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편의 설교 계속(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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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천사들의 위계에 대한 지식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실체들에 대한 관상에 굳게 자리 잡은 후에 지식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영계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영혼도 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만 아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익을 위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종종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 조상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사들을 보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또 우리는 공익을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일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마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믿지도 않을 때에, 공익을 위해서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꿈속에서라도 그러한 일을 경험하기를 원하는지, 또는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또는 우리가 처한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듯이 행동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함으로써 자신의 태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천사는 자신을 거부하는 지성도 안심시키며 자신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소유합니다. 마귀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지성이 자기들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볼 때에만 하나님의 동의를 받아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만일 지성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마귀는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주어진 수호천사들에게 쫓겨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지성이 자유의지를 원수에게 양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제는 천사들의 위계를 관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말과 성경에서 확인해주는 바에 의하면(cf. 사 6:2; 겔 1:5; 롬 8:38: 엡1 :21, 골 1:16, 살전 4:16), 천사들의 위계에는 아홉 계급이 있습니다. 이 아홉 계급은 각기 그들의 본성과 활동에 따라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무형"이라고 불리며, 지성적 존재들이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불리며, 만유의 왕의 섬기는 영들이기 때문에 "천군"(cf. 눅 2:13; 히 1:14)이라고 불립니다. 또 천사들에게는 특수한 이름과 호칭이 있고 일반적인 이름과 호칭도 있습니다. 그들은 "능력들"(cf. 엡1:21; 벧전 3:22)과 "사자들"(cf. 마 1:20)이라고 불립니다. "능력들"은 한 계급의 명칭이지만, 천사들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아홉 계급 전체에게도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계급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특별한 계급-우리와 가장 가깝고 하나님의 접근할 수 없는 보좌로부터 아홉 번째인 계급-은 "천사들(사자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모든 계급의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므로, 활동과 관련해서는 그들 모두가 "천사들", 또는 "사자들"이라고 불립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여호와를 "천사"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대접했다"고 말합니다(히 13:2; cf. 창 19:1-2). 다메섹의 요한이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찬송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는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친이시여,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서 다인 안에 있는 신비를 보았습니다. 그는 당신의 아들을 육체가 없이 받았습니다. "여호와는 뜨거운 풀무 속에 세 명의 경건한 청년들과 함께 계셨습니다(cf. 단 3:25). 또 선지자 이사야는 "기묘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주님을 "천사", 또는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주님 자신은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cf. 요 8:26) 주님께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14. 무정념

무정념이란 이상하고 역설적인 것입니다. 정념들에 대한 승리를 굳힌 사람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도까지 하나님을 본받게 됩니다. 무정념의 상태에 이른 사람은 마귀들과 악한 사람들의 공격을 받을 때에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경험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경험입니다. 그는 칭찬을 받을 때에 우쭐대지 않으며, 모욕을 받을 때에 상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분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는 것이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권적 행위로 여기며, 불쾌한 것은 시련으로서 오는 것으로 여깁니다. 전자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은혜로 주어지며, 후자는 우리의 겸손 및 내세의 소망을 키우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그러한 사람은 무감각하지만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것을 예리하게 의식합니다.

무정념은 한 가지 덕이 아니라 모든 덕을 지칭하는 명칭 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손이나 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에는 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에게는 사지뿐만 아니라 영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정념은 많은 덕의 연합이며, 영혼은 성령이 장악하십니다. 성령이 없으면 "영적"이라고 묘사되는 모든 활동은 영혼이 없는 활동이 됩니다. "영적 아버지"라는 호칭이 주어지는 것은 성령의 임재 때문입니다. 만일 영혼이 정념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영혼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성령이 현존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정념이라는 포괄적인 덕에 대해 바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성 령이 없이 무정념하게 된다면, 그는 실제로 무정념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런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교도들인 헬라인들은 영혼이 없는 것처럼 무정념하게 되라거나 정신이 없는 것처럼 정념에 휘둘리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에 의해서 영혼이 없는 듯이 무정념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념에 휘둘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부르는 데에는 우리도 동의합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지식이나 경험이 없으므로, 우리가 그들에게서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접 정념들의 폭정을 경험했고 정념들에 시달리는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또 우리가 덕의 획득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은혜에 의해서 무정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교부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정념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은 정념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죄수나 이성이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때때로 그는 무엇인가를 향한 욕망 때문에 정신없는 짐승처럼 생각이 없이 돌진하고, 때로 노염이 욕망을 옹호할 때면 사나운 짐승처럼 이를 갈며 동료에게 노골적으로 노염을 나타냅니다. 무정념을 획득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 때문에 무감각해집니다. 그는 때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의 장관을 묵상하거나 성경 구절을 묵상합니다. 그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에 있어도 그의 지성은 마치 홀로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 상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들을 지킴으로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을지어다. 아멘.

15. 사랑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대담하게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요일 4:16)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덕의 으뜸인 이 덕이 본성적인 덕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는 그것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나는 "뜻(혼)을 다하여"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으며, 나머지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뜻을 다하여"는 영혼의 지성적 능력과 도발적 능력과 갈망하는 능력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이 세 가지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적 능력은 항상 거룩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욕구는 항상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말아야 하며, 도발하는 능력은 이 열망을 방해하는 것만 적극적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요한의 말은 옳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하신 대로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이 하나님만 열망하는 것을 보신다면, 선하신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그 영혼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그 안에 거하시고 기동하실 것입니다(cf. 고후 6:16; 레 26:12). 그리고 몸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싫어하고 저항하지만, 결국 지적 능력에게 복종할 것이며, 사도 바울의 말처럼 육체는 더 이상 성령에게 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cf. 갈 5:17).

