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세계 속의 신앙 : 인간의 노동이 가진 고귀함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 227-241.

 

앞 장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어떻게 하나의 정교한 영성을 발전시켜 그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영생에 있음을 결코 망각하지 아니하면서도, 능동성을 발휘하여 살아가도록 했는지 살펴보았다. 이처럼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삶에 긍정의 자세로 접근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는 어쩌면 종교개혁 영성이 근대 서구 문화의 형성에 끼친 가장 중요한 기여 가운데 하나인 직업윤리(work ethic)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의 직업윤리' 라는 말은 그 기본 사상이 오해받고 있는 것만큼,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직업윤리' 라는 말은 계속하여 현대 서앙문화, 특히 미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자신의 유명한 노동절 연설에서 이런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미국의 자유 경쟁 정신, 곧 이 국민의 직업윤리는 1971년 노동절에도 살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직업의 고귀함, 성취의 가치, 자기 신뢰의 도덕 ‥‥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개념이 중요하기에, 그 기원으로 가보는 것도 분명 도움이 된다. 원래의 개신교 직업윤리에 기초한 현대의 다양한 변형 또는 설명들은 그 원() 정신과 실체, 양면으로부터 자주 심각할 정도로 벗어나 있다. 어쩌면 가장 과격하게 벗어난 경우는 닉슨이 열정을 다해 장려했던 '자기 신뢰의 도덕' 일 것이며, 바로 이것을 지금 검토해 볼 것이다. 종교개혁이 직업에 어떤 모습으로 접근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이 야기를 시작한다.

 

 

개신교의 직업(노동) 윤리

 

종교개혁의 직업윤리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수도원 출신의 저술가들이 그려내었던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직업(노동)을 강렬한 혐오감을 가지고 보았음을 이해해야 한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가 보기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육체노동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생계를 위해 노동하는 길을 택한 사람은 이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일한다는 것은, 일류 그리스도인으로 받은 부르심이 함축하는 모든 것과 함께, 부르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초기 수도원전통에서 노동은 천박하고 비루한 행위로, 사회 계층이나 신령함에서 보아 자기 아래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초기 기독교 전통의 태도를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고대 로마 사회의 문벌에 속해 있던 유력자들(patricians)이 노동을 자신들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천한 것으로 여겼다면, 손을써서 일하는 것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배척하던 귀족 정치 역시 초기 기독교 안에서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태도들은 중세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중세 시대가 직업(노동) 윤리에 대해 언급했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시선이 절대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완벽한 관계를 맺는데 노동이 늘 방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노동이 곧 기도이다 (laborareest orare)라는 구호는,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수도회가 갖고 있었던 확신, 곧 묵상의 삶이 손수 노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집약하고 있다. 수도사가 수도원에 있는 포도밭을 가꾸거나 수도원이 해야 할 세속사(世俗事)들을 감독하는 것처럼 몸소 부끄럽고 비천한 노동을 하는데 잠시 시간을 보낸다하여 묵상과 기도의 삶에 헌신한 것이 꼭 더럽혀지란 법은 없었다.

그러나 '노동'은 어디까지나 수도원 생활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결코 일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하지 않았다. 까르투지오 수도회와 같은 경우, 노동은 철저하게 '수사(修士)의 방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행위' (사본 필사는 특별히 선호되던 일이었다)로 이해하였다. 사실 수도원 출신의 몇몇 저술가들은 노동을 겸비함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추천하였다. 노동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비천한 것이었으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노동을 통하여, 수사들은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고통스럽고 수욕(羞辱)을주는 그 무엇을 감내하였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수도원 영성은 노동을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널리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수도원 영성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일상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는, 어떤 거룩한 소명을 추구하거나 또는 자신이 일류 그리스도인(만일 이런 구별에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한다면)의 한 사람임을 주장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이해했다. 일상 세계의 삶과 노동에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아드리아노 틸거(Adriano Tilgher)가 서구 세계의 노동에 대한 자신의 명쾌한 연구에서 결론내린 것처럼 수도원 영성은 세상에서의 일상적인 노동을 결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일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기껏해야 '관대한 사랑으로 바라보아야할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노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선택 방안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이런 사상을 경멸하며 다음과 같은 반문을 던지고 있다.' 저 밭을 갈고 있는 비천한 농부가 한 일이 수도원의 의식(儀式)보다도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지 않았는가?

