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지식과 분별에 관하여
(St. Diacochos of Photiki)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1(서울: 은성, 2001), pp. 407-476.

   디아도쿠스(St. Diacochos of Photiki)는 400년 경에 태어나서 486년 이전에 사망했다. 에피루스(북부 그리스)의 포티케의 감독이었던 그는 칼케돈 공의회(451)를 지지했고. 단성론자들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니코디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영적 지식과 분별에 관하여』(On Spiritual of knowledge and Discernment)라는 책에서 "기도라는 덕의 가장 심오한 비밀들"을 드러낸다. 그 책은 매우 아름답고 감성적인 문체로 저술된 것으로서, 정교회 신비신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다. 디아도쿠스의 사상은 매우 통찰력이 있고 미묘하므로,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디아도쿠스는 에바그리우스의 기술적인 용어 다수를 차용하여 사용하지만, 그의 저서는 에바그리스우스에게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의 탁월함, 성례전, 지성과 마음 등을 강조한 것이다. 세례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금욕고행자 마크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이 저서에서 디아도쿠스는 특히 멜살리아 파의 오류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디아도쿠스는 사람의 몸과 영혼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현재의 구분된 상태는 타락의 결과이다. 그리고 항상 주 예수를 기억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크게 중요시한다.

                                                           용어정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공정한 이해

소망: 지성이 사랑 안에서 바라는 것을 향해 날아감

인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정신의 눈으로 바라봄

탐욕으로부터의 자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재산을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과 동일 한 열정을 가지고 재산을 소유하지 않기를 바람

지식: 몰아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에 대한 의식을 상실 함

겸손: 자신이 성취한 것을 망각함

노염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의 기질을 잃지 않으려는 진정한 갈망

순결: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의식

사랑: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을 향한 애정의 증가

완전한 변모: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통해서 죽음의 불쾌함을 즐거움으로 간 주함

 

                           영적 지식과 분별에 관하여

 
1
모든 영적 관상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은 눈에 보이는 즐거움에서 이탈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사랑은 영혼을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연합시켜 주며 지적 인식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2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선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생활 방법에 세심하게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선해질 수 있습니다. 영혼이 참된 즐거움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을 때에, 그는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성경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5:48: 눅 6:36).

3
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본성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지 않은 것을 지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에게 형태를 부여하려 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향하는 성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본래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선이 악을 향하는 성향보다 더 강합니다. 선은 존재를 갖지만, 악은 우리가 행동을 통해서 존재를 부여하지 않는 한 존재를 갖지 못합니다.

 4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큰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께 복종시킨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모양 안에 거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분처럼 됩니다. 이 세상의 거짓된 번쩍 임에 미혹되지 않도록 자기 영혼을 설득하지 않는 사람은 이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5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자신이 결정한 것을 지향해 가는 능력 입니다. 영혼이 선한 것만 지향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선한 생각으로 악한 생각을 불살라 없애야 합니다.

 6
참 지식의 빛은 선과 악을 오류가 없이 분별하는 능력 입니다. 의의 길은 지성을 인도하여 의의 태양을 향하게 하며 영적 지식의 무한한 조명을 받게 해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영혼은 더욱 자신만만하게 사랑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노염에서 해방된 도발 능력을 발휘하여 의를 유린하는 사람에게서 의를 빼앗아야 합니다. 거룩을 향한 갈망은 사람들을 미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을 납득하게 함으로써 승리합니다.

7
신령한 설교는 우리의 지적 인식을 충분히 충족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에너지를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지성은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신학(신적세계의 실체들에게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참여하거나 인식함)에 집중합니다. 지성은 관상 속에서 사랑의 에너지가 바라는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근심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공허함을 겪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랑에 의해 활력을 부여받은 믿음을 가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해줄 조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정신이 하나님이 없이 존재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하려는 것만큼 궁핍한 것은 없습니다.

8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 사색을 시작하지 말아야 하며, 성령의 빛이 풍성히 비추는 동안에는 말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허함이 있는 곳에서도 무지도 발견할 수 있지만, 성령의 풍성함이 있는 곳에서는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때에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취하며, 말없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말을 시작하기 전에 이 두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간 지점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균형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우리의 말에 조화를 부여해 줍니다. 우리가 말하고 가르칠 때에, 풍성한 조명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양육되며, 우리는 사랑 때문에 가장 먼저 지식의 열매를 맛봅니다. 성경은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고 말합니다.

9
지혜와 영적 지식은 모두 성령의 선물이지만, 각기 독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같은 성령께서 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영적 지식을 주신다고 증거합니다(고전 12:8). 그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홀로 독거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식적으로 영적 지식의 조명을 받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드물게 영적 지식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지혜가 주어질 때에는, 내면에 있는 이 지식의 내적 에너지들을 겉으로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식은 그 내적 에너지를 통해서 사람들을 조명하며. 지혜는 겉으로 표현됨으로써 사람을 조명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지식은 기도와 깊은 정적과 완전한 이탈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며, 지혜는 겸손히 성경을 묵상함을 통해서, 특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합니다.

10
영혼이 정념들을 상대로 그 도발하는 힘을 발휘할 때에,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나 자비한 행동을 통해서 이러한 소란이 잠잠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려는 갈망의 감화를 받으며 겸손의 밧줄로 지성의 날개를 억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히 무(無)의 상태가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11

영적 담화는 영혼을 자부심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그것이 영혼의 모든 부분에 빛의 의식을 주므로 영혼은 사람들의 칭찬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담화는 정신을 환상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주입해 줍니다. 한편, 이 세상의 지혜에 근원을 둔 담화는 자만심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영적 인식의 경험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날조해낸 것에 불과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갈망을 주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면서도, 언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적절한 상태에 도달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2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창조주의 영광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영혼의 특징은 항상 모든 계명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비천한 가운데서도 행복한 것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비천함이 적합합니다. 비천함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주님의 영광 안에서 기뻐한다면,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13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자신은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뜨거운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제라는 것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규칙대로 사역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높은 지위 때문에 생길 수도 있는 교만을 거룩한 사랑 속 깊이 묻어버립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려 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도 이 사람처럼 행하면서, 우리를 크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향한 넘쳐흐르는 사랑을 가지고서 모든 존경과 영광을 피해 도망쳐야 합니다.

 

14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고전 8:3). 그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분량만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갑니다. 그 때부터, 그는 영적 지식의 조명을 바라는 뜨거운 갈망을 놓지 않으며, 마침내 그 힘을 절실히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는 현세 안에 있지만, 동시에 현세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몸 안에 거하지만, 동시에 몸을 떠나 있습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쉬지 않고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은 사랑의 불로 계속 타오르며, 불가항력적인 갈망으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영원히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후 5:13)고 말합니다.

 

15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육적인 우정은 영적 인식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집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 일 때문에 성이 났을 때에도 사랑의 유대는 깨지지 않습니다. 그는 재빨리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불을 다시 밝히고, 냉정을 되찾으며, 비록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했어도 기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추구합니다.

 

16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행동을 통해서 정화되고 유순해지며, 사랑의 작용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세상적인 염려를 완전히 초월하지 않는 한, 위에 묘사된 것처럼 완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지성이 깊은 고요와 이탈의 상태에 이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성을 괴롭게 하기 시작하여 아둔함으로부터 지성을 정화해 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하게 해 줍니다. 이처럼, 아직 정화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 두려움에는 적당한 분량의 사랑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이미 정화되어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완전한 사랑이 발견됩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성령의 에너지를 통하여 덕을 성취한 의인에게서만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발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한 곳에서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 34:9)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시 31:23)고 말합니다. 따라서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의인의 특징은 두려움과 적절한 분량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온전한 사랑은 이미 정화된 사람, 두려움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성령의 에너지로 말미암아 영혼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뜨겁게 타오르고 하나님께 결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됩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시 63:8).

 

17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나중에 의사가 약을 발라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상처를 소독해 주면, 약의 작용에 제대로 반응하여 빨리 치료됩니다. 마찬가지로, 방종이라는 문둥병에 걸린 영혼을 방치해 두면,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과 능력에 대해 경고해 주어도 그 영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를 경청하여 정화되기 시작한 영혼은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하는데, 그 두려움은 무정념의 불 속에서 영혼을 태우는 생명의 주는 약입니다. 그 후에, 영혼은 조금씩 씻음을 받아, 마침내 완전히 정화됩니다. 점차 두려움은 사라지고 사랑이 증가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랑을 획득합니다. 완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활력을 얻는 완전한 무정념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 안에서 끝없이 즐거워해야 합니다(롬 13:10).

 

18

세상의 염려에서 이탈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제대로 마귀를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염려는 짐이요 베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성은 장차 심판하실 재판관을 식별하지 못하며, 또 심판 때에 자기에게 내려질 평결을 예견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세상을 버리는 것이 소중합니다.

