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편의 설교

St. Peter of Damaskos (다메섹의 피터)의 글.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3 (서울: 은성, 2007), pp. 290-381.

1. 영적 지혜

알파벳의 첫 글자는 "A"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지혜는 모든 덕의 완성이면서 또한 모든 덕의 출발점 입니다. 영적 지혜가 없는 지성을 소유한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 조차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은혜에 의해서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면, 배운 분량만음 지혜를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파벳을 배우는 것은 기초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학문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지식에 있어서 우리의 첫 걸음은 매우 미미하지만,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서는 전혀 덕을 획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영적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혜에 대한 글을 쓰기가 두렵습니다.

지성을 논리정연하게 만드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 듯합니다. 첫째는 초자연적인 은혜와 축복입니다. 둘째는 덕의 실천에 근원이 있으며 영혼의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는 깨끗함입니다. 셋째는 인간적인 교육과 세석적인 학문을 통해서 저급한 형태의 가르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만함과 교활함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며 우리의 본성을 일그러뜨리는 저주받은 망상입니다.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에도 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아마 나에게 이 글을 쓰라고 강요한 당신의 믿음이 나의 펜에 은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지성과 손은 더럽고 하찮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내가 교부들에 대해서 무엇인가 기록하기를 원할 때면, 실제로 펜을 잡은 후에야 비로소 나의 지성 안에 기록할 내용이 형성되었습니다. 종종 성경에서 암시하는 작은 생각, 또는 이 세상에서 듣거나 본 것이 나의 정신으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는 즉시 내가 펜을 들어 쓰기 시작하면, 나는 곧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발견하곤 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하라고 강요하는 듯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손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거리낌 없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나의 어두워진 마음에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넣어주신다면, 나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기록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라는 바울의 말을 기초로 하여 말한 것처럼,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받은 것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해줍니다.

성 이삭의 말에 의하면, 추론적인 생각으로부터 해방된 침묵 상태를 획득한 사람의 지성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추론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은 순수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개념입니다. 성 안토니의 말에 의하면 모든 말이나 행동은 성경의 뒷받침을 받아야 합니다. 발람의 나귀가 말한 것처럼(cf. 민 22:28-30), 나도 이러한 정신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불행한 영혼을 훈계함으로써 말만 해온 내가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살아서 글을 쓸 능력을 소유하게 될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행할 능력이 당신에게 있는지, 누가 압니까? 우리는 각기 자신의 능력의 한도 안에서 행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언제 우리의 종말이 임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2. 두 종류의 믿음

사도 바울은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행동의 기초이며,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받았다고 말합니다(cf. 골 1:23, 롬 11:6). 성 이삭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첫째 종류의 믿음이며, 그 안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두려움을 낳는다고 합니다. 막시무스는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인도하여 계명들을 지키고 인내하며 시련과 시험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후에, 둘째 종류의 믿음, 관상의 큰 믿음이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주님은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상적인 믿음, 즉 하나님 및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창조에 대한 교리적인 믿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관상의 믿음, 즉 영적 지식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첫째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믿음이 둘째 믿음을 낳고, 둘째 믿음은 첫째 믿음을 강화해줍니다.

첫째 종류의 믿음은 그것에 대해 들음을 통해서 획득하며, 정통 신앙을 가진 경건한 부모와 교사들에게서 물려받습니다. 둘째 믿음은 우리가 믿게 된 주님에 대한 경외심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의 참 믿음에 의해서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 경외심 때문에 계명을 지키게 되며, 몸과 관련된 덕들-침묵, 금식, 적절한 철야, 시편 찬송, 기도, 영적 독서, 그리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는 몸에서 가장 좋지 않은 정념들-탐식, 부정(不貞), 불필요한 재산-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의 말처럼(cf. 히 13:5) 가진 것에 만족하기 위해서 이러한 덕들을 실천합니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은 분심되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합니다. 그는 성경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거룩한 교리와 계명들에 대해 배우며, 여덟 가지 주된 정념들 중 나머지 정념들을 거부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형벌을 인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 닐로스의 말처럼,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의 결과로서, 그는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가 각각의 계명을 위해서 자발적인 죽음을 경험할수록,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보다 많이 알고 관상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믿음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믿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갈망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짐을 여호와께 맡깁니다"(시 55:22). 대 바실의 말처럼, 보다 고귀한 믿음을 획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나 죽음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사나운 짐승을 만나거나 마귀의 공격을 받아도, 그것들이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들이며 자기와 같은 종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자기를 대적한 힘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홀로 능력을 소유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15). 이렇게 말씀하신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위에 있는 것들과 아래 있는 것들의 창조주이시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를 소유하는 피조물들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천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마귀들은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선한 인간들은 자기들과 같은 종의 신분인 자가 아무리 악해도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합니다. 대 아타나시우스의 말처럼, 오히려 그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악을 가르치는 교사인 마귀들은 분명히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당사자가 악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게 만들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악됨을 고쳐주실 때에 그가 감사하며 참고 견디려 한다면 악한 사람이나 마귀가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지극히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수중에서 그의 교훈과 구원을 위해 발생하는 일입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들과 거룩한 사람들의 시련과 시험은 하나님의 동의하에 발생하며, 그들의 영혼을 완전하게 하고 원수 마귀들을 부끄럽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명을 이행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알게 될 때에 단순히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능력을 소유하신다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들도 그리스도의 행위들 때문에 이것을 깨닫고 떱니다(cf. 약 2:19). 그는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분의 뜻은 모두 선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선한 것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달린 문제일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힘들게 노력해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생명(cf. 요 12:50), 가장 큰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불신자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큰 믿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서 성령의 지혜의 출발점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이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cf. 잠 1:7). 이따금 나는 의도적으로 영혼의 눈을 감고 율법을 범하며, 때로는 망각 때문에 눈이 멀어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나는 영혼에게 유익한 것을 알지 못한 채 나쁜 습관에 빠지며 상습적인 죄인이 됩니다. 그 결과, 거룩한 교부들의 말처럼, 나의 의지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헐기 위해 노력하려 하지 않으므로, 넘어졌을 때에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에게 회개의 행위를 수행하는 데서 오는 믿음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 18:29)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담을 뛰어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담 너머에 구덩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만일 담을 넘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비겁하게 망설일 것이며, 또 노력을 한 후에도 다시 뒷걸음질 치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계시다고 믿는 사람(cf. 렘 23:23),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힘과 능력과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해 단호하게 나아가며 "허공을 치는"(cf. 고전 9:25)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고 헤엄을 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는 위에 있는 세상을 갈망하며, 자기의 의지를 버려두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새 방언"(cf. 막 16:17)을 듣게 되며, 심지어 그 방언으로 말하고, 비밀들을 인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덕을 실천하는 상태에서 관상의 상태로 올라가는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와 주권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3. 두 종류의 두려움

