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시카스트들에게준 가르침


 


 


Callistus & Ignatius (칼리스투스와 이그나티우스)의 글.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


St Makarios of Corinth, The Philokalia.


엄성옥, 필로칼리아 5 (서울: 은성, 2006), pp. 221-362.


 


 


칼리스투스와 크산토포울루스의 이그나티우스 생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크산토폴루스의 칼리스투스(Callistus of Xantho- poulos)는 안드로니쿠스의 통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의 제자로서 그의 전기를 상세히 저술했으며, 성 필로테우스의 수도원 맞은 편, 마굴 스케테에 있는 아토스 성산에서 영적 싸움을 하며 살았다. 그는 동료 은둔자인 마크(Mark)와 28년 동안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 또 그는 크산토포울로스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Xanthopoulos)와 마치 둘이 하나의 영혼을 가진 것처럼 친밀한 우정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후에 총대주교가 되면서, 그는 세르비아의 교회를 방문했다. 그곳에 가는 도중에 아토스 성산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막시무스 카프소칼리비토스는 그가 일찔 사망할 것을 예고하면서 "이 스타레츠는 다시는 자기의 양들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뒤에서 '죄 없이 길을 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장례식 노래가 들려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도착해서 썩어질 생명을 버리고 썩지 않을 생명을 소유했습니다.


살로니카의 시므온(Simeon of Salonika)은 예수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두 사람의 위대한 영적 사역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로마의 총대주교이신 칼리스투스와 그의 동역자이신 이그나티우스는 마음에 하나님을 품고 성령에 의해 움직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모든 지혜로 저술된 책 안에 매우 탁월한 글들을 남겼으며, 예수기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주고 있습니다. 칼리스투스는 (수도원에서) 순종하면서 수도사의 순결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한 것처럼(요 26:11), 두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처럼 거하면서 거룩한 영적 투쟁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 원했던 평강을 완성한 후에 세상을 떠나 순결하게 예수님을 보면서 보다 고귀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했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사랑스러운 빛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관상과 행동에 의해서 정화되고, 하나님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얼굴도 스데반의 얼굴처럼 하나님의 빛을 반영했습니다."


 


 


 


헤시카시트들에게 준 가르침


 


 


1. 서로에게 선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이므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요 6:45), 불길보다 더 밝은 문자로 우리 마음에 신약성서를 새겨두어야 하며, 참되고 은혜로우신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의 가르침도 필요하지 않은 천사들처럼 되어야 합니다(렘 31:34). 한편으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한 것에서 벗어나 악을 향해왔고, 다른 면에서는 우리를 향한 벨리알의 유혹과 증오는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명들에게서 등을 돌리며 영혼을 난파시키는 급류 속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우리를 부추겨 우리 자신을 거슬려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하고 찾는 자가 없습니다(시 14:2). 우리는 모두 참 길에서 벗어났고 모두 더럽고 음란하며 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선을 향하도록 지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2. 이 지침들이 어느 형제의 요청을 받아서 교부들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기록되 었음을 보여주며, 기록자들이 기록하는 일과 독자들이 기록된 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을 주는 거룩한 성경을 조사하며 그 안에 있는 비밀들을 오류가 없이 가르침을 받으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종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말이나 규칙을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사랑하는 영적 자녀인 당신의 건전한 소원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의 행복을 위하기 때문에 게으름을 버리고 선을 향한 당신의 열심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본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의 재능을 땅에 파묻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하나님의 정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영적 교사와 아버지들이 또 다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명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들에 순종합니다.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모든 축복을 후히 주시는 분, 분별이 없는 짐승들에게도 언어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말을 주시고 우리의 무딘 입술을 열어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동료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것을 바르게 들을 지혜로운 귀를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살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영혼에 유익하고 선한 것을 하나도 할 수 없으며(요 15:5),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됩니다"(시 127:1).


 


3. 이 명령들의 강령 모든 일애는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힘이 닿는 한 당신이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편 당신의 목표는 앞으로 우리가 말할 것에 당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인생이라는 집의 기초가 무엇인지, 이 집을 짓는 방법, 그리고 그 집에 지붕을 덮는 방법 등을 알려면 그리스도의 경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에 있어서 성령이 건축자가 되셔야 합니다.


 


4. 명령들의 근본적 원리


우리의 명령들의 근본 원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들 안에 있는 법과 일치하게 살기 위해서 모든 방법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세례 안에서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자유로이 주어진 완전하게 재형성된 형상을 향해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만일 이 은사를 분명히 정의하자면, 옛 아담과 그의 역사와 정욕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영적인 인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5. 거룩한 세례의 은해의 영광 : 그것을 흐리게 하는 것과 회복시키는 것


이 은혜가 무엇이며, 어떻게 획득하며, 무엇이 그것을 흐리게 하고, 무엇이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지는 성 존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이 훌륭하게 설명해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18). 사도들의 시대에 신자들은 기적적인 은사가 발생하는 때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에 의해 깨끗해진 영혼은 태양보다 밝아집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어느 정도 빛나게 됩니다. 깨끗이 연마된 은이 태양빛을 받으면 그 자체의 본질에서 나오는 빛뿐만 아니라 태양빛에서 나오는 빛을 발하듯이, 성령에 의해 깨끗해져서 은보다 더 찬란해진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선을 받아 반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즉 성령의 영광에서 우리 자신의 영광에 이르는데, 그것은 우리를 채워주며,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것' 같이 되어야합니다."


그는 조금 뒤에 계속해서 말합니다: "원하신다면, 사도들에게서 이것을 좀 더 분명하고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기적적인 효과를 가진 옷을 입었던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림자에도 기적의 능력이 있었던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내면에 하늘나라 왕의 형상이 없었고 그들의 광채가 우리가 획득하는 것을 능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옷과 그림자는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도들도 왕의 옷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내면의 빛이 어떻게 그들의 몸에 스며드는지 알고자 합니까?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15). 그러나 이것은 그의 내면을 비춘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을 그들은 영혼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유형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빛을 받아 반사할 수 있는 물체가 발광체의 빛을 받으면, 받은 빛을 가까이에 있는 다른 물체에게 반사합니다. 신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이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이탈하여 하늘의 것만 생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통렬하게 신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처럼 고귀한 지위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그것을 상실하고 감각적인 것을 향해 기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말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한 영광이 하루나 이틀 정도 우리 안에 머물지만, 그 후에 우리는 그것을 소멸시키면 세상적인 일들의 폭풍 및 그 영광의 광채를 거부하는 두꺼운 구름이 도입됩니다." (고린도후서에 대한 일곱 번째 설교).


그는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몸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이것을 보여주는 어떤 표식들과 희미한 흔적을 주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의 얼굴이 영광으로 빛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은 한층 더 큰 빛을 발하셨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성례의 능력을 생생하게 깨달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거룩한 세례반, 그 열매, 그 충만함, 그리고 승리의 훈장 등을 떠난 후에 완전한 영적 중생의 수고를 이해했습니까? 이 초자연적인 은혜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능력, 다시 말해서 그것을 나타내거나 흐리게 만들 능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세상적인염려 및 그로 인한 정념들의 어두움입니다. 그것은 마치 회오리바람이나 사나운 격류처럼 우리를 공격하여 우리의 영혼을 쉬지도 못하게 하고, 피조된 목적인 선하고 복된 것들을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주지 않습니다. 영혼은 감각적인 정욕의 파도와 연기에 의해 시달리며, 어두움과 방탕함에 빠집니다. 반대로, 육체 안에서 행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들로부터 반영된 것에 의해서 은혜가 나타납니다. 성경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갈 5:16). 은혜는 그러한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마치 사다리에 의해서 하듯이 완전의 정상, 즉 사랑이신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게 합니다


 


6. 우리는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값없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이 정들로 덮여 있을 때에,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세례반 안에서 우리는 값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에, 세속적인 것들의 남용이나 세상적인 활동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말미암아 그것을 정념들의 안개로 덮었다 해도, 회개와 계명들의 성취에 의해서 그것을 되찾고, 그것의 초자연적인 밝음을 회복하여 그것의 나타남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믿음에 충실한 분량에 비례하여 은혜가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완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서 이자를 받지 않으시며, 단지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데 따라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이자를 주셔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엡 4:13)." 그러므로 중생한 후에 우리가 가져오는 것들은 분명히 과거에 그분이 우리 안에 감추어 두었던 것들입니다.


 


7.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계명을 따라야 하지만, 그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에 대부분의 활동을 할애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적인 활동의 근원과 원리는 계명에 따라서 사는 것이며, 여기에서 기대되는 결과는 세례를 통해서 치음으로 주어진 성령의 완전한 은사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념들 밑에 묻혀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들을 모두 열심히 이행해야 하며, 이 정화에 의해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성령의 은혜를 드러내어 나타내고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8),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28)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가슴에 기댔던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요일 3:24);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또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아버치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24). 무엇보다도, 다른 계명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계명들을 지키며, 대부분의 활동을 그것에 할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합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넘어지지 않고서 처음에 시작한 바른 행동의 목표와 우리가 노력하는 것의 목표, 즉 우리 안에 성령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동의 출발점은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사랑과 평화를 가지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행동의 출발점은 생명을 구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며, 이 부름에 수반되는 사랑과 평화를 가지고서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화에 대해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고 말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요일 4:16). 사랑과 평화는 기도를 순조롭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 기도에서 사랑과 평안이 다시 태어나고 발산되어 증가하고 완전해집니다.


 


 


9. 이 셋은 각기, 그리고 모두 합하여 우리에게 풍성한 축복을 줍니다.


이 세 가지는 각기, 그리고 합하여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풍성하게 주며, 우리 안에 있는 축복을 증가시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생명과 자비를 획득하기를 바라는데, 우리가 마음으로 순결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것들은 마치 영원히 흐르는 거룩한 근원으로부터 나오듯이 그분에게서 솟아납니다.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무한한 평화, 그리고 하나님 및 각 사람과의 화해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작과 끝인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폐지되며, 사랑을 통해서 은혜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우리 안에서 작용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아니 하나"(고전 13:7,8).


