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티스의 교부들과 분별에 관하여

   

존 카시안John Cassain

      "로마인 카시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존 카시안(John Cassain)은 360년 경에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에 베들레헴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385-6년경에 그는 친구 게르마노스(Germanos)와 함께 이집트로 갔고, 399년까지 그곳에서 지내면서 에바그리우스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401년부터 405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부제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존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제자이자 열렬한 지지자가되었다. 405년에 서방으로 가서 몇 해 동안 로마에서 지내다가 고을(Gaul)로 갔다. 그는 로마나 고올에서 사제에 서임되었다. 415년 경에, 그는 마르세이유 근처에 두 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하나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 저서인 InstitutesConference는 425-8년 경에 라틴어로 저술되었다. 이 두 권의 저서에서, 카시안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받은 영적 가르침을 서방의 상황에 맞춰 개작하여 요약했다. 그의 저술들은 서방의 수도원운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성 베네딕트의 『규율집』(Rules)에서는 특히 그것을 칭찬하고 있다. 카시안은 435년 경에 사망했다.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기념하고 있으며, 그의 축일은 2월 29일이다.

성 니코디모스(St. Nikodimos)는 『필로칼리아』에 카시안의 주요 저서들 중 일부를 헬라어로 요약하여 수록했다.「여덟 가지 악에 관해서」는 Institutes 5 -12권에서 취한 것이고, 「스케티스의 교부들과 분별에 관하여」는 Conference 1-2권에서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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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티스의 교부들과 분별에 관하여

사부 레온티스를 위한 글

존 카시안(John Cassin, 독수도자 에바그리오스의 제자)의 글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1(서울: 은성, 2001), pp. 140-161.

      나는 복된 카스토르(kaster) 주교에게 거룩한 교부들의 삶과 가르침의 방식에 대한 기록을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은 "공주생활 제도에 관하여"(On Coenobitic Institutions)와 "여덟 가지 악덕에 관하여"(On the Eight Vices)라는 제목으로 그에게 글을 써 줌으로써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약속을 완전하게 실천하려 합니다. 그런데 카스토르 주교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을 지극히 거룩한 레온티우스(Leontios) 당신에게 보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카스토르의 고결한 성품을 물려받았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의 수도원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적 친구인 거룩한 게르마노스(Germanos)와 함께 수도사들이 모여 사는 중심지인 스케티스 사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게르마노스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 군대에 있을 때, 그리고 수도생활을 하면서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성인 같은 사부모세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나 영적 관상에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완덕에 이르는 방법을 말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간청하니,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여, 모든 덕과 모든 일에는 직접적인 목적이 있는 법입니다. 이 목적을 지향하며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들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농부의 직접적인 목적은 밭에서 가시와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뜨거운 여름 햇볕과 겨울의 추위를 참고 견디면서 밭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곡식의 열매를 수확하는 데 있습니다. 상인들은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을 가지고 바다나 육지에서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하지만, 그의 목표는 거기서 얻은 이윤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군인도 전쟁의 위험과 해외 근무의 어려움을 참고 견딥니다. 그의 목적은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발휘하여 높은 계급으로 승진하는 데 있지만, 그의 목표는 그 계급의 혜택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역시 나름의 직접적인 목적과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수고와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금식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철야하면서 즐거워하며, 기꺼이 성경을 읽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노동, 순종, 세상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사막에서의 생활 등을 즐거운 마음으로 행합니다."

"그대들은 이국 땅에서 우리처럼 거칠고 교양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조국과 가족,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대들이 이렇게 행하기 위해서 세운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우리는 "천국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부모세는 "그대들이 말한 목표는 옳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 확고하게 추구해야 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대들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목적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고 사부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직접적인 목적은 청결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잠시라도 우리 마음이 그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긴다면, 즉시 마음을 제자리에 가져와야 하며, 우리의 목적을 고려하여 생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직접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합니다. 우리는 청결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 조국과 가족과 재산과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 목적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비틀거리고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을 걸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처음 수덕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부와 재산을 포기했지만 후에 음식이나 의복이나 집이나 책 등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한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 때문에 부를 멸시합니다. 왜냐하면 부를 얻기 위해 싸우고 노염을 타는 우리의 기질을 자극하면 사랑에서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일에서 형제에게 노염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며, 따라서 세상을 버린 것이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복된 사도는 이것을 알고서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버리고 포기하는 즉시 완덕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완덕은 사랑을 획득한 후에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 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 (고전 13:4-5)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청결한 마음을 확고히 해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모든 일을 행하고, 재산을 멸시하고, 기꺼이 금식하고 철야하며, 영적 독서와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일 때문에 정상적인 금식과 독서를 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구실로 마음의 청결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금식에 의해 얻는 유익보다 노염이 주는 피해가 훨씬 크며, 독서를 통해서 얻는 유익보다는 형제를 멸시하거나 슬프게 함으로써 얻는 해악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금식과 철야, 성경 공부, 재산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함 등 자체는 완덕이 아니라 완덕에 이르기 위한 도구입니다. 완덕은 그런 것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획득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식이나 철야, 성경 공부, 가난 등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사랑을 성취한 사람은 내면에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며 그의 지성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거합니다."

