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과 자유 : 이신칭의와 삶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 279-303.

 

 

 

종교개혁이 제시한 주요 통찰들 가운데 하나가 이신칭의 교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은혜로 말미암아(by) 믿음을 통하여(though)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교리는 이번 장()에서 더 상세하게 살펴볼 터이지만, 순전한 형태의 기독교 교리와 영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종교개혁이 펼쳤던 투쟁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실존 그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요 그 은혜의 표현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인생관 전체를 형성하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강조하게 되면서, 기독교 영성에 지극히 중요한 시각 하나가 회복된다. 구원은 곧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지, 결코 우리가 수고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지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무엇이지, 우리의 공로 또는 업적을 통해 우리가 얻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걸인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뭘 얻어낼 수 있을까하여 그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루터가 보기에, 은혜의 복음은 공로라는 개념이 짓누르던 압박감 - 하나님이 우리를 주목하시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 상태 - 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새롭게 강조한 것은 통속의 냄새가 짙은 중세 후기의 영성이 판을 치던 숨 막힐 듯한 세계 속에서 마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결과, 이런 은혜의 재발견이 심각한 오해 -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으로 인해 훈련(human discipline)에 대한 어떤 필요성도 철폐되었다는 주장 - 를 불러 올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칫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의무조차도 제거해 버린 것으로 생각될 소지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생각들이 종교개혁 진영내의 몇몇 분파들에서 신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개혁자들은 그런 생각들이 복음서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는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필요했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루터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주(lord)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의무를 부담하고 있으며, 모든 이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마지막 장은 이신칭의 교리를 다소 깊이 다루어 가면서, 이 교리가 영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앞 장에서 이 교리가 가진 많은 면들 중 몇 가지를 다루었지만,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분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신칭의와 인간의 공로

 

이신칭의 교리가 확증한 주요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힘들여 수고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필요가 없다.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무엇이며, 나아가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초대받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 구원은 우리의 모습을 바꾸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우리 실존의 모습이 바뀔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칭의로 인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는 지위가 주어지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 일치시켜 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우리의 지위에 하나님이 가져오신 변화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와 함께 한다. 의롭게 되었다는 이 외면의 선물은 성령이 우리 내면에서 펼치시는 갱신의 역사로 인해 보충된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를 탐구하기 전에, 우리는 이신칭의가 함축하고 있는 신령한 암시들을 다룰 때 사람들이 경험하는 몇 가지 어려움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첫 번째 어려움은 현대인들의 귀에는 생소한 것처럼 들리는 '칭의' (의롭게 됨, justification)라는 말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와 '칭의'라는 말은 어떤 논쟁이나 법정 소송에서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거나, 또는 작가의 경우, 인쇄된 페이지 전체에 걸쳐 오른쪽에 있는 여백을 고르게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서 작성의 세계에서나 익숙할 법한 말이 어떻게 기독교 영성과 생생한 연관을 맺게 되었을까?

'justification' 이라는 영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는 구약의 개념을 지칭하는 말이다. 번역과 해석이라는 뒤틀리고 복잡한 전통을 거쳐 -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그리고 마침내 라틴어에서 영어로 -'justification' 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의 지위를 가리키게 되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잡을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루터에게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것이었다.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신앙이 바로 삶의 바른 길(正道)이다. 따라서 만일 '칭의'라는 말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잡을 것이 없는 것' 이라는 말로 바꿔쓰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의롭게 되었다'는 말 역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만 독특한 문제는 아니다. 모든 전문용어들은 그것을 듣는 청중에 맞추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쓰이는 '헌법 수정 제5' 라는 문구는 전문 용어처럼 보이는 탓에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너무나 중요한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C. S. 루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청중의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더불어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단지 경험 이전의 영역에 속하는 것(apriori)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란 점을, 여기 서두에서 말해두고자 한다. 당신은 경험을 통해 발견해 내야만 한다. ‥‥ 조그만 부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신학을 일상의 언어로 옮겨야만 한다. 이것은 너무나 골치 아픈 일이지만, ‥‥ 그렇다 할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것 역시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크게 도움을 준다. 만일 당신의 사상을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쓰는 평범한 언어로 옮길 수 없다면, 그 사상은 혼란만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상의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실력이야말로 당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실제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이라면, 그렇게 된 연유는 우리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 말이 인간의 정황 속에서 가지는 힘과 그 정황과 맺고 있는 연관성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실패는 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교리 자체에서 연유한 것은 아니다.