 


10.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을 당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궁극적인 계명이요 거룩한 유산으로 그것들을 주셨습니다. 부활 후에도 그렇 게 하셨습니다.


지극히 자비하시고 사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발적인 수난을 받으려 하실 때,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리고 (본성적으로 주님의 아버지시요,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즈음에 자녀를 사랑하시는 참된 아버지로서 마지막 명령과 위로를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유산이라기보다 귀중하고 확실한 보증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을 당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 24). 부활하신 후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사도 요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 20:30,31).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 또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8-10);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8:18).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부활하신 후에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을 주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 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난 사도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 21:15, 16), 양을 돌보는 일을 맡기는 것이 주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에 대한 상이라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나타내는 세 가지 덕은 또 다른 세 가지 놀라운 열매-영혼의 정화, 조명, 그리고 영적 성숙-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나 주제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11. 이 세 가지 덕 안에 모든 덕이 포함됩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자세히 조사해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덕들의 외투는 이 끊을 수 없는 세 겹의 줄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의 삶은 금으로 만든 귀한 사슬과 같습니다. 그 사슬을 이루는 하나의 덕은 다른 덕과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사슬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므로, 그것들에 의해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며, 연결될 고리들로 그 사람을 부요하게 해줍니다. 사람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고 소망과 겸손에 의해서 부요해집니다.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서 지극히 사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또한 그는 사랑과 평안에 의해서 부요해집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심으신 세 줄기를 가진 생명을 주는 나무입니다. 알맞은 시기에 그것을 만지고 그 열매를 먹는 사람은 아담처럼 사망을 거두지 않고, 영생을 거둡니다.


 


12. 성령 강림과 성령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의 은사와 강림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이름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긍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요 15: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


 


13. 거룩한 교부들 및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 며 자비를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혜롭게 침묵을 실천하며 다른 일이나 염려보다 주님께 기도하는 편을 택하며 불굴의 희망을 가지고 자비를 구하면서 거룩한 침묵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성령을 소유하고 사는 위대한 교사들과 훈계자들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항상 주님의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이름을 마음과 정신과 입에 담고 다니며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 안에서 살고, 호흡하고, 자고 일어나고, 걷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을 때에 온갖 해로운 것들이 우리에게 와서 영혼에게 유익한 것이 들어올 여유가 없게 만들듯이, 그분이 계실 때에는 모든 악이 쓸려나가며 선한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므로 자격이 없는 우리도 믿음으로 이 지극히 두렵고,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이러한 글을 쓰는 것입니다.


 


14. 주님 안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침묵의 길을 걸어가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구원)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말과 진지한 충고를 들으십시오. 무엇보다도 거룩한 말씀에 따라서 세상에 속한 것을 완전히 버리고, 완전하고 진지한 순종을 선택하십시오. 이 목적을 위해서, 방심과 기만에서 해방된 교사와 인도자를 발견하기 위해서힘써 노력하십시오(그가 방심과 기만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은 그의 말을 확인해주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는 내면에 성령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자기의 말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며, 정신적으로 높은 이상을 품고, 겸손하며, 매사에 선한 성향을 지녀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거룩한 말씀에 따른 그리스도의 교사가 지녀야 할 성품을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발견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매달리듯이 몸과 영으로 그분에게 매달리며, 그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매사에 그의 견해에 동의하며, 그분을 단순히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듯이 하십시오. 당신 자신의 생각과 소원, 그리고 모든 의심과 불신을 버리고, 한 걸음씩 교사를 따라가십시오. 의심 없이 완전히 순종하면서 그분이 당신의 양심인 듯이 그분을 따라가십시오. 만일 모든 선의 원수인 마귀가 이것과 반대되는 말을 속삭인다면, 정욕이나 불을 피하듯이 도망치며 당신의 머리에 그러한 생각을 넣어준 유혹자를 반대하여 스스로에게 지혜롭게 권면하십시오: "안내자가 안내받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지 안내받는 사람이 안내자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승의 죄책을 짊어진 것이 아니라 스승이 나를 대신하여 죄책을 짊어지셨다" 사다리의 요한의 말처럼 나를 판단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그분이다."


자신의 죄가 기록된 보고서를 찢어버리고 구원받은 자들의 책에 기록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은 순종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같은 형상을 취하시고, 지혜롭게도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자비를 획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 하나님이신 주 예수께서도 이 순종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인간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8,9). 그렇다면, 우리의 지도자요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찌 감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부들의 축복을 얻기를 바라겠습니까? 만일 학생이 자기 선생님처럼 되려 한다면, 자기 스승의 삶과 행위를 하나의 본보기요 가장 그럴 듯한 원형으로 여기고, 확고하게 열심히 따라가며, 매사에 항상 스승을 모방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눅 2:51).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그러므로 지도자가 없이 제멋대로 자기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여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내자가 없이 여행하는 사람이 쉽게 길을 잃듯이, 비록 모든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자기의지에 따라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쉽게 멸망합니다." 따라서 순종과 충고가 없이 나아가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땀 흘리며 수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많은 것을 뿌리지만 거두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즐거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구성했기 때문에 밀이 아니라 가라지를 수확하기도 합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 주제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정신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사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려 하는 사람, 이제부터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고 싶어 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예로 팔려 하며, 참된 자유를 얻으려는 사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이 넓은 바다를 헤엄쳐 건너려는 사람은 자기의지라는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는 어려운 짧지만 어려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부인한 사람은 영적 투쟁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획득합니다. 왜냐하면 순종이란 선한 것이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이것을 이해했으며 앞으로 빼앗기지 않을 좋은 것, 즉 거룩한 침묵의 길을 배우려는 사람은 제정된 법을 엄격하게 따르며, 먼저 순종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침묵을 받아들으십시오. 행위가 관상을 향하는 단계인 것처럼 순종도 침묵을 향하는 단계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하십시오: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잠 22:28) :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10). 이와 같이, 기초를 놓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장차 당신의 영적 건물에 지붕을 얹게 될 것입니다. 만일 기술이 없이 시작한다면, 건축 전체가 무익한 것이 됩니다. 반대로 솜씨 좋게 시작하면, 모든 것이 규모가 있고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물론 때로 반대의 일도 발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15 참된 수도사로 하여금 실수함이 없이 순종할 수 있게 해주는 참된 순종의 표식들


이러한 생활방식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많으며, 사람들도 각기 달리 그것을 실천하므로, 일종의 표지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들을 지적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들을 규칙이나 다림줄로 삼아 지킨다면, 책망할 것이 없고 죄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수도사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덕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교사를 그리스도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순종하는 순수하고 진지한 믿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사도들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가르칩니다(롬 14:23). 둘째는 진실입니다. 즉 말과 행위와 생각의 고백에 있어서 진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시 119:160) ;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시 51:6). 그리스도는 "내가 곧 진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4:6). 셋째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도사가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크게 해로운 일이요 손해입니다. 수도사는 항상 자기 아버지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넷째, 수도사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거나 다투기를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언행의 불일치와 다투기를 좋아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복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전 11 :16).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일이 금지되었는데, 완전한 순종의 서원을 한 수도사들은 어때야겠습니까? 언행의 불일치와 다툼을 좋아하는 것은 불신앙과 거만함의 동반자인 자만심에서 옵니다. 반대로 언행이 일치하며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바르고 겸손한 성향에서 옵니다. 다섯째, 그는 모든 일을 성실하고 정확하게 스승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도 서원을 할 때에 우리의 행동과 노력의 시작과 끝으로서 마음의 비밀을 고백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거룩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사다리의 요한은 "종기를 드러내면 악화되지 되지 않고 치료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지혜롭게 이 다섯 가지 덕을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장차 의인들이 천국에서 누릴 기쁨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십시오. 이것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순종의 뿌리요 토대입니다. 이제 그것의 열매와 천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선한 판단의 은사를 낳고, 선한 판단은 분별을 낳고, 분별은 예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의 역사이며, 귀중한 초자연적인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실하고 사려 깊게 순종하는 분량에 비례하여 마음속에 겸손이 탄생할 것이며, 겸손의 분량에 비례하여 선한 판단이 생겨날 것입니다. 일련의 덕 전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틀거리지 않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힘껏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실수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순종의 단계에서 비틀거린다면, 당신 앞에 놓인 과정,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며, 승리의 면류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순종을 안내자, 또는 선원이 항로를 계획하기 위해 사용하는 나침반으로 삼으십시오. 그리하면, 그것들에 시선을 고정한다면 위험한 일을 만나지 않고서 덕들의 큰 바다를 건너 무정념의 안전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폭풍이나 소동의 공격도 당신의 순종에 비례할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도 참으로 순종하는 수도사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순종의 고귀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시 사다리의 요한의 말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가장 밝은 빛, 거룩한 사다리의 브살렐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부들은 시편기도는 무기요, 기도는 성벽이요, 깨끗한 눈물은 목욕이요, 복된 순종은 신앙고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들이 없는 정욕적인 사람은 주님을 부지 못합니다." 이 탁월한 비유는 세 배나 복된 순종을 가장 효과적이고 영화롭게 해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만일 본래 현재와 같은 상태로 피조되지 않았던 우리의 타락과 죽을 운명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거듭남과 불멸의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 과거를 바라본다면, 순종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여 죽을 운명이 된 원인은 아담의 자신과 자기고집과 불순종이었으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거고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후자, 즉 우리가 거듭나 불멸하게 된 원인은 둘째 아담, 우리 주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의 정신을 가지셨음에도 그분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따라서 우리의 첫 조상 아담 및 그를 닮은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근원은 오만이며, 새로운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 및 그분의 형상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축복의 근원과 원천과 기초는 겸손입니다. 세상에서는 교회 안에서 이 명령과 법이 지켜지듯이, 하늘에서는 거룩한 천사들의 세계에서 이 명령과 법이 지켜집니다. 이로 보건대, 무례하게도 이 근본적인 법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거룩한 빛의 유산과 보편교회를 저버리며, 완전히 추방되어 바깥 어두움과 지옥불 속에 던져집니다. 타락한 천사의 편을 취하여 남을 속이는 악한 장사꾼들, 이따금 나타나는 악한 정신을 가진 말 많은 이단자들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함과 자기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제거됩니다.


