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기도 방법


 


 


신 신학자 시메온


St. Symeon the New Theologian


 


 


그리스 교부들 중에서 신 신학자 시메온(949-1022)만큼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의 제자인 니키타스 스티타토스(Nikitas Stithatos)가 저술한 전기가 있을 뿐 아니라, 시메온 자신의 저술에서 생생한 개인적인 언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정교회의 신비적 전통에서의 영적 아버지 제도의 중요성을 예증해준다. 시메온은 소아시아의 지방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11살 때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삼촌에게로 보내졌다. 부모들은 그가 장래에 황실에서 근무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14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스튜디오스 수도원 소속의 "경건한 시메온"이라는 수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일은 그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젊은 시메온의 영적스승이 된 경건한 시메온(St. Symeon the Studite, c.917-986/7)은 사제로 서임되지 않은 평신도 수도사였다. 동방 기독교에서는 종종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수도사들이 영적 지도 사역을 행했으며, 때로는 수녀들이나 수도사가 아닌 사람들도 영적 지도를 행했다. 신 신학자 시메온은 특히 사제가 아닌 수도사들이 고해성사를 받고 사죄를 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문을 저술했다.


경건한 시메온의 지도를 받으면서 젊은 시메온의 기도 생활은 급속하게 발달했다. 그는 아직 세속생활을 하고 있던 20살쯤 때에 처음으로 피조된 것이 아닌 거룩한 빛의 환상을 받았고, 그 후 일련의 그러한 환상들을 받았다. 그는 다시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가 977년에 스튜디오스 수도원에 수련수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경건한 시메온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데 분개한 그 공동체의 수도사들 때문에 그는 일 년이 못되어 그곳을 떠나야 했다. 영적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은 그를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성 마마스(St. Mamas)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사가 되었고, 980년경에 사제직에 서임되고 25년 동안 수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 수도원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그의 지도하에 크게 부흥했다 성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영적 스승으로 유명해졌고, 많은 유명한 평신도들이 그를 찾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조언을 구했다. 성 시메온은 자기의 지도를 받는 수도사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목자였다. 동시에 그는 표준을 높이 두고 따르는 "열성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수도사들이 자주 성찬을 받기를 기대했고. 경건한 시메온의 가르침을 좇아 성찬을 받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지나친 기대 때문에 996-8년에 수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시메온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데 성공했다. 몇 년 후 그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사망했을 때 시메온은 공개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수도원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교회 당국자들에게 고발했다. 시메온은 평신도 고해 성사에 관한 가르침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시메온은 1005년에 대수도원장 직을 사임했다. 그는 4년 후인 1009년에 총대주교와 성의회(Holy Synod) 앞에서 재판을 받고, 보스포로스 해안에 있는 팔로우키톤으로 유배되었다. 이 판결은 곧 취소되었고 그는 다시 주교직에 복귀되었지만, 그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유배지에서 살다가 1022년 3월에 사망했다.


추종자들이 그에게 "신 신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을 볼 때, 그는 매우 존경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신학자"라는 용어는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a person cf prayer),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를 두고서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 시메온의 시대 이전에 "신학자"라는 호칭은 주로 복음서 기자 요한, 그리고 동방교회에서 세 명의 위대한 고위 성직자들 중하나로 존경받는 인물로서 관상적인 시들을 저술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게만 사용되었다. 시메온이 "신 신학자"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가 이 두 사람들과 함께 내적 기도의 전승에 대한 신실한 증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메온은 이러한 경험적인 의미에서 "신학자"일 뿐 아니라 신비생활의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상적인 연합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또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환상들에 대해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같은 죄인을 이처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더 큰 긍휼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가장 좋은 것이 여러분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성 마카리우스와 성 니코데무스는 성 시메온의 저술들 중에서 두 편을 이 책에 수록했다. 첫 번째 저술인 『사랑에 관하여』(On Love)는 시메온이 성 마마스의 대수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사들에게 행한 설교들이나 교리문답 중 하나이다. 그는 여기에서 조지(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내면생활에 대해서 삼인칭으로 이야기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청년은 시메온 자신이라고 여겨진다. 조지라는 이름은 그가 수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사용했던 세례명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거룩한 수도사"라고 지칭한 그의 영적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준다. 젊은 시메온은 고행자 마가(Mark the Ascetic)의 글을 읽으면서 특히 "너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 그리고 "성령의 능력들"에 대한 언급에 감명을 받았다.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신 신학자의 가르침의 중심사상들 중 하나이다. 그는 최초로 하나님의 빛을 보면서 기쁨을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 묘사하면서, 그 일이 자신이 세상적인 분심거리들로 인해 번잡한 평신도 시절에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외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관상의 고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인 『153편의 실질적이고 신학적인 본문들』(One Hundred and Fidty-Three Practial and Theological Texts)은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글이다. §§1-118은 신 신학자의 226편의 본문들 중에서 취한 것이고, §§119-52는 신 신학자의 스승인 경건한 시메온의 글이다. §153의 첫 부분은 니키타스 스티타토스가 저술한 신 신학자의 전기 §31에서 취한 것이다.


