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세상에서의 영성과 제자도.hwp

 

6장 실천 : 세상에서의 영성과 제자도

 

 

 

Q. 하나님께서 제8계명에서 무엇을 금하셨습니까?

A. 하나님께서는 국가 당국이 처벌하는 도둑질과 강도짓을 금하셨으며,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강제적으로든 권리를 구실로 하든 간에 거짓된 추와 도량형, 속이는 광고나 상행위, 위조 지폐, 고리대금, 그 외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다른 방법으로 이웃의 소유를 취하려는 모든 악한 속임수와 술책들에까지 도둑질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탐심과 당신의 선물들에 대한 오용과 낭비를 금하셨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개혁주의 전통은 개인의 내적인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와 동시에 세상 일에 대한 참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길러 냈다. 사회생활에서 활동적이며, 그 수에 비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이 되었다. 어떤 사회에서건 간에,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학교 이사회, 사회 복지 프로그램, 주거 개선 계획, 은퇴 노인들의 필요 충족과 같은 일에 매우 자주 참여한다. 이들은 프로그램의 입안자들인 경우가 많으며, 지도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경건과 정치가 언제나 나란히 가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둘이 전혀 양립될 수 없다고 본다. 그 때문에 이들은, 참으로 영적인 사람들은 이 둘에 대해 타협적이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물론 중요한 예외들도 있지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실천과 정치적 질서에 대한 관심을 조화시키려 해 왔다.

칼빈은 국가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프랑스 왕 프란시스 1(Francis I)에게 드리는 글로 시작했다. 이 글에서 칼빈은 기독교 통치자의 역할에 대한 충고를 했으며, 다음과 같은 잘못된 통치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왕적 통치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하는 것" 그는 기독교 강요"시민 정부"에 관한 장으로 결론을 맺었으며, 이장에서 그는 시민 정부를 질서의 수호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변호한다. 시민 정부는 우리가 이 땅을 순례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필수적인 "도움들"을 주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지명받았다. 칼빈은 안정된 정부와 사회 질서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이것이 무너졌을 때 인간 생활은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소 떼나 짐승의 생활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고 믿었다.

때때로 칼빈은 사회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이렇게까지 선언하기도 했다: "통치자들을 충심으로 존경하는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야 하며,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방위 임무를 맡거나. 그 밖의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복종심을 실증해야 한다." 칼빈은 재세례파를 혁명가들이라고 공격했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전복하려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질서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에서, 그는 "집권자에 항거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가 "아주 무례해지고, 사치에 빠지며, 자만심이 가득하고, 번영의 달콤함에 인이 박인" 방백들이나 통치자들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똑같은 강도로 공격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이러한 배은망덕을 참으시지 못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높은 지위에 두신 자들의 지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일반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데 대해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로마의 억압적 통치를 참아 내는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공격했다. "내가 최근에 본 바에 따르면, 전 나라가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로부터 생겨날 어떤 불편을 감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폭정의 멍에를 메고 억압당하는 쪽을 선택했다."

후에 칼빈주의자들도 군주들에 대해, 회의를 품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도 이들은 칼빈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칼빈의 급진적인 면이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 나타나 있다. 그는 훨씬 후의 사회적 변혁을 위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지상의 왕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나 그들의 모든 힘을 비축해 두며, 인간이라고 여겨질 가치가 없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

칼빈이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보았던, 모든 전제 군주들이 받는 유혹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신들에 대한 백성의 신앙을 자신들의 전제 통치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에서 군주들이 "신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스스로를 종교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백성들을 순종에 묶으려는 단 하나의 목적에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섬김을 독려하는 척한다." 이들은 종교를 권력 유지를 위한 버팀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용될 수 없다는 것을 백성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백성들의 충성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것이어야한다. 그러므로 군주들이 이기적인 목적에서 권력을 남용할 때, 백성들에게는 군주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이 하나의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다.

칼빈은 최상의 정부 형태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가 결합된 형태"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믿은 것은 "왕들이 스스로를 잘 통제하여 그들의 뜻이 정의와 공정함에 항상 부합되도록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었다. 권력에 대한 도전과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어떤 개인에게도 지나친 권력이 주어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이 가능했다.

