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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기도

 

 

 

Q.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기도가 필요한가?

A.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주요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기도로 당신께 열심히 구하는 자와 이러한 선물들에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당신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기도는 인간의 거의 보편적인 행동이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인간들은. 자신에게는 삶과 죽음처럼 중요한 신비하고 경이로운 힘과 관계를 갖는 방법들을 모색해 왔다. 인간들은 이러한 힘과 접촉하려고 애써 왔는데 이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지배하는 이러한 힘이 그들의 생존 자체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뭄과 흉년이 오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이 온 도시를 휩쓸고 지나갈 때, 아무리 희미하게 이해되는 신(또는 신들)이든지 간에 이들에게 나아가 이들과 접촉하는 것 외에 이러한 재난에 직면하여 달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기도에서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어떤 알지 못하는 것들의 위협을 받을 때, 인간들에게는 어떤 것이건 간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보이지 않는 힘을 향해 울부짖는 타고난 본능이 있다. 따라서 모든 기도는 초월적 존재 즉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인간 의식으로부터 생겨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식 때문에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신비적인 것들에 복종해 왔으며, 이것은 초월적인 힘이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들을 보시고 우리의 요구를 자상하게 들어주시도록 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된다. 염려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안전이나 도움이나 위험으로부터의 구조를 위해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성경에는 한 사람이나 집단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려는 노력으로서의 기도를 보여주는 예들이 많다. 비를 위한 기도,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도, 전염병이 그치길 간구하는 기도. 장수와 건강을 바라는 기도 등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이 시대의 지적인 성취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기도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자연적" 기도는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 모습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기도에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비현실적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기도가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런 기도가 솔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성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이런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식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어려운 근심 걱정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께 달려가 피난처를 구하듯이.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을 찾도록 경고하고 촉구하신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유혹은, 기도를 순전히 실용적인 것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도록 만들려고 애쓰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우리는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게 하려고 우리가 애쓴다면, 이 노력은 이기적이거나 전적으로 이타적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는 음흉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염려하게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믿을만한 분이신가 하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게 되며,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결과가 좋으면 그 결과에 고무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실망한다. 우리는 결과의 기도의 가치를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계속 기도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기도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위기의 순간들 외에는 기도를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과에 의해 모든 시도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우리는 기도를 구체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방법으로 보고 싶은 유혹을 매우 강하게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두려움이 모든 자연적 기도에 따라다닌다. 이러한 의심의 씨앗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에서 멀어지게까지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구를 거절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길 원치 않는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도하고 싶어 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 그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실망하게 된다.

기도에 관한 책을 읽거나 워크샵에 참석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를 바꾸는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심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 새로운 방법이이전 방법이, 주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주기를 바란다. 기도를 위한 수련회나 회의들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대들을 뒤에 숨긴 채로 시작된다. 에밀리 허만(Emily Herman)은 우리가 "기도에서 발전이 멎어 버린"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모든 실제적인 의도와 목적에까지 기도를, 개탄스러운 기계적 방법으로, 간청하고 애걸하면서 조르는 과정으로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간구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심을 우리가 믿고 있음을 내세운다. 이 믿음이 왜곡되었을 때 조차도, 기도는 여전히 신뢰의 상징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는 적절함이나 정확성과 같은 사치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는 긴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기도는 아무리 신학적으로 꾸며지거나 자기중심적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예수에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으며, 우리가 주의 기도로 알고 있는 기도의 모델로부터 나온 몇 가지 구체적인 특징들을 가진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며 우리 기도의 중요한 내용들을 정해 주신 분의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다. 주의 기도에서 초점은 우리 자신의 필요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들에 맞추어져 있다. 주의 기도의 주된 의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목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할 때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맡기는 기도이다.

