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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개혁주의 전통의 하나님 경험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의 확신은 혈과 육으로부터,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있는 자연적인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이다.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은 우리를 성화시키시며. 자신의 사역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다. 본성상 우리는 죽고 눈멀고 너무나 완악하다. 그 때문에 주 예수의 성령이 우리의 죽은 것을 깨우고, 우리의 마음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당신의 복된 뜻에 순종하도록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맞을 때에도 느끼지 못하며, 빛이 비췰 때에도 그 빛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에도 그 뜻에 따르지 못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느끼는 공허감 때문에 하나님과의 살아 있으며 생명력 있는 관계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 가까이 계시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확증을 찾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확증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열망은 우리 시대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오래 전에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42:1-2상반절)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다. 따라서 이 관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간의 불안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취하는 한 형태이다. 이 불안이 우리를 자극하며 독려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불만이 가득하고 공허한 상태가 되기 쉽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의 것을 원하도록 만들며, 또한 우리가 매우 바라던 것들을 얻을 때에도 만족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한 가지 특별한 목표를 성취했을 때에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공허감이 자리잡고 있다. 공허감은 소유나 특권이나 힘이나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허감이란 우리의 인간적 본성 바로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의 말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로 남아 있다: “우리를 깨우사 당신을 찬양하며 기뻐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은 축복이며 그 경험자에게 용기를 가져다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직접적인 의식으로부터 피하거나 숨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그와 같은 경험의 결과들을 어느 정도 염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피는 결코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때로는 잠시 동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다시 나타나 새로운 공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만일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나마 놓이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술에 취했거나 흥분한 사람의 수면 과 조금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섭고 떨리는 꿈에 의해 고통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자(不敬者) 바로 그 자신이,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데는 여러 형태들이 있다: 분주함, 소란, 심지어 교회 활동의 적극적인 참여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교회 조직의 활동이 우리를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떼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필요성을 무시해버린다. 실제로는 공허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바쁜 나머지 우리는 채워져 있는 척하며, 여기에는 수천 가지 방법들이 있다. 만족스러운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충분히 가까워진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실 것이라는 상식적인 직관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는 참된 열망을 전혀 갖지 않는다.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들은 대체적으로 짧기 마련이며, 상처와 의심과 고통과 혼란의 시간들과 뒤섞이게 된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기억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며, 우리가 의지해 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들을 맞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과연 그 사람 없이 살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나이와 질병 때문에 우리는 계획했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힘과 정열과 능력을 잃어버린다. 은퇴나 공장 자동화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고, 그때에야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그 직장에 투자했으며, 그 직장에서 벗어나 있던 순간들이 얼마나 적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결혼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우리는 희미한 의무감에서 결혼생활을 지탱할 뿐, 평생을 함께하겠다던 맹세가 흔들리는 것을 본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희망을 걸었던 아이는 우리의 기대대로 자라 주지 못하며, 우리는 충격과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빠진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열망은 삶이 아주 실망스러울 때에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 사람의 내적 자원들이 고갈되거나 부족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간구는 필사적이다. 삶에 대한 용기가 없을 때, 사람들은 절망 속에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을 수 있음을 발견한다.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쳐 놓았던 인간의 울타리들은 약해진다.