이러한 형태의 정부는, 정부의 하루하루의 가동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봉사가 필요했다. 칼빈은 공적 봉사의 사상을 하나님의 고상한 소명이자 "모든 소명 가운데서 가장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소명"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를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알고 다하도록 촉구했다. 칼빈이 추천한 정부 형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자신의 믿음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많은 사람의 재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칼빈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사회 변화를 일으킨 결과로 이해한 무정부 상태와 전제 군주의 권력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데서 연유된 전제정치 사이의 중간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반항과 순종 사이에서 칼빈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주의 깊고 균형 잡힌 긴장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신도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개혁주의 신앙 고백들은 순종의 의무를 우선적인 것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고의 권력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한,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이며 따라서 죄 없다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저항에 대한 일종의 허용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부의 영역들에 대한 제한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가 이러한 제한들을 뛰어넘을 경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이에 대한 저항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2 헬베틱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앞에서와 똑같은 강조점을 가진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모든 종류의 통치권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므로 통치권은 세상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계속해서 통치자들의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다: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 막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군주에게는 "과부와 고아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보호하며,"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의무를 게을리 하는 군주들은 통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성들은 공의로 다스려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다.

폭군을 향한 저항에 대한 이러한 암묵적인 허용은 역사 전체를 통해 칼빈주의자들에게 심어졌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작성자들 자신도 영국에 대한 저항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 저항은 이들이 종교적 독립과 그들의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까지 1세기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칼빈주의는 모든 형태의 전제 정치와 항상 긴장 관계를 형성해 왔다. 개혁주의 전통은 군주들에게 비판적인 경우가 빈번했으며, 기꺼이 이들을 전복하려 했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은 정치적 행동을 종교적 의무의 한 부분으로 보고 사람들을 정치적 행동에 참여시켰다.

개혁주의 전통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나타나는 이러한 정치적 행동주의는 역사 전체를 통해 일반적인 것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을 뿌리치는 데 그들의 영적 자원들을 활용했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군주를 대항하여 기도하며 싸웠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국 군주의 권력에 저항할 용기를 그들의 믿음 가운데서 발견했다. 그리고 미국독립 전쟁(American Revolution)은 조지 3(King George III)에 의해 "장로교의 반역"이라 불리었다.

20세기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고 있던 시기에, "고백교회" (ConfessingChurch)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그 당시 공식 교회였던 독일 복음주의교회(German Evangelical Church)에 맞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선포했다. 이들은 국가 교회가 나치의 제한들에 순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과 메시지에서 나치와 타협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바르멘 신학 선언(the Theological Declaration of Barmen)의 여러 구절들에는 시민정부에 대한 절대 권력 부여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원칙이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주인들에 속하는 영역들, 즉 우리가 그분을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치 않는 영역들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거짓된 교리를 거부한다."

개혁주의는 국가 권력에 대해 이러한 오랜 전통적인 회의를 가졌으며,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정의롭게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전통은 그 유산과 더불어 편안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지난 100년 동안에 미국 개신교는 한편으로 개인의 도덕, 기도, 종교적 경험, 하나님과의 친밀감 등 주로 사적이며 내적인 여정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해 온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 변화를 추구하고, 정부 관리들에게 편지를 쓰며, 항의나 시민 불복종을 통해 불의한 법을 바꾸려는 노력을 통한 제자도의 실행이라는 외적 여정을 취해야 한다고 느껴 온 사람들로 깊이 양분되어 왔다.

이러한 두 그룹 사이의 양분은 장로교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것이다. 18세기의 주요한 갈등들은, 대각성 운동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대한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엄격한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양 진영 모두 정의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으며, 영적인 삶은 존재뿐만 아니라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남북전쟁 직전까지도, 개인적인 경건과 정의를 행하려는 행동 사이에 뚜렸하고 지속적인 관계가 있었다.

