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주제를 가장 강력하고 통찰력있게 논의한 내용은 아마도 마르틴 루터의 초기 저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이란 보이지도 않고 확인되지도 않았으며 알려지지도 않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자유롭게 굴복하는 것이며 기쁘게 내기를 거는 것이다.' 이 주목할 만한 신앙에 대한 정의에는 그 핵심에, 신앙이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키에르궤고르(Kierkegaard, 1813-1855)가 말했던 '신앙의 도약 (leap of faith)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흑암과 의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세상의 안전함과 확실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감각 -내부의 것이든 외부의 것이든- 의 세계로부터 감각 저편에 있는 세계, 곧 눈으로 볼 수 없고 가장 고귀하시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옮겨지는 것이기에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 이미 우리는 루터가 말했던 독특한 신앙 개념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곧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그것이다.

15161130일에 있었던 한 주목할 만한 설교에서 루터는 신앙과 감각 및 경험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런 긴장 관계를 강조하는 한 가지 예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는 땅 위로부터 들어 올려 십자가에 달리셨으면서도 땅위에 있는 어떤 발판도 거부하셨다. 마찬가지로 신앙 역시, 말하자면 허공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경험이라는 발판에 발을 딛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경험하는 세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그것들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영원하면서도 인간의 생각으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혼을 연합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떼어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신자들을 일상의 세계에 닻을 내리게 하여 그 세계에 단단히 붙들어 놓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경험, 이성과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신앙은 각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현세(現世)라는 한정된 세계에 인간의 생각과 경험이 묶여 있는 것을 끊으려 한다.

루터는 신앙의 이런 모호함을 파악하려고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활용한다. 말하자면, 신앙은 비록 일부일지라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목적과 전략들에 대하여 늘 잘 알지 못하는 깜깜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모두 유혹이 넘쳐 나는 시대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모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런 도우심이 언제, 어떻게 주어질 것이며 그 도우심의 본질이 어떠한지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따라서 신앙의 눈은 저 언덕에 있는 깊은 어두움과 깜깜함 쪽으로 향해 있지만 우리는 정작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신앙과 의심은 의로움과 죄처럼 신자 안에 공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죄인이듯이(simul iustus et peccator), 마찬가지로 믿는 자이면서도 의심하는자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신앙을 깨우쳐 주고 확증해 준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이 신앙에 대한 확신을 빼 앗아가고 의심만을 불러일으킨다.