신 신학자의 저술들 중에서 취한 부분에서는 그가 즐겨 사용한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언급된다: 거룩한 빛(§§68, 105-6), 눈물의 은사(§§67,69), 성령을 의식적으로 경험해야 할 필요성 (§85), 영적 스승의 사역(§§6-19, 38-9, 41). 수도사들에게 과거의 모든 연결고리들, 특히 가족들과 완전히 결별할 것을 요구한 데서 시메온의 엄격함이 분명히 나타난다(§§3-8). 한편 그는 개인의 소명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추상적으로 어떤 형태의 삶이 다른 형태의 삶보다 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들면, 은둔 생활이 공주(公住) 생활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각 사람에게는 각기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길이 가장 선하고 고귀한 삶의 형태이다(§§88-92).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결혼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관상의 고지에 다가갈 수 있다.


경건한 시메온의 저술인 그 뒤의 본문에서는 스튜디오스 수도원만큼 조직적인 큰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저자는 엄격한 가난, 자기 의지의 근절,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단순성, 불필요한 분규에 얽히는 일을 피할 것 등을 강조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은 속죄의 고행이 아니라 즐거운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것(§140), 하나님의 빛을 보는 것(§150),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 (§§129, 141) 등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들은 후일 그의 제자인 신 신학자 시메온이 발달시킨 주제들이다. 경건한 시메온은 사랑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사랑이 기도보다 더 위대하다"(§143)라고 표현한다. 신 신학자 시메온도 이 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6l).


 


 



신 신학자 시메온의 것으로 간주되는 글:


"세 가지 기도 방법"


 


 


St. Nikodimos c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c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4 (서울: 은성, 2008), pp. 88-102.


 


 


개 론


 


『거룩한 기도와 경청의 방법』(Method cf Sacred Prayer and Attantive- nes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짧은 글에서는 예수기도와 결합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권한다. 이 글은 적어도 14세기부터 신 신학자 시메온의 저술로 간주되어 왔지만, 1927년 이후로 저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하우세르(Irénée Hausherr)는 이 글과 니키포로스(Nikiphoros)라는 수도사의 논문 정신 신체적 기법을 어느 정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깨어 있음과 마음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On Watchfulness and the Guaring cf the Heart) 사이에 비슷한 구절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니키포로스가 이 두 글의 저자라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니키포로스가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통적으로 신 신학자 시메온을 저자로 여기는 데에는 적어도 한 가지 참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 글이 시메온의 것이 아니라면, 그의 제자들의 것일 것이다. 당분간 이 글의 정확한 저술 연대와 출처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 성 마카리우스와 니코데무스가 이 저서를 현대 그리스어로 의역했으며, 현재 우리의 번역본은 하우세르의 원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중심 주제는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묘사하는 처음 두 가지 기도 방법은 불완전하며, 마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 이 글을 비롯하여 다른 글에서 사용되는 "마음"(heart)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정과 성정(性情)뿐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완전체로 간주된 인간의 영적 중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음이란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세 가지 기도방법』의 저자는 마음을 지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특징을 포함하는 정신 신체적 기법을 제안한다: 첫째는 턱을 가슴에 대고 배꼽을 응시하는 자세 , 둘째는 호흡을 제어하여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것 ; 셋째는 지성이 내면을 탐색하면서 마음의 장소를 찾는 것. 이것은 예수기도와 병행하기 보다는 예수기도에 선행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예수기도를 행하기에 앞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돕기 위한 선행 활동이 되어야 한다.