20세기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험을 가로막는 방패인 아주 강한 울타리들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가장 뚫기 힘든 울타리는 오감만이 감지할 수 있는 신자들의 마음 자세일 것이다. 이 마음 자세는 감각적 경험이라는 좁은 범위에 들어오는 것만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제한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거부되거나 무시된다. 이처럼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경계가 있다는 것은 20세기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들에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모든 경험은 몇몇 선입견들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이 세계 속에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도록 우리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설명하거나 퍼즐처럼 풀어야 할 필요 없이도 신비가 설 자리가 있을 수 있다. 고통과 상실의 경험들은 이러한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울타리들을 걷어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의 세계관이 혼란을 겪으면,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이전에는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경험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모톤 켈시(Morton Kelsey)는 물질세계에 제한되어 있는 존재의 얕음이 "초월과 의미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실재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건전한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들은 내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불건전한 추구가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열망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들을 말할 용기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그 경험들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는 뉴에이지 운동을 혹평하는 대신에 교회 자체의 삶에서 결핍되어 있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운동으로 기울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그 발단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고도로 이중적인 면을 지녀 왔다. 월리암 부스마(William Bouwsma)는 자신이 쓴 칼빈 전기에서, 칼빈은 매우 다른 두 가지 해석들 중 어느 쪽으로라도 해석될 수 있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번째 해석은, 칼빈이 확고한 원칙들을 고수하는 인물로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 기독교는 정적인 정통의 경향을 띠며, 그리스도인이란 특정한 지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칼빈의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질서와 합리성을 모든 것 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려왔다. 이들은 모호성에 대한 여지를 거의 허락하지 않는 스콜라적인 정통을 고안해 냈으며, 모든 인간의 경험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특히 그 경험들이 그들의 의식 구조에 맞지 않을 때 그러했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의 목소리들이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주 언급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목소리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두려움과 경외감을 제외한 모든 신비의 여지를 거의 남겨 두지 않았다. 이러한 형태의 정통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에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있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

이렇게 정의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그분과 관계를 가져야겠다는 열망을 거의 불어넣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정적인 성품은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하나님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하는 강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의 하나님 -울고, 신음하고, 질투하며, 인간들과 함께 고통당하시고, 그 뜻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 은 이러한 정적인 묘사에서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와같은 칼빈주의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은 어떤 형태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으시며, 종교적 경험이라는 언어에 대해서도 불쾌해 하신다.

칼빈의 전혀 다른 이면은 삶의 역설들을 찬양하며, 모호성을 합리화하는 것을 거부하며, 믿음의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를 환영한다. 부스마는, 칼빈은 "또한 경험과 실천이 이론에 우선한다고 말했으며,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아주 관대했다"고 말한다. 칼빈의 이러한 면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은 역동성을 가지며,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온전함에까지 자라는 평생의 여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칼빈의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은 매우 다른 형태의 칼빈주의를 취하게 되었다. 이들은 교리의 정확성보다는 믿음과 삶의 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형태의 칼빈주의는 덜 경직된 자세 때문에 광범위한 형태의 서로 다른 견해들을 포함해 왔다. 여기에는 대륙의 경건주의자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 미국 대각성운동의 설교자들,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현대의 여성 해방론자들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통주의의 공식들에 저항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그 공식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신비적이며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여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라고 말해 왔다. 이러한 칼빈주의자들은 빈번하게 자신들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중세 신비주의의 언어를 빌어 왔다.

개혁주의 전통의 두 형태 모두 칼빈의 한쪽 면이나 다른 쪽 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둘 모두 각자의 입장을 논증하기 위해 칼빈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첫번째 유형의 칼빈주의자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 왔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개혁주의 전통이란, 종교적 경험에 대해 별 관심이나 관용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의 두번째 면은 최근에 와서야 묘사된 것이다.

이 두 매우 다른 해석의 주요 근원은 "지식"이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칼빈은 거듭해서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지식에 관해 글을 썼다. 그는 이러한 두 종류의 지식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기독교 강요를 구성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며,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들은 그의 신학의 중심이었다.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빈이 "지식"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아주 빈번하게 이 단어는, 지적이며 합리적이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소요리문답이 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들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칼빈이 모든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그는 "알다"라는 단어를 훨씬 더 경험적인 측면에서 사용했다. 부스마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말하는 데에는 "경험"이란 단어가 "알다"라는 단어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신자들은 그들이 천둥 -이것은 종교적 경험에 대해 칼빈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은유들 중 하나이다- 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다'고는 거의 말할 수 없다." 천둥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듯,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표현을 너무나 웅장하고 강하기 때문에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직접적인 신앙은 신자의 삶 속에 있는 거룩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아의 내적이며 개인적인 개방을 통해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칼빈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바깥에 서 계시는 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한 고통과 행하신 모든 것은 우리에게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 위해, 그분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만 했으며 우리 안에 거하셔야만 했다."