루터는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신자에게 있어 최상의 사례로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사실 신앙과 의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루터가 이해한 내용은 그의 '십자가 신학' 에서 본질이 되는 부분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실 것을 결심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갈보리를 생각할 때처럼, 그 장면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성급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명백히 절망적이고 어떤 도움도 바랄 수 없었던 광경이다. 그것은 유기되고 방치되며 죽음을 나타나는 참경(慘景, 끔직하고 참혹한 광경)이다. 그 무엇이든 하나님이 자신의 현존과 권능을 드러내시는 표지는 없다. 갈보리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명백한 결과는 하나님의 존재, 본질 그리고 권능에 대하여 의심과 회의가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경험이 지레 내렸던 그런 판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뒤집어진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보다 경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십자가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의심과 절망의 상태에 빠졌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것들에 신실하신 분임을 잘 보여준다. 루터가 보기에 십자가는 신앙에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하나의 교훈을 보여주는 예다. '당신 안에 있는 감정들과 경험들을 찾기보다 오히려 당신 밖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찾으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신앙을 일깨워주며 지탱시켜 주지만 당신의 감정과 경험은 다만 그 신앙을 어지럽히고 약하게 할 뿐이다. '신앙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하게 붙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심으로 뒤덮인 우리의 상황을 잘 조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을 죽음과 지옥 속에서도 우리의 머리를 드시고 우리에게 관()을 씌우시는 분으로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 -사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베푸시는 권능이다-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높이시는 것이야말로 숨겨진 일이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절망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에 맞서 소망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십자가의 지혜는 오늘날 심오한 신비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천국에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생각은 하나님 자신이 흑암, 혼란 그리고 수수께끼로 뒤덮인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실존에서 중심이 되는 염려들 -생명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공허한 것일 뿐이라는 공포감,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고통- 을 단 하나의 초점으로 모으는 역사의 한 사건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하셨다. 이런 불가사의, 불확실들 그리고 수수께끼들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과 직접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 죽음과 의심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들로 그것들을 격파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특별히 니콜라스 카바실라스(Nicolas Cabasilas)가 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On Life in Christ) 속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세 갈래 길을 통하여 -우리의 본성, 죄들 그리고 죽음-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구원자께서는 우리가 방해받지 아니한 채 그를 만날 수 있고 나아가 직접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그분은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장애물들을 제거하심으로써 해내셨다. 그분은 우리의 인간 본성에 동참하심으로써 첫 번째 것을 제거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두 번째를 제거하셨다. 그리고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우리의 본질을 억누르고 있던 죽음의 독재를 물아내심으로써 우리와 그분을 갈라놓았던 세 번째 장벽은 제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대적들의 영토에서,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좇아 이들과 싸우는 길을 택하셨다. 루터가 보기에 의심과 염려는 이런 적대 세력들에게 원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救贖)하셨지만, 단지 죄로부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연합군인 의심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출해 내신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은 뒤에도 죄가 계속하여 우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의심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모습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신자는 한사람의 믿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의심하는 사람이다. 죄에 맞서는 싸움처럼 의심에 맞서 벌이는 투쟁 역시, 일상의 한 모습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자리하고 있다.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의심과 염려로 끊임없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예견해야 한다. 죄와 악처럼 의심과 염려는 신자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내내 신자들을 엄습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허세가 온 천하에 드러났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십자가의 승리는 그 의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곧 당신이 지으신 세계 속에 그 모습을 감추신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없는 것,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것이다.

루터가 보기에 결국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가 혹은 그분을 의지할 만한가의 질문과 함께 일어서거나 무너진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첫 번째 금요일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의 판단조차 믿고 의지할 수 없음을 새겨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당신이 약속하신 것들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는 적절한 조망 안에 의심의 위치를 잡을 수 있게 된다. 그 안에서 바라본다면 의심은 신앙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붙들고 있는지, 나아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 되새기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에 관해 철저히 흑암 속에 파묻혀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거나 별난 분이 아니시며 약속하신 것들을 지키시고 본질과 성품대로 행동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며, 그분은 당신을 믿고 자신을 내어맡긴 이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약속하신다. 어떤 상황에 대해 우리가 인식한 것이나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신뢰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변함없으심을 신뢰해야만 한다.

두 번째로 의심에 접근하는 방법은 칼빈의 저작들에서 발견된다. 신앙은 의지의 행위인 바, 그것은 곧 의지의 투쟁을 전제로 한다. 앞장에서 우리는 칼빈이 독특하게 강조하였던 점,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사이의 연계성 -곧 이 두 가지 지식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 을 살펴보았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으며 결코 틀림이 없으신 이 세계의 창조자요 보존자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될 구원을 약속하신 분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 지식은 타락하고 부서지기 쉬우며 죄로 가득 차 있는 존재인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이 주장하는 요지는 이렇다. 신앙은 사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아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운 약속의 진리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그 정의에 있어 하나님을 향한 측면만을 다루고 있다. 무엇이 이 지식의 다른 짝인가, 우리 자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것과 동행한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죄가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과 연계되면서, 의심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 준다.

 

신앙은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내가 강조했을 때, 내가 말하고 싶던 바는 의심이 전혀 없는 확실성이나 그 어떤 염려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신자들이 자신에게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내어맡김이 없다는 사실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 어떤 훼방에도 방해받지 않는 평안한 양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신자들이 -비록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실히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은 부인한다.

