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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

 

 

Q. 우리가 아무런 공적도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우리 죄와 그 죄의 비 참한 결과들로부터 구속받았다면, 왜 선을 행해야만 하는가?

A.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더 나아가 우리 믿음의 열매에 의해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확인받으며, 우리의 공손한 행동으로 우리의 이웃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일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평생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복잡한 것들과 모호한 것들을 단순화하려고 노력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랬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 당혹감,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칼빈은 이를 매우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곤란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 즉 각양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인간적인 상황에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을 시험하는 존재의 비극들을 면제시켜 주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자신들이 "간명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에서 이들이 의미하는 것은 강한 믿음을 통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지 않고 놀라운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으로부터의 이러한 면제에 대한 약속들은 거의 언제나 무지한 고통과 깊은 좌절을 낳는다. 일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하게 될 뿐이었다. 이들은 신자가 치유 받지 못하고, 결혼 생활이 회복되지 못하고, 아이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축복을 구하는 이 사람에게 충분한 믿음이 없었거나 이 사람의 삶 속에,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적인 은유이다. 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들을 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제자들로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자발적으로 당하는 특별한 고난도 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참아 낸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인간적인 고난들 가운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은 없다. 이 고난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고난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스스로 당하는 고난이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 부인의 중심적인 형태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필수적인 초점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자기 부인은 단순히 고통과 비극에서의 훈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데에는 기대치 않았던 축복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완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주님과 사귐으로써, 고난은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이 가져다주는 영적 유익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저주로써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그리스도인의 순종이라는 자발적인 훈련으로 주어지거나 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움들은 실제적으로 파괴적이다. 이 어려움들 속에는 축복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축복은 고통과 눈물 가운데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적 고난을 참아 내는 것을 그렇게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많은 인간적인 고통이 부당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고난이 제자의 삶의 한 부분임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로 그 고난에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 고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느낄 때가 많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회심 전의 삶과 의심과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이러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 전통은 회심한 자들도 이러한 고통들을 계속 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성장은 점진적인 개선을 의미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 전통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더 쉬워지지 않으며, 온전함을 향한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겸손을 유지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웃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로 통과하게 하시는 바람과 골짜기와 오르막과 내리막들이 왜 그리 힘든지!" 4)

십자가의 훈련은 세상의 선물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열망, 즉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훈련이다. 칼빈은 고난을 하나님께서 현세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시는 데 사용하는 주된 방법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사건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세상에 대한 이러한 사랑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신다." 그는 또한 우리가 현세를 경멸해서는 안됨을 강조한다: "이렇게 현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듯이 무시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 생활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결코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현세를 내세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현세와 현세에 주어진 선물들을 거부함으로써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신자로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자신들의 슬픔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헤맨다. 여기에 대한 어떤 쉬운 해결책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에 대해 칼빈이 제시한 한 가지 중요한 단언은 내적인 모순에 대한 것이다. 신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인간성에 배치된다고 느끼는 것을 피하고 무서워하는 자연적인 심리와 이러한 여러 가지 고난까지도 헤쳐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선에 대한 의지가 서로 싸우고 있다." 한편에서의 희생에 대한 우리 자신의 두려움과 거리낌에 대한 정직한 시인과 다른 한편에서의 그리스도께 충성하려는 우리의 열망 사이의 싸움은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싸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나 어려우며 너무나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쉬운 해답들에 대한 유혹도 마찬가지로 크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을 지금보다 더 순조로운 걸음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에 대해 더 분명하고 덜 모호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적어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란과 의심 가운데서 더욱 분명하게 임재 해 계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충실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께 충실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왔다. 이것은 결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 아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의식과 생활을 형성해 왔다. 한 문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문화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문화의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의 증거 사역을 가능하게 해 주는 내적인 자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면으로는 특별한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다. 믿음에 대한 표징들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의 믿음이 자랄 수 있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형태, 즉 어떤 중심적인 방법을 가져야만 한다. 우연에 맡겨진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최근의 문화적 유행에 휩쓸리거나 일종의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다. 몇몇 분명한 우선순위들이 없다면, 우리는 위기들이 닥칠 때 그에 대해 획일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큰소리로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 쉽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일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는 경건이나 영성이다. 주의 깊은 자기 훈련과 믿음의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힘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뿌리를 둔 영성을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 영적생활은 그저 의무에 지나지 않는 종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는 실천이 요구되는 생활이다.