영혼이 없는 해와 달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세상에 빛을 주기 위해 천계를 돌듯이, 몸도 영혼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 빛의 일을 행할 것입니다. 태양이 날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행하여 하루를 만들고 밤이되면 사라지듯이, 인간이 실천하는 각각의 덕은 영혼을 조명해줍니다. 그리고 그 덕 이 사라지면 정념들과 어두움이 임하며, 그가 다시 덕을 획득하여 빛이 돌아 올 때까지 그 상태가 유지됩니다. 태양이 동쪽 끝에서 떠올라서 서서히 그 광선 서쪽 끝까지 이동시키면서 시간을 만들어내듯이, 사람은 덕을 실천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성장하여 마침내 무정념의 상태에 이릅니다. 또 달이 매달 찼다 기울었다 하듯이, 우리의 특별한 덕도 날마다 기울었다 찼다 하다가 마침내 우리 안에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그는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고통을 받고, 때로는 덕을 획득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때로는 조명을 받고, 때로는 어두움으로 채워지다가 결국 그의 여정이 끝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발생합니다. 어떤 것은 그로 하여금 우쭐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어떤 것은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 세대에서 태양은 하지와 동지를 만들고 달은 이울었다가 차지만 내세에는 의인에게는 항상 빛이 있고 나 같은 죄인들에게는 어두움이 있듯이, 영혼은 완전한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시각을 획득하지 전에 현세에서는 두 개의 지점(로잔)을 소유하며, 지성은 덕과 영적지식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경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얻기 위해 노력하는 완전한 사랑을 획득하여 내세와 관련된 일들을 행할 자격을 갖출 때까지 계속됩니다. 복종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또 부자가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종이 되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금식하는 것도 자신이 먹을 것을 다른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하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롭게 행해지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나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앞에서 말한 일들은 이웃 사랑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지만, 철야, 시편찬송 등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과 존귀가 있을지어다. 아멘.

16.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근원이 있으며, 만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끝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덕에도 시작이나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덕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을 초월하시며,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정복될 수 없으며, 공평무사하시며.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무한하시며, 헤아릴 수 없으시며, 불변하시며, 참되시며, 불가해하며, 끝이 없고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며, 접근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완전하시며, 존재를 초월하시며,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고, 자비가 가득하시며, 긍휼과 동정심이 가득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위 디오니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것들 하나하나를 거룩한 사람들인 것처럼 발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택하시기 때문에 고결하게 행하시며. 덕들을 마치 도구를 사용하듯이 완전히 자유롭게 강력하게 사용하십니다.

천사들과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존재 및 덕들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본받음으로써 의롭고 선하고 지혜로워 집니다. 그들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과 감화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들은 덕이나 지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변화하기 쉽습니다. 그것들은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혼합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이 없고 단순하고, 근원이 없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모든 피조물에 의해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사람은 많은 복합적인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의지를 소유합니다. 그의 지성은 단순하며, 항상 형상이 없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마지못해 형상이 없는 것들의 세계로부터 내려와 성경 구절이나 피조 세계의 양상을 관상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정죄를 피하기 위해서 몸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만, 이는 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육신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어 정죄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성이 주위의 정념들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의 참된 본성과 일치하게 그것들을 사용하듯이, 영혼도 몸을 거부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또 지성이 어리석은 정념들의 충동을 억제하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도하듯이, 인간도 자기 몸의 지체들을 지배하면서 많은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의지에 종속시킵니다. 그는 몸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나 몸의 지체들이 제멋대로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또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이 생각 없이 방탕하게 행동하거나 몸으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 지혜의 인도함을 받아서 세 가지 기능의 의지를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의지로 만듭니다. 이 지혜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도덕적 판단, 자제, 용기, 그리고 정의, 신학자 그레고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감화를 받아 이것들에 대해 훌륭한 글을 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17. 도덕적 판단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주요 덕에 대해 성 그레고리에게서 쉽게 배울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그것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다른 모든 덕들은 이 덕들을 필요로 하며, 모든 일에는 이것들 중 첫째 덕인 도덕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성공적인 결론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판단이 없으면서 어떻게 무슨 일을 성취 할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 판단은 지적 능력에서 태어나며, 교활함-즉 지나치게 빈틈이 없음-과 생각이 없음의 중간을 이룹니다. 교활함은 도덕적 판단을 잔꾀와 간계를 향해 밀어가며 그것을 소유한 영혼 및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생각이 없음은 우리를 우둔하고 경박하게 만들며, 지성이 거룩한 일, 또는 자신의 영혼이나 이웃에게 유익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높은 산과 같고, 후자는 골짜기와 같습니다.

도덕적 판단의 소유자는 이 둘 사이의 평원을 따라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골짜기로 떨어지거나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며, 통과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면 저도 모르게 골짜기로 뛰어내립니다. 또 그는 거기에서 기어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산꼭대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회개를 통해서 도덕적 판단의 길로 돌아오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떨어진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을 다시 덕의 왕도로 끌어내줄 수 있는 분을 부릅니다. 그러나 도덕적 판단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려 하면서 오만하게 위로 올라가지 않으며, 어리석게도 아래로 내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지도 않습니다. 그는 중도를 선택하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받아 그 길을 따라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을지어다. 아멘

18. 자제

자제는 확실한 분별 의식 입니다. 그것은 그 소유자가 방탕함이나 외고집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좋지 않은 것을 거부하면서 도덕적 판단을 통해서 수확한 것을 안전하게 보존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지적 능력과 결합하며, 자신을 통해서 지적 능력을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그것은 선한 목자처럼 양-거룩한 생각들-을 품에 안습니다. 그리고 해로운 것을 삼감으로써 미친개를 죽이듯이 방탕함을 죽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마치 사나운 늑대를 쫓듯이 몰아내며 양들을 한 마리씩 잡아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항상 그러한 어리석음에 시선을 두고, 그것을 지적 능력에게 계시해 줌으로써 그것이 달빛이 비추지 않는 어두움 속에 감추어지며 우리의 생각들 가운데 스며들 수 없게 합니다.