기도에 관한 훌륭한 저서 기도의 방법(Method of Prayer) 서론에서,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기도의 기본적인 목적을 다루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움직여 복종시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목적에 대한 그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인식은 기도가 주는 주요한 유익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유익은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쉽게 주어지는 그런 유익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도록 만드는 행위로서의 기도와 자기 이해의 증대와 하나님의 뜻에 더 근접한 순응을 위해 우리를 바꾸는 행위로서의 기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번째 형태의 기도가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라면, 두번째 형태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관계적"이다. 첫번째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며, 두번째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이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표현하여, 기도는 '단순히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이다"라고 했다. 기도를 통한 대화에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목적은 매우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가 취하는 형태 또한 다르다. 기도는 의무나 우리의 필요에 대한 긴급한 표현 대신,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해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표현이 된다.

칼빈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로 중심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도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에 관한 장이 가장 길다. 기도에 관한 이 장으로부터 우리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기도가 갖게 된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해 주었다. 이러한 기도의 이유들은 개혁주의 기도 신학을 형성하고 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들

 

칼빈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항상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에 언제나 불일듯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기도의 이유는, 매튜 헨리가 말한 이유처럼, 하나님이 변하는 방법보다는 기도에 의해 우리가 변하는 방법과 관계가 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자극하고 심화시키며 강하게 하려고 기도한다.

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이유는, 우리의 보편적 생각과는 거의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고 최상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이 완전치 못할 때, 일이 잘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동이다. 이와 같은 때가 우리에게 기도가 가장 필요한 시기이다. 이러한 때는 또한 기도가 가장 힘든 시기이며,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기도를 미루기 쉬운 시기이다. 스스로에게, 기도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때 조차도, 우리는 기도를 미루며 하루 계획표에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 두지 않는다. 규칙적인 기도 시간을 찾는 일은 거의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게으름과 믿음의 부족 그 이상의 것이 문제임을 말해 준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내적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기도로부터의 도피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모호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기도에 저항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식하든 못하든지 간에 깊은 갈등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길 원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그 뜻에 저항하려 한다.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 데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들은 기도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하거나, 여러 공상들로 인해 기도에서 멀어진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그 시대의 이러한 어려움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이 천상의 일(기도)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드러날 것이다. 기도에 대한 거부, 기도에서의 불성실함, 다른 것들에로의 빈번한 외도, 또는 기도를 잘 시작하기도 전에 갑자기 끝냄으로써 당신이 이 일(기도)이 가져다주는 위안을 평가할 때, 이러한 위험스러운 악들에 충실히 저항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기도하기 싫을 때 가장 많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길 거부한다면, 이것은 기도에 대한 저항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영적 문제가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우리 자신의 믿음을 심화시키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갱신과 심화는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기도라는 어려운 일에 몰입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 칼빈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실 경우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도는 우리의 요구나 필요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들의 필요에 너무나 얽매여 있다. 그 때문에, 그 필요들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하고 통제하며, 우리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없다. 기도로 어떤 것을 구하는 일이 부끄럽게 생각된다면, 우리가 구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우리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필요의 적합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끝없는 도구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기도 시간은 우리 자신을 새롭게 조명해 줄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요구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그 요구들이 바뀌게 된다.

기도는 언제나 자기 점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것은 특히 개혁주의 전통에서 사실로 입증되어 왔다. 청교도들에게 자기 점검은 매일 기도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개인 고백 기도의 기초를 형성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 점검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유익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하며,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행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과 동요와 유혹에 대해 우리들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게 해 준다.

기도에서 인내가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기도는 우리가 원하거나 열망하지도 않은 변화를 우리 안에 낳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이 기도가 갖는 모험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선입관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한 사람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고 동시에 그 사람에게 복수심을 품을 수는 없다. 우리가 낡은 태도를 고집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새로운 전망이라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셋째, 칼빈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언제나 감사할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들을 더 많이 경험했다. 우리가 받은 축복보다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이나 고난을 더 잘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이다. 기도의 훈련이 가지는 큰 가치들 중 하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바로 그 기도의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증거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박스터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주고 있다:

 

독자들에게 부탁하노니, 이것을 기억하라. 여러분의 의무들에서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하라. 여러분의 고백과 간구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찬양을 드릴 것을 항상 손에 준비하라. 이를 위해 주의 탁월하심과 선하심을. 여러분 자신의 요구들과 무가치함만큼 자주 연구하며. 여러분이 받은 것과 약속된 자비를, 여러분이 범한 죄만큼이나 자주 연구하라.

