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적 설교
(Ascetic Discourse)

St. Neilos(금욕 고행자 닐루스)의 글.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1 (서울: 은성, 2001),pp. 336-406.

   금욕고행자인 성 닐루스(St. Neilos)는 5세기 초에 안카라 근처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었으며, 430년경에 사망한 듯하다. 그는 존 크리소스톰의 제자였을 것이다. 닐루스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원래 콘스탄티노플 출신이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통치 때에(379-95)콘스탄티노플의 총독으로 있다가 은수사가 되어 시나이 근처에서 생활했다. 사실상 그를 시나이 반도와 연결지을 훌륭한 근거는 없는듯하다.

   닐루스의 수덕적 설교는 영적인 아버지와 그 제자들의 관계에 관한 귀중한 글이다. 이 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는 그의 다른 저술에서, 닐누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다. 닐루스는 자기보다는 어린 동시대 사람 포티케의 디아도쿠스와 함께 예수기도를 분명하게 언급한 최초의 저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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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적 설교
(Ascetic Discourse)

   많은 헬라사람들과 적잖은 유대인들이 철학적으로 사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를 추구해온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친히 본을 보여 따라가야 할 삶의 길을 보여 주시는 지혜(Wisdom)를 교사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사람들은 무대에 선 배우들처럼 가면을 씁니다. 그들은 이름만 철학자일 뿐 참된 철학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외투, 수염, 지팡이 등으로 자신의 철학적 소명을 나타내지만, 몸을 제멋대로 내버려두며, 욕망을 주인으로 섬깁니다. 그들은 탐식과 욕정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노염에 복종하며 영광을 받으면 흥분하고, 개처럼 많은 음식을 삼킵니다. 그들은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하며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도 그로 인해 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욕과 쾌락의 노예가 되면, 치욕과 큰 조롱이 임합니다.

   일부 헬라인들은 자신이 형이상학에 종사한다고 상상했지만, 덕의실천을 완전히 등한히 했습니다. 어떤 점성술사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며 하늘의 크기와 태양의 차원과 별들의 운행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곳에 진리가 놓여 있으며 그것에 대해 추측하는 것이 위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진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생활하면서, 진흙탕에서 뒹구는 돼지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자기의 원리를 실제에 적용하려 하면서, 이론을 세우는 데 그치는 사람들보다 더 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들의 영광과 칭찬을 얻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데에만 있었으며, 값싼 칭찬을 얻기 위해서 어려움도 참고 견뎠습니다. 만일 내세의 보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침묵하며 채소만 먹고 거친 털로 짠 낡은 옷을 걸치고 나무로 만든 통 속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덕에 대한 상급이 현세에만 주어진다면 우리는 일평생 보상이 없이 수고하고 땀 흘리면서 결코 상이 주어지지 않는 곳에서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한편, 철학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요나답의 후손인 레갑 족속(렘 35:6 참조)-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따르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항상 포도주와 모든 사치품들을 삼가면서 천막 안에서 생활합니다. 그들은 검소하게 먹고, 육체적인 욕구 충족도 절제합니다. 그들은 덕의 실천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 그들에게 붙여진 "엣세네파"라는 명칭이 보여 주듯이 관상에도 큰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자신의 소명에 어긋나는 것들을 피하면서 철학의 목표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관이시며 상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이처럼 열심히 금욕적인 경쟁을 하여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소득이 없이 수고하며, 철학의 참 목표에 이르지 못합니다.

   철학은 실제와 관련된 참 지식의 원리와 결합된 도덕적 고결함의 상태입니다. 유대 인들과 헬라인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거부했고 삶과 가르침으로 참된 철학을 계시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없이 철학적으로 사색하려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처음으로 깨끗한 삶에 의해서 참된 철학의 길을 확립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영혼을 육체의 정욕 너머에 보유하셨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획에 죽음이 요구되었을 때에 자기영혼까지 포기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시면서, 참된 철학자는 삶의 즐거움을 모두 포기해야 하며 정욕과 고통을 제어하며, 몸에는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거룩함에 필요할 경우에는 기꺼이 영혼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이러한 생활방식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을 부인하고 조국과 친척과 재산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힘든 생활 방식을 채택하여, 온갖 종류의 역경에 직면하고 고난과 고문과 괴롭힘을 당하고, 벌거벗고. 심지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건도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모든 면에서 신실하게 교사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담대하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서 가장 고귀한 생활 방식의 본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모범으로 삼아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행하려는 의지나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란함을 초월하며 도시의 떠들썩함을 피할 힘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소란함에서 도피하여 수도생활을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사도적 덕을 재현했습니다. 그들은 재산보다 자발적인 가난을 선호했는데, 이는 그것이 그들을 분심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념을 다스리기 위해서, 풍성한 식탁보다는 쉽게 얻어 간단히 준비된 음식으로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운 옷차림을 거하고, 몸을 가리는 데 필요한 지극히 수수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일보다 세상적인 염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철학을 버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정념들을 초월했기 때문에 세상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착취하여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또 서로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공평한 재판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궁핍하게 지내는 동안 부유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없었고, 굶주리는 형제가 있는데 과식하는 형제도 없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궁핍한 사람들을 후히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불평등은 존재했지만, 이렇게 편차를 제거하고 평등함과 공평함을 확립하면서서로 나누어 사용하려는 태도는 오늘날처럼 사회적인 지위를 얻으려는 미친 듯한 노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검소하게 살려는 큰 갈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질투, 악의, 오만, 거만 등과 아울러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이 추방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악한 정념들에 대해서 죽거나 무감각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날마다 금욕하고 인내하면서 그것들을 철저히 거부했기 때문에, 내적인 안정을 얻었고, 그것들에 대한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어둠 속을 비추는 불빛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캄캄한 인생의 밤을 비추어 주는 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항구의 방파제였습니다. 그들은 정념들의 도발에서 해를 입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솔한 사람들이 다시 모방함으로써 이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방식은 차츰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정념을 갖지 않는 천사들의 상태에 동참함으로써 천사처럼 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세상에 대해서 죽고 이 덧없는 삶과 순수히 인간적인 한계들을 부인했지만, 여전히 다시 타락하고 뒷걸음질 치곤 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염려와 부끄러운 욕심 때문에 참된 수덕생활을 소홀히 해왔고, 그 때문에 진정한 성성(聖性)을 지니고 있어 공경받아야 할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도복을 입고 "손에 쟁기를 잡고" 있지만,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거나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뒤를 돌아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눅 9:62 참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또 과거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고요함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참된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많은 일을 선호합니다. 물질적인 소유물을 위해 경쟁하다 보면 주님의 권고를 망각합니다. 주님은 세상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늘나라를 구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마 6:33 참조), 그런데 우리는 고의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일을 행하면서 주님의 명령을 무시해왔고, 주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해왔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주님은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시면서. 주머니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약속에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0:10). 우리는 자신이 가진 어떤 수단보다 이 약속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계속 많은 땅을 모아들이고 있으며, 양떼와 훌륭한 소와 살찐 당나귀들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양은 양털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요, 소는 밭을 경작하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며, 소 자신과 다른 짐승들이 먹을 꼴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며, 당나귀는 우리나라에 부족한 물건과 사치품들을 외국으로부터 운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관심을 집중해야 하며 하나님을 기억해야할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최고의 수익을 제공해주는 일을 택합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실 수 없다거나, 우리 자신이 소명의 헌신을 성취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일을 추구하며 때로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방식을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수덕의 길을 이익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하며, 거짓된 경건을 통해서 힘든 일을 피하고 보다 넓은 범주에서 망상적인 쾌락에 빠져 지내기 위해서 과거에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축복된 생활이었던 삶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을 비방하며, 때로는 영성생활이 겸손과 온유한 삶이 아니라 공격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 상급자들을 비방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거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매하는 일에 개입하여 지내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는 커녕 무익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지금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해 주는 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입고 있는 수도복입니다. 우리는 금욕적인 노력을 거부하면서도, 금욕생활을 한다는 명성을 얻기만 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겉치레의 연극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영혼에 뭍은 얼룩들을 씻어 내거나 과거의 죄가 그의 정신에 찍어 놓은 흔적들을 지우지 않은 채 수도복을 입습니다. 그는 이러한 죄들이 속삭이는 환상들 속에서 육욕적인 즐거움을 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성품을 자신의 소명에 합당하게 훈련하지 않았으며, 거룩한 철학의 목적을 파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리새인처럼 거만하여 자기가 입은 옷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는 사용법도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도구를 가지고 돌아다닙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차림에 의해서, 실제로는 전혀 맛보지 못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항구가 아니라 절벽이요, 성전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이요, 양이 아니라 늑대로서, 그의 겉모습에 현혹된 사람들을 멸망하게 만듭니다.