구약에서 율법의 일차적인 기능은 언약 백성들이 주변 국가들의 낯선 문화에 흡수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레위기의 성결 법전은 이를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8:3-4). 매일 행해진 수십 가지 크고 작은 의식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분명하고 철저한 구별 가운데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다른 민족은 의식들에 의해 삼켜지지 않도록 주의 깊게 계획된 양식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율법이 이러한 목적을 잘 성취했다. 히브리 민족은 그 수가 적었고, 세계적인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으며, 많은 민족들에 의해 멸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낯선 사회들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신약 교회는 이와 똑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신약 교회에서는 서로 돕는 생활이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신약 교회는 그것이 하지 않았던 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졌던 서로 돕는 생활의 긍정적인 성격에 의해, 그것이 처한 문화 속에서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 교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4:32-33). 여기에는 탐욕과 종교적 냉소주의와 소수의 부자 엘리트들과 노예든 자유민이든 간에 다수 대중의 가난한 자들 사이의 섬뜩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 한 공동체가 있다. 비록 많은 복잡한 설명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로마 제국을 얻은 것은, 그 믿음이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믿음은 세상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법을 제시했다. 그 속에서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취급되며, 서로간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으며, 위해서 살고 죽을 만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에는 우리가 가져야만 한다고 문화가 말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포기와 그와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실천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싸워 왔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벗어 던지는 것과 영적 생활의 규칙적인 실천들을 행하는 것, 이 두 훈련 모두 생명력 있는 영성을 유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부분들이다. 영적인 삶은 이러한 두 영역들에 의해 표현되고 양육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삶을 위한 확인할 수 있는 한 양태를 세우는 방법을 결정하려는 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다른 길들을 택해 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터툴리안의 인도를 따랐다. 그는 3세기 사람으로 많은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극장 출입, 이는 이교도 예배 의식들에서 기원되었기 때문이다. 화장품 사용, 이는 합당하지 못한 자만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정치 세력으로 만든 이후로, 많은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 공동체로 물러났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들은 세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기도와 영적 생활에 헌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 세상 가운데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해야 하며, 확연히 다른 생활 양식을 따름으로써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문화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두 진영 간의 긴장이 그때 이후로 줄곧 교회에 존재해 왔다. 스스로를 문화로부터 멀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꼼꼼하고 엄격한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반면에 문화에 적응해 온 사람들은 세상의 길로 "나갔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자신의 목회생활 전체를 통해 칼빈은 제네바를, 사람들이 행동으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도시, 의가 지배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를 잃었고 좋은 평판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은 율법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율법 없이 살 경우 파멸의 위험을 겪을 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유 가운데서 율법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율법은 영적 온전함을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삶의 위험들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 줄 수 있으며 당혹스러운 유혹들 가운데서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경건에서 자라도촉 해 줄 수 있었다. 율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에 대해 우리가 자유롭게 드리는 감사의 한 부분이다. 율법은 우리가 우리의 구속자로 알고 있는 하나님께 충실하고자 할 때 우리를 인도함으로써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우리를 도와준다.

