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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개혁주의 영성 : 문제와 가능성

 

 

Q. 믿음이란 무엇인가?

A.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내 안에 창조하시는 전심적인 신뢰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순전한 은혜로부터 죄의 용서와 지속적인 의와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영성"이라는 단어는 많은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단어는 물질적인 생활에 반대되고 이로부터 떨어져 있는 한 영역을 암시한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삶이 서로 분리되고 독립적이거나 심지어는 서로 경쟁적인 두 개의 영역들로 나누어진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리는 영성에 대한 부당한 평가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자신이 영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일상적인 다툼과 혼란과 어리석음을 넘어서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관찰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때문에 영성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들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영성이란, 우리가 우리 속에 그리고 주변에 계신 매우 실제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응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이다. 고돈 웨이크필드(Gordon Wakefield)"영적"이란 단어를 정의하면서, 이 단어는 "사람들의 생활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들로 하여금 초감각적인 실체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태도와 믿음과 실천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진지하게 취급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모든 일의중심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특정한 기술에 의해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과 뜻의 특정한 훈련들을 의도적으로 개발함으로써 이미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들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영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경건"이라는 말이다. 이 시대 개신교인들 대부분은 "경건"이라는 말이나 이 말을 암시적으로 상기시키는 모든 것들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경건이라는 말은 편협하게 판단적이며, 독선적인 것으로 들린다. 경건은 창조된 질서 속에서 기쁨을 찾길 두려워하며, 대신에 엄격한 규칙 준수에 대한 확고한 의무감으로 가득 찬 결심을 선택하는 종교적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일에 감사로써 순종하면서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경건에 대한 칼빈의 정의는 경건의 범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데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경건'이라 부른다."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의미의 경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다음의 사실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들이 있고, 우리의 믿음에는 타고난 몇몇 책임들이 있으며,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거부해야만 하는 행동들이 있다는 것이다. 경건은, 우리가 은혜로 덧입혀진 삶을 살며 하나님께 책임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하는 방법이다.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깊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임재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특정한 "경건" 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다. 경건은 세상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자유를 행사하는 방법이다. 경건은 많은 형태들을 띤다. 그 때문에 우리는 경건이란 이름으로 다른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평가할 수 없다. 마음을 강조하며 따라서 명상적인 형태를 띠는 경건이 있으며, 감정을 강조하며 따라서 열정적인 형태를 띠는 경건이 있다. 그런가 하면, 행동 지향적이며 따라서 집단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건이 있고, 더욱 수동적이며 개인적인형태를 띠는 경건이 있다. 우리는 "영성""경건" 양쪽 모두에 대한 전형들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개혁주의 전통은 영성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그 때문에 삶 속에서 성령의 자극을 느낄 때,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러한 경험을 편안히 말할 수 있는 다른 전통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것은 아니다. 19783월 장로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도, 종교적 실천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한 자원들"이라는 제목의 조사에서 이런 질문이 주어졌: "당신은 당신이 종교적 또는 신비적 경험(), 즉 갑작스런 종교적 통찰력이나 자각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시겠습니까?" 거의 반수에 가까운 교인들이 "아주 상세히 말하겠다"라는 응답을 선택함으로써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반면에 36%"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개혁주의 영성의 실천을 묘사하는 훌륭한 방법을 제공해 준다. 여기에는 영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왜곡된 생각들을 건전하게 바로잡는 두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참된 목적은, 우리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나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일 수 있는가 등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들 자신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을 증거 하는가이다. 하나님 중심의 영성은 우리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내적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나 행동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따르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한다. " 경건이나 영성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개혁주의 영성이 가져다주는 도전은 순종적인 제자도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율법과 그 숨막히는 요구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기쁨과 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응답하고 그에 따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경건이 독선적인 부정과 엄한 결심의 표현인 경우가 너무나 많음을 인정한다. 에밀리 허만(Emily Herman)은 이러한 왜곡된 형태의 경건을 관찰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 안으로 떠나는 여행을 지나치게 꺼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엄격하고 법적인 개념으로 뒤덮여 있던 때를 회상하며, 진흙 구덩이에서 건져내어져 반석위에 세워진 성도들의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한숨을 입에 달고자신들의 길을 가던 때를 회상한다."