 

19

깨끗한 영혼은 질투심이 없는 사고력, 악의가 없는 야망, 그리고 영광의 주님을 향한 지속적인 사랑을 소유합니다. 영혼이 이러한 특성들을 소유할 때에, 지성은 자신이 흠이 없으신 재판관 앞에 선 모습을 보면서 어떤 심판이 임할 것인지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20

행위가 없는 믿음과 믿음이 없는 행위, 이 두 가지 모두 정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주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아들을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약 2:21: 롬 4:3).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참되게 믿으며 경건하게 믿음의 행위를 실천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할 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성으로 피상적으로는 믿지만 사랑의 힘에 의해 활력을 얻지 못합니다.

 

22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믿음의 깊은 바다가 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정신으로 고요히 관상해 보면 아주 평온합니다. 믿음의 깊음은 망각의 강처럼 우리로 하여금 모든 악을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추론에 의해 자세히 조사하려 해도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정신으로 이 바다를 항해하여 하나님의 뜻의 항구에 도착해야 합니다.

 

23

먼저 자신을 고발하지 않는 사람은 참되게 사랑하거나 참되게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후회하며 괴로워하는 한, 지성은 하늘나라 축복의 향기를 맡지 못하며 집중하지 못하고 흔들립니다. 지성은 과거의 경험 때문에 열심히 믿음을 향해 손을 뻗지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마음 속에서 사랑으로 믿음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깊이 경청함으로써 자신을 정화하면, 바라던 대로 하나님을 보다 충만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4

육체의 감각들은 그것들을 유인하는 것을 향해 우리를 거세게 몰아가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지성의 인식 기능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체와 유사한 것을 동경합니다. 따라서 흙으로 이루어진 몸은 세상적인 자양분을 추구하지만, 몸을 갖지 않은 영혼은 하늘의 것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애써 유형적인 본성을 정련한다면, 분명히 영적 인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5

우리 안에서 일깨워진 거룩한 지식은, 원래 영혼의 인식 기능은 하나이지만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서 두 개의 독특한 작용 방식으로 나누어졌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 하나의 단순한 인식 기능은 성령께서 영혼 안에 심어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소망을 가지고서 타락한 세상의 기쁨을 버린 사람, 그리고 극기를 통해서 모든 육체적인 욕망을 죽인 사람들만이 이 단일한 인식 기능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서 세상 염려에서 해방된 지성이 활발히 작용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지성은 그 진보한 분량에 따라 자신의 기쁨을 몸에게도 전달하며, 무한히 기뻐하면서 사랑의 노래와 찬양을 합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이 때에 영혼과 몸을 채우는 기쁨은 썩지 않는 생명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26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정신을 혼란하지 않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성이 정신을 통과하는 생각들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생각은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고 마귀에게서 온 악한 생각은 몰아낼 수 있습니다. 바다가 잔잔하면, 어부들이 깊은 곳을 조사하면서 물속에서 이동하는 고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칠면, 사나운 파도 때문에 바다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며, 어부의 솜씨와 기술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을 어지럽게 하는 불의한 노염에 시달리는 지성의 관상 능력에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27

자기의 모든 허물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분심함이 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지성의 소유자만이 자기의 허물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눈을 가진 사람은 날아다니는 모기와 하루살이 등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작은 물건은 전혀 보지 못하고 큰 물건은 흐릿하게 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영혼이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멀어버린 눈을 회복시킨다면, 영혼은 아주 작은 허물도 크게 생각하며 항상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리이다"(시 140:13). 그러나 세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영혼은 사람을 죽이거나 중벌을 받을 행동을 범하고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다른 잘못을 거의 분별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것을 진보의 표식으로 간주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것을 변호합니다.

 

28

성령만이 지성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보다 강한 자가 와서 약탈자를 타도하지 않으면, 그가 사로잡은 것들은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눅 11:21-2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특히 영혼의 평안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성령의 거처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면에 항상 타오르는 영적 지식의 등잔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 등불이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계속 빛나고 있으면, 지성은 마귀들의 공격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럽고 거룩한 빛에 의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면, 마귀의 공격이 크게 약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고 했습니다. 이는 "악한 행동이나 생각에 의해서 선하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보호해 주는 빛을 빼앗길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시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성령은 결코 소멸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즉 성령이 떠나가시면, 지성은 영적 지식의 빛이 없이 어둠 속에 남게 됩니다.

 

29

사랑이 많으신 성령께서는 영혼이 본성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식 기능은 하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이 서로 다른 것도 몸의 변화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서 현재 영혼이 작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지성 안에 자리잡은 혼란 때문에, 이 단일한 인식 기능이 분열됩니다. 따라서 영혼의 한쪽 측면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욕적인 부분에 몰두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게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영혼의 다른 측면은 지성의 활동을 즐거워하며, 따라서 우리가 극기를 실천할 때에 지성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이탈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영혼의 세상적인 욕망을 그 영적이고 지적인 갈망과 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신성이 우리 마음의 내적 성소를 적극적으로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열되지 않은 인식 기능, 즉 통일된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 다.

 

30

지성의 인식 기능은 상이한 실체들의 맛을 정확하게 식별하는 능력 안에 존재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미각은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실수 없이 구분하기 때문에 그는 좋은 것을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이탈하여 활발하게 작용하는 지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를 감지할 수 있으며, 마귀에게서 오는 은혜의 망상 때문에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좋은 음식을 맛본 사람은 경험에 의해서 각각의 음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압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생각들을 이기고 승리한 지성은, 자신이 성령의 은혜를 맛보고 있을 때 그것을 분명히 압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지성은 사랑의 에너지로 말미암아 이 맛을 항상 새롭게 기억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실수 없이 선택합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궁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빌 1:9-10)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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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성이 성령의 은혜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사탄은 고요한 밤에 기만적 인 감미로운 의식을 가지고 영혼을 귀찮게 하는데, 그 때에 우리는 옅은 잠이 듭니다. 그 때 지성이 주 예수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사단의 속임수에 대적한다면, 사탄은 이 술책을 포기하고 그 후로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영혼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 결과, 지성은 악한 자의 속임수를 분명히 분별하게 되며, 분별의 기술이 한층 성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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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되어있는 동안 몸이 깨어 있으면. 참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옅은 잠이 들면, 은혜의 환상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참된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를 의식적으로 기쁘게 하며, 영혼을 크게 기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랑으로 몰고 갑니다. 반면에, 은혜의 망상은 속임수의 바람으로 영혼을 흔들어 놓습니다. 지성이 강하게 하나님의 기억하고 있으면. 마귀는 육체에 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영혼에게서 영적 인식 경험을 빼앗으려 합니다. 만일 그 때 지성이 주 예수를 기억하고 있으면, 지성은 원수의 기만적인 감미를 쉽게 파괴하고 그와 싸우러 나아갈 것입니다. 그는 은혜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얻는 확신을 무기로 삼습니다.

 

33

때때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붙으면 모든 환상과 형상들로부터 해방되어 의심 없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몸과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 일은 사람이 깨어 있을 때나, 또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 아래 잠들기 시작할 때에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자신이 향해 가는 대상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에너지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 충만해진 영혼은 그 순간 끊임없는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 지성이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부정한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지성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악한 자를 물아내기 위해서 거룩한 이름을 불러도 그것이 계속된다면, 그가 경험하는 감미는 미혹자에게서 온 은혜의 망상이며 그 기쁨은 거짓 기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특성이 없고 무질서한 이 기쁨을 통해서 영혼을 자신과 연합하게 만들려 합니다. 지성이 영적 인식과 관련된 경험을 거리낌 없이 자랑하는 것을 보면, 마귀는 그럴듯한 은혜의 망상을 사용하여 영혼을 유혹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그 축축하고 쇠약하게 만드는 감미에 유혹되어 미혹자와의 교제를 경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은 마음 외부에 서성거리고 있으며 지성의 깊은 곳에 은혜가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화실히 알지 못하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맛볼 수 없으며, 마귀가 주는 쓴 맛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지성이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무장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34

영혼의 본성적인 사랑과 성령으로부터 영혼에게 임하는 사랑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의 활동은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소원에 동의하는 데 의존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선택된 길을 굳게 지키지 않을 때에 그것은 쉽게 악한 영에게 정복되고 왜곡됩니다. 그러나 성령에게서 오는 사랑은 영혼을 자극하므로 영혼은 그 사랑의 즐거움과 신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 때 지성은 성령의 에너지로 말미암아 사랑과 기쁨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35

거친 바다에 기름을 부으면 잠잠해지듯이, 성령의 은혜로 기름부음을 받은 영혼은 쉽게 평온해집니다. 그 영혼은 시편 기자의 말처럼 자신을 보호해 주는 공정한 은혜에 기꺼이 복종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시 62:5). 따라서, 마귀들이 아무리 자극해도 영혼은 성내지 않으며 큰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혼을 온화하게 하지 않으면, 이 러한 상태에 들어갈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은영적인 길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정결함을 수여해 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시 19:9).

