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천, "동방정교회 영성의 고전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무정념에 이르는 길," <신학과 실천> 16(2008), 251-282.
이 글의 출처는 한신대 권명수 교수의 홈에서 다운받아 왔습니다.
날이 갈수록 교수분들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이 늘어가는 것을 보며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혜아려 지는 듯 합니다.
참 좋은 글이라 느껴집니다.
읽으시면 관상기도를 모르드라도 조용히 침묵하며 내면의 기도를 하기에 갈구하는 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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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 영성의 고전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에1) 나타난 무정념(apatheia)에 이르는 길

                                                                                김 수 천 (협성대학교 강사 / 실천신학 / 목회와 영성학)


"초 록"

  본 논문은 동방정교회의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에서 제시하는 무정념(apatheia)에 이르는 네 가지의 주요 방법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무정념이란 기도자가 묵상 기도를 할 때에 경험하는 욕심, 근심, 잡념,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와지고 나아가 마음의 고요와 정적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참된 기도와 관상을 위해 필요한 전 단계로서 이해 되었다. 무정념에 이르는 네 가지의 길 가운데 첫째는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를 통한 길이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문을 반복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아가 잡념의 활동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동방정교회의 영성가들은 강조한다. 둘째는 기도자가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묵상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의 시간과 임종 장면을 자주 묵상할 때 기도자는 현실을 초월할 수 있고 그 현실로부터 야기된 욕심이나 근심과 같은 잡념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셋째는 덕의 실천이다. 많은 덕 가운데 공통적으로 강조된 덕들은 절제, 인내, 사랑, 겸손을 들 수 있다. 넷째는 애통의 눈물이다. 애통의 눈물은 혼탁한 마음과 영혼을 정화해 잡념들로 인해 흐트러진 마음과 정신을 쉽게 집중하도록 도와 준다.
  필자는 동방정교회의 이러한 영적 훈련이 현대인들에게 세 가지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마음 수련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에게 선교를 위한 대화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표는 다르지만 마음의 고요와 내면의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동방정교회의 훈련 방법을 불신자들과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깊은 묵상 기도를 갈망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동방정교회의 훈련 방법은 하나의 좋은 방안을 제시한다. 깊은 기도를 위해서는 존재의 중심이자 성령이 임하시는 마음 중심에 이르는 것이 필수인데 바로 동방정교회의 영성 훈련 방법은 마음의 정적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진정한 변화를 위한 성화와 신적 지혜를 얻도록 도와 준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갈망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성화의 삶인데 동방정교회에서는 무정념의 상태를 통하여 신화(deification)라는 비젼을 추구하고 있다. 나아가 무정념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명료한 사고의 활동을 통해 피조물의 본질과 성서적 진리를 깊이 사색하는 관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주제어
동방정교회, 영성, 필로칼리아, 무정념(apatheia), 예수 기도 

Ⅰ. 들어가는 말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심오한 영적 사고를 한 영성가로 추앙받는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에 대하여 말하기를 자신의 내면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세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복잡한 내면세계와 씨름하며 모든 기도자들은 오늘도 깊고 집중된 기도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구송 기도나 통성 기도가 아닌 묵상 기도를 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복잡한 내면세계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것을 경험한다.
  내면세계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하려는 노력은 이미 어거스틴 이전 시대부터 있어 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이집트 사막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였던 성 안토니(Anthony)였다.2)
  성 안토니의 모범을 따라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dox Church)에서는 사막과 수도원에서의 수도 활동을 통해 기도자가 내면세계의 다양한 생각들을 극복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기도 훈련을 실시하여 왔다. 특별히 그리스의 성 아토스산 주변의 수도원에서 1,000여년의 세월에 걸쳐 잡념을 극복하고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드리는 기도의 훈련을 하여 왔고 이 영성가들의 영적 훈련의 경험을 책으로 편집하여 출간하였는데 그것이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이다. 이 필로칼리아는 적지 않은 분량(5권)에 대부분 성인으로 추대된 수도자들의 수도 경험을 통한 교훈들을 집대성 하였기에 동방 정교회 영성의 보고로 간주되어 왔다.
  필로칼리아가 수도 생활을 하지 않는 개신교의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도 가치가 있는 것은 묵상 기도를 하는 이들에게 잡념을 극복하고 무정념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무정념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기도자가 일반적으로 잡념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생각의 활동들을 극복하는 것인데 그 네 가지는 욕심(desires), 근심(concerns), 잡념(random thoughts), 그리고 과거의 기억의 활동(memories)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정념의 상태란 이 네 가지 활동들을 극복하고 정신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3) 무정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본 논문은 필로칼리아에서 제시하는 이 무정념에 이르는 네 가지의 주요 방법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를 통한 방법이고 둘째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한 길이며 셋째는 덕(virtues)의 실천을 통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눈물을 통한 방법이다. 그것을 통해 오늘날 무정념에 이르고자 하는 다양한 종교 또는 마음 수련 활동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영성 생활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무정념(apatheia)의 상태와 가치

