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성경 사용.hwp

 

 

4장 연구 :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성경 사용

 

 

 

Q. 말씀이 구원에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읽혀지고 들려져야 하는가?

A. 말씀이 구원에 효과적이기 위해, 우리는 열심과 준비와 기도로 말씀을 대해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며,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두어야 하며, 우리의 삶에서 말씀을 행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언제나 성경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사람이라고 불려 왔으며, 이것은 이들에게 적절한 칭호이다. 성경의 언어는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기도들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성경의 이미지들은 개혁주의 찬송가의 주된 영감이었으며, 성경 해석은 개혁주의 예배의 중심이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표시로서 연구를 주장했으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혁주의 경건은 영적 삶을 위한 자료이자 안내자인 성경에 대한 열심과 진지한 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경이 이처럼 큰 역할을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상 숭배에 대한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우려 때문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우상 숭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상 숭배는 자신의 말씀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참되신 하나님 대신에, 또는 그 하나님 외에, 믿음의 대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소유하는 것이다." 삶에서 다른 어떤 목적이나 사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우리들 속에 너무나 팽배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심하고 우리에게 지나치게 중요하게 되는 것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나 느낌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에 대한 믿을 만한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을 가늠할 믿을 만한 기준이 없다면, 우리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성경만이 믿음과 기도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해 줄 수 있으며, 이것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한 조항이었다. 묵상과 기도의 안내자로서의 성경 사용이 개혁주의 전통의 중요한강조점들 중 하나이다.

우리의 묵상과 기도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닐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일 수밖에 없으며 기독교의 내용에서 벗어난 영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청교도의 한 영적 대작에서, 루이스 배일리(Lewis Bayly)"죄인으로 하여금 경건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일곱가지 장애물"을 열거했다. 이 중 첫번째 장애물은 "무지함으로 인해 성경의 특정 부분들이 말하고 있는 진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적에 맞추기 위해 성경의 의미를 얼마나 쉽게 왜곡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대해 제대로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의해 지속적으로 교정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준 칼빈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들 자신의 편견에 따라 방황하여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교사이신 성령을 피함으로써 바른 길로부터 상당히 빗나갈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 신중히 머무르는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교회라는 협력적 공동체를 위해서든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묵상하는 개인들을 위해서든 간에, 성경은 우리를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상태로 유지시켜 줄 수 있다. 성경이 책임 있고 주의 깊게 사용될 때,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그들을 살찌우고, 바로잡으며, 개혁하는 역할을 한다. "개혁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개혁된다는 의미이다.

연구하여 잘 아는 상태에서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 각자는 우상 숭배나 미신 또는 최근의 문화적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한 문화에 완전히 사로잡히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성경의 영감성은 성경의 초문화적 성격에서 경험될 수 있다. 성경은 서로 다른 많은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 사람들이 성경이 기록된 문화로부터의 전이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의 말씀들을 곧바로 자신들의 문화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을 경우 얻어지는 것이라곤 성경에 대한 비극적인 왜곡들뿐이다. 그리고 성경의 저자들과 독자로서의 우리 사이의 큰 문화적 간격을 극복함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 있는 말씀이 되도록 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 사용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20세기 후반인 지금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성경을 대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주요 문제들 중 하나는, 그들에겐 성경이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한 문화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부장적이다. 이것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대부분의 여성과 많은 남성에게 매우 곤혹스러울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극단적으로 군국주의적인 구절들이 있으며, 심지어는 점령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요구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성경은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며, 분명한 비난도 없이 일부다처제를 말하고 있고, 자녀들에게 엄할 것을 명령한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이혼과 이자를 위해 돈을 꾸어 주는 행위를 예외 없이 비난한다. 많은 구절들이 무자식과 유아 사망과 모든 형태의 인간 질병들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구절들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두려워하며 그들의 영적 부요를 위해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비평) 학자의 학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성경을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는 경향이 강하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과 아래서 듣는 사람들 사이에 간격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체체적으로 학문적 연구 방법들에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많은 성경 학자들 중 하나인 월터 윙크(Walter Wink)는 학적인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방식에 비평적 태도를 취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학자들의 연구가 담당하는 역할이 항상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똑같이 충실한 다른 해석 방법들이 있다. 그 예로, 독자들이 본문의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학자들과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본문을 읽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고난이나 사회적 소외 상황들과 같은 것에 대한 해석을 들 수 있다. "성경 학자들은 질투심에서 지식의 열쇠들을 주머니에 숨기는 서기관이 되려는 유혹을 뿌리쳐야만 한다. 비전문가들도 반지성주의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본문을 단순하게 해석해 버리는 '영해(靈解)'에 대한 유혹을 이겨야만 한다" 진짜 문제는, 강단 아래의 사람들과 많은 목회자들이 본문을 읽는데 필요한 기술들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함으로써 성경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특별한 의심과 성경과의 씨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응한다. 이 모든 방법들은 성경이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믿을 만하다는 강한 확신도 없이 성경을 사용하려는 노력들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 연구를 무시하고 자신의 입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 본문이나 표어로 성경 구절을 사용하려 한다. 이것은 그다지 책임감이 있지는 않지만 성경을 사용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확고히 하려는 경향이 숨어 있다. 이러한 증거 본문들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한마디 말씀을 발견하기보다는 기존의 생각들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 자신의 거의 모든 행동을 변호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성경의 인도를 따른다는 명분 하에, 이들은 모든 도전에 대항하여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또 다른 방법은 "정경 속의 정경"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 마음에 드는 몇몇 구절을 선택함으로써 이렇게 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구절들은 빈번하게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우리의 진짜 성경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을 무시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이 시련의 시기에는 믿음을 강하게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하나님의 어려운 요구들이나 우리가 무시한 성경의 다른 부분에 숨겨져 있는 제자의 삶을 위한 요구들에 복종할 수 없게 만드는 때가 있다.