 

36

지성의 인식 기능에 대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영혼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감지한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영혼에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후5:7). 혹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빛이나 불같은 형태가 나타난다면, 결코 그 환상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분명히 원수의 속임수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경험했을 때, 무지하여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썩어질 몸 안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고후 6:6)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의 거룩한 이적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37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영혼에게 나타나는 꿈은 영혼의 건강을 판단하는 확실한 기준입니다. 그런 꿈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내적 감각에 충격을 주지 않으며, 갑자기 위협적인 것이 되거나 웃음소리가 올려 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 꿈은 부드럽게 영혼에게 다가와 영적인 기쁨을 채워 줍니다. 따라서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영혼은 꿈에서 주어진 기쁨을 다시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귀들이 주는 환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형태나 일관성 있는 형태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이 선택한 생활 방식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기만적이기 때문에 취한 것은 오랫동안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리치고 위협하며, 때로는 군인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어떤 때는 고함을 쳐서 영혼의 귀를 멀게 합니다. 그러나 정결한 지성은 그들의 실체를 인식하여 육체를 잠에서 깨웁니다. 어떤 때는 그것들의 계략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종종 지성은 꿈꾸는 동안에 마귀들에게 도전하여 그들을 크게 성나게 합니다.

그러나 좋은 꿈이라도 영혼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내면에 부드러운 슬픔과 근심이 따르지 않는 눈물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겸손함이 크게 진보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38

앞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좋은 꿈과 나쁜 꿈의 차이점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정결함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규칙은 꿈에서 나타나는 것을 절대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꿈은 우리의 방황하는 생각들을 반영하는 영상이거나 마귀들의 조롱에 불과합니다. 혹시 선하신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내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거절해도,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마귀들의 계략을 경계하여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지시한 꿈의 유형들 사이에는 정밀한 차이점이 있지만, 종종 영혼이 인식하지 못한 속임수 때문에 더럽혀지면, 정확한 분별 의식을 상실하여 나쁜 꿈을 좋은 꿈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39

주인이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다가 밤중에 집에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하인은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주인의 음성을 모방하여 속이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 속아 주인이 맡겨놓은 물건을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하인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물건을 조금도 잃지 않으려고 주인의 음성조차 속임수일 것이라고 의심한 하인을 칭찬합니다.

 

40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강력하게 힘을 얻기 시작한 지성은 완전히 투명해져서 자신의 빛을 선명하게 봅니다. 이런 일은 영혼의 힘이 정념을 지배할 때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4)라고 말하면서, 빛이든 불이든 형태를 가지고 지성에게 나타나는 것은 모두 원수의 악한 계략의 산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형태를 갖춘 환상을 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수덕생활을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탄은 쉽게 우리 영혼을 빗나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의식적으로 충만하게, 다시 말해서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눅 10:27)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지점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힘을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으나 이미 이 세상을 버린 사람입니다.

 

41

기초적인 덕목들 중에 으뜸 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먼저 주제넘음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 우리 안에 겸손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해 주는 문입니다. 아담은 겸손을 거부했기 때문에 음부의 가장 깊은 곳에 떨어졌습니다. 주님은 겸손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순종을 통해서 인류를 불순종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순종하며 사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의 축복을 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주제넘음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겸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전진할 때에 겸손은 덕의 길을 인도해주는 확실한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42

모든 덕의 공통점은 자제입니다. 따라서 자제를 실천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자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몸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제거하면, 그 사람은 장애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덕을 무시하는 사람은 자제의 조화로운 전체적인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덕목들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속사람을 정화하는 힘을 가진 덕목들도 배양해야 합니다. 영혼이 불순종의 마귀와 간음하게 내버려두면서 몸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또 허영심과 자만심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작은 고통조차도 참고 견디지 않으면서 탐식이나 다른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겸손한 정신으로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들만 상을 받는 심판 때에, 그 사람은 어떤 상을 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

 

43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든 절제되지 않은 욕구를 미워하여 그 미움이 습관이 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음식의 절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음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끼지 말아야합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악하고 가증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삼가는 것은 그 음식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먹는 일이나 지나치게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피함으로써, 우리 몸의 격하기 쉬운 부분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음식을 절제하여 남은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데, 그것이 성실한 사랑의 표식입니다.

 

44

우리 앞에 차려진 음식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참된 지식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매우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창 1 :31 참조). 그러나 지나치게 좋은 음식이나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을 삼가는 것은 보다 큰 분별력과 이해력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감미를 충분히 맛보지 않는 한, 이 세상의 즐거움으로부터 이탈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45

과식하면, 몸은 지성을 게으르고 생기가 없게 만듭니다. 지나치게 음식을 삼가서 몸이 약해지면 영혼의 관상 능력이 저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상태에 따라서 음식을 조절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적절하게 몸을 훈련하고, 약할 때에는 그에 알맞게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의 몸을 약하게 해서는 안 되며, 여행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혼은 육체적인 노력을 통해서 적절히 정화될 수 있습니다.

 

46

형제들이나 나그네들이 찾아오는 것 때문에 자만심이 일어날 때에는,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 체계를 어느 정도 늦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귀는 좌절하여 자기의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후회하면서 쫓겨 나갈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랑의 규칙을 적절히 성취하게 될 것이며, 일상적인 수행(修行)을 늦춤으로써 자제의 비밀을 감추어둘 수 있을 것입니다.

 

47

금식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그것은 자제를 원하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금욕 고행하는 사람은 금식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목표에 이르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술가는 자기의 작품이 도구 덕분이라고 자랑하지 않으며, 작품자체가 자기의 솜씨를 증명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48

땅에 씨를 뿌린 후 물을 적당히 주면 곡식이 깨끗하게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비가 억수같이 오면 가시와 엉겅퀴만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포도주를 적절히 마시면 성령께서 마음 밭에 심어 놓으신 씨앗에서 깨끗한 싹이 솟아나서 훌륭한 수확을 거둡니다. 그러나 과음하여 마음 밭이 흠뻑 젖으면, 마음이 맺는 생각은 엉겅퀴와 가시뿐입니다.

 

49

우리의 지성은 과음이라는 파도 속에서 헤엄을 칠 때에는 잠자는 동안에 마귀가 만들어 놓은 형상들을 정욕적으로 응시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매력적인 허깨비들을 만들고는 그것들을 마치 사랑하는 여인처럼 다룹니다. 포도주 때문에 성적인 기관이 자극을 받으면, 지성은 정욕을 반영하는 쾌락적인 영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적절히 마셔, 과음에서 오는 해로움을 피해야 합니다. 죄를 상상하게 만드는 쾌락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 지성은 환상과 무기력함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에 머뭅니다.

 

50

성욕을 절제하고자 하는 사람은 식욕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든 합성 음료수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료수를 마시면 음식을 많이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음료수는 몸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 기만적이고 인위적인 특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양심을 크게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에 무엇이 부족하기에, 여러가지 향신료를 섞어 마시려 합니까?

 

51

이 거룩한 생활 방법을 가르쳐 주신 주인이요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에 마귀의 명령을 시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신 포도주를 드려 마시게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 관한 분명한 본보기가 됩니다.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것을 배불리 먹고 마시지 말고, 전쟁의 쓰라림을 참고 견뎌야합니다. 치욕을 머금은 해융에 우슬초를 더해야 합니다(요 19:29 참조). 우리의 정화는 주님이 남기신 본보기와 완전히 일치해야 합니다. 완전하게 되려면 정화가 필요하듯이, 영적 전투에는 민첩함이 필요합니다.

 

52

목욕하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거나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기를 위해 목욕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결단력과 자제의 표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뜻한 물 속에서 목욕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몸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아담이 치욕스럽게 벌거벗었던 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아담처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려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의 사악함을 버린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몸을 청결하게 함으로써 극기의 아름다움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이것이 중요합니다.

 

53

병이 들었을 때에는 의사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자연 속에 치료법들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실험을 통해서 의학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사에게 치료의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의 참 구주요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원 공동체나 도시에서 극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환경 때문에 항상 사랑을 통한 적극적인 믿음의 역사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마귀의 변덕과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의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자랑합니다. 한편, 뜻이 같은 두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보다 한적한 장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 임하든지 믿음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마 4:23)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는 병들었을 때에 주님 외에 사막으로부터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믿음은 항상 적극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사막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인내를 발휘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시 68:6).