 

감사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안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감사의 기도는 염려 속에서도 선한 삶을 살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들 모두가 감사의 훈련이 하나의 축복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놀라운 선물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기적 같은 기회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염려와 고통을 쓸어가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기도 전통이 흑인 교회에 한 가장 큰 기여들 중 하나는 감사, 종종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의 감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 주님" 처럼 빈번하게 반복되는 긍정적인 외침들은 흑인 교회에서 드려지는 기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찬양으로 가득 찬 이러한 기도는, 그렇지 않으면 단지 절망으로밖에 보일 수 없는 상황에서, 흑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주된 요소이다. 하나의 제도로서의 흑인교회는 흑인들 속에서 감사의 마음을 보존하는 주된 힘으로 존재해 왔으며, 흑인들에게 절망과 좌절을 벗어버리는 힘을 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삶의 기쁨을 쉽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거의 의식하지 못할 때도 많다. 우리는 좋은 시간들을 갖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권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에게서 이런 시간들이 사라졌을 때에야. 우리는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리의 감사 기도는, 칼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은혜에 순종하는" 방법이다.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규칙적으로 감사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하루하루의 삶에서 생명의 선물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받는다.

넷째, 칼빈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뜻은 우리의 거룩과 안녕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기도로 구하던 것을 이미 얻었다. 하지만 이를 믿기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자주 "응답되지 않은 기도"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응답이 주어졌을 때 이를 알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크게 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형태를 띨 있다.

"안된다"도 기도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의 한 표현 방법임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아이는 이러한 대답이 다름아닌 사랑의 표현임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곧 사랑이 많으신 부모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자녀들이다.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드린 많은 기도가 부정적 응답을 받아 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안된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축복이었음을 발견해 왔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면, 우리는 비극적인 피조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많은 것들이 이기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일시적으로만 가치 있다. 우리의 기도 항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생각하는 것들의 항목과 전혀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축복으로서의 기도를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면서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특별한 요구를 들어주시는 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따라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칼빈은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 때 누구나 좌절감을 느끼게 됨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그분은 "결코 졸거나 게으른 적이 없으시면서도, 잠자고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실 때가 많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훈련받지 않으면 게으르게 되는 우리를 훈련시켜, 당신을 찾으며 당신께 간구함으로써 큰 유익을 얻게 하시려는 목적에서이다."

기도는 믿음을 심화시켜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의 태도를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나 무관심에서 희망과 기대로 바꾸어 준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감사함으로 그 응답을 받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들을 말해 주었다. 이것들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칼빈의 기도 신학은 하나님 중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변화시켜 우리의 욕구를 채우게 할 것인가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문제들

 