  기도자는 물론 많은 현대인들은 마음의 고요(stillness of mind)를 경험하기 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잡념과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져 있음을 경험한다. 마치 물 컵 속의 물이 먼지로 뿌옇게 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고요보다는 먼지들의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끊임없는 생각의 활동들에 의해 마음은 자꾸만 흐트러진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너무도 쉽게 좌절되는 것을 경험한다.
  물 컵의 먼지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더 이상 외부로부터 컵에 충격을 주거나 물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한동안 놓아두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물속의 먼지들이 진정되듯 마음 속의 활동들도 진정될 수 있는데 바로 외부로부터 마음의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 영성가들은 사람들을 떠나 광야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4세기 이집트 사막의 독거 수도자였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또는 Evagrius the Solitary, c. 344 또는 345-99)에4) 의하면 수도자는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도 내면의 생각들에 의해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의 근원은 자기 사랑인데 이러한 자기 사랑으로부터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들이 형성된다. 이 여덟 가지의 생각들은 식욕(gluttony), 육욕(fornication), 탐욕(love of money), 노염(anger), 낙담(depression), 게으름(listlessness), 자만(vainglory), 그리고 교만(pride)인데 이 여덟 가지 죄악은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였던 존 카씨안(John Cassian)에5) 의해 서방 교회에 전파되어 후에 서방 교회에서 일곱 가지 죄악의 목록으로 정착되게 된다.6)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생각의 활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에바그리우스의 견해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바울은 “너희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깨어있는 시간 생각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살아있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힘은 참으로 집요해서 심지어 잠자는 순간에도 우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꿈들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우리의 잠재의식들과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생각의 활동들의 주된 요소들인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집중된 기도를 드리기가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를 무정념이 극복된 상태에서 드리는 순수한 사고의 활동으로 이해한다. 즉,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서 기도란 지성과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다시 말해 생각의 활동들로부터 자유한 순수한 지성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묻는다. “그렇다면, 지성이 기울어짐이 없이 주님을 향해 팔을 뻗으며 매개물이 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려면 어떤 상태가 필요합니까?”7) 이에 대한 대답이 무정념이다. 무정념에 대하여 그래서 존 카씨안은 간략하게 마음의 순수함(purity of heart)로 정의한다.8)
  이 무정념의 상태에 대하여 에바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정념의 상태를 획득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순수한 기도를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먼 곳에 붙들어 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9)

“지성이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의 세계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 그리고 비록 그러한 관상은 비록 정념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해도 피조물에 대한 관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형태를 지성에게 새기며 지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게 만듭니다.”10)

   따라서 무정념의 상태란 기도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들과의 싸움 끝에 이르게 되는 내면의 고요와 평정(stillness and calmness of mind)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요의 상태는 참된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관상을 위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정념은 내면의 정적을 경험하기 원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영적 훈련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Ⅲ. 무정념에 이르는 네 가지의 길들: 예수기도(The Jesus Prayer), 죽음에 대한 명상, 덕의 실천, 참회의 눈물

  필로칼리아에는 무정념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제시되어 있다. 동방 교회의 수도사들이 성서와 초대 교부들의 교훈을 중시하는 전통 가운데 수도를 하기는 했지만 각자 개인적인  영적 훈련 경험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들을 실천하고 형성하였으며 또 전수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방법들을 네 가지로 정리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