둘째로 '이신칭의'라는 문구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그의 신앙 때문에' (on account of faith) 의롭게 된다는 의미로 비춰질 소지가 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이라는 인간의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는 지위를 우리에게 부여하시겠다고 그분이 결정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옳다면, 이는 공로로 인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교리에 이를 것이며, 신앙은 다만 선행의 어떤 특별한 유형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사실 '이신칭의' 라는 문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쩌면 그 의미는 멜란히톤이 사용하였던 한 라틴어 문구를 살펴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신앙을 통하여' (propter Christum Per fidem : on account of Christ through faith) 의롭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자리에 두실 것을 결정하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평생 동안 하나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해 놓은 어떤 일 또는 앞으로 할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바로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의롭게 된 수단은 신앙이다. 신앙은 마치 하나의 물길(channel)같은 것이어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온다. 또는 우리가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루터가 제시한 이미지를 들어보면,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하나의 혼인약정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이다. 의롭다 여기는 데 기초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지, 우리의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수단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교리이다.

하지만 그 교리는 이런 의미보다 더욱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신앙 그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달리 말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얻게 하는 외부의 기초(곧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와 내부의 수단(곧 신앙)이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신앙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신앙을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동의' 또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에 대한 믿음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런 주장은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 종교개혁이 이해하였던 신앙은 이보다 더욱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신앙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분이 베푸신 모든 은택(benefits)에 연합시킨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 이미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신앙의 보증이라는 종교개혁의 중심 교리는 바로 이런 인식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스레 세 번째 난제를 불러온다.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은 이신칭의 교리는, 마치 도덕 또는 순종과는 애당초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선한 행실들, 곧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요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점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다음 항목에서 더 깊이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처음에 언급했던 몇몇 내용들은 쓸모가 있다.

개혁자들의 근본 관심사는 우리가 성취한 그 무엇 때문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다음의 세 가지를 담고 있었다.

 

1. 그런 주장은 하나님께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報償)을 베푸셔야 할 의무를 지우는 것이기에, 칭의가 갖는 은혜성과 하나님의 자유를부인하는 것이었다.

2. 그런 주장은 인간이 한 일들을 '의롭다 여기심 (칭의)이라는 상품을 사 들일 수 있는 공로로 간주한다. 만일 그렇다면 칭의는 하나의 보상, 곧 인간의 공 로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 되었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주장이야말로 위험스러운 추정이라고 믿었다.

3. 그런 주장은 공로의 영성을 부추기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더라도 칭의에 필요한 기준들을 성취할 수 있 다고 믿었다.

 