개혁주의 전통이 율법에 대한 순종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한 부분으로 이용하는 데서 순종을 율법주의의 한 형태로 만드는 잘못을 자주 범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양심의 인도자로서의 율법사용에 대한 존중은 그렇지 않았을 경우 제한이나 제재가 없는 삶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교정 수단을 제공한다. 율법의 도움이 없다면,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려 할 때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청교도 조상들은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정체성과 정결(purity)의 문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왕권과 특권이 세워지고,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는 사회 질서 속에서 소수로 살았다. 청교도들은 그들이 부와 허식과 예식의 위험성들이라고 지각한 것들에 저항했다. 그들은 이러한 과도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칼빈의 충실한 제자들이었으며, 현세에서 신중하고 주의 깊게 사는데 대한 칼빈의 관심을 공유했으며, 끝없는 소유에 대한 욕망에 저항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욕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소유욕을 제어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반응하는 가운데 청교도들은, 부와 왕궁의 과도한 사치에 참여하는 모든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도박뿐만 아니라 춤. 극장 출입, 화장품, 보석 착용들을 금지했다. 이들은 또한 성탄절과 관련하여 지나친 화려한 장식을 경멸하게까지 되었다. 이들은 돈에 대한 사랑과 그들이 저항하는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들이 직면한 위험들은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부당한 자만심을 가지며, 따라서 자신들의 특별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냉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교도들의 잘못이 그들의 언명에 있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결함에 대한 이들의 야심적인 추구는 이들로 하여금 문화에 대한 거부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들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깨어진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면서 구속받은 자들과 거룩한 사람들의 사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열심에 빠진 이들은 인간 본성의 약함을 잊어버렸다. 이들은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정죄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쉽게 정당화하려 한다는 사실과 사람들이 그들의 뜻에 자유롭게 동의할 때에만 그들의 정결함과 도덕성의 기준들이 그 사람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들을 전체 사회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들의 언명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청교도의 도덕적 기준들에 의해 명령받기를 꺼리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청교도들은 불행히도 그들의 판단주의(judgementalism), 도덕주의, 그리고 독선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청교도주의의 위험들은 19세기에 더 넓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인정받고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들을 분명하게 규명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개신교인들에 의해 과장되었다. 이들은 금지된 활동들의 목록들을 작성했다. 목록의 항목들은 교단들과 단체들에 따라 매우 다양하기는 했지만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일정한 형태로 고정된 일반적인 금기들이 있었다. 보석, 화장품, , 극장. 도박 등에 대한 청교도의 금기들 외에도, 이들은 흡연과 음주도 첨가시켰다. 이들은 절제를 전적인 금주로 재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그 결과 성찬식의 포도주를 포도 주스로 대체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을 경악시켰고, 보수주의자들은 포도 주스는 예수에 대한 모욕이며 성경 위반이라고 믿었다. 후에 활동사진을 보는 일도 이러한 금지된 활동 목록에 추가되었고, 찰스 피니(Charles Finney)가 신앙 부흥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커피와 차를 마시는 일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과도한 판단주의, 독선, 엄격성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금기의 전체적인 개념에 대해 세차게 거부했다. 보수적인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도, 금기 목록의 사용이 거부되었다. 가장 엄격한 몇몇 단체들이 극장 출입 금지 조항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극장에 함께 모여서는 볼 수 없는 것을 각 가정마다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다소간의 죄책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진 소비 형태를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여 왔다.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외적인 기준에 의해 사회의 나머지 부분과 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우리 모두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한 가지 긴급한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실천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양태를 어떻게 형성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하지 않는 것들에 얽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러한 얽매임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우리들 안에서 피하려 하는 독선과 냉혹한 판단주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에 의해 훨씬 더 많이 형성된다. 우리의 행동들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어떤 훈련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필수적이다. 비록 기도에 대해 쓰고 있기는 하지만, 칼빈이 쓴 진리는 삶 전체에 적용된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도움들에 의해 지탱되어야만 하며, 우리는 너무나 나태하기 때문에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의미 있는 개인기도의 형태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기적으로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데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우리의 영성을 가장 많이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어떤 것을 제거하는 훈련보다는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훈련이다. 19세기에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종교적 행동들의 왜 일반적인 목록은 (1)성경 일기, (2) 금식, (3) 주일 준수, (4) 기도, (5) 구제 그리고 (6) 자선과 자비의 행위들이었다. 더욱 최근에 20세기의 목록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1) 나쁜 습관들을 버리는 것을 포함한 도덕적인 생활, (2) 기도와 개인적인 헌신, (3) 매일 읽는 성경을 포함한 신앙 서적의 이용, (4)정기적인 교회 출석 그리고 (5)복음 증거와 자비와 사랑의 행동들 모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

비록 은혜가 선물이며 언제나 그저 주어지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반응에 의해 형성된다. 스코틀랜드 교회 지도자 헨리 스코우갈(Henry Scougal)은 영적 생활에 관한 영향력 있는 그의 저서 인간의 영혼 속에서의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에서 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의 씨와 하늘의 이슬을 받을 준비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휴한지를 갈고, 김을 매고, 가시나무를 뽑아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방식으로 당신을 주셨으며, 그들은 전혀 당신의 백성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붙잡으시며, 그들의 길을 갑자기 가로막으신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방법에 얽매이시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방법들을 사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훈련은 사치가 아니다. 훈련이 없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워지고, 우리의 길을 잃으며, 우리의 원칙들을 양보하며, 우리의 모습이 우리가 의도했던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금씩의 유혹이 확신을 갉아먹지 않게 할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코우갈의 저작에서 우리가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이러한 "방법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긍정적인 인도자들이며, "은혜의 수단"이라고 불릴 때가 많다. 사람들이 교회와 연합할 때 사용했던 친숙한 맹세는 은혜의 수단을 성실하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 줄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에 대해 수용적일 수 있게 해 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의 대가로서, 우리가 쌓도록 허락하신 장벽들을 제거하게 해 주는 한 양식이다. 이러한 도구들이나 보조 수단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값 없는 은혜에 우리들 스스로를 열어 놓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이것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열려 있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이 방법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순례의 길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일반적인 방향 감각의 상실과 선과 악에 대한 혼란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하나의 분명한 형상을 제공한다.

