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가지 악에 관해서 

 

존 카시안John Cassain

 

     "로마인 카시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존 카시안(John Cassain)은 360년 경에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에 베들레헴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385-6년경에 그는 친구 게르마노스(Germanos)와 함께 이집트로 갔고, 399년까지 그곳에서 지내면서 에바그리우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401년부터 405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부제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존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제자이자 열렬한 지지자가되었다. 405년에 서방으로 가서 몇 해 동안 로마에서 지내다가 고을(Gaul)로 갔다. 그는 로마나 고올에서 사제에 서임되었다. 415년 경에, 그는 마르세이유 근처에 두 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하나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 저서인 InstitutesConference는 425-8년 경에 라틴어로 저술되었다. 이 두 권의 저서에서, 카시안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받은 영적 가르침을 서방의 상황에 맞춰 개작하여 요약했다. 그의 저술들은 서방의 수도원운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성 베네딕트의 『규율집』(Rules)에서는 특히 그것을 칭찬하고 있다. 카시안은 435년 경에 사망했다.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기념하고 있으며, 그의 축일은 2월 29일이다.

성 니코디모스(St. Nikodimos)는 『필로칼리아』에 카시안의 주요 저서들 중 일부를 헬라어로 요약하여 수록했다. 「여덟 가지 악에 관해서」는 Institutes 5-12권에서 취한 것이고, 「스케티스의 교부들과 분별에 관하여」는 Conference 1-2권에서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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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가지 악에 관해서

카스토르 주교를 위해 기록한 글

존 카시안(John Cassin, 독수도자 에바그리오스의 제자)의 글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1(서울: 은성, 2001), pp. 107-139.

   나는 전에 공주생활제도에 관한 글을 저술했으며, 이제 당신의 기도 덕분에 힘을 얻어 여덟 가지 악덕-탐식, 부정, 탐욕, 분,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에 대한 글을 쓰려 합니다.

1. 식욕 제어에 관하여

    먼저, 탐식의 반대 개념인 식욕의 제어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하며,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임의로 말하지 않고 거룩한 교부들에게서 받은 것들만 이야기하려 합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금식을 위해서 단 하나의 규칙이나 음식을 먹는 데 대한 단 하나의 표준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체력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나이, 질병, 또는 체력 등이 다릅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하나의 목표-지나치게 먹거나 배부르게 먹는 것을 피하는 것-를 주었습니다. 또 그들은 사흘, 나흘, 혹은 일 주일 동안 금식하는 것보다 하룻동안 금식하는 것이 순수함을 획득하는 데 더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치게 오랫동안 금식하면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게 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음식을 적게 먹거나 영성훈련을 게을리 하면 우리의 몸의 기력이 쇠약해지며, 반면에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영혼이 나태하고 게을러집니다.

또 교부들은 야채나 콩을 먹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마른 빵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마른 빵 두 개를 먹고도 배고파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한 개나 반 개를 먹고도 만족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부들은 극기에 대해서 하나의 기본적인 규칙을 전해 주었습니다: "족하리 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잠 25:16). 음식의 종류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분량도 부정(不貞)의 불화살에 불을 붙입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배불리 먹으면, 방탕의 씨앗이 싹틉니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지지만 물이나 다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도 졸리고 지각을 잃게 됩니다.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소돔 사람들이 멸망한 것은 포도주나 다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빵을 과식했기 때문입니다(겔 16:49 참조).

만일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에 우리의 쾌락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을 공급하지 않고 병의 회복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면, 질병은 마음의 정결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욕구의 충동에 노예가 될 정도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적절히 먹으면 몸의 건강을 유지하며 거룩함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로부터 전해 내려 온 극기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음식을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지 말고 배가 고프다 싶을 정도로 만족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고 말한 것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방종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다른 덕행을 병행하여 실천하지 않는 한, 음식을 삼가는 것 자체만으로는 영혼이 완전하게 깨끗해지는 데 기여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순종과 육체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실천하는 겸손은 큰 도움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소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기를 원치 않음으로써 탐욕을 피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깨끗함에 이를 것입니다. 노염, 낙담, 자만심, 교만 등으로부터의 자유는 영혼의 전반적인 깨끗함에 기여하지만, 극기와 금식은 억제와 중용을 통해서 영혼의 특별한 깨끗함을 가져다줍니다. 배부른 사람은 정신적으로 부정의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식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금식뿐만 아니라 철야, 노동, 영적 독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마음을 집중하고 천국을 갈망함으로써 몸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2. 부정의 마귀와 육의 욕망