자제는 영혼의 갈망하는 능력에서 태어납니다. 혹시 그것이 없이 선한 것이 실현된다 해도, 보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제가 없으면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은 방탕함을 향해 끌려 올라가거나 어리석음을 향해 끌려 내려갈 것입니다. 나는 탐식과 부정에 포함된 방탕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양육되지 않은 모든 정념과 생각에 포함된 방탕함을 의미합니다. 자제는 모든 것을 훈련하며 영혼과 몸의 어리석은 충동들을 제어하며, 그것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19. 용기

이웃을 좌절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용기의 한도를 넘어선 위압입니다. 또 덕을 실천한 결과로서 시련이 닥칠 때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도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비겁함입니다. 용기란 꾸준히 모든 선행을 지속하며 영혼과 몸의 정념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혈과 육, 즉 사람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용기는 정사와 권세들, 즉 보이지 않는 마귀들을 대적하는 것입니다(cf, 엡 6:12). 승리하는 사람은 영적인 정복자가 되며, 그렇지 못하면 정념들에게 정복됩니다. 구약성서에 묘사된 전쟁은 우리의 영적 전쟁을 예시해줍니다.

위압과 비겁 이라는 두 가지 정념은 외견상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그 원인은 약함입니다. 위압은 사람을 위로 밀어당기며 겉보기에는 무력한 곰처럼 무섭게 보입니다. 한편 비겁은 쫓기는 개처럼 도망칩니다. 이두 가지 정념들 중 하나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견고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위압적으로 행하거나 비겁하게 행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자처럼 담대합니다(cf. 잠 28: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을지어다. 아멘.

20. 정의

위-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은 정의를 통해서 찬양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정의가 없으면 모든 것이 불의하며,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때로는 분별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공정한 중용을 확립하기 때문에 지나친 검약에 기인하는 부족함이나 탐심에 기인하는 과도함이 없을 것입니다. 지나친 검약과 탐심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정의의 아래, 후자는 위에 위치하면서 우리를 불의를 향해 밀고 갑니다. 옴폭한 선이나 볼록한 선 모두 직선이 아닙니다. 또 균형이 한편으로 기울면, 그 쪽이 반대편을 이깁니다. 그러나 정의를 굳게 붙들 수 있는 사람은 배로 다니고 흙은 먹는 뱀 (cf. 창 3:14), 염치없는 정념들의 종처럼 방탕함이나 비겁함이나 탐심이나 생각 없음 등을 통해서 끌려가지 않습니다. 또 그는 교활함과 위압, 어리석음과 지나친 검약, 지나친 기민함과 교묘함 등의 포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제하면서 지혜롭게 판단하고, 겸손하게 참고 견디며, 사도 바울처럼 자기가 가진 것은 은혜로 받은 것이라고 인정합니다(cf. 고전 4:7). 그가 성취한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자신과 이웃,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선한 것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가진 것이 제거될 때에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cf. 마 13:12)?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히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 평안

주님은 사도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덧붙이셨습니다(요 14:27). 주님은 사람들이 "평안하십시오"라고 인사하거나 수넴 여인이 "평안을 비나이다"(cf. 왕하 4:23)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하고 인습적인 방식으로 평안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평안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너는 평안하냐?"다시 말해서 "네 남편이 평안하냐, 네 아이가 평안하냐"라고 말하라고 게하시에게 명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안은 모든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요(cf. 빌 4:7),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전쟁과 위험한 일들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뒤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요 16:33).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이나 마귀들이 가하는 많은 고난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평안을 소유한다면 그것들을 능히 참고 견딜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주님은 "서로 화목(평안)하라"(막 9:50)고 말씀하셨습리다. 그들이 장차 주님을 위해 싸우고 고난을 받게 되기 때문에 주님은 미리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정념들의 공격을 받고 미혹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 및 이웃과 더불어 평안하다면, 그것들을 모두 정복할 것입니다. 이 정념들은 신학자 요한이 우리에게 미워하라고 말하는 "세상"(cf. 요일 23:15)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욕망을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영혼이 그 자체와 더불어 평안하며 완전히 하나님을 닳을 때에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합니다. 또 비록 영혼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서운 고난을 당해도 그들 모두와 더불어 평안할 때에,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합니다. 영혼은 인내심 때문에 동요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며(cf. 고전 13:7), 하나님과 자신의 본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불신자들은 스스로를 죽이기 때문에, 주님과 사도들이 불신자들로 인해 슬퍼하신 것처럼 영혼도 그들로 인해 슬퍼합니다. 영혼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수고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생각에 평안이 채워지며, 영혼은 영적 관상과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기도의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아멘.

22. 기쁨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3:1). 그가 "주 안에서"라고 말한 것은 올바른 표현입니다. 만일 우리의 기쁨이 주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기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욥과 대 바실은 인간의 삶에 온갖 종류의 고통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cf. 욥 7:1-21). 닛사의 그레고리는 새들과 짐승들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지만 지적 능력을 소유한 인간은 자신의 슬픔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이 상실한 복들을 알 자격조차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연은 우리에게 차라리 슬퍼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죄의 지배를 받는 유배 상태와 같아서 고통과 수고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의 말처럼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뻐할 것입니다(cf. 시 77:3).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지성은 이 세상의 고통을 잊고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며, 더 이상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지성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가 드리는 감사의 제물은 받은 은혜의 선물을 증가시킵니다. 그리고 복이 증가함에 따라서 감사가 증가하며, 기쁨의 눈물과 함께 드리는 순수한 기도도 증가합니다.