   그런 겉치레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내에서의 엄격한 생활을 참고 견디지 못하여 난봉꾼들처럼 떼를 지어 도시로 도망칩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겉으로 경건한 체하여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합니다. 사람이 게으를 때에 육체의 욕구가 가장 강력하고 독창적입니다. 그들의 기술은 점점 독창적이고 교활해집니다. 그들은 기생충처럼 부자들에게 매달리며, 노예처럼 부자들이 나아가는 길에서 사람들을 몰아내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춥니다. 그들은 탐식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끼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합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자신의 대변을 파묻기 위해서 사용할 삽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습니다(신 23:13 참조). 그들은 탐식하면 배가 점점 더 고파진다는 것, 그리고 현재 수중에 있는 음식으로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부끄럽고 문란한 식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기는커녕 불쾌감을 주며, 하나님의 이름과 수덕 생활을 모독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 수덕자들이 획득한 것을 속임수로 간주합니다. 도시에는 방랑하는 수도사들이 가득한데, 사람들은 이러한 수도사들이 거지보다 더 염치없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합니다. 사람들의 집에 들어간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잠시 자신의 악한 계획을 감추고 경건한 체하며 지내다가 주인의 물건을 훔쳐 도망침으로써 수도사들 전체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옛 수도사들은 자제와 극기를 가르쳤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요소로 간주되어 도시에서 추방되며, 문둥병자처럼 외면당합니다. 사람들은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도둑이나 강도들을 더 신뢰하려 하며, 말 솜씨가 좋은 사기꾼들보다 흉악한 죄수들을 막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수도사들은 수덕생활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며 고요의 소중함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그들은 수도생활 안에 무엇이 포함되는지 알지 못한 채 어떤 압력 때문에 수도생활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수도생활을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간주합니다. 그들이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 두려면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신령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수도복에 의해서 염치를 느껴 엄청난 탐욕을 억제하려면, 육체를 억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종한 그들은 안락한 생활이 지나친 욕구들을 길러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만성적인 병을 앓는 사람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계속 병치레를 해온 사람에게 건강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병약한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불행이라고, 또는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라고 간주합니다. 충고를 받아들일 의도가 없는 사람에게 충고해주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특히, 어떤 종류든지 이익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거룩을 갈망하면서 세상적인 생활과 그 욕망들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약속한 우리가 어찌 다시 세상의 어지러운 것들에 얽혀들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미 파괴했던 것을 다시세울 수 있겠습니까? 어찌 소명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헛되고 하찮은 것들을 추구하면서 연약한 형제들의 욕망에 불을 붙이고 그들에게 탐심을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쉽게 현혹되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악을 행하게 하지 말며, 우리의 즐거움보다 그들의 유익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무분별한 충동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우리보다 더 단순한 형제들이 더욱 세심하게 행동하도록 도와주며, 세상적인 염려에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의해서 형제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물질을 멸시하라고 가르침을 받아온 우리가 왜 물질을 소중히 여깁니까? 왜 돈과 재산에 집착하며, 무익한 염려에 정신을 기울입니까?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것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소홀히 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릅니다. 스스로 철학자라고 공언하며 쾌락을 초월했다고 자랑하는 우리가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물질적인 유익을 추구한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우리의 악한 방법을 본받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한다면, 우리는 가장 큰 벌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철학의 이름을 더럽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만드는 악한 행동을 고치십시오. 그렇지 못하겠으면 철학자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참된 철학자는 영혼의 순결을 위해서 육체적인 염려에서 이탈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많은 것을 소유합니다. 만일 당신의 목표가 물질적인 부와 쾌락이라면, 왜 멋진 말 뒤에 당신의 행동을 숨기고 철학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면서도 철학을 존중하는 체 합니까?

   우리는 물질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을 범하여 세상 속에서 살며, 그 때문에 우리가 멸시하는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말다툼을 할 때면, 그들은 "주의 종들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고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돈과 재물을 놓고 분쟁할 때면 그들은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마 5:40)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행동과 소명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우리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분쟁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어떤 사람의 우리의 포도원 경계를 허물고 자기 땅으로 삼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자기의 동물을 포도원 안에 풀어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누군가가 우리 밭의 수로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제력을 완전히 잃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까? 그런 경우에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피조물에 대한 관상에 몰두해야 하는 우리의 지성이 소송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관상하는 능력을 세상적인 잔꾀에 기울여야 합니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우리 것으로 삼으려 하고, 물질이라는 족쇄로 우리를 내리누르며, 선지자의 저주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자여"(합 2:6). 예레미야의 말처럼 우리를 잡으려고 쫓아오는 사람들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릅니다"(애 4:19). 그런데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을 무겁게 지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쫓아오는 탐심이라는 원수에게 쉽게 잡힙니다. 바울은 탐심에게서 도망치라고 가르쳤습니다(골 3:5).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되도록 빨리 달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우리를 잡아챌 것입니다.

   거룩함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큰 장애물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입니다. 그것은 종종 몸과 영혼을 멸망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사람 나봇이 무엇 때문에 죽었습니까? 그의 포도원이 이웃에 살고 있는 아합의 질투심을 유발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까(왕상 21 :1-6)?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약속된 땅 밖에 머문 것은 그들의 많은 가축 때문이 아니었습니까(민 34:15)? 롯과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헤어졌습니까? 그들의 가축들이 많아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기 때문이 아닙니까(창 13:5-11)?

   이처럼,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됩니다. 재산은 가족들을 불화하게 하며, 친구들이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다음 세상에서는 재산이 필요 없으며, 현세에서도 크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고 헛되고 하찮은 일에 몰두합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움이 없이 모든 축복을 섭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불어 버렸느니라"(학 1:9)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얻은 소득이 무엇이었습니까? 한편 의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밭을 경작하지 않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바다로부터 메추라기가 날아오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고(출 16장 참조),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출 17:6). 또 40년 동안 그들의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습니다(신 8:4). 엘리야가 숨어 있는 그릿 시냇가에 경작하는 밭이 있었습니까?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까(왕상 17:7)? 그가 사르밧으로 갔을 때, 가난한 과부가 아들이 먹으려는 떡을 엘리야에게 주지 않았습니까(왕상 17:10-16)?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추구하지 말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들이 이상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사람이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한 끼를 먹고서 힘을 얻어 40일 동안 여행했습니다(왕상 19:8). 모세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80일 동안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40일이 지난 후 산에서 내려온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보고 크게 노하여, 율법이 새겨진 돌 판을 깨뜨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지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돌판을 받은 후에, 그는 다시 백성들에게로 내려왔습니다(출 24:12- 18; 31:18-34:35). 인간의 지성으로 이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날마다 소진되는 기력을 보충해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의 몸이 생존했습니까? 이 수수께끼는 거룩한 말씀에 의해서 해결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그런데 우리는 왜 수도적인 거룩한 생활방식을 세상으로 끌어내리며, 물질적인 염려 속에 파묻혀 지냅니까? 왜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우리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고 있습니까(애 4:5)? 찬란하고 불같은 생각들로 기운을 회복할 때에, 우리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지만, 이 상태를 버리고 물질에 탐식할 때에는 거름더미를 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선물들을 자신의 솜씨라고 여깁니까? 욥은 자기의 가장 큰 죄는 자기의 손에 입맞추려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욥 31:7), 우리는 그렇게 행하면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손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면서 손에 입 맞추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면서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며"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은 가증하다"고 말합니다(레 11:27,42 참조).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자기의 솜씨를 의지하며 그것에 모든 소망을 두는 사람을 가리키며, "네 발로 걷는 것"은 감각적인 것을 신뢰하며 끊임없이 지성을 미혹하여 그것들에 대해 근심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며, "여러 발"은 물질에 집착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런 까닭에, 잠언의 저자는 상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두 발이 아니라 한 발을 소유하며 물질에 관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너는 이웃 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잠 25:17).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친구라'(요 15:1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친구들을 근심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에 관해 그리스도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친구들을 귀찮게 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이러한 육체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지내면서 땅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며, 어떻게 정죄를 피하겠습니까? 우리의 두 다리는 몸 전체를 지탱해 주며, 다리를 조금 구부리면 위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잠시 분별하는 기능을 구부린 후에는, 다시 세상적인 생각들로부터 이탈하여 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저급한 충동에 탐닉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똑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욕구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이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다"(겔 1:7)고 한 의도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전망이 굽힘이 없이 견고하고 영적인 것들을 향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람들에게는 구부러지는 다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몸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어떤 때는 영혼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영혼은 하늘나라의 권세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그들과 함께 하늘에서 지내야 합니다. 몸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물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식을 경험한 사람이 쾌락을 추구하면서 항상 땅을 기어다니는 것은 더럽고 품위를 저하시키는 일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네 발로 걷는다고 해서 부정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다만 그가 계속 그렇게 행동할 때에만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자신의 육체적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암몬 사람과 싸울 때에 손발(네 발)로 붙잡고 올라감으로써 승리했지만(삼상 14:13),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기어다니는 뱀과 싸울 때에 잠시 기었지만. 곧 일어나서 대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스보셋의 이야기는 육체적인 일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감각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보셋은 여인을 문지기로 세워 두고서 침실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레갑의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그 여인이 졸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에게 들키지 않고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였습니다(삼하 4:5-8). 육체적인 관심이 세력을 발휘할 때에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지성, 영혼, 그리고 감각-이 잠을 잡니다. 밀을 키질하면서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이성이 육체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상적으로라면 군대의 호위를 받고 많은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할 왕의 방을 어떻게 한 여인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왕이 그 여인에게 밀을 키질하는 일을 시킬 정도로 가난할 수 있겠습니까? 종종 하나의 이야기에 있을 법 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심오한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 사람의 내면에는 지성이 왕처럼 거주하고 있으며, 이성은 감각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이성이 육체적인 일에 관여할 때-밀을 키질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일을 의미합니다-원수는 어려움이 없이 들키지 않고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지성을 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쉽게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브라함은 문을 지키는 일은 여인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감각은 감각적인 것들을 즐기기 때문에, 지성으로 하여금 분명히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육욕적인 즐거움에 동참하도록 설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친히 장막 문에 앉아서, 세상적인 염려로 이르는 길을 차단하고 거룩한 생각 속으로 자유로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창 18:1 참조).