     우리의 두번째 싸움은 부정의 마귀와 육의 욕망, 즉 인간을 젊었을 때부터 괴롭히는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이 거센 싸움은 영혼 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몸 안에서 행해져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개의 전선에서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육체적인 금식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억제와 참된 순결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회하는 마음, 하나님께 드리는 열렬한 기도, 빈번한 성경묵상, 수고와 육체노동 등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영혼의 끊임없는 충동들을 억제하며 부끄러운 환상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겸손은 무엇보다 도움이 되며,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부정함을 비롯한 모든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비열한 생각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9).

금식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성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해입니다. 금식을 하면 먹은 음식 때문에 정신이 흐려져서 생각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금식에만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되며, 우리의 생각과 영적 묵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순결하고 순수한 곳에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26).

만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정말 법대로 경기하여 부정의 불순한 영을 극복하고 면류관을 얻으려 한다면(딤후 2:5), 우리의 힘과 수덕적인 수행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 주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합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통해서 치유되고 깨끗함의 고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 같은 승리는 인간의 본성적인 능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육의 쾌락과 도발을 짓밟아 억제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몸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의 늪에서 끌어 올려주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날개를 쳐서 거룩함에 이를 수 없고 천사들을 본받을 수도 없습니다.

육의 속박을 받는 인간을 영적인 천사처럼 만들어주는 덕은 자기-억제(극기)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줍니다(빌 3:20 참조). 잠자는 동안에 더러운 환상이 만들어 내는 영상들을 우리 영혼이 무시하는 것은 이 덕을 완전하게 회득했다는 표식입니다. 그러한 영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것은 영혼이 병들었으며 정욕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더러운 환상들은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연약함과 게으름의 증거로 간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잠자고 휴식하는 동안에 배설되는 것은 우리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질병을 드러내 줍니다. 이 때문에, 우리 영혼을 고치시는 의원께서는 영혼의 감추어진 부분에 치료책을 두시는데, 이는 질병의 원인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호기심 많고 순결하지 못한 눈을 고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좋은 목적에 사용하라고 주신 눈을 나쁘게 사용하는 영혼을 고치려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에서는 "부지런히 네 눈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말하면서, 원하는 목적에 눈을 사용하는 것에 부지런함이라는 치료법을 둡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마귀가 부추기는 여인들-심지어 어머니나 누이, 또는 다른 경건한 여인-에 대한 생각을 정신으로부터 즉시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오랫동안 그 생각을 품고 있으면, 미혹자가 정신을 위험하고 비열한 생각을 몰아넣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뱀의 머리를 조심하여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창 3:15 참조). 다시 말해서, 뱀이 영혼 안에 몰래 기어 들어오기 위해 사용하는 위험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에 경계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뱀의 머리, 즉 생각의 도발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뱀의 몸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즉 그 생각이 속삭이는 육적인 쾌락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정신을 저하시켜 부정한 행동을 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해야" 한다(시 101:8)는 말씀처럼, 우리는 거룩한 지식에 비추어 죄악된 생각들을 구분하여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것들을 땅, 즉 우리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자녀들-우리의 악한 생각들-이 아직 어릴 때, 우리는 그들을 땅에 내던지고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 던져 제거해야 합니다(시 137:9, 고전 10:4 참조). 만일 우리가 동의하여 이런 생각들이 더 강해진다면, 크게 수고하고 애쓰지 않고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 외에 교부들의 금언을 기억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예를 들어, 카파도키아에 있는 가이사랴의 감독 바실(St. Basil)은 "나는 여인을 알지 못하지만, 동정(童貞)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동정의 은사는 여인과의 교제를 삼감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거룩함과 순결함에 의해서 얻는다는 것, 그리고 영혼의 거룩함과 순결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서 획득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교부들은 먼저 진정한 마음의 겸손을 획득하지 않는 한 순결의 덕을 완전히 획득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에 부정의 정념이 감추어져 있는 한, 우리에게는 참된 영적 지식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극기를 얻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보다 깊이 설명해 주는 성경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그 다음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분명히 극기에 대한 말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6). 거룩함의 분량이 커질수록, 원수의 공격도 심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제어할 뿐만 아니라, 자주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마음의 통회를 획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바벨론 왕이 날마다 욕망의 풀무로 불을 붙이는 육의 용광로를 성령의 이슬로 끌 수 있을 것입니다(단 3:19 참조). 게다가, 우리에게는 거룩한 철야라는 위대한 무기가 주어져 있습니다. 낮에 생각을 지킴으로써 밤에 거룩함이 임하듯이, 밤에 철야하는 것은 낮에 영혼에게 순결함을 가져다줍니다.