어느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사물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에 의해서 치료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의 원인은 불순종과 교만이고, 모든 기쁨의 근원은 통회와 복종입니다. 죄 없이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방심과 기만으로부터 해방된 노련한 스승,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여 거룩한 것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고 모든 덕을 실천하며 살아온 스승에게 복종해야 하며, 그분의 명령과 충고를 하나님의 음성과 충고로 여겨야 합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잠 11 :14).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의 원수입니다. 만일 어느 거룩한 교부가 순종하지 않고서 신적 침묵과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함을 획득했다면, 그것은 특별한 신적 계시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극히 드문 현상입니다. 그리고 제비 한 마리가 봄을 오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희귀한 것은 교회의 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된 순종은 복된 침묵을 위한 예배 교육이라고 믿고,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발생한 희귀한 사례에 매달리지 말며, 거룩한 교부들에 의해서 확립된 일반적인 것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참된 안내자가 없이는 조사된 적이 없는 미지의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면, 만일 솜씨 좋은 항해사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바다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면, 만일 숙련된 교사가 없이는 어떤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누가 기술 중의 기술과 학문 중의 학문을 실질적으로 연구하며, 하나님께로 가는 신비한 길에 들어서며, 끝없는 정신적인 바다-수도생활-를 항해하면서 안내자와 항해사와 참되고 노력한 교사가 없이 목표에 도착하리라고 확신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출발부터 다른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교부들이 정한 법에 순종하는 사람은 한 걸음도 가기 전에 목표에 도착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육체와 싸우는 법, 그리고 귀신들과 정념들을 대적하여 무장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쁜 정념들이 덕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며 영원히 덕들의 문 앞에 서 있을 때에, 그러한 도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선과 악을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육체적인 감각을 억제하고 영혼의 능력들을 마치 하프의 선을 고르듯이 조화롭게 조율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러한 규정들이 없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들과 계시들과 암시들과 환상들, 그리고 귀신들의 올무와 방심과 기만과 망상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조명을 받은 참된 안내자에 의해서 이러한 신비의 초보를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의 활동인 성례전과 성체성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택함을 받은 그릇이요 그리스도의 대변인이요 이 세상의 빛이요 보편적인 태양이요 온 세상의 교사인 복된 바울은 동료 사도들과 함께 자신의 설교를 조사하기 위해서 서둘러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2). 지혜 자체이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 또 생명을 주는 성령에 대해서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 유익한 질서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게으름, 그리고 자만과 분별없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법이나 질서가 없이 생활하여 멸망하는 사람들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면 놀라움과 떨림과 공포로 가득합니다. 이 일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도중에 강도들이 무수히 많고 수많은 해적들이 숨어 있고, 파선하는 배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게 내버려 두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3):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02:12).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마땅한 방식으로 원하고 살게 하십시오.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당신 및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통해서 복된 순종의 영적 구조 전체를 이해한 후에 오류가 없이 완전한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찾으면, 길을 잃지 않고 목표에 이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8)고 말합니다. 그는(당신이 발견하게 될 교사) 하나님께 합당하고 만족한 것들을 올바른 순서대로 가르쳐줄 것입니다. 또 만일 당신이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지혜 없는 사람처럼 행하지 않고 먹을 것과 마실 것, 입는 것 등 매사에 중용과 단순함과 절제를 지키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필요한 것에 만족하며, 육체를 만족하게 하며 감각을 기쁘게 하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을 그가 본다면, 그는 더욱 신령하고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많은 사람들의 능력을 초월하며 모든 사람들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것들에게로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시작과 중앙과 마지막에 관해서 우리에게 배우며, 그것에 대한 성문화된 해설을 원합니다. 그 질문은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손을 뻗어 도우실 것이며, 우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며, 복된 순종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칭찬받는 완전한 영적 건물-거룩한 침묵-을 건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교부들의 말에 기초를 두고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16, 하나님 안에서 침묵 생활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은 바른 믿음과 선한 행위 들로 채워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1)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7:21). 그러므로 만일 거룩한 침묵을 향한 당신의 갈망이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행위로서 그것을 사랑한다면,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선한 행위로 가득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성실하게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도 이 거룩한 침묵이 천국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데, 그것은 다음 세상에서 한층 더 충만하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며(롬 12:18),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분심되지 말고, 헛된 근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말을 아끼고 잠잠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십시오. 깨어서 날마다 당신을 공격하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유혹들을 지켜보며, 인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임하는 모든 환란과 슬픔과 싸우십시오.


주님의 형제의 말에서 바른 믿음과 선한 행위와 관련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가 죽은 것이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약 2:18). 야고보 이전에, 모든 사람의 교사요 훈계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 또 신학자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덕을 요구하십니다. 즉 영혼에게는 참 믿음을, 몸에게는 순결을, 입에게는 진실을 요구하십니다."


 


(2) 두 종류의 믿음


하나님이 감화하신 말씀에 의하면,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소유하는 것으로서 처음 세례를 받을 때에 받아 소유하며, 세상에 나갈 때에 지녀야 하는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극소수의 사람만 소유하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되는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은혜의 빛으로 부유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며 기도할 때에 마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여 받습니다. 그러나 이 복된 사람들은 모든 지식과 생각과 망설임을 꾸준히 부인해왔고 모든 염려로부터 자신을 자유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거룩한 기쁨에 완전히 몰입하여 다윗의 말처럼 "지존자의 오른손"(시 77:10)에 의해서 한층 더 복되고 선한 상태로 변화되어가기 때문에, 순수한 행위들을 통해서 견고한 믿음을 획득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 믿음에 대해서 상세히 말하기보다 첫째 믿음에서 솟아나와 꽃을 피우고 거룩한 열매를 맺는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말하려 합니다. 이 믿음은 거룩한 침묵의 출발점이요 뿌리 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만일 헤시카스트에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침묵생활을 영위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다윗도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고 말합니다(시 116:10).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 제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더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또 다른 때에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2:21, 22). 성 이삭(St. Issac)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지식이 감각적인 것들보다 더 미묘한 것이며, 믿음은 지식보다 더 미묘한 것입니다.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받아들인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힘에 의해서 이 초자연적인 삶을 누립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예배하는 거룩한 삼위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의 본질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며,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성육하신 기적적인 섭리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의 빛에 의해서 영혼 안에 점화되는 믿음, 자부심과는 거리가 먼 확실한 소망 가운데 있는 마음을 정신의 증거에 의해서 강화해주는 믿음, 귀로 듣기보다는 영적인 눈으로 영혼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보는 믿음입니다. 그 비밀은 육의 자식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먹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계시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보혜사를 보내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요 14:17,26). 주님은 그에게 항상 그 안에 거하면서 영원히 그들 보호하며 모든 해로운 것을 몰아내는 이 거룩한 힘을 계시해주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정신은 믿음의 눈으로 이 힘을 감지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으로 영혼의 힘을 점화시켜주시는 보혜사이시며,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통해서 모든 위험을 잊고 높이 날아오릅니다. 영혼은 믿음의 날개를 달고서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 위로 날아오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놀라 기쁨의 상태에 머물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봅니다. 이와 같은 비밀들이 완성되고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되기 전에는, 믿음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비밀들을 공급해줍니다(즉 이러한 비밀들을 받고 보존하고 관상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이러한 비밀들이 이 세상과 천국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하십시오.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한다는 것과 관련하여 트럼펫 소리보다 더 큰 다윗의 말과 그리스도를 담고 다닌 바울의 말에서 강력한 권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시 120:6) :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 34:14).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4) 분심하지 마십시오.


성 이삭은 분심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감각에 의해서 정욕이 생겨난다면, 많은 헛된 분심거리들 가운데서 정신의 평화를 유지한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의 혀를 감각이 붙들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하지 마십시오."


 


(5) 근심과 걱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평판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에 대해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말아야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말에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 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 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25-8,41-4). 또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염려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영혼 안에서 빛을 발견하기를 기대하지 못하며, 또 당신의 감각들을 가라앉히고 그것들과 화평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을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들어간 작은 눈썹이 눈을 성가시게 하고, 작은 염려가 침묵을 파괴합니다. 침묵이란 구원과 관련이 없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평판이 좋은 일에 대한 염려까지도 모두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보살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으므로, 참된 침묵을 획득한 사람은 자기의 육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Ch 27,51,52).


 


(6) 말을 삼가십시오.


여섯째, 말을 삼가야 합니다.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말을 삼가십시오. 그것은 당신을 결실에게 더 가까이 인도해줄 것입니다. 혀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선, 말을 삼가십시오. 그러면 우리 안에 침묵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생겨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을 삼가는 데서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생활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빛을 가져다줄 것인지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삶(수도사의 삶, 헤시카스트의 삶)의 모든 행위를 저울의 한쪽에 올려놓는다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Ch.41). "침묵은 장래의 삶의 신비요, 말은 이 세상의 도구입니다"(Ch.42). "입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정념들에 물들지 않게 보존합니다. 마음을 정념들로부터 보존하는 사람은 매 시간 하나님을 봅니다"(Ch.8). 성 아르세니우스(St. Atsenius)는 다음과 같은 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도망치라. 말하지 말라. 침묵 속에 거하라. 침묵은 범죄하지 않는 상태의 근원이다."


 


(7) 침묵을 실천하십시오(독거를 사랑하십시오).