세번째 방법은 본문이 우리를 어떻게 느끼게 하느냐 또는 본문이 우리의 내적인 삶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와 같은 질문만을 던지기 위해 본문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의 문제들을 묻는 데는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접근의 유일한 방법이 될 때, 우리는 실제로 새로운 종류의 풍유적 방법을 채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 이야기들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되고, 성경은 더 이상 우리 믿음의 권위 있는 원천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대신 우리가 자신을 분석하는 방법이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과 본문 사이의 중요한 거리를 잃게 된다.

 

 

개혁주의 성경 해석

 

우리는 성경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해석에 대해 열띤 논쟁을 많이 벌여 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혁주의 전통에 속하는 교회의 주요한 문제들 거의 모두가 성경의 올바른 해석 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각 진영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며 따라서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칼빈과 다른 종교 개혁자들은 해석의 문제들을 알고 있었다. 이것들은 중세 후반에 일반적이었던 복잡한 성경 해석 방법들의 산물이었다. 성경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는 적어도 네 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1) 본문에 대한 역사적 또는 문자적 해석, (2)풍유적 해석, (3) 종말론적 해석, 그리고 (4) 도덕적 또는 인간적 해석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주의 전(殿)은 다음의 네 가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었다: (1)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발견했던 예루살렘 성전, (2) 인간들 사이의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예수, (3) 새 예루살렘(전 도시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며, 따라서 어떤 구체적인 성전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4)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종교 개혁 이전의 설교는 풍유적 해석을 따르고,문자적 의미를 죽은 것이나 의미 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개혁가들은 풍유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본문의 문자적, 자연적, 노는 의미론적 해석을 주장했다. 칼빈은 풍유적 해석을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마치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공인 것처럼" 그 말씀을 가지고 놀면서 이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라는 신랄한 반어적 표헌을 사용하여 이를 공격했다. 칼빈은, 이러한 게임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본문의 분명한 의미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자의 표면 아래는 더 깊은 신비들이 숨어 있으며, 풍유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러한 신비들을 도출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들에 맞추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아무리 지성이 모자라는 자라도, 유로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의 한계들에 맞추시는 데에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는 표현의 사용도 포함된다. 인간 언어의 한계는 하나님의 입. , 눈 등을 표현할 때처럼 거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언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능력에 언어를 맞추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수레이다. 이 문제에 대해 칼빈을 따를 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구절들 중 많은 수가 더 쉽고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 언어의 한계들에 대해 필요한 조정의 일부이다. 칼빈은 인간 언어의 한계들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본문 자체의 구체적인 단어들에 국한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는 특정 본문의 해석에 대해 상당히 비평적일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의 잘못된 해석을 발견하거나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단순한 말 사이의 구별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나 힘을 가지려면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독자로서의 우리의 경험은 성령의 이러한 내적 증거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증거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가슴속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한낱 말로 전락하고 만다. 칼빈은 우리가 두 극단들로 여기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력을 얻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문자적 말 사이의 구벽을 정교하게 유지했다. 한편으로, 칼빈은 성경 사건들에 대해 믿음에 우선하는 증거들을 요구한 합리주의적 스콜라주의를 거부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경에서 벗어나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과 모순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파주의자들을 거부했다.