 

 3. 탐욕에 관하여

 우리의 세번째 싸움은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는 탐욕의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입니다. 그 마귀는 믿음이 부족한 수도사에게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노염과 욕망과 같은 정념은 몸에 의해 야기되는 듯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태어날 때에 우리 안에 심겨지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정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탐욕이라는 질병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지키면 비교적 쉽게 근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한히 하면, 그것은 다른 정념들보다 더 파괴적이고 제거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생식기 안에서의 움직임은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에게서도 발생합니다. 갓난아기는 육욕적인 쾌락을 알지 못하지만, 육체 안에 그와 같은 본성적인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아기들이 자기를 해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갓난아기에게도 화를 내는 능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본성이 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창조주께서 선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내면에 심어 주셨다고 해도 성내는 능력과 욕망을 등한히 하면 몸 안에서 자연적인 것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변화되는 듯하다는 말입니다. 생식기 안에서의 움직임은 인류의 존속과 번식을 위해서 창조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내는 능력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안에 심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사나운 짐승처럼 행동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악을 대적하여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내면에 심겨졌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정념들을 잘못 사용하더라도, 본성 자체는 죄악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조주를 나무라서도 안됩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유익한 목적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 칼을 주었다면, 비록 그 사람이 그 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칼을 준 사람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탐욕은 우리의 본성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악에서 파생된 것이며 우리의 자유의지를 왜곡하여 사용한 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수덕의 길의 출발점에 선 영혼이 미지근하고 믿음이 부족한 것을 발견하면, 탐욕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유하게 하기 위해서 그럴 듯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탐욕은 수도사로 하여금 자신의 늙고 병든 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것으로는 병든 사람은 물론이요 건강한 사람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믿게 만듭니다. 또 수도원 내에서 병자들은 전혀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을 감추어 두지 않으면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탐욕은 수도사에게 주어진 일과 수도원장의 엄격함 때문에 수도사가 수도원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탐욕이 이러한 생각들을 사용하여 수도사로 하여금 돈을 감추어 두려는 생각을 품게 하려 할 때, 수도원장은 은밀하게 재산을 증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수공예를 배우라고 설득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쌍한 수도사를 미혹하여 은밀한 기대를 품게 하며, 그가 자신의 수공예를 사용하여 무엇을 벌어들일 것인지, 그 결과 얼마나 안락하고 안전하게 될 것인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제 소득에 대한 생각에 완전히 몰두하게 된 수도사는 자신을 공격하는 악한 정념들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는 손해를 입었을 때에 불같이 격분하며, 바라던 대로 소득을 얻지 못했을 때에 낙담하고 침울해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胃)가 신이듯이, 그에게는 돈이 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탐욕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라고도 말합니다(골 3:5).