  가장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방법인 예수 기도는 특별히 성 헤시키우스에11) 의하여 강조되었는데 “경성함과 거룩에 관해서”라는 글에서 성 헤시키우스는 자신이 1-2세기의 초대 교부들의 글을 통해 영향을 받았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1-2세기에 작성된 글을 통해서 지성을 잠잠하게 만드는 어려운 기술을 배우는 방법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글들은 우리의 정신으로 이룩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순결에 대해 우리를 가르치시는 거룩한 교부들의 작품이기도 합니다.”12)

   성 헤시키우스는 끊임없이 예수기도를 반복할 것을 계속 강조하는데 대표적으로 다음의 두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부탁해야 합니다. ... 그리고 습관이 형성되면, 그것은 마치 천성인 듯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한 평정의 상태에 있는 지성은 숲속에서 토끼를 뒤쫓는 사냥개처럼 원수들을 추적해 찾아냅니다. 사냥개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 추적하지만, 지성은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추적합니다.”13)

“...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당신의 호흡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면 고요의 축복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14)

  이 외에도 성 헤시키우스는 그의 글에서 최소한 9회 이상 예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예수 기도의 형성은 대략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를 반복하는 것이다. 시편 51:1의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좋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Have mercy on me, O Lord ...)와 시편 70:1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Hasten, O God, to save me; O Lord, come quickly to help me)와 그 내용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수기도는 네 가지의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준성례전(semi-sacramental)의 성격이다. 성례는 성찬위에 영적으로 임재하는 성령의 역사로 성찬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믿음이 자라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이해되는데  바로 이 기도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는 것이다. 핵심 구절인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Have mercy upon me)라는 구절이 그러한 신학적 의도를 잘 드러낸다. 즉 신실한 성도가 성찬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듯 예수 기도자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는 성화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가 되어 성화를 넘어선 동방 정교회의 비젼인 신화(Theosis-deification)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15)
  둘째는 죄에 대한 통회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비난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칼리스토스 웨어(Kallistos Ware)는 예수 기도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내적인 깊은 통회(penthos)라는 주제가 이미 성 안토니의 가르침에서 강조된 것임을 제시한다.16) 하나님은 통회하는 영혼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주제는 성서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로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기독교 인간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 반복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일상에서 경험하는 훈련이다. 바로 식사나 노동, 쉼의 순간에도 이 기도를 반복함을 통해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서적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실천을 통해 ??순례자의 길??이라는 저서를 남긴 러시아의 농부는 자신이 예수 기도를 반복하였을 때 예수기도가 자신의 심장에 박혀 심장 박동을 따라 전신에 피가 흐르듯 예수 기도가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 경지에서의 영적 경험이란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이었다. 따라서 예수 기도는 그것을 반복하는 기도자에게 하나님의 임재 의식(sense of the presence of God)을 일상에서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기도의 목적은 마음의 침묵(inner state of tranquility)과 정적(stillness of mind)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이 기도를 통해 마음에 떠오르는 잡념들과 생각들을 극복하고 내면의 단순함과 고요에 이르는 것이다. 그 내면의 고요에서 기도자는 정신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존재의 중심으로부터17)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명상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욕망, 근심, 잡념,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에 의해서 영적 정진에 방해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한 생각의 활동들을 가라앉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라고 조언한다. 성 헤시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죽음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항상 죽음을 그려 보아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숨을 거둘 임종의 장소 및 그와 관련된 것까지도 그려 보아야 합니다.”18)

   성 헤시키우스는 여기서 죽음은 우리 자신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과 죽음 사이에는 수많은 것들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더 이루기 원하는 욕심들과 이미 이룬 것들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근심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명상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그 죽음의 순간에 머무를 때 우리는 죽음과 우리 사이의 모든 것들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 헤시키우스는 우리가 숨을 거둘 임종의 장소 및 그와 관련된 것까지도 그려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죽음에 대한 명상에 대하여 시나이의 필로테우스는19) “맑은 정신에 관한 40편의 글”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이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장점을 경험하고서 영적으로 크게 상처를 받은 동시에 크게 기뻤기 때문에, 그것을 내 삶의 동반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의 권위와 사랑스러움, 겸손함과 회오의 기쁨, 그것에 충만한 깊은 생각,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한 염려, 삶의 염려에 대한 의식 등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 나는 항상 이 아담의 딸-죽음을 기억함을 동반자로 삼아 함께 자고 함께 이야기하며 그에게서 육신의 옷을 벗어버린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기를 열망했습니다.”20)