대부분의 현대 미국 개신교인들은 지나친 율법주의적 엄격성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창조주의 모든 좋은 선물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이 위험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기적인 생각들이 제한 없이 펼쳐지며 모든 것을 허용하는 방종이 판을 치는 지나친 관대함이 가져다 줄 위험도 명심해야 한다. 최상의 개혁주의 전통은, 우리가 창조된 질서에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따라서 이 땅의 삶에서 주어진 선물들에 기뻐할 수 있었다. 칼빈과 그의 계승자들의 엄하고 무미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삶과 그 즐거움에 대한 적절한 향유는 개혁주의 경건의 한 부분이다.

 

 

개혁주의의 저항들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상황과 필요에 적절한 영성을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영성""경건"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와 이 단어들이 제시하는 실천에 대한, 똑같이 거센 저항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계층적 편견

이러한 저항이 발견되는 장소들 중 하나로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의 사회적 계층을 들 수 있다. 영적 언어와 실천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사회에서의 우리의 위치와 많은 관계가 있다. 중산층으로서 우리는, 통제를 중시하고, 지성을 귀중히 여기며, 우리의 감정을 두려워하고, (done)수 있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또한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며, 따라서 우리들의 삶에 다소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경향들은 영성의 전통적인 실천들을 우리의 기본 정신에 낯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영성은 통제의 해제, 감정에 대한 진지한 취급, 행위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존재(beine)에 대한 강조를 요구한다. 중산층 사람들은 바쁘고 따라서 빈 시간이나 게으름을 두려워한다. 기도나 묵상은 시간 낭비처럼 보인다. 따라서 중산층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통제를 행사할 수 있고, 상황에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마음과 그 능력을 중시해 왔으며, 자신들의 감정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억압을 경험했으며. 안전한 중산층이 아닌 개신교인들은 성령의 사역들에 대해 훨씬 더 수용적이다. 흑인계 미국인들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과에 그렇게 깊이 얽매이지 않으며, 통제를 그들이 매달리는 우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백인 개신교인들은 그들의 영성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본받지 않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없고, 오히려 비난하거나 조롱한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특별한 강조점과

 

폰으 크들의 영성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U쉼제 사용할 수 없고, 오히려 비난하거나 조롱한다. 회의들을 만들어 낸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영적 전통과 동일시되는 실천들에 대한 저항을 강화시켜 왔다.

 

일에 대한 거부

종교 개혁자들은,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은혷란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 주어지는 어떤 것일 수 있다는 암시를 줄 수 있는 모든 영적 실천들은 전혀 부시되어 왔다. 칼빈은 은혜의 중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아주 명확히 하길 원했다: "우리의 의가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의를 소유한 것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분과 더불어 우리의 의의 모든 부요함들을 소유한다." 이 장의 처음에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은 이러한 메시지를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근원이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영적 행동도 우리의 자연적인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은 영혼들을 일으키고, 우리의 먼 눈을 뜨게 하며,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의 영감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러한 영감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여전히 완고하게 닫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초기 개신교인들은, 중세의 많은 영적 실천들이란, 죄가 만들어 낸 간격을 인간 쪽에서 메우려는 인간적인 노력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안내자 역할을 했으며, 오랜 시간을 통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영적 혼련의 많은 방법들을 거부했다. 어떤 영적 실천들은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사다리"와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고 하나의 특별한 훈련 방법을 따랐다. 그럼으로써 그러한 실천들은 영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로 옮아갈 수 있다는 인상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심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훈련은 각각의 전통에 따라 다양했으나, 일반적으로 엄격한 규범을 가졌고, 참가자의 전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일련의 실천들이나 단계가 포함되어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훈련은 다른 책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모든 시간을 영적인 삶의 추구에 바칠 수 있는 수도원들에서 가장 잘 이루어졌다.

종교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의로운 노동"(works righteousness)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적인 삶에 대한 중세의 모든 훈련들을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관되게 개인 기도나 비밀 기도, 가정의 명상, 성경에 대한 헌신적 묵상의 필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중세의 많은 헌신적인 실천들이 목회자들에 의해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에게 강하게 추천되었으며, 그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지침서들에도 묘사되었다. 헌신적인 생활에 대한 이러한 개인적 실천은 설교, 찬양, 합심기도와 연구, 성례에 대한 준비된 준수와 같은 은혜의 공적 수단과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스코틀랜드 목회자이자 정치적 행동가였던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존 고돈(John Gordon)에게 보내는 조언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충고할 때 형식의 사용을 강하게 암시했다: “기도와 묵상과 거룩한 교제와 거룩한 모임이 당신의 기쁨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기쁨이 당신 안에 들어왔을 때, 당신은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달콤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사용하실 있도록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 된다. "은혜의 수단들", 신자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며, 성령의 인도에 반응하게 되는 실천 방법들이다.

