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영성과 현대교회

 

Roots That Refresh,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서울: 좋은 씨앗, 2005), pp. 305-317.

 

 

 

종교개혁자들은 성인(聖人)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근대 초기라는 위험하고 새로운 세계 속에서 교회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그 출발점을 놓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소명을, 그리고 똑같은 시대를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나는 개혁자들의 관점, 사상 그리고 접근법들이 오늘에도 여전히 쓸모 있음을 논증했다. 이런 고전 복음주의 영성의 자원들은 현대 교회에서도 선택 가능한 방안들이며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독교 목회자들과 교사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절규가 있다. 바로 이렇게 요약될 것이다. 우리는 현대의 갈급함을 채워줄 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사회의 쟁점들에 대해 말해주는 영성을 구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도시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할 복음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 접근법이 어떤 관련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순전해야만 한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게 될 신념들을 좇아가느라 그리스도인다운 성실성이 헛되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강조하듯, 우리는 그 수레바퀴를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종교개혁 영성은 곤고함에 지친 채 그 영성을 필요로 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자각하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너무나 귀중한 출발점이요 자원이다.

지금도 작용하는 개념들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살펴본 종교개혁 영성의 여러 부분들은 근대 초기 유럽의 고달프고 절박한 조건들 아래에서 시험되고 검증된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 부분들을 되찾아 다시 우리의 소유로 삼아야만 한다. 이런 개념들 중 몇 가지는 흙과 먼지로 뒤덮여 버렸다. 어떤 개념들은 오해 때문에 사장되었다. 이 책은 그런 개념들을 선용할 수 있도록 되살리면서 그 개념들이 나오게 되었던 역사적 정황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새로운 자원과 자극을 풍성하게 제공하려고 하였다.

이 마지막 장은 단순히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여기서는 현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접근하는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려고 한다.

종교개혁 영성은 우리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려는 도전을 대변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게 하면서, 다시 기억 속에 되살려 사용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억압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발견하도록 과거를 초청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적인 특징인 전통과 현대 사이의 창조성 넘치는 상호 작용 역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전통주의와 근현대주의(modemism) 모두 나름의 명백한 결점들이 있는데, 전자는 현재를 못 보는 반면 후자는 과거를 보지 못한다. 현대는 과거가 가진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그 과거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자양분을 섭취해야 한다.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두 단어가 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그것이다. 전자(이 단어에서 영어의 정밀시계[chronometer]와 연대기[chronology]라는 말이 나왔다)는 객관성을 떤 시간의 경과, 시계가 똑딱거리며 몇 분인지 가리키는 것, 개념과 사건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간격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과거의 일로 이야기하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간은 주관성을 띤 개념으로 순수하게 분, 시간 또는 년()으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카이로스라는 그리스어는 시간이 갖고 있는 이러한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기 좋은 순간을 가리키거나, 어떤 개념이나 사건(그것의 크로노스에 상관없이)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벽을 뚫고 들어와 거기에 새로운 해방의 빛을 비추는 적기(適期, a window of opportunity)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이 책 전체에 걸쳐 강조하였듯이, 개념이나 가치들의 연대기는 현재와의 연관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연관성은 오로지 인간의 경험이라는 실험실 속에서 검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종교개혁과 연관된 많은 개념들이 그 연대(年代)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 내면을 보면, 고전 복음주의 영성은 여전히 청년이며 그 앞에는 창창하고 두드러진 미래가 열려 있다. 우리가 기꺼이 그 영성을 사용하며 그것을 토대로 행동하려 한다면 그 영성은, 여러 해 동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지만 활동을 재개하여 성장해 갈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하나의 씨앗처럼 작용한다.

 

종교개혁 영성과 개인

 

근대 초기는 기독 교회사에서 단순히 기독교의 외면(外面), 곧 껍데기만을 이해한 것들이 적절치 못했음을 발견한 시기였다. 에라스무스가 썼던 (그리스도의 군사에게 주는 지침서)(Handbook of the Christian Soldier)는 이런 점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교회 출석이나 성례에 참여하는 것처럼 순전히 겉에 드러난 것에 비추어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게 되었다. 대신, 신앙은 각 개인의 은밀한 경험 세계와 관련을 맺으며 현실로 나타나야만 했다. 개인의 영역에 신앙이 실재(實在)한다는 것은 인기 있는 쟁점이 되었으며, 이는 그 이전에 결코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종교개혁은 이 새로운 분위기에 차분히 호소하였다. 그것이 곧 사도시대의 기독교가 갖고 있던 생생한 측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의 글들은 신앙 안에 있는 개인 차원의 측면들, 주관성의 측면들 그리고 경험의 측면들을 그가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통찰과 기회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쓸모 있는 것이 되지 못했을까? 근대 초기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순전한 기독교에 담겨 있었지만 잃어버렸거나 억제되었던 측면들을 되찾을, 하늘이 내린 기회가 도래한 것으로 여겨졌다. 회복된 기독교야말로 참 기독교였다.