칼빈은. 아무런 이해 없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의 요점을 완전히 놓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우리가 읽은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이는 오직 성령뿐이시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의 손에 의해 가슴에 새겨지지 않는 한, 성경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말하자면 생명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통 칼빈주의는 말씀과 성령 사이의 긴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합리적으로 이해된 말씀이 강조되었으며, 따라서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남겨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정통 칼빈주의는 문자적이고 교리적이 되었다. 문자주의는 개혁주의 전통 속에 계속적으로 자리잡아 왔으며, 성경 해석의 주된 방법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탁월한 성취를 거두긴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 성취가 정통 칼빈주의의 성취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다음과 같이 선언할 때, 이 고백은 말씀과 성령의 정교한 균형을 강조한 칼빈에 충실했다: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것들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

칼빈은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적 접근의 모델을 제시했으며, 이 모델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익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발전되어 온 습관들을 상당한 정도로 개선한 것이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지침들을 따랐다:

1. 이 모델은 성경 구절의 상황에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칼빈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는 그 의미가 상황에 달려 있는 그런 진술들이 많다." 청교도인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도 이렇게 말했다. "올바른 상황 파악이 성경 해석의 절반이다." 이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그것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끌어내거나 증거 본문들을 따로 고립시키는 것은 개혁주의의 말씀 묵상이나 연구와 모순됨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러한 위험성을 대담하게 경고했다. "성경 구절들이 제멋대로 취해지고 그 구절들이 놓인 상황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주 잘못을 범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사람들이 이러한 원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잘못들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어떤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의 특정 구절들을 인용한다. 이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상황을 무시한 증거 본문 찾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전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은 그들 저작들을 주의 깊게 기록했으며, 대체적으로 서로로부터 독립적이었다. 성경에서 한 저자의 어떤 구절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저자로부터 구절을 취하려는 노력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러한 노력들은 그 구절에 외적 의미를 부가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기 쉽다.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을 다룰 때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각 구절들을 창조적 전체의 부분으로 보며. 각 저자들의 개성을 중시한다.

2. 이 모델은 이용 가능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한다. 칼빈은 성경 언어들을 알고 있었고, 저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본문의 자연적 의미를 추구했다. 그는 성경 연구를 위해 그 시대에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사용했으며, 본문에 대해 비평적 태도를 취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작업임을 인정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따라서 우리를 오인시키거나 모호하게 하는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에게 성경이 다소 어둡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칼빈을 따라. 성경에 대한 개혁주의의 접근은 가장 엄밀한 성경연구 방법을 사용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개혁주의 성경 연구는 유익한 역사적, 사회학적, 언어학적 전망들을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왔다. 이러한 전망들은 성경 본문이 처음으로 주어진 고대의 문화적 상황과 우리의 이 시대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는 과정에 도움을 주어 왔다. 성경 연구는 또한 성경이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만일 이러한 역할이 없었다면 이들은 성경의 문화적 상이성만을 보거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성경 구절에 내포된 어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구절을 자신들에게 성급하게 적용했을 것이다.

3. 성경은 궁극적인 통일성을 가지며, 여기에는 구약과 신약이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신약의 특별한 구절에 당혹스러워 할 때, 여기에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구약의 구절들을 통해 이를 검토하고 설명하는 것이 유익하다. 칼빈은 이러한 통일성을 주장했으며, 구약의 언약이 "그 실체와 실제에 있어 신약과 너무나도 같기 때문에 이 둘은 실제로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칼빈은 모든 계시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구약의 구절들을 성육신의 빛에서 해석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시대 사람들에게 말했던 성경 저자들의 의도를 이해하려 했다.