노예제도와 타협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다른 제휴를 낳았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 양쪽 모두로부터 큰 의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회심과 노예 석방 운동을 분명하게 연결 지었다. 이러한 연결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경험을 개인화하여 세상의 문제들, 특히 노예제도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리의 결과 교회의 증거 사역은 빈약해졌으며, 이는 사람들이 한쪽을 선택하고 이 문제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적인 길과 외적인 길 모두가 때때로 조각조각 찢어지고 왜곡되었다. 미국 개신교에 이러한 분리를 가져다 준 중심 이슈는 인종 문제였다. 그 때문에 흑인 교회는 영성은 세상에서의 제자도를 포함해야만 하며 삶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면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백인 교회에게 보여주는 계속적인 증인이었다.

노예 제도에 대한 갈등은 "교회의 영성" 교리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논쟁은 원래는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폭발적이고 잠재적으로 분열적인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방어책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에게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생각은 특히 남부 장로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는 절제, 도박, 충실한 결혼 생활과 같은 개인적인 도덕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회 문제에도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적인 영적 문제들로 그 범위를 제한하며 극단적으로는 죄악된 세상과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적 경건주의를 낳았다. 악한 ""세는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믿음의 일차적인 무대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럽고 타락한 세상과의 접촉에서 탈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신들의 내적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삶의 방식은 혼자서 주님과 함께하고, 영혼을 살찌우며, 믿음을 심화시키고, 이러한 관계의 힘은 무엇인가 즐겁고 힘있는 것으로 느끼는 방법일 수 있었다. 교회의 주된 직무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신앙으로 이끌며, 이미 교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을 타락한 세상에서 구해 내는 직무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영적" 형태는 특정한 종류의 죄에 대한 거부, 다시말해 대체적으로 다름 아닌 우리 자신과 관련된 천박한 형태의 개인적 악행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죄들은 성의 사용 및 남용과 관련된 개인적인 도덕성의 문제들이었다. 따라서 성경은 혼전 관계, 간음, 동성연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아주 선택적으로 읽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 탐심, 탐식, 민족적 자만심, 전쟁 등을 비난할 때는 성경이 무시될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범해지는 죄들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죄들에 관심이 훨씬 덜 기울여졌다. 이러한 태도는 낙태는 "살인"(anti-life)으로 비난하지만 총기 규제, 성교육,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태아 진료소 등에 대해서는 반대하며,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수로서 사형 제도의 부활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많은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의 편협한 경건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의 "자유주의" 진영은 말 대신에 행동으로, 기도 대신에 행위로 믿음의 삶을 사는 쪽을 선택했다. 이러한 행동주의자들은 그들이 복음에 대한 반인간적, 반육체적, 반정치적 곡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는데,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곡해는 영혼들이 악한 세상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상의 필요들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지자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는 경제 제도, 인종 차별주의와 성차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 불의한 정부의 압제, 핵전쟁의 위협 등을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불행히도 이러한 행동주의자들은 이 과정에서 유익한 전통의 많은 부분도 함께 배척해 버렸다.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기도를 내세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전통적인 형태의 경건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 안에서 살고 행동하도록 하신 세상에서의 도피로 보았다.

행동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경건주의자들을 속 좁고 편협하며 율법주의적인 사람들로 보아 왔다. 반면에 경건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들을 귀에 거슬리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 관심이 없고, 구원보다는 세속적인 정치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 보아 왔다. 양쪽 모두는 서로를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 어떤 가능성도 무시하기 위해 상대방의 입장을 지나치게 과장해 왔다.

행동주의자들의 약점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거의 편집병적인 두려움이었으며, 때로는 종교적 언어까지 회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행동을 위한 힘과 동기의 근원에 대한 접촉 상실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도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지각이라는 지탱력이 없는 믿음은 약해지고 낙심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이상주의로부터 비정함과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

미국에도 지금은 더 이상 선지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며 그저 세상에 순응하는 경우가 잦은 소진한 행동주의자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냉소적인 형태로 그들이 한때 공격했던 바로 그 행동들 가운데서 꽤나 성공했으며, 예를 들어 증권 브로커, 은행가들이 되었다. 빈번하게 이들은 순전히 세속적인 세상 가운데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교회를 아주 포기했다. 주요 개신교회들을 떠난 교인들은 화난 보수주의자들이기보다는 상당히 많은 수의 이러한 이전의 행동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시끄러운 항의나 큰 맹세들도 하지 않고 교회를 떠났다. 이들은 단순히 지루해지고, 피곤해지고, 그리고는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여러 해 전의 장로교 교인 조사(Presbyterian Church Membership Survey)에 의하면, 이전에 교인이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교회에도 출석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도 버렸다. 지치고 좌절하고 지루해져 그들은 투쟁을 포기 했다.