많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그리스도의 근접성(가까이 계심)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가장 즐겨 사용해 왔다. 이 표현은 상당히 다른 많은 형태들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독특한 개체들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개개인의 독특성을 존중하신다. 한 사람에게 중심이 되는 종교적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낯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한 사람이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글 뉴잉글랜드의 종교 부흥에 관한 소고들(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in New England)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칼빈주의를,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가져 온 깊고 강한 감정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들과 조화시키려했다. 그러나 그가 이어받은 칼빈주의는 엄격하고 경직된 정통주의 형태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쉽지 않았고 에드워드와 같은 탁월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인간 경험들 중에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했으며, "자신들의 경험을 잣대로 삼아 현재 고백되고 경험되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단지 자신들이 경험하고 느끼지 못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인간들 각자의 독특성과 차이점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며 종교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평가(Myers-Briggs Personality Inventory)는 한 사람의 특성과 타고난 것으로서의 이러한 특성에 대한 수용에 대해 알아보는 탁월한 도구이다. 예를 들면, 내성적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훨씬 더 편안함을 느끼며 묵상 기도를 쉽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외성적인 사람은 친구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을 것이다. 외성적인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일을 함께 이야기하며, 서로를 책임감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다른 사람들을 믿고 이 믿음을 통해 힘을 얻지 않는다면, 개인 기도에서 참으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또 다른 예가 경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설명해 주며, 그 어느 것보다 칼빈주의의 두 형태와 더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주로 자신의 행동과 성취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과 자신으로부터 수용과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며 대체적으로 상당히 경쟁적이다. 이들의 감정들은 다소 의심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감정들은 통제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겉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적 경험으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종교적 여정은 경험보다는 사상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정확한 교리와 하나의 제도로서의 교회에 관심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들이 "왼쪽 뇌"라고 부르는 것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주된 방향 설정을 자신의 느낌들을 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친절하고 협동적인 태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최선의 관계를 가진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를 열망한다. 이들의 종교적 삶은 흥분과 극적인 경험들로 가득 찬 우리의 첫 번째 그룹의 삶과 더 유사하다. 그리고 이들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들을 즐기며 심지어는 경험의 가치를 그 강도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서로를 아류 그리스도인이나 균형 잡히지 못한 사람으로 본다. 지적인 사람들은 맹목적인 감성주의의 위험성을 염려하며, 감성적인 사람들은 지적인 메마름과 무미건조함을 염려한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두 서로 다른 접근들을 두고 심각한 분열이 발생해 왔다. 미국 장로교인들과 회중교회파 교회들 가운데서 18세기 초에 있었던 구파(Old Side)/신파(New Side) 또는 구광(Old Light)/신광(New Light)의 분열은 신학적 정확성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대각성 운동 및 이와 아주 긴밀하게 관련된 감정들에 대한 호소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바로 이와 같은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복종하게 되는 여정에서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한 가지 큰 위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옳은 것으로 보이는 길을 유일한 길이요 모든 사람들이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또 소중히 여기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못할 경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 그러한 경험을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 종교 집단이 사용하는 진짜 위협이다-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똑같은 말과 이미지로 그 경험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 각자의 독특성은 통일성이란 이름으로 부인되며, 사람들은 여기에 순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는 요구를 받는다. 사람들은 기대되는 종교적 경험들을 하려는 노력에 많은 정열을 쏟아 붇는다. 추구하던 목표가 성취되지 못할 때, 무서운 고통이 동반된다. 사람들은 순응하지 못한 데 대해 스스로를 탓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화를 내고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거나 그로부터 떠나버린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광범위하게 논의한 후에, 프랭크 라우바(Frank Laubach)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러분이, 그 방법이 하늘로 향하는 문들을 열고 여러분이 하나님과 긴밀한 접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본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절대적으로 그것은 여러분의 방법이다. 그러나 누가 어떤 방법을사용하건 간에, 그 방법이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방법이 아니다." 라우바의 충고를 따르면,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아닌 어떤 것이 되고자 우리들이 시도하는 자기기만의 고통스러운 노력을 상당량 피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감각들이 규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영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은 것이다. 우리의 경험들이 우주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설명들에 맞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그 경험들을 덮어 버리거나 억눌러 버리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 주변의 다른 사람의 경험과 다를 때 부끄러움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독특성을 통하여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저 순응하려는 지속적이고 힘겨운 노력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자신의 종교적 경험들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왔다. 주저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경험들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경험을 불편해 할지도 모르며, 이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말하더라도 무시당하거나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이들은 그것들을 말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믿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고 계신다는 믿음도 뒤따를 것이다. 사랑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며, 사랑받는 자로부터 제거될 수도 없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모색하고 계신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색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이상한 우연의 일치나 정신적인 혼란으로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심지어 순간적인 정신착란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감각 경험 세계를 뛰어 넘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끄는 경험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의 교제를 모색하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는 매우 다양한 방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방법들은 우리의 기질과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한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더라도, 그 만남의 순간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1. 회심의 경험들: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급진적인 방향 전환을 초래하는 경험에 의해, 때로는 빠르게 변화한다. 이것은 불신앙을 대신하는 신앙의 행동에 의해서나, 그들을 위한 실제로서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더욱 수동적이고 점진적인 의식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약하지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물방울이 모인 결과일수도 있으며, 성숙한 어른에게 적합한 신앙을 발견한 결과일 수도 있다. 회심이 항상 불신앙에서 신앙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영적 경험의 한 형태이며, 이러한 경험들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힘을 증거할 수 있다. 하워드 투르먼(Howard Thurman)은 회심의 경험을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위기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극적인 행동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나 그분의 성령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