탐식은 여덟 가지 악의 용사들 중에서 첫째 용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즉 첫 계명은 여덟 가지 모두를 물리칩니다. 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랑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한,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계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상태에 이른 사람도 처음에는 두려움과 더불어 시작했으며, 이 최초의 두려움이 자신에게서 어떻게 떠나갔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길에 의해서 사랑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영적 기쁨에 사로잡혔거나 자기의 고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에프렘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잠자면서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영적 기쁨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많은 복에 놀라며,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자처럼(눅 16:19) 고집스럽게 사치와 호화로움에 빠져 사는 사람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몰두하며 시련과 시험을 당하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만하여 그들을 멸시합니다. 그는 실제로는 안락한 삶을 누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덧없는 것들에 대한 무의미한 사랑 때문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삶을 누릴 자격이 없게 만듭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사랑의 상태에 도달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를 그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까닭에 심판 날에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못할 것이며, 당연히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다"(눅 16:25)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불신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복되다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거나,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렇기 때문에 현세에서 안락하게 산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두려움은 초보적인 두려움이며, 둘째 두려움은 첫째 두려움에서 자라나오는 완전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두려움은 종의 두려움과 같아서 그로 하여금 악을 삼가게 만듭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시 34:11). 도로테우스의 말에 의하면, 초보적인 두려움에 관해서 이 말씀들 및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죄 인들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회개하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발견하려 할 것입니다. 또 이 초보적 두려움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면서 생명으로 인도해주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시 34:14)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의 내면에서 두려움이 더 크게 성장하면, 마침내 그가 아직 무지의 어두움 속에 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주 작은 잘못까지도 보여줍니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이 완전해지면, 내적 슬픔을 통해서 그 자신이 완전해집니다. 이제 그는 죄 짓기를 원하지 않으며, 정념들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이 깨끗한 두려움 안에서 상처를 입지 않고 머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른다"(시 19:9)고 표현합니다. 첫째 종류의 두려움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안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화된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변덕스럽고 악을 쉽게 범하기 때문에 계속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덕들을 획득하면서 전진할수록 더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잃는 것, 형벌, 수치, 그리고 그 결과로 높은 신분에서 전락하는 것 등을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전반적으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매 맞는 것만 두려워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영혼과 몸이 완전히 깨끗하고 완전한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죄가 아주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두려움이 순수하다고 생각하여 판단을 그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에 의하면, 만일 자신의 두려움이 순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미혹된 사람입니다. 그의 두려움은 순수하지 않으며, 겸손도 아닙니다. 그것은 비굴한 조심성이며 위협을 가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들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두려움에 예속되어 있는지 알며, 고통을 인내하며 깊은 슬픔을 통해서 죄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완전한 두려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두려움의 표식은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사람처럼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해 노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두려움의 표식은 덕을 사랑하며 타락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변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타락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위대한 왕이요 선지자인 다윗은 자신의 두 가지 죄로 인해 슬퍼했고(cf. 시 51:2, 삼하 11:1-17), 솔로몬도 심각한 죄를 범했습니다(cf. 왕상 11:1-10).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도 요한처럼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 (요일 4:18)라고 말한다면, 그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보적인 두려움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온전한 두려움에 관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라고, 즉 덕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들의 신분을 소유하며,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 때문에 덕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마지못해 명령을 수행하는 종과는 달리 크게 기뻐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형벌로부터 구원받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를 돌릴지어다. 아멘.

4. 참 경건과 절제

세속적인 철학에 매우 다양한 것이 포함되듯이, 참 경건에도 매우 다양한 것들이 포함됩니다. 철학은 열 가지 학문 분야의 완성을 전제로 하며, 그중 한두 가지만 아니라 열 가지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참 경건은 단 하나의 덕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들 모두를 지키는 것입니다. "참 경건"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어원은 "잘 섬기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잘 섬기다"라는 것이 믿음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믿고 그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런 까닭에 믿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에서 참 경건이 나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지혜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가면서 마지막에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사 11:2-3)을 언급합니다. 주님은 두려움에서 시작하여 이 두려움을 소유하는 사람을 내적 슬픔의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에서는 참 경건이나 영적 활동의 모든 형태에 대해 체계적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보다 고귀한 믿음과 순수한 두려움의 획득에 선행하는 금욕적인 수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영적 낙원의 나무들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아 영혼의 덕들에 대해 간단히 말하려 합니다. 영혼의 덕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것은 절제, 즉 모든 것의 소유를 삼가는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행동에 적용되며 음식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는 형태의 절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절제는 소유물에 적용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생각 및 사지의 움직임을 삼가는 것입니다. 이 덕을 소유한 사람은 몸의 생명이나 영혼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한 생각이나 말, 손이나 발을 비롯한 몸의 움직임을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덕을 획득한 후에는 마귀들이 선동하는 시련과 시험이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은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전념하는 천사의 화신 같은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낙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라"(창 2:15)는 명령의 의미입니다. 동산 밖에 있는 정념들이 몰래 기어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쉬지 않고 절제를 경작하고 지켜야 합니다. 말에서 말했듯이, 두 가지 형태의 절제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절제는 부정(不貞) 및 다른 부끄러운 정념들을 억제하며, 둘째 형태의 절제는 생각이 죄로 이어지기 전에 감독하여 통제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합니다.

단지 귀로 듣기만해서는 절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서만 지성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흙을 소생시키며, 물질을 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속 학문에서는 어원론에 기초를 두고서 이름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의 경험과 획득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여, 또 오랫동안 많이 노력해야만 덕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영혼의 덕에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덕은 보다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관련된 덕도 육체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영혼의 덕을 획득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영혼의 덕은 생각의 통제만 요구하지만 훨씬 획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말합니다. 대 바실은 이 구절에 관한 훌륭한 논문을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주목하지 않는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금식과 철야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합니다. 우리는 종종 부분적으로 이해하고서 이러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별이 부족합니다. 또 우리는 많은 시련과 전투를 통해 경험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함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숙련된 선원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인내하면서 자신에게 주목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본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더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cf. 요 9:41). 만일 우리가 눈이 멀었음을 인정한다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감사하며 자신의 실패와 무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교도인 그리스인들처럼 더 큰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은 많은 것을 갈망했지만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침묵해야 합니까? 그것은 한층 더 좋지 않은 태도일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을 책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밀하게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럽기 때문입니다(cf. 엡 5:12). 이런 까닭에 나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존중해야 할 덕들에 대해서 말하려 합니다. 그러한 덕들의 사랑스러움을 생각하면 나의 어두워진 마음에 즐거움이 가득 차며,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잊으며 또 내가 말만하고 생동하지 않을 때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죄로 인해 걱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자제는 동일한 능력과 두 개의 부분을 지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의 보다 완전한 형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하고 거룩한 두려움과 관상의 믿음을 누리는 사람, 그리고 이것들을 기초로 하여 절제와 자제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치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과 관련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다음과 같이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혐오 자체이다. 나는 흙으로 시작하여 썩음으로 끝나며, 그 사이에 온갖 종류의 무례함과 더 나쁜 것으로 채워져 있다. 나의생명이란 무엇인가? 나의 수명은 얼마인가? 잠시 후면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 나는 왜 이것저것에 대해 염려하는가? 나는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생사를 지배하시는데, 나는 왜 헛되이 걱정하고 애쓰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조각 빵뿐인데, 왜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가? 만일 나에게 빵 한 조각이 있으면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무지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듯한 것을 고안하거나 행하기 않기 위해서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지키는 데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유쾌한 것이든지 불쾌한 것이든지 사람들이나 마귀들이 가하는 것들을 참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들의 선동을 받아 무분별한 즐거움이나 주제넘음, 낙심이나 낙담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나치게 자만하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5. 창고 견딤