일곱 번째는 홀로 침묵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대 바실과 성 이삭이 믿을 만한 말을 합니다. 대 바실은 "침묵은 영혼의 정화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하고 성 이삭은 "침묵의 목적은 모든 것의 정지이다"라고 말합니다. 대 바실은 침묵의 출발점에 대해서, 성 이삭은 침묵의 목적에 대해서 간단히 묘사합니다. 구약성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그리고 사다리의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침묵의 첫 번째 일은 선한 것이든지 악한 것이든지 모든 것들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선한 것에 대한 염려에 대해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확실히 악한 것에 대한 염려에 빠집니다. 두 번째 일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유린되지 않은 마음의 행동입니다. 알파벳을 모르면 책을 읽을 수 없듯이, 침묵의 첫 번째 일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두 가지 일을 지혜롭게 실천할 수 없습니다"(Ch.27,46). 또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침묵을 실천하려면 항상 죽음을 반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이 침묵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참고 견뎌야 할 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Ctl 41).


 


(8)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덟 번째,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살전 5:18). 또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감사를 표현하면, 주는 사람은 전보다 더 큰 선물을 주게 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에 있어서 거짓되고 불공정합니"(Ch2)‥‥영원히 감사하는 입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감사로 가득한 마음은 예기치 않게 은혜를 받습니다."


 


(9)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해야 합니다.


아홉 번째, 만일 시편 6편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 안에 얼마나 큰 선이 모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흘히 여기소서"(시 6:2)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또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은 모든 은혜의 기초요 뿌리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은 즉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영혼의 헛된 교만을 억제함으로써 보호하심을 받습니다"(Ch.61):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완전한 겸손을 획득한 사람입니다."


 


(10) 용감하게 유혹을 인내하십시오.


우리가 계획했던 열 가지를 마무리하는 이 단락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여러 가지 유혹들을 용감하게 인내하며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하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서신 제1장의 의미는 "시험을 참고 견디지 않은 사람은 시련을 당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성 엘리아스 에크디코스(St. Elia Eddikos)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기독교인은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말고, 항상 시험 당할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험이 오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그로 인해 당황하지 않고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26:2), '당신의 징계가 결국 나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라는 선지자의 말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통의 짐을 져야 합니다. 선지자는 '당신의 징계가 나를 멸망시킬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결국 나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시험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어디에서 오는지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시험이 오면,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하려 하지 말고, 다만 증오심이 없이 감사하며 그것을 감당하려 하십시오"(St. Mark on exculpation by deeds, Ch. 195) : "사람은 시험을 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므로, 슬픈 일이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ibid., Ch.200). "고통은 우리의 의지가 향하는 경향, 즉 그것이 오른쪽으로 기우는지 왼쪽으로 기우는지를 드러내줍니다. 고통은 당하는 사람을 시험하여 그의 내면의 성향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불립니다"(ibid., Ch.204), 성 이삭도 같은 말을 합리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유익합니다. 만일 바울에게 시험이 유익한 것이었다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롬 3:19). 영적인 실행가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그들로 더욱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그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용감하게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짐을 지는 일을 실천하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 집의 보화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시험하시고 학대하신 후에 은혜의 선물을 드러내주십니다. 쓴 약에 의해서 건강으로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고통이 없이 교육과정을 통과할 수 없으며, 시험의 독을 마시면서 그것이 쓰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없으면 영혼의 강한 체질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한 불에 의해 단단해지지 않은 진흙이 어떻게 물의 작용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멍에에 복종하며 항상 겸손하게 소원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인내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될것입니다"(Ch 37).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 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곧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도 당황하지 말아라"(집회서 2:1,2).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한 것들을 기대하십시오.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안에 소망의 닻을 내리고(히 6:19),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시험들을 중지시키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 밖에도 성경이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롬 5:3-5)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2-4,12)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 40: 1-3). 복된 시므온(Semeon Metapha -rates)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끈에 의해서 하나님께 묶인 영혼은 고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슬픔 중에 기뻐하고, 비통함 속에서 꽃을 피웁니다. 영혼은 그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아무런 고통도 당하지 않을 때에는 한층 더 고난을 갈망하며, 고통을 피하듯이 위로로부터 도망칩니다."


 


17.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하여 : 초심자와 완전한 사람들의 경우


거룩한 교부들은 덕의 순서에 있어서 믿음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경외심을 둡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 종류의 경외심을 언급하려 합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초심자들의 경우와 완전한 사람들의 경우가 있습니다. 초심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10: 잠 1:7) ;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시 34:11)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경외심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복된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덕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식으로 간주되며, 정신이 세상의 헛된 것을 멀리할 때에 마음 속에 뿌려지고, 장차 만물이 거듭날 것을 생각함으로써 흩어진 생각들을 한데 모읍니다"(Ch. 1); "사람의 내면에서 참 생명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흩어진 생각들과 함께 영혼 안에 머물지 못합니다"(ibid.):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당신의 발전의 기초로 삼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며칠 후에 당신은 방황하지 않고 그 나라의 문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ibid.).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경외심 다음은 하나님에 대한 두 번째 경외심, 또는 완전한 경외심에 대한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조:1) :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 128:4)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시 19:9). 다마스커스의 피터(St. Peter of Damascus)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첫번째 경외심의 상징은 죄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서,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사람의 분노와 같습니다. 완전한 경외심의 상징은 덕을 사랑하고 가변성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우리는 항상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실족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Book 2, Ch.3). 그러므로 이 모든 말을 듣는 당신도 위에서 언급된 다른 모든 덕과 더불어 첫번째 경외심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선한행위를 보관하는 가장 튼튼한 보물창고입니다. 만일 이것을 지킨다면, 당신은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모두 실천하려 할 것입니다. 이 길을 좀 더 걸어 나가면, 덕에 대한 사랑 과 우리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서 순수하고 완전한 경외심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15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계명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 다.


생명을 주는 계명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기꺼이 영혼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그리고 신인(神人)이시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유지하면서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며(빌 3:13), "뒤를 돌아보지"(눅 9:62)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전진하십시오. 이제, 니케포루스(Nicephorus)가 사용한 자연적인 방법, 호흡을 통한 정신집중에 의해서 마음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보려 합니다. 그것은 생각의 집중에 도움을 줍니다. 니케포루스는 내면생활에 관해 많은 거룩한 교부들의 증거를 인용한 후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9.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 면서 호흡을 통한 정신집중에 의해 마음으로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방법. 이 방법은 생각을 집중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형제여,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호흡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우리 몸의 생명은 이것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체온도 이것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수실에 앉아서 들이쉬는 공기와 함께 정신을 집중시켜 기도(氣道)를 통해서 마음으로 들어가서 그것에 머물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곳에서 잠잠히 한가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쉬지 말고 드리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정신으로 하여금 꿈을 꾸지 못하게 함으로써 원수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고 거룩한 갈망과 사랑으로 인도해 줍니다. 형제여, 당신의 정신이 마음에서 너무 빨리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처음에는 내면에 은둔하여 갇혀있는 것이 매우 고독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에 익숙해지면, 정신은 표면적인 것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내면에서 그 나라를 보고 순수한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발견하고 경험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것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매력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내면에 거하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아내와 자식들을 보면 미칠 듯이 기뻐하는 것처럼, 분심되었던 정신이 다시 영혼과 결합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 이것은 니케포루스가 정신으로 하여금 이 자연적인 방법의 영향을 받아 일상적인 분심을 버리고 자체에 집중하며, 그러한 집중을 통해서 그 자체와 재결합하여 기도와 하나가 되고, 기도와 더불어 마음으로 내려가서 그곳에 영원히 머물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거룩한 지혜로 가득하고 이 거룩한 행위에 숙련된 또 다른 교부는 위에서 말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호흡과 연결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연적인 방법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


숨을 들이쉬는 동안에 정신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익숙해지면, 정신이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모든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하고 적나라하게 되어 모든 기억을 버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만 기억하게 됩니다. 반대로, 정신이 마음에서 나와 외적인 것을 향하게 되면, 즉시 여러 가지 기억에 의해 분심하게 됩니다.


 


21. 요한 크리소스롬도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위대한 크리스소톰(Chrysostom)은 "형제들이여, 이 기도의 규칙을 무시하거나 범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도사는 먹거나 마시거나 의식을 집전할 때나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 예수의 이름이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내면의 목장을 다스리는 뱀을 정복하고 영혼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는 항상 주 예수의 이름과 더불어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음은 주님을 흡수하고 주님은 마음을 흡수하여 둘이 하나가 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지키십시오. 주님의 이름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며 마음이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십시오. 당신에게서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2. 사다리의 요한과 성 헤시키우스의 가르침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호흡과 결합하십시오. 그리하면 침묵의 효력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Ch 27,61). 헤시키우스(Hesychius)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참으로 생각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제대로 침묵하고, 노력하지 않고서도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호흡에 예수 기도를 결합시키십시오. 며칠 후면, 그것이 실현될 것입니다"(Ch. 182).


 


23.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려는 사람, 특히 초심자는 보다 나은 기도훈련을 위해 서 고요한 수실에서 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 신과 생각이 하나로 결합됩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오래 전에 위대한 교부들이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호흡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마음으로 내려가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평정한 정신을 실천하며 그분의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이름 안에서 도움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일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서 정신적인 평정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특히 초심자는 이 일에 경험이 많은 거룩한 교사들과 교부들이 지시하고 충고하는 것처럼 항상, 그리고 특별히 정해진 기도 시간에 희미하게 불을 밝힌 고요한 수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흔히 눈으로 보는 것 생각들을 흩어지고 분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방에 문을 닫고 들어가 있으면 생각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조금씩 고요해지고 집중됩니다.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이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분심되지 않고 감각에 의해서 세상적인 것들 가운데 흩어지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24.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마음으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 주 예수 그리 스도께서 정신을 가라앉혀 주십니다.


