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게 침묵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글


 


 


St. Gregory Palamas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글.


St. Nikodimos c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c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4 (서울: 은성, 2008), pp. 477-491.


 


 


그레고리 팔라마스


St. Gregory ralamas


 


 


 


 


서론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1296-1,359)-테살로니키의 그레고리-는 정교회의 교회력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여, 그가 사망한 날(11월 14일)뿐 아니라, 사순절 중 둘째 주일날에서 기념된다. 성상 파괴론 논쟁이 종식된 843년에 거룩한 성화들이 결정적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사순절중 첫째 일요일은 정교주일(Sun- day cf Orthodoxy, 또는 Triumph cf Orthodoxy)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의 축일이 그 다음 주일로 지정된 것은 곧 그가 다볼 산의 빛의 신적이고 자존하는 특성을 성공적으로 변호한 것 및 그 시대의 이단자들-발라암(Barlaam), 아킨디노스(Akindynos), 그레고라스(Gregowas) 등-에 대한 승리를 선행하는 축전의 연속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황실과 가까운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친구였고, 장래의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개인교사였다. 젊은 그레고리는 한동안 필라델피아의 테올립토스에게서 영적 지도를 받았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후에 장래가 촉망되는 세상에서의 경력을 포기했고, 20세 때인 1316년경에 두 형제들과 함께 아토스 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같은 시기에 그의 어머니는 두 딸을 비롯하여 많은 종들과 함께 테살로니키의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튀르크 족의 공격의 위험 때문에 베로이아의 동굴에서 지낸 6년을 제외하고는 그레고리는 성산의 수도원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그는 시내 산의 그레고리처럼 비교적 단기간 동안 공주수도원에서 생활했고, 나머지 기간은 여러 작은 암자에서 헤시카스트로 살았다. 팔라마스는 매주 닷새 동안은 완전히 홀로 생활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형제들과 함께 성찬 예배를 비롯한 예배에 참석했다. 그것은 장차 믿음의 수호자가 되기 위한 준비였다.


1335-6년경에 그레고리의 인생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그는 흔히 헤시카스트 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에 개입했다. 원래 그의 주된 적은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유식한 그리스인인 칼라브리아의 발라암이었다. 발라암은 헤시카스트들이 기도할 때에 보는 빛은 신격의 자존하는 빛이 아니라 피조된 유형적인 광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또 정신 신체적 기법을 사용하는 일부 수도사들을 배꼽 무당들(navel-psychics), 즉 영혼을 배꼽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그레고리는 개인적으로는 고요한 암자에 머무는 편을 선호했지만 성산의 영적 전통을 옹호하고 수도사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토스를 떠나서 제국의 수도에 정착했다. 1341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레고리의 견해를 옹호했고, 발라암은 서부로 물러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논쟁의 끝이 아니었다. 문제의 신학적 논점이 정치와 얽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은 다시 6년 동안(1341-7) 계속되었다. 이 두 번째 논쟁 기간 동안 그레고리의 주된 적들은 과거 그의 친구였던 그레고리 아킨디노스와 인문주의 학자요 정치가인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Nikiphoros Gre- goras)였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공의회(1347, 1351년)에서는 다시 그레고리의 교리적 입장을 지지했고, 그 이후 그것은 정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이 되었다.


그레고리의 인생의 마지막 시기는 1347년에 비잔틴 제국의 제2도시인 테살로니키의 총대주교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1350년에야 비로소 주교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주교가 된 그는 1340년대의 사회적 /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분열된 양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설교에서 사회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설교는 성례전 적이었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팔라마스의 저술들은 세례와 성찬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테칼로니키의 신자들에게 보낸 목회적 설교에서는 균형을 회복했다. 그는 1354년에 콘스탄티노플로 향해하다가 투르크족에게 잡혀 1년 동안 소아시아에서 갇혀 지내면서 그 지방의 회교도들과 교리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가 1359년에 사망하면서 테살로니키,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성산에서 그에 대한 대중적인 존숭이 시작되었고, 불과 9년 후인 1368년에 그는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칭송되었다.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저술들은 매우 방대하다. 파나키토스 K. 크리스토우 교수가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섯 권으로 된 교정판을 출판 중에 있는데, 지금까지 다섯 권이 출판되었다. 팔라마스의 저술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포함되어 있다.