현대 서방의 저자들은 이 정신 신체적 기법을 요가나 수피즘에서 사용되는 방법들과 비교해왔지만, 그것들 사이의 유사한 점들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의 저자는 이 기법을 특별히 기독론적인 배경 안에 둔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기도를 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데 있다. 그러한 기법을 잘못 사용할 때에는 육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에 심각한 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채택되어야 한다. 『세 가지 기도 방법』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잘못이 없는 확실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정교회 내의 거의 모든 교사들은 정신 신체적기법은 노련한 교사의 개인적인 지도하에서만 실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체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도 예수기도를 완전히 실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간단히 설명된 기법은 인간에 대한 건전한 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St. Gregory Palamas)는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라고 지적하는데, 그것은『세 가지 기도 방법』의 서두에서도 분명히 진술된다. 몸은 우리의 완전한 개성의 본질적인 측면이므로 기도할 때에 등한시 되거나 무시하지 말고 역동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세 가지 기도방법



기도와 경청과 관련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영혼은 이것들에 의해서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방법들을 바른 시기에 사용하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지만, 옳지 않는 시기에 어리석게 사용하는 사람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깨어 경계하는 것과 기도는 몸과 영혼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기도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죄와의 전쟁에서 깨어 경계함은 정찰병처럼 선두에 섭니다. 그 뒤에 기도가 따르면서 깨어 경계함과 이미 교전하고 있는 모든 악한 생각들을 즉시 죽이고 근절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악한 생각들을 근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사의 문입니다. 우리가 깨어 경계함으로써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한다면 진보하지만, 기도를 지키지 않고 버려두어 더럽혀지는 것을 허용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되고 무익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집중과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므로, 생명을 얻고 확신을 가지고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각각의 방법의 특징을 설명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무지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잃고 좋지 못한 것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기도 방법


 


첫 번째 기도방법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서 서 두 손과 두 눈과 지성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자신의 지성에 거룩한 생각들, 천상의 아름다움과 천군들과 의인들의 거처에 관한 심상들로 채웁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기도할 때에 거룩한 성경에서 들은 모든 것을 지성 안에 모아 정리하며, 하늘을 응시하면서 영혼을 자극하여 거룩한 것을 갈망하게 하며, 때때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우쭐대고 교만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을 거룩한 은혜의 결과라고 여기며 자신이 항상 이러한 활동에 개입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바른 방식으로 행해지지 않는 선은 선이 아니므로 그러한 태도는 망상의 표식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침묵의 은둔생활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미칠 것이며,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해도 거룩함이나 무정념의 상태를 회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방식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미혹되어 자신이 육체적으로 빛을 보고 향기를 맡고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귀신에게 사로잡혀 사방으로 배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를 알아보지 못하고(cf. 고후 11:14) 신뢰하여 죽을 때까지 미혹된 상태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마귀의 선동을 받은 사람들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속임수를 모두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첫 번째 집중 방법이 초래하는 해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을 채택한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해악들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평생은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독거 자들은 특히 그러한 해를 입기 쉽습니다).


 


 


두 번째 기도 방법


 


두 번째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지성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감각들을 지키고 생각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때로는 자기의 생각들을 조사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표현에 집중하며, 때로 정념들에게 사로잡힌 생각들을 되찾아오며, 또 자신이 정념에게 정복될 때에는 회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평화나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컴컴한 밤에 싸우는 사람과 같아서 원수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지만,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오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공격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지성 안이 어둡기 때문에 그러한 피해를 입습니다. 이런 식으로 싸우기 때문에 그는 정신적인 원수들을 피하지 못하며, 그들로 인해 기력을 잃습니다. 그는 노력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지중에 자부심에 빠집니다. 그는 자부심의 지배와 조롱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이 부족한 것을 멸시하고 비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치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처럼 됩니다(cf. 마 15:14).


이것이 두 번째 기도 방법의 특징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노력하는 사람은 이 방법이 끼치는 해로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도 없는 어두움보다는 달빛이 낫듯이, 이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보다 낫습니다.


 


 


세 번째 기도방법


 


이제 세 번째 기도 방법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이 기도 방법과 순종이라는 덕을 함께 상실한 듯합니다. 순종에 대한 사랑은 악한 세상과 뒤얽혀 있는 우리를 구해주고 걱정과 정념에 물든 갈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안내자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고 성실하게 목표를 추구하게 합니다. 만일 당신이 순종을 통해서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애착에 대해 자신을 죽인다면, 무상한 것이 어찌 당신의 지성을 사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사람들의 평판에 관심을 두지도 않은 채, 몸과 영혼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과 영적 아버지께 맡긴 사람이 어찌 근심에 시달릴 수 있겠습니까?