주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견디는 것은 모든 덕의 통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으면 어떤 것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합니다(눅 9:62). 어떤 사람이 모든 덕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먼저 끝까지 참고 견디며 마귀의 덫에서 피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못합니다. 참고 견뎌야만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도 다음 세상에서 궁극적인 상을 받으려면 참고 견뎌야 합니다. 모든 형태의 학문과 지식에는 지속성이 필요합니다. 지속성이 없으면 감각적인 것들조차도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만들어져서 계속 존속하려면 참고 기다리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것이 실현되려면 먼저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어떤 일이 실현된 후에는 참고 견딤을 통해서만 그것이 지속되고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선한 것이라면, 이 참고 견딤의 덕이 그것을 돕고 지켜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이 덕은 영혼에게 힘과 위안을 주며 그 사람이 시험을 받아 마음이 약해져서 지옥을 미리 맛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덕은 영혼에게 많은 전쟁과 고통을 당할 때에 냉담해지지 않고 즐거워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유다는 이 덕이 부족했고 영적 전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중의 죽음을 당했습니다(cf. 마 27:5). 사도들 중의 으뜸인 베드로는 이 덕을 소유했고 노련한 전사였습니다. 그는 실족했지만 자기를 넘어뜨린 마귀를 물리쳤습니다(cf. 마 26:75, 요 21:15-17). 언제나 부정(不貞)에 빠졌던 수도사는 이 덕을 획득했고, 그의 수실과 독거 생활을 포기하라고 조르는 낙심의 속삭임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정복했던 자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인내하면서 자기를 유혹하는 생각들에게 "나는 범죄하지 않았다. 나는 범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결한 사람 안에는 참으로 거룩한 이해력과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이 복된 덕은 의로운 욥으로 하여금 최초의 선한 일들을 완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이 덕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그는 과거에 행한 모든 선을 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내를 아시는 하나님은 그를 완전하게 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전염병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 바실의 말처럼,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아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덕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념들 모두를 대적하여 싸우다가 성공하지 못하여 제자리로 돌아가면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못하게 되므로, 우리는 정념들을 모두 대적하여 싸우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대 바실은 충고합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정념들과 싸우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인내하며 견디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내가 부족한 사람은 평범한 싸움에서도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하며 퇴락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누구도 비겁하게 출진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cf. 신 20:8), 일반적인 전쟁에서 싸움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럼으로써 그는 명예를 잃고 가난하고 치욕스럽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에서는 피조세계 어디에서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곳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막에는 사나운 짐승들과 마귀들 및 해롭고 무서운 것들이 있습니다. 독거와 침묵의 장소에는 마귀들과 시련과 유혹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사람들과 마귀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가 없으면 평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내는 이해에서 생겨나지만, 두려움과 믿음에서 유래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지성에 비추어서 사물을 시험하며, 수산나의 말처럼 "함정에 빠져 사방으로부터 몰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더 좋은 편을 선택합니다. 수산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함정에 빠져 사방으로부터 몰리고 있구나. 만일 내가 이자들의 말을 들어주면 그것은 곧 나에게는 죽음이다. 만일 거부하면 이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깨끗한 몸으로 이자들의 모략에 걸려드는 편이 낫겠구나"(cf. 외경 다니엘서 13:22-23). 이 복된 여인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악한 재판관들이 죄 없는 그녀를 간음죄로 고발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려 했을 때, 하나님은 열두 살에 불과했던 다니엘을 선지자로 내세워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셨고, 불의하게 그녀를 재판했던 제사장들을 죽게 하셨습니다(cf. 외경 다니엘서 13:44-52).

하나님은 수산나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시련을 당하는 사람, 그리고 고난 때문에 비겁하게 덕을 포기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참고 견디면서 구원의 소망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법에 매달리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행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위험과 영원한 결과를 포함하는 위험에 직면할 때에는 일시적인 위험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이런 까닭에 성 이삭은 시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의 수중에 떨어져 그와 함께 벌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위험한 일을 당하며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성도들처럼 시련을 당할 때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닮지는 못하더라도 강요를 받아서라도 더 좋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현세에서 강압적으로 육체의 위험을 감수하여 무정념의 상태를 획득하며, 그리하여 현세와 내세에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되든지, 아니면 시련을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배교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무서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참고 견딜 힘을 주셔서 우리를 형벌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인내는 인생의 바람과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폭풍이 불어와도 흔들리거나 돌아서지 않으며, 편안함과 기쁨을 발견할 때에 자화자찬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나 편안할 때나 한결같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그는 폭풍을 만나면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기쁨으로 참고 견디며, 하늘이 맑으면 시험이 닥칠 것을 예상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에는 불변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cf. 벧전 5:7).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가 세세토록 있을지 어 다. 아멘.

6. 소망

생명은 근심이 전혀 없는 소망이요, 감각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이해력과 사물의 참된 본성에 의해 증명되는 부입니다. 농부들은 힘들게 일하면서 씨를 뿌리고 경작하며, 선원들은 많은 위험들을 감수하며, 어린아이들은 읽기와 쓰기 및 지식의 여러 분야를 배웁니다. 그들은 모두 소망을 가지고 기대하며, 기뻐하면서 수고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당면한 이익을 희생하지만, 실제로는 참고 견딤으로써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그들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자기들이 유익을 얻으리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장차 어떤 상을 기대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적 선물들과 영적 지식들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농부들과 선원들도 경험을 쌓지 못하면 크게 근심합니다. 글쓰기나 다른 학문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어린이는 그러한 학문을 배우려 하지 않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그 학문의 유익을 알기 때문에 공부를 강요합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어 어린이가 경험을 얻게 되면 학문 및 학문을 강요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기뻐하면서 고된 학습과정을 받아들입니다. 믿기 시작한 우리도 진보하기 위해서 인내하며 노력해야 하며 시련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우리도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되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지치지 않고 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라고 말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믿음에만 기초를 둔다면 이익을 낼 수 없듯이, 덕을 획득하기 위해서 생각과 행동으로 수고하지 않은 사람은 영적 지식과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도 죽을 때까지 사업가처럼 항상 손해를 두려워하고 이익을 바라야 합니다. 또 사업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낼 때에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고 모험을 하면서도 노력하듯이, 우리도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수고하여 거둔 열매를 먹지 못하여 거지가 되거나 큰 빛을 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라고 말했고,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온전해졌다고 말했습니다(cf. 히 11:39-40).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우리가 자연과 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경험을 통해서 이것들을 알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학생들처럼 일곱 가지 육체적인 훈련을 열심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윤리적인 덕, 즉 영혼과 관련된 덕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소망을 얻어 계속 유지한 후에 위에서 말한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 회개하여 일곱 가지 육체적 훈련 중에서 금식과 철야 등 여섯 가지 훈련은 시작하지 않고 첫째 훈련, 즉 침묵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소망의 상과 그것에 주는 복들이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가 첫째 훈련-영혼의 정화의 출발점인 침묵-을 실천하기 시작하는 즉시 그가 갈망하는 복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를 도우려는 소원을 지녔던 부모의 은혜를 자녀가 모르듯이, 그는 미숙한 학생이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이는 자신이 부모님의 상속자가 되어 부모님의 현재 재산과 앞으로 모을 재산을 물려받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골칫거리로 생각합니다. 사실, 만일 그가 먹을 것을 비롯하여 본성적인 필수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부모님이 고마운 줄 모를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물려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을 참고 견디지 않는 사람은 이런 아이보다 더 무례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피조 되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았고, 앞으로 임할 것을 기다리며, 또 그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을 받는 편을 선택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고 그를 위해 보혈을 흘리시며 눈에 보이는 선물과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고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습니다(cf. 미 6:8).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들을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상은 또 하나의 보다 큰 선물입니다. 비록 거지나 출생이 비천한 사람이라도 덕을 배양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요 모든 사람보다 탁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우리는 현세에서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알아보면서도 우리를 위해 예비 된 복에 대해서는 의심합니까? 우리는 그들의 삶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와 능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들은 사후에도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까? 왕들과 부자들이 그들의 성화를 얼마나 존숭하는지 보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고결한 사람들이 현세에서도 감사와 덕과 영적 기쁨이 층만하여 살며, 부자들은 고행자들이나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큰 시련과 유혹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덕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하기를 바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고결한 사람들의 신앙이 자신의 신앙과는 다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덕을 찬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도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이 소유한 덕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덕을 선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필연적으로 덕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도 선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필연적으로 의로우십니다. 왜냐하면 의는 하나의 덕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우시다면, 악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행하셨고 행하고 계실 것입니다. 악만큼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를 수고하고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겸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숙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관상 및 성경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들의 계시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현세에서는 그것이 침묵이나 다른 덕들에 대한 상입니다. 장차 임할 세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과 예비되어 있는 복을 바라고 참고 견디면서 자기의 뜻을 버린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cf. 고전 2:9).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이러한 복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라와 영광과 존귀가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7. 이탈