 

칼빈은 이렇게 의심과 염려는 본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김(, 신뢰)이 없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결점을 반영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결점이 있다는 게 아니다. 불신앙(unbelief)은 오히려 신앙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비록 칼빈 자신은 신앙을 정의하면서 불신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에 무게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삶속에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불신(misuust)이라는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나음을 입을 수는 없기에 철저하게 신앙으로 채워지고 신앙에 사로잡혀야만 한다. 우리의 이전 본성들 가운데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는 불신이 들고 일어나 신앙을 공격할 때, 그런 전투가 벌어진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온전히 믿음으로 충만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는 의심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이 보기에 의심에 맞설 수 있는 한 가지 방책은 새롭게 된 의지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을 갱신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신앙이 의존하는 중심 요체(要諦)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서 베풀겠다고 하신 자비로운 약속들을 오로지 겉으로만 참되고 안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 약속들을 내면으로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마침내 바울이 어디에선가 평강이라 불렸던 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삶이라는 주제를 의심에 맞서 싸우는 투쟁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투쟁은 결국은 승리하는 투쟁이며, 나아가 의심에 맞서 싸움으로써 신앙의 질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시험에 처하면서 성장한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요지를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의심은 머리, 곧 지식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심장 곧 마음의 문제이다. 의심은 단순히 지식으로 말미암아 복음서에 관해 어려움을 겪거나 그 앞에서 주춤거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죄로 가득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신뢰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의심의 뿌리는 우리의 지성(知性)에 와서 부닥치는 수수께끼와 불가사의 만큼이나, 우리의 감정이 갖고 있는 애매모호한 것들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앞에서 우리는 루터가 한 척의 배를 신앙과 유추해 말한 것을 살펴보았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그 배가 있느냐 없느냐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주춤거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배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주저한다. 칼빈이 보기에 믿고 맡기는 것이야말로 의심에 맞서는 전략으로 현실성을 갖는 것들 중 하나다. 사람들은 주춤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한 쪽으로 밀어내고 그 배에 몸을 실은 다음 항구를 떠나야만 한다. 약간 다른 유비(類比)를 사용하자면, 사람들은 의지의 박약함 또는 마음가짐의 결여로 인해 자신이 건너왔던 다리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그 다리를 불살라버려야 한다.

더욱이 시편은 신자들이 의심에 맞서 벌이는 비슷한 투쟁들을 증언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에서 칼빈은 시편을 읽을 때 자신이 겪었던 역경과 의심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역경과 의심들이 있었기에 칼빈은 본문이 말하는 의미들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으며,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런 의미들은 쉽사리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 221('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이 매일 체험하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종류의 난처한 일에 압도당할 때 그 일은 신자들을 불신 속에 빠뜨리고,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무엇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는 반대로 신앙이 그들을 돕게 되면,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소원(疎遠)한 분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 이제는 그분의 약속의 거울 속에 감추인 비밀스런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신자들은 상반된 두 마음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기미들을 보여주면서 신자들을 절망으로 물아 붙여 끝내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겨주고 인내하며 기다리도록 가르치며, 그분께서 다시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가르치신다.

 

이처럼 칼빈은 의심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불신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불신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며 끝내 정복될 것이라고 그는 논증한다.

'신앙은 마치 과실이 살아 있는 나무뿌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씀을 필요로 한다‥‥ 만일 신앙이 말씀을 통하여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사라지고 만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칼빈의 영성에서 두드러질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칼빈이 보기에, 성경은 신앙의 양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생명을 주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지반(地盤)이다. '신앙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이다.' 칼빈은 더 정확하게 말한다. 즉 신앙의 특별한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반(全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것들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거듭거듭 바울은 신앙과 복음을 서로 연관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칼빈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보다 가치가 덜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것들을 증거하는 말씀들이 그 중심이 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나는 신앙이 은혜로운 약속 위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모든 부분을 포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신앙의 고유한 대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르면서 성취된다. 바로 여기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를 다시 설파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증되고 그 실체가 부여된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다. 칼빈이 보기에 '신앙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루터가 보기에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우셨던 구유' 이다. 성경을 되씹어 보고 깊이 묵상함으로써 비로소 신앙은 양분을 공급받게 되고 힙을 얻게 된다. 이런 약속들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의심은 제지될 수 있다. 칼빈은 의심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되새길 것과 그리함으로써 위안과 확신을 얻도록 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들로 인정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유업을 이을자라고 선언하고 있다‥‥그리스도는 거울이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하면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선택을 바라본다. 그리스도는 그 선택의 보증이시다. 또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이 거울 속을 바라보도록 하신다. 나아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보중과 담보를 붙잡을 수 있게 하는 손이다.