이 말을 듣고 게르마노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습니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지성을 하나님께만 고정시켜 환자를 찾아보는 일, 손님 접대, 손노동, 피할 수 없는 육체적 욕구 등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특히,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신데, 인간의 정신이 어찌 항상 하나님만 바라며 그분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부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만 바라며 그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일은 육체 안에 있어 연약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관상하는 일은 여러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복되고 불가해한 존재 안에서 알려지는데, 이는 그것이 장차 임할 세대에 그의 성도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통해서, 날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의 의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 세대의 성도들에게 보여 주시는 이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 그리고 주무시지 않고 마음의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샅샅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할 때에, 경외심으로 가득차며, 그분에게 놀라고 그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빗방울들,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들을 세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의 본성과 지혜의 장대하심에 놀랍니다. 또 하나님의 말로 형언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지혜, 인류를 향한 사랑, 인간의 무수한 죄를 오래 참으시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망상에서 구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원수 마귀를 정복하신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택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노력과 정화의 정도에 비례하여 우리 안에서 성장합니다."

게르마노스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많은 개념이나 악한 생각들이 몰래 우리 안에 들어와서 눈에 뜨이지 않게 우리의 주의집중을 훔쳐 가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는 그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알아채기도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며 전혀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까?" 사부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신이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고, 물리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그것들을 몰아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마음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시편과 아가를 공부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며, 장차 임할 것-천국, 지옥 불,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염두에 둔다면, 악한 생각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일, 무의미하고 무익한 대화 등에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안에 천한 생각들이 증가할 것입니다. 방앗간 주인이 밀이나 가라지를 빻는 일을 선택할 힘이 있지만 풍차가도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우리는 정신에게 영적 묵상을 공급할 수도 있고 세상의 염려를 공급할 수도 있지만, 항상 움직이는 정신이 생각들을 소유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에 놀라며 더 많은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을 보고서, 사부는 잠시 말 없이 있다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말을 했는데, 아직도 더 많은 말을 듣기를 원하는군요. 그것을 보니 당신들이 정말로 완덕에 대한 가르침을 갈망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분별이라는 특별한 덕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분별은 일종의 성채나 덕의 여왕입니다. 이것의 장점과 가치에 대해서 나 자신의 견해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귀중한 가르침을 말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듣는 자들의 성품과 갈망에 비례하여 교사들에게 은혜를 채워 주십니다.