이렇게 호흡에 의해서 마음으로 내려가는 것, 그리고 홀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 앉는 것만이 정신을 집중하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줍니다. 이 정신적인 행동의 성공이 달려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집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 그리고 거룩한 은혜의 도움입니다. 호흡에 의해서 마음으로 내려가거나 홀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 앉는 것만으로는 이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이 이 방법을 창안해 낸 유일한 이유는 생각들을 집중시키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생각을 모으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은 정신으로 하여금 산만하지 않고 순수하게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해줍니다. 성 닐루스(St. Nilus)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찾기 위해 주의를 집중하면 기도를 발견할 것입니다. 주의를 집중하면 자연히 기도하게 되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Ch.179). 그러나 육에 속하여 있지만 보다 선한 생활을 사랑하고 몸을 입고 있으나 몸으로부터 자유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25 헤시카스트가 저녁부터 아침에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


해가 진 후, 지극히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한 뒤에, 희미하게 불을 밝힌 고요한 수실에 들어가서 낮은 의자에 앉으십시오. 습관적으로 외부를 선회하고 방황하는 정신을 집중시켜 호흡에 의해서 마음속으로 이끌어 들이면서 호흡과 연결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호흡과 결합하면서 기도를 마음속으로 도입하십시오. 헤시키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호흡에 냉정한 정신, 예수님의 이름, 죽음과 수치에 대한 기억 등을 결합시키십시오. 이것들은 큰 유익을 줍니다"(189), 그 밖에도,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이요, 귀신들보다 더 비열하다고 간주하면서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에 대한 상과 심판에 대한 기억을 이 기도에 결합시키며, 당신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십시오. 만일 이러한 생각들 중 하나가 통회와 눈물을 야기한다면, 눈물이 저절로 그칠 때까지 그 생각에 머무십시오. 만일 눈물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은사를 얻기 위해서 겸손한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눈물에 의해서 정념들과 더러움으로부터 정화되며, 유익하여 선한 성향들을 획득합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나무를 태우듯이, 깨끗한 눈물을 눈에 보이는 더러움과 정신적인 더러움을 태워 없앱니다"(Ch.1,31). 또 다른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서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덕을 획득합니다. 통회하지 않는 사람은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허영심은 영혼이 통회하는 것을 막습니다. "만일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이렇게 앉아서 기도하면서 약 한 시간 동안 그러한 생각에 집중한 후에 일어서서 정신을 집중하고서 종도(終禱)를 하십시오. 그 다음에 다시 앉아서 약 30분 동안 아무런 걱정이나 생각이나 꿈을 꾸지 말고 정신을 집중하여 순수하게 같은 기도를 드리십시오.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과 침대에 십자성호를 긋고, 침대에 앉아서 장래의 축복과 고통, 이 세상 것들의 무상한 본질, 갑자기 임하는 죽음, 죽음 전후에 받는 끔찍한 반대심문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십시오. 당신의 죄를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성찰하고 나서 침대에 누워서 계속 기도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예수기도와 더불어 잠자리에 들고 그 기도와 함께 잠드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밤의 길이에 의해서 수면시간을 정하되 5-6시간 정도가 좋습니다.


 


25. 잠에서 깨어나서 아침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잠에서 깨어나면,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중보기도를 한 후에 약한 시간 동안 가장 중요한 일, 즉 마음 안에서 분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나면 정신은 저절로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우리는 최초의 것과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처음 생각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곧바로 바쳐야 합니다. 성 닐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처음 생각들을 익은 열매를 바치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Ch.126). 완전한 침묵에 기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제대로 기도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초심자들에게 자주 발생하며, 드물게 어느 정도 이 기도에 성공했지만 아직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람들만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빌 4:13). 그런 경우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되도록 온전하게 정신을 차린 후에 먼저 정신을 집중하여 내용을 생각하면서 찬송하십시오-그 다음에는 앉아서 분심되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약 1시간 동안 기도하십시오. 은혜를 주시는 분이 허락하신다면 더 오래할수록 좋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밤에는 시편찬송보다는 기도를 더 많이 하고, 낮에는 능력에 따라서 일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Ch.27,77). 이렇게 한 후에도 여전히 잠이 깨지 않고 나른하다면, 잠에서 깨기 위해서 힘껏 노력하면서 계속 기도하십시오(성 이삭은 "밖으로 나가서 잠시 산책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에, 앉아서 순수한 기도로 순수하신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기도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일어서서 육시과(六時課), 시편 51편,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미사전문을 노래하십시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약 30분 동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십시오. 그 다음에 다시 일어나서 일상적인 영광송과 1시과를 찬송하고, 폐회송을 부릅니다. 우리는 입술의 열매를 주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글을 읽을 때에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를 내어 읽으십시오. 무한히 자비하셔서 안전하게 밤의 심연을 건너 밝은 낮을 맞이하게 해주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혼과 생각을 다하여 감사하십시오. 또 정념과 귀신들이 사납게 날뛰는 험악한 태풍 속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1. 아침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완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연약하고 게으르고 분별이 없는 당신을 도와달라고 통회하면서 기도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이 닿는 한 분심되지 않은 순수한 정신으로 마음의 기도와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배정된 시편과 복음서는 일어서서 읽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문을 낭송할 때에도 일어서십시오. 그 외에 성경의 다른 부분은 앉아서 읽으십시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악의 스승인 게으름을 몰아내며 그것들의 원인인 정념들을 피하기 위해서 영혼의 힘을 다해서 정신을 집중하여 시간경을 노래하십시오.


 


28. 게으름을 피하며 교회의 전통들을 지켜야 할 필요성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태함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죽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또 나태함은 수도사를 원수들의 수중에 넘겨줍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우리가 시편이나 기도를 소홀히 한 것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소홀히 함으로써 귀신들에게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실 것입니다. 귀신들은 들어오는 문을 발견하고 들어와서는 우리 눈의 문을 닫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정죄와 가장 무서운 형벌을 가져다 줄 온갖 종류의 더러운 것으로 우리를 채웁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장 크게 돌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은 대적의 멍에 아래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수실에 들어가서 회의 법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위한 영의 계시에 기초를 두고서 정한 일을 지혜롭게 행해야 합리다. 그리고 비록 하찮게 보일지라도 이 일은 당신을 잡으려는 원수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주는 성벽이라고 여겨야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오는 해로움을 고려하지 않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길의 시작과 과정은 억제되지 않은 자유, 정념들의 어미 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일을 소홀히 하여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그와 같은 불길한 자유의 결과는 끔찍한 종살이입니다"(Chn).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념들을 향한 충동들은 무척 매혹적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정욕적인 행동들을 끊어버리고 그것들의 대상으로부터 물러나 휴식함으로써 내면에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지만, 정욕적인 충동들을 정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험을 당합니다. 그리고 (정념들이 솟아오를 때) 그것들로 인해 슬퍼하면서도 그것들의 충동이 오래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죄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를 죄로 인도하는 충동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실제로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됩니다. 정념들의 사탕을 즐기는 사람은 무의식중에 그것들에게 예속되고, 자기의 뜻과는 달리 정념들의 노예가 됩니다. 자기의 죄를 미워하는 사람은 범죄를 중지할 것이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기 전에 용서를 받을 수 없듯이, 죄를 미워하기 전에는 죄의 습관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전자는 참된 겸손의 원인이 되며, 후자는 통회의 원인입니다"(ibid.). "회개되지 않은 죄를 제외하고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Ch.2)


시간경을 찬송한 후에는 앉아서 식사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수행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는 동안에 계속 기도하십시오. 먼저 영혼에게 생명과 힘을 주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므로,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 안에서 육신을 지탱해주는 음식에 대한 명령들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겠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신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29. 기도, 그리고 항상 기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영혼이 떠난 몸은 죽어 악취가 나듯이, 기도하지 않는 영혼도 죽고 저주를 받고 악취를 풍깁니다. 한 순간이라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한 위대한 선지자 다니엘은, 기도를 빼앗기는 것을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톰도 이것에 대해서 훌륭히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각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의 상태보다 더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영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천사들과 인간들 모두가 행하는 것으로서 상이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말씀이 부족한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분리하여 천사들과 결합해줍니다. 평생 기도를 실천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삶, 영광, 신분, 지혜, 명철 등에 있어서 천사들과 비슷하게 됩니다."


"마귀는 덕의 보호를 받는 영혼을 보면, 기도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힘과 능력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기도가 영혼에게 공급해 주는 양분은 음식이 몸에 공급해주는 것보다 더 풍성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신경입니다. 몸은 신경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살고 움직이고 안정을 유지하지만, 신경이 손상되면 몸의 조화가 완전히 파괴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거룩한 기도에 의해서 유지되고 안정성을 획득하고, 의의 길로 순탄하게 움직입니다. 당신이 기도를 중지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를 물에서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에게는 물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과 같이, 당신에게는 기도가 생명을 의미합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듯이, 영혼도 대기를 통과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이 됩니다. 왕의 궁전을 금과 보석과 대리석으로 장식하듯이,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인 신자들의 영혼은 기도로 장식합니다.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전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그리고 하늘들도 담을 수 없는 분이 기도할 때에 살아 있는 영혼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찬양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기록한 기도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날개를 단 것처럼 온 우주를 여행하고, 감옥에 갇히고 채찍질을 당하고 쇠사슬에 묶이고, 고난을 당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병을 고쳐주면서도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이런 것들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기도에 의해서 자기 영혼을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또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린 후에는 서둘러 모든 시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최고의 행위인 기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이나 기타 모든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기도가 지니는 능력은 나무의 생명 안에서 물이 지니는 능력과 동일합니다."


"기도는 구원의 원인이요, 불멸의 근원이요, 무너지지 않는 교회의 밤이요, 공격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그것은 귀신들을 두렵게 만들며 의를 행하는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여왕이 어느 마을에 들어갈 때에는 온갖 종류의 부를 지니고 가듯이, 영혼 안에 들어가는 기도의 기차에는 온갖 종류의 덕이 실려있습니다."