칼빈의 계승자들로서 청교도들은 구약을 신약만큼 진지하게 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약과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똑같은 계시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구약에 대한 이러한 존중을 계속 유지해 왔다. 구약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의 한 특징이다. 존 낙스(John Knox)는 매주일마다 구약과 신약을 읽을 것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신학자들에 의해 제1 예배 지침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규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구약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4. 말씀 묵상(성경 읽기)은 쉽지 않고 성경의 의미 또한 분명하지 않다. 그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을 실제로 접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의 중요성에 대한 칼빈의 주장의 기초였다. "나는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당연히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결코 아니며, 기도하며 주의 깊게 성경을 읽는 일을 포함한다.

본문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진지하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빛에서 성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본문을 대할 때, 우리 안에는 독자로서의 겸손한 태도가 생겨날 것이다. 우리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 중 하나일 것이다.

5. 성경은 그것이 무엇을 행하도록 우리를 인도하느냐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만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이자 열매이며, 또한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그의 주장은 이 장을 시작할 때 우리가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성경은 원칙들의 추상적인 모음집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인도자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의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목적은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더욱 충실하고 순종적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교회의 형성과 개혁에 있다.

 

2 헬베틱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성경 연구에 대한 고전적인 개혁주의적 접근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 해석이 정통적이고 참되어야 하고.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이 쓰여진 원어로부터, 마찬가지로 성경이 기록된 상황들에 따라) 비롯된 것이어야 하며, (비슷하지만 다른 구절들과 많은 분명한 구절들의 빛에서 설명되어져야 하며) 믿음과 사랑의 법칙과 일치해야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기여하는 바가 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은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성경을 대한다. 그들은 이러한 성경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영성 개발에 도움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해석자들이 되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에서 성경은 삶의 너무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은 신자들의 경험의 중심이 된다.

 

 

설교와 가르침에서의 성경 사용

 

말씀 전파(설교)는 언제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설교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삶에서 지극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가 성례전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위대한 전기 작가인 파커(T.H.L. Parker)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주님의 만찬이자 볼 수 있는 주님의 만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강단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셔야(preside) 한다고 말하길 좋아했다. '주도하다'라는 동사는 의미가 깊으며, 우리에게 초대 교회에서의 성만찬 '거행자'(president)를 상기시킨다.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은 말씀 선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는 순간은 경외와 고요한 기대의 순간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주의를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설교자의 설교가 빈약하더라도, 이것이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절실한 소망을 앗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읽혀지는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 사이의 어떤 절대적인 구별도 두지 않았다. 설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았다. 설교자의 말은 그것들이 살아 있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해석하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의 저자들과 설교자들 양쪽 모두는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인간적 도구들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사(大使)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유일한 권위는 말씀 전파를 그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소명과 성경이 명하는 것만을 전파하는 그의 충실함에 있다.

칼빈은 성경을 연속해서 봉독하거나 설교하는 데 있어 어거스틴(Augustine),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암브로스(Ambrose)와 같은 초대 교회 신학자들을 따랐다. 다른 종교 개혁자들, 특히 쯔빙글리와 함께 칼빈은 중세의 성구집(매주일 쓸 수 있도록 성경 본문들을 뽑아 만든 것-현대의 교독문과 같은 것)과 결별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상황 속에서 선포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구집이 더 넓은 상황으로부터 본문을 분리시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중에는 구약 본문을 설교하고, 주일에는 신약 본문을 설교했다. 그리고 칼빈은 한 번에 몇 절씩 설교했으며, 이것은 그가 성경의 한 권을 설교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그는 창세기 한 권만으로 123회에 걸쳐 설교했다.

