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영적 인도.hwp

 

 

5장 상담 :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영적 인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사적이든 그렇지 않으면 죄의 고백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에서의 공적인 것이건 간에,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이러한 진지한 고백으로 충분하며, 따라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사제의 손을 자신의 머리에 얹게 하고 그에게서 면죄선언을 받기 위해 자신의 죄를 사제의 귀에 중얼거리며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죄짐이 무겁거나 유혹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교회 목사나 하나님의 법으로 교육받은 다른 형제들에게 개인적으로 상담과 교훈과 위로를 구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2 헬베틱 신앙고백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로 혼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표현되며, 따라서 공동체 내에서 경험되고 나타나야 한다. 믿음의 협력적인 성격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확신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강조되며, 많은 신앙 고백들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교회의 필수성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제2 헬베틱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에서 아주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교제하지 않고 스스로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홍수로 망할 때 노아의 방주 밖에는 구원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 누려지도록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 밖에는 어떤 확실한 구원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적 입장이 오늘날에도 널리 퍼져있는 것은 아니다. 활동적인 교인들도 교회는 그들에게 먼저 주어진 개인적인 믿음에 부가되는 보조물(extra)이라고 믿기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개혁주의 영성은 우리 시대의 생각과 배치된다. 개혁주의 영성은 인간의 영이 믿음의 공동체에 의해 살찌워지고, 인도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주의 시대에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이와 같은 일깨움은 건강한 교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도와 지원과 도전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해 준다. 우리가 혼자일 때, 우리는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기가 아주 쉽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경험을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교회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며, 서로를 책임지며 서로에게서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개인적인 관계들이 필요하다.

교회사에서 상호 지원과 개인들을 위한 교정적 인도가 수행되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이러한 방법들에는 주로 교회가 교인들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 주요한 형태들은 교회 권징, 고백, 목회 상담, 개인적인 보살핌의 형태들을 지닌 영적 인도, 편지, 자유로운 상호 지원 등이 있었다. 때때로 이러한 형태들 중 하나가 강조되었으며, 또 어떤 때는 다른 하나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적으로 충실하고 진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회 권징

 

인도의 첫번째 형태는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정기적인 교회 모임에 출석하지 못하게 하고, 회개가 확인된 후에야 그 제재를 철회하는 일은 "매고 풀기"로 정의되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개인이나 두세 사람, 마침내는 전체 교회가 잘못을 지적하고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할 때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8:15-18). 이 구절은 우리에게 적어도 1세기 교회의 어느 시기에 행해졌던 교회 권징의 한 모습을 보여 준다.

교회 권징은 교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한 방법이었다. 그 목적은 전체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목회적 도움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목표는 이 일에 관계된 사람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화해와 치유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교회 권징은 한동안 거의 사라진 후에 칼빈에 의해 부활되었다. 권징은 칼빈이 목회적 보살핌을 행하는 한 방법이었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법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 권징에는 말씀의 선포가 수반되었다. 권징은 독단적이고 잔인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독선적인 경우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권징은 가장 좋게 보자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한 방법이었다. 권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닥칠 위험을 경고하며, 그들의 행동을 책임질 것을 요구할 정도로 사람들을 아주 진지하게 대했다.

우리는 관용이 제일의 덕목이 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모든 교회 권징을, 남을 판단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는 위험스러운 행동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용에 대한 우리의 높은 평가가 서로에게 진실된 관심을 표현할 수 없도록 하는 장애물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로의 잘못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서로를 돌아보지 못함으로써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줄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교회를 다음과 같은 곳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곧 교회는 그저 교회가 자신들을 즐겁게 하는 한에서만 함께 모이며, 그런 다음에는 그 공동체로부터 아무런 인도나 정직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자신의 길을 외로이 가는 외로운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지 못함으로써 은연중에 악을 조장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침묵 그리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기를 게을리 한다. 칼빈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지 못하는 이러한 위험들을 경고했다. 그는 또한 지나친 꾸짖음의 위험성도 염려했다. 그는 권징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훈계들을 절제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도 말했다. 그는 지나친 엄격은 연약한 사람들을 좌절시켜 그리스도에게서 더 멀어지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칼빈의 재임 기간 동안 제네바에서 시행된 엄격한 권징은 징벌이 아니라 회개가 그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권징이 판결을 거친 사람들의 뉘우침과 자기 점검 없이 실행되도록 의도되지는 않았다.

개혁주의 교회의 권징은 개인적인 상담이 첫 단계에서 이루어지도록 요구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충실함을 유지하려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도받기 위해 목회자, 장로,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난다. 목회적 권징의 상황에서 한 목회자는 다른 목회자를 만난다. 이러한 개인적인 만남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 파괴적인 고안들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권징과정에서 그 다음 단계 -교회 앞에 내어놓는 것- 는 개인적인 상담이 무시되거나 권징 당사자가 그러한 상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사용된다. 그 의도가 회개로 이끄는 것 외에 그 개인을 불명예(disgrace)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권징이 공적인 문제가 되면, 그 시행이 오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권징은 냉혹하며, 당사자에 대해 판단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심의 충족을 위한 여론 재판이 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력 확대를 위해 이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 그의 다른 오용들 그리고 이러한 권징 과정이 때때로 취하는 지나치게 격한 수단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권징은 개혁주의 교회 구성들이 서로 협력해야 할 책임 의식을 갖게 하는 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돌보려 했으며, 그들에게 용서와 새로운 삶을 위한 자원들을 가져다주려 했다.

 

 

고백

 

초대 교회는 모인 공동체의 상황에서 공적 고백을 행했다. 이러한 공적 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구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의식이다. 3세기가 되었을 때, 공개된 죄인들에 대한 화해 의식이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공동체에 다시 들어오길 원하는 사람들은 주교에게 죄를 고백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진지함을 보여주며, 죄에 대한 그들의 슬픔을 상징하는 몇몇 행동들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회개의 행동들에는 금식, 기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가 포함되었다. 회개의 형태로서의 이러한 공적 징계의 엄격성은 기독교의 공인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쇠퇴했다.

