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관한 글 15편


 


 


St. Gregory cf Sinai(시내 산의 성 그레고리)의 글


St. Nikodimos c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c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4 (서울: 은성, 2008), pp. 384-399.


 


 


 


 


두 가지 기도 방법


 


1


두 가지 형태의 연합, 또는 성령이 마음 안에서 촉진하는 영적 기도를 시작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행동이 있기 전에 주님과 굳게 결합된 지성(cf. 고전 6:17)이 마음에 있든지, 아니면 영적 기쁨의 불속에서 점진적으로 소생한 기도가 지성을 끌어당겨 주 예수의 기도 및 주님과의 연합과 결합시킵니다. 성령은 각 사람 안에서 그 뜻대로 행하시므로(cf, 고전 12:11), 어떤 사람에게서는 우리가 언급한 이 두 가지 방식 중 하나가 우선하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나머지 방식이 우선합니다. 쉬지 않고 예수그리스도께 기도함으로써 정념들이 가라앉으면, 마음에서 거룩한 능력이 솟아오르고 거룩한 불이 붙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정념들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합니다(cf. 신 4:24; 히 12:29). 또 성령은 지성을 자신에게 끌어당기시고 마음 깊은 곳에 가두시며 일상적인 분심들을 제거하십니다. 그 때에 지성은 예루살렘에서 포로가 되어 아시리아로 끌려가지 않고, 상태가 호전되어 바벨론을 떠나 시온으로 돌아오며 시편기자처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예루살렘에서 행한)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1: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시 126:1)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야곱은 금욕적으로 행동하는 지성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금욕적인 노력을 행함으로써 정념들을 정복하고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관상적 지성을 언급합니다. 그 때에 지성은 마치 잔치에 초대받아 거룩한 기쁨을 배불리 먹은 것처럼 "주께서 나를 괴롭히는 마귀들과 정념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습니다"(cf. 시 23:5)라고 노래할 것입니다.


 


경계(Watchfulness)의 출발점


 


2


솔로몬은 집중하지 못하여 기도를 중단하는 순간이 없이 계속 기도하려면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고 말합니다. "씨"는 기도의 씨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새벽부터 대략 20센티미터 정도 높은 곳에 앉아서 지성으로 하여금 머리를 떠나 마음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머물게 하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가슴과 어깨와 목에 아픔을 느끼면서 영혼 안에서 계속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나를 먹는 사람은 더 먹고 싶어지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더 마시고 싶어진다"(집회서 24:21)라는 성경 말씀처럼 세 가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가지 기도를 계속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게 계속하는 것은 지루하고 짜증날 수 있으므로, 그 다음에는 지성을 그 기도의 후반부에 집중시키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여기소서"라고 반복하십시오. 이 후반부의 표현을 바꿔가면서 계속 되풀이 하십시오. 그러나 나무를 자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호흡을 억제하십시오. 숨을 내쉴 때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공기가 지성을 흐리게 하고 생각을 어지럽게 만들고 지성을 마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 때에 지성은 망각의 노예가 되거나 온갖 종류의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시해야 할 것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당신의 지성 안에서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일어나 다양한 형체를 취하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마십시오. 선한 것들의 형상이 나타나도 그것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마십시오. 가능한 한 숨을 억제하고 지성을 마음 안에 가두어두고 부지런히 계속해서 주 예수에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곧 그것들을 정복하고 없애며.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몰아낼 것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원수들을 때리십시오. 하늘이나 땅에서 이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3


은자(隱者) 이사야는 기도할 때에 호흡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저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의 태만 때문에 해이해진 영혼을 제어하며, 그 자체보다 저 악한 영들을 데리고 와서 영혼을 원래의 상태보다 한층 더 악하게 만드는 사탄의 힘에 의해 몰려다니는 억제 할 수 없는 지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cf. 마 12:45) 또 다른 저자는 수도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 호흡을 대신해야 한다고 말하며, 또 다른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날숨에 마치 브레이크처럼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신신학자 시메온은 "들숨을 억제하라"고 말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호흡과 예수님을 기억하는 일을 결합하십시오. 그리하면 침묵의 복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서"(cf. 갈 2:20) 거룩한 생명으로 그를 자극하고 감화하신다고 말합니다. 또 주님은 바람이 부는 것을 예로 드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씨앗과 같은 형태로 성령을 미리 맛보았고(cf 고후 1:22), "마음에 심어진 말씀"(약 1:21)을 받았습니다. 또 성령은 자신을 손상되지 않고 감소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시면서 풍성한 은혜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우리는 은혜의 보호자인 계명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다시 정념들의 수중에 들어갔고, 성령의 숨이 아니라 악령들의 영감으로 채워졌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피로하고 기운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며 성령에 의해 성화되었다면, 성령께서 거룩한 생명의 불을 붙이시고 감화하여 주셨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cf. 마 10:20)고 말씀하시면서 지적하신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거꾸로, 만일 우리가 마귀를 받아들이고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면, 반대되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4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파수꾼은 파수를 보다가 지루해지면 일어나서 기도한 후에 다시 앉아서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여기에서 클리마쿠스는 지성을 언급하면서 지성이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울 때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시편 찬송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르사누피우스는 시편을 찬송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성무일과와 시편 찬송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때에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어진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스케티스의 수도사들은 성무일과나 시편 찬송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육체노동과 묵상과 짧은 기도를 실천합니다. 당신은 서서 기도할 때에 삼성송(Trisagion)과 주님의 기도를 반복하며, 당신을 타락한 자아로부터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부주의해져서는 안 되며, 종일 기도에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바르사누피우스는 개인적인 묵상은 마음의 기도라는 것, 그리고 "짧은 기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서서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또 요한 클리마쿠스는 침묵 상태를 획득하려면 먼저 완전한 이탈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단호한 기도-이것은 서서 시편 찬송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가 필요하며, 세번째로는 단절되지 않는 마음의 노력, 즉 침묵하며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시편 찬송하는 방법