가장 인기 있는 개신교의 성화들 중 하나로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많이 사용되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이다. 이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이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문을 열 것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시면서, 안에서 들어오라고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기독교 영성의 전통적인 실천들이란, 그 문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기꺼이 열릴 수 있도록 두드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안에서 빗장을 여는 방법들이다.

우리는 개혁주의 개신교인들로서 인간의 노력에 의한 어떤 거짓된 구원의 모습이든지 이를 열심히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 속에서, 우리는 공적을 세우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실천들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위대한 중세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방법을 따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 놓은 모든 실천이나 훈련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요, 감사의 표시이며, 더 깊은 관계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주의에 대한 거부

개혁주의 전통은 모든 개인화된 형태의 종교에 깊은 회의를 품어 왔다. 따라서 예수와의 개인적 관계에 만족하는 형태와 수평적 차원의 제자도를 기피하거나 경시하는 형태의 모든 경건은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개혁주의 경건은 세상 일과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형태의 어떤 영적 실천도 그리스도의 영성에 모순되는 것으로 거부해 왔다. 칼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며 위로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으며, 따라서 개인적인 형태의 경건을 무시했다. 그는 "자만, 반감. 경쟁의식에서, 개인적인 독서나 묵상으로부터 충분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공적 모임을 무시하고 설교를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칼빈은 또한 몇몇 재세례파의 가르침과 실천의 약점이라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공격했다. 지금도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로막고서 자신들의 영적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믿으며, 교회를 떠나 온 사람들이 있다.

개혁주의 전통의 주요 특징들 중 하나는, 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강조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공동체를 부르셔서 언약 상황 속에서 당신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게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협력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러한 강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언제나 매우 수용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러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공동체를 경멸하거나,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 형제나 자매들보다 믿음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 때는 더욱더 그렇지 못했다. 사실 영성에 관한 글을 쓰는 책임 있는 저자들 거의 모두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의무를 강조한다. 개인적인 영성과 공적인 영성의 간격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간격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한 파괴적인 모습이다. 개인의 영적 깊이를 위한 중요한 자원은 개인적 훈련이나 단체 훈련, 또는 이 둘의 결합일 수 있다.

개혁주의가 개인적인 종교적 실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 가지 이유는, 순전한 동기들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깊은 확신 때문이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팽배성을 심각하게 취급한다. 개인은 정기적으로 전체 믿음 공동체의 지도와 올바른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는 그의 종교적 경험이 왜곡되지 않고, 환영에 빠지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개혁주의 이해,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협력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 참된 개혁주의 경건은 전체 신앙 공동체를 아주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면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복종시켜 그의 조언을 구하는 영적인 삶이 될 것이다. 공적 예배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바르게 고쳐지길 원할 것이다.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공적인 성례를 함께 나누는 일과 같은 공적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 대한 모든 개혁주의의 이해에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한 외로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공동체로서 구속받았다. 함께 예배드릴 때,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배운다. 이해를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계속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전체 교회가 함께하는 기도 생활을 나눔으로써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모이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같은 머리 아래서 한 몸으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구원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복지와 행복에 무관심하지" 않도록 "서로를 돌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무엇인가를 단순히 받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과 믿음과 용기를 나눠주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영성에는 상호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종교 체험과 실천을 평가 절하시키려고 이것들에 대해 자주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깊은 개인적 경험들에 대해 입을 다물거나 부정하라는 미묘한 압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적인 삶은 무시되어 왔으며, 마침내 많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충성심과 의무감에서, 그러나 그다지 기쁨과 열심 없이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잊기는 했지만, 역사를 통해 보면 개혁주의 전통에는 개인적인 영적 훈련을 위한 자리가 늘 있어 왔다. 칼빈은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기도를 "비밀스러운" 어떤 것으로 규정했다. 칼빈은, 기도란 "원칙적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의 무수한 염려들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고요함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개인 기도의 필요성은 개혁주의 저자 매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해서도 강조되고 있다. 헌신적인 실천에 대한 영향력 있는 그의 고전 기도의 방법(A Method of Prayer)에서, 매튜 헨리는 기도의 세 가지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 공적 기도, 가정 기도 그리고 비밀 또는 개인 기도. 이들은 모두 하나에 속하며, 각각은 다른 것들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1640년대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부터 아주 최근까지, 웨스트민스터 예배 지침 (the Westerminster 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은 은밀한 예배 또는 개인 예배의 네 영역들을 말하고 있다: 기도, 성경 봉독, 거룩한 묵상 그리고 진지한 자기 점검. 예배 지침의 가장 최근 판에서는, 이것들이 확대되어 성경 봉독, 기도, 고요히 하나님을 기다림, 말씀에 대한 묵상 자기 헌신, 섬김에 대한 서약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은밀한 예배의 각 부분은 공적 예배와 균형을 이루며 다른 사람과 공유될 때 정직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가 의미를 가지려면, 혼자 있을 때 시행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공적 기도에 내어놓을 것이 거의 없다. 혼자서 성경을 읽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통해 성경이 전파될 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준비시켜 줄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나 사랑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된다. 칼빈은 개인 기도와 공적 기도의 이중적 필요성을 간단하게 말했다: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또는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혼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를 등한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빈번하게 공중 기도에 참석한다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 뿐이다"라고 했다.