"영혼 안에서 기도는 집의 기초와 같습니다. 우리는 영혼 안에 기도라는 기초를 놓은 후에, 그 위에 순결,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율법의 성취라는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열렬한 기도는 정신과 영혼의 빛이요, 꺼지지 않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동안에 원수는 무수히 많은 더러운 생각들로 우리의 정신을 덮고 영혼을 흠뻑 젖게 만들며,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한곳에 모아들입니다."


"기도는 위대한 무기요, 보호장비입니다."


신학자 시므온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당신은 호흡하는 것보다 더 자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으로 기도한 뒤에 다른 것에 대해 염려하면 생각들이 흩어집니다" ; "몸을 피로하게 하고 마음으로 통회하게 만들지 않는 기도는 마치 유산된 태아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도에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질상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요 연합입니다. 실질적으로 기도는 세상을 지탱해주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화목이요, 눈물의 근원인 동시에 결과요, 속죄요, 시험을 극복하는 다리요, 슬픔을 막아주는 담이요, 전쟁의 중지요, 천사들의 행위요, 영들의 양식이요, 장래의 축복이요, 끝도 없고 한계도 없는 행동이요, 덕의 근원이요, 은사를 찾아 발견하는 자요, 보이지 않는 성취요, 영혼의 양식이요, 정신의 빛이요, 절망을 베어버리는 칼이요, 희망의 증거요, 슬픔의 속박을 풀어주는 것이요, 수도사들의 보화요, 헤시카스트들의 보물이요, 노염이 점점 감소하여 없어지는 것이요, 성취의 거울이요, 사람이 이른 단계의 척도요, 영적 상태의 증거요, 미래를 예고하는 자요, 영화의 상징입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는 고문실이요, 정의의 법정이오, 주님의 보좌입니다(Ch.28,1)" : "기도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성 닐루스(St. Nilus)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에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물려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 "기도는 정신이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 "빵은 몸의 양식이요, 덕은 영혼의 양식 입니다: 기도는 정신을 위한 영적인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영혼의 양식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육체의 양식의 양과 질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30. 헤시카스트를 위한 음식 규정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데 필요한 만큼 달아서 먹고 마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4:9-11). 어느 교부가 말했듯이, 만일 우리가 피를 바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9). 다윗도 같은 말을 합니다: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시 109:24). 신학자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이나 육체적인 궁핍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눈물만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없습니다."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돌보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고난당하는 사람(그리스도를 위해서 육체적인 고난을 인내하는 사람)의 몸의 돌보시며, 항상 그의 몸 가까이에 계십니다"(Ch.58); "눈물을 뿌리는 사람은 기쁨을 거두듯이,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자발적으로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 "자신을 창조주에게서 끌어내는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통하는 문에 빗장을 지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Ch.75). "오랫동안 사방에서 시험을 받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며, 원수로부터 무수히 공격을 받았으며, 은밀하게 큰 도움을 받았던 나는 여러 해가 흐르면서 경험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선의 기초, 영혼이 원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 생명과 빛으로 인도해주는 길은 다음과 같은 방법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홀로 정신을 집중하고서 계속 금식하십시오. 즉 음식의 정체에 대한 지혜롭고 현명한 규칙에 복종하며, 항상 한 곳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거기에서부터 감각의 정복이 이루어지고, 감각의 정복에서 냉철한 정신이 이루어지며, 냉철한 정신에서부터 몸 안에서 일어난 정념들을 길들이는 일이 이루어지고, 정념들을 길들일 때에 생각들이 평온해지며, 생각들이 평온해지면 생각들의 분명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나면 덕을 열심히 실천하게 되며, 덕을 실천하면 고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 항상 끝없이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기억하게 되며, 죽음을 기억하면 생각을 부추길 수도 있는 모든 백일몽이 제거된 순수한 순결이 이루어지며, 순결이 이루어지면 총명하고 시야가 넓어집니다. 시야가 넓어지면 정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을 받아서 이해하는 깊고 신비한 개념들,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내면의 움직임들, 그리고 거룩한 능력들로부터 오는 영적인 것들과 헛된 망상들이 구분되고 분별됩니다. "거기서부터 게으름과 부주의함을 제거해주는 정신적 바다와 고가도로에서의 두려움이 생기고,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불같은 열심히 생기고, 정신으로부터 그것을 제거하려 하며 일시적인 것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망각하게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간단히 말해서, 거기서부터 참된 인간의 자유, 영혼의 기쁨,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부활 등이 생깁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수단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우리가 말한 모든 일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그 두 가지 덕을 태만히 함으로써 모든 덕의 기초를 잠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내면에 보존하며 그것들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덕은 영혼 안에서 거룩한 행동의 정상이요 출발점이며,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요 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악덕, 즉 육체적인 방랑과 탐식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들은 위에서 말한 모든 것과 반대되는 것의 출발점이요 영혼 안에서 정념들을 일으킵니다"(Ch.15),


그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연약하고 자기의 일을 시작할 때에 열심히 없는 사람들은 그것들 및 그와 비슷한 공격에 의해서만 아니라 나뭇잎 소리만 들려도 공포와 혼란에 빠지며, 작은 욕구나 배고픔이나 병에 의해서도 하던 일을 버리고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은 곡물과 야채를 지나치게 많이 먹지 않고 마른 물을 먹으며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몸이 기진맥진해지면 맨땅에 눕습니다. 그들은 몸이 영양실조가 되어 거의 눈을 보지 못하며, 혹시 음식을 먹지 못하여 죽을 지경이 되어도 그들은 자신에 대한 승리를 포기하거나 견고한 결심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세의 삶을 편안하게 지내기보다는 곤경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덕을 위해 일하는 편을 선택하며 또 그것을 바랍니다. 그들은 시험이 와도 크게 기뻐하며. 시험을 통해서 보다 완전해집니다. 심지어 아주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으며,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 물러서지 담대하게 공격에 저항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완전함을 얻기 때문입니다"(Ch.60).


이러한 말들 및 그와 비슷한 교훈에 우리의 말을 맞추고, 또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는 말에 순종하면서, 음식에 관한 적절한 규칙을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1. 영적 실행가가 월요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음식을 먹는 방법


한 주일의 둘째날과 넷째날과 여섯째 날에는 'niners', 즉 하루에 한 번 아흡 시에만 음식을 먹습니다. 약 160g의 빵, 마른 음식 약간을 먹고, 서너 컵의 물을 마십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69번째 규칙을 따른 것입니다: "만일 주교나 사제나 부제나 봉독자나 독창자가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부활절 전 거룩한 사십 일 동안, 또는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금식하지 않는다면, 그를 내쫓으십시오. 만일 그가 평신도라면, 그를 파문하십시오." 후대의 거룩한 교부들은 월요일에 금식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32. 화요일과 목요일에 음식을 먹는 방법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하루에 두 번 음식을 먹습니다. 역시 160g정도의 빵, 조리된 음식 약간, 그리고 마른 음식 약간을 먹고, 물로 희석한 포도주 서너 잔을 마십니다. 저녁에는 80g 정도의 빵과 약간의 마른 음식이나 채소를 먹고, 물을 탄 포도주를 한두 컵 마십니다. 그러나 갈증과 철야는 눈물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갈증과 철야는 마음을 통회하게 하며, 통회하는 마음은 눈물을 만들어냅니다"라고 말합니다(Ch.6,13). 성 이삭은 "하나님을 위해서 갈증을 참고 견디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갈증을 해소시켜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루에 한 끼만 먹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식과 금욕은 모든 덕의 기초와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혜로운 평신도는 "가장 좋은 삶을 선택하여 그것이 습관이 되면 즐거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대 바실은 "장애물이 없는 곳에 확고한 결심을 가진 의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느 거룩한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꽃은 열매의 출발점이요, 금욕은 활동적 삶의 출발점입니다"(Nilus, part 1).


어떤 사람들은 이것 및 그에 따라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얻는 유익을 고려하며 이로 인해 생겨나는 영광스러운 상태를 그려보는 사람은 그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최대한으로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증명할 것입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한 사람이 먹는 빈약한 음식은 영혼에게서 모든 정념들을 깨끗이 씻어줍니다. 주님을 위해서 금식하고 철야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식탁에서 당신의 삶을 위한 치료법을 차용하며, 당신의 죽은 영혼을 살리십시오. 사랑하는 주님이 그들의 식탁에 기대어 그들의 음식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의 빈약한 음식의 쓴맛을 형언할 수 없는 단맛으로 변화시켜 주시며, 그분의 영적인 종들이 그들 및 그들의 거룩한 음식을 둘러쌉니다"(Ch.8) : "금식하는 사람의 호흡은 매우 향기로우며, 그와의 만남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금욕하는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33. 토요일에 음식 먹는 법


철야 및 철야하는 동안에 음식을 먹는 법 부활절 전야를 제외한 매주 토요일에도 화요일과 목요일처럼 하루에 두 번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은 거룩하나 규율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또 사순절 전 주간을 제외하고는 매 주일에는 철야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날이나 성인의 날이 있는 주간에는 그 날에 철야하고 주일날에는 철야를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토요일에는 하루에 두 번 음식을 먹습니다. 철야 기도를 하는 것은 유익하므로, 매주 주일날에 철야하며, 그밖에 위에서 언급한 날에도 철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렇게 하면 곧 그것이 가져다주는 큰 유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사 58:8),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특히 내면의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금식과 철야는 죄와 정욕을 대적하려는 모든 시도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죄와 정욕에 대한 미움을 보여줍니다. 거의 모든 정욕적인 충동은 금식을 통해서 감소됩니다. 그 다음에 영적인 행위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것은 철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평생 동반자로 삼아 행하는 사람은 순결의 친구입니다. 위를 만족하게 하고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는 것은 모든 악의 출발점으로서 사람을 약하게 하고 간음이라는 정욕을 자극합니다. 그러므로 금식, 철야, 그리고 냉철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 등은 하나님의 거룩한 길이요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밤낮으로 쉬지 않고 행하는 철야로 말미암아 빛나는 영혼 안에서, 주님은 낮에는 구름을 만들어 그것을 덮어주고 밤에는 불빛을 만들어 그것을 조명해주시며, 그것은 확고하고 안전하게 해주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사랑스러운 행동을 선택하십시오. 즉 끊임없이 철야를 실천하십시오. 거룩한 교부들은 그것에 의해서 옛 아담에게서 해방되고 정신을 새롭게 했습니다. 영혼은 밤에 영원한 생명을 느끼며, 그 감각은 정념들의 어두움에서 해방되어 성령을 받습니다" ; "철야하는 것을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영혼이 위로를 발견할 것입니다" : "수도사에게 철야보다 더 큰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 "분별있게 철야하는 수도사를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천사들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이 거룩한 철야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혼은 스랍 천사의 눈을 갖게 될 것이며, 그 눈으로 항상 거룩한 것을 볼 것입니다."