 


5


어떤 사람들은 시편 찬송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어떤 사람들은 적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시편 찬송을 전혀 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육체노동이나 부복 등과 같은 힘든 활동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은혜를 발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은혜를 발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인지적 통찰과 뜨거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단기간에 은혜의 상태를 획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지와 자만심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비방하며, 자신의 경험과 다른 것은 은혜의 작용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삽시간에 부자로 만드는 것은 주님에게 있어 아주 쉬운 일이며" (집회서 11:21), 잠언의 말처럼 은혜를 언급하면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 4:7)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시대에 은혜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렇지 않으면"이란 "태만하여 진보를 이루지 못하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불신앙과 오만 때문에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작용시키시는 특별한 기도의 특징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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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사람이 금식하고 절제하고 철야하며, 서서 부복하고, 마음으로 슬퍼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적극적인 금욕생활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단순히 시편 찬송을 옹호하면서 금욕적 노력이 없으면 기도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합니까? 위에서 언급한 행동들이 금윽적 노고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정신이 산만한 상태에서 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집을 짓고 한 사람은 그 집을 헐어 버린다면, 그들에게 헛수고 이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집회서 34:23). 마음에는 온갖 형태의 불의와 더러움이 가득하면서 몸으로만 의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몸을 사용하여 일하듯이 지성을 사용하여 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기도하지만 지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지성)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그는 이어서 "깨달은 마음(지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고 덧붙여 말합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고귀하고 완전한 기도를 실천한 위대한 사람은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 일에는 기도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충분한 것은 없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에 의하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탁월하고 포괄적이며, 덕의 근원이요 선의 촉매 입니다. 성 막시무스는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 두려운 것이 없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보다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행위의 탁월함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완고하여 눈이 멀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현세에서 적극적인 은혜의 상태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7


사람들이 시편 찬송을 많이 하지 않는 것도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중용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인들은 중용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힘을 금욕적 노력에 소진하여 기도할 때에 태만하고 부주의하게 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시편 찬송에 보내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계속되는 영적 기도와 강력한 집중 때문에 지성이 지칠 때에는 엄격한 침묵기도에서 벗어나 시편찬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인들이 가르친 탁월한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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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여정에서 크게 진보한 사람들은 시편 찬송을 전혀 하지 않아도 바르게 행동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시편을 낭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조명의 상태에 도달했다면, 침묵, 중단되지 않는 기도, 그리고 관상을 배양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지성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해내어 혼동에 빠지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수도원에서 순종의 규칙 아래 사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따를 때에 타락하며, 헤시카스트는 기도가 방해를 받을 때에 타락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헤시카스트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서 지성을 떼어낼 때에 간음을 범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들을 희롱하는 듯합니다.


이 훈련을 사람들에게 항상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하는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가르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순종은 병행하는 덕인 겸손 덕분에 모든 덕에 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식하든지 유식하든지 이런 종류의 순종 아래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에 대해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정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만심이 강하며 자만심의 자연적 결과는 망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쉽게 미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초래될 해를 의식하지 못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만 실천하라고 권고하며, 그 결과 그들의 지성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것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의무 아래 있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태만함과 오만함 때문에 그들의 지성은 눈물에 의해 정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더럽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생각들의 이미지들로 가득 찹니다. 한편 그들의 마음에 있는 더러운 영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로 인해 두려워하며, 자기들을 채찍질하는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 울부짖습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이 훈련에 대한 말을 듣거나 가르침을 받을 때에 그것을 실천하기를 원하지만 영적지도를 받고 있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경험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전의 태도를 고집하여 망상에 빠지고 치유되지 못하거나, 또는 태만해져서 평생 진보하지 못할 것입니다.