 

54

병이 들었을 때에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은 영혼이 아직도 육체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의 건강을 간절히 원하며,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잃으려 하지 않으며 병 때문에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큰 난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영혼은 무정념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참된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여겨 기뻐하며 기다립니다.

 

55

호흡하는 대기에 대해 무관심해지지 않는 한, 영혼은 몸에서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육체적인 감각은 믿음에 반대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현세의 일에 관심을 갖지만, 믿음은 오로지 내세의 축복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멋지게 자라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기분 좋게 흐르는 샘물, 꽃이 만발한 풀밭, 멋진 집, 가족을 찾아가는 것 등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과거에 자기가 누렸던 대중적인 명예를 회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는 현세는 낮선 땅을 가로질러 가는 도로로 간주하며, 목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이렇게 정신을 집중해야만 영원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56

시각, 미각 등의 감각을 절제하지 못하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첫 사람은 하와입니다. 금지된 나무를 욕심 없이 바라보았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명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벌거벗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가지고 그 나무를 바라보고, 뜨거운 욕망을 가지고 그 나무를 만지고, 적극적인 육욕을 가지고 그 열매를 맛본 즉시, 하와는 육체적 교섭에 끌리는 것을 느꼈고 벌거벗었기 때문에 정욕에 굴복했습니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갈망은 오로지 즉각적인 감각의 충족이었습니다. 하와는 그 열매의 보기 좋은 모양을 구실로 아담을 타락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그 후,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계명들을 기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아야 하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 거짓된 인생을 통과해야 합니다. 참된 영적 지혜의 표식은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하는 사랑의 날개를 자르는 것이며, 이것이 큰 경험을 한 욥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언급한 것입니다: "언제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욥 31:7).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러는 것은 가장 위대한 극기의 증거입니다.

 

57

지속적으로 자기 마음 속에 거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유혹들로부터 이탈합니다. 그는 육체의 욕망을 알지 못하며, 성령 안에서 삽니다. 그는 정결의 문을 지켜주는 덕의 요새 안에서 자고 깹니다. 육욕적인 욕망의 화살이 그의 감각의 문 앞에까지 날아오지만, 그를 향한 마귀의 공격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58

영혼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갈망을 일기 시작하면, 냉담의 영이 몰래 들어오기 쉽습니다. 이 영은 우리가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며, 내세에 우리를 위해 예비된 축복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또 이 무상한 삶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심지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영적 지식을 획득했다거나 그것이 완전한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영적 지식 자체를 경시합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기력을 빼앗는 냉담을 피하려면, 정신을 좁은 경계 안에 가두어 놓고 오로지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지성은 원래의 열심을 되찾고 무의미한 낭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59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모든 출구를 차단하면, 지성은 그 활동 욕구를 충족시켜 줄 일을 요구합니다. 그 목적을 완전히 성취하려면 지성에게 "주 예수" 기도만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합니다. 지성으로 하여금 계속 그 내면의 성소에서 다른 정신적인 심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 단어에만 집중하게 하십시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름을 쉬지 않고 묵상하는 사람은 때때로 자기의 지성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름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 이름이 영혼의 표면을 덮고 있는 모든 더러움을 태워 없애는 것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신 4:2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영혼 안에 주님의 영광을 향한 큰 사랑을 일깨우십니다. 지성이 마음의 열정으로 꾸준히 이 귀한 이름을 기억하면, 그 이름은 우리 안에 그의 선을 향한 꾸준한 사랑을 심어 줍니다. 이것이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사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값비싼 진주입니다(마 13: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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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적인 기쁨과 완전한 기쁨은 같지 않습니다. 초보적인 기쁨에는 환상이 따를 수도 있지만 완전한 기쁨은 겸손의 힘을 소유합니다. 이 두 기쁨 사이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과 적극적인 눈물이 임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이렇게 영혼은 거룩한 책망을 용광로로 삼아 그 안에서 연단되며, 열심히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환상과는 거리가 먼 기쁨을 적극적으로 경험합니다.

 

61

영혼이 노여움을 느끼거나 술취하여 혼란스러울 때, 또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 지성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굳게 붙들지 못합니다. 정념의 난폭함 때문에 완전히 어두워진 지성은 본래의 인식 형태를 완전히 상실합니다. 거센 정념 때문에 정신의 기억 능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지성이 계속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망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한편, 비록 지성이 순간적인 망각 때문에 그 바라는 대상을 빼앗긴다 해도, 정념에서 벗어난 영혼은 즉시 원래의 활동을 회복합니다. 이제 영혼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되풀이하여 말하게 하여 잠잘 때에도 아버지를 부르는 습관이 형성되게 하듯이, 묵상에 동참하여 함께 "주 예수"라는 이름을 반복할 은혜를 소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친히 간구하시느니"(롬 8:26)고 말합니다. 기도의 덕에서의 완전함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므로, 주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이 집중되고 기뻐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존재 전체로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기억을 갈망하려면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쉬지 않고 "아바 아버지"(롬 8:15)라고 부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62

격앙하는 성질은 대체로 다른 모든 정념보다 더 영혼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하지만, 영혼에게 크게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내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나 다른 죄인들을 이끌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거나 그 방식을 고치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격앙하는 성질을 발휘할 때, 우리는 자기 영혼을 보다 온유하게 만듭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롭고 선하신 목적에 완전히 조화를 이룹니다. 게다가, 종종 죄에 대해 크게 화를 냄으로 말미암아 영혼 안의 약점들을 극복합니다. 우리가 크게 낙심했을 때 부패의 마귀에 대해 영적으로 분개한다면, 죽음의 주제넘음까지도 멸시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님은 두 차례 죽음에게 분개하시고 영적으로 고민하셨습니다(요 12:27; 13:21). 그리고 단순한 의지의 행동에 의해서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에 영적으로 분개하고 번민하셨습니다(요 11:33 참조). 이것은 분개하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면서 우리의 본성 안에 심어 놓으신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만일 하와가 뱀을 대적하여 이 무기를 사용했다면, 육욕적인 욕망에 밀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보건대, 경건한 정신을 가지고 분개하는 힘을 절제하여 사용한 사람의 지성은, 활발하지 못하여 전혀 분개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유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후자는 자기의 감정을 다루는 미숙한 마부를 소유한 듯하며, 언제든지 활동할 준비를 갖춘 전자는 마귀의 군대 한복판으로 덕의 말들을 몰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극기라는 네 마리 말이 모는 마차를 끌고 갑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라간 묘사에서 이 마차는 "이스라엘의 병거"(왕하 2:12)라고 불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 인에게 우선적으로 네 가지 주된 덕목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는 성령에 의해 하늘로 올라갈 때에 자기의 덕을 말로 삼아 불마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63

하나님의 지식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감미를 맛본 사람은 법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서는 안 됩니다. 또 비록 누가 자기의 옷을 벗겨가려 해도 법에 호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비교할 때에 이 세상 통치자들의 정의가 불완전하게 보여 전자를 하나의 법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인간의 법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의 자녀를 구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벧전 2:23). 심지어 옷을 벗기셨을 때에 잠잠하셨고,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얻어낼 때까지 계속 법에 호소합니다. 특히, 관련된 돈에서 이자를 받고 있었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들의 정의는 큰 불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64

우리가 자신의 생계유지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빼앗아 갈 때, 특히 그 사람이 기독교인일 때에는 그들을 고발해야 한다는 말을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당한 일을 한사람을 고발하지 않는 것은 곧 그들의 죄를 장려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보다 재산을 선호하는 데 대한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만일 내가 기도를 포기하고 마음의 문을 지키는 일을 중지하며, 법원을 들락거리면서 부당한 일을 행한 사람들을 고발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분명히 재물을 자신의 구원보다. 그리스도의 계명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눅 6:30)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법에 호소하여 자기 것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을 그의 죄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를 제한할 수 없으며, 피고는 자기가 지은 죄에 적용되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의 무법함을 참고 견디며, 그들이 빼앗아간 것을 돌려받기 보다는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편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회개하여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65

우리가 영적인 길을 택하여 걷기 시작하면, 항상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지위에 있기를 원한다는 구실로 주님의 명령을 무시하기보다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재산을 팔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고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첫째, 이것은 완전한 이탈, 그리고 모든 무법함과 소송에 의해 손상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는 가난을 확보해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죄악의 불을 밝혀줄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겸손의 덕이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소중히 여겨줄 것입니다. 예쁜 옷보다 벌거벗은 것을 더 좋아하는 단순한 마음 때문에 옷을 벗어버린 아기를 안고 품어 주는 어머니처럼, 겸손은 벌거벗은 우리가 자기의 품에 안겨 쉬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6:6)고 말합니다.