영적인 삶에서, 개인 기도와 공적인 형태의 경건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우리는 개인 기도를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들을 두려워해 왔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공적 예배에 우리의 영적 양식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불균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주일 아침 한 시간이 우리의 영혼을 먹이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말해서,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전통의 고전적 형태의 헌신적 실천들을 개발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공적 헌신과 개인적인 헌신의 균형을 회복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개혁주의 유산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감성에 대한 거부

개혁주의 전통은 감성의 위험들에 대해 깊이 염려해 왔으며, 그 때문에 영성의 몇몇 형태들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우리의 믿음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음(mind)의 진지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지성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영성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무책임하고 미덥지 못한 것이 될 가능성도 크다. 감성은 지나친 감정주의(emotionalism), 주의 깊은 사고보다 느낌을 더 선호하는 것을 말한다. 감정은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 믿을 만한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느낌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오거나 우리들 자신의 신경적인 필요에서 나올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불행에 대한 연민에 빠져 있을 때마다. 감성은 일종의 방종적인 자기도취(narccicism)라는 특별히 현대적인 형태를 띤다. 감성은 또한 "예수와 동행하라"와 같은 표현에서 개인주의적 방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이를 믿음의 목표로 삼는다. 감정이 우리를 진지한 반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올바른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고에서도 엄격한 믿음만이 순종적일 수 있다.

감성에 대한 개혁주의의 거부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열성적인 감정을 추구하며 예수와의 친밀한 느낌을 충성의 궁극적 평가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경건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잘못된 경건주의로 전락할 때, 경건은 느낌에 빠져서 감정을 진리 시험의 기준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로 느끼면 그는 확실히 옳은 것이다라는 평가가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감정은 계시 수납의 중심 수단으로 취급된다. 이렇게 되면, 상상력이 잘못 사용되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무시무시한 행동을 범하게 된다. 심지어 실제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벗어난 나머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시무시한 파괴 행동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믿게 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위험이 있다.

마음(mind)은 이러한 잘못된 인도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칼빈은 마음이라는 선물을 인간을 정의하는 절대적인 중심으로 소중히 했으며, 합리성의 한계들까지 알고 있었다. "선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일이 많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또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난다. 그 때문에 이성은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오도하고 왜곡할 수 있듯이, 합리성도 믿음의 심연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사람들은 마음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합리성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왔다.