개신교는 때때로 교회에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일 때 회심의 증거를 요구할 정도로 회심의 경험을 아주 소중하게 여겨 왔다. 자신들의 회심경험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깊고 강한 의식이 있다. 청교도들은 신자들의 삶에서 회심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심은 새롭고 더 깊은 형태의 영성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아니며 그 자체로 완전한 것도 아니었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화의 은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향해 조금씩 커 가는 삶이며, 회심이란 이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첫 사건이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회심의 경험들이 가지는 문제들 중 하나는, 이러한 경험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계속적인 인지를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회심은 성장 과정의 시작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끝으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투르먼은 "이러한 정열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회심의 경험으로 일어나는 자발적인 정열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할 것이며 결국에는 신앙 성장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2. 황홀한 경험들(Ecstatic Experiences):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영적 치유, 예언. 방언 등과 같은 특별히 극적인 경험들이 다른 때보다 더욱 일반적이었던 시기가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때때로 잃어버리고 있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들의 삶 가운데 들어가셨으며, 따라서 특별한 경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방문의 증거로 인식된다. 모톤 켈시(Morton Kelsey), 초월(Transcend)분별(Discernment)을 비롯한 여러 권의 그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은사 경험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세밀하게 탐구한 몇 안되는 학자들 중 하나이다.

황홀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거나, 그러한 경험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이들의 영적 자만이 이들의 황홀한 경험의 아름다움을 망칠 수 있는 위험물로 작용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면 나쁜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신의 경험들을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딜 가나 누굴 만나든지 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이것은 좋은 징조라기보다는 나쁜 징조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다. 그들은 공허하고 진지하지 못한 자세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은사 경험(charismatic experience)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경험을 격하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 즉 어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성령의 경험들을 했을 때, 그들은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두려움과 불신과 거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험을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여기며 더욱더 강조하게 만든다. 소위 "은사주의자들"과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골이 깊어져 균열이 생기며, 전자는 이러한 균열을 이용하여 그들 사이의 나됨이 바로 은사적 경험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정당화한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을 신앙에 접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는 은사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 특히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감정적 필요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감정적 심연으로 들어가는 돌파구인 그와 같은 경험에 의해 피해를 당하기가 특히 쉽다.