우리는 행동주의자들에게 실제적으로 빛을 지고 있다. 이들과 이들의 고집이 없었다면, 교회는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천국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의 자연적 경향은 스스로를 세상과 적대적인 것으로 보고,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는 모든 행동들을 배제함으로써 좋은 느낌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행동주의자들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퇴보하는 것을 막아 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건에 뿌리를 두지 않는 행동주의는 선행에 대한 독선적 자만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분노로 가득할 수 있다. 행동주의는 심판을 통과하길 간절히 원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거의 할 수 없다. 다니엘서 주석에서, 칼빈은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지나친 자기 과신에 빠지기 때문에 의의 행위들이 성공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이교도에게서 자주 보는 바와 같이‥‥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야망이 이들을 사로잡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에 안주한다. " 이것이 깊은 개인적 신앙이 계획의 기초가 되지 못한 행동주의의 문제점이다. 대단한 계획들과 거대한 이상들은 일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무서운 환멸감으로 변한다. 비전과 일시적인 목적을 뛰어넘는 지속력의 근원이 없다면, 한 운동이 더 이상 인기도 없고 만족스럽지도 못하게 될 때 우리가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기도와 정치가 진정으로 온전할 경우,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개인적인 경건과 우리가 현대 개신교에서 경험하는 정의의 사역들 사이의 분리의 위험성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겉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소유에 대해 초월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를 나누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이 없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의 영혼에 큰 사랑을 보이는 척하지만, 그들의 몸에 대해서는 동정하지도, 귀중히 여기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사랑, 연민, 영혼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일은 아무 회생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육체에 대한 자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형제에 대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다른 이들의 영혼과 육체 모두에 미친다.

 