머리의 지식은 가슴(heart)을 필요로 한다. 감정은 하나님께 접근할 때 한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대각성 운동을 통해 해방된 강한 감정들을 이해하고 비판하려고 하면서, 열과 빛의 유비를 사용하여 사고와 느낌의 상호 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해에는 감정을 지닌 뜨거운 열뿐만 아니라 빛도 있어야만 한다. 빛은 없고 열만 있는 곳에는 그 가슴속에 신적인 것이나 천상의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만 있고 열이 없으며, 머리는 관념과 사색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은 냉랭한 곳에서는, 그 빛 속에서는 어떤 신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머리와 가슴의 연합은 믿음에 대한 칼빈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서 강조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함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며 우리의 가슴에 인쳐진 것이다." 믿음은 거짓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마음도 마땅히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의 믿음은 의미 없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합리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칼빈은 "지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해"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감각적 지각을 넘어서는 어떤 것,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이 마음 그 자체를 뛰어 넘어야 하는" 어떤 것을 의미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없는 머리의 지식은 우리를 설득하기에 충분치 못하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 수도 없다. 신뢰는 믿음의 심장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믿음의 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칼빈은 핵심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개혁주의 영성은 지적인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 반응에 의존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믿음은 마음으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것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믿음은 지적 동의를 구하는 언어적 공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방법으로 참된 믿음을 정의하고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창조하시는 전심적인 신뢰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복음이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순전한 은혜로부터 죄의 용서와 지속적인 의와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다.

 

가슴과 마음 사이의 균형은 중요하다. 우리는 감정적 경험들을 우리가 아는 것에 비추어 테스트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가슴으로 느껴지는 개인적인 경험이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한 사람이 올바르면서도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를 가지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과 경험은, 대비를 이루지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믿음을 위한 두 필수품들이다. 경험과 지식이 결합될 경우, 이 둘은 거짓된 마음과 가슴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칼빈의 많은 추종자들은 한 가지 잘못을 범했다: 이들은 정확한 교리에 대한 동의로서의 믿음과 신뢰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감정적 반응으로서의 믿음, 이 둘을 분리시키고 말았다. 믿음에 의한 구원으로 알려진 것이 올바른 신념에 의한 구원이라는 가르침으로 자주 왜곡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올바른 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일련의 명제들에 대한 동의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설득과 내어 맡김과 내적 증거나 확신으로서의 믿음이 가지는 중요성을 재발견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이러한 재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감정과 사고의 조화도 회복하게 해 줄 것이며, 느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내세에 대한 회의

개혁주의 전통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세상과 결별된 어떤 실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삶 전체와 관계된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실천과 이러한 실천이 그 사람의 사업, 가정, 정치적 삶에 미치는 영향의 어떤 분리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물리적 세계를 거부하거나 영의 세계를 혈과 육의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경건은 어떤 것일지라도 위험스럽다. 창조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취급하거나, 정치와 경제의 세계를 그리스도인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하는 형태의 경건은 개혁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육과 영을 날카롭게 분리하는 것보다 성경적 믿음을 더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은 없으며. 특히 이러한 분리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잘못된 가치 판단을 가져다 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해 왔다: 몸으로부터 자유롭고, 육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으며, 영이 육에서 분리되어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것들에 오염되지 않을 수 있는 영의 세계가 있다.

칼빈은 이러한 이분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는 죄가 감각적인 유혹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일반적인 관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불신앙이 야망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으며, 야망은 반역의 아버지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야망은 육체의 죄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죄이다. 죄는 인간의 삶, 생각, 느낌, 행동, 정치, 경제, 경건 모두에서 표현된다.

칼빈은 몸-마음의 이원론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찬양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상을 그렇게 멋지게 장식해 주신 것은 결코 작은 영광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아름다운 세상의 구경꾼이 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의 풍성함과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이처럼 선하신 창조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양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를 사용하도록 의도하셨다. 세상은 풍부한 향기와 맛과 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들의 창조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감각적 기쁨들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식을 준비하심을 가리켜, "단순히 필요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기쁨과 선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의복과 다른 부분의 창조들은 유사한 점이 있다. "풀과 나무와 열매는 다양한 쓸모와는 별개고 아름다운 모양과 달콤한 향기를 가졌으며," 이는 사람들에 의해 즐겨지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삶의 축복을 맛보길 거부하거나 맛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주신 자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넉넉히 준비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고 이용하게 하시고자함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영성은 세상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 영성에서 성령의 훈련 목표는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닳게 함으로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다 낫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성실하게 응답할 때, 모든 영적인 훈련은 우리에게 인도와 힘을 가져다준다. 영적 삶에 대한 개혁주의의 지침들은 경건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접목되어야 함을 강조해 왔다.