 

3. 시각적, 청각적 경험들: 비록 앞의 두 예들보다는 다소 드물기는 하지만, 자신의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문에서 비롯되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음성들을 듣고 환상들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목소리에 의지해 행동하거나 환상을 따르는 것이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순종의 한 단계로서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들은 그 사람 개인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빈번하게, 이러한 환상과 음성들은 꿈을 통해 주어진다. 꿈속에서 우리는 감수성의 장애를 덜 받으며, 따라서 다른 경우라면 우리가 무시하거나 인지하지 못할 경험들에 노출되기가 더 쉬워진다. 비록 꿈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해석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겨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이건 간에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경험의 위험성은, 사람들이 자신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열망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섭리로 쉽게 오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러한 경험들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정신적 질병들은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참된 방문과 환각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경고한다: "마귀는 구원의 모든 작용들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들을 위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하고 신적이며, 신성한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력들을 위조할 수 있다." 자만과 자기기만의 위험성은, 비록 크기는 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무가치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이끌리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방법으로 헌신과 희생을 다하게 되는 경우들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4. 직관적 경험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순간들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특별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내적 감각을 가지거나, 겉으로는 단지 혼란으로 밖에 보일 수 없는 일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통찰력을 갖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각한 개인적 우유부단을 경험해 왔으며,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 하며, 어떤 것이 문제의 해결책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러한 혼란이 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시도들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에 대한 재고가 어떤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지 혼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아침에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해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해답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내적인 평화가 언제나처럼 유지되었다.

이와 유사한 인간의 경험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경험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건이 다른 한 사건과 정확하게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생각한다. 우리는 왜 그 친구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의아해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친구를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친구가 큰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발견하게 된다. 더 설득력 있는 예를 들자면, 우리는 옛 친구에 대한 꿈을 꾼 그 다음날 그 친구로부터 편지나 전화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와 같은 다양한 인간 경험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들을 계속 기억하고, 즐겨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등 참으로 영혼은 다방면에 걸쳐 민첩성을 가진다. 그리고 많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고안해 내는 영혼의 기술과 많은 놀라운 고안품들의 어머니인 영혼의 기술도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다른 모든 신비스러운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섭리로 오해할 위험이 있다.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음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심지어는 이 "메시지들"에 이끌리어 이성과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5. 초월적 경험들: 그 속에서 적어도 순간적으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험에 의해, 우리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삶의 경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멋진 석양이나 무지개의 마술을 볼 때. 우리는 그 광경에 매료되어 우리가 낯선 우주 속에 홀로 일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한 곡의 위대한 음악도 우리에게 이와 비슷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중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우리들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에 대한 경험이 강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강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났을 때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직장을 잃거나 건강을 잃거나 간에, 큰 개인적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삶의 의미가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사람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다. 큰 사고를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생명이라는 선물과 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일상적인 장애물들을 철거하고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전적으로 통제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와 임재에 대해 우리를 가장 많이 열어 놓고 수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우리가 홀로 있을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삶이 가지는 의미를 이름짓는 데 이를 가능성이 가장 크다.

 

6. 성육신적인 경험들 :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줄 정도로 사랑을 잘 실천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거나 우리가 상처를 입힌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일들은 신적인 것에 대한 지시계 역할을 하며 우리로 하여금 희미해진 믿음을 재정비하게 할 수 있다.

아기의 출생에 대한 경험은 이러한 성육신적 경험의 또 다른 예이다. 출산에서 맛보게 되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와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개인적 경탄을 낳게 만든다. 칼빈은 인간의 번식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여주는 계시적 표징임을 확신했다. "배은망덕이 우리의 눈에 어리석음의 베일을 씌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아기의 탄생을 찬양하며 넋을 잃을 것이다."

()도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중재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마음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우리가 이를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영성과 성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경험은 우리에게 성과 령이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서로를 맡긴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은유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이란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과의 친밀감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재연합과 하나됨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을 육에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육체적 접촉은,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에게 그 순간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종교적 경험의 한 부분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혼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을 만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경험들을 한다. 왜냐하면 삶 속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순간들을 둘러대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이러한 순간들에 겁먹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우리가 삶에 대해 숙고할 때, 우리는 단지 합리적인 설명들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 경험의 실체를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험들이 가지각색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기독교 전통의 본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영적 경험들이 가지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들을 가려낼 수는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평가하고 그 진위를 판별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러한 특징들과 조화되지 못하는 경험들은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기만적이거나 위험하거나 파괴적일 수 있다.