오늘날 미국 개신교 내에서도 치유의 모습들이 있다. 소위 "복음주의" 진영은 안으로부터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1971년 시카고에서 선포된 사회적 관심 선언(the Declaration of Social Concern)에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미국의 물질주의와 세계의 부의 불공정한 분배를 공격하라는 경종이 포함되어 있다. 체류자들의 공동체(the Sojourners Community)는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 내에서 이러한 새로운 각성을 위한 중요한 목소리가 되었으며,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짐 월리스(Jim Wallis) 등이 그 중요한 구성원들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또한 전체성의 회복과 영성의 갱신을 도모했다. 그들의 많은 이상주의적인 프로그램들이 실현되지 못한 데 대한 좌절감은 기도의 내적인 여정을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억압적인 구조들은 현대 선지자들의 비난과 정열에 상당히 저항적이었다. 평등과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진전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인종 차별주의는 그것이 죽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때에 다시 계속 고개를 쳐들었다. 법이 부의 더욱 공정한 분배를 의도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자들은 더 부해지고 있다. 우리 세계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볼 수 있는 결과들을 초월한 동기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경건이나 정의를 증거하는 데 있어 실제로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앞에서 말한 동기는 훌륭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도에 대한 열정도 없고, 공적인 장소에서 증거하는 용기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이 두 행동들이 가져다주는 불편과 두려움이 일종의 죽은 선을 낳으며, 이것은 파렴치한 개인적인 부도덕을 피하려는 의무적인 선일뿐이다. 이러한 선은 체면을 차리려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런 열정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게 잡혀 있다는 의식도, 자신이 세상에서 악과 관계있다는 의식도 전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친절하고 편안하며 성공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신비의 필요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복음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가지는 힘을 그려보았다. 이것은 사회 속에서의 헌신이라는 외적인 의무들과 도덕적 의무들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요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참으로 온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포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 말씀 청취, 찬양, 종교적 모임 만큼에서나 사랑의 행동들에서도 풍성해진다면, 그것은 가장 복된 징조일 것이다. 이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에서 땅으로 더 많이 끌어내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광경은 사랑이 많으시며 찬양 받으시는 구속자의 눈에 너무나 아름답게 보일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말하자면 곧 그분을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게 하여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장막에 좌정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게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깊고 새로워진 개인적인 경건과 세상에 대한 열성적인 관심을 결합하는 영성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경건은 감상주의로 전락하며, 체험을 추구하는 목적을 개인적인 더 큰 행복감이나 만족과 내적인 평화에 맞추게 한다. 이러한 종교는 참으로 민중의 아편이 된다. 이러한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많은 가슴앓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과 행동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말은 말과 일치하는 행동이 수반할 때 신빙성을 가진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의 말의 해석을 돕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동할 때, 구원, 용서, 은혜, 자비와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가지는 경험에 의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요구되며,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요구를 피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의 중심에는 물질세계에 대한 불안과 정신으로부터의 물질의 분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그들 자신이 창조한 영적 세계보다 하나님께서 다소 열등한 것으로 창조하신 것으로 보고 이를 배척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성육신을 중심적인 것으로 보는 신앙이 이러한 분리로부터 보호되어야 된다. 성육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위한 기초이자 육신의 세계에서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위한 기초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인간들을 아주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분은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은 틈을 있는 다리이다. 우리가 믿는 자들의 가슴과 영혼에 거하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데까지, 우리는 신의 본성에 참여한다. 칼빈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몸에 접붙이시고 그분의 모든 유익들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붙어 계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놀라운 교통에 의해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삶이 성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와 영혼의 연합은 모든 인간적인 것을 최대로 존경하는 기초가 된다. 성육신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 존재를 그리스도의 하나의 형상, 그러나 손상되고 왜곡된 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멸시해서는 안된다. 어느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어떤 인간적인 상황도 그리스도의 관심 밖에 있지는 않다. 우리의 말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대우하는 우리의 방법이 우리가 믿고 있는 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 주변의 세계는 성육신에 의해 완전히 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의 인성 속에 거하심을 믿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우리가 성육신을 볼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모든 생명을 강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주무시고, 먹으시며,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고, 다른 인간들의 접촉과 사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으며, 축제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즐기셨다.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에게는 어떤 인간도 남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하는 방법이다. 칼빈은,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 범위에 있어 보편적이며, 우리가 알고 우리 눈으로 보는 사람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거울을 보듯이,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 비록 이들이 우리에게 전혀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이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어인(Moor)이나 야만인을 다룰 때에 그들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형제와 이웃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남성형 단어들만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친숙하든 아니든 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웃으로 대해야 하며,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으로 통하는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있으며, 이것은 육체적 세계를 경멸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건은 마치 성육신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진실하지 못한 영적 경험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다. 뜨거운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중거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깊은 필요들에 속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을 분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은 행동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야만 한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다면, 우리는 남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받아들이며, 더 많이 용서하고, 남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물어 보아야만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지나쳐 버리는 사랑은 말로 쉽게 표현된다. 그러나 말은 값싼 것이다. 그리고 경건은 행동에서보다 말에서 더욱 쉽게 가장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값비싸며 힘겨운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부정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고백적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경건을 보여주는 최선의 표시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남을 위하는 분이셨다. 그분의 삶 전체는 가장 가치 없는 사람들, 가장 대접받지 못하거나 평판이 나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쓰여졌다. 그분 자신이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찾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을 위해 보냄을 받으셨기 때문이었다.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가난한 자들이 더 도덕적이거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더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다. 20세기 자유주의신학자들 가운데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God s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라고 불린 것이 칼빈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앞서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가난한 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부자들에게 부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은 강한 자들이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무시당하는 자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며, 이 둘 모두가 온화함과 겸손을 훈련받을 수 있도록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그분이 가졌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공유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강하거나 삶을 잘 변화시킨다 할지라도 그 경험은 잘못 이해된 것이거나 단순히 상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더 깊은 관심과 인간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 시간과 정열을 아끼지 않는 태도로 우리를 이끈다면. 그 경험은 진정성에 대한 일차적인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영적 경험은 스스로에 꽁꽁 묶여 있는 자아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마음껏 돌볼 수 있는 자유의 시작이다. 결국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고총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아 몰입(self-preoccupation)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사랑을 충족시켜 준다. 사랑받지 않고는, 아무리 힘써 노력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영적 경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험의 중심은 "나는 사랑받고 있으며,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랑. 네 공로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 대한 내적 자각이다. 영혼의 이러한 깊은 자각은 그렇지 않을 경우 끝이 없을 사랑에 대한 필요를 없애 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바로 중심에 우리를 위치시키며, 우리의 필요를 얼마나 충족시키느냐는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게 한다. 사랑을 아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며 따라서 사랑을 주고 또 나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신비가들이 언제나 그렇게 강한 인물들이며 혁명적인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강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비전은 사랑받아야 한다는 이들의 필요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필요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세상에 나아가 악한 권세들에게 도전하도록 힘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그들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작용한다: 첫번째는 대면적 방법(face-to-face way)이며,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곁에 있는 곤궁에 처한 이웃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그러한 이웃을 위해 행동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관계에서 친절하고 용서하며 돕고 돌보며 치유하려는 개인적인 일대일의 사랑의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표시이다. 개인적인 관계들 속에 친절함이나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의 증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제자라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악을 경멸하지만 가정에서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야수처럼 행동하는 선지자는 사기꾼일 뿐이다. 대단히 열심히 남아프리카에 대해 염려하지만 동료 일꾼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표시가 없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두번째 방법은 훨씬 더 장기적이다. 이것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우리에게 필요한 확신도 주지 않는다. 장기적인 사랑은 우리가 사회 구조를 다루고 그러한 구조들을 변혁하려는 우리의 사랑 방법으로 나타난다. 이 두번째 길은 정치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이 길에서만 배고픈 사람들이 빵을 얻으며, 집 없는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첫번째 형태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없으며, 그 결과 우리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동정심에 의해 다루어질 수없는 필요들을 무시한다.