칼빈은 세상과 분리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세 수도원 체계를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수도원의 실천이나 이상을 경멸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과 세상 속에서의 삶을 분리시키는 그들의 태도를 깨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 제도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도된 삶을 살기 위해 다만 몇몇 사람들만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칼빈은 수도원 제도가 다수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의 대체물이 되고 말았다고 믿었다. 가혹한 육체적 자학으로, 수도원은 물리적 세계를 희생시켜 영을 영화롭게 하는 한 위험한 행동에 가깝게 되고 말았다. 수도원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칼빈은 영혼의 훈련들을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삶에 접목시키려 했다.

따라서 칼빈은, 오로지 세상을 포기하고 물러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상을 공격했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성인(聖人)들의 영성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삶을 실제로 그대로 본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칼빈은, 복음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비록 멀리서나마 그분의 자취를 따른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고 말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칼빈의 공격이 지나치고 과장된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그는 종교 개혁의 생존을 위한 일종의 거룩한 전쟁을 치르는 답장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색적인 삶은 일과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사는 삶 보다 낫지 못함을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수도원적 시간들은 가족을 위한 아침과 저녁 기도 시간을 가지라는 명령으로 전환되었다. 개혁주의 개신교의 이상은 각각의 기독교 가정이 세상 속에서 작은 수도원이 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는 세상에서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힘과 지지를 가져다주는 숨은 힘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은 여러 약점들도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 앞에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되는 수도원 제도가 없을 경우, 그 시대의 특별한 문화에 너무나 쉽게 동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은 널리 보편화되었지만 프랑스의 타이제 공동체(Taiz Community)가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에서 균형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스코틀랜드 이오나 공동체(lona Community)의 생활도 이와 유사한 필요와 반응을 지적해준다.

 

 

 

개혁주의 영성 갱신을 위한 잠재력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내세웠던, 언제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세 가지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개혁주의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영성을 가져다주는 창조적 긴장에 필요한 핵심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것들은 또한 제노아의 캐서린(Catherineof Genoa),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십자가의 존(John of the Cross), 아빌리아의 테레사(Teresa of Avilia)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보편 교회의 역사적 믿음의 영성과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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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의하게 살면서 동시에 영적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참된 영성은 우리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과의 화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 참된 영성은 영적 훈련의 한 고유한 부분으로서 세상에서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

칼빈은 인류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의 공통된 교제로 묶여져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이 교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행동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그의 백성들에게 행한 모든 것을 당신에게 행한 것으로 셈하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무시되거나 존중 받으신다"고 했다. 우리는 은혜에서 자라듯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자라야한다. 이웃에는 우리가 전혀 만나지 않을 사람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공회의 원리는 우리의 영성 중심에 자리잡음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현제의 친구들에게만 제한시키거나 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는 이와 같은 영성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칼빈이 고리대금에 대해 그렇게도 강하게 반대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대때로 필요한 이웃들에게 돈을 꿔 주고 적은 이자를 받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꿔주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선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 예숙가, 농부, 상인들과는 달리 대출업자들은 "편안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부터 일정량을 착취한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또한 우리가 서로를 떠받쳐 주고 지탱시켜 줄 수 있도록 모든 백성을 상호 부조 사회(mutual society)의 유대 속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원리를 깨뜨리는

특히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며,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의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검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두번째 표시는 때때로 금욕주의의 "현세적(現世的)" 형태라고 불러왔다. 칼빈은 세상은 우리가 즐겁게 누리고 소중히 여기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지만, 소유에 얽매이고 세상의 편리함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소유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우상이 될 때에는 언제든지 이를 기꺼이 포기해야만 한다.