 

66

장차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데 대한 보고서를 요구하실 것입니다(고후 8:12). 그 때에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여러 해 동안 나누어줄 수도 있는 것을 잠깐 동안에 나누어주어 지금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무슨 근거로 나를 송사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 "내가 주는 적은 것에 의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제는 누가 도와줄 것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돈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모욕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행해 오신 것처럼 자신이 지으신 것들을 위해서 실수 없이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극을 받아 돕기 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옷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고서, 참된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서 부유함에서 생겨나는 주제넘음을 거부하며 자신의 욕망을 미워해야 합니다(눅 14:26). 나누어 줄 재산이 없으면, 더 이상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구제할 물건이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나누어 주는 일을 즐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을 모조리 소모했을 때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을 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명치 않은 우울함과 굴욕감이 임합니다. 이처럼 깊은 굴욕감을 느끼는 영혼은 정신을 차려 날마다 구제함으로써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을 겸손과 인내를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획득하려 합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시 74:21). 하나님은 먼저 복음의 영광을 위해 모든 재산으로 사람들을 구제하여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신학의 선물을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그 때에 그는 경건한 가난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라고 말한 뒤에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시 68:10-11)고 말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67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은 흠이 없으며 모든 선한 것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선을 사랑하게 하는 선물은 신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초기의 소산으로서, 영혼에게 가장 큰 선물들을 수여해 줍니다. 우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한 욕망 대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화인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멸시하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는 변화시키는 불빛으로 우리의 지성을 둘러싸 천사들의 예배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를 갖춘 후에는 이 관상적 이상의 은사를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가득하며, 우리를 세상의 염려에서 해방시켜 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빛나는 거룩한 진리의 빛으로 지성을 양육해 줍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거룩한 선지자들의 도움을 통해서 신화(神化)된 영혼을 하나님과의 깨지지 않는 교제 속에 결합시켜 주는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신학은 마치 결혼식을 진행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음성이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68

종종 우리의 지성은 집중하여 철저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어렵게 여깁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색은 범위가 넓고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기꺼이 신학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지성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많은 말로 표현하거나 과도하게 기쁨에 도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보내야 하며, 자기의 믿음을 글로 드러낸 사람들의 생각을 무시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성이 자기의 발언을 은혜의 발언으로 혼동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자부심 때문에 엇나가고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고 말이 많은 것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관상을 행할 때에는 지성에게서 환상이나 심상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며,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지성이 고요한 중에 평화로울 때, 그리고 특히 기도의 감미로움 때문에 기뻐할 때에, 지성은 위에서 언급한 허물들을 피할 뿐만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서도 신속하게 거룩한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며 분별의 지식 안에서 겸손하게 전진합니다. 가장 넓은 범위의 사색까지도 초월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는 자기 안에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만 수여됩니다.

 

69

영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영혼은 은혜의 작용을 통해서 자신의 빛의 조명을 받는 경험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신학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전진하면, 지식이 없어도 영혼의 내면에서 은혜의 비밀들이 작용합니다. 은혜는 먼저 우리로 하여금 관상의 길을 가면서 즐거워하게 하며 무지로부터 영적 지식에게로 불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지식이 오만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작용합니다. 한편, 우리는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어느 정도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보다 겸손해지며 주님의 영광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희망에 부풀어 기뻐해야 합니다. 큰 슬픔이 영혼으로 하여금 믿음을 잃고 낙심하게 하듯이, 큰 기쁨은 영혼을 부추겨 주제넘게 만듭니다(이것은 초보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조명과 포기의 중간에 시련이라는 경험이 놓여 있고, 슬픔과 기쁨 사이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고 말하고, 또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고 말합니다.

 

70

목욕탕의 문을 열어 놓으면, 목욕탕 안의 온기가 빠져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선한 말이라도 많은 말을 하는 영혼은 말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흩어버립니다. 그런 후에, 환상으로부터 지켜줄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지성은 적절한 생각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쏟아냅니다. 혼동과 환상에 어울리지 않는 귀중한 생각들은 말이 많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시기에 침묵하는 것은 귀중한 일입니다. 침묵은 지혜로운 생각의 어머니입니다.

 

71

영적 지식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한 영혼은 많은 정념들, 특히 노염과 미움에 시달립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마귀들이 이러한 정념들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진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영혼은 사람들이 정의를 짓밟는 것을 보아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욕망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이 세상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정념들을 초월하기 시작하면, 꿈에서라도 정의가 무시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그는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격노하며, 공의를 파괴하는 사람이 개심하는 것을볼 때까지 계속 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불의한 자들을 미워하고 의로운 자들을 사랑합니다. 영혼의 베일(몸)이 극기를 통해서 거의 완전히 투명해지면, 영혼의 눈은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의 무감각함을 개탄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들은 미움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미움에 시달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영혼 안에 미움이 있으면, 영적 지식 이 마비됩니다.

 

72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불이 붙어 기뻐하는 영혼을 가진 신학자는 때가 되면 무정념의 세계에 이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영적 지식의 경험에 뿌리를 둔 영지자(靈知者)는 정념을 초월합니다. 흠 없는 분별력을 획득한 영지자는 점진적으로 신학적 관상의 덕을 획득할 수 있으며, 자기를 낮추는 신학자도 영적 지식의 경험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영지라는 이 두 가지 은사는 결코 한사람 안에서 완전히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자와 영지자는 각기 상대방이 크게 즐기는 것을 보고 놀라며, 그들의 내면에서는 겸손과 거룩함을 향한 갈망이 증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전 12:0)고 말합니다.

 

 

73

본성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큰 소리로 시편을 노래하며 소리내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힘을 얻으면. 그는 기뻐하면서 지극히 평화롭게 마음속으로만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첫번째 상태에는 거짓 기쁨이 수반되며, 두번째 상태에는 신령한 눈물에 이어 고요를 사랑하는 즐거움이 수반됩니다. 음성을 억제하기 때문에 열정이 유지된 하나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마음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추수하기를 바라면서 눈물로 마음 밭에 기도의 씨를 뿌립니다(시 126:5). 그러나 크게 낙심하여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노래의 열기에 의해 두꺼운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즐겁게 소리를 높여 잠시 시편을 노래해야 합니다.

 

74

자기-이해에 도달한 영혼은 내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이 뜨거움이 세상 염려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으면, 힘이 닿는 한 평화의 하나님을 찾으려는 평화를 향한 갈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오관(五官)에 의해 주의집중이 흩어지기 때문에, 또는 근본적인 부족함 때문에 본성이 쉽게 소진되기 때문에, 영혼은 곧 그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현인들은 원하는 것을 극기를 통해서 얻을 수 없었습니다. 진리의 충만인 영원한 지혜가 그들의 지성 안에서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령이 마음 속에서 만들어 내시는 따뜻한 느낌은 지극히 평화롭고 영속적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일깨웁니다. 그것의 열기는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의 부채질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마음을 통해서 무한한 사랑으로 전인을 기뻐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 종류의 따뜻함을 인정하면서 둘째 종류의 따뜻함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본성적인 사랑은 우리의 본성이 극기를 통해서 건전한 상태에 있다는 증거이지만, 그 사랑에는 지성을 무정념의 상태로 이끄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한 힘은 영적 사랑이 가지고 있습니다.

 

75

북풍은 맑게 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남풍이 불면 안개와 구름이 낍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화를 받아 활력을 얻은 영혼은 마귀의 안개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러나 오류의 구름이 사납게 몰아치면, 영혼은 죄의 구름으로 완전히 덮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주고 깨끗하게 하는 성령의 바람을 향하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영적 지식의 빛 속에서 그 바람이 북쪽으로부터 불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1:4 참조). 그 때에 영혼의 관상 기능은 깨끗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하게 거룩한 것의 관상에 몰두하며, 빛이 충만한 대기 속에서 빛의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지식의 빛입니다.