기도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기도에 대해 이런 저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물질주의 문화의 시민들에게 기도는 특히 더 힘들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을 돌볼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런 우리에게 기도는 책임 회피를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기도는 우리를 아이로 전락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세상에서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믿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에게 자연 법칙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인상에 따라 결정한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간구를 거절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겐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너무나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고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의 일차적인 인상에 들어오는 하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재판관, 즉 경배의 대상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기도에 대한 우리의 열심을 가로막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벌하는 것만 생각하는, 복수심 강한 폭군과 아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유치한 인상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인상들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작용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을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저작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으며 기도에 대해 현실적이었던 플로라 월너(Flora Wuellner)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충고를 했다: "때때로 잠재의식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우리에게 그의 사랑이 필요함을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인상에서 두려움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상으로 옮겨가는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재형성하도록 허락할 때에만 가능하다. 칼빈은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 중재자로 앞에 나서며, 무서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바꾸실 때까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두려움을 증가시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하는 대상이 사랑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셨음을 알게 해 준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의해 바뀌어진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보시고 판단하실 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고 말하면서, 기도에서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하나님의 신비와 타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우상 숭배 위험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성을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인성적 측면을 잊으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견해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접근을 달갑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우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기도를 그다지 열심 없는 의무 이행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요구한다. 열심히 기도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이신 하나님, 개인적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강하지만 멀리 계시는 하나님, 인간의 삶의 매일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하나님은 우리 안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계시며, 우리의 인성을 공유하시고, 지금 우리를 현재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임재 바로 그곳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만 계속 늘어놓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너무나 멀리 계시는 분으로 보이는 한, 우리의 기도에는 친밀감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친밀감 모두에 대한 존중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조화요 균형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자연 세계를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우리의 시각에 의해 빈번하게 제한된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발전한 이후로, 우리는 이성의 힘을 믿어 왔다.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하려 해 왔으며,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진지하게 취급되어서도 안된다고 거의 의심 없이 믿어 왔다. 우리는 자연이 고정된 법칙들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하나님을 제한하며, 우리로 하여금 기도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신념에까지 이르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사물의 존재 방식을 바꾸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변화가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때, 기도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확고하고 기계적인 태도는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고정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조차도 자연을 바꾸는 어떤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없이나, 우리를 통해서나, 심지어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하실 수 있음을 믿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궁극적인 객체라는 생각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에게는 실제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는 또한 기도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행으로 보는 한, 우리는 극단적인 절망의 순간에만 기도할 것이다.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보이려는 우리의 열망, 자신을 돌보려는 우리의 결의 그리고 강하고 독립적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우리 속에 너무나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새롭게 눈뜨는 데에는 위기와 위험이 뒤따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의지는 나약함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돌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관계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자족한 체하면서 우리 자신에 얽매이는 것은 실제로는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한계와 약점을 볼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정직은 우리가 자족하다는 거짓된 생각을 버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기도는 놓아두는 행위이다. 기도는 다른 행동들 중의 또 하나의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한쪽에 제쳐둔다. 그리고 적어도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 없이도 계속해서 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기도는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계와 달력의 노예이다. 우리는 성취된 일을 보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기도를 위한 중요한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의 시간을 찾는 것은 안식일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두 경우들 모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주어지도록 가만히 있으라는 요구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의 바쁜 세계에서, 기도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은 약해지고,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하나님과 당신의 영혼 사이의 부끄러움을 걷어 내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 잦은 기도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무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간헐적으로만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해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20세기에 있어 기도의 주된 장애물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상들과 우리들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상들이다. 전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후자는 우리로 하여금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족성을 증명하려 하게 만든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회복하는 것과 우리가 온전히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회복하는 것, 이 둘 모두가 우리의 개혁주의 유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도에서의 균형 회복

 

기도에는 네 가지 필요한 균형들이 있다. 생명력 있고 의미 있는 기도양식을 회복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네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들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 각각은 기도에서 필요한 긴장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이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우상 숭배나 개인주의와 같은 지나침의 덫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

1. 기도는 협력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우리는 혼자서 기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협력 기도(cooperate praying)를 살찌우는 개인 기도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기도는 우리들 자신들과 그 사람들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기도에서 어떤 것을 피해야 하거나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믿음 공동체 안의 다른 삶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공적 기도가 동반되지 않은 개인 기도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성향을 띠게 되어, 우리의 지각 범위 너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차단해 버릴 수 있다. 따라서 협력 기도는 개인 기도에 대한 교정자 역할을 한다. 협력 기도는 개인 기도가 자기중심적이 되지 않도록 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 기도를 공적 기도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공허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협력 기도는 건조하고 의미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조용한 곳으로 가기도 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예를 통해, 우리에게 독거(獨居)의 필요상을 보여주셨다.