   우리가 세상적인 것을 위해 수고하여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 아닙니까(전 6:7)?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딤전 6:8),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우리의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질문했듯이, 우리는 왜 "바람을 잡으려고"(전 5:16) 끝없이 수고합니까? 세상 일에 대해 근심하면, 영혼이 거룩한 축복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 육체에게 필요이상의 돌봄과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육체에게 해로운 것을 공급하여 우리의 원수로 만듭니다. 그리하여 육체는 전쟁에서 동요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멋대로 행동하면서 명예와 상급을 얻으려하며 영혼을 대적하여 싸웁니다. 우리가 무한히 이어지는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핑계로 사용하는 기본적인 육체적 필수품은 무엇입니까? 빵과 물입니다. 두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하여 쉽게 빵을 얻을 수 있고, 샘에서는 물이 넉넉히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분심을 거의 겪지 않으면서 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의복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유행을 따르지 말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아주 가는 실로 짠 천이나 아마나 비단으로 만든 옷이나 자주색 옷을 입었습니까? 창조주께서 그에게 가죽 옷을 입고 밭의 채소를 먹으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까(창 3:l8,2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육체에 필요한 것에 한계를 두셨는데, 그것은 오늘날 문명세계의 몰염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지금 나는,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면,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분께서 분명 우리를 위해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예비해 주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거에 의해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 요청을 받았을 때에 필요한 것을 주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힘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한 야만적인 바벨론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거룩함을 존경하여(렘 40:4-5), 육체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할 그릇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야만인이 아닌 우리의 동포들은 우리의 선에 대해 감사하며 거룩함을 찬양하고, 수덕생활을 존경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본성적인 연약함 때문에 수덕의 길을 따르지 못하지만, 그들은 이 길을 존중하며, 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무엇이 수넴 여인으로 하여금 엘리사를 위해 방을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비치하게 만들었습니까(왕하 4:10)? 엘리사의 거룩함이 아니었습니까? 온 나라가 가뭄으로 궁핍할 때에 과부가 자기 자신보다 선지자 엘리야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만일 그 과부가 엘리야의 영적 지혜에 놀라지 않았다면, 자기와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엘리야에게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부는 자신이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각오를 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사람들은 용기와 인내, 그리고 이 세상 일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적은 것에 만족함으로써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여, 몸이 없는 천사들과 흡사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겉모습은 눈에 뜨이지 않고 하찮아 보였지만, 세상의 가장 최대한 통치자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담대하게 군주들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어떤 무기나 힘을 의지하고서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다'(왕상 18:18)고 아합 왕을 책망했습니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거룩함뿐인 모세가 어떻게 바로 왕에게 저항할 수 있었습니까(출 5장 참조)? 이스라엘과 유다의 군대가 전쟁하러 모였을 때, 어떻게 엘리사가 여호람에게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왕하 3:14)라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왕의 분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때에 왕의 정신이 혼동되고 불안하면, 왕은 이유 없이 불끈 화를 낼 것입니다. 거룩함으로 성취되는 것을 세상 임금이 성취할 수 있습니까? 엘리아의 외투로 강을 가른 것처럼, 왕의 자주색 옷으로 강을 가를 수 있었습니까(왕하 2:8)? 사도들은 손수건으로 병자들을 고쳤는데, 왕의 면류관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행 19:12 참조)? 어느 고독한 선지자가 왕의 불법한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성난 왕은 손을 펴서 선지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그 손이 말라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왕상 13:4). 여기에서는 거룩함과 왕의 권세 사이의 싸움이 있었는데, 승리는 거룩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선지자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몰아낸 것은 거룩함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그의 믿음이 작용했습니다. 왕의 연합군은 그 싸움의 재판관으로 서 있었고, 굳어 버린 왕의 손은 거룩함이 승리했음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몸과 그 욕구를 등지고 오직 영혼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들보다 탁월해졌습니다. 그들은 거룩을 버리고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부자들에게 아첨하기보다는, 몸을 버리고 육적인 삶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면, 자신이 처한 난관에 맞서 담대하게 싸우기는커녕 뼈다귀나 부스러기를 던져 주기를 바라면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부자들에게 아첨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들을 기독교인들의 보호자요 은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완전한 악인이라도 그들에게 모든 덕을 돌립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 하지 않습니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많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밖으로 나가서 그를 맞았습니까? 그에게로 달려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기 위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이 가져온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습니다(왕하 5:8-16). 이 이야기는 우리가 궁핍함 때문에 멸시해야 할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아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 우리는 영적 지혜를 추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농사와 상업에 종사합니까? 우리의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께서 우리가 농사짓는 일을 도와주시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셔서 부드러운 흙 속에 있는 씨앗에 물을 주어 싹을 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태양을 떠오르게 하면서 흙을 따뜻하게 하시고 이 따뜻함으로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십니다. 또 식물의 성장을 조절하기 위해서 바람을 보내십니다. 어린 싹이 나오기 시작하면, 산들바람을 불게 하셔서, 뜨거운 대기 때문에 말라 죽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꾸준히 바람을 불게 하셔서 낱알을 익게 하십니다. 타작할 때에는 햇볕을 뜨겁게 하시며, 타작하기에 적절한 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이 요소들 중 하나가 부족해도,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종종 위의 모든 요소들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 시기에 맞지 않게 거센 폭풍이 불어 타작 중이거나 타작을 마치고 쌓아놓은 곡식을 망치기도 합니다. 또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벌레가 먹기도 합니다. 또 조리하여 식탁에 올려진 음식을 누군가가 빼앗아 먹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의 방향을 통제하시고 지시하시는데, 우리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병 들었을 때에는 육체에게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죽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을 원하신다면, 우리의 몸에 병의 고통을 감당할 넉넉한 힘을 주시고 우리의 용감함에 대해서 상을 주시거나. 아니면 고통을 완화해줄 방법을 찾으실 것입니다. 지혜의 원천(Fountain of wisdom)이신 하나님에게는 결코 치료책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최초의 수도사들이 따라간 복된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쉽게 이 방식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이 무익한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우리의 허물을 고쳐 주며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게 만들어준다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난은 영적인 길에 들어섰다가 떠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나 마을에 머무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물기보다는 그곳 주민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찾아가며, 지금 우리를 회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따라 광야로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읍을 떠나 비둘기 같이 바위 사이에 거하는"사람들(렘 48:31)을 칭찬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했는데, 모든 성읍의 주민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비단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가죽 혁대를 보려고 서둘러 왔습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옥외에서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보석으로 장식된 침대보다 모래 위에 눕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습관과 반대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을 견뎌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만나기를 원했고 그의 거룩함에 경탄했기 때문에, 곤경이나 불편함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부귀보다 거룩이 더 귀히 여겨지며, 많은 재산보다 고요한 삶이 더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 당시 영광을 자랑하던 부자들은 오늘날 완전히 잊혀졌지만, 광야에서 생활한 이 겸손한 사람의 기적적인 삶은 오늘날도 인정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를 기억합니다. 거룩의 명성은 영원하며, 그 고유의 덕목들은 그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양과 가축을 포기하지 않는 참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저분한 거래를 포기하고 "값비싼 진주"을 획득해야 합니다(마 13:46).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창 3:18) 땅을 경작하는 일을 멈추고, 낙원을 경작하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요한 삶을 선택하며, 지금 우리가 재산을 가지고 있음을 책망하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비난하는 우리의 허물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책망받는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변화는 책망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아야 할 부끄러운 것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덕에 관한 표면적인 수행들-언제 어떻게 기도하며,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는지 등-에 대해서만 겨우 배운사람이, 자신이 통달하지도 못한 것들에 관해서 가르치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배워야할 그가, 제자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쉽게 여깁니다. 사람은 먼저 과거의 더러움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서, 주의를 기울여 거룩함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제자들의 도덕적 성품을 바로잡아줄 수 있습니까? 악한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어떻게 바로잡아 주겠습니까? 정신적인 싸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정념의 공격을 받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상처를 입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상처를 고쳐 주겠습니까?

   하나의 기술을 완전히 익히려면 많은 가르침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은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의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의사가 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자는 훌륭한 농장을 황폐하게 만들고 잡초가 자라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고, 후자는 병자의 상태를 악화시킨다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감히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은 영적 인 길에 적용되는 기술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려운 것을 쉽게 여깁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이 지극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도생활이 멸시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수도생활을 하려는 사람을 조롱합니다. 어제 술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오늘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덕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방금도시의 부정한 삶을 떠난 사람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시장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영적인 길로 인도하려면 얼마나 힘들게 수고해야 하는지 깨닫는다면, 그리고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 일이 자기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고 여겨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때가 되면 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뜨거운 풀무 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과거의 생활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무모함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아들들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엘리는 나이가 많은 것 과거에 하나님과 자유로이 교제한 것 제사장직에 따르는 명예 등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삼상 2:12,29; 4:18). 그런데 죄의 작용이나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 허영심 때문에 경험도 없으면서 이 위험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겠습니까?

   언뜻 보면, 주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두에 두신 대상은 바리새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은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심으로써, 장차 동일한 잘못을 범할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정죄를 두려워하여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인간적 영광을 향한 부적절한 욕망을 삼갈 것입니다. 그들은 욥의 일을 회상해야 하며, 자기 자녀들을 돌보듯이 제자들을 돌보거나, 아니면 영적 지도를 하겠다는 주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욥은 아들들이 정신 속에 있는 죄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날마다 그들을 위해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욥 1:5). 그러나 경험이 없이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지성은 정념들과의 전쟁터에서 묻은 먼지 때문에 흐려져 있어서 표면적인 죄조차도 식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정념도 치료하지 못한 사람 스스로도 승리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을 승리로 이끌 수 없는 사람이 어찌 무모하게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선 전쟁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주시하면서 자기의 정념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 후에야 개인적 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 전쟁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충고해줄 수 있고, 전략을 설명해줌으로써 그들을 쉽게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대단히 엄격한 금욕을 실천함으로써 정념을 제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일어난 우발적인 전투에서의 승리가 그렇듯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승리했는지 알지 못하며 원수가 쳐 놓은 함정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상징적으로 말하면서 지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군대에게 밤중에 요단강을 건널 때에 요단강에서 돌을 집어 강둑에 두고, 그 위에 흰색으로 요단강을 건넌 경위를 기록하라고 명령했습니다(수 4:2-9). 이것은 우리의 정욕적인 행동 밑에 숨어 있는 생각을 사람들 앞에 공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 놓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면, 강을 건넌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강을 건넜는지 알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일을 원하는 다른 사람들도 가르침을 받아 보다 쉽게 강을 건널 것입니다. 먼저 강을 건넌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청하여 교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인 경험이 부족하며, 또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의 확신만 의지하면서, 형제들에게 종처럼 자신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제자들이 많다는 것만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들의 주된 목표는, 대중 앞에 나설 때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경쟁자들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많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교사라기보다는 사기꾼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행동으로 본을 보여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증진하기 위해서 스스로 지도자의 지위를 편취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감화를 주어 자기를 따르게 한 아비멜렉과 기드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비멜렉은 나뭇가지를 도끼로 찍어 어깨에 메고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고 말했습니다(삿 9:48). 기드온도 행해야 할 일을 자신의 행동으로 본을 보이면서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삿 7:17)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 20:34)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주님은 먼저 행동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행동으로 본을 보이지 않고 거만하게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합니다. 혹시 그들이 이러한 일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선지자의 책망을 받은 미숙한 목자들과 같습니다: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슥 11:17). 그들은 어리석게도 옳은 행동을 소홀히 하여, 관상의 빛을 꺼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벌을 줄 때에는 목자처럼 무자비하고 가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상적인 지혜는 즉시 파괴되며, 그것을 박탈당한 그들의 행동은 잘못된 것으로 증명됩니다. 칼을 허리에 차지 않고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거나 볼 수 없습니다. 칼을 찬다는 것은 정념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성의 예리한 능력을 사용한다는 의미 입니다. 들고 다닌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악 된 행동을 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 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는 관상적 통찰력을 지닌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눈을 다 빼어 버리겠다고(삼상 11:2), 그리하여 그들을 올바른 행동으로 이끌어줄 지혜를 박탈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관상의 상태에서 행동으로 나아갈 때에 이 옳은 지혜가 그들을 크게 진보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먼저 영적지식의 밝은 눈에 의해 깊이 고려된 행동이 선한 것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은 마음이 한결같고 개인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미 고요와 관상을 맛보았고 어느 정도 내면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육체적인 염려로 지성을 혼란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성을 지식에서 Ep어내며, 영적인 것에서부터 물질적인 것에게로 끌어 내리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점이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말한 유명한 비유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며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무화과 나무도 아름다운 실과 때문에 거절했고, 감람나무는 그 기름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좋은 성품을 갖지 못한 가시나무가 왕이 되어 달라는 나무들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삿 9:7-15). 이 비유에서 왕을 구하러 다닌 나무들은 재배되는 나무가 아니라 야생 상태의 나무였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감람나무는 야생의 나무들을 다스리기를 거절하고, 권위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열매를 맺는 편을 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덕의 열매를 감지하고 그 유익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보다 이러한 유익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압박을 받아도 지도자의 자리를 거절합니다.