 

76

어떤 사람들은 은혜와 죄 즉,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이 세례받은 사람의 지성 안에 동시에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두가지 영들 중 하나는 지성에게 선을 촉구하고, 나머지 하나는 악을 촉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과 지성의 통찰을 통해서 그것을 달리 이해합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은혜는 외부에 있으면서 영혼이 선을 지향하도록 격려합니다. 반면에 사탄은 영혼의 깊은 곳에 숨어 있으면서 지성이 신적인 것에게 접근하는 길을 차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순간부터, 마귀는 바깥에 있고 은혜가 우리의 내면에 거합니다. 따라서, 세례 받기 전에는 오류가 영혼을 다스렸지만, 세례 받은 후에는 진리가 영혼을 다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사탄은 여전히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종종 전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은혜와 함께 영혼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은 쾌락의 즐거움으로 지성을 흐리게 만들기 위해서 육체의 기질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이렇게 행하는 것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은 폭풍과 불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 결국 거룩한 축복을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7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은혜는 지성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지성 자체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은혜는 지적 인식에 의해서 신비하게 그 보물을 영혼에게 전해 줍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이 보물을 굳게 붙들려 한다면, 생명의 보물이 발견된 밭을 사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물건을 모두 없애려 할 것입리다(마 13:4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재물을 모두 없애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추어져 있는 곳을 발견합니다. 영혼이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성에게 계시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주님은 영혼이 마귀에게 크게 시달리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며, 정화되는 동안에 악한 생각에 더럽혀지는 방법 때문에 느끼는 큰 수치를 통해서 더욱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78

우리는 영혼의 지적 활동 덕분에 하나님의 형상에 동참합니다. 몸은 영혼의 거처입니다. 아담의 타락에 따른 결과로서, 영혼에 새겨진 형상의 윤곽이 더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썩음에 예속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육체를 취하셨고, 우리를 거듭 나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물을 수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거룩하신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물을 통해서 거듭났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긴다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죄를 몰아내시는 성령께서 즉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영혼에 새겨진 형상은 단일하고 단순한 것이므로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영혼 안에 동시에 두 개의 반대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룩한 세례를 통해서 무한한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은혜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침투해 들어오며, 그에 따라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획득하는 능력이 새로워질 때, 어떻게 마귀가 영혼 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고후 6:14).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우리는 세례의 물을 통해서 뱀이 지성의 성소에서 쫓겨났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소유한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세례가 우리에게서 죄의 얼룩을 제거해 주지만, 우리의 의지의 이중성을 즉각적으로 치유하지는 않으며, 또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거나 미혹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의의 무기를 손에 들게 되며, 영혼 혼자의 노력을 통해서는 안전하게 보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보존하게 됩니다.

 

79

사탄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영혼에게서 쫓겨나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몸을 통해서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 깊은 곳, 즉 지성 안에 거합니다. 성경에는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린다"(시 45:13)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거룩한 갈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낍니다. 악한 영들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 침투하여 육체적인 감각 속에 숨어 있으면서, 육의 허락을 통해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지성은 항상 성령의 법을 기뻐하지만(롬 7:22). 육체의 기관들은 쾌락의 유혹을 허용합니다. 더욱이, 영적 지식이 진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은혜는 지성의 인식 기능을 통해서 몸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마귀는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폭력에 의해 영혼을 붙잡습니다. 특히 영적인 길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나약해질 때에 그렇습니다. 마귀는 영혼으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살인자입니다.

 

80

신자들의 마음 속에 은혜의 세력과 죄의 세력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혼 안에 거룩한 빛이 마귀의 어두움과 가까이 있어도 거룩한 광채는 결코 마귀와의 접촉에 의해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견해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말씀은 그들이 성경의 참된 의미에서 떠나갔음을 보여 줍니다. 신학자 요한이 그렇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큰 긍휼을 나타내셔서 우리 안에 자기의 거룩한 지식의 빛을 비추어 주시면서 자기의 육체를 통해서 피조물에게 참 빛을 나타내려 하셨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 8:7), 이 세상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조금 뒤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분이 모든 사람을 인도하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9-12).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이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고 말하면서 "그것을 잡다(파악하다, 이해하다)"는 말을 해석합니다. 따라서 요한의 말은, 참 빛을 잡는 데 실패한 것이 사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참 빛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서는 참 빛이 비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그 행한 기적에 대해 듣고서도 마음이 어두워 영적 지식의 빛에 가까이 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81

영적 지식은 두 종류의 악한 영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교활한 영과 본질상 물질적인 영입니다. 교활한 마귀는 영혼을 공격하며, 물질적인 마귀는 호색적인 유혹을 통해서 육을 사로잡습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인류에게 해를 끼치려는 동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을 공격하는 마귀와 몸을 공격하는 마귀는 크게 대조적입니다. 어떤 사람의 내면에 은혜가 거하지 않을 때에, 마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마치 뱀처럼 잠복해 있으면서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성 안에 은혜가 감추어져 있을 때에는. 마귀는 온갖 종류의 백일몽이나 죄악 된 정념의 형태를 취하고서 마치 검은 구름처럼 마음 속 여러 곳을 이동해 다니며 지성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여 은혜로부터 끊어버립니다. 영혼을 공격하는 마귀들은 영혼의 정념들, 특히 모든 악의 어미인 주제넘음을 자극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칭찬을 받으려 하는 천한 욕구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육체를 공격하는 마귀들이 부끄러운 욕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끓게 할 때에도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악한 영들의 세력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을 공격하는 마귀들이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격하시킨다면, 즉 인간의 본성은 결국은 죽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고 부추긴다면(마귀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괴롭히면서 즐겨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심판의 두려운 측면을 보면서 동시에 천국의 존귀와 영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낙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마음을 억제하여 경박해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82

복음서에서, 주님은 사탄이 자기 집에 돌아와서 집이 청소되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다시 말해서 마음이 메마른 것을 발견하면, 일곱 귀신을 불러 모아 다시 마음 속에 들어와 숨어 있기 때문에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휠씬 나빠진다고 가르치십니다(마 12:44-45).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사탄이 영혼 깊은 곳에 들어와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도 동일한 영적 지혜를 전합니다. 그는 금욕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면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완전함에 이른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말합니다. 또 사탄이 몸을 통해서 성령 안에 있는 영혼을 공격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전쟁과 포로가 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포로가 되는 것은 폭력에 의해 끌려감을 의미하며, 전쟁은 대등한 적수들 사이의 싸움을 가리킵니다. 정확하게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영혼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을 마귀가 불화살로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원수와 가까이에서 씨름하지 않는 사람은 멀리서 화살을 사용하여 그를 공격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성 안에 있는 은혜 때문에 그의 지성 안에 숨을 수 없을 때, 그의 몸 안에 잠복하여 몸의 기질들을 활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어느 정도 약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몸의 기질들 때문에 지성이 육욕적인 쾌락의 평탄한 길로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지성은 거룩한 빛에 의해 활력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바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롬 7:22 참조). 그러나 육체는 그 기질들 때문에 쉽게 악한 영들을 받아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유혹을 받아 그들의 사악함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지성은 하나님과 마귀가 함께 거하는 거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지성이 은혜에 복종하면서 자유로이 마귀와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며 몸은 분별없는 쾌락의 냄새에 이끌려 간다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몸 안에 미혹하는 악한 영들이 자유로이 잠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들은 육체를 유혹하여 육욕적인 쾌락의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게 함으로써 지성을 공격합니다. 죄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몸 안에 마귀들이 거하는 것을 허락하는 데는 타당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 의지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노력하여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는 완전한 성령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및 죄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왔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83

마음에서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만들어집니다(눅 6:45 참조). 그것은 마음이 본성적으로 악한 생각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인 미혹의 결과인 악에 대한 기억이 습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대체로 마귀들의 공격의 결과로서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한 생각이 마음에서 솟아난다고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지성 안에 은혜와 더불어 죄가 거한다고 추측해왔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시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8-19)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지성이 마귀들이 육체의 활동을 통해서 제안한 생각들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둘의 연합 때문에 몸의 기질이 영혼이 지닌 이러한 연약함을 강조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기만하는 것의 아첨을 받을 때에 무한히 즐거워하며, 그 때문에 마귀가 영혼 안에 뿌려놓은 생각들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에게 동의하여 탐닉할 때에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위에 인용한 본문에서 주님이 비난하신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사탄이 교활하게 제안하고 새겨놓은 생각에 몰두하는 사람은, 후에 자신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로서 그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84

복음서에서 주님은 강한 자가 침입했을 때에는 그보다 더 강한 자가 무기를 빼앗고 결박하여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29 참조). 이처럼 부끄럽게 쫓겨난 침입자가 어찌 다시 돌아와서 자유로이 살고 있는 참 주인과 함께 거할 수 있겠습니까? 왕은 왕위를 강탈하려 한 반역자가 자기의 궁전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당장에 죽이거나 결박하여 군인들에게 넘겨주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게 만듭니다.