종교개혁은 이런 사고방식에 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가 보았지만 개혁자들은 중세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던 '거룩한 것' '세속에 속한 것' 사이의 구분을 거부했다. '신령한 질서''세속의' 질서 사이에는 그 지위에 어떤 진정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성직자)으로 부름 받았고, 나아가 그 부르심은 일상 세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으로 파송된 제사장들로서, 세상의 내부로부터 일상의 삶을 순결하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소명을 부여받았다. 루터는 이 점을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세속의 일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을 너무나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이런 소명의 개념에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는 심지어 가사 노동마저 거룩한 것으로 칭송하면서 '그것이 거룩함을 드러내주는 명백한 외양(外樣)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바로 이런 허드렛일이야말로 수도사와 수녀들이 하는 그 모든 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고 선언한다. 영국인으로서 루터를 추종하였던 월리엄 틴데일(William Tpdale)도 말하기를, 비록 '설겆이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이 각기 다른 인간의 행위들을 대변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 새로운 태도에 바탕이 되었던 것이 '소명 (부르심, callirlg)이라는 개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단지 신앙만이 아니라, 명확한 삶의 영역들 속에서 그 신앙을 표현하도록 부르신다. 사람들은 먼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나아가 두 번째로 세상 속에 있는 너무나 명확한 영역 속에서 그 신앙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수도원 영성이 소명(vocation)을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뒤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과 고적(孤寂)의 삶을 사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루터와 칼빈은 소명을 일상 세계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신앙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행위의 장()으로도 부르신 것이다. 부르심 곧 소명이 의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그분이 지으신 이 세상 속에서 그분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하는 행위요,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게끔 인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헌신하고, 그 안에서 행하도록 그리스도인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행동은,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원동력을 얻고 박식해지며 인정받게 되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일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 나아가 그것을 훌륭하게 해내는 것은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된다. 틴 데일에 따르면, 그 일이 양을 치는 일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든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일상의 삶에서 보여주는 근면과 헌신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적절한 응답이다.

'모든 개인의 삶의 방식은, 말하자면, 주님에 의해 그에게 부여된 위치(position).' 칼빈이 보기에 하나님은 각 사람들을 당신이 두고 싶어하는 곳에 두신다. (우연히도 이 점은 칼빈이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행동의 범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에 욕망이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그는 논증한다.) 이러한 위치를 사회적 지위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그것은 어떠한 영적 중요성도 없는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다. 그 누구도 어떤 직업의 지위에 대한 인간의 평가를 하나님의 판단보다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모든 노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으로 존중할 만한 것이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 어떤 직업도, 그 어떤 소명도, 너무 비천하고 볼품없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인 휴 라티머(Hugh Latimer)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는 ‥‥ 목수(木手)이셨으며, 나아가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가신 분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평범한 소명과 직업을 갖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의 인간됨에 복을 베푸셨던 것처럼, 당신의 노동을 통해 모든 직업과 기술들에 복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노동의 결과보다 신자들의 노동은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일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일과 일시적인 일, 거룩한 일과 속세의 일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노동은, 설령 그것이 볼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노동은 찬양, 그것도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찬양이다. 루터의 말처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부엌, 지하실에 있는 포도주 저장고, 일터 그리고 들판까지도‥‥‥ 중요한 것은 루터와 칼빈 모두 그리스도인에게 자존감을 심어 주는데 생산적인 행동이 중요함에 주목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감과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