1. 거룩한 것에 대한 경험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일부러 찾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난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도 분명한 사실로 나타난다. 사울이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일어났다. 모세에게 있어 이러한 사건은 그가 장인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러 나가는 동안에 일어났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가능성을 더 높여 주는 그러한 활동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그러한 경험들을 만들어 내는(create)노력들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언제나 우상숭배의 위험들에 깊은 우려를 표해 왔다. 스스로의 힘으로 특별한 경험들을 이루어 내려는 노력들은 우상숭배라는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 내야할 절실한 필요성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들을 강화시켜 줄 감각들을 갖기 위해 애쓰게 된다.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는 데 지나치게 열성적인 사람들은 평범의 하나님을 놓칠 수 있다.

2.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는 경외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두려워 말라"와 같은 표현들에 의해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으며,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모세는 신을 벗어야 했으며, 야곱은 환도뼈에 부상을 입었으며,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함을 알았고, 사울은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사랑과 경이와 좋은 느낌이라는 말에 의해서만 묘사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들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물어야만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의 경외감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우리들 자신의 수준에서 쉽게 만나질 수 있으며 친구처럼 취급될 수 있는 하나의 편리한 우상을 만드는 것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강한 사랑은 결코 편안한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며 언제나 내적인 평안에 대한 의식과 경외감을 자아내는 불편한 경험 양쪽 모두를 포함한다.

3.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언제나 그 경험을 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그 요구가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어려운 것을 성취하도록 요구할 때가 많다. 꽁무니를 빼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종에서 해방시키라는 명령과 함께 바로에게 보내진다. 이사야는 그에게 개인적인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 뻔한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사울에게는 그가 반대했고 또 멸해 버리겠다고 맹세한 바로 그 믿음의 사도가 되라는 요구가 주어진다.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취하고 변화를 이루며 무엇인가 귀한 것을 버리라는 요구가 주어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이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사람의 현재 생활만을 확증해 준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경험들과는 아주 다른 것임에 분명하다. 에밀리 허만(Emily Herman)은 그녀가 "세례의 순간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후유증에 대해 말한다. 그 순간들 뒤에는 "언제나 광야에서의 시험이 뒤따른다. 아름다운 여인의 베일을 벗기는 행위에는 언제나 엄격한 윤리적 선택이 뒤따른다. 선견자에게는 하늘의 환상에 순종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부가되며. 순종은 자연적인 본능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훈련과 계속적인 도덕적 훈련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미치지만, 그 사랑은 우리들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더 넓은 관심의 도구로 만들어야 할 사랑이다. 종교적 경험에 대한 다른 어떤 평가 기준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왜곡되거나 사용될 수 있다. 칼빈은 이렇게 선언했다: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믿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나온다."