이런 위험들 하나하나는 중세의 가톨릭 신학에서도 이미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험들과 관련되어 채택된 전략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 정교한 신학적 구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 예를 들어, 적합한(Consuous) 공로와 지당한(Condign) 공로의 구분처럼. ] 신학이란 것은 사실상 철저하게 수도원에 국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스콜라 신학의 복잡한 개념 구분에 익숙해 있던 수도사들은 아마 이를 수월하게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 개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임을 알아차렸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공로의 종교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칭의가 철저히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길 뿐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공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 도 전혀 참작하지 않으신 채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이나 영혼이 성취한 것에 털끝만큼도 신세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이 시작되면, 새롭고 중요한 어떤 역할이 인간의 행위에 부여된다. 우리의 모습을 철저히 바꾸어 버리는 신앙의 본질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바뀌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종교개혁 후기의 저술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신앙은 선행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가 그 시작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 삶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해 새롭게 되고 거듭나게 되면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고 도덕에 부합하는 삶을 통해 우리의 새로운 본질이 갖게 된 실재(reality)를 드러내게 되면서, 선한 행실을 통하여 지속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통찰은 곧, 인간의 행위는 의롭다 여겨 주심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뿐이지, 그 행위가 의롭다 여겨 주심에 선행 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생각을 여기서 한 번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에서 이 종교개혁의 중심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함축은 자수성가한 사람(the self-made person)이라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특별히 이런 사람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종교들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현대 서양 사회, 특별히 미국에서는 너무나 성취(성공) 지향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다. '당신은 당신이 스스로 만드는 존재입니다' 라는 말은 기업 문화에서 핵심 표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힘으로 해내야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가족과 또래들을 통해 우리에게 스며들어온 성공이라는 세속 가치들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 또 이런 세속 지향의 태도들은 영혼의 중요한 부산물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들이 무언가를 해야 하거나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복음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의 무조건성을 선포한다 해도, 그런 의무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겐 그런 선포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뚜렷이 서구 문화의 기준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려면, 우리가 그 전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확실한가? 많은 사람들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곧 용기를 끊어버린 것과 같다고 배웠다. 그 결과, 그들은 '독립' 이라는 사이비 종교를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다. 인격의 완성은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관념은 도리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런 관념은 많은 사람들이 무심결에 세속 문화로부터 흡수해 온 여러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런 세속 문화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는 방도(方途)에 대해 말할 때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강조점을 두었던 중세 후기의 영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는 이런 태도들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고 있다. 루터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존심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칭의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는 자존심이며, 그 자존심은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지위는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수고하여 얻어낸 것이 아니다. '죄인들은 사랑받고 있기에 매력이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매력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성취한 것들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더 높은 것을 성취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루터는 1546217, 목요일, 이른 시각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물론' (Ja)이었다. 그 대답은 그가 죽음에 다가가면서, '자네가 설교했던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변함없이 고수할 것인가'라고 물어 온 한 친구에게 대답하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가 숨을 거둔 직후, 친구들은 그 집의 한 탁자위에 놓여 있던 공책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루터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기록하였던 글이었다. 그 글의 마지막 여섯 단어는 이러하다. '우리는 거지들이다. 이것은 진실이다(Wir sind Bettler. Hoc est verum),' 루터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거지들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후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철저히 의지하고 있는 자들이다. 루터의 영성 전체는 바로 그 여섯 단어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다. 우리는 다만 받을 뿐이다. 기뻐하며 그리고 감사하면서.

 

은혜와 훈련

 

하나님의 은혜를 엄청나게 강조하였던 한 운동이 또 마찬가지로 인간의 훈련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였다는 점은 어쩌면 16세기의 가장 커다란 역설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확실히 어떤 모순이 존재하는가? 개인이나 공동체가 훈련을 받는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과 모순을 빚는 것은 아닐까?

얼핏 보면 양자가 모순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해 보인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어떤 종교도 그 지반부터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심오한 해방을 안겨다준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 - 결코 우리가 아닌! - 은 너무나 좋은 소식이었으며, 특별히 자신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을 자각하는 이들이나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 이들에겐 더욱 복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연단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이처럼 해방을 안겨다 준 주제에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엄격한 규율을 좇은 삶을 강조하였던 중세 수도원 주의의 사고방식으로 뒷걸음질 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좀 더 가까이 관찰해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은 사라지게 된다. 겉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 대답이 자리하고 있다. 은혜는 우리를 지금 여기 이곳에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은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루터가 사용한 어떤 의사의 모습이 여기서 도움이 된다. 은혜는 단지 우리의 상황을 진단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치료한다.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없거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그 어떤 일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자신을 의로운 존재로 만들 능력이 없었던 인간의 본성은 급격하게 그 모습이 바뀐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신앙과 선행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분석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이 의미를 명확히 깨닫도록 개혁자들은 두 개의 신학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는 루터의 것이다. 루터는 한 그루의 나무를 사용한 신약 성경의 비유를 쓰면서, 나무의 생산력이 오로지 그 뿌리에 의존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좋은 뿌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루터는 논증하기를 신앙은 나무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건강한 뿌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 곧 건강한 뿌리가 주어지는 때로부터 나무는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좋은 뿌리가 존재함으로써, 자연 법칙의 작용으로 좋은 열매를 산출하는 연관 관계가 마침내 복잡한 생명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나무에게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일단 그 뿌리가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나무가 대지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나머지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신앙은 마치 그 좋은 뿌리와 같은 것이다. 일단 그것이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면, 자연스럽게 선한 삶을 살아가면서 선한 행실에 진력하는 하나의 과정이 시작된다. 진정한 신앙은 자연스럽게 선한 행실을 낳는다.