칼빈은 본문의 메시지를 제시하고, 그런 다음 그 메시지를 청중들의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죽기 직전 제네바의 목회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칼빈은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가르침에 대해 나는 충실하게 가르쳐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힘을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내가 쓴 것들을 충실하게 쓸 수 있었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성경의 단한 구절도 그릇 전하지 않았으며, 내 지식이 닿는 한 단 한 구절도 잘못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혹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거나 어렵게 연구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단순하고 명확함을 겨냥하여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개혁주의 설교는, 특히 그 형성기 동안에 칼빈의 본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개혁주의 설교는 대체적으로 칼빈이 거부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성구집의 사용을 거부했다-왜냐하면 성구집은 성경을 조각조각 자르며 서로 관계없는 것을 한데 묶으며, 따라서 제멋대로 그리고 상황을 무시한 채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경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해서 설교했다. 따라서 각 설교는 그 전 설교나 다음 설교의 상황이 되었으며, 일정 기간 동안 성경 한권 한권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중심적 지도자) 존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에 이러한 설교 방법을 도입하고, 훌륭한 강해 설교의 전통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강해 설교는 상황 속에서 이해되고, 주의 깊게 설명되며, 그런 다음 청중들의 상황에 적용되는 본문에 견고히 기초를 두고 있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읽혀지거나 선포된 성경 말씀을 듣는 데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교인들에게는 설교 과정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영국 청교도였던 월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는 이렇게 충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듣는 데에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 듣기 전의 준비, 들을 때의 올바른 자세 그리고 듣고 난 후에 실천해야 하는 의무들이 그것이다." 교인들은 이 과정에서 수동적일 뿐이다. 사람들은 설교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견적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는 일에 접근해야만 한다.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일도 꼭 필요한 것이다. 설교를 올바로 들을 수 있도록 기도와 더불어 공적, 사적으로 성경을 읽는 개혁주의적 실천은, 외적 말씀과 내적인 살아 있는 말씀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중요한 이해를 보여준다.

 

 

예배에서의 성경 사용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대해 온 또 다른 방법은 음악이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예배를 특징짓는,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에는 성경구절들이 포함된 경우가 많으며, 성경 문구에 대한 풀이를 담고 있는 경우는 더욱더 많다. 개혁주의 찬송에 익숙해지는 일은 성경의 언어 및 이미지와 친숙해짐으로써 성경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편은 개혁주의 찬송에서 계속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칼빈은 공적 예배에서 시편을 다시 사용하려 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를 수 있도록 시편 찬송들을 발전시킨 것은 그의 주된 업적들 중 하나였다.

개혁주의 교단들을 위해 최근에 미국에서 두 권의 찬송가가 출판되었다. 그중 하나는 미국 개혁주의 교회(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를 위한 "Rejoice in the Lord"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장로교를 위한 "The Presbyterian Hymnal: Hymns, Psalms. and Spiritual Songs"이다. 이 두 찬송가 모두에는 시편 찬송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시편 찬송들에 대한 관심의 부활을 보여준다.

칼빈은 시편을 기도로 이해했다. 따라서 시편이 노래될 때, 회중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회중의 찬양은 사람들의 주요한 의식이었다.

회중의 찬양은 개혁주의 교인들 예배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찬송가는 실제로 개혁주의 기도서였다. 여기에는 찬양, 고백, 감사, 간구 등이 모두 노래의 형태로 담겨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대각성 운동 기간 중에 글을 쓰면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의무는 전적으로 종교적 정서들을 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 우리는 산문이 아니라 노래로 하나님께 우리들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말로 표현한 것보다 노래로 표현한 것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한다. 우리가 찬양을 통해 익힌 성경 구절들과 표현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뚜렸이 남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멜로디와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교회의 믿음의 상기자이자 우리의 신성한 역사의 요약으로 시편을 사용한다. 우리는 또한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기위해 시편을 사용한다. 시편은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의심, 우리의 분노, 우리의 기쁨 등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시편은, 칼빈의 말을 빌리자면,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해부'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들 중 그 어느 것도 여기에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편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느낌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준다.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께 화가 났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비통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감정을 가진 데 대해 나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시편에서 그와 똑같은 감정들을 읽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는 체 할 괼요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은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주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읽혀지고 선포된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신자들은 살아 있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공적 예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영적 갱신의 가능성이 성경의 단어, 구절, 이미지를 사용하는 찬송가와 시편의 찬양을 통해 커진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가 성경의 위로와 인도가 가장 필요할 때, 우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것은 찬송가에 실린 성경이다.