4.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영적 경험에 대한 확인을 구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인도와 분별을 의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을 잘못 해석하기가 쉽기 때문에. 스스로 행하는 자기 분별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 이상과 그들이 하나님의 방문이라고 믿는 것을 구별하는 데 실패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은 그에 대해 자신들이 느낀 대로 행동함으로써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쳤다. 믿고 있는 친구들이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들 모두는 서로를 충분히 신뢰함으로써 경험을 서로 나누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사귐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비웃음을 살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믿고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충분히 믿고, 그들이 그 믿음을 근거로 우리의 경험에 대한 우리 자신의 해석에 조심스럽고 건전한 의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상의 네 가지 가이드라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을 얻고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방법으로 우리의 종교적 경험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하면 이러이러한 결과들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며 스스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청중이 자신의 지시대로 따르기만 하면(대체적으로 돈을 바치면) 축복은 분명히 따를 것이며 인생이 잘 풀릴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들은 건강과 성공과 부와 명예가 올바른 믿음의 결과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약속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인간적 투쟁의 와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가 원하는 그런 정도의 삶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좀 더 쉬운 것들을 선택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이따금씩 우리는 모두 "이러저러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더 멋진 체격을 가졌거나 더 재치가 있거나 더 많이 배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때 그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투쟁이나 고통 없는 삶을 제공하겠다는 약속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만을 구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환영(幻影)은 우리가 실제로 다스림(control)이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리들의 삶을 다스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스림은 언제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목표이다. 인간이라는 사실 한편에는 우리의 삶이 우리들 자신의 손아귀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날을 결정할 수 없으며. 우리를 사랑할 사람도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상황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일들 중 어떤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셨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해 새로운 기술보다는 새로운 동기가 더 절실히 필요하다. 다스림의 핑계를 계속해서 대려는 힘든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구출자로 찾게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과 협상을 하고,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이러저러한 희생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그와 같은 노력의 시간들은 대부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우리의 영적 추구 뒤에 있는 동기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지배권을 늘리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러 가지 위험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삶에서 어떤 종교 지도자들이 약속한 것들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충족되지 못한 기대들로 인해 실망해 버릴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겠는가? 비통한 실망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올바른 영적행동들을 통해 자신들은 스스로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 경험을 통해 조소적이 되며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셨거나 실망시키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신은 개인적인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애쓴다. 우리들 모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정원사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자유, 바로 그것이 우리 희망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받을 가치가 가장 적을 때 우리를 사랑하는 자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의지와 영(Will and Spirit)라는 책에서, 제랄드 매이(Gerald May), 우리는 하나님을 다스리려는 우리의 노력이 포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천천히,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겸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 상황은 분명해진다. 위엄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팔에 그것을 안을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를 안는다. 우리는 그것을 잡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이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냉소적이 되어 우리들의 삶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궁극적인 공급자이시다.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장 열망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상당한 고통 가운데서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삶이 이혼,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성적인 혼란, 질병 또는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무능력 등에 의해 찢겨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주 실망스럽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어 보이는 고도로 견고한 구조들이 자신들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을 발견하며, 이러한 사실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19783월 연합 장로교(the United Presbytehan Church)는 교단에 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도, 종교적 실천 그리고 교회 성장을 위한 자원들"이라는 제목으로 헌신적 습관들에 관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교회 구성원들, 사무원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자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이러한 실천들이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었다. 결과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적게 가진 사람들일수록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일에 더 깊이 관여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기도를 더 많이 하며 그들의 삶에서 기도를 더 중요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중년의 사람들보다 더 그러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이혼을 했거나 과부가 된 사람들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그러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삶을 책임이 있는 척할 수 있는 울타리들을 허물어 버릴 때, 우리는 더욱 기꺼이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들을 엎어 버리고 우리의 편의들을 깨뜨려 버릴지 모르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더욱 열망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더욱더 열려 있을 수 있게 된다.

다스림에 대한 망상을 깨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큰 싸움이 있은 후에야 그것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일을 우리의 방식대로 처리하려는 욕망이 우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주의 깊게 건설한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경험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큰 고통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볼 가능성이 더 크다. 사람들이 삶의 경험에 의해 더 깊은 상처를 받을수록,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꿈이 깨어지는 것과 희망과 계획들이 무너지는 일은 경험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들 자신의 경험에서 고통과 깨어짐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참되고 현재적인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강력한 치유를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로 우리에게 접근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그 문은,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들어오시는 하나님에 의해 열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발견은 훨씬 더 부드럽게 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우리가 그 이유를 결코 알 수는 없지만, 이러한 발견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살며, 만사가 합리적으로 잘되어 간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신들의 삶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믿게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복을 받는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를 발견하는 축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라지지 않을 사랑, 즉 우리 모두의 힘과 희망의 근거가 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주여 내게 당신의 뜻을 명하시며, 당신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만을 주시며, 당신의 말씀을 엄하게 하소서. , 주여 내가 주를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나는 나의 뜻과 자유와 선택을 당신께 맡기나이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으니 오직 당신의 사랑만이 나의 기업이 되게 하소서 내게 당신의 원하시는 것을 주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내가 내 모든 미래를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주여 나를 항상 인도하소서.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사용하사 당신의 선을 이루소서. 다만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만 말씀하지 마옵소서. 내가 당신을 욕되게 하며, 당신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더럽히며, 은혜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게 하소서. , 주여, 내게서 당신의 사랑스러운 친절을 거두지 마시며. 당신의 성실하심을 거두지 마소서. 당신은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맹세하셨으니, 당신은 당신의 종들의 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리이다. 당신은 의로운 자들의 세대를 복주시겠다 맹세하셨나이다. 내게 이러한 인격을 주시며, ,주여, 이 약속을 한 무익한 피조물에게 이루소서.

엘리자베스 로우(Elizabeth Rowe)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