   필로테우스는 다른 수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아담의 딸이라고 부르며 그 아담의 딸의 권위와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논한다. 죽음은 기도자를 겸손함과 깊은 사색으로 이끌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사랑스러운 삶의 동반자로 삼아 함께 자고 이야기하며 지내야 할 인생의 스승이요 친구인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는21) “테오둘루스에게 보낸 맑은 정신과 기도, 그리고 영혼 구원에 관한 글”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하다면 항상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염려와 허영심을 몰아낼 수 있고, 정신을 지키며 항상 기도하고, 육체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활기차고 활동적인 덕이 그것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호흡을 하듯이 항상 죽음을 생각하십시오.”22)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는 일상생활의 모든 활기차고 활동적인 덕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나온다고 단언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는 순간 모든 염려와 허영심을 몰아낼 수 있고, 죄를 미워하고 정신을 지키며 항상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을 명상하는 순간 수도자가 이르기 원하는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죽음을 인생에 있어 최고의 선물로 정의하였다. 죽음을 명상할 때 기도자의 내면에서 물 컵 속의 먼지처럼 끊임없이 활동하는 욕심, 근심, 일상적인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은 컵 속의 먼지가 가라앉듯 잠잠히 가라앉는다. 어떤 욕망이나 염려도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사색자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초월하게 한다.

  3. 덕(virtues)의 실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아홉 가지의 열매가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성도가 성화의 삶을 살 때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동방 교회의 영성가들은 이러한 성화의 표징으로서의 덕의 열매 외에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의 활동들을 극복하고 무정념에 이르기 위한 준비로서의 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는23) “사랑, 절제, 지성과 일치하는 삶에 관하여”에서 덕의 중요성에 대하여 “뿌리 깊은 습관은 쉽게 제거할 수 없으므로, 고질적인 사악함을 제거하려면 오랫동안 덕을 실천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한다.24)  이러한 덕의 종류에 대하여 영성가들마다 다른 강조들을 하였는데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덕은 크게 절제, 인내, 사랑, 겸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절제는 수도자가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으로 강조된다. 절제는 음식에 대한 절제와 혀에 대한 절제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수도자들에게 있어 음식에 대한 절제는 필수적이었다. 그 이유는 과식은 육체적인 정욕에 휘말리게 하며 정신 집중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성가들은 하루에 400g 정도의 빵과 두컵 정도의 포도주만을 섭취하기를 권고한다. 그리고 식사는 하루에 두끼를 하도록 지도되었다. 물론 병이 나거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더 많은 분량의 음식과 육식 섭취도 허용되었다.
  음식에 대한 절제와 함께 영성가가 실천해야 할 절제는 혀 즉 말에 대한 절제이다. 혀에 대한 절제는 침묵의 덕에서 나타난다.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는 침묵의 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절제와 사랑, 인내와 침묵을 강력하게 실천하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정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25)

  시나이의 필로테우스는26) “맑은 정신에 관한 40개의 글”에서 음식에 대한 절제와 혀에 대한 절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정신의 예루살렘-정신 집중-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비록 정신은 아직 침묵하지 않더라도 지혜롭게 입술을 침묵하는 것입니다. 둘째 문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의 양을 정확하게 절제하는 것입니다.”27) 

   이처럼 필로칼리아의 많은 저자들이 무정념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길로 음식의 절제와 침묵의 가치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정념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덕은 인내이다. 인내는 육체적인 인내와 영적인 인내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육체적인 인내란 수도자가 자신이 머무는 수도 장소에서 정한 수도의 엄격함을 견디는 것을 말한다.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는 인내의 덕에 관하여 이렇게 조언한다.

“모든 일을 적당하게 규칙에 따라 행한다면, 수덕 생활의 엄격함도 견디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28)

“역경에 직면하여 인내하면 악을 몰아내며, 부단한 인내는 악을 완전히 제거합니다.”29)

  인내심이 부족한 수도자는 자신이 머무는 수도 장소가 자신의 영적 정진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리 저리 수도 장소를 옮기려 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비록 원하는 시간에 영적인 정진을 이루지 못한다 하여도 수도자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려야 한다.