 

 

개인적인 말씀 묵상 및 연구

 

설교, 가르침, 공적 예배와 같은 공적 형태들을 통해 신자들이 성경을 만날 수 있는 방법들 외에도, 개혁주의 전통은 개인적인 말씀 묵상(성경읽기)을 크게 강조해 왔다. 성경에 대한 공적이며, 협력적인 이용들은 개인적인 말씀 묵상의 교정자 역할을 하며, 개인적인 묵상이 지나치게 내향적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 하지만 공적인 성경 이용이 개혁주의 경건의 중요한 특징인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선포된 말씀을 들은 후에, 신앙이 깊은 청교도들은 그들이 들은 말씀을 묵상했다. 루이스 배일리(Lewis Bayly)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안내서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때, 또는 당신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당신이 들은 것들을 잠시 동안 묵상해 보라. 그리고 새김질 꺼리를 되씹는 동물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교회에서 들은 말씀을 되새겨야만 한다." 주일날 개혁주의 가정의 대화에는 설교자의 설교와 그가 성경 본문을 사용한 방법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었다. 가장들은 모든 가족들에게 요리문답의 일정한 부분을 반복해서 읽도록 하고 그들이 설교에서 배운 것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따라서 공적 예배로부터 가정에서의 연구와 신앙으로의 직접적인 이행이 있었다.

배일리와 다른 청교도 신학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가족들이 하루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 그리고 정오에 성경을 한 장씩 읽을 것을 권했다. 배일리는 이렇게 하면 마지막 여섯 장을 제외하고 일 년에 성경 전체를 한 번씩 읽을 수 있으며, 나머지 여섯 장은 그 해 마지막 날에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파된 말씀을 정기적으로 듣는데다가 이렇게 덧붙여진 광범위한 묵상은 이러한 개혁주의 개신교인들로 하여금 성경과 아주 친숙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성경의 언어는 그들에게 친숙했으며. 그들은 성경의 이미지들을 그들의 기도에 사용할 수 있었다.

성경 연구는 모든 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순례 여정에서 중요하고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며,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성경인구는 특정 구절에 대해 그 저자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주어졌으며, 그것이 쓰여진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상황은 어떠했으며, 그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그 구절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성경 연구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일이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그들의 학자들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들의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한 학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교회는 이용 가능한 학문적 도구들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 너무나 자주 목회자들은 사람들에게 학자들의 통찰력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자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유치한 태도들을 지닌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신자들에게 제공된 성경 연구반들도 서론적인 수준에서 그침으로써 더욱 세밀한 연구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배일리는, 성경을 읽은 후에 그리스도인은 "그로부터 당신이 얼마나 많은 훌륭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식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많은 훌륭한 성경 연구가 가지는 일련의 한계는, 그것이 사람들의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본문이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본문에 대해 많은 정보만을 얻는다.

리차드 박스터(Rchard Baxter)는 영국 왕정 복고 이후에 최선의 청교도주의를 보존하려 하면서 "숙고"(consideration)에 대한 일반적인 청교도적 실천을 "머리와 가슴 사이의 문"을 여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묘사했다. "이해는 진리를 받은 후에 그 진리를 기억 속에 두며, 숙고는 그 진리를 그곳에서 감성으로 이동시킨다." 그는 "이해력이 빠르고 분명하며 뛰어난 최고의 학자""그 이해력이 깊고 가장 감성적이며,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는 최고의 그리스도인"을 구별했다.

박스터는 학문적인 접근과 병행되는 성경 접근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후자는 전자와 병행되지만 다르다. 박스터와 동시대 사람인 존 오웬(John Owen)은 이 방법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들 자신의 가슴 사이에 어떤 존경과 관련성이 있는지를 숙고해 보는 것이며, 이는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했다. 배일리는 방금 말한 말씀 묵상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이러한 것들을 당신의 가슴에 적용시키고 이러한 장들을 역사적 담화로 읽지 말고 마치 그것들이 천국의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에게 보내진 많은 편지들인 것처럼 읽도록 하라." 신앙적 말씀 묵상은 한 특별한 구절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 구절이 우리 자신의 특별한 상황에 어떻게 빛을 던져 주거나 우리에게 새로운 자기 이해를 요구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본문의 "숙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리차드 박스터의 실천은 본문과 우리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려 한다. 그는 "독백" 또는 "스스로에게 설교하기"의 실천을 권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영혼에게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 각자는 "당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라."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은 분명한 말로 표현한다= 당신 자신에게 당신이 묵상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해 주어라. 성경을 통해 그것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그런 다음 그것들을 당신의 본성과 필요에 따라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라."