 


9


나의 경험을 토대로 덧붙여 말하겠습니다. 밤이나 낮에 천박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어 침묵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할 때에 당신의 지성이 하나님을 부르다가 지치거나, 쉬지 않고 집중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지성과 마음이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여 당신이 영적 구도자의 내면에서 열정과 인내를 만들어내는 따뜻함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일어서서 혼자서, 또는 함께 사는 제자와 함께 시편 찬송을 하거나, 성경구절을 묵상하거나 죽음을 생각하거나 육체노동을 하거나 집중하여 독서하십시오.


혼자 일어나서 시편 찬송을 할 때에는 삼성송을 낭송한 후에 지성을 마음에 집중시키고 지성이나 영혼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두세 편의 시편과 몇 개의 회개의 트로파리아(troparia)를 찬송하지 말고 낭송하십시오.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이러한 영적 발달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찬송하지 않습니다. 성 마가의 표현대로, "헌신의 정신으로 인내하는 마음의 고통"은 그들 안에 기쁨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며, 그들에게는 은혜와 환희의 근원인 성령의 따뜻함이 주어집니다. 각각의 시편을 낭송한 후에는 다시 마음이나 영혼 안에서 기도하면서 생각들이 방황하지 못하게 하고 알렐루야를 되풀이 하십시오. 이것이 바르사누피우스, 디아도쿠스 등 거룩한 교부들이 정한 순서입니다. 또 대 바실의 말처럼, 열정의 불을 불이며 지성이 항상 동일한 것을 낭송하는 데 싫증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날마다 시편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성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열정이 살아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신뢰하는 제자와 함께 서서 시편 찬송을 한다면, 제자에게 시편을 낭송하게 하고 당신은 은밀하게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기도하십시오. 감각적인 것이든지 개념적인 것이든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상들을 기도의 도움을 받아 무시하십시오. 침묵이란 성령에 의해 생겨나는 거룩한 생각까지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선한 것이라고 해서 그러한 생각들에게 주목한다면, 더 선한 것을 잃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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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지혜롭게 주목해야 합니다. 혹 영적인 일을 하는 동안 외부에 있는 빛이나 불, 또는 그리스도나 천사나 어떤 사람의 심상을 볼 때에, 해를 입지 않으려면 그것을 거부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심상들이 당신의 지성에 새겨지는 것을 막으려면, 그것들에게 지싯거리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좋지 않은 시기에 외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의 참된 출발점은 정념들을 태워 없애고 영혼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채워주며 흔들림이 없는 사랑과 확실함 안에 마음을 세워주는 마음의 열심입니다.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감각적인 것이든지 개념적인 것이든지 영혼 안에 들어올 때에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마음에 의심이 드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또, 만일 당신의 지성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든지 위로부터 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그 힘을 신뢰하지 말거나, 지성이 유혹받도록 버려두되 즉시 본연의 일을 계속하게 해야 합니다.


성 이삭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스스로 임합니다. 우리의 본성적 원수-우리의 갈망하는 힘 안에서 작용하는 마귀-는 우리의 상상 안에서 영의 군대에게 다양한 모습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원수는 영적 열정을 자신의 제어하기 어려운 열기로 대체하며, 이 속임수로 영혼을 압제합니다. 그는 영적 기쁨을 어리석은 기쁨과 후텁지근한 쾌락의 의식으로 대체하고, 자만과 허영심을 일으킵니다. 원수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일으키는 망상들을 영적 기쁨의 현현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러나 통찰력이 있고 원수 마귀의 계략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은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고 경험을 쌓음으로써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혀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식별하듯이(cf. 집회서 36:18, 19),영적 미각은 모든 것의 참 모습을 분명하고 확실히 드러냅니다.


 