기독교 신앙을 주관성을 깨달은 개인들과 관련지어주는 것이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 특징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실재(實在)가 되지 못한다면, 신학은 자살통보서를 쓸 수도 있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는 죽어 가고 있었다. 나아가 근세 초기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던 것들과 연관되도록 기독교가 다시 진술되고 다시 주조될 수 없다면, 기독교도 그 중세와 더불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개혁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했고, 그 꽃은 결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석이 될 것을 믿었다. 역사가 발전하면서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신앙의 재건에 있어 좋은 기회가 마련되었다. 기독교를 그 본연의 올바른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야말로 미지의 세계가 요구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강렬했다. 어마어마한 위험을 안고 있었던 이 모험은 결국 성공하게 된다. 새로운 성경 연구방식들, 설교 방식들 그리고 교수(敎授)방식들이 고안되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평범한 민중들에게 복음이 제시하는 거대한 잠재력을 탐구하고 설명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런 요구는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된다. 기독교를 외면과 형식에 맞춘 여러 행위들을 묶어 놓은 하나의 총체로 이해할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근세 초기의 그런 태도들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그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던 요구, 복음이 개인들의 주관적 의식(意識) 및 경험 세계와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력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키에르케고르(S e ren Kierkegaard, 1813-1855)'가장 열정이 넘치는 내면(본질)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과정' (그의 작품 <과학성이 없는 후기를 맺으면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ccript]에 나오는 말이다)이라고 불렀던 것을 향한 끊임없는 요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복음을 개인이 경험한 세계 위에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기독교 자체의 미래에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기독교가 주관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안개 속으로 빠져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은 신앙의 주관성과 객관성을 확고하게 강조하며, 둘 사이에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교리는 신앙에 존재하는 주관성의 측면들이 가져올 수도 있는 위험들을 바로잡는 지극히 중요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교리가 경험을 해석한다. 그 본질에 비추어, 경험은 결코 진리가 흘러나오는 원천으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뚜렷하게 밝히는 것처럼,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일이나 사물의 모습이 그 일과 사물의 실제 모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이 주관주의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신중하게 거부했다면, 개인주의에도 이와 같은 비판의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종교개혁 영성에서 교회가 담당했던 역할을 살펴보아야할지 모른다.

 

 

종교개혁 영성과 교회

 

종교개혁은 과격한 기독교 개인주의를 용인할 수 없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이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것도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 공동체는 신앙에 우연히 첨가된 어떤 부가물이 아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앙의 양육과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의 자원이다. 우리는 '고독한 방랑자'의 운명을 걸머진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함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이 나그네 길을 걸어가도록 예정되었다. 그런 점에서 복음주의자들- 종교개혁의 유산을 현대에 물려받은 상속인들 -은 신앙이 갖고 있는 공동성의 측면들을 다시금 포착할 필요가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함께하는 삶) (Life Together)처럼 현대의 많은 개신교 저술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과 헌신을 깊이 함양하는 데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종교개혁 영성은, 교회라는 제도의 생명력과 잠재력이 거기 속한 구성원들의 헌신의 질()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였다. 교회의 사명이 열매 맺을 것인가의 문제는 구성원 개개인의 신앙과 결코 별개일 수 없었다. 종교개혁의 이상은 자신의 전 인격을 헌신한 한 무리의 개인들이 가진 이상이며, 그 개인들은 자신의 헌신과 재능을 동원하여 단순히 그 개인들이 집합한 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는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부흥과 믿음은 교회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며, 나아가 바로 그 교회의 삶을 통하여 교회는 사회에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된다. 드 몽뜰랑베흐(De Montalembert), 자신의 유명한 연구서인 (서구의 수사들)(The Monks of the West)에서 6세기에 성 베네딕투스가 서구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앞 다투어 베네딕투스의 천재성과 혜안을 칭찬했다. 그들은 베네딕투스가 유럽을 새로운 정신으로 쇄신하고 사회의 해체를 멈추며, 공공 교육을 재건하고 나아가 문학과 예술을 보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 나도 그가 단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형제들인 수사(修士)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것만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베네딕투스는 복음주의 영성의 고전이 품고 있던 하나의 이상 - , 개인의 거듭남이 제도의 유효성과 사회의 기능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 -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비록 교회가 신앙이 자라날 수 있도록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돌보는 환경을 제공하더라도, 그 제도가 개인 신앙의 중요성을 가리는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교회라는 제도에 무턱대고 맹종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의 다른 모든 제도들처럼 교회 역시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개혁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라는 구호 속에 함축되어 표현된 논지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라 했을 때 먼저는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며, 두 번째로 교회라는 제도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처럼 교회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만일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과 소명에 충실한 것이라면, 사랑과 염려의 심정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것도 포함해야만 한다.

현대의 복음주의를 포함한 현대 교회는 마르틴 루터가 중세 기독교 세계에 의도했던 지식, 도덕 그리고 신학 분야의 청소 작업 같은 것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어떤 커다란 각성을 필요로 하며 그 각성을 통해 교회의 존재 이유를, 나아가 교회의 소명을 회복하여 그것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교회의 자원들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중세 교회가 온갖 종류의 추가와 왜곡을 통해 복음의 생명력에 -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부주의로 우연히 - 손상을 입혔던 것처럼, 현대 교회 역시 의문투성이인 가치와 의심스러운 출처로 뒤덮인 온갖 개념과 입장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신앙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정말 무언가 새로운 틀을 짜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은 그처럼 신선한 기풍을 되살리는 교정 작업에 필요한 하나의 본보기와 자원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정결케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아픔 역시 우리를 깨끗케 한다.