   비유에서 나무들에게 임한 저주는 비슷하게 행동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임합니다. 성경은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해로운 협정을 맺는다면 그것은 미숙한 교사들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주의한 제자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교사들에게도 위험한 일이 됩니다. 교사의 어리석은 언행이 제자들을 죽이며, 제자들의 태만함은 교사를 위험하게 합니다. 특히 교사의 어리석음 때문에 제자들이 게을러질 때에 위험합니다. 교사는 제자들의 결점에 주목하여 바로잡아 주어야 하며, 제자들은 교사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죄를 범하는 것과 교사가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심각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안일함과 방종을 위한 구실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을 책임지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말이나 다른 짐승을 맡아 기르는 사람들은 항상 그것들을 통제함으로써 목적을 성취합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짐승을 기르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성품이나 명민함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호된 싸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허물을 크게 인내하면서 다루어야 하며, 그들이 무지하여 알지 못하는 것들을 인내하며 가르쳐 주어야 합니 다.

   이것이 성전 안에 놓인 성결 의식을 위한 바다(물그릇)를 열두 소들이 받치고 있는 이유이며(왕상 7:25), 촛대를 정금으로 만든 이유 입니다(출 25:31). 촛대는,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확고한 기초가 있어야 하며 공허하고 헛된 것을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입니다.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과 거룩함의 본보기가 될 수 없는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합니다. 바다를 지탱해주고 있는 소들은,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자신에게 닥치는 것을 피하지 말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그의 짐이나 더러움을 대신 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의 행동을 깨끗하게 해 주려한다면, 어느 정도 그들의 더러움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성결 의식에 사용되는 물그릇이 씻는 사람들의 손을 깨끗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들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념들에 대해서 말하며 사람들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사람은 더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 행동이 말하는 사람의 정신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죄를 생생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그것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지성의 표면을 더럽게 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원수가 사용하는 방책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함정에 대해서 경고해 주어 어려움 없이 승리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도자는 극히 드물며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궤계를 알지 못함이 아니로다'라고 한 바울의 말을 사실입니까? 그러나 욥은 당황하여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라고 질문합니다(욥 41:13-14). 아마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러 가지 옷 아래 교활함을 감추며, 은밀하게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의 멸망을 도모하면서도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욥은 자신이 사탄의 방법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해로운 능력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욥 41:18). 욥이 이렇게 말한 것은 마귀의 사악함을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샛별의 아름다움을 가장하여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들이 가까이 오면 내면에 있는 독으로 죽이려 합니다. 영적 지도를 하는 데 포함되어 있는 위험을 강조하는 금언이 있습니다: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전 10:9-10).

   일반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구분할 때에는, 겉보기에 좋은 것과 실제로 좋은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내려 하는데, 이것은 큰 모험입니다. 잘못 하면 듣는 사람들을 오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생도 하나가 요단강 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이 떨어진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도끼는 빌린 것이었기 때문에 곤란에 처한 그는 엘리사에게 "내 주여"라고 외쳤습니다(왕하 6:5). 다른 사람들에게서부터 잘못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가르치려 하는 사람,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도중에서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그 때에 자신의 가르침이 빌려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것을 발견하고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합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베어 요단강에 던져서 제자가 잃어버렸던 도끼를 떠오르게 했습니다(왕하 6:6). 다시 말해서, 엘리사는 제자가 내면 속 깊이 숨겨 두었다고 믿고 있는 생각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냈습니다. 여기에서 요단강은 회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곳이 요단강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회개의 감추인 능력을 전달하지 못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무시하게 만드는 사람은 도끼를 요단강에 떨어뜨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뭇가지-이것은 십자가를 의미 합니다-가 강에 빠진 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회개의 완전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었고, 회개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무모하고 부적당하게 말한다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회개의 의미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무 십자가를 통해서 정해진 시간에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는 목표는 초심자들의 영적 지도를 맡으려는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큰 과업을 하는 데 필요한 내적인 상태를 획득하게 하며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채 그 일에 착수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릴 즐거움-제자들의 시중과 외부 사람들의 칭찬-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 일에 포함된 위험을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평화가 정착되기 전에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를 농기구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정념을 정복하여 더 이상 전쟁에 시달리지 않으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된 사람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념의 압제를 받고 있으며 육체의 뜻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는 사람은 계속 무기를 손에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는 우리가 해이해진 틈을 이용하여 싸우지도 않고 우리를 정복할 것입니다.

   거룩함을 얻기 위해 싸워 성공했지만 자신이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서. 성경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사 2:4)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패배한 원수들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영혼의 능력들을 재정비하여 아직도 사악함이라는 잡초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을 계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미숙하거나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전에 자기의 능력을 벗어난 일에 착수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반대되는 충고를 합니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욜 3:10). 전쟁이 진행되고 있어, 농사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가 추수한 것을 소유할 텐데, 농사를 짓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광야에서 여러 민족들과 싸우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농사를 짓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군사로 활동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와 화해한 후에는, 농사를 짓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농사를 짓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고 안정성이 부족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영성생활을 할 때에는 처음부터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식사에 초대된 손님은 혹시 처음에 제공된 음식보다는 나중에 나을 음식에 마음이 끌리더라도 제공되는 순서대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야곱은 레아의 추한 눈을 멸시했고 라헬의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꼈지만. 먼저 레아를 얻기 위해서 칠 년 동안 일해야 했습니다(창 29:15-28). 참된 수도사가 되려면, 거꾸로 뒤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며, 출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을 향해 전진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구하는 것을 얻을 것이며, 제자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전혀 노력함이 없이, 또는 진정한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모르고 영적 지도자의 상태만 쫓아갑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일에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모집하고는, 마치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 하인들과 계약을 맺듯이 그들에게 온갖 종류의 수입을 약속합니다. 이런 부류의 영적 지도자들은 많은 수행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 앞에 나타나기를 좋아하며, 무대에서 연극을 하듯이 수도원장의 외적인 화려함을 소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섬김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계속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채찍을 떨어뜨려 말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달리게 하는 마부와 같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거칠게 달리는 것을 허락합니다. 욕망에 휩싸인 그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비틀거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저지하거나 그들의 무절제한 충동을 억제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을 내버려 두는 사람들을 에스겔이 어떻게 정죄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소원에 양보하면서, 스스로 장래의 형벌을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겔 13:18-19). 거짓교사들도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바친 것으로 자기에게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넝마들을 모아 꿰맨 것 같은 옷을 입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게 하여 치욕을 줍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1:4). 그들은 사람들을 나약하게 하며, 죽여서는 안 될 영혼들을 죽입니다.

   이렇게 행동하지 말고, 참 교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되도록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을 맡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마 23:8)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나머지 사도들에게 그러한 일을 피하며 자신이 그러한 지위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라고 권면하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금지된 직무를 맡겠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는 말씀은, 그 호칭을 피할 수만 있다면 자유로이 그 직무를 취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두 명의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사람들을 영적으로 지도하게 된 사람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첫째, 그는 자신이 말보다 행동으로 그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삶을 거룩함의 본보기로 제시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추함으로 거룩의 아름다움을 흐리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듯이 제자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단 그들에 대한 책임을 맏아들이면, 장차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회계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자기 못지않게 거룩한 제자들을 남겨 두려고 노력했고 제자들을 원래의 상태에서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순교자로 변화시켰습니다(몬 10-19). 엘리야는 농부였던 엘리사를 선지자로 변화시켰고(왕상 19:19), 모세는 다른 사람들보다 어린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은사를 전해 주었고(신 31:7-8), 엘리는 사무엘을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삼상 3:19-20), 각각의 경우에, 제자 자신도 노력했지만, 그가 발전한 주된 원인은 열심의 불에 부채질을 하여 큰 불길로 만들 능력을 지닌 교사를 발견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렘 15:1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서 교사가 지녀야 할 태도, 그리고 제자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여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라"(겔 4:1). 이것은 교사는 제자를 진흙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네 앞에 놓고"라는 말이 특히 중요합니다. 계속 교사 앞에 있으면, 제자가 빨리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고집 세고 무감각하지 않은 영혼들은 선한 본보기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도둑질한 게하시와 배반한 유다는 스승의 눈앞에서 떠나갔기 때문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스승의 시야의 규제하는 영향력 아래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태만함이 스승을 위험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철(煎鐵)을 가져다가 너와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鐵城)을 삼으라"(겔 4:3), 진흙에서 성읍으로 변화시켰던 나태한 제자 때문에 스승이 당하는 형벌을 피하려면, 타락한 사람 앞에 놓인 형벌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경고의 말이 마치 성벽과 같은 역할을 하여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해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겔 3:17-1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신 121:30)고 말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자기의 정신을 주의 깊게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정념들을 제거한 후에 과거의 환상들의 영상들이 마치 어린 싹처럼 다시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영상들이 지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고 계속 허락한다면, 정념들이 다시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것들을 대적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념들을 길들여져서 가축들처럼 풀을 뜯어먹게 한 후에 태만하면, 정념들은 야생 짐승의 사나움을 되찾아 사나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성경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혼이 이런 종류의 환상들을 즐기는 습관을 형성하여 이전의 사악함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겜에서 이방 신상들을 땅에 묻었습니다(창 35:4),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항상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면, 정신에 부끄러운 환상의 뚜렷한 영상이 새겨져 해를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념과 싸워 잠시 동안만 아니라 영원히 그것들을 파묻고 죽여야 합니다. 세겜은 "짊어지다"라는 뜻이며, 정념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세겜으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정념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창 37:12-28) 마찬가지로 야곱은 칼로 세겜을 정복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어렵게 싸운 끝에 정념을 정복하여 세겜 땅에 묻었다는 의미입니다.