11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영적 전쟁에 참전하고 있으므로, 금욕적 수행에 관한 글들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한 글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다른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침묵과 기도에 관한 교부들의 글을 읽으십시오. 예를 들면 요한 클리마쿠스, 성 이삭, 성 막시무스, 성 닐루스, 성 체시키우스, 시내 산의 필로테우스, 신 신학자 시메온과 그의 제자 스티테우스 등의 글을 읽으십시오. 다른 책들은 당신의 현재의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며 지성을 기도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당분간 내려놓으십시오. 청중을 의식하여 목소리를 높이거나, 지나치게 유창하거나 부자연스럽게 발음하거나, 무의식중에 정념에 휩싸이지 말고 홀로 읽으십시오. 어떤 일에서든지 중용이 가장 좋은 것이므로 너무 욕심을 내서 읽지 말고 대충 태만하게 읽지도 마십시오. 지성과 영혼과 이성을 동원하여 경건하고 온유하고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읽어 활력을 얻은 지성은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합니다. 만일 이와 반대되는 태도로 읽는다면, 지성이 어둡고 태만하고 산만하게 되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 머리가 아프고 태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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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의도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살피십시오. 당신이 침묵하거나 시편 찬송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다른 덕을 배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선 자체를 위하고 당신의 영혼을 위한 것인지 발견하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부지중에 함정에 빠져 겉모습만 금욕적일 뿐 실제의 생활 방식과 내면의 의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 한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마귀에게는 많은 덫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마귀는 은밀하게 우리의 뜻의 성향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수고를 부패하게 만들어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비록 마귀가 염치없이 무자비하게 당신을 공격하고,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지의 성향을 빗나가고 흔들리게 만든다 해도, 당신이 꾸준히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힌다면 마귀가 자주 당신을 붙잡아 타락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당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마귀에게 정복된다면, 당신의 마음과 뜻을 아시는 하나님은 곧 당신을 용서해주시고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만심이라는 정념은 수도사가 덕 안에서 자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금욕적으로 노력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이 초심자든지 영적 여정의 중도에 도달했든지 온전함의 단계에 도달했든지, 자만심은 항상 은근히 작용하여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을 수포로 만들기 때문에 당신은 냉담하며 공상 속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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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덕들을 배양하지 않는 수도사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금식, 절제, 철야, 인내, 용기, 침묵, 기도, 정적, 내적 슬픔과 겸손, 이 덕들은 서로서로를 발생하고 보호해줍니다. 지속적인 금식은 정욕을 시들게 하고 절제를 낳습니다. 절제는 철야할 수 있게 해주고, 철야는 인내를 낳고, 인내는 용기를, 용기는 정적을, 정적은 기도를, 기도는 침묵을, 침묵은 내적 슬픔을, 내적 슬픔은 겸손을 낳습니다. 이 순서를 거꾸로 따라간다면, 겸손이 내적 슬픔을 낳는 식으로 딸들이 어미들을 낳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덕의 영역에서는 이와 같은 상호 발생의 형태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덕들과 반대되는 것들은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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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금욕생활의 노고들을 상술하며 각각의 임무를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지 분명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채 들은 것에 의존하여 성공하려 하며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나 다른 작가들이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일은 마음의 고생과 육체적인 노고를 통해서만 제대로 행해질 수 있고, 그것들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가 계시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받았지만 계명을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정념들에 의해 짓눌렸던 은혜입니다. 이제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에 열매가 없어 "한 달란트를 빼앗아라",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cf. 마 25:28-29),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행동이든지 영적인 행동이든지 수고와 고난을 동반하지 않은 행동은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침노"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분발하고 수고해야 한다는 육체의 의식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채 영성생활에 열중해 왔거나 지금도 그런 식으로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난 열심과 목적의식을 가지고서 곤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육체적으로 힘들게 수고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부주의하고 게으르게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진정한 환란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수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고귀한 생활 방식이라도 무가치하고 거짓된 것에 불과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노력하지 않을 때에 냉담해져서 수상한 형태의 분심들에게 도취되어 어둠 속에 빠지며, 자신이 그것들 안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들, 특히 초심자들은 점점 나태해지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풀 수 없는 밧줄에 결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며 모든 행동이 무력해집니다. 온전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적절히 유익합니다. 성 에프렘은 이것을 종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헛된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고난을 꾸준히 참고 견디십시오" 금식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몸이 약해지고 심한 요통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마음의 통회로부터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면(cf. 사 21:3; 25:18), 우리는 마음에 구원의 성령을 잉태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게으르게 정적을 배양하고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무익하게 보낸 세월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에 자신의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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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경험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지만, 누구도 혼자 힘으로 덕의 기술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의 충고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행동하는 것은 거드름을 피우는 주제넘음이거나, 그러한 주제넘음을 발생합니다. 성자께서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만 행하시며(cf. 요 5:19-20) 성령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데(cf. 요 16:3), 과연 누가 자신이 덕의 고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비밀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미혹되고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을 배양하는 데 포함되어 있는 어려움들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처럼 엄격한 금식, 고통스러운 절제, 꾸준한 철야, 무릎꿇음.서서 움직이지 않음, 꾸준한 기도, 가식이 없는 겸손, 끊임없는 통회와 가책의 슬픔,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은 침묵(cf. 골 4:6), 모든 일에 있어서 참고 견딤 등에 의해서 덕을 배양해야 합니다. 적절한 때가 되기전에, 또는 늙거나 병들어서 어쩔 수 없는 때가 아닌 한 항상 휴식하거나 앉아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cf. 시 128: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 11:12)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위에서 언급한 덕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수확을 거두어들일 것입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