개인적인 고백은 그에 의해 교회가 개인적인 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방법이자 목회적 보살핌의 한 표현이었다. 개인들은 성찬을 받기 전에 사제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고백을 해야 했다. 개인적인 고백은 자발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1214년에는 이것이 성례로 선포되었고 따라서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하도록 요구되었다. 죄가 완전히 용서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완벽한 회개가 필요했다. 목회적 문제이자 개인적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회개가 용서를 받을 만큼 충분히 완전한 것인지를 결코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세후반에는 더욱더 법적인 이해가 발전했으며, 이러한 이해는 용서를 얻는데 필요한 것으로 사제의 면죄 선포를 강조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회개가 충분히 완전한가 아닌가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에 답하려는 하나의 노력이었다. 성례가 유익하기 위해서는 고백, 회개 그리고 고행(기도, 금식, 또는 선행)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성례의 타당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었다.

루터와 칼빈 모두 다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고해 성사를 공격했으며 둘 모두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관심에 자신들의 공격의 근거를 두었다. 칼빈은 한 사람의 죄를 빠짐 없이 완전히 열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경험을 통해 보더라도, 우리가 저녁에 단 하루 동안에 저지른 잘못들만을 살펴볼 때에도 기억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러한 완전한 죄의 고백에 대한 요구는 선보다 악을 더 많이 발생시키며, 따라서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떨어뜨릴 뿐이다"고 했다. 이것은 고백에 처한 지나치게 가벼운 취급이나 피상적인 고백이나 절망감을 낳는다. 칼빈은 용서가 자신의 자신의 죄를 기억해 내고 이를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동에 얽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목사가 겸손하며 한계를 인식하고 직무를 행할 때에도, "매고 푸는 일의 확실성은 지상의 재판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다만 조건적으로 사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 상태를 아실 수 있으며,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은 개인기도이건 공적 기도에서건 간에 모든 고백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칼빈은 고대의 공적인 고백기도를 공적 예배에 다시 부활시켰다. 그는 이러한 합심기도를 모든 공적예배의 규범으로 삼았다. 공동의 고백기도는 개혁주의 예배의 한 표준적인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용서에 대한 확신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영적 상담의 주요 근원이 되었다. 칼빈은, "전교회가 회개의 명령으로 무장된 죄를 고백할 때 교회의 사면이 선포되는 것을 듣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그곳에 참석한다는 것은 평범하거나 가벼운 위로가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에는 확신이나 용서나 사면의 선언이 다소 그 힘을 잃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사람들의 영적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목회자들이 항상 깨닫는 것은 아니다. 교권주의(clericali- sm)에 대한 두려움이 일반적인 변명이다. 하지만 용서를 분명하고 강하게 선포하는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는 고백의 두번째 형태는 개인 기도이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죄책감을 스스로 자유롭게 벗을 수 있으며, 자신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 기도에서, 사람들은 공적인 상황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죄를 고백할 수 있다. 공적인 고백 기도는 그 본성상 일반적이고 포괄적일 수밖에 없다. 그 성격상, 개인적인 고백은 다른 형태의 고백보다 더욱 개인적이며 구체적일 수 있다. 독거(獨居)하는 개인은 친구를 잃거나 다른 사람들의 눈밖에 나는 게 두려워 자신의 실패를 고백하길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전심적인 믿음뿐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절대로 작은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점수를 메기며, 복수심이 가득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분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께 죄를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백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고백으로는 충분치 못한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행한 것을 말하고, 그 사람에게서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세번째 형태의 고백은 우리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약점들을 서로에게 말하면서, 우리는 상호간의 상담과 위로로 서로를 돕는다." 이러한 고백의 대상은 목회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루터처럼 칼빈은, 목회자들에게 가서 영적 안심과 위로를 구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러한 고백은 "자유로운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필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추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목사에게 하는 고백은 언제나 목회적 보살핌의 자발적인 형태였다. 고백은 장로나 다른 교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와 마찬가지로 고해 성사를 반대하기는 했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목사나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영혼의 짐을 내려놓는 영적 유익을 빼앗으려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자 전체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약속들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여전히 약간의 의심을 가지며‥‥ 마음이 불안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고백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달린 것이었으며, 고백할 대상을 정하는 것도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였다.

이러한 고백이 일반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목회자에게 대한 고백의 한 형태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주의 만찬이 거행되기 전 주일에, 칼빈은 성찬에 참여하길 원하는 사람은 그에게 미리 알려 그와의 상담 약속을 정하라고 했으며, 특히 그가 모르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이것은 신앙 안에서 신자들을 더욱 주의 깊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둘째, 이것은 고침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셋째, 이것은 죄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자신이 고해 성사를 부활하려는 것이 아님을 주의 깊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권징도 가지지 않는 것보다 그 제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했을 것이다." 성찬식이 있기 전에 목사나 장로를 방문하는 일이 여러 해 동안 개혁주의의 영적 전통으로 남아 있었으며, 아직도 지구상의 몇몇 곳에서는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위로와 치유의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사에게 고백하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칼빈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할 때 사면을 선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칼빈의 본을 따르길 다소 꺼렸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특별한 신분이라는 암시를 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매우 조심해 왔다. 그러나 용서의 분명하고 직접적인 형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들은 죄의식에 얽매여 있으며, 따라서 일반적인 말들로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는 좋은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의 소설 마지막 야수(The Final Beast)에서,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용서의 직접적인 표현이 필요한 한 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다. 아주 영적인 여인 릴리안 프래그는 목사인 니콜렛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여인 루니에게 용서를 선포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목사는 자신이 그녀를 용서했다는 것을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릴리안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목사님의 유일한 힘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하고 작은 간음자인 그녀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지금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도 말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녀가 아이들이 가득한 즐거움이 충만하지도 않고, 외롭고 지루한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하심을 말하십시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그녀가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이 그녀가 우리들 모두가- 다른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목사님께서 안수를 받으신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지금 의무적인 고백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완화되었고, 개신교인들 역시 이 제도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화해의 예배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들은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보충 의식서(Supplemental Liturgical Resource)인 새로운 장로교판 목회적 보살핌의 상황들을 위한 예배들(Services for Occasions of Pastoral- Care)과 그리스도 연합 교회 (the United Church of Christ)예배서(Book of Worship)는 공적 예배와 사적 예배 모두에서 참회하는 자들의 회개를 위한 순서들을 담고 있다.