이탈의 근원은 소망입니다. 다른 곳에서 영원한 보화를 획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물질적이고 무상한 것들이 온갖 종류의 평안함을 제공한다해도 그것을 기꺼이 멸시합니다. 비록 지성적인 사람의 삶이 거칠고 고통이 가득해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두 가지 형태의 부를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물질적인 부를 더 귀중하게 여기라고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일은 믿음의 부족, 또는 악한 성향과 습관 때문에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교화되었을 것이며, 또 그가 견고한 믿음을 통해서 영적 지식에서 오는 교화를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악한 습관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악한 습관을 없애기로 결심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원받는 자가 극히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cf. 눅 13:23- 24). 실제로는 쓴 것이 달콤하게 보입니다. 혀로 상처를 핧는 개는 그 달콤함 때문에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며 자기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또 몸과 영혼에게 해로운 것을 먹는 대식가는 스스로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정념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모두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혹 잠시 저항한다해도 다시 습관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까닭에 주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마 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침노는 우리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들과의 교제에 기인합니다. 만일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지만(cf. 마 11:30), 이것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마 7:14). "천국은 침노를 당합니다"(마 11:12). 천국을 선택한 사람들은 천국을 원하며 현세에서 무정념을 획득하길 바라기 때문에, 천국은 그들의 내면에, 그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돕거나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만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행하십시오. 만일 그것을 행할 수 없다면, 행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러면 선한 행위 자체는 이루지 못하지만 그 결심은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선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습관은 점진적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죄인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구원받았을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장점이 눈에 뜨이게 드러났습니다. 죄인과 성도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심은 결국 습관을 정복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수도사가 된다면, 죄인들이 성성(聖性)을 획득했듯이 그들이 성성(聖性)을 회득하는 것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들은 성성과 거리가 멀며, 수도사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은혜나 본성, 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헌신과 신앙심에 의해서 여정의 대부분을 완수했습니다. 그렇다면, 산적들과 도굴꾼들도 성인이 되는데, 수도사들이 정죄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아닐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습니다" (시 44:15)

요아사프(Joasaph) 및 그를 닳은 사람들처럼 왕들은 자신의 부귀를 버렸지만, 종종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본래의 상태조차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는 것들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아무런 노력 없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는 세례를 받을 때에 자기의 것이 아닌 것까지도 버렸고-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므로, 그는 단지 그것들을 바라는 권한만 소유합니다. 또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지위도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에 재산을 얻으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나는 재산이 없이는 살 수 없거나 나에게 닥치는 일들을 참고 견뎌낼 수 없다"고 말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무엇을 참고 견딜 수 없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갇혔었거나 갇혀야 할 감방과 쇠사슬입니까? 권세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부를 소유한 사람들도 이러한 일에 예속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빼앗기는 것과 벌거벗음 등 그가 당해야 하는 것들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상세하게 다룸으로써 이 논의를 오래 끌며 이미 충분히 수치를 당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치욕을 가하기 않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만 덧붙이렵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한 가지, 우리가 이미 버린 것에 대한 갈망만 간절히 구한다면, 우리는 게하시나 유다처럼(cf. 왕하 5:25-27, 마 27:3-5), 다음 세상에서 수치와 치욕을 받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원했고, 그리하여 문둥병에 걸렸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한편 유다는 자신이 이미 버렸던 것을 다시 소유하려 했고, 그리하여 벌을 받아 목을 맸고,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만일 수도사가 동정과 완전한 무소유 상태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특별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 계명들은 우리의 본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닥치는 것들을 참고 견디며, 사물을 그것들의 참된 본성에 일치하게 사용하며,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삼가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이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법한 사람들은 율법에 다라 벌을 받으며,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은 우이에게 고결하게 살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고"(롬 13:4):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롬 13:3). 이런 일들은 본성과 일치하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행하며, 또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군사인 많은 수도사들은 본성을 초월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것도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에 의해 검증된 본성의 법입니다. 왕의 군사들은 왕을 위해 고난을 받기 때문에 명예를 얻지 않습니까? 그가 이런 식으로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면 치욕을 당하지 않습니까? 장엄한 옷을 입은 사람일수록 왕에게 가까이 가며, 장엄하게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일수록 왕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왕과 관련해서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당하신 고난과 학대를 맛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분의 가난을 본받을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 친밀해지고 그분의 영광에 더욱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cf. 롬 8:17).

군인들과 도둑들은 단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고생하며, 나그네들과 선원들은 오랜 기간 집을 떠나 생활하며, 사람들은 천국의 소망이 없이 큰 시련을 당하지만 종종 자신이 노력하여 얻으려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과 영원한 복을 얻기 위해서 작은 고난도 견디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굳게 결심하고서 덕을 획득하는 일이 힘들고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덕을 통해서 얻게 될 근심으로부터의 자유와 영광과 소망 때문에 그것을 즐거움이요 휴식이라고 여긴다면, 그것들을 획득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도 덕을 존중하고 칭찬합니다. 마지막으로, 덕은 행복과 환희를 줍니다. 실제로, 물질적인 생활과 그것의 부끄러운 정념들 안에는 슬픔이 가득하듯이, 이탈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물질적 생활에서 벗어나며, 몸을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 이탈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영원이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드릴지어다. 아멘.