세겜 땅에 이방 신상을 묻은 것과 우상을 비밀 장소에 감춘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칭찬받을 일이고, 후자는 비난을 받을 일입니다. 성경은 "우상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5)고 말합니다. 어떤 물건을 땅 속에 완전히 파묻는 것과 은밀한 장소에 두는 것은 같은 행동이 아닙니다. 감각에 의해 감지되지 않도록 땅 속에 완전히 파묻은 것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지지만, 은밀한 장소에 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둔 사람은 언제든지 그것을 볼 수 있으며 정신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새롭게 기억됩니다. 정신 안에 형성된 부끄러운 생각은 은밀한 우상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면, 그것을 우상으로 은밀한 장소에 간직하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미 제거된 영상들을 찾으려는 것은 한층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쉽게 이미 축출된 정념을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육욕적인 쾌락에 의해서 그것에 이끌려갑니다.


이것을 통해서, 덕이란 매우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소홀히 하면 즉시 반대되는 것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얻으려는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스 9:11,12). 덕의 상태를 획득한 사람이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즉시, 그의 덕은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해로운 환상이 모습을 나타내면, 그것이 우리의 정신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것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가기 때문입니다(렘 42:19; 43:2-3). 정신이 불순한 생각들의 어두움-이것은 애굽을 의미합니다-속으로 내려갈 때, 정념은 정신을 무섭게 끌어당겨 자기를 섬기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자께서는 뱀의 머리를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정욕적인 즐거움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뱀이 우리의 발꿈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3:15). 그것의 목표는 우리의 발꿈치를 물어 독을 주입하는 데 있습니다. 한편 우리의 목표는 모든 정욕적인 즐거움의 도발을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도발을 물리치면, 정념은 거의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삼손이 먼저 여우들의 꼬리와 꼬리를 묶어 서로 반대편을 향하게 한 후에 그들 사이에 횃불을 놓지 않았으면,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을 불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삿 15:4). 이것은 우리가 전조들을 보고서 미혹하는 생각들의 공격을 탐지하며 그것들의 출발점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매력적인 모습을 취하려 합니다. 우리는 처음 시작과 마지막 결과들을 비교함으로써 그 생각들의 사악함을 폭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우의 꼬리와 꼬리를 묶고 그 사이에 횃불을 두어 그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부정(不貞)이라는 악은 처음에는 자부심의 형태를 취합니다. 입구에서 보면 매력적이지만, 그 뒤에는 정신없는 사람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멸망의 길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부심의 세력 아래 있는 사람이 사제가 되거나 수도적 완전의 삶을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러 오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자부심을 느껴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미혹된 그는, 내면적으로 깨어 지키는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여인을 만나려는 생각을 품어 관능적인 욕정의 행동에 동의하게 되며, 양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빼앗기고 부끄러운 상태로 전락합니다. 우리가 삼손처럼 여우의 꼬리와 꼬리를 묶으려면, 이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그리고 그가 자부심 때문에 부끄럽고 부정한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처음과 끝의 차이,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된 방법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식은 부정으로 이어지며, 부정은 낙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정의 악에 정복된 사람이 내적으로 깨어 지키는 상태를 회복하면, 즉시 낙심과 낙담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므로 영성의 길을 추구할 때에, 먹는 즐거움이나 관능의 유혹을 받지 말며, 그것들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이 낙담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들의 꼬리를 서로 묶어놓은 것이며, 그것들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횃불로 블레셋 사람의 곡식을 태워 버릴 것입니다.


정념과의 싸움에는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므로, 영적 지도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사람들을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빌 3:14)으로 인도하며, 이 전쟁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직접적인 행동을 피하면서 승리한 척하지 말고, 원수와 직접 교전하여 치명적 인 상처를 입혀야 합니다. 이 싸움은 운동 경기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운동선수는 넘어져도 쉽게 일어날 수 있지만. 영적 싸움에서 영혼이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념과 싸우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영혼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을 세우려 한다면, '너는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길22:8)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전을 건축하려면 평화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쳤습니다(출 33:7). 이것은 교사는 전쟁의 소란함과 진영의 혼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며, 교전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한 교사들이 있다면, 또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의지를 부인하여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될 수 있는 제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반대하지 않으면 영혼이 몸 안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하듯이, 토기장이가 일하면서 솜씨를 나타낼 때에 진흙이 저항하지 않듯이, 교사가 제자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할 때에 제자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지나친 호기심을 발하여 교사가 맡은 일을 행하는 방법과 가르침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제자들 자신의 발전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미숙한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는 솜씨가 없는 사람과 전혀 다른 판단을 합니다. 전자는 정확한 지식에 따라 일하지만, 후자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것에 의해서 일합니다. 그럴듯하다는 것은 억측에 의존하며 대체로 옳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배가 바람을 거의 정면으로 받으면서 항해할 때에, 타수는 승선한 사람들에게 안전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즉 수면 위로 올라와 바람의 압력을 많이 받는 쪽을 떠나서 파도 속에 잠긴 쪽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개연성에 대한 고찰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반대되는 충고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탄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보다 타수의 말에 순종합니다. 타수의 지시가 의심스러워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지식을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사람들은, 기술자의 지식이 자신의 의견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하고서 개연성에 대한 관념을 버리고 기술자의 지식에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을 부인한 사람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남건 두지 말아야 합니다. 밭을 판 돈 중 얼마를 남건 두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아나니아를 기억해야 합니다(행5:1-10). 그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이 장차 계속 정신의 관심을 끌어당기면, 그는 고귀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결국 형제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기록된 옛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거기서 삶의 방식과는 관계없이 각 사람을 진리로 인도해주는 적절한 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가 될 때에 세상을 어떻게 버렸습니까? 열두 겨리의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엘리야를 좇았습니다(왕상 19:19,21). 이것을 보면 그의 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소의 기구를 팔아 그 돈을 적절하게 나누어 주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물건을 파는 편이 더 이익이라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따르려는 소원이 간절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시했습니다. 또 그것들 때문에 자기의 의도가 흐려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는 지체하면 자기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주님이 부자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완전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소유를 팔아 남김없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마 19:21)? 조금이라도 남겨 두면 온갖 종류의 분심이 생길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한 것도 소유를 완전히 버리라는 요구였다고 생각됩니다(민 8:7),


두번째로, 수도생활을 채택하는 사람은 친철과 친구들에 대한 기억에 시달리지 않도록 그들을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언약궤가 실린 수레를 끌고 가는 두 마리의 암소는 자기의 본성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송아지들을 Ep 내어 집에 가두었고, 소들을 모는 사람도 없었지만 소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실수 없이 여행을 마쳤습니다(삼상 6:12). 송아지들과 떨어졌기 때문에 괴로웠지만, 소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본능의 횡포에 예속된 상태로 무거운 언약궤를 싣고 가면서도, 소들은 마치 직선을 따라 걸어가는 것처럼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수레에 실린 언약궤를 그만큼 경외한 것입니다. 영적인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에 착수한 사람들도 이 소들과 같은 경외심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소들보다 휠씬 더 큰 경외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 형성되어 있는 인간적인 본성이 짐승들보다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들이 부득이 행한 것을 인간들은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서 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광야에서 헤맨 것은 혈육의 유대를 포기하지 않은 채 완전함을 얻으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창 37:15-16). 그가 방황하는 이유를 물은 사람은, 그가 목자라는 것을 안 것이 아니라 친척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 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만일 요셉에게 양 치는 사람의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양을 "친다"고 말하기보다 "돌본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창37'17)고 말해 주었습니다. 도단은 "충분한 이탈"(sufficient detachment)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대답은, 친척에 대한 애착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애착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완전함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하란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창 29:4). 하란은 "동굴들"의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을 나타냅니다. 또 헤브론 골짜기에서 나가는 것 즉 겸손한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창 37:14). 완전함을 찾는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는 사막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도단에 도착하지 못한다면-즉 충분한 이탈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노력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친척들의 유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완전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친척들의 유대를 버리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친척들 중에서 그를 찾았기 때문에 책망하셨고(눅 2:49), 아비와 어미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7).


이 두 가지 일에 성공하여 세상의 요란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고요함을 실천하라고 충고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주 외출함으로 말미암아 감각을 통해서 정신의 상처가 도질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옛 환상들에게 새로운 영상들을 추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방금 세상을 부인한 사람들은 고요함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일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내면의 더러운 것들을 휘저어 놓지 못했지만, 이제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실천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흐르면 고요함은 지성을 더러운 생각들의 시달림에서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목표는 영혼에게서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하는 데 있으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영혼을 더럽게 만드는 모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성을 노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평온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며, 경솔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홀로 생활하는 독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독거는 지혜의 어머니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바깥 세상의 혼란함과 섞인다면, 자신이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했던 함정에 다시 붙잡히기 쉽습니다.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있으면서 자신이 정죄하고 피했던 것에 빠지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습관의 힘은 강하기 때문에, 크게 노력하여 획득한 고요함을 상실하며, 잊었던 죄를 기억하고서 과거의 부끄러운 생활로 돌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죄에서 돌이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지성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회복되기 시작한 몸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몸은 아직 기력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찮은 것에 의해서도 다시 건강을 잃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방금 수도생활을 시작한 사람의 지성은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정념들이 되돌아올 위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념은 바깥세상의 소란함과의 접촉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죽이는 천사를 피하려는 사람들에게 집 안에 머물러있으라고 명령하면서,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 12:22-23)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도 동일한 충고를 하는 듯합니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행치 말라 대적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렘 6:25).