그 사람은 서서히 비탄의 눈물과 정념으로부터 나와서 완전히 영적기쁨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통해서 겸손해지고 감사하게 되며, 시련과 시험을 통해서 내세에 대한 소망이 견고해집니다. 그는 이 두 상태에서 기뻐하며, 또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은인으로 여겨 본성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는 피조 세계 전체에서 자기를 해칠 수 있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으로 인해 주 안에서 기뻐하며, 지으신 것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경탄합니다. 영적 지식을 획득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만 경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지식의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많은 본질적인 것들을 자신이 인식한다는 것에 의해 놀랍니다.

그러므로 그는 낮의 빛뿐만 아니라 밤도 경탄하면서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밤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밤은 몸과 관련된 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정적과 자유로운 시간을 제공하며,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죽음과 지옥의 기억을 조장하며, 도덕적인 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자신이 받은 복과 영혼의 도덕적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연구하고 조사하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리에 누워 마음속으로 말하는 것을 회개하라고(cf. 시 4:4), 즉 밤의 정적 속에서 회개하며 낮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범한 죄를 기억하며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자신을 훈련하라고(cf. 골 3:16), 다시 말해서 읽는 것을 집중하여 묵상함으로써 기도와 시편 찬송을 지속하도록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도덕적 덕의 실천은 낮에 발생한 것들을 묵상함으로써 실현되며, 그리하여 우리는 밤의 정적을 통해서 자신이 범한 죄를 의식하고 그로 인해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진보하며,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영혼이나 몸의 도덕적인 덕을 행동이나 생각으로 실현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때 우리는 두려워하면서 겸손하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눈물과 기도에 의해서 그 도덕적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망각 때문에 그것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 안에서 도덕적인 덕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대 바실의 말에 의하면, 관상생활과 관련하여 밤은 많은 관상의 주제들을 제공해줍니다. 우선, 밤에는 어두움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창조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것은 다시 태초에 하늘이 공허하고 별들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어두운 수실에 들어가면, 창조 전의 혼돈 상태를 덮고 있던 어두움을 기억하게 됩니다(cf. 창 1:2). 하늘이 다시 밝아질 때에 수실 밖에 설 때면, 욥기에서 천사들이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cf. 욥 38:7) 우리는 위에 있는 세상을 보고 경탄합니다. 우리는 정신의 눈으로 형체가 없고 보이지 않았던 원래의 세상(cf. 창 1:2)과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세상에 홀로 있다고 느끼며, 천사들과 함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천둥과 번개 속에서 심판 날을 보며, 수탉의 울음소리 속에서 심판 날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듣습니다(cf. 살전 4:16). 샛별이 뜨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우리는 생명을 주는 귀중한 십자가의 출현을 이해하며(cf. 마 24:30),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상징으로 여기며, 해가 떠오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가는 성도들처럼(cf. 살전 4:17) 노래를 부르면서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장차 심판을 받을 사람들처럼 무관심하여 잠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종일 기도하고 관상하면서 찬양의 제물을 드리면서 기뻐하며, 장차 재림 때에 의인들처럼 영적 지식의 빛 속에서 사는 것을 봅니다. 한편,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죄인들처럼 무지의 어두움과 정념들 속에서 계속 존속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영적 지식의 소유자는 모든 것이 자기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실제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말처럼 이 영광 때문에 지식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cf. 삼상 2:3). 한나는 지혜로운 자가 그 지식을 자랑하거나 용사가 그 힘을 자랑하거나 부자가 그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며, 자랑하는 자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자랑하라고 말합니다(cf, 삼상 2:10).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솜씨를 통해서 충분히 이해하여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랑해야 합니다. 그는 계명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처럼 땅에서 심판하고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과 관련하여 예언적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지혜자의 갈망 역시 덕을 획득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무정념과 영적 지식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종이 되며 주님의 겸손을 모방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cf. 고전 4:5). 그러나 그 일은 언제 발생합니까? 언제 주님은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조:34)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과 권세가 있을지어다. 아멘.

23. 거룩한 성경

시편 기자는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 47:7)라고 말하며, 주님은 "성경을 연구하라"(요 5:39)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조명을 받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어두움으로 채워집니다. 거룩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주 성경을 읽고 찬송해도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하면 지성이 집중할 수 있으므로, 성경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분적으로"(고전 13:12)라고 말하는데, 잠시라도 집중한다면 부분적으로라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특히 도덕적 덕의 실천에 있어서 어느 정도 진보한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념들과의 제휴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지성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성경 구절 안에 감추어두신 비밀들을 모두 알지는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한 그의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부분적으로 압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관상하는 도중에 특정 구절을 이해하며 그것이 기록된 한두 가지 의미를 파악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우리의 지성이 더 깨끗해지면 처음 이해했던 것보다 더 탁월한 다른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무한한 지혜 앞에서 당황하고 경탄하며, 지식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지금 나는 단순히 성경 구절을 경청하거나 어떤 사람의 말을 듣는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동 자체에는 지성의 깨끗함이나 신적 계시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나는 지식이 있지만 다른 성경구절이나 다른 성도들로부터 성경구절이나 감각적 / 지성적 실체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확인해주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한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이나 거룩한 교부들에게 주목하여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많은 의미를 발견해도, 믿음을 잃거나 그 안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본문이나 객체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복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옷이 따뜻하게 해준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치장해준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호해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말 모두가 옳습니다. 왜냐하면 옷은 보온, 치장, 보호에 모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옷에게 배정하신 목적을 파악했습니다. 성경과 사물의 본질이 그것을 확증해줍니다. 그러나 만일 도둑질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 옷은 도둑질을 당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한 거짓말쟁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나 사물의 본성은 옷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암시하며, 법도 옷을 훔치는 사람을 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에 적용됩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물이나 성경 본문과 관련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며, 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단번에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이해를 초월하시며,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기 때문에 천사나 인간이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 영적 해석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그것에 대해서 지금 말해야 할 만큼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것 외에도 측량할 수 없이 많은 의미를 알고 계십니다. 둘째, 사람들은 무능하고 약하기 때문에, 성도들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나치게 장황하게 말함으로써,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 혼란스러운 정신 때문에 그들의 말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그레고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능력에 비례해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한 사람이 특정 주제에 대해서 오늘 이야기하는 것과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다를 수 있지만,듣는 사람이 논의되는 문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동일한 성경 구절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 순간이나 특정인에게 주는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모든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 말씀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나 사물의 본성과 반대되는 것을 전파한다면, 비록 그가 천사라고 해도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는 사도 바울의 말이 그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이것은 위-디오니시우스, 성 안토니, 고백자 막시무스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요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헬라인들이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가 포로로서 바벨론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그를 바벨론으로 데려갔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사람에 대해서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그의 두 눈을 빼고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고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cf. 왕하 25:7; 렘 52:11). 따라서 그는 어느 기자의 말처럼 바벨론으로 갔지만, 다른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바벨론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험이 부족하여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거나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우스의 것으로 알려진 논문들이 실제로 그의 기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저서들을 주목하여 보는 사람은 진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연에 관한 문제에 관한 지식을 영적 통찰, 즉 깨끗한 지성을 통해서 획득한 자연에 관한 영적 지식과 피조물에 관한 관상에서 얻는다면, 그들은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정확하게 해석하며, 좋은 광맥을 찾아내는 광부처럼 성경을 찾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마 5:18)는 것을 보장합니다.