8. 정념들의 극복

이탈을 성취한 사람은 항상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물질로부터의 이탈은 영적 실체들에 대한 관상-현세의 피조물에 대한 관상이 아니라 죽음 전후에 발생하는 두려운 일들에 대한 관상-을 일으킵니다. 이탈한 사람은 은혜에 의해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그 결과 그는 내적 슬픔을 통해서 정념들을 죽이며, 때가 되면 생각 안에서 평안과 온유함을 획득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의 근원이며, 두려움은 참 경건이나 절제, 슬픔을 참고 견딤, 기타 주님의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것(cf. 마 5:3-12)-온유, 의, 즉 모든 덕에 대해 주리고 목마름, 자비의 행위-과 이탈의 근원입니다. 이탈은 회개와 비탄의 쓰라린 눈물과 가책의 슬픔을 통해 실현된 육신적 고행의 근원입니다. 고민하는 영혼은 이것들에 의해서 이 세상의 즐거움, 심지어 먹을 음식까지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의 잘못이 바다의 모래알만큼 무수히 많다는 것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조명의 출발점이요 건강의 표식 입니다. 특히 사람들 가운데서 살거나 분심에 예속된 사람들의 경우에 이 상태에 이르기 전에 흘릴 수도 있는 눈물과 거룩한 생각들, 양심의 가책 등은 모두 마귀들의 속임수요 계략입니다.

감각적인 사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정념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만일 옛 성도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물질도 소유했지만, 그들은 결코 이러한 물질들은 정념의 영향력 하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족보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아내와 결혼하여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성적 교접을 가짐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결혼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결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욥 및 다른 의인들에게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요 선지자였고, 솔로몬도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들에게 미묘한 시험을 보내심으로써 사람들이 헛된 것들에 의해 분심되게 하며, 그럼으로써 한층 더 악한 것을 향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고 묘사합니다(cf, 전 1:13). 이것은 사물의 본성을 보면 분명이 드러납니다. 만일 수천 가지의 분심거리가 있을 때에 누군가가 죄를 범할 기회를 발견한다면, 하물며 우리의 삶에 분심거리가 없다면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실질적으로는 더 악한 많은 일들을 행하기보다는 피상적으로 분심되어 거룩한 일과 생각에 전념하지 못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영적 지식을 획득했으며, 인간의 최초의 불순종의 결과로서 죽음 전후에 발생하는 무서운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생각들 및 그러한 생각들을 유발하는 행동에 전념하기 위해서 계속 침묵하고 이탈해야 하며, 헛된 일들에 의해 분심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다메섹의 요한은 이 구절을 기초로 하여 "진실로 모든 것이 헛되며, 인생은 그림자요 꿈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모든 사람은 헛되이 근심합니다(cf. 시 39:6). 결국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보다 더 헛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탈이란 제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편안함을 향하는 육체의 최초의 충동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편안함을 원하는 갈망은 영적인 갈망이 아닙니다. 영혼이 자신 안에서 영적 활동이나 지식을 인지할 때에, 영혼은 이 비 영적인 갈망의 존재로 인해 한층 더 괴로움을 느낍니다. 만일 영혼이 비 영적이라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cf. 창 6:3). 이런 일이 발생하면, 영혼은 선한 행위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육체의 욕망과 그 안에 거주하는 정념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둠 위에 어둠을 쌓으며 완전한 무지 안에 사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조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크신 인내, 그리고 불쌍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죄를 범해왔고 지금도 범하고 있는지를 보고서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 때문에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 인해 감사함으로 가득하여 누구도 정죄하려 하지 않게 되며 우리의 엄청난 죄로 인해 수치를 느낍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며, 자신의 감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을 행하지 않도록 지깁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시 131:1)라고 기록한 시편기자를 모방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지에 도착한 후에, 그는 자신이 태만함이나 우쭐댐으로 말미암아 다윗처럼 회개하지도 못한 채 다윗과 같은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매우 의로운 사람들도 쉽게 죄를 범할 수 있는 데 반해,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회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죽임이 임하기 전에는 낙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좋으며, 혹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십시오. 우리는 혹시 넘어져도 낙심하여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자비롭게 다루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계명의 강권을 받을 때에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목표에 이르지 못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cf. 시 90:4). 우리는 성급하지도 말고 우물쭈물하지도 말며, 항상 새로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십시오. 우리가 낙심 때문에 자살한 것보다 더 악하다고 선고되지 않으려면, 의원이신 주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고쳐주시거나,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거나,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섭리를 통해서 자비하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의 성향과 일치한다고 여기는 것을 장려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쁨이나 자만, 슬픔이나 낙심, 지나친 수고나 철저한 게으름,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고 유익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 맹목, 생각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미워함 등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가지 정념들-위에 있는 것들과 아래 있는 것들, 오른 편에 있는 것들과 왼편에 있는 것들, 내면에 있는 것과 외부에 있는 것들-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분별하고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적절히 억제하면서 사용한다면, 영혼 안에 있는 것들은 영혼 안에 있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선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것이더라도, 마귀는 되도록 큰 해를 끼치기 위해서 영혼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선동합니다. 그를 대적하는 여섯 가지 정념들 안에는 덕의 실천과 관련된 것이든지 영적 지식과 관련된 것이든지 어떤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안토니의 말처럼 항상 모든 것에 대한 조언을 구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상담하지 말고 분별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상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담하는 사람이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람 모두 구덩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cf. 마 15:12-14). 무지한 사람에게는 분별이 없이 행한 것도 선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분별이 없으면 결코 선한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분별이 없이 행해진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거나, 무익하거나, 균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의 지식이나 능력을 초월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을 것입니다. 분별의 은사는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분별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며, 때가 되면 영적 통찰력을 얻습니다.

내적 슬픔과 인내는 소망과 이탈의 근원이며, 우리는 소망과 이탈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우리는 참고 견딤으로써, 그리고 사방에서 낙담과 죽음을 볼 때에 이것이 시련인 동시에 조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음으로써, 또는 자신의 목표를 이룬 것으로 인해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대해서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슬퍼하면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고난을 분명히 보기 시작하며, 그로 인해 크게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복이 주어졌는지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권세가 있을지어다. 아멘.

9.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함

우리가 금욕적 수행을 하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당한 수난에 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묵상하면서 크게 놀라며, 놀라면서 금욕적 노력에 매진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많은 고난과 성도들이 즐겁게 받아들인 무수히 많은 시련들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의식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이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지식의 조명을 받습니다. 또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이해함으로써, 때로는 매우 슬퍼하고 애통하며, 때로는 영적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때문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것들을 깨달아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층 더 겸손해지며, 윤리적인 덕, 즉영혼의 덕과 일곱 가지 육체적 훈련을 실천합니다. 또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을 지키며, 주님의 계명들을 지킵니다. 우리는 이것들 이상을 받을만한 선행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갚아야 할 빛이라고 여깁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지식의 은사를 받았는지 알기 때문에 그 빛에서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읽는 것과 찬송하는 메시지의 의미에 사로잡힙니다. 또 우리는 종종 즐거움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죄를 망각하며, 기쁨 속에서 꿀처럼 단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급할 경우에 미혹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제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삶을 상기하면서 다시 슬피 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두 종류의 눈물, 달콤한 눈물과 쓰라린 눈물 사이를 오갑니다.