2. 기도는 자발적인 동시에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대마다 최고의 기도들을 담고 있는 훌륭한 기도서는 개인 기도를 독려하는 탁월한 도구이다. 이 기도서는 자발적 기도가 가장 어렵고 메마른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우리의 반성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청교도들이 공적 예배에서 기도를 읽거나 암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반면에, 그들의 개인 기도 안내서들에는 사용이 권장되는 모범 기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기도를 심화시킬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말들을 스스로 찾을 수 없을 때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자발적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삶을 드리도록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마음속에서 나오는 기도이며, 따라서 그 누구도 우리의 기도를 도와줄 수 없다. 자발적 기도는 교정되거나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꾸며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우리 자신만의 것이며, 그 주된 조건이 즉각적이고 친밀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3. 기도는 마음과 가슴의 일이다. 기도는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으며, 개혁주의 전통은 이 선물을 소중히 여겨 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기도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 보이는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는 가슴의 문제일 필요가 있다. 칼 바르트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고 해서 그를 반지성주의자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도는 감성의 행위여야만 한다. 기도는 단순히 입술을 움직이는 것 이상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슴의 충성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가슴이 담겨 있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가 다소 정확하게 행해지는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면, 우리 기도가 도대체 뭐가 되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고만큼이나 우리의 감정들을 환영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간절한 간구들을 내 놓으며, 때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한다. 따라서 기도는 웃음과 눈물 둘 모두를 포함한다.

4. 우리는 말하는 자인 동시에 듣는 자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타자(the Other)에게 말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한다. 왜냐하면 그 말이 우리의 솔직한 필요와 관심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기도에는 수용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균형 잡히고 건강한 기도에는 열정적인 간구의 순간들뿐 아니라 고요히 기다리는 순간들도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문화의 소음과 그 자극적인 성격을 뛰어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성공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말하기를 멈추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간구들을 그냥 내버려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들을 내려놓고 세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세계를 볼 수 있다. 현대 독일 신학자 도로시 죌레(Dorothee Soelle)는 종교적 실천의 다양성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 실천들 각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안에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외적 세계로부터 조금 떨어져 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묵상할 때에, 우리는 실체로부터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에 의해 주문된 그 선택이 실제적 힘을 빼앗긴 또 다른 관계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듣는 기도는 급진적인 행동이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적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그렇지 않았으면 모호하거나 그들에게 감춰져 있을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기도가 실제적이지 못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악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피하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죄를 시인하는 것을 낮은 수준의 자기관의 표시로 간주해 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길 꺼린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이 받아들여질 만하다는 생각을 지탱하려는 노력에서, 우리는 반쪽 진리와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떠받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를 탈진시킬뿐만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 하나님의 용서에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그 빛에 노출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개혁주의 기도는 삶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가 바로 우리가 기도를 재발견하는 출발점이다.

엘리자베스 싱어 로우(Elizabeth Singer Rowe)가 발표한 글들은 많은 청교도 기도에서 이루어졌던 부정적 자기 평가의 전형들을 보여준다: "깨뜨리라, 깨뜨리라, 무감각한 가슴을! 혼란이 나를 덮고, 검은 그림자가 내 자신의 죄처럼 나를 휩싸는도다. 주여, 내가 괴물이 되었나이다! 내가 당신을 대적하다니, 자신이 너무나 증오스럽나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처럼 겸손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용서를 또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나타내는 가장 부드러운 칭호들로, 당신께서는 내 영혼이 당신을 알게 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그 칭호들을 멸시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긍휼하시며 기꺼이 용서하려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우리의 현대적 성형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강직하고, 스스로에 대해 엄했으며, 열심이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그들은 무릎을 꿇고 지난 하루, 즉 그들이 저지른 잘못된 일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그들이 게을리 한 일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의 치유를 향해 스스로를 열어 놓았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자기 증오를 표현하지도 고침을 받지도 않은 채로 우리 안에서 끓어 넘치도록 버려 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고백과 자기 점검에 대한 건전한 회복이 정신적 건강의 근원이 되는 것도 극히 당연하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기도를 정직하게 해 줄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기도는 그 성격이 매우 고백적이다. 고백을 위한 협력 기도는 모든 개혁주의 예배 의식의 한 중심이며, 개인적인 고백 기도는 자기 점검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백은 또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이러한 믿음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실패들을 감히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정죄의 두려움 때문에 자꾸만 움츠러든다. 공적기도에서. 용서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주저 없이 고백할 수 있게 해 주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생명력 있는 기도의 회복에 가장 필수적인 조건은 아마도 독거(獨居)의 실천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소음 그리고 우리 세계의 사건들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생각들과 염려스러운 느낌들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소음을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이러한 생각과 느낌들을 다시 덮어 버리는 쪽을 더 선호한다.