홀로, 또는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통회의 뜨거운 느낌을 가치고서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철야하십시오. 철야를 마친 후에는 당신이 참고 견딘 수고에 대한 작은 위로를 허락해주고, 저녁식사 시간에는 약 80g 정도의 빵, 그리고 당신의 식욕을 만족시켜줄 정도의 마른 음식을 먹고, 세 점 정도의 물을 섞은 포도주를 마십시오. 만일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 하는 요일에 철야하게 된다면, 철야하기 위해서 그 규칙을 깨지 마십시오. 전자를 지키면서 후자도 태만히 해서는 안 됩니다.


 


34. 일요일의 식사 및 그 밖의 것에 관하여


일과 겸손에 대해, 일요일에도 토요일에 하듯이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합니다. 이 규칙은 병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거룩한 교부들이 허락한 것에 관해서, 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랜 관습에 의해서 확립되었을 때에는 다른 날과 동일하게 행합니다. 그런 날에는 음식을 한 끼만 먹거나 마른 음식만 먹지 않고 , 금지되지 않은 것이면, 좋은 것은 모두 먹습니다. 또 야채가 있으면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지 말고 조금만 먹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항상 절제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몸이 병들었을 때에는 몸에 좋은 것과 허락된 음식을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우리에게 정념들을 죽이라고 가르친 것이지 몸을 죽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허락된 것이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우리 수도사들에게 허락된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오만을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사하게 먹되 과도함을 피하십시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약한 음식은 무의식중에 금욕을 가르쳐줍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물건이 넉넉하고 쉽게 그것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면, 절제하기 어렵습니다." 육체를 위해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것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만 위로를 발견합니다." 노동과 가난한 삶, 그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성인은 "노동과 겸손은 그리스도를 획득해준다"고 말합니다.


 


35. 사순절 기간의 생활방법과 식사법


사순절 기간의 식사와 생활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한 끼 식사를 해야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과 금요일의 규정과 같이 행하십시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엄격하고 착실하게 행하십시오. 특히 사순절의 사십일은 일 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간으로서, 거룩한 부활의 밝은 날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복자들은 수고에 대한 상을 받게 됩니다.


 


36. 선한 판단 및 행동의 절제가 가장 귀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순종에 대하여


이 모든 일 및 그와 비슷한 일을 실천할 때에 마음의 평화를 보존하면서 당신의 이중 본성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면 주의 깊게 판단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고 말합니다(잠 24:3, 4). 거룩한 탈라씨(Thalassy)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절한 궁핍과 엄격함은 지름길이요, 분별없는 엄격함과 비이성적인 방종은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똑같이 분별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말합니다: "지체들이 야해지면 생각들이 들끓고 격분하게 됩니다. 지나친 노동은 낙담으로 이어지고 낙담은 격분으로 이어집니다. 격분에는 서로 상이한 종류가 있습니다. 한 가지 격분은 정욕들을 공격하며, 다른 격분은 우리로 하여금 고요한 거처를 버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만듭니다. 그러나 비록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적절하게 행하는 노동은 무척 귀중한 것입니다. 수도사의 생활에서 노력을 게을리 하면 죄악 된 정욕이 증가하며, 그것이 지나치면 격분으로 이어집니다"(Ch.71).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는 이렇게 말합니다: "몸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몸의 능력에 맞는 일을 배정한 후에, 내면에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딤전 4:8)"(On love, 63). "몸이 영혼보다 무거우면, 영혼을 괴롭히고 부담을 주며,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라는 말씀처럼 꼴사납고 부패한 욕망과 충동을 향해 영혼을 몰아갑니다. 그 때에 금욕의 재갈로 그것을 억제한 후에, 그것을 죽여야합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그것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6)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서 다스리는 자에게 순종하고 가장 좋은 것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태하게 살기보다는 노력하다가 죽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믿음을 위해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도 순교자들입니다" : "노력하다가 죽는 것이 타락한 상태로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아버지에게 충고를 구하고 받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감당할 수 없는 것들과 유혹들이 쉬워지며, 당신이 마치 약간 경사진 들판으로 실려 가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37. 식사 시간에서부터 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우리의 행위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 필요성 음식을 먹어 영양을 보충한 후에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라는 바울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서 거룩한 교부들의 글, 특히 절제에 관해 가르치는 글을 충분히 읽으십시오. 만일 낮이 길다면, 그 다음에 약 1시간동안 잠자십시오.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계속 기도하면서 손으로 약간의 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도하고 또 다시 글을 읽고 생각하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겸손해지며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는 훈련을 하십시오. 주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고 말씀하십니다. 그밖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잠 3:34),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 데서 시작되고"(집회서 7:12) :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51) ;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거룩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마지막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비밀들이 계시됩니다"; "겸손이 지배하는 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솟아납니다"; "겸손에는 은혜가 따르며, 자만심에는 징계가 따릅니다."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행동으로 순종을 나타내십시오. 두 발을 땅에서 들어올리고, 정신을 하늘로 인도하여 밤낮 그곳에서 당신의 생각 안에 머무십시오. 동시에 자신을 비열하다고 여기며, 매사에 당신이 모든 사람보다 비천하게 여기려고 노력하십시오. 이것이 참된 방법입니다; '능력 주시는' (빌 4:13)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이것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증거하는 것입니다"(Answer 477).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금식하지않고, 철야하지도 않고 맨땅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지만, 나 자신을 낮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려 했고, 주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는 당신을 도시 가까이에 데려갑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당신을 도시 안에 앉힙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죽은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도시 및 도시의 보물을 물려받게 만듭니나" ;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주하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이 거룩한 성인의 제자인 성 존(St. John)은 "자신을 무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또 어떤 선한 행위에 대해서 '나도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분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녁까지 기도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저녁 예배 찬송을 부르고, 덕을 위한 우리의 수고와 고난에 비례하여, 그리고 우리가 행한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들을 조정하여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주시고 위로해 주신다고 믿으십시오. 거룩한 다윗은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31)고 말씀하십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거룩한 것을 지혜롭게 이해한 성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는 원인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분량에 비례하여 자신의 믿음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능력을 소유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행동에 의해서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드러내며, 믿음의 분량에 비례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그 게으름에 비례하여 불신앙의 분량을 드러내며, 믿음의 부족 때문에 은혜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진보하는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그릇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진보하는 것은 그의 능력 안에 있으며, 다른 사람은 믿음의 분량 안에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그의 믿음을 이용할 능력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생 회개하며 평화롭게 살며 괴로움이 없이 흠없이 평화롭게 기독교인으로서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당신이 우리 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훌륭하게 변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십시오.


 


38. 순수한 기도는 모든 행동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형제여, 모든 수단이나 방법, 모든 규칙,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수행들은 우리가 순수하게 분심되지 않은 상태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정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난다면, 많은 다양한 것들을 버리고 이성을 초월하는 연합 안에서 직접적으로 한 분, 단일하시고 통합시키시는 분과 연합알 것입니다. 신학자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신들(즉 신을 닮은 사람들)과 연합하시고, 그들에 알려지실 때, 성령의 관통에 의해서 마음에 광채가 가득 찹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순수하고 분심되지 않는 마음의 기도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이 상태를 획득하는 것이 허락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아마 천 명 중에 한 사람에게만 허락될 것입니다. 한층 더 높이 올라가서 영적 기도를 획득하고 장래의 삶의 비밀들의 계시를 받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로 말미암아 몇 세대에 한 사람쯤 나타날 수도 있을것입니다.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계명 및 합법적인 모든 것을 성취하고 영혼의 순수성을 획득한 사람은 수천 명 중에서 한 사람 정도 발견할 수 있듯이, 기도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여 그것을 성취하고 이 세상의 속박을 깨고 그 비밀을 소유하게된 사람은 수천명 중에 한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기도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순수한기도 다음에 오며 그것을 초월하는 신비에 이른 사람은 여러 세대에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Ch.16).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에 의해서 그러한 새로운 비밀들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무슨 일을 할 때든지 분심되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계속 실천하면, 당신은 젖을 빠는 아기의 상태에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이며(엡 4:13), 법정에서 지혜롭게 발언한사람, 즉 삶이 말과 일치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을 사람으로서 신실하고 지혜로운 건축자(청지기)와 함께 칭찬과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필레몬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여,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분심되지 않은 순수한 기도를 주신다면. 낮이든지 밤이든지 당신의 규칙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힘껏 매달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영적인 행위 안에서 당신의 마음을 조명해 주실 것입니다. "어느 지혜로운 교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몸 안에 있으면서도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행하는 은밀한 마음의 기도를 회득하십시오. 그리하면 죽기 전에라도 당신의 영혼은 천사처럼 될 것입니다." 성 이삭은 침묵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 침묵 생활에서 완전함에 이르렀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기도가 주어진 때입니다. 그가 그것을 획득했다는 것은 곧 그가 모든 덕의 정상에 도착했으며 성령의 거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보혜사의 은혜를 완전히 받지 못한 사람은 기뻐하면서 마음에 이 기도를 보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러 오시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롬8:26). 그렇게 되면 그가 잠들었든지 깨어 있든지 그의 영혼 안에서 기도가 멈추지 않습니다. 먹거나 마실 때, 잠자거나 어떤 일을 할 때, 심지어 깊이 잠들었을 때에도 그의 마음은 노력하지 않고서도 기도의 향기와 탄식을 내보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결코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비록 겉으로는 잠잠하지만 매시간 계속 은밀하게 내면에서 작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담고 가는 사람의 침묵을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움직임이요 순수한 마음과 정신의 움직임은 은밀하게 존재하시는 분을 은밀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의 온유한 음성입니다"(Ch.21). 그 밖에도 은밀하게 은혜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놀라운 말을 했지만, 여기에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하려 합니다.