자기 점검의 또 다른 형태로 고백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청교도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일기 쓰기이다. 이들의 일기는 아주 세밀한 권징과 더불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청교도들의 고해 제도라 불리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기들은, 청교도들이 그들의 내적, 외적인 삶의 사건들을 기록할 때 종교적인 자기 점검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한 특별한 사건들도 기록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은 그들로 하여금 어려운 순간들에 용기를 얻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다 큰 계획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이것은 이들의 믿음을 새롭고 강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일기들 중 일부가 아직껏 남아 있긴 하지만, 많은 일기 기록자들, 특히 여성들은 자신들이 죽은 후에 자신의 일기를 폐기시켜 달라는 부탁을 함께 남겼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기들 중 탁월한 것은 1669년 출산 중에 죽은 엘리자베스 화이트(Elizabeth White)의 것이다. 그녀의 일기는 미국의 보스턴, 글래스고우, 런던에서 널리 출판되었다. 그녀의 일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으려는 노력들과 결합된 자기 점검이 마침내 안전한 믿음에 대한 자각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녀를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떻게 죄에 매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기를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어머니는 어느 때인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영적 자각이 시작된 것은 결혼할 무렵이었다나는 내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나로 하여금 성찬을 받도록 하고 싶어하셨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때는 내가 참여한 일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기 전이었다." 그녀는 목사를 방문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순종했으며, 이 방문은 일종의 시험처럼 보였다. 그녀는 목사를 만족시켰지만, 단지 그런 척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후에 갑자기 그녀는 주님께서 "내 거짓된 신념을 깨뜨리시고, 내 거짓말의 피난처를 쓸어버리셨다"고 선언한다.

이 극적인 경험은 설교 중에 일어났다. 그녀는 그 사건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길 기뻐하셨듯이 내 마음을 여시길 기뻐하셨다. 그래서 나는 설교 말씀에 주목했으며, 내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사는 다시 한번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말하길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리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사가 그녀에게 일종의 인도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또한 목사들의 심방이 그 시대에 의례적인 것이었을 뿐임을 암시한다.

그녀가 성경을 읽고 있는 동안, 몇 마디가 그녀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몇 마디 말씀들은 나를 아주 견고히 지탱시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말씀을 봄으로써 희망을 얻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그 말씀들을 찬장에 붙여 놓았다." 그녀는 "위선자는 자신의 상태를 거의 또는 전혀 의심하지 않으나, 진실된 마음을 열망하는 것은 진실함의 표시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위로를 얻었다. 한 여자 친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했지만 위로는 순간적일 뿐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 대한 회의와 혼자 씨름했으며, 출산을 앞두고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근심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성경에 의해 위로를 받은 것은 출산하는 동안이었다. 그녀는 한 아이를 낳았고 산후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는 이를 사단과의 싸움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기로 젖을 떼게 하는 일과 관련하여 또 다른 위험에 직면했다.

 

내 아기가 젖을 뗀 후로, 나는 죽음과 어두움의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로부터 빠져 나왔다면 결코 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다시 의문을 품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나는 아기에게 놀랄 정도의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내 주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내 어두움을 걷어 주시고 기쁨으로 나를 채우셨다. , 내가 그분께 무엇을 드릴까?"

 

엘리자베스 화이트의 이야기는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의 영적 성장이나 변화를 결혼, 임신, 출산, 이유(離乳)와 같은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한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경험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적 여행의 이미지들을 제공했다. 그 여행은 아버지의 통제와 보호로부터 결혼한 여인으로서의 상대적 독립으로의 여행이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또한 아기의 젖을 떼는 자신의 경험을, 이차적인 신앙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되고 직접적인 경험으로 커 가는 한 상징으로 보았다.

그녀의 일기는 목회자와 다른 여자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한 고백의 실천을 설명해 준다. 그녀의 일기는 청교도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기 위해 일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예이다. 이러한 일기들은 고백과 영적 자기 점검을 위한 하나의 훈련된 형태였다.

세 가지 형태의 고백들 -협력적이며 공적인 기도, 자기 점검과 일기쓰기를 포함하는 개인 기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고백- 모두 칼빈이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의 능력이라고 이해한 열쇠의 능력에 대한 표현들이다. 목사들은 복음을 선포할 때 열쇠의 능력을 행하며. 설교와 가르침과 개인적인 상담에서 열쇠의 능력을 행한다.

 

 

목회 상담

 

언제나 목회 사역의 중요한 부분들 중 하나로 자리잡아 온 일은 교인들과, 인도와 가르침을 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상담하는 것이었다. 목회상담은 성직자이건 아니건 간에 내적 갈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들, 어려운 관계 문제들,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 가운데서, 교회를 대표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문제를 직시하거나 갈등을 해소하거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

목회 상담은 서로 다른 문화적 상황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때때로 목회 상담은 거의 전적으로 성직자의 사역이었다. 또 다른 시대에는 이 사역이 믿음의 공동체 내의 많은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었다.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들을 적절하게 받지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엘리자베스 화이트는 그녀의 목사와 한 여자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목회 상담과 비슷한 어떤 것이 이루어졌다.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장로의 직무는 목회적 보살핌을 제공하며,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들을 배가시키는 것으로 잘 규정되어 있다.