 

85

우리가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소유하는 것은 성령과 마귀가 우리 지성 안에 함께 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은혜는 처음에는 세례 받은 사람들 안에서 그 존재를 감추고 기다리면서 그 영혼이 어디로 기우는지를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완전히 주님을 향해 돌아서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자신의 존재를 마음에 드러내고, 다시 영혼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보기 위해 기다립니다. 동시에, 영혼으로 하여금 보다 뜨겁게 결심하고 보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게 만들기 위해서, 마귀의 화살이 영혼의 가장 예민한 곳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허락합니다. 만일 그 때 그 사람이 계명을 지키는 일에 진보하기 시작하고 쉬지 않고 주 예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불이 마음의 다소 표면적인 인식 기관에까지 퍼져 영혼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가라지들을 태워 버립니다. 이제 마귀의 공격은 영혼 깊은 곳을 관통하지 못하고 단지 정념에 복종하는 부분을 찌를 뿐입니다. 수덕자가 모든 덕을 획득했을 때, 특히 정념을 완전히 떨쳐버렸을 때, 은혜는 보다 깊은 의식으로 그의 전 존재를 조명해 주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뜨겁게 해줍니다. 이제부터는 마음 속에서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성령의 입김 때문에 마귀의 불화살은 몸에 토착하기 전에 공중에서 꺼져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하나님은 이만큼의 완전함을 이룬 사람들을 마귀가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의 지성을 빛이 없는 상태로 버려두십니다. 따라서 그의 자유의지는 전혀 은혜의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가 금욕적인 노력을 통해서 죄를 정복할 뿐만 아니라 영적 경험이 크게 진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노력하여 야곱의 사닥다리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비교해 볼 때에 학생의 완전함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결코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86

주님은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0:18 참조).이것은 가증한 사탄이 거룩한 천사들의 거처를 구경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종들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간 물러나셔서 그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설명이 못 됩니다. 하나님이 물러나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교육하기 위해서 물러나십니다. 이것은 결코 영혼에게서 신적인 빛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일은 은혜가 종종 그 존재를 지성에게서 감추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그것은 영혼이 겸손하게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함으로써 마귀의 공격에 저항하여 진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영혼은 점차 원수의 사악함을 알게 됩니다. 아기가 음식을 먹지 않으려 하면, 어머니는 잠시 동안 아기를 내버려 두는데, 짐승이나 험상궂게 생긴 사람을 보고 놀란 아기는 겁에 질려 울면서 엄마품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러나시는 또 한 가지 유형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 영혼에게서 하나님이 완전히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마귀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나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참 하나님의 은혜의 자녀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존재를 감추었다가 다시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양육합니다.

 

 

87

우리를 교육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영혼에게 큰 슬픔, 겸손, 그리고 약간의 실망이 임합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허영과 자기-영광을 향하는 경향을 가진 영혼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즉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감사의 눈물, 그리고 침묵을 향한 큰 갈망이 가득찹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완전히 떠나가시면, 영혼은 절망과 불신앙과 노염과 교만으로 가득찹니다.

우리는 이미 이 두 종류의 떠나가심을 경험했으므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첫번째 경우,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고 탄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한 아버지처럼 덕과 악의 차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자신의 임재를 감추심으로써 제멋대로인 우리의 성품을 훈련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두번째 경우에는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해야 하며, 우리의 노력을 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전처럼 우리 마음에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세상을 더욱 멀리 해야 합니다. 또, 사탄과 영혼이 직접적으로 싸울 때(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하기 위해서 떠나가시는 동안에 일어나는 싸움) 은혜는 자신을 숨기지만 은밀한 방법으로 영혼을 도와주므로, 원수가 볼 때에 영혼 혼자만의 힘으로 승리한 것 처럼 보인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88

겨울철에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햇볕을 받는 가슴 쪽은 따뜻해지지만, 해를 받지 못하는 등 쪽은 춥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에너지를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뜨거워집니다. 따라서, 그들의 지성이 영적 생각들을 형성하기 시작할 때에 마음의 바깥부분에서는 여전히 육체적인 생각을 형성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성 안에서 두 개의 존재가 싸우고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예를 든 사람이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햇볕을 받으면 따뜻함을 느끼듯이, 영혼이 동시에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소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식의 형태와 관련하여 지식이 이중성의 상태에 빠진 이후로, 지성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시에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분별력이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에게도 쉽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이후로 인간의 사유 능력은 두 가지 형태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지성은 항상 선한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갑자기 악한 것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성취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인식 기관들은 은혜의 빛을 충분히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그 불길로 우리의 생각들을 삼키고, 방해받지 않는 사랑의 평화 속에서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며, 더 이상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신령한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함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주 예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항상 이러한 은혜의 결과들이 존재합니다.

 

89

하나님의 은혜는 중생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은사를 주는데, 그 둘 중 하나는 나머지 하나보다 한없이 우월합니다. 첫 번째 은사는 세례의 물 속에서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죄의 얼룩을 완전히 제거하여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끗이 씻어줄 때에 단번에 주어집니다. 두번째 은사-하나님의 모양-을 받으려면 우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지성이 성령을 완전히 의식하기 시작하면,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윤곽)을 하나님의 모양으로 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가들은 먼저 단색으로 사람의 윤곽을 그리고 그 다음에 색칠을 시작하여, 자신이 그리는 대상의 모양을 세미한 부분까지 묘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재형성하여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의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화실에 벌거벗고 겸손히 서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덕을 차례로 꽃 피게 하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들어 올려 줌으로써, 영혼 위에 하나님의 모양을 묘사합니다. 우리의 인식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모양이 완성되는 것은 은혜의 빛에 의해서만 알게 될 것입니다. 지성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이 진보하면서 그 인식 능력을 통해서 신령한 사랑을 제외한 모든 덕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신령한 사랑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지성이 그러한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양의 완성을 받지 못한다면, 다른 덕을 거의 모두 소유하고 있어도 완전한 사랑에는 동참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성은 하나님처럼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닮습니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밑그림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하면, 모델의 미소까지도 비슷하게 표현해 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모양으로 다시 그려지는 사람에게 발생합니다. 사랑의 빛이 더해지면,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하나님의 모양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됩니다. 모든 덕 중에서 사랑만이 영혼에게 무정념의 상태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이런 식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날마다 새로워지며, 사랑의 완전함 속에서 자신의 완성을 발견합니다.

 

90

우리가 거룩함을 간절히 바라면, 성령은 처음부터 영혼에게 하나님의 감미를 충분히 맛보게 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지성은 영성생활에 대한 궁극적인 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은 종종 이 귀하고 생명을 주는 은사를 감추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모든 덕을 획득했어도 아직 영구적인 형태의 거룩한 사랑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영적 경기를 하는 사람의 영혼을 미움의 마귀가 더욱 괴롭힙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한다고 여기며, 애정의 입맞춤까지도 증오로 더럽힙니다. 영혼은 여전히 거룩한 사랑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더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생활의 가장 높은 단계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을 의식적으로 충분히 맛보려면, 그것이 얼마 동안 영혼에게 강력하게 작용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 순교하거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들이 아니고는 육체 안에 있으면서 사랑의 완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에 이른 사람은 완전히 변화되며, 심지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에 대한 욕구도 느끼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랑에 의해 양육되는 사람이 어찌 그런 것들에 대한 욕구를 느끼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은 장차 성도들이 느낄 기쁨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말했는데, 그것들은 완전한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완전함을 향해 나아간 사람은 계속 이 사랑을 맛볼 수 있지만.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고후 5:4) 되지 않는 한 그것을 완전히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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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변함없는 결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적인 지식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충만하고 적극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에너지를 강력하게 느꼈기 때문에, 내 영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으로 육체를 떠나 주께로 가며 어떤 의미에서 이 무상한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고 해를 입어도 성내지 않고, 자기를 욕하거나 해를 입힌 사람의 영혼과 사랑 안에서 연합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또는 하나님을 거슬러 불의를 말하는 사람, 또는 그 외의 다른 형태의 사악함을 따르는 사람에게만 성을 냅니다. 하나님을 자기보다 사랑하는 사람, 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예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의만 존중되기를 원하며, 그 의는 그에게 영원한 영광을 부여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심오한 경험을 통해서 확립된 강력한 태도를 지니고서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그러한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활력을 얻은 사람은 그 순간에는 믿음마저 초월합니다. 그는 자신의 큰 사랑의 판단에 의해서, 전에는 믿음으로 공경했던 분을 이제는 마음속에서 의식적으로 느껴 압니다. 거룩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말하면서 이것을 분명히 표현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충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은 그 순간에 거룩한 갈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믿음도 초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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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갑자기 성을 내면서 어떤 사람을 욕하여 원수로 만들었다면, 우리 안에서 영적 지식이 활동할 때에 예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충분히 사과하여 우리를 향한 과거의 좋은 감정을 회복시킬 때까지 그 가책은 계속됩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유 없이 우리에게 화를낼 때에도, 이 강력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리는 불편함과 걱정으로 가득 찹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의 지혜"(고전 2:6)를 좇아 말하는 사람들 중 하나에게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성은 관상을 게을리 합니다. 이유 없이 우리에게 성낸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지 않는 한, 완전히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지식은 정신이 거룩한 것에 대한 이상을 확대하거나 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노염을 풀지 않거나, 우리가 자주 가는 장소를 피한다면. 영적 지식은 우리에게 영혼 안에서 넘쳐흐르는 긍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그려봄으로써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법을 완성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기를 원한다면, 까닭 없이 화를 내는 사람까지도 분을 품지 않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지성은 신학에 전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올라가며 방해받지 않고 둘째 단계에서 첫째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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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거룩함을 갈망하기 시작한 사람이 볼 때에, 덕의 길은 매우 험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길이 실제로 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본성은 육욕적인 쾌락의 넓은 길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덕의 길을 반 이상 여행한 사람은 그 길이 평탄하고 쉬운 길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은혜의 에너지를 통해서 나쁜 습관이 좋은 습관에게 정복될 때에, 그와 더불어 분별없는 쾌락에 대한 기억도 파괴됩니다. 그 후 영혼은 기뻐하면서 덕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니라"(마11: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강력한 의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실천해야 합니다(마 11 :12 참조). 그렇게 하면, 주께서 우리의 의도와 수고를 보시고서 자원하는 마음과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려는 생각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원하는 마음을 주셔서 항상 기쁨으로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해 주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진실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빌 2:13)은 하나님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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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납을 완전히 따뜻하게 하거나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인(印)을 새길 수 없듯이, 연약함과 수고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인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고후 12:9). 잠언에서도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고 말합니다. 바울이 약함이라고 말하면서 의미한 것은 십자가의 원수들이 행하는 공격, 그 시대의 모든 성도들과 바울에게 계속 가해진 공격으로서, 그들이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한"(고후 12:7)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치욕 때문에 완전의 삶을 한층 더 유지했고, 멸시를 받을 때에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악한 생각과 육체의 질병을 의미할 때에 약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 시대에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육체는 무서운 고문이나 여러 가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죄의 결과로서 인간의 본성을 공격하는 정념들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주님의 은혜에 의해 교회 안에 평화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몸은 질병에 의해, 영혼은 악한 생각에 의해 연단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특히 내면에서 거룩한 지식이 완전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자부심과 자만심을 버릴 수 있으며 큰 겸손을 통해서 마음에 신적 아름다움의 인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면서 주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잦은 질병과 악한 생각과의 싸움이 제2의 순교로 간주될 것입니다.