이 탐욕이라는 병마가 수도사를 나쁜 길로 이끌어 우상숭배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황금에 찍힌 인간들의 형상에 지성을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퇴보의 길에 들어선 수도사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성을 잘 내며 매사에 불평을 합니다. 그는 말대꾸를 하며, 존경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마치 고집 세고 말을 듣지 않는 말처럼 행동합니다. 그는 매일 주어지는 음식의 양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러한 상황을 영원히 견뎌낼 수는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나 그의 구원의 가능성은 수도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수도원을 떠나지 않으면 자신이 멸망할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는 자신이 은밀하게 비축해 놓은 것 때문에 매우 신이 나서 이러한 비틀린 생각에 몰두하여 심지어 수도원을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는 교만하고 거칠게 자신에게 명해진 일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도원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서 수도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비방할 뿐, 수도원 내에 고쳐야 할 일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유 없이 경솔하게 수도원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성낼 구실을 찾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에 공범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험담이나 한담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유혹하여 함께 수도원을 떠나는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수도사는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려는 욕망으로 불타기 때문에, 수도원 내에서, 또는 규칙 아래서는 결코 평화롭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는 늑대처럼 그를 양우리에서 잡아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그로 하여금 밤낮 수실에서 정해진 수도원 내에서의 일과를 행해야 하는 것을 불평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그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 규정대로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를 탐욕으로 굳게 묶어 놓고서, 수공예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설득합니다.

탐욕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성경과 교부들은 그것들 모두를 정죄합니다. 첫째 형태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추겨 세상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물건을 획득하여 저축하게 합니다. 둘째 형태는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후회하면서 다시 재물을 찾게 만듭니다. 세번째 형태는 수도사로 하여금 처음부터 믿음과 열심이 부족하게 만들어, 세상의 물건들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하게 하며, 내면에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을 일으키며, 그가 세상을 부인하면서 행한 약속을 파기하게 만듭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 가지 형태의 탐욕의 본보기를 들어 정죄합니다. 게하시는 과거에 소유하지 못했던 재물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스승이 그에게 물려주려 했던 예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저주를 받아 나을 수 없는 문둥병에 걸렸습니다(왕하 5:27 참조).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버렸던 돈을 다시 취하려 했기 때문에 타락하여 선생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무리에서 축출되었고, 목을 매어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마 27:5 참조). 셋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번 돈 중 일부를 숨겨 두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아 죽었습니다(행 5:1-10 참조). 신명기에서 모세는, 세상을 버리기로 약속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재산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신 20:8). 이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증언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버리고 떠난 우리는 이러한 본보기들을 통해서 세상을 완전히 부인한 상태에서 전쟁에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을 복음서에서 가르친 완전함에서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망설임 때문에 그들을 겁쟁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탐욕스럽고 교활한 사람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왜곡합니다. 그들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도 왜곡합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부를 소유하고서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복되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도 바울의 가난을 받아들여 스스로 일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한 세상을 부인한 것도 아니요 수도적 완덕에 이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행 20:34 참조). 스스로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구제하는 사람은 수도 서원을 성취하며 사도 바울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재산을 나누어준 후에는, 바울과 함께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으면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고후 11:27). 만일 바울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완덕에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공적인 지위를 멸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행 22:25 참조). 또 만일 사도들이 자신의 노력과 이방인들이 바친 헌금을 의지하여 사는 것보다 자기가 가진 재산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 더 복된 것이라고 간주한다고 생각했다면, 예루살렘에 거하는 형제들은 집과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행 4:34-35 참조).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시작하여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빛진 자니"라는 말로 끝맺는 구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제공합니다(롬 15:25-27). 바울 자신도 종종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힘들게 여행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손수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데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게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제공하는 생필품을 받았다고 말하며(고후 11:9),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라고 편지했습니다(빌 4:15-16). 그렇다면,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고 해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바울보다 더 복됩니까? 물론 그렇게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명령과 사도들에게 기초를 두고 세워진 교회의 관습을 따르려 한다면, 우리 자신의 개념을 따라서는 안 되며, 또 옳게 거론된 일에 그릇된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믿음이 없는 견해를 무시해야 하며, 복음의 엄격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주(公住) 생활의 규율을 지키고 이 세상을 부인하면서 교부들의 발자취를 따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이사랴의 감독 바실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그는 마지못해 세상을 부인하고서 재산 중 얼마를 보유하고 있는 원로원 의원에게 "당신은 원로원 의원직을 상실했고 수도사가 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 뿌리가 남아 있으면 가지들이 솟아날 것을 분명히 알고서, 영혼에게서 모든 악의 뿌리인 탐욕을 잘라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수도원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이처럼 탐욕의 뿌리를 뽑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도원 내에서는 극히 기본적인 욕구에 대해 걱정하는 일까지도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운명을 염두에 두고서, 재산 중 일부를 남겨 보관하려는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탐욕 때문에 문둥병에 걸린 게하시를 경계로 삼고서, 세상에 있을 때에도 소유하지 않았던 돈을 쌓아두려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목매어 죽은 유다를 기억함으로써. 이미 버렸던 것을 다시 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이 모든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기 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예기치 않은 때에 오셔서 탐욕으로 더럽혀진 우리의 양심을 발견하시고서 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하신 것처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고 말씀하시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4. 노염에 관하여