은혜의 수단에 대한 정기적인 사용은 우리들 자신이 주변 문화에 완전히 지배받지 않도록 돕는 훌륭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들에 대한 정기적이고 훈련된 사용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고, 우리의 뜻을 교육하며, 우리의 영성을 길러 감으로써 문화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있게 해 준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훈련된 삶을 추천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부끄러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빈번한 교제는 친밀감을 가져오며, 친밀감은 사랑과 기쁨을 증가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대담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의무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사귐이 거의 없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과 낯선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칼빈은 은혜의 수단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채워 주시는 수단으로 이해했다. 그는 모든 은혜의 수단들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은혜의 공적인 수단

 

은혜의 네 가지 가장 중요한 수단은 이미 논의되었다: 기도, 성경 읽기, 다른 사람들과의 상담, 윤리적 생활. 이 넷은 언제나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협력적으로도 행해졌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개인적인 이행이 필수적이지만, 이것들로부터 최대한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사용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 없이 윤리적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 없이 영적 인도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은혜의 수단들은 각각 개인적으로도 이행될 수 있다: 개인은 공동으로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기도한다. 개인은 공적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성경을 읽는다. 개인은 다른 사람과 나누기 이전에 혼자서 영적 인도를 준비해야만 한다. 개인은 사적으로, 특별한 운동에 가담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나 단체를 옹호하려고 마음먹어야 한다. 서로의 협력하에서만 이행될 수 있는 다른 은혜의 수단들도 있다. 이것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예배

은혜의 공적 수단들 중 첫 번째는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예배이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열어 놓는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읽혀지고 해석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장애물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협력적인 믿음의 공동체의 힘에 노출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격려와 성례들에서 전파되고, 찬양되며, 행해지는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에 우리들 자신을 복종시킨다.

개혁주의 전통 전체를 통해 설교는, 그리스도의 백성들 가운데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효과적으로 방법으로 계시되고 확인되는 수단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영적 유익이 일어나기 위해,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 가운데 적용할 수 있도록 들을 준비를 하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예배 참석자들의 책임이었다. 기대감은 전파된 말씀에서 축복을 얻기 위해 청중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일 것이다.

설교를 듣는 것은 설교자에게만 달려 있는 일이 아니며, 그 속에서 모든 참석자들이 하나의 역할을 갖는 사건이다. 우리가 수동적 자세로 그저 흥겨워지는 데 익숙해져 있는 사회 속에서는 설교 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파된 말씀이 청중들에 의해 진정으로 받아들여질 때마다. 그 결과는 참으로 기적적이다. 리차드 박스터는 전파된 말씀의 힘에 대해 역설한다: "내가 전파된 말씀에서 또 어떤 기쁨을 발견했는가? 내가 하늘의 말로 심금을 울리는 교사 아래 앉아 있을 때, 내 가슴이 어찌 그리 뜨거워졌는지?--- 내가 마음에 염려를 안고 교회를 찾았다가 기쁨으로 돌아온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의심하며 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내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개혁주의 예배에서 중요한 찬송은 우리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우리의 찬송가는 개혁주의 교회의 기도서이다. 우리의 찬송은 음악에 맞추어진 기도이다. 음악은 가사에 힘을 더해주며, 가사의 암기를 도와주며, 전체 사람들이 그들의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을 도와준다. 우리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한 목소리로 찬양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며 또한 주의 일들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된다.

예배가 언제나 은혜의 수단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예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그런 주일도 있다.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또는 건강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으며, 예배가 우리의 필요에 적절치 못한 협소한 주제에 집중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감사와 찬양의 예배가 사랑하는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을 막 경험한 사람에게는 전혀 적절치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를 경험하고 그 임재에 감동되어 돌아오는 경우들도 많다. 이러한 경험은 찬송, 성가대 찬양, 기도, 설교 등을 통해 올 수 있다. 우리들 자신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