칼빈은 이웃의 의미를 기록할 때 장기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그리스도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웃"이라는 말에 가장 먼 사람도 포함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으므로(10:36),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가까운 사람들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유일한 감정으로 인류 전체를 예외 없이 포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야만인과 문명인, 가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친구와 원수 등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을 그 자체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5)

 

단기적인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단기적인 사랑은 결핍으로 고통 당하며, 존엄성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고, 굶주린 채로 잠자리에 들며, 난민 수용소나 소년원에서 살고 있거나, 감옥에 갇혀 있거나, 단순히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지내는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긴급한 필요를 그대로 내버려둔다. 장기적인 사랑은 공적이거나 국가적 정책들에 의해 그 삶이 파괴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즉각적인 관심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단기적인 사랑 이상의 것에 대한 필요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볼 때 가장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로 가는 길을 자주 다녔고, 그러면서 그 길에서 맞고 강도 당한 사람들을 자주 발견하고 그들에게 단순히 개인적인 도움과 위로를 주는 것 이상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최소한으로 말해 순진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지역 사람들을 범죄를 저지르도록 몰아넣은 높은 실업률뿐만 아니라 그 길에서 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과 적절한 경찰 치안의 부재를 연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 이상의 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와 연민과 자비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부분으로 한데 어울린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는 각각에 두는 비중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기도라는 우리의 내적인 삶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우리의 외적인 삶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둘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물론 각 사람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 그러나 몇몇 공통적인 양식들도 있기 마련이다.