노련하고 용감한 군인은 원수를 맞아 육박전을 하지만, 싸울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집 안에 조용히 머물러 지냄으로써 위험을 피해야 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그는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급하게 전쟁터에 나가 싸우려는 사람들은 친척들과 친구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창 4:8). 디나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창 34:1 이하), 능력 밖의 일을 행하려 하며, 자기에게 적절한 자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이 치졸하다는 표식입니다. 만일 디나가 유혹을 거부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무모하게 이웃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구경하러 나가지 않았다면, 영혼의 판단이 감각적인 것들에 의해 미혹되어 장성하기도 전에 타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인 지성의 영적 능력이 그녀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이 주제넘음이라는 정념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라"(레 15:31)고 말씀하셨습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기 전에는, 도시생활의 소란함을 피하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소음을 멀리해야 합니다. 물질을 부인하고 나서도 그에 대한 잡담에 귀를 기울인다면-성읍과 그 활동을 떠나고서도 롯처림 성문 앞에 앉아서(창 19:1) 성 안에서 나오는 소란함을 가득 채운다면-물질을 부인해도 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도시를 완전히 포기하고, 도시의 활동을 피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말하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모세는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않을지라"(출 9:29)고 말했습니다.


참 평정(tranquility)을 획득하면, 세상적인 행동을 삼갈 뿐만 아니라 기억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것은 영혼에게 과거에 정신에 찍힌 인상들을 바라보고 그것들 각각을 대적하여 제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계속 새로운 인상들을 받아들인다면, 지성은 그것들에게 정신을 기울이게 되므로 과거에 새겨진 인상들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념을 근절하기 위한 싸움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정념이 증가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정념이 강해져서, 이제는 마치 홍수로 넘쳐흐르는 강처럼 연속적인 환상으로 영혼의 분별력을 익사시킵니다.


강 바닥에 있는 흥미로운 것을 조사하려면, 그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의 물만 퍼내서는 안 됩니다. 그곳의 물을 퍼내도 다른 곳에서부터 계속 물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류에서 물의 흐름을 차단하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강바닥이 드러날 것이며, 우리는 관심이 있는 것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감각에 외부로부터의 자료의 공급을 끊는 즉시, 우리의 정신에서 정념을 만들어내는 인상들을 쉽게 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이 계속 인상들의 흐름을 전달할 때에는, 이러한 인상들의 범람에서 지성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때에는 정념이 활동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정념의 시달림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념은 눈에 뜨이지 않게 우리의 내면에 존속합니다. 그것은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강해집니다. 계속해서 땅을 밟아 주면 땅 속에 있는 잡초들이 표면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지내다가, 기회를 얻는 즉시 땅 위로 솟아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지내면, 정념은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꾸준히 더 강하게 성장하다가, 우리가 추구하기 시작한 고요한 삶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정념이 처음 발생했을 때에 그것과 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것과의 싸움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종하는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버리라"(렘 50:16)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이 주는 인상들이 정신 속에 들어오기 전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그것들이 우리의 정신 속에 들어와 자라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리고 반복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에게 많은 비를 내려 물을 공급해 준다면, 그것들은 풍성한 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정념이 성장하여 힘을 얻기 전에 죽이는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f:9). 욥이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강에서 자라는 왕골과 갈대가 물이 없으면 말라 죽는다고 말한 것도 그런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욥 8:11).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욥 4:11)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 듯합니다. 그는 정념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피조물 중에서 가장 담대한 사자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정념의 도발은 개미처럼 눈에 뜨이지 않게 다가오는 하찮은 환상들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결국 엄청나게 성장하고 그 공격이 사자의 공격만큼 위험한 것이 됩니다.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념이 아직 성장하지 못하여 미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 공격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자같이 강력해지면 저항하기 어려우며, 그것이 요구하는 음식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정념이 먹고사는 양식은 감각적인 인상들입니다. 그것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환상들이나 우상들을 가지고 영혼을 공격함으로써 정념을 양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성막 안의 제단 주위에 그물 모양으로 된 막을 쳤는데(출 27:14), 그것은 정신을 성막처럼 깨끗하게 보존하려면 우리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제단 주위에 친 그물이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처럼, 우리도 장차 임할 두려운 심판을 생각함으로써 정신적 차단막을 만들어 감각과 부정한 인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왕하 1:2). 다락난간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유혹을 받을 때에 장차 받을 보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서 육욕적인 쾌락에 굴복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병은 없을 것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균형이 깨져 하나의 요소가 비정상적으로 힘을 발휘하면, 몸은 병이 듭니다. 영혼의 옳은 판단이 손상되며 질병을 일으키는 정념에 정복될 때에, 영혼은 병이 듭니다.


솔로몬은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라"(잠 23:33)는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눈을 위해 그러한 그물을 만들었습니다. "망령된 것"은 우리가 범죄하여 벌을 발을 때에 제시할 답변을 의미합니다. 사물에 대한 옳은 판단은 우리 눈으로 위험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해 주며 혼동으로부터 구해줍니다. 솔로몬은 계속해서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라"(잠 23:34)고 말합니다. 실제로 시험을 받을 때에 자기를 유혹하는 광경을 거부하는 사람은 폭풍 속에서 배를 젓는 사람처럼 장래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나. 그는 공격자들이 가하는 상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쉽게 그들을 정복하며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잠 23:35)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나를 때리고 그들의 생각이 나를 조롱하지만 그로인한 상처는 어린아이의 화살과 같기 때문에 상처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들의 속임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윗도 그러한 원수들을 멸시하면서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시 101:4). 이것은 "나는 그것들이 접근할 때나 물러갈 때에나 그것들을 인식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감각적인 대상들과 긴밀하게 제휴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제휴 때문에 쉽게 미혹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해로움을 알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이러한 감각적인 인상들에 도취됩니다. 덫을 식별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속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앞에 놓인 덫을 식별할 수 있겠습니까? 앗수르 사람들과 소돔 사람들과의 싸움(창 14:1-2)은 감각과 감각적인 사물들과의 싸움, 감각이 패배했을 때에 감각적인 대상이 감각에게서 어떻게 조공을 착취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경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의 네 왕과 소돔 주위 지역의 다섯 왕이 사해에서 맺은 협정, 휴전, 화해의 선물: 다섯 왕이 12년 동안 속박을 받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반역한 것; 그리고 14년째 되는 해에 네왕이 다섯 왕을 공격하여 정복한 것.


이상이 사건들의 표면적인 경로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감각적인 대상에 맞선 감각의 싸움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다섯 왕은 다섯 가지 감각을 나타내며, 네 왕은 감각적 인식의 대상들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12살이 될 때까지는 아직 분별력이 정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감각들이 감각적 인식 대상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각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감각적 대상들에게 순종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보이는 사물의 지배를 받고. 청각은 소리의 지배를 받으며, 미각은 맛의 지배를 받고. 후각은 냄새의 지배를 받고, 촉각은 유형적 사물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어리기 때문에 지각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식별하지 못하거나 반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판단력이 성숙하기 시작하여 자신이 당하는 해로움을 의식하게 되면, 이 노예 상태에 맞서 도망칠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계속 이처럼 확고한 결심을 소유하면, 이 잔인한 주인들에게서 도망쳐서 영원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결심이 흔들리면, 감각은 다시 노예가 됩니다. 감각은 감각적인 대상의 힘에 정복되며, 그 때부터는 도망칠 희망이 없이 노예 상태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다섯 왕은 네 왕에게 패배한 후에 역청 구덩이로 몰려갔습니다(창 14:10),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사물에 정복된 사람들은 역청 구덩이로 몰려가듯이 각각의 감각에 적절한 대상을 향합니다. 그 후, 그들은 세상적인 것만 갈망하며 지적인 것보다 이 세상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상들만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종이 주인과 가족들을 사랑하게 되면. 육체적인 혈연관계의 유대 때문에 참된 자유를 거부하며,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을 허락하고 영원히 종이 될 것입니다(출 21:6). 그는 현존하는 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말을 듣지 않고 영구히 종으로 남아 있을 것니다. 이런 까닭에, 율법에서는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는 남자의 음낭을 잡은 사람의 손을 찍어 버리라고 명합니다(신 25:11). 다시 말해서, 그 여인은 세상적인 축복을 선택할 것인지 하늘나라의 축복을 선택할 것인지, 두 가지 생각사이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하늘나라의 축복을 선택하지 않고 썩어질 것을 붙잡았습니다. 율법에서 음낭이란 변화하는 세상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버리겠다는 결심을 지키지 못한 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애착을 느낀다면, 그 결심에 의해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롯의 아내처럼 계속 이미 버린 것을 돌아보는 것은 아직도 그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어 지금까지도 불순종한자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창 19:26). 롯의 아내는 우리가 확실히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지만 우리를 다시 끌어가는 습관의 힘을 상징합니다.


성전에 들어온 사람은 기도를 마친 후에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지 말고 맞은 편 문으로 나가라는 명령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심 때문에 방향을 되돌려 가지 말고 거룩함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라는 의미 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이미 버린 것을 생각하면, 분별력이 발전하지 못하며,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 과거의 죄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원래 소유했던 덕의 상태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습관의 힘에 붙들리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습관이 자리 잡으면 하나의 성향이 되며, 그 성향은 "제2의 천성"이 되는데, 천성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압박을 받으면 약간 굴복하기도 하지만, 곧 자기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나쁜 습관을 버리고 처음 그 습관을 버릴 때에 지녔던 덕의 상태로 돌아가지않는 한, 그것을 포기하거나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과거의 습관에 굴복하여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하는 영혼은 라반의 우상들 위에 앉아 있는 라헬과 같아서, 보다 귀한 것에게로 끌어올려 줄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라헬처럼 "마침 경수(硬水)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창 31:35). 오랫동안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온 영혼은 우상들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우상들은 본래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의 솜씨에 의해서 실체가 주어집니다. 이 세상의 부귀와 명예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럴듯하게 실체와 유사하지만, 날마다 변화합니다. 우리는 생각 속에서 참된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 환상을 만들고 그것들에게 실체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육체의 기본 욕구를 초월하여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곳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음식에 많은 소스를 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치한 옷을 입습니다. 혹시 이러한 낭비 때문에 비판을 받으면, 자기의 행동이 적당하고 온당한 것이라고 대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실체를 갖지 않은 것에 실체를 부여하려 합니다.


그러한 영혼은 "우상 위에 앉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대상에게 집착하는 영혼은 진리를 섬기지 않고 습관의 노예가 되며, 습관을 통해서 사물의 참된 본성을 더럽힙니다. 성경에서는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앉아 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사람"(시 107:10; 사 9:2)이라는 말에서, "앉으며"는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흑암과 쇠사슬은 우리의 행동을 방해합니다. 마음으로 애굽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출 16:3)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앉다'는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식욕이 왕성하여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고기 가마 곁에 앉습니다. 왜냐하면 탐식은 쾌락에 대한 욕망 및 다른 여러 가지 정욕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부터 나머지 정욕들이 솟아나 왕성하게 자라며, 원래의 나무 곁에서 자라난 새끼 나무처럼 조금씩 성장하여 악의 가지들을 하늘 높이 뻗습니다.