이 세 번째 방법은, 마귀들이 지성을 온갖 교활한 생각들로 끌어들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궤계들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깨끗한 마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해방된 지성은 힘껏 싸우면서 원수가 은근히 심어준 생각들을 자세히 조사하여 솜씨 좋게 그것들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참된 은둔생활의 출발점이며, 이런 식으로 출발하지 못하는 사람은 헛되이 기력을 소진합니다.


이 세 번째 기도 방법의 출발점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생각을 집중하며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첫 번째 형태의 망상의 표식들입니다. 또 그것은 두 번째 방법처럼 내면에서 공격하는 원수들을 관찰하지 못한 채 지성을 사용하여 감각을 지킴으로써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행하는 사람은 마귀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들의 공격을 받으며, 상처를 입어도 의식하지 못하며, 자기를 사로잡는 자에게 반격하지 못합니다. 원수들은 끊임없이 배후에서, 심지어 직접 대면하여 공격하면서 그에게 자부심과 오만을 채워줍니다.


만일 이 빛을 주는 즐거운 임무에 착수하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십시오. 우선 위에서 묘사된 것처럼 항상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엄격한 순종을 실천하십시오. 순종이 없으면 양심이 깨끗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양심을 깨끗이 보존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하여, 둘째는 영적 아버지에 대하여, 셋째는 사람들과 물건들에 대해 양심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상충되는 일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영적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그분이 명하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며, 그분의 목적과 뜻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 관해서는, 당신이 싫어하는 일 및 당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들에게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토빗 4:15). 물건들과 관련해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의복을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여 양심이 당신을 책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집중의 참된 특성 및 그 근거를 설명했으므로, 이제는 그것의 특징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바르고 참된 집중과 기도란 마음이 기도하는 동안 지성이 마음을 지켜 돌보는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서 순찰해야 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관대하시다는 것을 마음 안에서 맛본(cf. 시 34:8) 지성은 마음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 베드로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성은 항상 마음 안에 깨어 있으면서 원수가 심어주는 생각들을 거절하고 몰아낼 것입니다. 이 수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모질고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입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경험은 있지만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숨막히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외칩니다.


교부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2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뿐 아니라 안도 깨끗이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마 23:26). 그들은 마음을 지킴으로써 다른 모든 덕을 소유할 수 있지만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덕도 굳게 세워질 수 없다고 확신하고서, 모든 형태의 영적 수고를 포기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이 임무에만 전념했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이 수행을 마음의 정적이라고 표현했고, 어떤 사람들은 경청이라고 표현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은 깨어 경계하여 물리침 이라고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생각들을 조사하고 지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쨌든 그들 모두 자신의 마음 밭을 경작했고, 거룩한 만나를 먹었습니다(cf. 출 16:15).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언급하여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며"(전 11:9), 마음에서 노염을 물아내고"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 10:4)고 말합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며"(마 15:19);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29)고 말씀하셨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 (마 7:14)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5:3),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했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엡 6:12)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행자 마크, 요한 클리마쿠스, 헤시키우스, 시내 산의 필로테우스, 은둔자 이사야, 바르사누피우스, 그리고 『교부들의 낙원』(The Paradise of the Fathers)이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거룩한 교부들도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성을 지키지 않으면 깨끗한 마음을 획득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cf. 마5:18).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심령이 가난해지거나 애통하거나 의를 갈망하거나 온유하거나 마음이 깨끗해지거나 화평케 하는 자가 되거나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수 없습니다(cf. 마 5:3-10). 일반적으로 말해서,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덕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려면 무엇보다 그것을 부지런히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기를 원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힘껏 그것에 대해서 말해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획득함으로써 당신이 구하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첫째는 이성적인 것이든지 분별없는 것이든지 모든 사물과 관련하여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합리다. 둘째, 깨끗한 양심을 보존하여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 완전히 초연함으로써 당신의 생각들이 세상에 속한 것, 심지어 자신의 육신조차 향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조용한 수실 한 구석에 홀로 앉아서 다음과 같이 행하십시오. 수실 문을 닫고, 무가치하고 덧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성을 거두어들이십시오.