   우리의 네번째 싸움은 노염의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마귀의 치명적인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 속에 살면서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한, 우리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식별할 수 없고, 영적 지식을 성취할 수 없고, 선한 의도를 이룰 수 없고, 참된 생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또 우리의 지성은 참되고 거룩한 빛의 관상에 대해 여전히 무감각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내 눈이 근심(노염)을 인하여 쇠하며"(시 6:7)라고 말합니다. 또 비록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지혜롭다고 여겨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는 동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노염)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비록 사람들이 우리를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결정들을 식별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는 깨어 지키는 마음으로 의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약 1:20). 또 모든 사람들이 찬양하는 예의와 품위를 획득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잠 12:25).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완전함에 이르고 영적인 길을 바르게 추구하려 한다면, 죄악된 분과 노를 멀리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1)

바울은 "모든"이라고 말함으로써 노염을 발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타당한 것이라고 간주할 구실을 주지 않습니다. 만일 형제가 옳지 않은 일을 행하고 있을 때에, 당신이 그의 잘못을 고쳐 주거나 벌 주려 한다면, 당신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고쳐 주려는 병에 당신 자신이 감염되거나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는 복음서의 말씀이 당신에게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 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노염은 영혼의 눈을 멀게 하며, 의의 태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금으로 된 것이든 납으로 된 것이든 간에 얇은 판으로 두 눈을 가리면, 우리의 영적 시각이 방해를 받습니다. 노염을 발하는 능력을 본성에 합당한 방법으로 사용하면, 우리의 정욕적인 생각이나 방종한 생각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라고 말하면서 가르치려 한 것은 자신의 정념 및 악한 생각에 대해서 화를 내며, 그것들의 제안을 실천에 옮겨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이 해석을 확인해 줍니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이것은 악한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면 화를 내면서 그것을 몰아낸 후에 마치 당신의 영혼이 고요함의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것처럼 가책과 회개를 향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이것은 "악한 생각에 동의하여 그리스도를 노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마음에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떠나가시고, 그로 말미암아 마귀가 당신 안에서 빈틈을 발견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 태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 4:2). 바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해가질 때까지 화를 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불같이 격정적인상태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만 아니라 며칠 동안 화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또는 화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잠잠하지만 원한의 독을 금식시켜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은 행동으로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화를 피하지 않으면 원한 때문에 지성이 어두워지고 영적 지식과 분별의 빛에서 차단되며 성령의 내주하심을 박탈당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제단에 제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23-24). 왜냐하면 우리 안에 노염과 원한이 쌓여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교훈을 가르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각처에서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사도 바울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함으로써 열심히 그의 명령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우리는 종종 형제들이 가난하거나 노여워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부터 영혼의 핑계들을 근절하기를 원하시는 영혼의 의사께서는, 우리가 형제 때문에 화가 났을 때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우리가 형제를 화나게 했으면 제물을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과하여 형제와의 불화를 치료한 후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레 19:17), "의로운 길에 생명 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잠 12:28). 