 

뿌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다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영성의 뿌리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과거에 놀라고 그것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으며, 그것으로부터 도전 받고 나아가 과거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현대 복음주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준 그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뿌리와 이어진 유대의 끈들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현대 복음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토대를 놓았던 사상가들 덕택에 선용할 수 있게 된 너무나 풍성한 유산들을 대부분 망각 속에 묻어버렸다. 이는 근심스러운 결과들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많은 현대 복음주의 세력들은 이 세상을 등지고 편협한 기독교 하부문화 속으로 도피하였다. 그런 양상을 종교개혁자들이 목격했다면 그들은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며, 이것을 천박한 지식과 무책임한 신학 때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의 근본 사상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 직면해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그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 뿌리로부터 도전을 받아야만하며, 나아가 자신이 갈라져 나온 반석을 응시해야만 한다. 그 복음주의는 중대한 지식과 영혼의 양식에 굶주려 왔기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한다. 자립을 외치는 심리학 교범들에 엉성한 근거를 둔 채 어정정하게 이해된 세속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차지하던 자리를 빼앗아갔다. 현대 복음주의는 하나같이 성경에 기반을 둔, 개혁자들이 다듬어 낸 개념과 입장들을 회피한 채, 적절치 못하고 순전하지 않은 양식들로 대체하였다. 이것들은 현대의 상황이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은둔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분파주의 풍조가 세상의 회개와 변혁에 헌신했던 움직임을 지배하게 되었다. 비록 때가 늦었지만, 복음주의의 뿌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이처럼 침체된 양상을 바로잡는 것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종교개혁 영성이 전 세계의 기독교회에 계속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 가운데 쓰였다. 현대 세계에서 성장하는 기독교 양식들은 성경과 종교개혁 전통 속에 자리한 자신들의 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교회들이라는 점을 모든 통계 수치들이 증거하고 있다. 20세기의 가장 큰 역설들 가운데 하나를 든다면, 세속 문화로부터 유래한 현대의 사고방식을 채택하여 현대인과 복음 간에 더 많이 관련을 맺게 한 교회들은 하나같이 교인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복음과 현대인 사이를 연결하려는 것 자체는 기특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추구는 심각한 실패를 맛보았을 뿐이다.

슬픈 일이지만 이처럼 복음과 현대인 사이의 관련성을 추구했던 모습에는 기독교 복음 본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 곧 세상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신뢰할 만하며 나아가 매력 있는 대안을 세상에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 그 자체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영성은 성경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바로 그 성경에서 영감을 섭취한 뿌리에 깊이 호소함으로써, 책임 있고 순전한 기독교의 방식을 통하여 세삼과 관련을 맺기 원하던 교회에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고전적 복음주의 영성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쟁점들과 관련된 생생한 방안들을 제공한다.

근대 초기의 여명이 자아오던 때의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눈에 띄게 유사점이 있는 당시의 정황을 향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요구들과 기회들을 만족시키는 영성들을 성경에 근거하여 만들어냈다. 전통 속에 자리한 영성은 우리에게 줄 만한 것들이 많은데, 때로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에도 전장을 내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접근법들을 보완해 줄 귀중한 자원들을 허락해 주기도 한다.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멈추어 서서 우리 상황을 곰곰이 살펴보고, 과거의 실패와 성공으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 책은 다만 과거에게 현재를 향하여 말을 건네며 그 현재를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한 겸손한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이 고전 복음주의 영성이 남긴 중요한 공로는, 이신칭의 교리에 표현된 대로,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그분의 몸 된 교회를 떠받치며 교회에 풍성한 양분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거듭 발견한다고 옹골차게 주장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끝맺으면서 루터에게 교회를 향해 마지막 권면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자.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이는 지금의 우리가 아니요, 우리 이전에 있었던 이들도 아니며, 우리 이후에 있을 이들도 아닐 것이다.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내일이나 오직 한 분,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늘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다. 히브리서 13장이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또 요한계시록 1장이 말씀하는 것처럼, '그분은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치 오실 자이시다.' 진실로 예수께서 말씀이신 바로 그분이며, 어느 누구도 그분이 아니요, 다른 그 누구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분이 될 수 없다.

당신과 나는 수천 년 전에는 없었으나, 교회는 우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에도 계신 분' 그리고 어제도 동일하게 계셨던 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 만일 교회와 우리를 그토록 분명하게 떠받치고 계시는 바로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로 우리 눈앞에서 무너질 것이요, 우리 역시 그 교회와 함께 쇠락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것을 마지못해 믿는다 할지라도, 이 사실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이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지금도 계신' 그리고 '오늘도 동일하신' 바로 그분에게 드려야만 한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는 교회를 떠받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분, '장차오실'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께서 당신의 교회를 떠받치실 것이다.

 

  ref결론_종교개혁영성과 현대교회.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