  다음으로 영적인 인내란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잡념들과의 싸움이다. 무정념을 방해하는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과의 싸움은 지루하고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다. 기도자는 무한한 인내로 자신이 싸워야할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 그래서 인내의 덕은 무정념의 복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길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기도자가 무정념에 이르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은 사랑이다. 왜 사랑의 덕이 무정념에 이르게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한 생각을 품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이웃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지성은 항상 이웃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지성은 이웃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30)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은 선한 것으로 채워진다.

“덕은 선한 생각을 낳고, 계명은 우리를 덕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덕의 실천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 의존합니다.”31)

   나아가 사랑의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웃과 세계를 넘어 하나님에 대한 선한 갈망으로 채워진다.

“거룩한 사랑에 의해 활력을 얻은 지성은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들을 배양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의 자극을 받은 지성은 악한 생각을 낳습니다.”32)

  그러므로 사랑의 덕의 실천은 기도자를 무정념에 이르게 하는 의미 있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겸손이 무정념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덕이다. 시나이의 필로테우스는 “맑은 정신에 관한 40개의 글”에서 겸손의 덕을 강조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 안에서 정신을 지키려 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게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통회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겸손하고 통회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서 과거의 생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 청년시절부터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하는 것도 마음을 겸손하고 통회하게 만듭니다. 만일 정신이 그러한 죄들을 조사한다면, 과거의 죄를 회상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33)

  기도자가 지난 삶 속에서의 자신의 죄를 기억하면 스스로 겸손해 진다. 그리고 그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잡념으로부터 정신을 지키게 하는 유익을 준다. 그러므로 겸손은 주님의 계명이자 동시에 무정념에 이르게 되는 거룩한 덕이 되는 것이다. 시나이의 필로테우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겸손을 거룩한 덕, 주님의 계명이요 옷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본보기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고귀한 덕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위에서 언급했던 구제책들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의해서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몸, 정신, 소원, 말, 생각, 외모 등 안팎이 겸손해야 합니다.”34)

   기도자가 이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통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계명을 따를 때 그는 무정념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4. 통회의 눈물

  무정념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은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덕의 실천, 관상, 사제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성 테오그노스토스는35)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물로 당신이 눈보다 희게 씻겨지고 당신의 양심이 흠 없이 깨끗할 때, 또 당신의 흰 옷이 영혼의 내적 아름다움을 드러낼 때에만, 당신은 거룩한 것을 만질 수 있을 것입니다.”36)

  영혼과 마음을 씻기는 눈물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물의 내적 본질과 지성의 정화에 관한 100편의 글”에서 니키타스 스티타토스는37) 눈물의 가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념으로 채워진 생각들의 억제되지 않는 지성의 물이 성령의 영원한 임재로 말미암아 되며, 죽음에 대한 묵상과 절제로 말미암아 상스러운 형상들과 욕망들의 쓰디 쓴 심연이 정복되면, 회개의 거룩한 영의 바람이 불고 가책의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하나님은 그것을 회개의 그릇에 담아 우리의 영적인 발을 씻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뜰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38)

  니키타스 스티타토스는 먼저 가책의 눈물은 우리의 더러운 모습을 씻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깨끗해진 영적인 발은 하나님 나라의 뜰을 걷기에 합당한 발이 된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뜰을 걷는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통해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기도드릴 수 있다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념으로 채워져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영혼이 가책의 눈물을 통해 정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스티타토스는 계속해서 눈물의 힘에 대하여 강조한다.

“... 그리고 영혼이 기만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을 보지 않고 오직 영적이고 근본적인 빛을 보기만 열망하며, 감각인식에서 파생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일 때, 마치 샘에서 물이 솟듯이 눈물이 분출하여 영혼의 감각을 온화하게 만들며, 온갖 종류의 기쁨과 거룩한 빛으로 정신을 채워줍니다. 그 눈물은 마음을 강력하게 뒤흔들어 놓으며, 지성으로 하여금 보다 고귀한 세계를 보면서 겸손해지게 합니다.”39)

  여기서 감각 인식에서 파생된 모든 것이란 마음 안에서 활동하는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면 속에서 그러한 것에 방해를 받고 있는 기도자가 그것들을 거부하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열망할 때 샘물과 같은 눈물이 분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눈물은 강력하게 마음을 흔들어 놓아 지성으로 하여금 고귀한 세계 즉 하나님과 영적 진리에 집중하도록 도와 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눈물은 단순한 마음의 정화를 넘어서서 순간적으로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힘이 있다.
  눈물은 나아가 무정념의 상태의 다음 목표인 관상(contemplation)을 가능하도록 도와준다고 니키타스 스티타토스는 가르친다.