그 다음에는 고개를 숙여 턱을 가슴에 닿게 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시선을 배굡에 두십시오. 들이쉬는 호흡을 억제하면서 지성으로 하여금 내면에서 영혼의 모든 능력들이 거주하는 장소인 마음을 찾아보게 하십시오. 우선 그곳에서 어둠과 불가해한 불투명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밤낮으로 이것을 꾸준히 실천하면, 끊임없는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지성은 마음의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전에 알았던 것들이 무(無)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성은 마음 안에서 광활한 공간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명석하고 분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느 쪽에서 산만한 생각이 나타나든지 그것이 완성되어 형태를 취하기 전에,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몰아내고 소멸시킵니다. 이때부터 지성은 마귀들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기 시작하며, 정신적인 원수들에 대해 본성적인 분노를 일으키면서 그것들을 추적하여 쓰러뜨립니다. 그 밖의 것들은 당신이 계속 지성을 지키고 경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스스로 배울 것입니다. "수실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수실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질문 : 왜 수도사는 첫째 형태와 둘째 형태의 경계에 의해서 온전함을 회득할 수 없습니까?


대답 : 왜냐하면 적절한 순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 클리마주스는 이 방법들을 사다리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념들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편찬송을 실천하면서 보내고, 어떤 사람은 기도에 헌신하며, 또 어떤 사람은 깊은 관상에 집중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볼 때에는 사다리를 사용하여 유추해봅시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은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내려오지 않고 바닥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갑니다. 그는 첫째 계단을 오른 후에 둘째 계단을 오르고 차례로 계속 올라갑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장하는 어린이들처럼 우리 앞에 놓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여 한 단계씩 전진하다보면 마침내 장성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것입니다.


수도 상태의 첫 단계는 정념을 억제하는 것이며, 이는 초심자들의 단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여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진보하는 두 번째 단계는 부지런히 시편 영창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념들이 억제되고 매장되었을 때에 실천하는 시편 영창은 혀에 즐거움이 되고 하나님이 영접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방 땅에서. 즉 정념이 물든 마음은 여호와께 찬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cf. 시 137:4). 이것이 진보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표식입니다.


영적으로 청년기에서 성인 단계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특징인 세 번째 단계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진보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사춘기 소년이나 청년들과 다르듯이, 기도와 시편영창은 다릅니다.


영성생활에는 네 번째 단계. 즉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노년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관상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며, 온전한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착하여 여정이 끝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정하시고 배열하신 상태이므로, 어린아이는 사다리의 첫째 계단에 올라가고 계속하여 네 계단을 올라 온전함에 이르지 않고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거듭남을 원하는 사람이 빛을 향해 오르는 첫 단계는 정념들을 죽이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지키지 않고서는 정념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단계는 시편 영창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정념들에게 저항함으로써 그것들을 죽여 매장한 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향한 열망이 지성을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이 열망으로 인해 힘을 얻은 지성은 마음을 둘러싸서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산만한 생각들을 집중과 경청으로 물리칩니다. 이처럼 지성은 둘째 단계, 즉 경청과 기도의 단계에 전념합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을 자극하며, 정념의 바람은 마음 깊은 곳을 거세게 휘젓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원함으로써 악한 영들이 완전히 정복되며, 소동은 마치 밀랍이 불에 녹듯이 사라집니다. 마귀들은 마음 밖으로 쫓겨났지만 감각을 통해서 외적으로 지성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상적으로만 지성을 괴롭히기 때문에, 지성은 곧 평온함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결코 마귀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자유는 완전히 장성한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초연하며 쉬지 않고 마음에 집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중과 경청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후에 조금씩 노년기의 지혜, 즉 관상의 단계로 상승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람들의 단계입니다.


이 모든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순서대로 실천하여 완성한다면, 먼저 당신의 마음에서 정념이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 완전히 시편 영창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감각들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지성의 표면을 어지럽게 하는 악한 생각들을 대적할 수 있으며 영적인 눈과 육신의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면서 순수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공중에 매복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가끔씩만 위를 응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깨어 경성함을 통해서 정화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와 열매도 거룩할 것입니다(cf. 롬 11:16). 그러나 만일 앞에서 말한 순서를 따르지 않은 채 영적인 것을 보려고 두 눈과 지성으로 하늘을 바라본다면, 진리가 아니라 환상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청의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은 우리를 진보하게 하지 못합니다. 집을 지을 때에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얹지 못합니다. 먼저 기초를 놓은 후에 벽을 쌓고 마지막에 지붕을 얹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집의 영적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지키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념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집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감각에 의해서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영들의 소동을 둘째 형태의 경청을 통해서 물리쳐야 하며, 되도록 신속하게 그것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 지붕을 얹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 인 집이 완성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