기도는 독거를 요구한다.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와 같은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깊은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조언한다: 당신에게 가장 편리한 때에 어떤 은밀한 장소로 물러나, 모든 세상적인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고 가능한 모든 진지함과 경외심으로 하늘을 쳐다보라." 독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우리 자신의 부분들을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고 우리의 가슴속의 가장 깊은 바람들을 표현할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은 지속적으로 기도에 있어서의 독거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다.

우리가 독거에서의 혼자됨(aloneness)과 단순한 외로움(loneliness)을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외로움은 불완전함을 느끼면서, 깨어졌거나 부인되었거나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관계를 바란다.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저주이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혼자 있는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빠져 나오도록 만든다. 우리는 외로움을 피하려는 근심 섞인 노력에서 친구를 부르고, 활동 계획을 세우며. 텔레비전을 켠다. 이와는 반대로 독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태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기꺼이 열어 놓으려는 자세이다. 따라서 독거는 "육체적인 고립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내적인 고요의 기술을 실행하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독거는 소음과 활동 가운데서도 발견될 수 있다.

고요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자연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요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며,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창문을 닫고, 전화선을 뽑아 버리며, 집중력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외부요인들을 제거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내적인 소음과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꿈과 계획과 다른 침입자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침묵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46:10). 우리 안의 소음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우리가 언어의 소음을 포함한 모든 소음을 치워 버리고, 그저 고요히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고 수용적인 자세를 취할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이 있다. 그리고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를 위한 인격적인 실체로 발견할 수 있다.

혼자 있고 또 침묵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야 할지 알지 못하며, 스스로에 대해 통제를 행사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우리는 너무나 바쁜 나머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내적 고요는 우리의 가득한 일정들을 제쳐둠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는 한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채우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방법이다.

고요함에 처할 때, 우리는 기도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은 "최상의 기도는 때때로 말이 없는 기도일 때가 있다"고 했다. 청교도들은 규칙적 기도 또는 "보통" 기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별기도"라고 부른 기도의 방법을 발전시켰으며, 이 기도는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드려졌다. 이 기도문들에는 기도할 때 "예수"라는 이름이나 "사랑"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의 정신을 집중케 하는 구절이나 단어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도들은 내적 탄식과 신음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주고 있다. "명상""정신적 기도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기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기도는 그 단어나 구절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매우 강하게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이 주장과 더불어 묵상 기도도 자주 잊혀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전통은 묵상 기도의 실천을 계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제적인 깊이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침묵하며 기다리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독백으로서의 기도는 실제적 대화가 아니다. 쉴 새 없는 말은 심지어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가로막는 방패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말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리차드 박스터는 자기 비움의 의식적 행동을 통해 기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에게 충고해 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당신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깨끗게 하라. 사업, 걱정, 즐거움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한쪽으로 치워두라. 당신의 마음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비워 하나님으로 더 많이 채워질 수 있도록 하라."

침묵기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다리고,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러한 기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잠시 동안 우리의 말을 포기하는 것, 즉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누구도 그 어려움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에서 침묵 훈련을 발전시키는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리한 실천들은 우리 내부로부터 나오는 소란들을 잠재우도록 우리를 도와 줄 것이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들은, 우리의 정신을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집중시키기 위한 안내자들로 성경 구절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성경과 기도서에 성화들을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림에 표현된 사건들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 그림에 대한 상상력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가 성경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명상이 반드시 모든 이미지, 단어, 또는 개념들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어 있는 마음에 어떤 것이 들어올지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있을 수 없다. 명상이 확실히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하기위해. 우리는 믿음에서 우리의 조상들을 본받아 성경이나 성경의 광경들이나 믿음의 글들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요의 위험성은 우리가 아주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소음이나 활동으로부터 편안하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해결되지 않는 분노나 끓어오르는 울분이나 지속적인 유혹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고요함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고요는 그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형태이건 간에 묵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어두움과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분노를 인정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분노가 묻혀 있는 한,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갉아먹을 뿐이다. 시편은 여기에 대한 매우 유익한 안내자이다. 시편은, 우리의 진짜 감정들을, 특히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일 때, 인정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우리들 대부분은 착한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분노나 울분의 감정들을 갖지 않는다고 믿으며 자라났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것들을 부인하거나 이것들이 실제가 아닌 척하거나 이것을 무시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