“로고스께서는 그들이 거룩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겸손을 통해서 무정념의 상태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다가 기운을 잃고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한층 더 높이 나아가 관상의 상태로 올라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눈물의 빵을 적당히 먹여 양육하신 후에 가책의 빛으로 축복해주시고 지성의 눈을 떠서 성경의 깊은 사상을 이해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과 내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40)

  눈물은 내면의 씻음과 마음에서 활동하는 잡념들을 극복하고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스티타토스는 주님 스스로가 무정념의 상태에서 무정념의 목표였던 관상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눈물의 양식을 주신다고 강조한다. 동방 정교회에서 의미하는 관상은 간단히 말한다면 신적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자가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면 관상을 하게 되는데 기도자는 두 단계의 관상을 경험한다. 첫째는, 피조물에 대한 관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본성과 내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서적 진리에 대한 관상으로 특별히 삼위일체의 진리에 대한 이해이다. 이제 눈물은 그러한 신적 지혜를 향한 영적 진보의 과정에서 영적인 음식이 된다고 니키타스 스티타토스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Ⅳ. 무정념에 이르는 네 가지의 길들에 대한 실천 신학적 적용 방안

  이제까지 고찰한 무정념에 이르는 길들은 평생을 수도사로 헌신했던 동방정교회의 영성가들이 실천했던 방법들이다. 이 장에서는 그것이 시대와 상황이 다른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마음 수련에 관심을 갖는 현대인들에게 선교를 위한 대화의 접촉점으로서, 둘째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존재의 중심에서 절대자와 나누는 대화라는 관점에서, 셋째는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품을 닮는 인격 성숙에 그 초점을 맞춘다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마음 수련에 관한 현대인의 관심과 선교를 위한 대화의 접촉점

  필자는 몇 년 전 신문 광고를 보고 마음 수련원이라는 단체에서 하는 공개강좌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다. 놀라운 것은 그곳에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 곳에 온 이유는 간단하였다.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 단체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온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현재의 기독교 신앙생활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특징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와 관심에서 감성적 또는 영적인 사고 내지는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정신으로 대표되는 이성주의와 과학적 사고는 현대 문명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고 적어도 문명의 발전과 편리함이라는 면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유익을 인간의 삶에 제공하였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문명의 이기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존재이다.
  문명이 제공하는 삶의 외면적 풍요와 편리를 넘어서는 또 다른 영역을 현대인들은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에 따라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물질적 풍요만큼 현대인들은 복잡해지고 바쁜 사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절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사회 시스템 안에서 현대인들은 그래서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한 정신적 영적 욕구에 부응하고자 다양한 종교들과 마음 수양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들이 현대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의 개신교는 사회에서 그 신뢰를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평안을 제공하지 못하는 종교로 인식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현실에서 무정념에 이르는 동방정교회의 영성 훈련법은 마음 수련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선교를 위한 대화의 한 접촉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존재의 중심에서 절대자와 나누는 대화로서의 기도와 그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길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정의에 대하여 김병훈은 “시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를 위해 다가오시는 영혼의 상담자와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친밀한 교제와 진솔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영적인 경험의 깊이를 더하고, 그래서 영적인 관심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우리가 더욱 더 온전하고 정서적인 여유와 지혜로운 통찰력의 소유자로서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육체를 입은 정신적 영적 존재의 생명줄”이라고 말한다.41) 간략하게 말하면 기도는 절대자와의 친밀한 교제와 진솔한 대화라고 정의한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며 진솔한 대화라고 한다면 그 기도의 행위는 기도자의 존재 중심에서 전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기도자의 존재의 중심은 어디인가? 그곳은 동방정교회에서 제시하는 지성과 마음이 통합되는 자리, 즉 마음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자가 성령이 계시는 자신의 존재 중심에 이를 때에 성령의 도움 안에서 절대자와의 깊은 대화와 교제를 할 수 있다.
  문제는 기도자가 어떻게 자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의 활동들을 극복하고 마음의 중심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동방정교회의 마음의 고요에 이르는 영적 훈련은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방정교회의 수도자들이 실천했던 모든 방법들이 그대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대인들에게 하루에 두 끼의 식사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이 강조했던 무정념을 위한 길들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창조적으로 적용할 때 적지 않은 유익을 줄 것이라고 기대된다.