분별은 결코 작은 덕이 아니며,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은사들 중 하나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그는 성령의 은사들을 열거한 후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고전 12:11)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분별의 은사가 세상적인 것이거나 하찮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가장 큰 은사입니다. 수도사는 부지런히 힘을 다하여 이 은사를 구해야 하며, 자기에게 들어오는 영들을 분별하여 바르게 평가하는 능력을 획득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속을 방황하다가 더럽고 사악한 구덩이에 빠질 뿐만 아니라, 길이 곧고 평탄할 때에도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젊어서 테바이드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복된 안토니가 살고 있었는데, 몇 명의 원로들이 안토니에게 찾아와서 완덕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모든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수도사가 마귀의 올무와 속임수에 걸려 해를 받지 않게 해 주는 덕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나서 원로들은 각기 자신의 지식에 따라 자기의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과 철야는 정신을 정화시켜 주기 때문에, 금식하고 철야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쉽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신은 자발적인 가난과 개인적인 재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통해서 세상의 염려라는 복잡한 실타래에서 해방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이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긍휼이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려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4-3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가장 쉽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해 주는 덕에 대해 각기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며 토론하는 동안 밤이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안토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다고 간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금식과 철야를 해온 사람들, 사막에 들어가 생활한 사람들, 또는 가난을 실천하여 매일 생명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아주 후하게 긍휼을 실천하여 이제는 구제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행한 수도사들마저도 비참하게 덕에서 이탈하여 악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곧은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에게 분별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별의 덕은 무절제하게 극기하거나, 무관심하고 태만하지 말고 지름길을 걸어가라고 가르칩니다. 분별은 영혼의 눈과 등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마 6:22-23)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발견합니다. 분별력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세밀하게 조사하면서 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을 구별하여 밀어내어 그를 망상에서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분별의 눈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어두웠고, 그는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사무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 했고, 그 때문에 폐위되었습니다. 만일 사울에게 분별력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삼상 13:8-9 참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5)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은 이 덕을 '해' 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별력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시 104:15) 신령한 포도주도 마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분별력 안에는 지혜, 지적 작용, 지각력 등이 연합되어 있는데, 이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내면의 집을 세울 수 없고, 영적 부를 모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 24:3-4)고 말합니다. 분별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장성한 자에게 적합한 단단한 식물'이라고도 불립니다(히 5:14). 이 성경 구절들은 분별의 은사가 없으면 어떤 덕도 끝까지 지탱하거나 확고히 보존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분별은 모든 덕의 어머니요 수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안토니의 말인데, 그 내용은 다른 교부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 안토니가 말한 것을 우리 시대의 모범에 의해서 확인하려면 사부 히론(Abba Hiron)의 일을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목격한 대로, 며칠 전에 그는 마귀의 미혹을 받아 수덕적 상태의 절정에서 사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수도사들보다 더 거친 사막에서 대단히 엄격하고 철저한 극기 생활을 하면서 약 5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오랫동안 크게 수고하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타락함으로써 인근에 있는 교부들과 형제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에게 분별의 덕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덕이 그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말고 교부들과 형제들의 충고를 따르라고 가르쳐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따라 금식하고 혼자 고립하여 지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찬을 받기 위해 교회에도 가지 않았고, 교부들과 형제들을 만나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대충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을 먹고 지내면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려 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외고집에 미혹되어 있었던 사부는 사탄의 사자가 등장했을 때에 그를 빛의 사자라고 여겨 그 앞에 절했습니다. 한밤중에 나타난 사탄의 사자는 그의 큰 덕과 금욕적인 노력 때문에 결코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깊은 우물에 뛰어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정신은 흐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는 자가 누구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우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우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발견한 형제들이 그를 건졌지만 그는 이미 반 죽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틀 후에 숨을 거둠으로써, 형제들과 파프누티오스(Paphnoutios) 사제를 크게 슬프게했습니다. 히론이 사막에서 생활한 오랜 세월과 많은 노력을 기억하고 그를 불쌍히 여긴 파프누티오스 사제는 그가 자살한 사람들 가운데 속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복된 안토니가 살았던 테바이드 사막 너머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본질에 속하는 것인지 식별할 수 없는 생각의 충동을 받아 개간되지 않은 광대한 사막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제공하는 음식은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시는 것만 받아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굻어 쇠약해진 상태로 사막을 방황하다가 마지케 족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마지케 족은 다른 야만족보다 훨씬 사납고 거친 종족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본래의 사나운 성품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껴, 그들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한 형제는 분별력을 회복하여, 하나님이 감동하시지 않았으면 거칠고 사나운 그들이 자기들을 동정하여 음식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빵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는 인간이 제공한 것이라는 이유로 빵을 받아 먹지 않고, 분별력이 없는 판단을 고집하여 굶다가 쇠약해져서 죽었습니다.