이러한 신앙적 말씀 묵상 방법은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일반저인 것이었다. 이 방법의 많은 부분은, 본문을 읽고, 세밀하게 고안된 기도의 과정을 따르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본문과 그 의미를 상고하는 lectio divina라고 불리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방법에서 빌어온 것이었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이 과정을 간략하게 묘사하면서, 첫번째 책임은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독자는 가장 유익한 것들을 본문에서 선택하여 그것들을 직접 적용해야 한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리는 이것들이 우리의 감성을 데우고 일깨울 때까지 이것들을 우리 가슴에 자극해야만 한다."

이러한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선한 말씀을 주시기 위해 이러한 오래된 본문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위로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지각 때문에 성경에 이끌린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역시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윤리적 요구들에 경외심을 느낀다. 열쇠는 우리가 읽은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한 구절이 우리를 위해 살아 있는 말씀이 될 수 있도록 그 구절을 내면화한다.

성경 본문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성경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는 중요한 동기이다. 우리가 단순히 고대의 관습이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배우는 것 이상의 것, 즉 우리 자신의 삶과 관계있는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전문가들의 손에 재빨리 넘겨 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 시대의 문화적 조각들로 옷 입혀져 있는 먼 과거의 저작들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인격적인 말씀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문을 묵상하고 우리가 들은 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20세기 독일 신학자이자 순교자인 본회퍼(Dietrich Bohnhoeffer)는 이렇게 썼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분석하지 않고 다만 당신에게 말해진 대로 받아들이듯이,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가슴속에서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이것이 묵상이다."

신앙적 말씀 묵상은 하나님께서 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든지 그 말씀에 우리들 자신을 진정으로 열어 놓으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읽은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진정으로 찾을 것을 요구한다. 칼빈은.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의 사귐"을 갖기 위해 "우리들 자신의 이해를 비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성경을 읽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을 강화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데까지 이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거나 어떤 구절과 이미 친숙하여 그 구절이 가지는 기존의 의미들을 생각한다. 그 때문에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란 실제로 불가능하다.

신앙적 말씀 묵상에는 말씀을 읽는 동안에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요구된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우리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다 읽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그 목표를 성취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겠다고 서두르다가 실제로 그 성경 속에 담긴 것을 놓쳐 버린다. 배일리는 그의 독자들에게 매일 아침, 정오 그리고 저녁에 성경을 한 장씩 읽으라고 권한 후에 한 장이라는 분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해를 가지고 이렇게 읽고 적용과 더불어 묵상한 한 장의 성경은 그 범위나 의미를 표시하지 않거나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그저 읽는 데 급급한 다섯 장보다 당신의 영혼을 더 살찌우고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이 읽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자연적인 경향이다. 성경을 많이 읽으려는 우리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을 놓치기 쉽다.

본문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길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말씀 묵상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단계들이 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목적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우리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인도되며,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 본문을 읽는 데서 벗어나 본문에 의해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인도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대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또 개인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실 것임을 믿으면서, 기도함으로 본문에 접근해야 한다. 종교적 자유를 위해 순교한 청교도였던 존 번연(John Bunyan)은 말씀 묵상의 어려움과 가능성들 양쪽 모두를 알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한 줄의 성경에서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성경 전체가 마치 마른 막대처럼 보인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내 가슴은 성경에 대해 죽고 메마른 나머지, 나는 성경을 다 읽어보아도 신선한 것이라곤 눈꼽만큼도 꿈꿀 수 없는 때가 있다."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뜻을 발견하려고 애써 온 우리 모두의 경험이기도 하다.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신선하고 놀랄 만한 발견에 놀라게 될 것이다.