이 구절들은 우리가 행동으로 화내는 것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 화를 품는 것도 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면, 노염의 마귀와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질병을 대적하여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화가 났을 때, 혼자 지내면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인내의 덕을 쉽게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이유 때문에 혼자 지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형제들에게서 떠나려는 것은 교만 때문이며, 자신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의 원인이 자신의 태만함에 있다고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연약한 원인을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 한, 우리는 인내하면서 완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고치는 것과 평안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인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향해 나타내는 인내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우리가 혼자 지냄으로써 인내를 위한 싸움을 피하려 할 때, 정념들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집니다. 먼저 정념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세상을 등지고 혼자 생활해도 그러한 정념들은 감추어진 상태에서 성장하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정념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 감지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거나 시험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인내와 겸손의 덕을 획득했다고 생각하거나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전하고 화나게 하는 일이 발생하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훈련하지 않고 버려두었던 말이 마부를 사납게 끌고 가서 죽게 하듯이, 눈에 뜨이지 않게 감추어져 있던 정념들이 폭발합니다. 우리의 정념은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사나워집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섞여 있는 동안에 인내와 오래 참음의 덕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혼자 고립하여 지내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 덕이 상실됩니다. 사막의 동굴에서 조용히 사는 사나운 동물들은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감지했을 때에만 광포함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고결한 성품 때문에 고요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지내기 때문에 고요하게 생활할 뿐 내면에 정념이 가득한 사람은 누군가가 접근하여 도발할 때마다 독을 내뿜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온유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이나 무생물에게도 성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사막에서 살 때에, 골풀들이 너무 두껍거나 너무 얇아서, 또는 나무를 빨리 베려는 데 벨 수 없어서, 또는 빨리 불을 붙여야 하는데 불이 붙지 않아서 화를 냈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처럼 나의 노염의 대상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었는데, 심지어 무생물을 향해서도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표면적으로 노염을 표현하는 것을 삼갈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 노여워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화가 나는 순간에 입을 통제하여 성난 말을 삼가는 것보다. 마음에서 원한을 깨끗이 제거하고 형제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 편이 더 유익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죄의 열매뿐만 아니라 뿌리를 근절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노염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면 더 이상 증오나 시기심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입니다"(요일 3:15). 왜냐하면 그는 마음 속에서 미움을 가지고 형제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칼에 찔려 살해된 사람의 피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마음속에서 미움에 찔려 흘린 피는 하나님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동 뿐만 아니라 생각과 의도에 따라 상이나 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고 그 지향하는 바에 따라 공적을 판단하실 것이다"(집회서35:22)라고 말씀하시며, 사도 바울은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16)고 말합니다.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된다'(마 5:22)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유 없이"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노염의 뿌리, 그 불꽃을 제거해야 하며, 마음 속에 노염에 대한 핑계를 하나도 간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처음에는 선한 이유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화를 내지만, 곧 자신의 노염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질병을 치료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노염의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면, 우리에게는 분별의 빛도 없고 참된 판단의 보증도 없고 의의 안내도 없게 되며, 우리의 영혼 안에 성령이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항상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며, 노염을 멀리 해야 합니다. 또 만일 우리가 최후 심판 때에 노염과 미움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우리가 행한 극기나 물질을 부인한 것이나 금식과 철야 등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5. 낙담에 관하여