 

신앙으로부터 주 안에서 맛보는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으로부터 우리 이웃들을 기꺼이 섬기게 되는 기쁘고 자원하는, 나아가 자유로운 마음이 흘러나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유로우신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도우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몸과 우리의 행실을 통하여 우리 이웃들을 도와야 하며, 나아가 각 사람이 말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 나무의 뿌리가 그 터를 잡기 전에는 열매를 낼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선한 행실도 신앙이 존재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루터는, 그 연원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구분, 곧 도덕에 비추어 행한 선한 행실과 하나님을 믿는 결과로 이루어진 선한 행실 사이의 구분을 원용(援用)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선한 행실의 본질은 곧 감사로 충만한 심령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선한 행실로 나아가는 적절한 원동력을 부여한다. 그 행실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 행실들을 우리의 벗들이나 이웃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실은 신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하여 그것이 곧 우리를 행위(행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행위에 관한 그릇된 견해들(이를테면, 행위로 인해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우둔한 견해처럼)로부터 벗어나게 할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짓누르는 공로지향의 심리 상태로부터 해방된 존재이다.

칼빈은 좀 더 정교한 모델을 전개하면서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현존(임재)한다는 관념을 끌어다 쓰고 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그분과 연합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우리가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줄줄이 이어지는 여러 선물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뿐인 최고의 선물이다. 자비롭게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루터가 사용하였던 유명한 비유, 곧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혼인을 원용하고 있다.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연합되었다. 나아가 신자는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방식으로 신앙의 삶 속에 통합시킨다. 신앙은 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면서,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공로가 전달되는 하나의 수로(水路)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난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611절을 근거로, 그 결과들을 '의롭다 여기심 받음' (칭의, justification)'거룩하게 됨' (성화, sanctification)이라는 '이중 은혜'로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따라서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으신 채, 그를 의롭다 여기지 않으신다. 그 복들은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결합되어 있다. 당신의 지혜로 깨우치신 이를, 그가 또 구속(救贖)하신다. 그가 구속하신 그 사람을 그가 또 의롭다 여기신다. 그가 의롭다 여기신 이를, 그가 또 거룩하게 만드신다.

 

우리가 실제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의 지혜와 의로움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에게 구속을 안겨준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나며 그와 연합하는 것이 철저하게 무상(無償)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칭의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이 확인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성화) 사이에는 결코 뗄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함으로 인해, 거듭남과 성화의 필연성이 확인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것을 그분이 여전히 외부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현존(임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신자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과 칭의 사이에는 신학적인 면에서 엄청난 연관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점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모델이 성화에 대해 엄밀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되며,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되어 가는 갱신의 과정이 곧 성화이다. 칼빈이 보기에 칭의와 성화는 둘 다 신자 속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으로 직접 일어난 결과들이다. 칭의는 성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또 성화는 칭의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 모두 사람을 바꾸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일어나며, 그 현존은 신자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존재로 만들면서(칭의), 나아가 동시에 신자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모습에 일치시키는 과정(성화)을 시작한다. 성화는 사람의 행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써,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을 일치시켜 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자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심이 하나의 촉매 역할을 하면서 그 촉매로 인해 갱신과 재창조의 과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과 홉사하다.