이것이 자연에 관련된 것들과 관련된 상황입니다. 당면한 문제가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자연을 초월하는 것일 때에, 성도들은 성령이 주시는 예언의 은사와 계시를 통해서 그것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에게 이러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면,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고 말하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약함을 고백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다"(잠 30:18)고 말했습니다. 또 요한 크리소스톰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만일 이단자들이 나를 불신자라고 부른다면, 또한 바보라고도 부를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도들은 영적 지식과 세상적인 지식을 소유하지만 영적 지식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수 이상으로 자랑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규칙에 따라서(cf. 고후 10:13) 제한된 목적을 위해서만 지혜롭게 세상에서 배운 것을 이용했습니다. 클레멘트의 저술에 의하면, 애굽 사람들은 사도 바나바가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그의 단조로운 어법을 조롱했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처럼 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상한 어조로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면, 그가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경외심을 일으키는 신비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소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미숙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종종 특별한 상황이나 자신의 글을 읽을 사람들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매우 단순하게 글을 썼습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 에프렘을 칭찬하면서 이것에 대한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그레고리의 말에 의하면, 에프렘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단순하게 글을 썼습니다. 그레고리의 말에 의하면, 에프렘이 유치한 이단자의 저주받은 책들을 신학적 교리에 정통한 방식으로 매우 유식하게 논박했는데, 그 교만한 그 이단자는 이것으로 인한 수치를 견디지 못하여 죽었습니다.

거룩한 겸손은 본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그것을 획득할 수 없으며, 그것이 본성을 거스른다고 생각합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디모데에게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옛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본성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디오니시우스나 디모데는 그것이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은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본성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은 생각과 말에 있어서 겸손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Geronikon을 편찬한 사람은 감독으로서 그리스도 때문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위해서 어느 처녀의 누더기 옷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도로테우스와 카시안은 지혜로운 교부들이었지만 단순하게 글을 썼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어떤 교부들은 교만하여 유식하게 글을 썼고 어떤 교부들은 지적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한 문체로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양측 모두 동일한 성령이 주신 동일한 지성의 능력을 통해서 글을 썼고, 그들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바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 모두가 단순한 문체로 저술했다면, 유식한 사람은 단조로운 문체 때문에 기록된 것을 무가치하게 여겨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 모두가 유식한 문체로 저술했다면 단순한 사람은 기록된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영적 해석에 노련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구절도 가장 심원한 구절과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두 종류의 구절 모두 인간의 구원을 지향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종종 세속적인 학문도 성령의 고귀한 지혜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합니다. 성령의 지혜는 영감 된 생각들을 줍니다. 한편 생각이 없는 것과 교활함을 두려워하며 자제하면서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겸손과 도덕적 판단을 동반하는 세속적 지식은 표현의 능력을 제공해줍니다. 누가가 "진실로"(cf 눅 9:27)라고 번역한 "아멘"이라는 용어가 안정되고 확고한 단어인 것처럼, 도덕적 판단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매달릴 수 있게 해주는 안정되고 확고한 형태의 지적 작용입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은혜의 영속성을 확인해줍니다. 이런 까닭에 그것은 예표(豫表)에 불과한 구약성서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영원히 세세토록 존속하기 때문에 도처에서 그 용어가 사용됩니다.