   다섯번째로 낙담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악한 마귀들과 싸워 물리치려면, 낙담의 마귀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좀이 옷에 구멍을 내고 벌레가 나무를 자아 먹듯이, 낙담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유익한 만남을 피하게 만들고, 참된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거나 예의 바르고 화평하게 응대하는 태도를 버리게 합니다. 낙담은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은 후에는, 앙심과 태만함을 가득 채웁니다. 그 다음에는 영혼이 혼란한 원인은 사람들에게 있으므로 사람들을 피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질병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가 수덕적인 노력 때문에 영혼이 공격을 받을 때에만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 해를 입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정념들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영혼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영혼의 상처를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원인을 뿌리 뽑으라고, 그리고 영혼의 건강은 동료들을 멀리하고 혼자 지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수덕생활을 함으로써 얻어진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선한 이유 때문에 형제들을 버릴 때, 우리는 낙담할 동기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하는 데 그칩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질병은 후일 다른 상황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분명히 내면에 숨어 있는 정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것들이 우리 마음에서 근절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나운 짐승들과도 함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욥 5:23)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영혼을 절망 속에 밀어 넣는 낙담의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마귀를 몰아내야 합니다. 이 마귀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회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주님을 배반한 유다가 회개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배양해야 할 유일한 낙담은 죄에 대한 회개와 병행하며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을 수반하는 근심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낙담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후 7:10)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기쁨이 섞여있으며, 회개가 만들어낸 소망을 통해서 영혼을 양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며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하기 쉽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모든 환란과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성품을 소유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류의 낙담을 통해서 악한 영의 열매-게으름, 조급함, 노염, 미움, 싸우기를 좋아함, 절망, 기도를 게을리 함 등-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 탐욕, 노염 등의 정념을 피하듯이 두번째 형태의 낙담도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나님 안에 소망을 둠,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함 등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습니다.

 

6. 게으름

    여섯번째로 게으름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 마귀는 낙담의 마귀와 협력하여 일합니다. 이 거칠고 무서운 마귀는 항상 수도사를 공격하며. 한밤중에 습격하여 그를 해이해지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수도원과 동료 수도사들, 수도원 내에서 행하는 모든 일, 심지어 성경 읽는 것까지도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는 수도사에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만일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면 시간과 노력이 낭비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 외에도, 평소에는 사흘 동안 금식하거나 오랫동안 여행한 후, 또는 힘들게 일한 후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던 수도사로 하여금 한밤중에 배고픔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는 종종 형제들을 방문하여 도와주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또 살펴 주지 않는 한, 이 심각한 질병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만일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수도사를 빗나가게 하지 못하면, 마귀는 그를 깊은 잠에 빠뜨립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공격은 점점 더 거칠고 강해집니다. 기도하고, 무익한 말을 피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시험을 당했을 때 인내함으로써만 이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수도사가 이러한 무기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화살로 그를 쏘아 쓰러뜨려, 이 수도원 저 수도원으로 돌아다니며 게으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먹고 마실 것을 얻을 수 있는 곳만 생각하게 만듭니다. 게으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의 정신에는 헛된 분심만 가득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 것들의 함정에 빠지며, 점점 그것들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수도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질병이 정말로 심각한 것임을 알았고 또 우리 영혼에서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주된 원인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 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6-12).

바울은 게으름의 원인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잘못이 많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이란 존경심이 부족하고, 충동적으로 말하고 쉽게 남용하기 때문에 고요한 생활을 하기에 부적합합니다. 그는 게으름의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사람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들이 오만하다는 것, 그리고 사도들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또 그는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 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갔던 사람,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셨다"고 말한 사람(고전 9:14), 열방들의 교사, 복음의 선구자인 바울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을 태만히 하며 육체적으로 게으른 우리, 복음을 선포하는 하거나 교회를 돌보는 일은 맡지 못했고 다만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만 맡고 있는 우리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게으름에서 생겨나는 해악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 게으름에서 호기심이 생겨나고, 호기심에서 규모 없는 행동이 생겨나며, 규모 없이 행동하는 데서 온갖 종류의 악이 생겨납니다. 바울은 그 치료책으로서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하노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한층 더 강조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실어 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도의 명령을 토대로 하여 성장한 이집트의 거룩한 교부들은 수도사들, 특히 젊은 수도사들이 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도사들이 계속 일함으로써 게으름을 몰아내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뿐만아니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섬겼으며, 그러한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사라고 믿었습니다. 교부들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단 하나의 마귀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수천 마리의 악령들의 포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노련한 교부인 사부 모세(Abba Moses)가 나에게 해준 말을 기억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막에서 생활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에, 나는 매사에 열의가 없고 게으른 것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나는 사부 모세에게 가서 "나는 어제 게으름 때문에 크게 번민하고 약해졌는데, 사부 폴(Abba Paul)을 만나러 가서야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부 모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게으름에서 해방되기는 커녕, 그것에 완전히 복종하여 노예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자리를 떠났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인내와 기도와 손노동을 통해서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이 한층 더 심하게 공격해 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7. 자민심에 관하여