과거에 무법한 통치자들의 입을 빌려 거룩한 순교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세상의 명예를 선택하라"고 말했던 마귀는, 이제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같은 말을 속삭입니다. 마귀는 과거에는 자기의 악한 계획에 유익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영적 교사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성도들의 몸을 고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정념과 많은 모욕과 멸시를 무기로 삼아 거룩함을 고백한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학대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에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고 확신을 가지고서 내적 순교를 성취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라고 말합니다.

 

95

겸손을 획득하기는 어렵습니다. 큰 겸손을 얻으려면 크게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게 겸손이 임하는 두 가지방법이 있습니다. 영적 경험의 길을 반쯤 나아간 사람은 육체적인 연약이나 의를 추구하는 사람을 대적하는 사람들, 또는 악한 생각에 의해서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지성이 하나님의 은혜의 조명을 충분히 의식할 때, 영혼은 소위 본성적인 겸손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한 영혼은 더 이상 자기의 영광으로 자만할 수 없습니다. 그 영혼은 쉬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지만, 하나님의 인내에 동참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른 어떤 영혼보다 비천하다고 여깁니다. 첫째 유형의 겸손의 특징은 후회와 낙심이며, 둘째 유형의 특성은 기쁨과 존경 입니다. 이런 까닭에 첫번째 유형의 겸손은 영적인 길을 반쯤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며, 두번째 유형의 겸손은 완전함에 가까이 간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전자는 종종 물질적인 번영 때문에 손상됩니다. 그러나 두번째 유형의 겸손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소유해도 교만해지지 않으며 죄의 화살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영적인 것이므로, 물질적인 영광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합니다. 첫째 유형의 겸손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두번째 겸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첫째 유형의 겸손에 의해서 의지를 부드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정념의 공격을 통해서 그것을 시험하기 시작해야만, 둘째 유형의 겸손을 풍성히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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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악한 생각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죄를 범합니다.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죄악된 생각을 악한 말이나 경건하지 못한 행동으로 옮깁니다. 반면에 수덕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먼저 외적인 죄와 맞서 싸우고, 그 다음에 악한 생각이나 말에 맞서 싸웁니다. 그러므로, 마귀들은 그런 사람들을 공격하여 사람들을 욕하고, 한가하게 어리석은 대화를 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헛된 영광을 바라게 하려고 힘을 합합니다. 특히 마귀들은 칭찬받으려는 욕구를 자기의 악한 계획을 도모하기 위한 구실로서 사용하여 영혼 안에 들어와 약탈합니다. 그러므로 고결한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 하지 말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계속 외출하지 말고 사람들을 욕하지 말고, 훌륭한 말을 할 수 있을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합니다. 말이 많으면 지성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일을 게을리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냉담의 마귀에게 정복됩니다. 냉담의 마귀는 지성의 힘을 완전히 약화시킨 후에, 낙담과 노염의 마귀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므로 지성은 항상 거룩한 명령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며, 영광의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전 8:6)고 말하는데, 그것은 천한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97

마귀의 화살로 공격을 받는 사람이 실제로 공격을 받는 것처럼 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 정념들을 크게 미워하게 되는데, 이 때 영혼의 정화가 시작됩니다. 몰염치한 죄 앞에서 크게 고난당하지 않는 영혼은 의의 축복 안에서 완전히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씻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주 예수를 기억함으로써 마음이 활활 타오르게 하며, 그것을 유일한 연구요 지속적인 과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따금 기도하는 데 그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는 항상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지성을 지켜야 합니다. 금을 정련하는 사람이 잠시라도 용광로의 불이 꺼지게 내버려 둔다면, 정련하던 재료가 다시 굳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따금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잃습니다. 진실로 거룩함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마음 속에 있는 세상적인 것을 계속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이 기억의 불 속에서 악이 조금씩 소멸되며, 그의 영혼은 본래의 찬란함을 완전히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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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념이란 마귀들의 공격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해방되려면, 바울의 말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고전 5:10). 무정념이란 마귀의 공격에 패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적들로부터 활과 화살로 공격을 받을 때,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소리도 듣지만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그들이 쇠로 만든 갑옷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선행 때문에 하나님의 빛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의 보호를 받는다면, 마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중지 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악을 죽이면 깨끗함을 얻습니다.

 

99

하나님의 사람이 거의 모든 정념을 정복한 후에도, 두 가지 마귀가 여전히 그를 대적하여 싸웁니다. 첫째 마귀는 영혼을 하나님의 큰 사랑에 집중하지 못하고 잘못된 일에 열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영혼은 다른 영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두번째 마귀는 육체에 성적 욕정의 불을 붙입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첫번째 원인은, 번식을 고려한 성적 즐거움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쉽게 우리를 정복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주님은 수덕자가 모든 덕 안에서 장성한 것을 보시면, 때때로 이런 종류의 마귀가 그를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을 세상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비천하게여깁니다. 물론, 이 정념은 사람들의 덕이 성숙한 후에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기 전에도 괴롭힙니다. 어떤 경우든지. 아무리 큰 덕을 소유한 영혼이라도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첫째 마귀와 싸울 때는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두번째 마귀를 대적할 때에는, 우리가 내면에서 끊임없이 성령의 에너지를 인식하며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이 정념들을 초월할 수 있을 때까지, 극기, 노염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묵상을 사용하여 싸워야 합니다.

 

100

하나님의 지식에 동참하게 된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인 것이라도 모든 헛된 상상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욥은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욥 14:1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중지하거나 그의 거룩한 명령을 등한히 하지 않으면, 의식적인 죄나 무의식적인 죄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눈물을 통해서 용서 받았다는 것을 양심이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인 규칙을 실천하면서 범한 무의식적인 잘못-인간은 그러한 잘못을 피할 수 없습니다-까지도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고백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양심이 미혹되어 자신의 고백이 적절한 것이라고 믿지 않도록 내적인 의식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일을 행했다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양심보다 한층 엄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혜롭게 말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라 나도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만일 우리가 무의식적인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죽을 때에 분명치 않은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죽을 때에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자유로이 지하 세계의 통치자들의 곁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이 사악함 때문에 경험하는 두려움을 우리를 고발하는 자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는 영혼은 죽을 때에 평화의 천사들과 함께 어두움의 군사들 위로 들려 올라갑니다. 그 영혼은 끊임없이 "율법의 완성" (롬 13:10)인 사랑을 품고 다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랑이 준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도들과 함께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살전 4:17 참조), 그러나 죽을 때에 잠시라도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남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남아 불 심판을 받을 것이며 (벧전 1:7 참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운명을 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세토록 그 나라의 축복을 주십니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