(1) 「존경하는 크세니아 수녀에게」(To The Most Reverend Num Xenia). 이것은 1342-6년 경, 팔라마스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에 저술된 것으로서, 팔라마스는 여러 번 자신의 어려움을 빗대어 인용한다(§§3,5,6,57). 그러나 이 글은 그가 신학적 비판가들에게 쓴 답변이 아니라, 크세니아의 요청을 받아서 저술한 금욕생활에 관한 정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팔라마스의 금욕에 관한 저술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 죽음과 내세, 정념들과 덕들, 특히 순결과 내적 슬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개관이다. 그는 영적 여정의 보다 높은 단계들에 대해서는 그리 언급하지 않지만, 신적인 빛을 보는 것에 대해서(§59), 그리고 성도들의 내면에 거하는 은혜의 자존적 특성에 대해서(§70) 간단히 언급한다. 크세니아 수녀에 대해서는 1,341년에 사망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들을 맡고 있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신약 십계명」(A New Testament Decalogue). 이것은 그레고리 팔라마스가 말년에 주교로 재위하는 동안, 1355년 가을에 쓴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한 것으로서, 모세율법의 십계명이 성육신으로 인해 교회 생활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지적한다. 이것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그레고리의 목회적 관심사들을 예시해준다. 특히 그레고리는 성상에 관한 정교회의 가르침(§2), 영적 아버지에 관한 가르침(§5), 그리고 순결과 결혼에 관한 가르침(§6)을 언급하지만, 내적 기도에 관한 헤시카스트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의하지 않는다.


(3) 「침묵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글」(In Defense cf Those who Devoutly Practise a Life cf Stillness). 이것은 팔라마스가 1337-9년에 주로 칼라브리아의 발라암의 공격에 맞서서 헤시카스트의 기도의 전통을 옹호하기 위해 저술한 비교적 방대한 저술의 한부분이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부분에서, 팔라마스의 주된 관심사는 정신 신체적 기법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데 있다. 헤시카스트들이 취하는 웅크린 자세는 내면에 일종의 순환 운동을 확립하여 내면에 집중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5,8). 천천히 호흡하는 것은 변덕스럽고 쉽게 산만해지는 지성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이와 같은 호흡 조절은 주로 "초심자들, 영적 여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에게 적합하며 보다 높은 단계로 진보한 후에는 그것을 버릴 수도 있다(§7). 그러나 그레고리 팔라마스는 육체적인 방법의 중요성은 제한된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은 상징적으로 인간의 영적 중심을 상징한다고 간주하며,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반영한다고 인정한다. 몸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우리는 그것이 지닌 성령을 운반하는 잠재성들을 충분히 이용해야한다. 사도 바울은 몸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몸"을 정죄한다(§1).


(4) 「기도와 정결한 마음에 관한 세 편의 글」(Three Texts cf Pray and Purity cf Heart). 그레고리는 이 글에서도 마음이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5). 이 짧은 글에서는 헤시카스트 논쟁의 관심사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그 논쟁이 일어나기 전인 1330년대 초에 저술된 듯하다.


(5) 「성산의 선포」(The Declaration cf the Holy Mountain). 이것은 그레고리 팔라마스가 1340년에 초고를 저술한 것으로서 팔라마스의 개인적인 견해뿐 아니라 성산의 공인된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다. 팔라마스는 내세의 빛을 미리 맛보는 것이요, 예시인 신적인 빛의 종말론적 특성을 강조한다. 자존하는 빛을 목격하는 수도사들은 교회 안에서 예언자 역할을 행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고했듯이, 새 언약의 선지자들인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미리 지적한다. 여기에서도 팔라마스는 인간에 대한 전체론적인 견해를 표현한다: 몸은 영혼과 함께 영화롭게 된다(§4). 우리는 결코 상징적 이거나 형이상학적으로만 신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화는 참되고 특수한 실체, 현세에서도 경험되는 순전한 은혜의 선물이다(§2).