상담은 복음 메시지의 성격에 대한 숙고에서 그 형태를 취할 수 있거나 심리학이라는 인문 과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거나 심지어는 그 지배를 받을 수도 있으며, 더욱 가능하게는 이 둘의 혼합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담은 현대 심리학보다 먼저 생긴 것이었다. 왕정이 복고되고 청교도의 꿈이 외견적으로 좌절된 이후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청교도 성직자의 품위를 회복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노력은 17세기에 상담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의 상담은 상식, 성경 금언들, 사랑 그리고 특별한 상황들에 대한 주의 깊은 응답 방법들로 중세 로마 카톨릭의 목회 지침서들의 유산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스터는,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다가설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교인들에게는 "그들의 의심을 해결하고, 그들의 죄를 이기며, 자신이 맡은 일에서 행할 바를 알며, 지식과 모든 구원의 은혜에서 커 가기 위해" 목회자의 개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필요들은 청교도 목회 상담의 기초를 암시해 준다. 청교도 목회 상담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상담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며, 자신들의 삶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며, 믿음을 가르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현대의 기준들에 의하면, 이러한 상담의 대부분은 매우 직접적이었다. 이 상당은 성경의 명령들로 구성되었으며, 엄하고 요구적인 것으로 보인다. 코튼 마더(Cotton Marther)는 부모로서 딸 캐디와의 상담을 이야기한다. 그는 딸에게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말하고 그녀의 죄많은 상황을 지적해 주었다. "나는 그 아이로 하여금 내가 그의 곁을 떠날 때 그 아이가 지금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 그 아이에게는 자신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주의 깊고 인자한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계속적으로 기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주실 것이며, 모든 고난이 그 아이에게 유익이 되게 하실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이 아이가 불쌍하다고 느끼고 이 아이에게 고의적으로 겁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무감각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거의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그러나 마더는 자기 자녀에 대한 사랑과 그 아이의 안녕에 대한 부모로서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목회상담을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상담은 아주 최근까지 지배적이었던 목회 상담의 전형이었다.

20세기 사람들은 앞선 시대의 모든 것을 획일적이고 무감각하거나 잔인하고 독선적인 것으로 비난하는 데 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과학 이전에 존재했던 목회 상담 방법들이 많은 목표들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그 방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삶의 비극들을 다루는 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그것들은 당황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었다. 그것들은 절망과 좌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것들은 복음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1930년대 후에야, 즉 매사추세츠 제너럴 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목회자 훈련을 위한 임상 프로그램들이 개발된 후에야, 현대 목회 상담이 신학교 교육의 커리클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안톤 보이젠(Anton Boisen), 시워드 힐트너 (Seward Hiltner), 칼 로저스(Carl Rogers), 웨인 오테츠(Wayne Oates)와 같은 거장들이 새로운 심리학의 통찰력들을 목회적 보살핌(pastoral care)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한 선구자들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이들은, 목회 상담에 수많은 기여들을 남겼다. 이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 방법을 제시해 주었으며. 그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노력은 줄이면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목회자들이 내담자를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복잡한 문제들과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은 목회 상담의 실천을 인간화 시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이 상담을 기독교적 상징들과 언어에 대한 분명한 연결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담의 심리학적 측면은 때때로 거의 종교적인 것을 배제할 정도의 상담 방법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종교인을 배제하고 안전한 상담자를 찾기란 어려울 때가 많았다. 목회 상담의 특수화도 이 일을 목회자에게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적절히" 훈련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교회 다른 구성원들이 상담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시켰다. 이러한 경향이 가져다 준 한 가지 결과는 많은 목회자들이 다른 일들은 거의 제쳐둔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데 보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심리학적 목회 상담에는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음을 느껴 왔다. 이들은 그들의 영적 투쟁을 돕고, 그들의 종교적 경험들을 가려 줄 수 있으며, 기도를 개선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돌봐 주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왔다. 목회자들은 이러한 필요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훈련을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요구들에 다소 겁을 냈다. 고대의 영적 인도는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있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영적 인도

 

영적 상담이나 인도는 그 역사가 길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회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자신을 그들의 아버지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디모데와 같은 특별한 개인들과 전체 회중들과 함께,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충고하고, 훈계하며,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듯이 자신을 본받으라고까지 촉구했다.

3세기에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영적 "인도자"(guide), "감독"(director)에게 드러내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4세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인도를 받기 위해 사막의 은둔자들을 찾아갔으며, 이러한 일은 널리 퍼져 있었다. "감독"은 기도에 대한 조언을 주며. 적절한 회개의 행동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영적 감독들, 중 많은 수가 여성들이었으며, 일반적인 평신도들보다는 수도원의 일원인 경우가 아주 많았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 시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으며 부자들과 권력층 사람들은 이들을 개인적인 안내자로 찾기까지 했다.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영적 생활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인도자를 찾는 것은 로마 카톨릭보다는 덜 일반적인 일이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개신교에서 개인 기도와 개인적인 말씀 묵상이 가지는 중심적인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한 필요보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더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적 인도는 많은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이 이해하거나 느끼지 못한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 가운데서 이웃이나 목회자로부터 영적 인도를 구하는 경향이 다시 일어났다. 이들은 대단한 열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실천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빛만으로 제역할을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메마름을 경험하고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포기했다고 느낄 때, "그녀는 스스로의 빛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그때에 빛을 가진 다른 사람이 (비록 다른 때에는 그 자신 위에 그녀만큼 또는 더 많은 구름이 덮여 있을지라도) 자신의 빛으로 보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그녀 자신의 빛이 비취지 않을 때, 그녀는 인도자를 구하고 날이 밝고 해가 그녀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빛을 빌리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청교도 운동이 사람들의 풀뿌리 운동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영적 인도의 중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료들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특히 여성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들은 서로의 영적인도자들이 되었다.