그런 점에서 루터와 칼빈 둘 다 영성에서 너무나 중요한 일련의 통찰들로 신학의 기초를 놓아준 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종으로인해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않는다. 도리어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칭의)이 순종을 낳는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바울의 통찰들이 여기서 합쳐지면서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의 기독교 영성을 낳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사람들이며, 그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동참하고 있다(고전 1:3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에 일치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그분의 순종에 일치되어 가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순종은 신앙으로부터 생겨난다(1:5). 이런 통찰을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 1934)이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는데, 이 선언을 통해 고전 복음주의 영성의 이런 원리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치하에 있던 독일 교회의 상황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신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똑같이 진지하게 그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권리 주장이다. 그의 피조물들을 자유롭게, 감사하며 섬길 수 있도록,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속박들로부터 환희에 찬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어려움이 발생한다. 만일 의롭게 하는 믿음이 동시에 선한 행실을 낳는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선한 행실이라는 명백한 표지들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처음 답변은 이렇다. '선한 행실' 이 반드시 '공중(公衆)이 볼 수 있고 공중 앞에서 이루어진 선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개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신앙을 조용한 방법으로, 오로지 몇몇 사람들만이 알 수 있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별히 루터가 보기에 어떤 사람의 행위나 영적 성취에 공중의 이목이 끌린다는 개념은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자칫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필요한 진짜 핵심은 남아 있다. 선한 행실로 명백하게 표현되지 아니하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사람이 이 신앙을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실제의 관심사였으며, 우리는 제네바에 살던 칼빈의 회중과 관련하여 그들의 접근법을 살펴볼 수 있다. 칼빈은 자신의 회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껍데기 신자들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판단과 결정을 내리실 수 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13:24-30)를 토대로 칼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신실하게 인내하면서 복음을 설교하고, 복음서에 담긴 이적들을 선포하며 나아가 그것이 인간의 행위에 있어 암시하는 바를 될 수 있는 한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누가 그리스도인이며 누가 아닌지를 판단할 수도 없었고 또 판단해서도 안 되었다.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비유가 말하듯이 회중 속에서 그들을 갈라놓으려는 어떤 섣부른 시도도 해악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런 구분에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동기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판단할 권한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칼빈이 강조하였던 것처럼 설교자와 목회자는 복음과 그것이 담고 있는 결론들을 될 수 있는 한 분명하고 자세히 설명해야 하며, 그 밖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목회자는 복음이 당연히 선한 행실을 낳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의 신앙에 관해서는 하나님께 판단을 맡겨야 한다.

결국 이 분석의 마지막 부분 -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훈련이 갖는 중요성 - 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자주, 어떤 율법주의 - 오로지 율법 자체가 목적이 되어 엄격하게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면서 인간을 짓누르는 규율들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사상 - 로 뒷걸음질 치는 것이라고 오해 받고 있다. 하지만 훈련은 신앙에 대한 응답이요. 신앙의 결과이지, 결코 신앙으로부터 독립된 그 무엇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단한 순간일지언정, 당신이 규정이나 규율들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훈련을 - 삶 전체로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을 포함하여 - 당신의 인격 전체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라. 훈련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헌신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규율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삶의 모든 측면 -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 - 이 새로운 깊이와 헌신을 갖게 할 전략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훈련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정결함을 부여한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듬어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과정, 곧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은혜로 추진해 가시는 바로 그 과정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받지 못한 삶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신앙을 연애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라. 모름지기 최선의 연애라면, 당신은 사랑을 나누는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해 자연스럽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응답이다. 당신이 현재 모습을 바꾸어 연인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연인이 원하는 것을 시작할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것은 율법주의도 아니며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연애라는 영광스러운 사업의 일부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훈련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을 다시 빚으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걸림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보증하는 방식이다. 훈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데 주님의 은혜로운 자원들을 완전히 동원하실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무대를 말끔히 치우는 것이다. 나아가 훈련은 이신칭의의 교리와 모순되지도 안는다.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인간의 성취나 공로를 통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로 시작된 것임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그 삶이 일단 시작되면, 계속되어야한다. 지속되는 부분이 바로 성화이며, 바로 그 성화의 과정을 통해 성령이 일하심으로써 우리 내면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훈련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런 성화의 과정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훈련으로 인해 의롭다 여기심 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려는 우리의 의지로 인해 도움을 얻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닳아 갈 수 있도록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틈새들을 그분께 내어드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훈련은 개인 차원과 타인과 함께 하는 공동 차원의 삶 양쪽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과정을 촉진하는 수단이다. 훈련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훈련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기 검증의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목표에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된다. 나아가 그 장애물을 없애게 된다. 훈련은 영혼의 순종을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새로운 자질과 헌신을 가져오는 신앙의 열매로 간주된다.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군대는 전장(戰場)에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전장에서 극히 제한된 가치만이 있을 뿐 이었다. 비록 군사(軍事) 비유가 오늘날 몇몇 사람들에겐 다소 껄끄러운 인상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 기본 취지는 신뢰할 수 있다. 개인이 어떤 훈련을 받았느냐에 따라 그의 대인 관계, 학문 세계 그리고 사업 세계(단지 세 개의 경우만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에서 지극히 중대한 차이가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그런 연단의 차이는 신앙에서도 너무나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훈련을 거친 신앙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갖는 실천적인 중요성은 16세기 중엽 유럽에서 칼빈파가 겪었던 운명을 통해 증명된다. 루터파는 자신의 인생관에 잘 맞는 것으로 여겨졌던 지방 제후들과 군주들의 친절한 영향력 덕택에, 널리 확산되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칼빈파는 대적들이 우글대는 험난한 조건 아래에서 살아남아 발전해가야만 했다. 프랑스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1534년 이후로, 프랑스에서 칼빈파는 사실상 금지됐었다. 칼빈파가 된다는 것은 신속하게 (그리고 전혀 즐겁지 않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될 위험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파는 번성하였다. 1560년대 초에 이르자, 그토록 대적들이 우글대는 상황에서도 칼빈파는 결국 우세한 지위를 차지할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해답의 일부는 칼빈의 사상이 종교와 경제면에서 매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로 인해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답의 주요한 부분은 바로 칼빈이 자신을 따르던 프랑스인들에게 끊임없이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작은 모임들이 생겨나, 모이는 시기를 정하여 비밀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나아가 함께 떡을 떼기 위해 모였다. 그들이 살아남았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갖고 있던 자질과 탄력성 때문이었다. 이 모임들과 마끼(Maquis)와 같은 2차 대전 당시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 단체들 사이에는 매우 흥미를 끄는 유사한 관계가 존재한다. 특히 이 모임을 도운 세력이 제네바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들 16세기 원형(原型)- 작은 성경 공부모임 같은 - 프랑스 칼빈파의 중추였다. 기도와 성경 공부라는 일정한 양식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환난의 때에 서로 도울 것을 맹세함으로써, 이 모임들은 칼빈파의 미래를 보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신앙을 발전시켰다.