 


   


경건하게 침묵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글


 


 


침묵생활에 대한 질문


 


아버지여, 내가 질문한 주제와 관련하여 성인들의 말을 인용하신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다는 말을 들으면서 진리의 분명함에 놀랐지만,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당신의 말을 반박할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은 결과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 성인들에게서도 당신이 하신 것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성인들이 납득시키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신용할 수 있겠으며, 또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성인들의 하나님을 거부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계승한 성인들에게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들에 관하여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16). 다시 말하면,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어찌 진리의 원수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부디 세속적인 학문을 추구하면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들을 열거하는 내 말을 귀담아 듣고 이 문제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시며, 또 그것들에 대해 성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지성을 몸 안에 가두어두려고 노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조롱하며, 새로 영적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말을 듣고 호흡에 의해서 지성을 내면으로 끌어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성은 영혼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영혼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성을 어떻게 다시 내면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까? 또 그들은 우리가 콧구멍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중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를 향한 그들의 다른 비난들 역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께 부탁합니다. 왜 우리가 지성을 내면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며 지성을 몸으로 둘러싸는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십시오.


 


 


답변 : 지성을 몸 안에 보존하기 위해서


침묵과 집중 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1


형제여,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고후 6:16), "우리는 그의 집이라" (히 3:6). 몸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지성이 몸 안에 거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먼저 지성을 몸 안에 세우신 것은 어쩐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잘못 행하신 것입니까? 이단자들, 몸은 마귀가 만든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성이 몸 안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생각들 안에 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몸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은 다윗처럼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8:12) ;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라고 외치며, "내 마음이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cf. 사 16:11);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사 26:17)라고 외쳐야 합니다. 성령께서 용기를 주시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거룩한 말과 시민권을 세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넘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말하면서 몸을 "사망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정신 상태는 몸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몸을 영적인 거룩한 정신과 비교한 것은 옳은 일입니다. 또 그는 단순히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망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직전에 육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타락 때문에 육신 안에 침투해 온 악한 충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 말의 의미를 밝힙니다. 그는 "나는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4)라고 말하지만. 팔린 사람은 본성 상 타고난 노예가 아닙니다. 또 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롬 7:18)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육신을 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지체 속에서 지성의 법과 싸우는 법이 악한 것입니다.


 


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죄의 법"과 싸워 우리 몸에서 몰아내고 그 대신에 지성의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성의 감독을 받음으로써 영혼의 모든 기능과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알맞은 것을 처방합니다. 감각을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들과 행동의 한계 등을 처방해야 하는데, 이 영적인 법의 실천은 절제라고 불립니다. 영혼에게서 정념의 영향을 쉽게 받는 부분에게는 모든 성향들 중에서 가장 선한 것, 즉 사랑을 나누어줍니다. 또 우리는 정신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쫓아버림으로써 지성의 수준을 높이는데, 이것을 경계(watchfulness)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절제를 통해서 몸을 정화할 때, 그리고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도발적인 능력과 갈망을 덕을 향한 자극으로 만들 때, 또 기도에 의해 깨끗해진 지성을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약속된 은혜를 자신의 내면에서 보고 소유할 것입니다(cf. 마 5:8). 그 때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어두운 데에 빛이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합니다(고후 4: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빛을 이 질그릇, 즉 우리의 몸 안에 가지고 다니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몸 안에 보유한다면, 어찌 지성의 고결함에 합당치 않은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 인간의 지성을 부여받은 사람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3


우리의 영혼은 많은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의 통일체이므로, 본성적으로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 몸을 하나의 기관으로 활용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영혼의 능력은 어떤 기관을 사용하여 활동합니까? 지금까지 누구도 정신이 손톱이나 눈썹이나 콧구멍이나 입술 안에 거한다고 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어떤 내면의 기관을 사용하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정신이 우리의 내면에 거주한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의 소재지를 두뇌로 보며, 어떤 사람은 정신이 사용하는 도구는 마음의 중심 부분, 본성적인 삶으로부터 정화된 부분이라고 간주합니다. 우리는 지성이 마치 그릇에 담기듯이 내면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정신은 우리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우리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정신은 자체의 기관인 마음 안에 소재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말씀하신 후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이니라"(마 15:19)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대 마카리우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인간이라는 유기체 전체를 다스립니다. 마음이라는 풀밭을 소유한 은혜는 인간의 생각과 지체들 모두를 다스립니다. 왜냐하면 지성과 영혼의 모든 생각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지성의 성소이며 몸의 주요한 지성적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해서 외부에 흩어져 있는 지성을 집중시키고 내면-생각들의 성소인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엄격하게 깨어 경계함으로써 자신의 지성을 성찰하고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마카리우스는 위에 인용한 말 다음에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은혜가 성령의 법을 새겼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