 

 

편지 쓰기

 

종교 개혁 시대에, 개신교인들은 영적 인도의 일반적인 한 형태로 편지 쓰기를 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꼭 필요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목회자나 인도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적 고립 때문에, 이들은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편지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은 목회적 보살핌의 상당 부분을 편지 쓰기를 통해 수행했다. 그의 편지들은 그의 영적 인도 방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적 인도를 보여주는 한 탁월한 예로 까니 부인(Mdam de Cany)에게 보낸 편지를 들 수 있다: "우리가 더욱 자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볼 때, 부인께서는 제가 보내는 편지를 부인의 구원을 증진시키기를 바라는 제 진심의 표현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는 칼빈의 목회적 관심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녀를 인도하기 위해 왜 서신 왕래라는 방법을 택했는지도 분명히 보여 준다.

칼빈은 또한 편지를 자신을 위한 영적 인도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 예로, 그가 월리암 파렐(William Farel)과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슬픔과 문제들을 파렐에게 쓴 편지에 쏟아 놓았다: "코우랠(Courault)의 죽음이 저를 너무나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어 제 슬픔은 이루 말할 수없습니다‥‥ 깨어 있는 데 잘 적응되어 있긴 하지만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시달리고, 밤새도록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들 때문에 지쳐 쓰러집니다." 칼빈은 파렐을 직접 만나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도움과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칼빈은 역사가들이 거의 알아채지 못한 다른 면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최선을 다해 슬픔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제게 대한 그들의 의무에 열심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저와 그들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의 관심에 얼마나 큰 힘을 얻고 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제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충분히 잘 알고계십니다."

그의 중후한 설교와 가르침과 행정적인 의무들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위기에 처한 개인들을 위한 이러한 목회적 보살핌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학자요, 행정가요, 신학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들을 이끄는 목회자요 지도자였다. 우리는 칼빈이 그의 스케줄 가운데서 이러한 모든 활동들을 위한 시간들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인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영적 상담에 대한 편지들을 썼다. 편지들에서 그는 때때로 아주 직설적인 충고를 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의심의 문제를 다룰 때 더욱 그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제가 두려움과 의심에 빠져 있는 자매님께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사랑을 더욱 굳게 부여잡으라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며, 당신의 이름을 그의 책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루더포드의 가장 분명한 조언은 개괄적인 기도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스스로에 대해 부족함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요구였다.

1. 많든 적든 간에 하루 중의 시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

2. 세상에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적어도 한 두 마디의 통성 기도와 함께 죄, 죽음, 심판 그리고 영원에 대한 생각 들을 가지라.

3. 개인 기도에서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4. 기도한 후에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화내지 말라.

5.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개인 예배나 공적 예배를 드리라.

6. 말씀을 지키고, 방황과 게으른 생각들을 피하며, 갑작스런 분노와 복수 심, 심지어 진리에 대한 억압과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야성(野性)을 뒤섞 기 때문이다.

7. 양심에 반하는, 알려지고 발견되고 드러난 죄들을, 마음을 굳게 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것들로 알고 피할 수 있도록 하라.

8 사람들을 대할 때, 계약과 거래에서 믿음과 진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하라.

 

 

성숙한 인도

 

종교 개혁은 평신도 영적 인도자의 역할을 전적으로 제거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벗겨 줄 대상으로 평신도 친구들을 계속해서 찾았다. 칼빈은 상호 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약점들을 서로에게 내려놓고, 서로를 충고하며, 서로를 동정하며,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 관계에는 목회자가 필요치 않았다.

흑인 교회는 영적 인도를 위한 이러한 상호 관계 형태의 사역을 중요시했다. 하워드 트루먼(Howard Thurman)이 이러한 평신도 사역의 한 예를 들고 있다: "일단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가면, 그 다음 단계는 여러분이 더 오래된 교인의 보호와 지도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여러분에게 영적 인도자로 지정된 두 사람, 남자 한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가 직접적으로 그를 꾸짖었던 한 사건에 대해 기술하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돌이켜보면, 그 일은 교회에서 내 후원자들의 주의 깊은 관심이, 내 삶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내 양심을 깨끗게 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녀들의 삶이 귀중한 선물이었던 내 어머니와 특히 할머니의 조용한 말씀이 내게 주었던 안전을 더해 주었다."

흑인 교회는 일종의 확대 가족으로, 백인 세계의 적대감을 견딜 수 있었으며. 모든 구성원들의 기술과 믿음을 이용함으로써 구성원들을 위한 지원과 훈련과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목회자의 시간과 정열은 수배나 증대되었다. 개혁주의 전통의 특징은 목회자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데 있었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교인들의 타고난 재능들을 개발하는 것이 훌륭한 청지기 정신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기도에 대해 목회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목회자를 찾아가지 않을 사람들에게 영적 인도를 제공할 수 있다. 이들은 거의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지혜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영적 깊이와 인간 영혼에 대한 타고난 이해가 결합되어 이들을 "적격자들"(naturals)로 만든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이러한 섬세한 인도에 대한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기진해 있는 어느 특별히 힘든 날에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나는 즉시 그녀에게 가서 다정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 "뭔가 잘못 됐군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오늘 밤엔 말씀에 힘이 없으세요." 두려움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폴라드 부인,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날카로웠다. "저를 속이실 수 없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백인들이 선생님을 못살게 굴기 때문입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저희들이 언제나 선생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 그녀의 얼굴은 빛났으며, 그녀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선생님과 함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계속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녀가 이러한 위로의 말을 할 때. 내 속의 모든 것이 생생한 생동력으로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직접적이며, 거의 대면적인 영적 상담은 동료들, 즉 정직한 조언을 함으로써 아무것도 잃거나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자질은 절대적인 정직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들에 관한 어려운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즉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도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의 역할은 특히 지원(sponsorship)에 적합하다. 이에 대해 하워드 트루먼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며 그들이 은혜 가운데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임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러한 잠재력을 무시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지 못함으로써 그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장로들의 섬김은 목회자들의 섬김을 배가시킬 수 있다. 20세기까지, 장로들에게는 성만찬이 거행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각 지체들을 점검하고, 서로 불화 가운데 있는 이웃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중재할 책임이 있었다. 장로들에게는 그들을 선출한 회중의 권위가 주어졌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믿을 만한 상담자들이 될 수 있는 기술들을 가지도록 선택될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전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기준에서 교회의 특정한 한 부분에 지도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룹 인도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은 또 다른 형태의 영적 인도, 즉 그룹 인도를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작은 계약 집단이나 교회 전체가 포함될 수 있다. 영적 경험들을 공적으로 나누는 것은 청교도 삶의 뿌리 깊은 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집단들은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상호간의 지원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때가 많았다. 코톤 마더(Cotton Mather)는 이러한 집단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나는 헌신된 여성들의 사회를 방문했다. 그들은 하루를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이고 엄숙한 감사의 날로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나는 그들에게 사무엘상 2:1을 설교했다. 그러한 청중들에게 설교를 한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나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을 전체 회중과 나누도록 고무되었다. 이러한 나눔의 중요성은, 이것이 구성원들을 서로 엮어 하나가 되게 해 주며, 영혼의 시련과 어두움을 다른 사람들의 경험의 빛에 노출시킴으로써 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된 경험의 탁월한 예는 더블린에 있는 존 로저스(John Rogers)의 회중들 앞에서 매리 배이커(Mary Baker)에게 주어진 경험이다.