1.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힘을 얻고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에 참여하는 비전과 힘을 가진다. 우리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 동기의 원천이 된다. 우리가 자기중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더 완전히 보살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접할 때, 우리는 행함으로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참여하게 하는 힘이 된다. 우리는 혼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침묵과 고요 가운데서의 자기 갱신과 이 새로운 힘을 정열적으로 세상에 쏟아 붓는 행동 사이를 오간다. 이러한 순환 양식은 개인의 영적 경험이 제자의 행동과 관계되는 중심적인 방법이다. 순환 운동은 날마다 또는 매주마다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다른 어떤 형식을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과 너무나 깊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개인적인 휴양을 취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자신의 적극적인 증거의 투쟁들을 다룰 힘에 대한 필요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내 모든 두려움이 일시에 나를 엄습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집중 포화 지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고갈 상태에서 내 용기가 거의 소진된 때에, 나는 내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놓기로 결심했다.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부엌 테이블 위에 엎드려 큰소리로 기도했다‥‥ 그순간 나는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거의 동시에 내 두려움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불안도 사라졌다. 나는 어떤 것이든 마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외적인 상황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내적인 안정을 주셨다.

 

킹 목사는 시민 권리 운동에 너무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운동이 요구하는 중요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그는 계속적으로 소진과 비통과 절망에 대한 좌절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를 지탱시켜 줄 기도가 필요했다. 우리의 엄청난 양의 힘이 필요한 어떤 운동에 우리가 가담하는 정도만큼, 우리에게는 킹 목사처럼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정기적인 갱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도, 활동의 시간도 절대적으로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각각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영성의 한 형태이다. 각각은 또한 온전함과 균형을 제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은 이렇게 경고했다: 후퇴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이어지는 활기찬 삶을 위한 유용성의 측면에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각 행동이 그 자체로 완전함과 가치를 가진다 할지라도, 각 행동은 상대를 강하게 해 줄 것이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행동이 더 활력 있고 위험스러운 것일수록, 우리에게는 경건의 시간이 더욱더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휴양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반()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어떤 운동에서도 진정으로 열심히 가담하지 않고 있다.

2. 우리의 제자도의 내적 형태와 외적 형태 간의 두번째 연결 형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인식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문화의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 문화의 가치들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특정한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비적 연합으로 묶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경우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거짓말들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는 세상의 제한된 비전에 얽매여 있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전에는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제한들만을 보았던 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들에 열려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비전이 갱신되고 분명해질 때, 하나님의 뜻도 우리에게 더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지는 똑같은 과정에서, 세상의 악도 또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광란적인 행동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욕망이나 두려움으로 뒤덮이지 않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다.

기도는 세상으로부터의 거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기 위해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들로부터 한걸음 물러선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들이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방향과 더 잘 일치될 수 있도록 행동의 질주로부터 물러난다. 도로시 죌레(Dorothee Soelle)는 현대 서구 사회에 대한 우리의 노예성을 생산과 분배의 중심성에 대한 서구 사회의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묵상은 생산을 의미하지도 소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를 앞으로의 생산이나 소비에 적응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질 때, 우리는 세상의 위선과 사회의 추함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배반들을 발견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기도를 양방향 과정으로 허용하는 정도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서 어두움을 제거하시며 우리는 세상을 달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전은 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3. 기도와 행동 사이의 세번째 연결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우리가 혼자서 기도할 때나 명상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역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지역이라고 부르는 곳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즉 삶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과 함께 행동한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어두움과 역경의 중심, 즉 고통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한가운데서 그분을 만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다루어야만 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상처 입는 것을 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증거 사역을 가로막을 수 있다. 이것들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열망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죽음이란 말만 듣고서도 지극히 비참하고 불길한 그 무엇을 대하듯 벌벌 떤다‥‥ 자기의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쁨으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보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독선적이거나 좌절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악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은 승리에서 삼켜지며, 생명은 죽음의 권세에 의해 패배될 수 없다.