이 장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하였던 이미지를 원용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프랑스의 칼빈파와 2차 대전 중의 프랑스 저항 운동 사이에는 실제로 유사 관계가 존재한다. 그들은 둘 다 점령당한 영토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움을 벌였고, 살아남아 자신들의 최종 목표를 이루려면 신앙(신념)과 훈련(연단)이 요구되었다. C. S.루이스는 언젠가 현대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2차 대전 중의 저항 운동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점령된 영토 안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하나의 외세(흔히 ', 세상 그리고 마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력들)가 접수하였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침략자인 외세가 축출되고 올바른 정통 정부(하나님을 가리킨다)가 회복되도록, 끈질기게 저항투쟁을 이어가야만 한다.

이런 이미지가 유익한 이유로는 특히 현대의 많은 서구 문화들이 가진 지독한 적대 성향 때문이다. 이런 문화들은 빈번히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지나간 시대가 남긴 기괴한 유물로 묘사하면서, 신자들의 관심사를 단순히 향수(鄕愁)에 젖은 갈망이요. 시대 변화에 대처할 수없는 무능함을 반영한다고 여겨 배척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장하고픈 것은 바로 이것 즉 생존 여부가 개인의 훈련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칼빈파 신자들이 만들었던 소규모 모임들이 훈련(연단)으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아남을지의 여부도 그와 같은 것들에 달려 있을 수 있다. 그 상황들 (16세기 칼빈파가 맞이했던 상황과 2차 대전 당시 저항 운둥 세력이 직면했던 상황) 사이에, 또 거기에 대처하려고 사용된 수단들 사이에 대응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유익한 교훈을 안겨준다. 우리는 칼빈이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서 있는 교회들 (eglises plantees)이라고 규정했던 프랑스의 그 작은 모임들과, 그들이 훈련을 강조했다는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군사(軍事)에 관한 하나의 비유를 끌어다 쓰면서 칼빈 자신이 쓴 글을 위어 보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무장한 적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 적은 교활하여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격퇴할 수 없다." 훈련은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게 한다. 대학에서의 학생연합 성경 공부, 교구에서의 기도 모임, 공동체의 교제 등 모든 것들이 활력 넘치고 훈련된 작은 단위 모임들로 그 역할을 감당하며, 곤고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신앙이 전진하며 자라가게 하는 능력이 있다. 바로 이것이 그 어떤 영성에서도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ref9_이신칭의와 삶.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