 

나는 지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나와 관계된 문제들에 있어 괴로움을 당해 왔으며, 이것은 내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위에 당신의 손을 무겁게 올려놓으신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내 죄에 매우 민감하게 하셨으며. 나는 오랫동안 그 무거운 짐 아래 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는, 주님께서 그 짐을 제거하셨으며, 당신의 은혜의 방으로 나를 이끄셨으며, 나에게 당신을 향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설교와 기도와 개인적, 공적 말씀 묵상과 로저스의 설교를 통해 무한한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로저스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일과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열심히 기도하게 하신 일을 통해, 나는 큰 위로를 발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방법들이 내게 너무도 유용한 것이 되게 하셨으며, 그 결과 나는 만물 중에 뛰어나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많이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합니다. 왜냐하면 용서와 구원이 그의 보혈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 증언은 청교도들의 공적인 모임에서 여성들이 말을 하도록 고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증언은 또한 간증의 기원을 보여준다. 간증은 후에 미국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으며 지금도 몇몇 보수적인 집단들에서 행해지고 있다. 간증을 통하여 서로에게 힘을 주고 서로를 지원해 주는 것은 전체 회중이 각 구성원의 삶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는 방법이었다. 반면에 각 구성원에게는 전체에 대한 목회(사역)의 책임이 있었다.

개신교인들은 일대일 방법을 보충하기 위해 소그룹 인도라는 방법을 계속해서 사용해 왔다. 이것은 훨씬 덜 목회자 중심이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상호간의 목회를 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대륙의 경건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연구- 기도그룹들이나 모임들에서 그룹 지도(group direction)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모임들은 주일 오후에 모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에서는 대중의 필요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종교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는 교회 예배에서 찾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영적인 양분을 공급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모임들에서는 아침 예배의 설교가 논의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인의 체험들을 증거했으며, 일상 생활에서의 믿음의 의미가 서로간에 점검되었다. 여기에서는 서로 기도와 권고를 나누었다. 그룹 인도는 소수(목회자)의 정열을 소진시키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는 한 방법이다.

다양한 형태로,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은 그들의 삶을 위한 인도를 받아왔다. 여기에는 편지, 친구들과의 개인적인 나눔, 장로나 목회자의 심방, 목회 상담, 그룹 인도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방법들 중 몇몇은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는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각각의 방법은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크나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개혁주의 인도의 특징들

 

영적 인도자가 목사, 장로, 다른 교회 교인, 또는 집단 그 어느 누구이든 간에, 서로간의 관계에는 확연히 개혁주의적인 특징들이 있다.

1. 개혁주의의 영적 인도는 그 주장들이 온건하며 모든 인간적 한계들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 죄에 대한 인식은 개혁주의 경건의 아주 뿌리 깊은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개혁주의의 영적인도는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기 이해가 커감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연약하고 깨어진 공통된 인성을 다같이 깨닫고 공유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인도자는 언제나 상대방의 옆에 선다. 인도자는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과 인간의 죄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어지며, 인도자로 하여금 상대방을 깔보지 않을 수 있게 해 준다.

겸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한계들을 깨달으며,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치유와 영적 사역이 진정한 사역임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인도자는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을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들에 따라 상대방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실패들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바람들을 상대방에게 부가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겸손은 또한 우리가 상대방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성격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과 어떤 깊은 관계도 가질 수 없거나 그에게 많은 손상을 입힐 것이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도가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이나 방향 지시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혁주의 인도는 때때로 상대방에게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경향이 상당히 강했으며, 상대방을 새로운 수준의 순종과 믿음으로 이끄는 데 주저하지 않거나, 주어지는 말에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 인도자로 소명 받은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설사 신의 역할에 대한 유혹이 주어진다 해도 이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인도자를 찾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을 여행한 적이 있거나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그의 순례의 길이 자신의 것보다 좀 더 길어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찾는다.

2. 개혁주의의 영적 인도는 영에 있어 평등주의적이다. "영적 지도"(spiritual direction)라는 말은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권위적인 형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신교인들은 영적 발전에서 주된 요소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하길 원해 왔기 때문이다. 인도자의 역할은 산파의 역할과 같다. 산파는 상대방의 삶에서 생명의 출산을 돕는다. 영적 삶 전체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이다. 이 출산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각기 다른 형태를 띤다. 산파는 강제로 출산을 시키지 않으며, 다만 곁에 서서 필요한 적절한 방법으로 부드럽게 상대방을 도울 뿐이다.