두 명의 수도사 모두 처음에는 판단력이 부족하여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 중 한 수도사는 분별력을 회복하여 무모하게 세운 결정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어리석고 무분별한 계획을 고집하다가 주께서 막으려 하신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지금 생존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수도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렵니다. 그는 종종 마귀를 천사로 여겨 영접하고 그에게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가끔 수실에서 등불 빛 같은 것을 보곤 했습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이 마귀는 그에게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예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칼을 갈며 그를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결박할 밧줄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 도망쳤기 때문에,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수실에서 나오지 않고 지내면서 극기하며 생활해온 메소포타미아인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금욕과 덕행은 그 지역의 다른 모든 수도사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귀가 준 꿈과 환상에 미혹되어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로 되돌아갔습니다. 마귀는 그를 미혹하기 위해서 종종 장차 실제로 실현될 꿈을 보여 줌으로써 궁극적인 미혹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마귀는 치욕에 둘러싸여 풀이 죽은 사도들 및 순교자들과 함께 낙담과 슬픔 때문에 약해진 기독교인들의 모습, 그리고 빛으로 둘러싸여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모세와 선지자들과 함께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유대인들의 축복과 기쁨에 동참하고 싶으면 할례를 받으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는 이 유혹에 넘어가서 그대로 행했습니다. 만일 분별의 은사가 있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미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게르마노스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요즈음에 있었던 이러한 본보기들과 과거의 교부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분별이 모든 덕의 근원이요 뿌리요 정상이요, 그것들을 이어주는 유대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는 방법,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분별력과 마귀에게서 오는 거짓된 분별력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사부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참된 분별력은 오직 참된 겸손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임하며,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원로들의 말을 따르며, 그들의 판단을 선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영적 아버지에게 드러내 보일 때에 참된 겸손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행하면, 수도사는 참된 분별로 말미암아 해를 입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의 판단과 지식을 토대로 하여 생활을 조정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분별의 은사가 주어지기 전에, 자신의 비열한 생각을 공공연하게 교부들에게 드러내는 행동은 그들을 연약하게 만듭니다. 뱀을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가져다 놓으면, 도망치고 숨으려 하듯이, 우리가 악한 생각들을 성실하게 고백하여 공개하면 그 생각들은 우리에게서 떠나려 합니다.