만일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며 항상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충고를 구한다면, 그리고 덕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순수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동시에 지성을 그것이 알거나 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집중하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하는 일 안에서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요청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혹되어 자신이 그리스도나 거룩한 천사들 중 하나의 출현을 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려 하는 사람은 자신의 외부를 보지 말고 내면을 보아야 하며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본 받으며, 그리스도처럼 몸과 영혼이 죄가 없게 되어야 합니다. 그의 지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어떤 형태나 색이나 생각을 염두에 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지성이 하나님의 처소에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시편 기자의 "하나님의 처소에 평안히 거한다"(cf. 시 76:2)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평안히"란 우리가 선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에바그리우스의 말처럼, 만일 지성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면 하나님 안에만 있지 않고 지성 자체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형태나 색깔이 없이는 확정되지 않으며 확정될 수도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과 함에 있는 지성은 형태나 색깔이 없이 비유적 표현으로부터 자유하고 분심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은 악한 망상의 지배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이 있는 사람의 조언을 받지 않는 한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어떤 생각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생각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그것이 원하는 대상에 의해 구체화되고 그것이 감지하는 것들의 형태의 특징을 취하듯이, 마귀들은 자기가 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마귀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행하며, 마귀들의 영향을 받는 지성은 온전함에 이르려고 노력하면서 분별없이 방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도록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묵상의 한계 안에 지성을 가두어야 합니다. 일곱 가지 육체적인 훈련이 있듯이, 지성에 관한영적 지식이나 관상에는 여덟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는 주님의 거룩한 수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혼 및 동료들의 영혼을 위해 슬퍼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발적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해야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태초에 인간의 범죄 때문에 발생한 무서운 일에 대해서,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많은 정념들에게 굴복했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과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교정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발생하는 시련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죄인들이 죽은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영혼이 힘을 얻고 슬퍼할 것입니다. 동시에 영혼은 위로를 받고 겸손해지며, 이러한 무서운 생각들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또 자신이 영적행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영혼은 계속 두려워하고 바라는 상태, 온유한 생각과 동등한 상태, 그리고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이 상태가 지성을 영적 지식과 분별로 인도해줍니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확인하면서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시 25:9)라고, 또는 분별로 인도하신다거나 이사야가 영적 지식과 거룩이라고 묘사한 것에게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cf. 사 11:1).

참 경건이 많은 외적 형태를 취하듯이, 영적 지식도 많은 지식과 관상의 형태를 취합니다. 육체적 훈련의 실천의 첫 단계는 지식의 형태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목표-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며 지성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를 획득할 때까지 거치는 각각의 상태는 지식과 관상의 형태를 취합니다. 우리가 영성훈련을 실천하기 전에 소유하는 지식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도구 역할을 합니다. 한편 믿음의 결과로서 생기는 지식은 담처럼 두려움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호해 줍니다.

영혼의 덕에 대한 지식과 실천의 목표는 낙원의 나무들을 준비하고 심는 것입니다. 이 나무들은 인간의 지성과 그의 영적 노고에 대한 지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성의 집중과 영혼의 도덕적 상태입니다. 그는 계명들을 실천함으로써 이해와 통찰력으로 "경작하며 지킵니다"(cf. 창 2:15). 동시에 그는 태양과 비와 바람과 성장처럼 작용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순서대로 행해진다고해도 정원사들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위로부터 오는 도움이 없으면 선한 것이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위로부터 오는 도움과 은혜는 행동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현세에서는 모든 것이 한 쌍을 이룹니다: 실천과 영적 지식, 자유의지와 은혜, 두려움과 소망, 고투와 상, 이렇게 한 쌍을 이루는 것들은 전자가 실현되지 않으면 후자가 임할 수 없습니다. 전자가 실현되지 않고서도 후자가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망상입니다. 원예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꽃을 따는 것은 열매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꽃을 보고서 그것이 열매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따려고 앞으로 달려 나갑니다. 이것은 여기에서도 적용됩니다. 막시무스의 말처럼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의 진보를 방해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무슨 일이든지 분별하며 행해야 합니다.

분별의 근원은 겸손하게 충고를 구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비평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빛의 천사'(고후 11:14)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경험이 부족할 때에는 마귀가 우리 안에 뿌리는 생각들도 의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겸손이 무정념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대 바실의 말에 의하면, 겸손의 불을 붙이는 연료는 온유함입니다. 이것이 성실함을 주기 때문에, 인간은 상황이나 생각들이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항상 동일합니다. 그는 명예와 불명예 모두에 대해 무관심하며, 즐거운 일과 고통스러운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동요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성 안토니가 말한 처녀와는 다릅니다. 어느날 성 안토니가 어느 사부와 함께 앉아 있을 때, 한 처녀가 사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한 주일에 엿새 동안 금식하며 날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몇 부분을 암송합니다." 그 말을 듣고 사부는 "가난과 풍요함이 너에게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느냐?"라고 대꾸했습니다. 처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부는 다시 "불명예가 칭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처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너는 원수들도 친구들과 동일하게 여기느냐?" "아닙니다." 그 때 지혜로운 사부는 그녀에게 "가서 일하거라. 너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만일 그 처녀가 일주일에 한 끼만 먹을 정도로 엄격하게 금식했다면, 가난을 풍요로움과 동일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또 만일 날마다 구약성서와 신약 성서 구절을 암송했다면, 겸손도 배우지 않았을까요? 또 그 처녀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포기했으므로 모든 사람을 자기의 친구로 여겨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그 처녀에게 아직도 원수가 있다면, 그녀는 많은 금욕적인 노력을 한 후에도 아직 그들을 친구로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없었단 말입니까? "너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라는 사부의 말은 아주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호되게 정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요한 크리소스톰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 관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비의 행위처럼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어려운 형태의 금욕-본성을 초월하는 순결-을 행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은 그러한 행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행합니다. 이 처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처녀는 정말로 필요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헛수고를 했습니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욕적 수행은 올바른 목표를 마음에 품고 행할 때에만 선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질적인 임무가 아니라 실제의 임무를 위한 준비로, 열매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하나님의 수고와 도우심을 받아 열매-지성의 순수함과 하나님과의 연합-를 맺을 나무를 내는 땅으로 여겨야 합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10. 겸손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온 세상이 그를 공격하고 모욕할 때에도 쉬지않고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가 이렇게 행하는 것은 단지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수동적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전진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는 이러한 고난들을 통해서 모든 덕 중에서 가장 귀한 덕인 겸손을 배웁니다. 덕은 성령의 거처요 하늘나라, 즉 무정념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나 만일 겸손이 없다면, 그가 가는 길에는 고통과 쓸모없는 노력이 가득할 것입니다. 겸손을 마음에 소유한 사람의 내면에는 그리스도가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겸손은 그 소유자에게 평안을 줍니다. 겸손을 통해서 은혜가 그와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은사들이 보존됩니다. 그것은 순종, 인내, 재산을 나누어줌, 가난, 하나님을 경외함, 영적 지식 등 많은 덕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특히 그것은 분별, 지성의 가장 먼 영역을 조명해 주는 덕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겸손해지는 것을 단순하고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겸손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영들과 시련을 대면할 때에는 큰 판단력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가정 됩니다.