지금까지 개신교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것은 그들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평신도 인도자들의 역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보다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역할은 목회자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모든 교회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타고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목회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들도 소명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해 줄 수 있으며,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모든 교인들에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 경향을 부활시키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집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로들을 이용하는 것도 개혁주의의 영적 인도에 아주 잘 부합된다. 장로들에게 있어 교인들의 영적 삶을 살피고 이끄는 것이 그들의 우선적인 책임이다. 확실히 이러한 장로들 중 몇몇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영적 인도자들로 섬길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해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소명에 대한 인식과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야 하는 책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준비이다.

3. 세번째 특징은 기대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는 상황과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쏟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지나친 정열을 쏟아 부으려 하질 않는다. 성장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있어 치유의 사역이란 무의미하다. 영적 인도자는 상대방의 성장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상대방을 인도하는 이 과정은 하나님의 뜻과 협력하는 과정이다. 모든 인도의 관계에서 인도자와 그 상대자가 인도의 과정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상대방이 성장할 것을 바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상황이 실마리를 거의 제공하지 못할 경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이 된다. 영적 인도에서 가장 어려운 면들 중 하나는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실망하거나, 심지어 큰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포기하기까지 해 버리는 것이다. 미국 장로교인들 가운데서 영성 분야에 있어 이 시대의 지도자이자 저술가인 벤 캄벨 존슨(Ben Campbell Johnson)은 이렇게 충고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 낸 작은 진전들을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성장을 깨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는 변화들을 일으키기 위해 성실한 자세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영적 인도에서 기도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모임 때마다 조용한 기도의 시간으로 시작하고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통성 기도가 따른다면, 기도는 우리에게 도움이된다. 모임 동안에, 잠시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왜 그곳에 있으며 함께 기도하고 있는가를 상기시켜 보는 것이 필요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모임의 주된 목적에서 벗어난 자질구레한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4. 개혁주의 인도는 삶 전체를 다루며, ,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들과의 관계, 육체적 건강, 고용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들까지 취급한다. 이러한 것들이 대화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들은 관계의 더 큰 목적,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장과 연결되어 있다. 다른 모든 것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관찰되고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영적 인도가 목회 상담과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개혁주의 인도는 현대 심리학의 통찰력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목회 상담 운동에 참여한 것은 결코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과학의 중요성을 언제나 인정해 왔으며 과학이 이루어 내는 발견들을 인간의 상황에 대한 더 완전한 이해를 위한 기여로 환영해 왔다.

모든 영적 인도자들이 심리학적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두 가지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1) 이들은 자신들의 한계와 언제 상대방을 숙련된 전문가에게 소개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한계에 대한 이 같은 자각이 없이는, 인도는 치료 요법(therapy)이 될 수 있으며, 상황을 더 능력 있고 훈련된 사람에게 넘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도리어 해를 끼칠 수 있다. (2) 이들은 어려운 주제들을 피하려는 공통된 경향들을 인지할 정도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이것은 특히 성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적절할 때에 질문들을 제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5. 다섯번째 특징은 인내이다. 이것은 상대방과 "함께 서 있거나"(standing with) "함께 머무르는 것"(staying with)을 의미한다. 우리의 자연적 성향은 결과들을 지나치게 열심히 바라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열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을 방해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는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비언어적 실마리들과 신호들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배워야만 함을 의미한다.

모든 형태의 영적 인도에는 시간이 요구된다. 영적 인도는 지나치게 바쁘거나 열 번째나 스무 번째 만남에서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의 영적 인도에서는 편지 쓰기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편지 쓰기가 고도로 유동적인 사회 속에서 상대방과 계속적으로 접촉하는 한 수단으로 간과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편지 쓰기는 그렇지 못할 경우 지리적 분리에 의해 깨어질 수 있는 관계를 계속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적 인도자 되기

 

본회퍼는 영적 보살핌을 목회자의 한 직무라고 말했으며,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이다. 교인들은 목회자들에게 영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기대하며, 목회자들이 이러한 필요들에 당연히 준비되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목회자도 영적 인도자가 되려는 지나친 열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영적 인도를 행하는 일에는 엄청난 투자가 요구된다. 매우 많은 교인들의 영적 인도자가 되려는 모든 목회자들은 다른 필수적인 목회 직무들을 수행할 시간이 거의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 인도자들이 되기 위한 똑같은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영적 인도자가 되려고 애써서도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영적 인도자의 책임을 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영적 인도자의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때에도, 그저 의무적으로 예라고 말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아주주의 깊게 숙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인도는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특별한 영적 은사도 요구한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상대방을 매우 주의 깊게 돌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여행길에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이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인도를 받지 않는 영적 인도자가 되어는 안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규범에 아주 가까워져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광야에서 안내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서 그들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으며, 그들 자신의 짐들이 나누어지며.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직시되는 책임 있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실천은 장래의 영적 인도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과신을 피하고, 자신의 한계들을 인식하며, 진정한 인도자이신 하나님의 성령을 잊지 않고 의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음의 것들은 내가 영적 인도에 가담하고자 하는 자에게 꼭 있어야한다고 믿는 자질들이다.

 

1.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깊고 개인적인 체험

2. 정기적인 예배 참석

3. 개인적 기도 훈련인간

4. 심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여기에 대한 정식 연구가 꼭 필요한 것 은 아니다

5. 자신의 한계들에 대한 자각과 영적 인도에 의한 정기적인 동기 점검

6. 교회 생활에서 영적 인도의 전통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이해

7. 자신을 찾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 다는 확증

8. 특별히 고통스러울 때도 다른 사람에게 정직하려는 의지와 능력

 

영적 인도는 상담과 비슷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다. 상담은 대체적으로 상대방에게 어떤 고통이나 근심을 일으키는 특정한 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이 있다. 상담 관계는 문제들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삶에서 그 근본 원인들을 다루며, 심지어는 그 사람의 감정을 연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구성된다.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의 명예 교수로 있는 로이 페어차일드(Roy Fairchild)는 한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쳤던 최초의 인물로 상담이나 치료와 영적 인도나 지도를 분명히 구분하면서 세 가지 분명한 차이점들을 지적했다: 영적 인도는 문제 중심이 아니며, 내담자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지 않으며, 인도자와 인도받는 자가 모두 서로에게보다 성령께 더 의지한다.