"이 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부 세라피온(Abba Serapion)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과거에 행한 일에 대해 말해 주곤 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영적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마다 구운 빵을 숨겨 가지고 나와서 몰래 먹곤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극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부끄러워서 아버지께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연히도 몇 명의 형제들이 사부를 찾아와서 자기들의 생각에 대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사부께서는 수도사가 자기의 생각을 영적 아버지에게 숨기는 것은 수도사 자신에게는 매우 해로운 일이요 마귀가 크게 기뻐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부께서는 극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범한 나의 잘못을 사부님께 보여 주셨다고 생각하고 가책을 받은 나는 주머니에게 훔쳐두었던 빵을 꺼내어 던지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고 장래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때에 사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네가 고백했기 때문에 너는 해방되었다. 네가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는 너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너는 감추던 것을 털어놓음으로써 그 마귀를 죽였구나. 지금까지는 네가 마귀를 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가 너의 주인이 되었었다. 그러나 네가 마귀를 마음 밖으로 몰아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마귀가 네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사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내 가슴에서 등잔 불 처럼 생긴 마귀의 에너지가 나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방 안을 악취로 가득 채웠기 때문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유황 덩어리가 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사부께서는 '주께서 이 표식을 통해서 나의 말과 너의 구원을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의 고백의 결과로서 탐식이라는 정념과 마귀의 에너지는 나에게서 떠나갔고, 나는 다시는 그러한 욕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부 세라피온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자기 정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규칙을 신뢰할 때에 참된 분별의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수도사로 하여금 교부들의 권면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과 욕망을 따르게 함으로써, 다른 잘못을 범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도사를 파멸의 가장자리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인간의 예술과 학문이 제공하는 본보기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를 들을 수 있는 것을 다루지만, 우리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우리를 제대로 가르치고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어려운 영적 기술을 배우는 데 교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청결한 마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기술이며, 거기서 실패하면 일시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멸망하고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게르마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의 생각을 경청하지 않는 교부들은 종종 그들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죄하여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해로운 사건에 대한 핑계를 제공해 줍니다. 시리아 지방에서 이러한 종류의 사례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형제가 그 지방에 사는 원로 한 사람에게 자기가 품고 있는 은밀한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은 원로는 즉시 형제가 그처럼 비열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사실을 책망하고 화를 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원로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부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그대의 생각을 교부들에게 숨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그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그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사람들을 대하듯이 하지 말고 분별력을 가진 영적 스승으로 대하면서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을 지도자로 여기며 자기의 생각을 털어 놓지만, 고백을 받는 사람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치유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낙심합니다. 매우 열심이지만 부정의 마귀에 의해 크게 시달리고 있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교부에게 가서 자기의 은밀한 생각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미숙한 이 교부는 그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그러한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비열하고 수도생활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낙심한 형제는 수실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가장 경험이 많은 원로인 사부 아폴로스(Abba Apollos)가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사부 아폴로스는 잔뜩 긴장하고 낙심한 그를 보고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형제는 너무나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로가 계속 설득하였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가끔 악한 생각에 시달리기 때문에 원로에게 가서 그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원로께서 나에게 구원의 소망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포기하고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부 아폴로스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놀라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아라. 이렇게 늙었지만, 나도 여전히 그러한 생각에 시달리고 있단다.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라.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치유된단다. 부디 오늘은 수실로 돌아가서 지내거라.' 형제는 그의 말대로 했습니다. 형제와 헤어진 아폴로스는 형제를 낙심하게 만든 원로의 수실을 찾아가서 수실밖에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 원로로 하여금 그 형제와 같은 싸움을 겪게 하셔서, 지금까지 배우지 못한 것을 경험하여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마귀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그는 수실 가까이에 서 있던 검은 것이 원로에게 화살을 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원로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격을 견디지 못한 원로는 결국 수실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젊은 수도사가 갔던 길을 걸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사부 아폴로스는 그의 앞을 막아서서,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아폴로스가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사부 아폴로스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수실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장차 당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당신에게 관심을 갖거나 멸시하지 않았고, 당신과 싸울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싸움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단 하룻 동안도 그의 도발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흔한 원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젊은 형제가 당신을 찾아왔을 때, 당신이 그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게 하지 않고 절망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신은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말라' (잠 24:11)고 한 지혜로운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상한 갈대를 꺾지 말고 꺼져 가는 불도 끄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비유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마 12:20).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원수의 음모를 견뎌내거나 본성의 무서운 소용돌이를 가라앉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긍휼하게 여기시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당신을 치신 채찍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합시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가 손으로 고치십니다.'(욥 5:1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6-7). 사부 아폴로스가 이렇게 말하고 기도하니, 원로에게 가해지던 공격은 즉시 멈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부 아폴로스는 하나님께 '학자의 혀를 주사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해 달라'(사 50:4)고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분별력의 은사를 받은 교부들에게 자신의 은밀한 생각을 고백하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보다는 그들의 지도를 받아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확실한 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약간 무식하거나 경험이 부족한 원로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해서 정말로 자격이 있는 교부들에게 고백하기를 망설이거나 조상들의 전통을 멸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교부들이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서, 그리고 영적인 길을 오랫동안 여행해온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는 전통을 물려준 성경의 감화를 받아서 이러한 말을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사무엘의 이야기에 의해 입증됩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어머니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져 하나님과 교제해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지만, 제사장 엘리에게 가서 하나님께 대답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과 지시를 받았습니다(삼상 3:9-10).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사무엘을 부르시면서도, 사무엘이 제사장의 가르침과 교육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사무엘을 본받아 겸손에 이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부르셨을 때에, 단번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완전함의 길을 알려 주실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아나니아에게 보내시면서 그에게서 진리의 길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행 9:6). 주님은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 진보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환상을 잘못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제넘게도 각자가 교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울처럼 하나님에 의해 직접 진리에 입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지금 여기서 말한 것과 사도바울의 행동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한 것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2)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행한 기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성령의 은혜가 그와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사도들의 충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을진대, 누가 교만하고 거만하게 자신의 판단이나 견해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적 아버지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만 완덕의 길을 계시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며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

그러므로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분별의 은사를 얻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교부들이 말했듯이, 지나친 것은 해로운 것입니다. 지나친 금식도 과식하는 것만큼 위험하며, 잠을 너무 자지 않는 것도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는 것만큼 위험합니다. 내가 아는 수도사들 중에는 탐식에 굴복한 사람들도 많지만 무절제하게 금식하다가 몸이 약해져서 결국 탐식하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 자신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음식을 엄격하게 통제해왔기 때문에 2-3일 동안 금식해도 배고픈 줄 모르고 계속 금식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귀의 간계 때문에 불면증에 걸려 여러 날 밤을 잠을 자지 못하던 나는 하나님께 잠을 자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나는 탐식이나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잔 것 때문이 아니라 무절제한 금식과 불면증 때문에 큰 위험에 처했었던 것입니다. "사부 모세가 이러한 가르침으로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경외하는 자에게 큰 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