24. 마음속의 의식적인 깨달음

나는 자신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어렴풋이 볼 때마다 울고 싶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죄를 짓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면 낙심하고 낙담합니다. 나는 소망 안에 피하면 다시 오만해지며, 눈물을 흘리면 주제넘어집니다. 만일 내가 울지 않으면, 정념들이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 나의 삶은 죽음이지만, 나는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이 한층 더 나쁘게 보입니다. 나의 기도는 시험의 근원이 되며, 나의 의도는 재앙의 원인입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전 1:18).나는 제정신을 잃고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나의 지식은 나의 정죄에 기여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무지한 나에게는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일치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나는 시련을 참고 견디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당하는 시련 속에 감추어진 덕과 지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악한 생각들 때문에 침묵에서 도망치며,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나를 유혹하는 정념들에게 포위됩니다. 나는 금식하고 철야하기를 원하지만, 주제넘음과 방종의 방해를 받습니다. 나는 아낌없이 먹고 자며,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에서 이탈하고 도망치지만, 다시 냉담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싸움과 시련을 통과한 후에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주어지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두려움을 통해서 다른 덕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나에게 그들과 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나는 참 경건과 영적 지식을 받는 통로가 되는 이 두려움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통해서 능력과 이해력과 성령의 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cf. 사 11 :2). 이것들은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위에 있는 것이든지 아래 있는 것이든지 모든 것을 동등한 정신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성경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들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경험을 쌓으면, 특별한 정념이 덕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덕이 정념으로 전환할 때면, 세월이 흐르고 경험을 쌓으면서 참고 견디면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영혼 안에서 믿음이 그러한 인내를 낳지 못한다면, 영혼은 어떤 덕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시편기자의 말처럼 "모두의 마음을 지으신"(cf. 시 33:15) 주님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마음, 즉 지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것을 참고 인내함으로써 자신을 소유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가 "나는 이것을 원한다"거나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는 "이것이 선하다"거나 "이것은 악하다"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자신의 생각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안내자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하고 그의 대답을 듣고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이는 안내자가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질문하며, 믿음 안에서 주님의 대답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 안에 나타날 것이라고 바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사탄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우리에게 대답할 것이며, 우리의 안내자로 가장하고서 인내심이 부족한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내가 부족한 사람은 무지하여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을 붙잡으려고 성급하게 서두르며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cf. 시 90:4). 그러나 참고 인내함으로써 마귀의 간계를 경험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 표현할 것처럼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인내하면서 싸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cf. 고전 9:26; 빌 3:12). 그는 "우리는 그 계책-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마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책략-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고후 2:11)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라고 말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마귀가 우리 마음에 나타나게 만드는 생각들이 의로운 생각들처럼 보이므로, 이것은 결코 놀라운 말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천사의 말을 불신하지도 않고 원수의 속임수를 통해서 발생하는 것을 신뢰하지도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을 인내하며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탁하지도 않고 눈에 뜨이지도 않는 대답이 구체적인 행동의 형태로 주어질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극적인 영적 지식의 항구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이 지식이 여러 해 동안 우리 안에서 존속하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의 요청이 참으로 받아들여지고 응답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거짓 표적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가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에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는다 해도, 그는 절대로 그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생각들이 그의 지성을 겸손 및 자신의 약함에 대한 지식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속임수일까 두려워하며 여전히 이것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여러 해를 보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안에 일으키려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다가올 시련에 대해 경고하실 때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부주의하거나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고 두려움을 가지고 노력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이라도 마귀와 아담과 다를 많은 사람들의 타락으로 이어졌던 주제넘음에게 잡혀 있는 사람은 다른 덕들로부터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완전한 사람의 항구에 도착하여 더 이상 세상이나 몸 안에 있지 않게 될 때까지 두려움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 항구에 도착한 사람이라도 자진하여 그러한 두려움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큰 믿음 덕분에 그의 지성은 몸의 생사에 대한 모든 근심에서 해방되며, 그는 사랑에 의해 고취된 순수한 두려움을 얻습니다. 대 아타나시우스는 이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완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폭군으로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나타내지 않아 복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한 복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두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혼을 사랑을 향해 인도하시며, 그럼으로써 영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주어졌고 앞으로도 주어질 선한 것들을 누릴 자격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 때에 영혼은 사랑이 고취한 순수한 두려움에 의해서 본성을 초월하는 겸손을 획득합니다.

순수한 두려움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많은 복을 받거나 많은 두려운 일을 당해도, 자신의 능력이나 이해력 때문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고 견디거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혼자 힘으로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으며 은혜로 주어진 것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판단과 용기를 통해서는 시험을 제거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다는 것 등을 깨닫는 수단이 분별을 겸손히 받습니다. 그는 분별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영적 지식을 얻고 지성의 눈으로 만물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의 내적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사를 동경하지만 그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그의 분별력은 교사가 아닌 다른 사람은 모두 사기꾼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당황하며, 결국 자신이 행하고 배운 모든 것을 무로 간주합니다.

그는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것을 보며, 또 자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이 지식-그가 실제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지식-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cf. 고전 8:2),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빼앗긴다는 것(cf, 마13:12)-다시 말해서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분별이 없고 어리석으며 무지하고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며 웁니다.