4. 그리스도의 능력을 아는 것은, 어디서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 기간 동안 여성들이 그를 어떻게 보살폈는지를 설명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지금 이러한 방법으로, 승귀된 위치에서 우리의 자비가 전혀 필요치 않으신 그리스도에게 직접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그분 대신 그분의 수혜자들로 남겨 두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땅의 희생자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인지할 수 있으며, 비록 그 정도가 작기는 하지만 그들의 고통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다룰 때 그들이 어떤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 속에 있는 "우리가 모든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그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들을 돕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상대방이 우리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 사람을 우리에게 맡긴다. 우리는 중앙 아메리카의 농부의 얼굴에서, 미국의 한 도시의 슬럼가나 동남아시아의 한 난민촌에 살고 있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의 능력으로 모든 생명과 접촉하실 때.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살아나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도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닳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다른 사람들을 남매요 형제로 진지하게 대하며 그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 일하려는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깊은 영적 경험이 우리의 자각을 일깨우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깊은 영적 경험은 모든 피조물들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강화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멋진 느낌과 소름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도 당연하다. 세상의 비극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사랑에까지 고양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정직하게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우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이다. 이러한 공유에는 그들의 공허와 우리들 안에 있는 추함에 대한 인정(認定)이 포함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짓는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바로 그 죄를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첫번째 경험들은 영광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경험은 우리를 우리들 자신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 속에 발견되는 모든 것이 유쾌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가 피하려 할수록,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요구할수록, 우리는 도전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참된 체험은 아주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임재의 선물은 값비싼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인도되는 대로 따라갈 때에만 우리는 믿음의 순례의 길의 값어치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5. 우리의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의 다섯번째 연결은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에도 인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있다. 절망과 냉소주의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를 특별히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빨리빨리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사회적 상황들이 도무지 변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로 보일 때, 우리는 냉소적이 되고 절망에 빠진다. 또는 우리는 기진맥진하게 되고, 특별한 한 운동에 식상하여 더 모호한 다른 운동으로 옮겨가게 될 수 있다. 우리의 신뢰가 깊을수록, 우리가 환멸을 경험할 가능성은 커진다. 결과를 보지못 할 때에도 우리가 한 운동에 계속적으로 스스로를 내어 맡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확신은 내적인 힘에 의해 고양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강조는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왔다. 섭리는 인간의 경험과는 관계없는 객관적인 실체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실제적으로, 섭리는 은혜를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칼빈은 우리가 포기할지도 모를 때 용기를 주는 한 수단으로서 섭리의 중요성을 말한다. "여기 견고함과 확신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근거가 있다: 우리들에게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그렇게 많은 위험과 함정과 도덕적 투쟁들 가운데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맡기신 모든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우리의 현재 경험과 과거의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유혹과 의심의 순간에서 사랑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패배감에 압도되지 않고는 계속할 수 없는 우리의 신뢰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생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신 것과 거룩하게 하심에서 함께 받게 되거나 또는 거기서 나오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이생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신 것과 거룩하게 하심에서 함께 받거나 또는 거기서 나오는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아는 것과 양심이 평안한 것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끝까지 굳게 참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개혁하시며, 우리의 근심들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도록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실 것이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심지어 우리를 어느 곳으로 보내실것인가를 미리 알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철저한 신뢰의 행동이다. 신뢰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신뢰는 모든 내적인 평안의 기초이며,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정의를 행하는 기초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뢰는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고 실망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신뢰는 우리의 최상의 노력들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때에도 우리에게 힘을 더해 준다. 이러한 신뢰는, 믿음이 흐려지고 우리의 순종과 충성으로 인한 희생이 너무나 커 보일 때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지탱시켜준다. 좋은 의도와 결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찰스 핫지(CharlesHodge)는 거룩이란 "양심의 힘에 의해서도, 도덕적 동기들에 의해서도, 훈련에 의해서도 주어지지 않으며, 하나님과 화해하며 성령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주어진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우리의 행동 능력의 기초이다. 우리가 위험, 좌절, 결과의 부재, 반대 등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내적인 확신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위대한 옥중 서신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힘을 주셨는지에 대한 개인적인고백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우리 모두가 바울이 직면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적의의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결과에 대한 굶주림, 성공의 증거에 대한 갈증, 친구들로부터 우둔하거나 바보스럽다는 말을 듣는 굴욕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약속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가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택하셨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형제의 친절함을 보이며 서로의 유익을 위해 일하게 하소서-오 주여,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당신께 무익한 자라 불리지 않게 하시며, 오히려 우리 가운데 온전함과 순전함이 넘치도록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유익하게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삶이 끝나고 당신께서 우리 앞에 두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 마침내 이생의 모든 악을 통과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복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아멘

                                                                                                                            존 칼빈.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