겸손은 영적 지식의 결과이기도 하며, 영적 지식은 시련과 시험에서 태어납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주어지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의 지체들 안에서 겸손이 다스릴 때에, 그에게 만물이 복종할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시련과 시험을 겪음으로써, 그리고 그것들을 참고 견딤으로써 경험을 얻고, 그 결과로서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의식하게 될 때에, 자신이 과거에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 알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과거에 그가 이것들을 알지 못했으며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듯이, 나중에 배울 수 있을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 바실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맛보지 않으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식을 맛본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알며, 그리하여 그의 지식이 겸손의 근원이 됩니다. 또 자신이 변덕스러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의 것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 놓인 항아리가 스스로를 유익하게 만들었다고 칭찬하지 않으며, 그것을 만든 사람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항아리가 깨지면, 그것을 만든 사람을 책망하지 않고 깨뜨린 사람을 책망합니다.

만일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릇에 지성이 주어진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자유의지를 소유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선한 것은 그것을 지으신 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또 그분은 그릇이 만들어짐의 원인이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릇이 쓰러지거나 탈선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탈선하지 않는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인정하신다는 보증의 표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뱀의 악한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승인과 감사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주는 사람의 몫입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것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또는 은혜를 주신 분에게 감사하기 때문에 승인을 받습니다. 만일 그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의 승인은 몰수되며, 그는 무례함 때문에 스스로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 아낌없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불의하게도 자신이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는 체 하며, 자만하며,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는 근거에서 자신을 닮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은혜를 주시는 분에게 감사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바리새인처럼 행하며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또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가 "이르되"라고 말한 것은 옳은 표현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자화자찬하는 영혼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가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종종 동일하거나 비슷한 구절을 사용하는 것은 반복성이나 장황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읽는 것을 그의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저술의 열심 때문에, 그의 말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과 그 말의 무게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게으르게도 그 말들을 짓밟는 사람처럼 중단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유익을 거둘까요? 그는 정죄를 받을 뿐만아니라, 자기를 공격하고 있는 마귀들에게 문을 열어줌으로써 지성을 어둡게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말씀하셨고(눅 23:31),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만 집중하는 실체가 없고 형상이 없는 지성의 소유자들도 공격합니다. 만일 그들의 겸손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들의 기도는 천국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절망적인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입을 열어 허공에 말하지도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의 차원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들이 온전한 사람들을 공격하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성 마카리우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현세에서는 아무도 온전해지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온전해진다면, 현세에서 주어지는 것은 예비 되어 있는 복들의 보증이 아니라 완전한 실현일 것이다." 그는 여러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정신적으로 갑자기 천국으로 들려올라가서 거룩한 예루살렘과 성도들의 장막을 본 형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일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후에 덕을 버렸고 완전히 멸망한 상태로 생을 마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본성적으로 티끌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특권을 누림으로써 더 큰 빛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리우스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온전하지 못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거의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해도, 죄는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를 추적할 것입니다.

은자(隱者) 에바그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수도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유익을 위해서 마귀들이 그의 손과 발을 붙잡아 공중에 던졌다가 땅에 떨어질 때에 다치지 않도록 돗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마귀들은 오랫동안 이렇게 했지만 하늘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지성을 산만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어찌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인식하겠습니까? 언제 시편 찬송이나 독서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약하기 때문에 비록 그렇게 하여도 집중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필요합니다. 그처럼 거룩한 사람도마귀의 공격을 당했는데, 우리는 마귀들의 공격에 대해 전혀 근심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겸손 때문에 마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지만, 무지한 우리는 자만하고 우쭐댑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우쭐대는 것은 무지의 표식 입니다. 카시안은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에게서나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거저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얻은 것처럼 자랑하느냐?"라고 표현합니다(cf. 고전 4:7).

겸손은 영적 지식에게서 나오며, 분별을 낳습니다. 한편 분별은 선지자가 "모략"이라고 부르는 영적 통찰에게서 나옵니다(사 11:2). 우리는 그러한 통찰에 의해서 사물을 그 참된 본성에 따라서 보며, 지성은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죽습니다.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11. 분별