    일곱번째로 대적해야 할 마귀는 자만심입니다. 그것은 교묘하면서도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그것의 유혹을 받고 있으면서도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정념입니다. 다른 정념들의 도발은 쉽게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쉽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원수를 인식하면, 그것에 반박하고 기도함으로써 즉시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만심은 어려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행동-말하는 방법, 우리의 말과 침묵, 일, 철야와 금식, 기도와 독서, 고요와 인내 등-안에 나타나기 때문에 대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만심은 모든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군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것은 화려한 옷으로 사람을 유혹하지 못하면, 남루한 옷으로 유혹합니다. 명예를 가지고 그에게 아첨하지 못하면, 치욕처럼 보이는 일을 겪게 함으로써 우쭐대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게 하는 데 실패하면, 침묵을 통해서 그를 유혹하여 자신이 고요(stillness)를 성취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좋은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그를 유혹하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금식하도록 유혹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일, 모든 행동이 이 악한 마귀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를 자극하여 스스로 사제라고 상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내가 스케티스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어느 원로가 한 형제의 수실을 방문했습니다. 수실 문 앞에서 도착했을 때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로는 형제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서 밖에 서서 들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 원로는 형제가 자만심 때문에 정신을 잃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부제에 임명하고 세례문답자들을 해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로는 문을 열고 수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형제는 원로에게 인사를 하고는 오랫동안 문 앞에 서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원로는 미소를 지으면서 "자네가 세례문답자들을 해산시키는 일을 마칠 무렵에 도착했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는 원로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이 이 망상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마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어리석음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싸움에 참여하여 의의 면류관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 이 짐승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해야합니다.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은 다윗의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시 53:5). 그는 무슨 일이든지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상급을 구해야 하며,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자기를 자랑하려는 생각을 거부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만심의 마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8. 교만에 관하여

    우리가 대적해야 할 여덟번째 마귀는 교만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어떤 마귀보다 더 사납고 사악한 마귀입니다. 그는 우선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을 공격하며, 거룩함의 산에 거의 도착한 사람들을 파괴하려 합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몸의 한 부분만 아니라 몸 전체를 파괴하듯이, 교만은 영혼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영혼을 괴롭히는 다른 정념들은 각기 그것과 반대되는 하나의 덕을 공격하여 정복하려 하며, 영혼을 부분적으로만 괴롭히고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영혼을 완전히 어둡게 하고 완전한 파멸로 이끕니다.

이것이 의미를 보다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탐식(gluttony)은 극기를 파괴하고, 부정(unchastity)은 중용을 파괴하고, 탐욕은 자발적인 가난을 파괴하고, 노염은 온유함을 파괴하며,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악은 그에 상응하는 덕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교만이 불쌍한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면, 그것은 마치 큰 도시를 정복한 폭군처럼 행동하면서 영혼의 기초까지 완전히 파괴합니다. 교만함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이것을 증거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 되었고, 모든 덕과 모든 지혜로 치장되었지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또 다른 선지자는 같은 맥락에서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시 52:1)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하여 이 치명적인 교만의 영을 두려워하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룩함을 획득한 후에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라는 말을 되풀이 상기하며, 아울러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 주님을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근면하고 진지하고 단호한 사람이라도, 혈과 육에 얽매어 있는 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를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고 말했고, 사도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 4:7)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슨 권리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완전함을 이룰 수 있는 듯이 교만하게 행동합니까?

덕행에 대한 상으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천국에 들어간 강도는,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참 증인입니다. 거룩한 교부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결같이 완전한 거룩함은 겸손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겸손은 믿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온유, 그리고 모든 소유를 버림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것들에 의해서 완전한 사랑을 획득합니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