  3. 성화를 넘어선 신화(deification)와 관상(contemplation)의 비젼

  기독교인의 중요한 신앙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성화이다. 날마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울이 “너희는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라고 한 것처럼 존재의 중심인 마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마음의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성령이 역사하는 그 마음으로 내려가야 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무정념에 이르는 길을 통해 그 마음으로 내려가는 훈련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신화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이것은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무정념에 이르는 훈련이란 마음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늘 의지하게 하는 훈련이며 그 성령의 은혜는 신의 성품을 닮도록 기도자의 마음 가운데서 일하기 때문이다.
  동방정교회의 영성 훈련은 동방정교회에서 제시하는 의미에서의 관상이 가능하게 해 준다.
전술한대로 동방정교회의 관상이란 첫 단계는 피조물의 내적 본질에 대한 사색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삼위일체의 진리와 성서적 진리에 대한 깊은 묵상이다. 기도자가 무정념에 단계에 이르러 순수한 사고의 활동에만 전념할 때, 기도자는 관상을 통해 신적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관상 생활의 모범이셨다. 외진 곳에서의 기도 생활을 통해 피조물에 대한 관상을 하셨기에 작은 겨자씨를 보면서 그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새들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겨자씨의 내적 본질을 파악하셨다. 나아가 성부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확신하셨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 5:19)라고 말씀하셨다. 성부의 뜻과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있었으며 나아가 성부와 연합하는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IV. 나가는 말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방정교회의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에 나타난 무정념에 이르는 길을 고찰하여 보았다. 먼저 무정념(apatheia)이란 기도자가 묵상 기도를 할 때에 경험하는 욕심, 근심, 잡념,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마음의 고요와 정적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필로칼리아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네 가지의 무정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음을 밝히고 집중적으로 그 내용을 분석하였다. 첫째로 강조된 방법은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를 통한 길이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문을 반복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아가 잡념의 활동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동방정교회의 영성가들은 강조하고 있음을 보았다. 둘째로 강조된 길은 기도자가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묵상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의 시간과 임종 장면을 자주 묵상할 때 기도자는 현실을 초월할 수 있고 그 현실로부터 야기된 욕심이나 근심과 같은 잡념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제시된 길은 덕의 실천이다. 많은 덕 가운데 공통적으로 강조된 덕들은 절제, 인내, 사랑, 겸손을 들 수 있다. 절제란 음식에 대한 절제와 혀에 대한 절제 즉 침묵을 의미한다. 인내는 수도 생활의 엄격함과 기도 가운데 성령이 임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선하고 단순한 사고를 위한 전제 조건인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삶속에 선한 것만을 기대하기에 단순한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덕의 마지막 요소인 겸손은 죄는 물론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얼마나 낮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 영혼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기에 보다 쉽게 마음의 정적에 이를 수 있다. 넷째로 무정념에 이르는 길은 애통의 눈물이다. 애통의 눈물은 혼탁한 마음과 영혼을 정화해 잡념들로 인해 흐트러진 마음과 정신을 쉽게 집중하도록 도와  준다.
  현대인들에게 전혀 다른 영적 상황과 시간 속에서 행해진 이러한 영적 훈련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세 가지 점에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는, 마음 수련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들에게 선교를 위한 대화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목표는 다르지만 마음의 고요와 내면의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동방정교회의 훈련 방법을 불신자들과 대화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깊은 묵상 기도를 갈망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동방정교회의 훈련 방법은 하나의 좋은 방안을 제시한다. 깊은 기도를 위해서는 존재의 중심이자 성령이 임하시는 마음 중심에 이르는 것이 필수인데 바로 동방정교회의 영성 훈련 방법은 마음의 정적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진정한 변화를 위한 성화와 신적 지혜를 얻도록 도와준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갈망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성화의 삶인데 동방정교회에서는 무정념의 상태를 통하여 신화(deification)라는 비젼을 추구하고 있다. 나아가 무정념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명료한 사고의 활동을 통해 피조물의 본질과 성서적 진리를 깊이 사색하는 관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하 참고문헌  및 각주는 첨부파일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