 

따라서 칼빈이 보기에 의심은 하나님 쪽에서 신뢰할 만한 부분이 없거나, 성경 속에서 계시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들 안에 믿지 못할 부분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에 자신을 내어 맡기기를 주저하는 인간의 의지 속에서 일어난다. 인간의 의지는 망설이고 싶어한다. 그 의지는 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의심의 문제는 우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을 주저하고 꺼리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칼빈이 제시한 해결책은 이를테면 '당신은 더 굳세게 믿어야 한다! 좀 더 믿음이 필요하다? 처럼 어떤 단순한 선언이나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연약한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인 존 로저스(John Rogers)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연약한 믿음이 참 믿음이다. 비록 강고(强固)한 신앙만큼 위대하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소중하다. 똑같은 성령이 저자이시며 같은 복음이 도구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힘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진실성이다.' 칼빈은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의지가 박약하다는 점에 주목하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온유하고 부드럽게 동의해야 한다. 오로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려는 구원받지 아니한 성향에 우리를 계속하여 묶어 두려는 질긴 줄들을 끊어야 한다. 성화에는 지성의 신앙을 마음의 신앙으로 변모시키는, 자라나는 의지와 능력이 포함되어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우리는 믿고자 하는 의지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믿음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충분한 믿음이 없어', '나는 그리스도를 정말 충분히 신뢰하지 않아 등과 같은 의심들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칼빈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갖고 있는 질(quality)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점을 믿으라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신앙이 지닌 강렬함이 아니라,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던지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자신을 내맡긴 것이다. 신앙을 믿는 것(to have faith in faith)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오히려 믿을 수 있는 당신 자신의 능력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자신의 밖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을 통하여 확증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에, 도리어 당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마음상태만을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더 굳세게 믿으라고 요구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삶과 의지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빛어지도록 우리 삶과 의지를 내어드려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영생을 더 많이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영생을 향한 우리의 신앙이 바로 지금 여기서 자신에게 더 깊이 영향을 미치게끔 요구받고 있다. 신앙이 오로지 우리의 지성에만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으로 남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과 우유부단으로 흐르기 쉽다. 신앙은 반드시 우리의 의지와 삶을 바꾼다. 또 그러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고요한 확신이 나타나게 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신앙은 무턱대고 냉랭하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을 생생한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이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순수하게 지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라면, 하나님의 권능과 평강을 발견해야만 한다. 의심은 그런 실패를 보여주고 복음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신앙과 헌신의 새로운 깊이를 발견하게 하는 자극제이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것이다. 영혼의 염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합당하지 못하게 파악함으로 인해 우리가 멀리 따돌렸던 새로운 질()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 진정한 신앙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부르신 그분과 확고한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우리를 평강의 세계 속에서 살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확신'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갖는 확신의 기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자리한다. 우리의 신앙 또는 구원을 다시금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바깥쪽을 바라보고 나아가 성경 속에서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확인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바라보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 영성은 현대 교회에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염려와 의심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혼란을 일으키고 당황스러움을 안겨주는데, 루터와 칼빈 같은 저술가들은 염려와 의심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밝히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들에 맞서 싸우면서도 거기에서 교훈을 얻도록 유익한 권면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현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토대가 놓여진다. 그러나 일상의 삶은 기독교 영성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한 뭉치나 안겨준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신 세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부지불식간이라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을까? 일상의 삶에서 인간이 하는 일이 대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 인간의 일은 어떤 목적에 소용되는 것일까? 그런 일의기본 동기는 무엇일까? 다음 두 장에서는 종교개혁 영성이 이러한 부분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처신하도록 도와주었던 중요한 자원들을 다루게 된다. 세상을 향하여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ref5_신앙 의심 염려.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