우리는 남을 돕는 일이나 그렇지 않으면 해치는 일에 우리의 소유를 사용한다. 그 때문에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영성에 매우 중요하다. 개혁주의 경건의 고전적인 특징들 중 하나는, 칼빈이 구제라고 부른 것이다. 구제는 필요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생적으로 주는 영적 삶의 한 혼련이다. 인간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 준다. 칼빈은 구제를 중보 기도와 연관시켰다.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실 중보기도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해준다. "기도와 구제는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구제는 그들의 궁핍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통해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심지어 외국인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까지도 도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도와 행동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금식은 개혁주의 영성에서 탐심과 방종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경향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칼빈은 금식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금식에 대해 음식을 억제하며 절제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이해한다. 경건한 사람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깝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금식은 우리의 소유에 지나치게 얽매여 그것을 잃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지배를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두려움은 쉽사리 우리의 신앙과 타협될 수 있다. 2 헬베틱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금식과 하나님께 대한 책임 있는 감사 사이의 연결을 말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가 과식과 술취함과 다른 모든 종류의 욕구와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면 할수록, 그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금식을 더욱더 강하게 명한다.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에서 그 연료를 제거함으로써 육체가 더욱더 기꺼이 그리고 쉽게 성령에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잠시 동안 필요한 것으로 취해지는. 경건한 자들의 금욕과 절제이자 우리의 육체에 대한 훈련과 돌봄과 응징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금식은 또한 하루 동안이나 정해진 일정한 기간 동안 틀에 박힌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하나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행동이기도하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금식은, 비록 백년이 넘는 시간차가 나기는 하지만 칼빈과 루이스 배일리(Lewis Bayly)가 말했듯이,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1. 칼빈은 "우리는 육이 방종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며, 굴복시키기 위해 금식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배일리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약화시키기 위해 금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명에 필요한 의무들을 행하기에 적합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사용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은 다소 악하며 영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식이 우리의 우선순위들을 명확히 하는 문제로 봄으로써 금식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금식을 한다는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에 비해 이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기도와 명상을 위해 우리들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금식한다. 개인적 금식은 우리의 기도를 강화시켜 주는 한 수단으로 기도를 동반한다. 칼빈은 바울과 바나바의 금식에 대해 쓰면서,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을 더욱 열심으로 기도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체험으로 보더라도, 배가 부르면 정성과 열성을 다해 기도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없다." 금식이 우리의 정신적 상태와 우리의 우선순위들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겪는 일반적인 경험이다. 금식은 우리의 기도를 강화하고 심화시켜 줄 것이다.

3.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자 할 때 우리들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금식한다. 금식은 공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 공적인 금식은 단체의 죄를 고백하려는 목적을 가지며, 회개에 대한 공동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역사를 통해 보면, 공적 금식은 공적 재난을 피하거나 공적 축복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기도 했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은 공적 금식을 정기적으로 행했으며, 특히 봄에 씨를 뿌린 후에 행했다. 봄은 또한 궁핍의 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는 겨울 식량이 거의 바닥나기 때문이었다. 청교도들의 봄철 금식이 그들이 거부한 카톨릭의 사순절 준수와 상응하는 점이 많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우연의 일치이다.

기도에 대한 지지대로서 금식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계속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금식의 관습은 개혁주의를 포함하여 미국의 모든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시들해져 가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 시대의 목회자들이 금식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음을 염려했다. 그는 또한 금식을 개인 기도와 연결시켰다:

 

금식은 은밀한 기도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구주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권하신 의무이다‥‥ 나는 은밀한 금식이 은밀한 기도처럼 일정한 방법으로, 견실한 과정을 거쳐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 있어 금식은 모든 고백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그것도 자주 실천해야 하는 의무로 보인다. 금식을 필요로 하는 영적, 육적 상황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들 자신이나 친구들을 위해 특별히 바라는 자비들이 많다. 따라서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로, 금식은 등한시되어 왔다. 그 결과 금식이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을 위한 훈련의 한 방편이었다는 사실마저 잊혀질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살빼기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나 압제당하는 자들과 궁핍한 자들과의 일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식은 로마 카톨릭의 관습이라고 믿고 있다. 영적 혼련으로서의 금식에 대한 우리의 망각은 경제 분야에서의 우리의 성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성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풍족한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금식 훈련을 행하기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금식은 다른 좋은 것에 대한 포기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거부가 아니며, 이 세상에 대한 격하도 아니다. 금식은 몸에 대한 증오도 아니며, 몸을 학대함으로써 영이 자라거나 깨끗해 질 수 있다는 믿음도 아니다. 이러한 태도들은 비성격적이며 비개혁주의적인 몸과 영의 분리를 가정하고 있다.