성경이 가져다주는 기쁨들 중 하나는, 성경은 읽을 때마다 신선하고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 성경은 다시 읽는다고 해서 낡아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매번 상고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성경은 우리의 경건을 표현하고 또 형성한다. 리차드 박스터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상상력을 동원하며, 그가 "성경적 이미지들"이라고 부른 것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을 것을 권했다. 그는 우상 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이미 그려진 그림을 보지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그림들이 "당신이 그들에 대한 성경 기사를 숙고함으로써 그릴 수 있는 것들(성경 인물들, 이야기들 그리고 상황들)에 대한 가장 생생한 그림들"이라고 했다. 상상력의 사용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력을 집중시키도록 해 주며,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본문 속에 위치시키게 해 줄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본문에 반응해야 하는 존재들로 다뤄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발견은 우리가 성경과 더불어 시간을 보낼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서로 다른 번역 성경들을 읽을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우리가 똑같이 새로워지며 각 번역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상고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향하는 문들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친숙한 말씀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우리에 관한 말씀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본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도 달라진다.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영양분을 공급받을 것이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삶과 경험이 기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되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있어 기존의 절차를 따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특히 베네딕트 수도회와 청교도들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많은 전통들에서 사용해 온 과정에는 몇몇 단계들이 있다. 17세기에 영향력 있는 청교도 작가였던 조지 웨브(George Webbe)는 이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씀 묵상 전에 당신을 말씀 묵상 가운데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는 정신을 집중하라. 묵상이 끝난 후에는 그 말씀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 당신에게 적용하라."

말씀 묵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제안들은 개인들이나 소그룹들에 의해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구성원들이 참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어떤 위협도 없고, 리더만이 올바른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룹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 하든 함께 하든 간에,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단계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성경을 읽기 전에 우리 자신을 추스리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차분히 가라앉히며 수용적이 될 준비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신앙적 사용에 대해 광범위한 글을 쓴 청교도인 존 화이트(John White),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장애물들로부터" 자유케 해야 하고, 거룩한 존경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복종시켜야" 하며, 우리의 영혼들은 "영적 갈망과 더불어 깨어나야만 하고,"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믿도록 고무되고 힘을 얻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것에 진정으로 열려 있기를 구한다. 우리는 기도와 열린 영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실제로 본문을 읽기 전에 침묵하며 몇 분을 보내는 것은 훌륭한 실천이다.

둘째, 우리는 각 구절들을 천천히 읽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각 단어들에 시간을 할애하고, 다양한 단어들이나 이미지들이 성경의 다른 부분이나 우리의 삶의 다른 사건을 암시할 때 우리 마음이 독창적으로 움직이도록 허용한다. 특별히 한 장 전체를 모두 읽으려 할 필요는 없다- 특별히 강한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중간쯤에서 멈출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의 적은 분량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본회퍼는 한 주일에 한 본문이나 10에서 15절 가량을 묵상할 것을 권했다."

우리가 한 말씀을 거듭거듭 묵상할 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연결되고 구체화된다. 반복은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마음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 반복 훈련은 훨씬 더 느린 속도로 살았던 모래 전 사람들보다 바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가치가 있다. 이것이 성경 암기의 가치이다. 한 구절을 외우기 위해서는, 거듭되는 반복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친밀감이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어떤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우리의 경험과 연합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들에 접근하게 한다. 한 단어가 우리가 깊이 연구해야 할 전부일 수도 있다. 이에 수반되는 묵상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볼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을 검토하게 하시는 방법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특별한 구절을 듣고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다른 시간들을 회상할 것이다. 그때마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인상들과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탁월한 방법이다. 우리가 특별한 구절과 얼마나 친숙하든지 간에 그 구절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가장 친숙한 구절이 우리에게 되살아나며,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발견한다.

넷째, 우리는 본문을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본문을 묵상한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세의 접근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기대하며 그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존 화이트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어느 부분이든 그것을 읽은 후에,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들을 마음에서 되새김질하고 진지하게 묵상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만 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으며,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이는 요구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빈손으로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어떤 구절에 대해 기도하며, 우리가 발견한 것, 즉 우리가 찾은 새로운 통찰력들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에 감사하며, 새로운 능력으로 기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구절에서 우리들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우리의 간구를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에 대해 열려 있게 될 때,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훨씬 더 잘 알아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연구로부터 나올 것이며, 개인 기도이든 합심 기도이든 간에 그 기도는 심화되고 고쳐지며 도전받는 기도가 될 것이다. 존 화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기도와 말씀 묵상이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둘이 서로를 돕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며, 따라서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말씀 묵상에 이어지는 기도는 성경 기도(praying the Bible)라는 말에서 우리가 의미했던 것이다.

칼빈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자주 행했던 기도는, 성령께 붙잡힌 마음으로 성경을 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주여,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교훈을 위해 우리가 진정으로 커 가는 헌신으로 당신의 하늘의 지혜의 신비들을 연구하게 하소서.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