탐욕, 노염, 낙담 등은 모두 탐식에서 파생됩니다. 대식가가 만족을 모르는 식욕을 충족시키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돈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노염이 생겨나며 또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때에 낙담합니다. 그는 "배로 다니는"(창 3:14) 뱀과 같습니다. 그는 쾌락을 충족시킬 물질적인 수단을 소유할 때에는 배로 다니고, 그것이 없으면 가슴으로 다닙니다. 왜냐하면 가슴은 노염을 발하는 능력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쾌락을 빼앗기면 낙심하고 성을 냅니다. 모세는 제사장에게 흥패를 달게 했는데, 그것은 내면적으로 지성을 사용하여 노염을 일으키는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판결 흥패"라고 이름 지었습니다(출 28:15). 제사장은 불완전한 사람이므로 지성을 사용하여 이 정념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인 모제는 노염을 일으키는 충동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흥패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슴을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세가 그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다"(레 8:29)고 말합니다. 노염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지성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힘들게 노력함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팔로" 가슴을 제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은 수고와 일의 상징입니다. "배로 다닌다"는 것은 쾌락의 삶을 지칭하는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배는 실질적으로 모든 쾌락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면, 다른 쾌락을 얻으려는 욕망이 강해지지만, 배가 고프면 그러한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완전한 사람과 완전함을 이루고 있는 사람의 차이점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먹는 즐거움을 완전히 거부한 모세는 "물로 내장과 정갱이들을 씻었습니다"(레 8:2)). 여기서 "내장"(배)은 쾌락을 의미하고, "정갱이들"은 상승과 진보를 의미합니다. 한편 아직 완전함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내장 전체를 씻는 것이 아니라 내장 안에 있는 것을 씻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제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인 것에 유의하십시오. 과거 시제는 자발적인 것을 나타내며, 미래 시제는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완전한 사람은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해서 옳은 일을 행합니다. 반면에 완전함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상관에게 복종하여 행동합니다. 그는 매우 조심하여 가슴 전체를 제거하지만 배는 제거하지 않고 씻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완전히 부인하고 제거할 수 있지만 배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금욕하는 사람이라도 본성적으로 최소한의 음식은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더러운 쾌락에 물들어 참되고 안정된 지성의 지도에 복종하지 않으면, 배가 커집니다. 몸은 만족을 느낄 때에도. 욕망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일 배가 부으면 넓적다리가 썩을 것입니다(민 5:22). 사치한 음식들 때문에 배가 자극을 받으면, 정신은 선한 것을 의식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영적인 노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율법서에서 넓적다리란 이 러한 영적 노력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배로 다니며, 관능적인 즐거움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은 풍성한 음식을 포기함으로써 배에 낀 기름을 제거합니다. 영적인 길을 보다 많이 걸어간 사람은 배 안에 있는 것을 씻으며, 완전함에 이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외의 것을 거부하고 배 전체를 씻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슴과 배를 충족시키며 지내는 사람에게 "다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관능적인 쾌락은 고요하고 평온하고 지내는 사람의 특징이 아니라 부산하고 소란스러운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성욕은 노염이나 낙담보다 더 탐식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생식기가 배 바로 밑에 있는 것을 보아도 이 둘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욕정이 약해지지만, 배가 불러 힘을 얻으면 욕정 이 쉽게 동합니다.


탐식은 이러한 정념들을 증식시키는 한편, 모든 선한 것을 파괴합니다. 그것은 일단 우위를 확보하면, 자제, 중용, 용기, 견인 등 모든 덕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다"(렘 52:14, 왕하 25:9-10)는 말에서 은밀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위대 장관은 탐식을 의미합니다. 시위대 장관은 배를 충족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다양한 음식이 덕의 성채를 무너뜨립니다. 소스와 양념은 이미 견고히 서 있는 덕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공격 수단입니다. 지나친 방종은 덕을 파괴하지만, 검약함은 악의 성채를 파괴합니다. 시위대 장관이 육체적인 쾌락을 장려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예루살렘은 평화로운 영혼을 의미합니다)을 무너뜨렸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꿈에서 보리 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을 무너뜨렸습니다(삿 7:13). 검소한 음식은 부정(不貞)을 일으키는 충동을 파괴합니다. "미디안 사람"은 부정한 정념들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부정이라는 악을 소개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민 31:9).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은 성벽이 둘려 있었고, 미디안 사람들은 장막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덕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기초가 튼튼하고 견고하지만, 악을 포함하는 것들은 표면적인 모습-장막-에 불과할 뿐 환상에 불과합니다.


성인들은 그러한 악을 피하기 위해서 도시에서 도망쳤고, 딴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타락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전염병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심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토지를 목초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엘리야는 유대를 떠나 황량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가득한 갈멜 산으로 갔고(왕상 18:19), 그곳에는 나무에서 자라는 것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열매만 먹고 살았습니다. 엘리사도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생활 방식을 따랐는데, 특히 광야를 사랑했습니다(왕하 2:25 참조).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생활함으로써(막 1:6), 크게 수고하지 않아도 육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어들이라고 명령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법을 제정했습니다(출 16:16-17) 그는 내일을 위해 준비하지 말고 그날그날 살아가라고 정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수중에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하며, 나머지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으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장래를 위해 준비할 것이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축복을 주시는 일을 중지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성도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을 떠나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당하면서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지낸 까닭입니다(히 11:37-38).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혼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악함과 도시에 가득한 비정상적인 것들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사나운 짐승들이 동료 인간보다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기꺼이 짐승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쉽게 배반하는 사람들을 피하고, 짐승들을 믿고 친구로 삼았습니다. 짐승들은 그들에게 죄를 가르치지 않았고 오직 거룩함을 경외하고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악한 사람들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에, 사자들이 그를 구해 주었고(단6:16-23), 인간의 정의가 실패했을 때에 짐승들이 그의 무죄를 선포했습니다. 다니엘의 거룩함은 사람들의 긴장과 질투를 야기했고, 사나운 짐승들에게서는 두려움과 공경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진보를 원하는 우리는 성인들의 거룩함을 본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구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들 나귀를 광야에서 자유로이 달리도록 지으셨습니다. 들나귀는 마부의 책망을 듣지 않으며 성읍의 지껄이는 것을 업신여깁니다(욥 39:5-7). 그런데 우리는 이 순간까지 들 나귀를 정욕과 죄의 멍에 아래 두어 짐을 나르게 해왔습니다. 이제, 본래 들 나귀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랜 습관 때문에 그를 지배해온 사람들이 반대해도 그를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주께서 쓰시겠다"(막 11:3)고 말하면, 그들은 즉시 나귀를 풀어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도들의 겉옷을 걸친 나귀는 거룩하신 로고스를 태우게 될 것입니다.


나귀는 원래 풀을 뜯어 먹던 곳에서 해방되어 "두루 다니며 여러가지 푸른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욥 39:8). 이것은 그가 성경의 보화를 찾고, 양분과 즐거움을 얻어 완전한 생활로 인도함을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은 들 나귀가 왜 식물의 성장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정념의 수분이 완전히 말라 사막이 된 곳에서는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적 진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영혼의 참된 유익을 향해 올라가야합니다. 언제까지 하찮은 장난감에 만족하렵니까? 어른같이 성숙한 정신을 취하지 않으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여 보다 중요한 것을 향해 진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라면서 가지고 놀던 물건에 대한 애착을 버리며, 놀이도 포기합니다. 그들은 이해력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러한 물건에 애착을 느껴 소중히 여기지만, 자라서 어른이 되면 그것들을 버리고 어른의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롱하고 멸시해야 할 것에 매료되어 어 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귀한 것을 얻고 어른으로서의 지성을 발달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 채, 세상적인 즐거움에 매료되어, 진정한 가치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장성한 어른이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땅바닥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또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이 자기의 목표라고 고백한 사람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의 소명을 더럽히며 세상적인 것의 더러움 속에서 딩구는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탁월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비속한 것들보다 영적세계의 축복이 얼마나 더 좋은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허울뿐인 광채로 우리의 눈을 현혹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원하게 만듭니다. 선한 것이 없으면, 악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세계의 실체들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 것들의 매력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들로부터 떠납시다. 돈, 재산, 우리의 지성을 질식시켜 죽이는 모든 것을 멸시합시다. 우리의 배가 물 위에 잘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내던져 버립시다. 우리는 폭풍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많은 장비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배의 타수인 지성과 그 생각들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은 폭풍을 만나면 배에 실은 물건들을 물 속에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보다 자기의 목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처럼 행하지 않으며, 우리 영혼을 깊은 구덩이로 끌어 내리는 것들을 멸시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을 바다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폭풍을 만난 사람들은 이 덧없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재물을 잃는 것은 큰 재앙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극히 하찮은 대상에서조차 이탈하지 못하고, 짐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 짐을 지닌 채 죽으려 합니다.