겸손은 많은 덕들로부터 태어나며, 한층 더 완전한 것들을 낳습니다. 영적 지식, 감사, 기도, 그리고 사랑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 덕들은항상 증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죄 인이기 때문에 슬퍼하며 겸손해집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구한 고난과 구하지 않은 고난을 참고 견디며 자제를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금욕적 훈련을 통해서 마귀로부터 오는 것을 참고 견디며,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은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여겨 견딥니다.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사람을 신뢰하는지, 또는 자신의 힘과 판단을 신뢰하는지 분명해집니다. 그가 참고 견딤으로써,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의 유덕함이 증명되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큰 믿음을 받습니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통해서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를 통해서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겸손한 영혼으로 감사하기 시작하며, 다시 불순종에 바지게 될까 두려워 떱니다. 이 순수한 두려움-그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기인하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그의 지식의 결과로서 주어진 감사와 인내와 겸손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를 얻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각지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복을 받은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에게서 그러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게 될까 두려워하며 경계합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더 큰 겸손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보다 강력한 기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들과 감사함이 증가할수록, 그는 더 큰 지식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는 지식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감사함으로 나아가며,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지식을 얻습니다. 결국, 그는 참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자신이 받은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께 빛진 자로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의 지식은 한층 더 크게 증가하며, 그는 개인적으로 받은 복들만 아니라 보편적인 복들도 관상합니다. 그는 이것들에 대해 적절히 감사할 수 없기 때문에 슬퍼하며, 그 후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고 위로를 받습니다. 이따금 그는 고통스럽게 웁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겸손에서 오는 영적 기쁨은 그의 눈물을 꿀보다 더 달게 만듭니다. 그가 진정으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모든 명예와 안락함을 미워할 때,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며 자신이 조금도 이름 있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빛진 자라고 생각할 때, 그는 시련과 고난은 큰 복이요 즐거움과 편안함이 매우 해로운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닥쳐도 혼을 다하여 시련과 고난을 동경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라 해도 편안함과 즐거움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위에서 말한 눈물을 경험하는 동안, 그의 지성은 깨끗함을 획득하며 원래 상태, 즉 정념들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잃었던 본성적인 영적지식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지성은 사물의 본성적 모습을 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도덕적 판단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성경과 모든 피조물 안에 감추어진 비밀들-즉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영적 통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본성적인 지식은 분별에서 나오며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들의 내적 원리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피조물 관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본성적인 것이며 깨끗한 지성에게서 나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공익을 위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는다면, 그는 본성을 초월한 것을 획득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각각의 사물과 성경의 영감 된 말씀을 창조하신 목적뿐만 아니라, 만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은혜에 의해서 그러한 지식을 성도들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따라서 때로 도덕적 판단이라고 불리는 것, 즉 감각적 / 지적 피조물에 대한 관상은 일종의 영적 통찰 형태이며 본성 안에 이미 선재하기 때문에 "본성적인" 영적 지식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정념들이 지성을 어둡게 만들면, 그것은 상실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덕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념들을 제거해 주시지 않는 한, 지성은 눈먼 상태에 머뭅니다. 본성을 초월하며 오로지 은혜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예언의 은사는 다른 단계에 속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식은 본성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도인 헬라인들은 많은 것을 인식했지만, 대 바실의 말처럼 그들에게는 겸손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에 근거를 두고서 볼 수 없는 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믿는 것과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는 분을 믿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시련은 눈에 보이지만, 우리를 돕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르므로, 믿음으로 참고 시련을 견뎌낸 사람은 영적 지식을 발견하여 그것을 통해서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며, 또 자신이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치유를 행하시는 통로 역할을 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과 겸손을 얻습니다. 그는 이것을 본성적인 것으로 여기는 동시에 빛으로 여기며,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는 정념들을 원수로 여겨 미워하며, 감추어졌던 지혜 (고전 2:7)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무정념을 획득하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생각되는 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지혜는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불립니다. 세상에서 성공과 즐거움, 편안과 영광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지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것들과 반대되는 것을 얻기 위해 고투하는 사람, 즉 하늘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며 절제를 실천하고 온갖 종류의 시련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합니다. 전자는 물질적인 이익과 세속적 학문과 세상의 권력을 갈망하며, 종종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따라서 전자는 이 세상의 것에만 희망을 두며, 그것이 무상하고 얻기 힘들어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후자는 성경말씀처럼 "미련한 자들의 눈"(지혜서 3:2)에는 보이지 않지만 감추어졌던 모든 것이 드러날 다음 세상에서 분명히 계시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위해서 감추어진 것들에 대한 지식, 즉 거룩한 성경과 피조물에 대한 관상이 주어집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내적 슬픔을 낳습니다. 내적 슬픔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분별을 낳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별은 영적 통찰을 낳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예언의 은사를 낳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코 자기의 생각을 의지하지 말며, 항상 거룩한 성경이나 사물 자체의 본성에 비추어서 그것들을 확인하려 해야 합니다. 대 바실이 별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언급한 것처럼, 그러한 확인이 없는 것은 참된 영적 지식이 아니라 사악함이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몇 개의 별의 이름만 말하지만, 이교도인 헬라인들은 망상 속에서 많은 별들에게 이름을 부여합니다. 성경의 의도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며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비밀들, 그리고 피조물의 내적 원리들, 즉 각각의 사물이 피조된 목적을 계시해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주는 것, 그리고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말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를 지성으로 하여금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며, 또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의식하게 합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계명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또 아담이 소홀한 틈을 탄 원수에 의해 비열한 길로 끌려간 것처럼, 우리가 쉽게 물리지 않고 간절히 원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몇 가지 비밀들은 우리에게 드러내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덕을 획득한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지식이 부족한사람에게는 죄를 삼가게 하기 위해서 시련과 시험을 주어 경고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적인 복을 주어 격려하십니다.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마귀의 함정에서 구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은총과 지식을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감사하는 데 비례하여 은사와 거룩한 생각들을 주십니다. 또 성경을 읽는 각 사람의 성향 및 그에게 유익이 되는 것에 따라서, 성경의 의미를 감추기도 하시고 알리기도 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누르고 자신이 더 지혜롭게 보이려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달랐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들을 모방하는 사람들도 힘써 노력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의 노력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믿음-즉, 성경과 피조물을 관상하는 것-을 통해서 오는 겸손과 단순함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해주는 큰 믿음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초보"(cf. 히 6:1)라고 부르며, 요한 클리마쿠스는 침묵의 근원이라고 부르며, 성 이삭은 관상의 믿음이요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부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옛날 의인들처럼 성도들에게도 자기들에게 알맞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반석"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베드로의 이름은 그의 확고부동함을 가리키며, "안식"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바울의 이름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안식"을 언급합니다. 야고보는 마귀를 넘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불렸고, "면류관"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스데반의 이름은 그가 얻은 시들지 않는 면류관에 근거한 이름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헬라어로 "불멸"을 의미하며, 바실은 "왕국"을 의미합니다. 그레고리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혜와 신학 안에서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황금의 입"을 의미하는 헬라어 크리소스톰이라는 이름은 그의 유창하고 세련된 화법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삭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이름들은 적절한 이름들입니다. 아담의 이름은 네 가지 주요한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이루는 네 개의 문자는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들의 첫 문자들입니다. 시리아어에서 인간은 "불"을 지칭하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불의 본성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등잔불에서 불을 얻어 원하는 만큼 많은 불을 켤 수 있듯이, 온 인류는 한 사람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언어의 혼동 이후(cf. 창 11:1-9), 어떤 언어에서는 인간이 초래한 망각에서 "인간"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었고, 다른 언어에서는 인간의 다른 특징들에서 유래된 명사가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는 인간이 위를 바라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인간의 주요한 본성적 특징은 지성입니다. 인간만이 이 특성을 소유하므로, 인간은 지적 존재라고 불립니다. 인간에게 이름이 부여되는 근거가 된 다른 특성들도 있지만, 다른 많은 피조물들도 그러한 특성들을 소유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다른 것들은 모두 버리고, 지적 존재로서 지성을 굳게 붙들며,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성에게 지적인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인간의 말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거룩한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를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되게 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지성의 기도를 주시며, 부지런히 지성의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형상이나 형태가 없는 기도를 주십니다. 또 이 형상이 없는 기도를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피조물에 대한 관상을 허락해주십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즉 지성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며 하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각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면, 하나님은 정신이 황홀함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시며, 참 신학과 내세의 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영적 지식이 그 소유자에게 수치심을 채워 주어 겸손으로 인도하며 그로 하여금 자신이 자격이 없음에도 그러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선한 지식 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것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그것을 해롭다고 여겨 거부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삼지창에 찔려 죽은 수도사만큼 영적 지식으로 인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크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이 큰 손해라고 여겨 애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은밀한 교만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사람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위로부터 "그에게 결코 안식을 허락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는 한 순간도 나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 그의 기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시련과 시험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지만 교만했기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마감한 것입니다. 만일 그 원인이 다른 죄였다면, 그는 모든 사람들을 그 죄에 끌어들이거나 계속 그 죄를 범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의 죄가 이단이었다면, 그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함으로써 계속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영원히 감추어지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며, 그것을 신봉하던 사람은 원할 경우에 그것을 철회할 것이며, 만일 그가 철회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자만하는 오만뿐입니다. 오만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영혼을 시험하게 만들며 자기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시험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수도사는 항상 자신의 탁월함을 생각하면서 마치 그것이 고귀한 업적인 듯이 기뻐했기 때문에, 이 불행한 수도사의 영혼 안에서 성령은 한 순간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마귀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는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서 이 정념만 마음에 품었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이 정념은 다른 모든 악덕들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마귀들은 이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이해하고 분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영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나의 영적 아버지는 또 대 안토니가 바보 바울(St. Paul the Simple)에게 어느 처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일에 대해서도 말해주셨습니다. 바울은 당장 엎으려 순종하지 않고, 안토니에게 왜 자기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안토니에게서 자신이 다른 점에서 미쳤다는 말을 들은 후에 비로소 안토니에게 순종했습니다. 나의 영적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바울의 뒤로 미루고 지체하는 버릇 때문에, 마귀는 처녀에게서 즉시 나가지 않고 오랫동안 힘들게 노력한 후에 나갔습니다. 실제로 사태가 이와 비슷하다는 것은 거룩한 사부의 증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cf. 요 13:6-8), 모세가 하나님과 논쟁한 기사(cf. 출 4:10),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자기를 때리라고 부탁한 선지자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주어지지 않는 영적 해석을 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왕이 포악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폭정을 견딜 수 없어서 선지자에게 가서 그 왕을 책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왕의 잔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바로 왕에게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멀리서 그를 보고서 그가 오는 이유를 추측하여 그를 몰아내면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만일 그가 왕 앞에 가서 "나의 하나님께서는 폐하의 잔인함 때문에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해도 왕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매를 맞아 피를 흘리면서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발하는 것처럼 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왕을 속여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 했습니다.