이 둘을 구별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영적 인도를 받으려는 사람은 단순히 결혼 생활을 더 성공적으로 영위하며 동료들을 더 효과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와 상담은 동시에 시행되고 서로 상보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둘이 서로 다르다는 데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적 인도의 과정은 치료의 문제들(therapy issues)로 뒤덮일 것이다.

영적 인도에서 각 만남은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로를 내어놓을 수 있는 경건의 시간으로 시작된다. 짧은 경건의 시간, 즉 함께 기도하는시간이 있어야 한다. 실패, , 죄의식, 근심 등을 다루는 고백의 시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백의 시간 뒤에는 용서를 선포하는 시간이 반드시 이어져야 하며, 이것은 십자가의 표를 상대방의 이마에 새기는 일일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은, 영적 인도에서의 만남이 어떤 종류이건 간에 상담을 위한 만남과 그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준다. 이 만남은 또한 전적으로 모든 과정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관계된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영적 인도를 위한 만남은 전문 지식은 덜하면서 신학적인 횡설은 더 많은 또 다른 형태의 상담이 되고 만다.

영적 인도를 위한 만남에 있어서 주된 주제는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의 삶으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전망에서 검토된다. 따라서 만남에서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몇몇 자연스러운 질문들이 있다

 

1. 지금 주어지고 있는 은혜의 징후들은 무엇인가?

2.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거기에 어떤 장애물 들이 있는가?

3. 하나님께 대한 그 사람의 지배적인 인상들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은 적절한 것인가?

4. 그 사람의 영적 체험과 기대들은 어떤 것들인가?

5. 그 사람의 꿈은 어떠한가?

6. 가장 실제적으로 보이는 믿음의 문제들은 무엇인가?

7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 사람의 신임은 어떠한가?

 

각각의 질문들은 발견되고 검토되고 인정되며, 그런 다음 하나님 앞에 놓여져야 한다. 인도자는 자신에게 그 주제에 대해 어떤 지혜가 있다는 확신을 느낀다면 상대방이 미래에 이러한 문제들을 대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치유와 성장의 과정을 돕기 위해, 인도자는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들에서 우리들 자신과 하나님께 더욱 주목하게 되기를 바라는 방법들이다:

 

1. 기도

2 일기 쓰기

3. 말씀 묵상

4. 침묵

5. 금식

6.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 사역

7. 특히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믿음으로 위험을 무릅쓰기

 

관계에서 필요한 요소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 영적 인도에 참여하겠다는 계약에는 만남에서와 그 외의 시간에도 상대방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다. 성령께서 그 사람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분별하려는 노력에서, 인도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이다.

 

2. 정직. 인도자가 상대방에게 말하기 힘든 사실을 말할 수 있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대방으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받는다면, 서로의 관계가 충실해지기 쉽다.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이러한 신뢰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본회퍼는 목회자와 인도자는 상대방에게 문제들을 강하게 제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무슨 제안에 대해 '난 못해요'라고 말했다면, 인도자는 "제가 듣기로 '난 못해요'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난 안할 거예요'라는 뜻으로 들리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도자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그리고 아무런 변명 없이 지적할 필요가 있다.

 

3. 친절. 인도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합당하지 못한 고통을 안겨다 줌으로써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상대방이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수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자는 어느 정도의 고통이 유익한가를 분별해야만 한다. 율법과 복음 또는 순종과 용서 사이에 섬세한 균형이 필요하다. 순종이 없는 용서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거나 말하기 힘든 사실을 피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용서에 대한 선포가 없이 주어지는 순종에 대한 지나치게 엄격한 요구는 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4. 독특성에 대한 존중. 상대방에게 우리 자신의 방법을 부가하려는 유혹은 매우 크지만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도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렇게 취급되어야만 한다. 인도자의 의무는 상대방을 어떤 기결된 방법으로 만들어 가려고 애쓰지 않고 상대방을 관찰하고 돌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재빠른 해결책들을 찾으려는 시도는 우리가 만사를 우리의 시각에 "고정시키고자" 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하나의 유혹이다.

5. 주의. 우리는 상대방에게 긴밀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이 상대방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제시되고 있는 자료에 지루함을 느낀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대화를 새로 시작하거나, 그래도 지루함을 계속 느낀다면 그 관계를 끝내는 편이 더 낫다. 우리가 상대방과의 모든 영적 관계들에서 알맞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직 한 일이다.

미국 개신교의 특징이 되어 버린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혜롭고 충실하게 살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 개혁주의 전통은 유익한 실천들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부활된다면 이것들은 교인들을 돌보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교회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소그룹들이나 목회자, 장로, 또는 친구와 같은 개인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영적 여행을 돌이켜봄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따금씩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만나고, 마음을 터놓으며, 당신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크게 힘을 얻고. 안정을 얻으며, 하늘로 가는 길에 당신보다 더 멀리 가 있을 것이다. (때때로 하루의 한 끼, 특별한 때에는 하루 종일 금식하며 하나님의 인자를 구하는) 일상적인 일보다 이따금씩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한 시간 정도를 이러한 친구와 함께해 보라. 그러면 여러분의 대화는 깨어나게 되고 천국의 문제들에서 있어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은혜로운 천국의 대화 속에서 생명이 주어지나이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서로를 세워주라. 이 모든 일에서 서로에게 영원을 주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라.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