모든 일에 대해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분별은 때가 언제 무르익었는지, 어떤 의미가 사용되는지, 질문자의 내면 상태와 도달한 수준, 그의 능력, 영적 지식과 의도의 차원, 그리고 각각의 성경 구절의 의미와 하나님의 목적 등을 압니다. 이런 까닭에 분별이 없는 사람은 힘들게 노력해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반변에 분별을 소유한 사람은 장님의 안내자요.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됩니다(cf. 롬 2:19). 우리는 매사에 그러한 사람을 의지하며, 우리가 미숙하여 그들의 말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실제로 분별이 있는 사람은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모든 것을 찾아내시며, 하나님의 현존은 반항적인 지성도 설득하여 믿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요나(cf. 욘 1:3)와 사가랴(cf. 눅 1:18)에게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산적이었던 수도사 다윗에게도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천사는 그가 기도의 규칙에 따라서 낭송하는 시편 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일 현 세대에서 아무도 분별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분별을 낳은 겸손을 소유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권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cf. 약 5:16). 우리에게 거룩한 손, 즉 몸과 영혼의 깨끗함이 없어도. 최소한 악한 생각이나 원한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딤전 2:8)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침착하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비록 그리 선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행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의 공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정념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도,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 결과는 우리의 공적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는 곳에는 우쭐댐이 현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또 우리가 알면서도 행하지 않아 더 큰 정죄를 받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계시해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거두어 가시든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에 관련된 덕들을 실천함으로써 정념들을 제거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습관적으로 정념에 굴복하여 내면에 거하시는 성령을 모욕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먼저 오랫동안 금욕적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는 작은 죄든지 큰 죄든지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몸을 정화하기 시작한 후에, 영혼에게서 온갖 형태의 욕망이나 노염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는 선한 습관에 의해서 도덕적 충동들을 훈련함으로써 지성의 목적에 반대되는 것을 감각을 통해서 행하지 않으며, 속사람이 그러한 일에 동의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자신에게 예속될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그리고 무정념을 통해서 모든 것을 그에게 복종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해야 하며, 그 후에 지성적인 존재로서 주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의 지성은 원래 피조될 때처럼 판단력과 자제, 용기와 정의를 사용하여 다스릴 것입니다. 이제 그는 온유한 갈망을 가지고 화를 진정시킬 것이며, 준엄한 진노를 가지고 자신의 욕망을 잠잠하게 만들 것입니다. 또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의 사지는 무지와 망각에 의해 끌려 다니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 영적 통찰을 얻을 것이며, 마귀가 준비해 놓은 함정과 은밀한 공격을 예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들처럼 장래를 예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찰력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정화되면, 정념들의 폭정 아래 감추어져 있는 통찰력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때에 겸손을 통해서 임하는 은혜가 마귀에 의해 앞을 보지 못하던 영혼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즉시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전처럼 사물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는 냉정하게 금은보석을 바라보며, 정념들 때문에 그것들에 미혹되지 않으며 또 잘못된 평가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것들이나 다른 물질들이 땅에서 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사람을 볼 때에 그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식합니다(cf. 창 3:19). 그는 추상적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서 이것을 알고 있지만, 정념들에게 휘둘리기 때문에 여전히 물질을 갈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제넘게도 선행조건인 노력이나 덕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사물을 그 참된 본성에 일치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제넘음은 심지어 눈먼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며,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랑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단순히 추상적으로 사물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참된 본성에 일치하게 그것을 보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거기에서 나오는 내적 슬픔과 정화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과 초자연적인 은혜와 무정념은 물론이요, 여러가지 형태의 금욕적 노고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경험 많은 영적 아버지에게 복종한 단순한 사람들, 이 세상의 소란함과 교활함에서 해방된 지성의 소유자들에게는 사물을 그 참된 본성에 일치하게 보는 능력이 보다 쉽게 임합니다. 또 옛날 사람들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할 때에(cf. 욘 4:18)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섭리를 통해서 주어졌던 것처럼 그러한 능력이 주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서부터 정념들을 섬겨왔고 철저한 계략을 가지고 열심히 온갖 형태의 악의와 거짓을 실천해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노력하지않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러한 악에서 해방될 수 없고 사물의 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에 정념들에게 몰두했던 것처럼 덕을 획득하는 데 전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생각과 행동으로 이 덕들을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디지 않았거나, 자신이 가는 길이나 목표를 알지 못하고 있거나, 게으르거나 믿음이 부족하거나, 그밖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상황이 이러하며, 우리가 과녁에서 크게 벗어났다면, 자기만족과 깨닫지 못한 자기파멸에 미혹되지 않은 한, 어찌 옛 아름다움을 획득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기비판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므로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진보입니다. 반면에 자기만족과 주제넘음은 보이지 않는 멸망의 형태들입니다. 주께서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러운 영이 후에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영들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cf. 마 12:43-45). 은혜에 의해서 쫓겨난 정념들은 오만한 영혼에게 돌아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러운 영들이 떠난 곳에 영적 활동이나 겸손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속박에서 벗어난 더러운 영이 다른 많은 악과 함께 이곳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사람은 주목하십시오. 말씀이신 로고스께서는 사물을 우리에게 전하실 때에 지나치게 분명하거나 지나치게 모호하게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게 전하려 하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은 분명하고 어느 부분은 분명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부분에 의해서 믿음과 열심을 얻으며, 기록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불신앙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분명하지 않은 부분 때문에 자극을 받아 질문하고 노력하며,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로 인해 겸손을 배우며 이해력이 강화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수여되는 선물들을 평가해보면, 우리는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수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의 다섯째 단계의 표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망상으로 인해 눈이 멀지 않고 분별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과 감각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 정념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 또는 악한 생각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 우리는 사망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영적 지식의 마지막 단계들에도 적용됩니다. 처음단계와 관련하여, 우리는 배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표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의 악한 습관들에게 패배하기 때문에 노력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섭리 안에서 우리가 조금 곁길로 빠졌다가 크게 겸손해져서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주제넘게도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훈련하시고 가르치시면서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의 힘과 지식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깨달아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고후 1:9)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고 견디며 주제넘거나 덕에서 퇴보하지 않는다면, 몸과 물질의 죽음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피조된 실체들에 대한 영적 지식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cf. 롬 6:4-6). 우리는 육체의 훈련을 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며, 영혼과 관련된 덕들을 실천함으로써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립니다. 그리고 감각과 영적 지식의 죽음을 통해서 묻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정념 상태를 획득함으로써 영적으로 영원히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합니다.

12. 감지할 수 있는 세상의 관상

정념들에 대해 죽지 않는 한, 우리의 지성은 감지할 수 있는 실체들을 관상하려 하지 말아야합니다. 지성이 여전히 분심에 예속되어 있고 침묵과 영적 지식 안에서 성경을 묵상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을 관상하려 한다면, 지성이 이미 어느 정도의 영적지식을 획득했어도, 우리는 망각 속에 더 깊이 빠지며 점차 무지의 상태에 접근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식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서나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러한 신비들에 대해 배우고 있을 때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좋은 땅이라도 농부가 경작하지 않으면 굳어지듯이, 우리가 기도와 영적 독서를 주된 임무로 삼아 전념하지 않으면 우리의 지성은 상스럽고 무뎌집니다. 태양이 따뜻하게 비추고 비가 내려도 농부가 씨를 뿌리고 경작하지 않은 땅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듯이, 우리가 윤리적인 덕, 즉 영혼의 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혜에 의해서 영적 지식이 주어져도 우리의 지성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지성은 태만해져서 조금이라도 정념들을 향하면 즉시 길을 잃습니다. 만일 지성이 주제넘음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은혜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부들은 종종 늙거나 힘이 부족하여 육체의 훈련을 완화하더라도 도덕적 덕의 실천은 결코 완화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 금욕 대신에 육체적인 약함이 육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덕을 실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혼을 죄 없이 보존하여 지성이 조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농부는 자주 농기구를 바꾸지만, 땅을 경작하지 않거나 씨를 뿌리지 않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또 수확하기를 원하는 열매를 보호하지 않은 채 버려두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도둑이나 강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오려 한다면(cf. 요 10:1), 양-막시무스에 의하면 거룩한 생각-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도둑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풍문에 의해서 속이고 성경을 풍유로 바꿈으로써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그는 주제넘음과 사이비 지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 및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거룩한 생각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인 목자는 이러한 생각들을 불쌍히 여기며, 거룩한 계명을 지킴으로써 좁은 문, 겸손과 무정념의 문으로 들어갑니다(cf. 마 7:13)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배우고 연구합니다. 또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접근할 때에는(cf. 마 7:15),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라고 말하며 자기 비판에 의해서 몰아냅니다. 만일 어떤 생각이 염치없이 접근하여 "만일 네가 생각들을 지키며 사물들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지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여달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만일 네가 나를 바보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 호칭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요한 크리소스톰처럼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다음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천국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cf 눅 16:8). 이 세상 자녀들은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 똑똑해지고 칭찬을 받는 것, 권력을 얻는 것 등을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듯해도,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초인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전혀 다른 것을 열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장래에 받을 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기도 합니다. 그들도 이 세상의 자녀들처럼 노력하지만, 그들의 지성이 은혜에 의해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지성은 성경 및 영적 지식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증거하는 거룩한 생각들을 알게 되거나,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생각들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당황합니다. 그 때에 지성은 자신의 과거의 생각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시련이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들과 목적들을 신뢰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는 두려워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며 조언을 구하고, 겸손과 자아비판에 피하며, 영적 지식과 은혜의 선물들을 큰 빛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정해진 때가 있는 것들을 성급하게 추구하지 말라는 요한 클리마쿠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우리는 무모하게 행하지 말고 침묵 속에 감사해야 한다는 성 이삭의 충고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서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는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이나, 아담이 성급하게 감각적 실체들의 관상을 시작했다는 다메섹의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아기의 위는 매우 여리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며 우유를 먹어야 합니다(cf. 고전 3:2; 히 5:12-14).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관상을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근원적인 덕들을 획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지식이 자발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 글이 길어 나누었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됩니다 *********************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