현대 서구의 분석가들은 흔히 노동을 '급료를 받는 일' 로 간주한다. 그들의 가정은 자본주의와 그 비평가들로부터 유래된 세속적 가치라는 틀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런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콘 하우저(Arthur Komhauser)의 연구서인 산업 노동자의 정신 건강(The Mental Health of the Industrial Worker, 1965)이다. 자신의 논제(論題)들에 비추어 노동의 중요성을 평가하면서, 콘 하우저는 그가 말하는 '노동'의 개념에서 급료를 받는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엄격하게 배제하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조립하고 급료를 받을 때 '일한다'는 말을 들었지, 급료를 받지 않고 자기 정원이나 집에서 일할 때에는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직업(노동) 윤리 속에는 이처럼 편견으로 얼룩진 평가가 없다. 종교 개혁자들에게 노동은 급료를 받고 고용되어 일하는 것과 결코 같은 말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노동의 보수(報酬) 또는 사회가 그것에 부여한 가치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인간이 맡아 행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노동의 본질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들과 산업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라면, 그 노동을 하도록 만드는 동기에 있다할 것이다. 중요한 연구서인 1850-1920년대 미국 산업의 노동 윤리(The Work Ethic in Indus Dial America 1850-1920)를 보면, 세속의 노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원리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노동 윤리의 중심 전제는 노동이 도덕을 추구하는 삶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노동은 인간을 회귀성이라는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것은 게으름을 먹고 사는 의심들과 유혹들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합당한 재부(財富)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과 숙련된 기능을 물질세계에 새겨 넣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인간 행위의 근본 동기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개혁자마다 특별히 강조점을 두었던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그 근간이 되는 주제는 일관적이다. 곧 노동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먼저 베풀어 주신 것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바로 그 노동을 통해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그분께 표현하고, 동시에 그분이 지으신 세상 속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사회적 효용(social utility)이라고 문화적으로 특징 지워진 개념들도 최우선적인 이 관심사로 인해 단지 상대절인 의미로 변했다. 노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공동의 선(good)에기여한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성이 표현되는 통로다. 마지막 둘은 첫째에 포함된다. 잉글랜드 사람으로 칼빈을 따랐던 월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우리 삶의 진정한 목표는 사람을 섬기면서, 바로 그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런 통찰은 종교개혁의 노동 윤리가 갖고 있는 몇몇 측면들을 평가하는 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칼빈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는 바울의 훈계를 지지하면서 커다란 비중을 부여한다. 충격 그 자체였던 1920년대의 사회 상황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는 몇몇 작가들은, 칼빈의 말이야말로 일터를 잃어버린 이들의 절박함에 너무나 둔감한 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느꼈던지, 그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칼빈이 염두에 두었던 주요 목표물은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 같다. 제네바에 망명해 있던 프랑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스스로가 일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일하려 들지 않았다. 칼빈이 보기에, 모든 인간의 공통 의무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지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하나님의 정원(, 이 땅)에서 일하는 것이다. 일해야만 한다는 이 공통의 의무는 사회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하는 위대한 도구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윤리로 인해 노동이 갖는 위치가 역사 속에서 변모하게 되었음은 정말 주목할 만하다. 비토리오 트란귈리(Vinorio Tranquilli)는 자신이 쓴 권위 있는 연구서 노동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칼빈까지에서, 사회가 자기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행위로 보았던 노동을, 칼빈의 신학이 어떻게 직접 변모시켰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또 이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긍정하는 영예롭고 영광스러운 도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계에 행복을 더해주는 개념으로 말이다. 개신교를 받아들였던 유럽의 지역들이 이내 경제 번영을 구가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의도했거나 사전에 깊이 생각했던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종교가 새롭게 노동에 부여한 중요성이 가져온 파생물이었다.