원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앞에 서 있으므로, 우리도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옷을 겹겹이 껴입고 경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은 날씨가 덥든지 춥든지 규칙에 정해진 대로 간단한 운동복을 입고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기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적들보다 한층 더 능숙한 적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규정된 운동복을 입지 않고, 많은 짐을 짊어진 채 경기에 참여하려 함으로써 적에게 승리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재산 때문에 방해를 받으면서 어찌 "악의 영들"(엡 6:12)과 싸울 수 있습니까? 부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면서 어떻게 탐심의 마귀와 씨름할 수 있습니까? 세상적인 선입관들을 껴입고서 어떻게 모든 염려를 벗어버린 마귀들과 경주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암 2:16)고 말합니다. 돈과 재산에 대한 생각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는 벌거벗은 사람이라야 도망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사람을 붙잡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만일 요셉이 벌거벗었다면. 애굽 여인은 그를 붙잡을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창 39:12)고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옷"은 육욕적인 쾌락이 우리를 붙잡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에 사용되는 물질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몸에 필요한 옷 때문에 육욕적인 쾌락에 끌려들어 가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옷을 버리고 벌거벗은 상태가 되지 않으면, 여 주인이 억지로 그를 붙잡아 끌고 가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원의 아담처럼 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벌거벗고 다니는 특권을 허락하셨지만, 타락한 아담은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라고 촉구하는 원수들에게 저항하는 동안에는 경기장에 있는 운동선수처럼 벌거벗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기에서 진 후로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기자는 우리의 훈련자인 지혜에게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잠 27:13)고 말합니다. 운동경기에 참여하지 않고 경기장 밖에 서 있는 사람은 경주에 필요한 힘을 감각적인 사물이라는 옷 밑에 감추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경주에 참가하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경주에 참여한 우리는 옷을 벗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몸에 기름을 발라야 합니다. 옷을 벗으면 적수가 우리를 붙잡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기름을 바르면 그가 우리를 붙잡았을 때에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씨름을 할 때에 기름을 바른 사람은 상대방의 손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지만, 흙을 덮어쓴 사람은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싸움에 있어서 마귀가 세상에 대해 애착하지 않는 사람을 붙잡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차 있을 때에, 마치 흙을 덮어쓴 것 같은 그의 지성은 이탈이 제공하는 민첩함을 상실하기 때문에 마귀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기 어렵습니다. 완전한 영혼의 표식은 이탈이요, 불완전한 영혼의 특성은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지쳐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영혼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아 2:2)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걱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탈의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서에서 백합은 세상의 근심에서 이탈한 영혼을 상징합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8-29). 그러나 육체적인 일에 대해 많이 근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한다"고 말합니다(욥 15:20). 실제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 육체적인 일에 대해 근심하며 내세의 축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몸에 평생을 허비하며, 평생을 바쳐도 완전하게 하기 어려운 중요한 여행이 앞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에게는 일 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 여행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한다 해도 항상 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부주의하고 게으르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화장한 아름다운 얼굴 밑에 추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창녀들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현세의 헛된 것들에게 정복된 사람은 그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바보처럼 되어 물질의 추함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생명을 유지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에 만족하지 못한 채 온갖 종류의 소유물을 의지하게 되며, 탐욕 때문에 삶을 망칩니다. 그는 육체의 기본적인 욕구에 필요한 것 외의 것을 소유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요 좋지 못한 취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몸에 맞는 외투는 필요하며 취향에 맞습니다. 그러나 너무 길어서 땅에 끌리고 발에 걸리는 외투는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덕에 장애물이 되므로, 사물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강력하게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인 사물에 미혹된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말며, 영적 실체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세상적인 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덧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은, 건전한 판단 기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님에게 색깔을 판단하게 하거나 귀머거리에게 음악을 평가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구가 된 지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식별할 기준이 부족하며, 그렇기 때문에 장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미의 아들 아간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훔친 물건을 은과 함께 자기의 장막 안 땅 속에 감추었다고 고백했습니다(수 7:21). 물질을 더 소중히 여기고 지성을 물질 밑에 파묻어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바보처럼 길을 잃고 다닙니다. 그는 지성을 그 보좌에서 쫓아내어 지성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것들, 또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 가운데 둡니다. 그러나 만일 지성이 올바른 자리에 확고히 서 있으면서 감각적인 일들을 판단하는 일을 맡는다면, 공정하고 건전한 판결을 하며 현혹시키는 것들을 따라가는 충동을 처벌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충족시키려 하지 않고 그 테두리 안에 머물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원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한계를 조금이라도 넘어서면, 어디까지가 필요한 것인지 그 한계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되는 움직임을 점검할 기준이 없어집니다. 불필요한 일에 기울이는 무의미한 노력과 끝없는 수고는 그것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킬 뿐이며,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한 번 본성적인 욕구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은 점점 더 물질주의적이 되어서 빵에 잼을 발라 먹으러 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량의 포도주에 물을 섞어 먹으려 하며, 그 다음에는 비싼 포도주를 원하게 됩니다. 그는 기본적인 옷차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 좋은 양모로 만든 화려한 색깔의 옷을 원하기 시작하여, 다음에는 아마와 양모를 섞어서 잔 옷을 원합니다. 다음에는 비단 옷을 입으려 하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수수한 비단 옷을 원하다가 나중에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옷을 원합니다. 그는 음식을 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요강이나 짐승들의 먹이를 담을 그릇으로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을 구입합니다. 사치가 극에 달하여 은으로 만든 요강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관능적인 쾌락의 본질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저급한 것까지도 받아들이며, 우리로 하여금 가장 비열한 데 사용하기 위해서 사치를 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과 동물들을 위한 자연스러운 생활 방법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주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당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창 1: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짐승들과 같은 음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지나친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창의력을 발휘한다면, 짐승들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자연의 범주 안에 머뭅니다. 그러나 지성의 능력을 수여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동물들이 호사스러운 음식을 요구합니까? 요리사와 빵장수들이 짐승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노력합니까? 짐승들은 들의 풀을 먹으며, 가진 것에 만족하고, 샘의 물을 마시는 원래의 단순한 삶을 살지 않습니까? 동물들은 이렇게 살면서 성적인 욕정을 감소시키며, 기름진 음식으로 욕망의 불을 붙이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종족 유지와 번성을 위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짝짓기를 하도록 정해진 시기에만 암컷과 수컷의 차이점을 의식합니다.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그것들은 짝짓기의 욕망을 완전히 망각한 듯이 서로를 멀리합니다. 한편, 사람의 경우에는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먹는 데 따른 결과로서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여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게 됩니다.


재산은 큰 해의 원인이며 온갖 정념들을 일으키므로, 진정으로 영혼의 행복을 염려한다면, 이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서 탐욕을 치료하십시오. 홀로 고요히 지냄으로써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십시오, 말이 많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은 해로우며, 우리의 평화로운 상태를 손상시킵니다. 일반적으로 기후가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병약하듯이, 무가치한 일로 소일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악덕에 동참합니다.


세상을 부인한 사람과 세상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2:4), 사업에 몰두하는 것은 군사 훈련에 방해가 됩니다. 훈련을 받지 않고서 어떻게 노련한 군대와 맞서 싸워 자기의 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열의 없이 싸우기 때문에 땅에 쓰러져 있는 원수에게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똑바로 서 있는 우리가 땅에 쓰러져있는 원수의 먹이가 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전쟁 때에 탐욕 때문에 죽은 시신을 약탈하는 사람의 운명처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몸을 뒤지다가, 갑자기 그에게서 치명적인 공격을 당함으로써, 어리석게도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서도 수치를 자초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극기와 자제를 통해서 원수를 정복했을 때-또는 원수를 정복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원수의 옷,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부귀, 권세, 편안한 삶, 명성 등-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쓰러진 원수의 물건을 취하려고 그에게 접근하다가 오히려 원수에게 살해당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순결함으로 원수를 죽였지만. 탐욕 때문에 생긴 완악한 마음 때문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원수의 칼에 찔렸습니다(마 25:1-13).


우리의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원수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원수는 우리에게 자기의 물건을 취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의 제안을 수락하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렇습니다. 원수는 주님에게도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고 말했습니다. 원수는 이 세상의 허울 좋은 유혹을 가지고서 그런 것을 전혀 필요로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을 미혹하려 했습니다. 하물며, 감각적인 것의 즐거움에 쉽게 미혹되는 사람들을 속이려 하지 않겠습니까?


육체를 훈련하는 법을 배운 후에는, 지성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육체적인 금욕 훈련은 초등교육과 흡사하며 육체적 고행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참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며(딤전 4:8), 원수인 정욕을 물리치려는 사람들의 영혼에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운동연습을 하는 어린이들은 항상 사지를 움직이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노력하며, 경기에 임할 준비를 하면서 몸에 기름을 발라야 합니다. 거룩한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정념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이 단계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정념에 수반되는 쾌락에 의해 미친 것처럼 몰려가며, 스스로의 선택과는 거의 상관이 없이 습관적으로 죄에 몰려갑니다. 그들이 정념을 제어할 수 있으면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덕을 실천하는 습관이 확립된 사람은 정신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성이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초심자들은 육체를 훈련해야 하며, 진보한 사람들은 지성이 지혜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면서 작용할 수 있도록 지성의 충동들을 억제하며 세상적인 환상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주님만 갈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내면에서 인간적인 생각이 그에 상응하는 정렴을 일으킬 기회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지배하여 그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정념은 그 사람의 지성을 속박합니다. 그런데 거룩함을 향한 열심이 우리의 정신을 다른 것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난 사람이 상상 속에서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과 싸울 때, 표면적인 것을 의식합니까? 물질적인 재산을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할 때에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욕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종종 주위 환경을 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원하는 여자 생각만 하면서 돌덩이처럼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내향적이 되어 자기의 환상에 몰두합니다. 율법에서는 이러한 영혼을 '떠나게 하라'(레 15:31)고 말합니다. 그 영혼은 감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서, 영혼을 지배하는 부끄러운 환상 때문에 외적인 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내면에 모든 활동을 집중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의 지성을 지배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어 감각들의 기능을 멈추게 할진대, 지혜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지성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고귀하게 하고 영적인 것에 대한 관상에 집중하게 하며, 감각적인 사물들과 감각들을 부인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불에 데이거나 칼에 베인 사람이 아픔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어떤 물건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를 지배하는 정념은 그의 지성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아픔이 크면 열심히 일할 수 없고, 너무 슬프면 기뻐할 수 없고, 낙심하면 쾌활할 수 없고, 일이 고되면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적대적인 정념들은 서로를 배제하므로 결코 연합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기 때문에 협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에 의해서 깨끗한 덕이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염려로 인해 관상의 열심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 지혜가 완전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 거만한 사람들이 우리의 결점 때문에 참 지혜를 비방하지 못할 것이며, 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혜를 조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니라도 천사들과 그리스도께서 지혜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성인들은 주님의 칭찬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무시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영광을 얻으려 했습니다: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시 22:35),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시 34:2). 사람들은 종종 선한 것을 비방하지만, 높은 곳에 계신 재판관은 공평하게 판단하시며 진리에 따라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운 행동을 기뻐하시는 이 거룩한 재판관에게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선하게 산 사람에게 상을 주지도 못하고 악하게 산 사람을 벌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질투나 세상적인 애착 때문에 거룩의 길을 비방하는 사람은 미혹되어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모독할 것입니다. 의롭게 생활한 사람은 심판 때에 인간들의 견해를 토대로 하여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참 본질에 따라서 축복을 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