선지자는 길을 가다가 도끼를 든 사람을 만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도끼로 내 머리를 치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는 자를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선지자는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홧김에 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안하게 죽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자에게 잡혀 먹혔으며, 그 비통한 죽음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Gerontikon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명의 사제들이 협정을 맺고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면 부정한 그들의 종이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사자가 그 종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헤시카스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시 선지자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선지자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여호와의 말씀이니 네 도끼를 들어 내 머리를 치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을 듣고서 주저하지 않고 도끼로 선지자의 머리를 쳤습니다. 선지자는 모세가 레위의 자손들에게 한 말과 비슷하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cf.출 8:29). 처음 만난 사람은 매우 경건하여 선지자를 존경했으며, 베드로가 자기 발을 씻기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cf. 요 13:8) 선지자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고, 두 번째 만난 사람은 레위 자손들이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형제들을 죽인 것처럼(cf. 출 32:26-29)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에 의해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이 더 선한 일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성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명령이 본성적인 지식보다 더 지혜롭고 의롭다고 여겨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옳은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롭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그가 행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살펴보면, 상황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나 불순종의 배후에 놓여 있는 동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이 더 선한 길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 선지자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 노하셨으며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적 관상의 관점에서 보면, 양자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동기에서 행동했기 때문에 동등하게 선합니다.

그 후에 선지자는 왕에게 가서 "내가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내 머리를 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상처와 피 흘리는 것을 본 왕은 항상 하던 대로 노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정죄하리라고 생각하고서 선지자를 때린 사람을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 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한 선지자는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네가 이러한 일들을 행했으니, 내가 분명히 너와 네 자손에게서 이 나라를 빼앗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원한 대로 자기의 메시지를 전했고,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선지자들의 영혼들은 그처럼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자신이 지닌 하나님에 대한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고난 받았습니다. 이것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어떤 길이나 기술에 익숙한 사람은 기꺼이 쉽게 그것을 실천하며,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길의 방향을 가르쳐주거나 기술의 비밀과 요점을 가르쳐줍니다. 종종 공식적인 훈련이 부족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다른 일에 있어서 지혜롭고 연륜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우리처럼 간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피를 흘림으로써 성령을 받아 교부들의 말을 예증했습니다: "피를 흘리고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교부들은 외적인 의미에서 순교한 것이 아니라 양심 안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죽으려 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지성은 세상의 모든 욕망에 대해 승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립니다. 영원히 주님을 경배하고 영광과 존귀를 돌릴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