개신교의 직업(노동) 윤리는 근래 '자기 신뢰의 윤리' 라는 말로 빈번하게 표현되고 있다. 앞에 인용했던 리처드 닉슨의 말이 그 증거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이룩해내야 한다는 관념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관념은 개신교 노동 윤리에서 핵심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종교개혁이 말한 노동 윤리의 참 모습을 심각하게 오해한 결과다. 개혁자들은 줄기차게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 결코 인간의 노력 덕택이 아님을 강조한다. 성취 중심의 영성이라는 관념은, 그런 생각의 신학 토대를 줄곧 그 근본부터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엔 생소한 것이었다. 사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16세기 초부터 도시들 속에 존재하고 있던 하나의 현상이었다. 개혁자들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개념과 실재에 대하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개념은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기껏해야 이류에 불과하다는 중세 수도원들의 일관된 주장에 비추어, 오히려 복음은 그런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과업이었다. 성공을 외치는 영성들에 대해 종교개혁의 비판이 너무나 중요하고, 나아가 그 비판이 현대 서구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우리는 다음 두장()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바라보는 종교개혁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동료인 사람들을 섬길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동에 영예를 부여하셨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그것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든, 책 쓰는 것이든, 정원을 가꾸든 아니면 제3세계에서 도시의 빈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들보는 것이든- 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자질의 헌신으로 무장한 채, 세상 속으로 자신을 내어 던짐으로써 조용한 만족을 누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바로 이 점에 대해 현대 복음주의는 중요한 종교개혁적인 통찰을 잊었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최근 복음주의 신학생들을 조사하여 발표한 (복음주의: 다가오는 세대)에서, 노동이 이전 세대에서 갖고 있었던 중요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노동은 그것이 갖고 있었던 영적이고 영원한 중요성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개개인이 가진 어떤 자질들을 키우는 정도로만 그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복음주의는 노동의 영적인 고상함(spiritual dignity)이라는 개념을 되찾아야 한다. 이제 직업(노동) 윤리는 '주말을 즐기려고 일 한다'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직업과 노동에 대한 성경의 태도는 근대 초기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 시대에 적용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현대의 많은 복음주의 양식들이 기독교 하부문화라는 한정되고 케케묵은 침체 상태에 빠져 그 속에 갇혀 버렸다는 말은 슬프게도 진실이다. 세속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은 빈번히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증언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현존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낸다. 그런 다음 우리가 그 속으로 되돌아가도록 추진력을 불어 넣는다. 소명(부르심)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립된 그리스도인의 영토 속에 안전하게 머무르면서 세상을 향하여 증거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종교개혁의 노동 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성실과 헌신의 자세로 자신들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생생한 -그러나 무시된-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 머무르며 그 안에서 일하면서도', 당신은 주님을 섬길 수 있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다. 세상을 향하여 증거하는 진정한 증인은 그 속에 몸을 담근다. 노동은 찬양의 행위이며 나아가 증언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이 하는 일에 새롭게 헌신하며 새로운 깊이를 더함으로써, 일하면서 동시에 증인이 될 수 있다. 이는 그야말로 세속의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지, 그 일원(一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그처럼 자신을 내던지는 것에는 위험이 수반된다. 이 세상 속에 깊이 자신을 담금으로써, 그 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함, 기풍(氣風, morale) 그리고 생명력을 잃어버릴 위험을 부담한다. 신앙 공동체는 세상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 숨 쉬는 지원 조직과 양육 체계를 제공한다. 그것은 마치 오아시스와 같아서, 세상이라는 메마른 사막 속에 대담하게 자신을 내던진 이들의 기운을 소생시켜 준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후의 장()에서 더 깊이 다루어 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눈길을 Rm는 것은 현대 서구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발하고 그것과 맞붙으려는 어떤 기독교 영성이든지 안고 있는 현실 문제인데, 이는 일상에서 노동에 부여된 중요성으로부터 직접 비롯된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해야만 합니다.' 성취를 지향하는 서구 문화가 널리 만들어 낸 이같은 구호들은, 은혜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어려운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성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회를 개혁하며 거듭나게 하였던 종교개혁 투쟁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일단(一團)의 쟁점들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와 이신칭의 교리- 을 계속해서 살펴 볼 것이다.

 

  ref7_일상세계 속의 신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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