내적 고요의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소음들에 부드럽게 반응할 수 있다. 우리는 감정들에 휩싸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억눌린 분노와 울분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기다림 속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수용적일 수 있는 내적 고요를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러한 기다림은 쓸쓸한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부재 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영성은 "어두운 밤"의 싸움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개혁주의 영성은 십자가의 성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과 로마카톨릭 교회 전통에 속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부재 의식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싸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 개혁주의 영성은 기도가 완전함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을 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 사실을 중시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을 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영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어두움 속에 남아있는 데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절망으로 인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하도록 할 뿐이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그리스도의 부재 경험을 상세히 서술한다. 그런 다음, 그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경우를 절망이나 포기를 위한 유혹들로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당황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가장 일상적인 일은 당신의 일상적인 소명으로 주어진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심지어 하늘의 주님께 당신의 영에 임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당신의 천상적 소명과 더욱 깊은 관계가 있는 다음과 같은 일들에 시간과 주의를 돌려야 한다. 한숨 짓고, 기도하라. 읽고, 들어라. 그리고 천상적 묵상으로 당신의 영혼을 남편을 찾는 신부로 꾸미도록 하라.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천상적 생각들을 당신의 지상적 노동들과 혼합하도록 하라.

 

일상적 생활 직무들에 대한 정상적인 추구와 개인적 헌신의 특별한 노동들과의 이러한 특별한 혼합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황폐감과 부족감을 경험할 때 우리 모두에게 건강한 처방이다.

개인 기도의 어떤 규칙적인 패턴도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노력, 시간, 인내, 용기, 믿음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독려가 요구된다. 칼빈은 규칙적인 기도 시간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기도 시간을 가지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 빛을 갚는 것을 생각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갚을 빛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따라서 이 연약함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계속 자극을 받아야 한다." 리차드 박스터는 규칙적인 기도를 위해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의 깊은 충고를 주고 있다:

 

또한 가장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라, 제철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탁월하다 철이 맞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노동의 열매를 잃을 것이고, 일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며, 의무는 죄로 바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절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 중 어느 때를 선택할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영혼이 가장 활동적이며 사색에 적합한지를 알아보고 그때를 기도를 위한 고정 시간으로 정해야 한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게 가장 적절한 시간은 언제나 초저녁 시간, 그러니까 해질 때부터 어두워질 때까지의 시간이었다.

 

규칙적인 기도 습관은 우리가 기도를 회피하지 않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주저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주의 깊게 형성된 기도의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위해 따로 정해 둔 시간에 다른 일들을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거나 적합한 분위기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규칙적인 기도의 결과들이 언제나 우리가 바라던 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즉각적인 평안을 발견하거나, 큰 비전들을 가지게 되거나, 우리들 자신에 대해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알게 되거나, 심지어 우리들이 바라던 대로 우리들 자신의 어떤 부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우리의 처지로 낮추어서 우리를 살아 있는 관계로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외로움과 자기 추구의 어두움과 근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가 도망하려 할 때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가 스스로를 미워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시는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 살라는 위대한 초대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내가 전혀 변영의 여지가 없다고 고백할 때에 나의 부족함을 용서하소서 - 당신의 손은 짧아지지 않으며. 당신의 후하신 샘들은 봉해지지 않았나이다. 당신의 옛 이적들이 당신의 힘을 소진시키지 않았으며, 영월한 당신의 은혜가 당신을 가난하게하지도 않았나이다. 당신의 능력은 여전히 그대로이시며,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나이다. 이 놀라운 당신의 성품이 황홀한 영광으로 나를 감싸나이다. 내가 어느 길로 갈지라도, 나는 분명한 화신을 만나나이다. 내 지난 날 동안 당신의 선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나이다.

엘리자베스 로우(Elizabeth Rowe)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