모든 진정한 경건의 회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에서 검소함의 한 상징으로 금식을 주의 깊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룩

거룩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따라서 우리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축복에 동참하는 자로 만든다. 은혜에 의한 칭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끝은 아니다. 우리는 성화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은혜에서 커 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숙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에 응답하는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죄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 빠져 있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계속해서 움직이며 살아야만 한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의 열매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알게 해 준다. 거룩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신비와 더불어 사는 것이며, 이 신비는 우리의 차가운 가슴을 들어내고 우리를 새롭게 하며 우리의 믿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머리와 지체들과의 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 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의 것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당신이 받으신 선물의 공유자가 되게 하신다."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신비적 연합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거룩의 진정한 핵심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문헌들 전체에서 나타나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각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성화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양심의 힘에 의해서도 아니며, 도덕적 동기들에 의해서도 아니며, 훈련의 행동에 의해도 아니며, 하나님과 화해하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했던 영성의 몇몇 중세 형태들과는 달리, 개혁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17세기 사람으로 신비적이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아마도 청교도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는 결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극적인 말로 표현했다: "당신은 하나님이신분과 결혼한 상태이며, 그분 안에서 당신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분은 개인적인 연합에 의해 당신과 하나이며, 당신은 신비적연합에 의해 그분과 하나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과 혼인한 상태이므로, 그분의 영이 여러분의 영에 흘러 들어오며, 신성이 여러분의 영혼에 흘러내린다." 루스는 개혁주의의 신비를 가장 잘 나타냈으며,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구하고, 그러한 연합이 실제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이것이 모든 자각 활동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세 특징들 -, 검소, 거룩- 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균형을 유지해 준다. 이들 각각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과 은혜에서의 성장을 위해 똑 같이 필수적이다. 의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의 공의의 의무를 계속 기억하게 해 준다. 검소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며 소유의 우상의 위험성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해 준다. 그리고 거룩은 우리를 신비스러운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힘든 삶을 계속해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해 준다.

진정한 개혁주의 경건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질 것이다:

1. 진정한 개혁주의 경건은 공동의 헌신과 개인의 헌신을 조화시킬 것이다. 그 결과 믿음의 공동체는 각각의 실천에 의해 부요해질 것이며, 개인의 사적인 생활은 전체 교회의 증거에 의해 바로잡혀지고 심화될 것이다.

2. 진정한 개혁주의 경건은 감정과 사고를 조화시킬 것이다. 그 결과 경건은 단순히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충실한 것이 될 것이다. 성경이 중심이 될 것이며, 묵상과 성경 연구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이 실제로 누구이신가를 바로 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그와 같은 연구는 냉랭한 지적인 것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내주의 부요함, 즉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 줄 것이다.

3. 진정한 개혁주의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신 세계에 대한 즐거운 수용과 소유를 우상으로 여기고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주의 깊은 청지기 정신을 조화시킬 것이다. 경건은 검소함의 훈련을 실천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한편으로 물질적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들도 거부하지 않게 된다.

4. 진정한 개혁주의 경건은 고요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욕구와 그리스도의 임재에 의해 불어넣어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우리의 믿음에 따라 살려는 욕구를 조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공적인 믿음이 될 것이다.

개혁주의 영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열쇠는 균형 속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쪽이나 또 다른 쪽으로 기울게 되면 위험스러운 극단에 빠지게 된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고전적인 칼빈주의자로서, 그리고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시골 목사(Country Parson)에 대해 개혁주의적인 수정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쓴 개혁주의 목회자(The Re formed Pastor)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혁주의 목회자에서 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삶에서 네 가지 필수적인 것들을 지킬 것을 권고했다. 그것은 기도, 연구, 의논 그리고 실천이었다. 함께 유지된 이 네 실천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거짓이나 위험스러운 극단들이 없는 생명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이 리차드 박스터의 간단한 권고가 여전히 중요성을 가지는 이유이다: 기도하라, 연구하라, 의논하라 그리고 실천하라. 이들 각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표시이며, 다 같이 우리를 균형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당신의 법을 알게 하셨듯이, 당신의 복음도 더하셨나이다. 그 속에서 당신은 우리를 불러 당신을 섬기게 하셨으며, 친절하게 우리를 초대하사 당신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명령이나 당신의 자비의 약속에 귀멀지 않게 하시며, 다만 우리로 어느 곳에서나 당신께 복종하게하시며, 우리의 모든 재능을 당신께 바치게 하시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규칙이 당신의 법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솔직히 인정하게 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굳게 붙잡게 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어떤 유혹에 의해서나 사단의 아첨이나 속임수에 의해서도, 당신께서 단번에 당신의 독생자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마침내 우리가 천상의 유업 가운데서 이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될 때까지 그 사랑 가운데서 복음의 가르침으로 날마다 우리를 굳세게 하셨으니, 그 유업은 당신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우리를 위해 사신 것입니다. 아멘.

존 칼빈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