 


39. 하루에 무릎을 꿇는 회수에 관하여


무릎을 꿇은 회수에 관하여, 거룩한 교부들은 일주일 중 닷새 동안에는 매일 밤낮으로 삼백 번 무릎을 꿇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어떤 신비하고 은밀한 이유 때문에 관습적으로 정해진 날에는 그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체력과 결심에 따라서 무릎을 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많이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덜 꿇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자신의 체력에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경건한 일에 열심을 내며 무릎을 꿇는 일에도 열심을 내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기" 때문입니다(마 11:12).


 


40. 우리의 노력과 행위의 분량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의 경험과 능력, 믿음과 본성적인 성향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의 노력과 행동의 분량에 따라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활 방식에서의 경험과 능력, 믿음과 본성적인 성향에 따라서도 주어집니다. 성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은 지혜에 속한 기관이며, 이성은 지식에 속하는 기관입니다. 그 둘로부터 파생된 본성적인 확신은 그 둘에 따라서 형성된 믿음의 기관입니다. 사람의 본성적인 사랑은 치유의 은사에 속하는 기관입니다. 각각의 은혜의 선물에는 경험이나 능력이나 성향처럼 그것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상응하는 본성적인 기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에서 모든 감각적인 환상을 깨끗이 제거한 사람은 지혜를 받고 이성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재하는 정념들, 즉 노염과 정욕을 다스리게한 사람은 지식을 받고, 정신과 이성에 의해서 거룩한 것을 확실히 인식한 사람은 지극히 능력 있는 믿음을 받고, 사람들에 대한 본성적 사랑이 진보한 사람이 이기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치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것을 당신의 스승 외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말만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것을 행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가르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은 "누구든지 이(계명)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모든 것을 듣고 열심히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합니다(롬 2:13). 하나님께서 당신을 모든 선하고 구원하는 행위로 인도해 주시며, 당신 앞에 놓인 거룩한 정신적인 일을 할 때에 성도들의 기도에 의해서 성령이 당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적극적이고 선한 판단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이제는 포괄적이고 완전하게 선한 판단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위대한 교부들의 증거에 의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덕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41. 완전하고 포괄적인 판단에 대하여; 육체를 따라 악하게 사는 사람, 본성적으 로 영혼에 따라서 사는 사람,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에 대해서


정욕적이고 악하게 사는 사람은 선한 판단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입니다. 모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로 결심한 사람("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 34:14]), 그리고 새로 선의 영역에 들어와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초심자에게 적절한 약간의 판단 의식을 획득합니다. 자기의 영혼과 본성에 따라서, 즉 상식과 판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것 및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관련된 것들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본성을 초월하여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정욕적인 상태, 초심자의 상태와 중간 상태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완전함-초 본질적인 조명과 완전한 판단-을 획득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분명히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바르게 판단을 받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바르고 정확하게 보고 판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고전 2:15)


 


42. 판단에 대한 몇 가지 직유


첫 번째 사람은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여행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단조로운 어두움 속을 방황하면서 자신을 보지도 못하고 판단하지도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2:35). 두번째 사람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에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희미한 별빛 속에서 종종 무분별이라는 돌에 걸려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천천히 걸어갑니다. 이 사람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고 판단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세 번째 사람은 보름달이 빛나는 밤에 걸어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달빛에 의해서 보다 확실하게 걸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자신 및 동료 여행자들을 거울로 보듯이 보고 판단합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네 번째 사람은 햇빛이 밝게 빛나는 한낮에 걸어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태양빛에 보듯이 자신을 분명히 보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진실하게 판단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위에서 인용한 사도 바울의 말에 따라서 판단합니다. 또 그는 길을 잃지 않으며, 동료들을 생명이요 진리이신 참된 빛으로 인도합니다.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5:14). 또 거룩한 바울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 또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 8:12)


 


43. 모든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변화, 그리고 높은 단계의 겸손에 대하여


자기 정화와 조명을 통해서 (부분적인 완전함만 가능한 우리 시대에 가능한 한도까지의) 완전함에 이른 사람들도 항상 불변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성적인 연약함이나 때때로 몰래 숨어들어오는 자기 과장으로 인하여, 그러한 사람들도 이따금 변화를 겪으며, 일종의 시험으로서 얻은 것을 빼앗기지만 나중에 가장 강력한 중재가 다시 주어집니다. 안정성과 불변성은 장래의 삶의 특성입니다. 현세에서는 순결과 평화와 거룩한 위로의 시기, 그리고 그것들에게 부정과 슬픔이 섞이는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각 사람의 생활과 진보에 따라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불가해한 방법에 따라서 발생합니다. 또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해야" 합니다(고후 1:9).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율법을 범하고, 회개함으로써 영혼을 치료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지각을 가진 모든 존재는 무수히 변화하며 모든 사람은 시간마다 변합니다. 선한판단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냉정하게 자신을 관찰한다면, 날마다 그가 당하는 시련은 이 일에 있어서 특별한 힘을 가지고 그를 지혜롭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자신을 관찰하며 자기의 영혼이 매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온유함과 평화로운 성향을 버리고 갑자기 혼란에 빠지는지, 또 그러한 때에 어떤 위험이 그를 위협하는지 알게 됩니다. 복된 마카리우스(Macarius)는 형제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심 때문에 그들이 배우고 기억하기 위해서 이것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역경을 당했을 때에 절망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대기가 차가와지듯이, 깨끗함을 획득한 사람들도 끊임없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게으르거나 부주의하지 않아도 그들이 성취한 분량에 따라서 움직일 때에도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와는 달리 실패할 수 있습니다"(St. Issac, Ch.46).


마카리우스는 계속해서 "대기 안에서 변화가 발생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변화가 발생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질상 동일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모든 사람에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장 비천하고 연약한 사람만 언급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완전한 사람들은 정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변화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단계에 확고히 머문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마카리우스의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날씨가 변화하여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며, 우박이 내리기도 하고 청명하기도 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변화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공격을 받기도 하고 은혜의 보호를 받기도 하며, 영혼이 잔인한 파도에 에워싸이기도 하고 은혜가 임하여 마음에 기쁨과 하나님의 평화와 깨끗하고 평온한 생각들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이 깨끗한 생각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상스럽고 더러운 생각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권면하게 했다고 암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깨끗하고 온건한 생각들 다음에 나쁜 생각들의 공격을 받아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은혜가 주어지는 고요한 시기에 자신을 찬양하며 자만하지 말며, 기쁨의 시기에 슬픔을 대비해야 합니다"(ibid.).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일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슬픔에는 은밀하게 넘쳐흐르는 위로가 따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 매일 매 시간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분투하다가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교정됩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사람은 늑대의 먹이가 됩니다. "이 거룩한 교부는 이 사상을 간단히 확증하여 그것이 지혜로 가득하다는 것을 입증하며 독자들이 품는 의심을 완전히 잠재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빗나가서 늑대들의 먹이가 된 사람은 바른 길을 따라가려 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길, 거룩한 교부들이 걸어간 길이 아닌 길로 걸어감으로써 자기의 목표를 회득하기로 결심합니다"(ibid.).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행위가 없어도 겸손하면 많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겸손이 없는 행위는 소용이 없습니다. 겸손과 모든 덕의 관계는 소금과 음식의 관계와 같으며, 겸손은 많은 죄의 세력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을 과신하지 않으면서 겸손을 얻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겸손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선한 행위가 없이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주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이 부족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와 덕과 노력은 소용이 없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없어도 겸손은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주며 우리를 위해 변론해줄 수 있습니다"(ibid.).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성인은 교만한 생각이 떠올라 너의 덕을 기억하거라' 고 속삭이면 '이보게 늙은이, 당신의 색욕을 보게나' 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44. 회개, 깨끗함, 그리고 완덕에 관하여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진보의 완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회개, 순결, 그리고 완덕 회개란 무엇입니까? 과거의 것으로 인해 슬퍼하고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깨끗함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피조물을 향한 동정심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완덕이란 무엇입니까? 깊은 겸손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든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보이지 않는 것이라 정신세계에서 창조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Ch48,298).


"회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은 모든 피조물, 사람들, 동물들, 귀신들과 모든 창조를 향해 타오르는 마음입니다"(ibid.)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한, 비록 하늘로 올라간다고 해도 행위와 노동이 없이, 그리고 염려가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 완전함이 있습니다. 그 너머에는 생각이나 정식적인 기도가 없는 마음의 은밀한 교육이 있습니다"(Ch.47).


성 막시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혜롭게 덕을 사랑하면 본성의 무정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무정념이 만들어집니다. 이 의지의 무정념을 통해서 거룩한 축복이라는 정신적인 은혜가 영혼 안에 들어옵니다" : "육체적인 슬픔과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경험에 의해서 육체적인 것의 기분 좋음과 불쾌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경험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의 힘에 의해서 육체적인 기쁨과 슬픔을 정복한 사람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들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사람은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선한 판단이 가장 고귀한 덕으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면에 선한 판단을 소유한 사람은 거룩한 빛의 조명을 받으며, 신비하고 은밀한 환상들을 물론이요 인간적이거나 신적인 것들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거룩한 침묵의 출발점에 대해 설명할 시간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45. 초심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초보적 침묵과 관련된 다섯 가지 활동: 기도, 시 편 찬송, 독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 손노동


이제 막 침묵을 실천하기 시작한 초심자는 하루 24시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섯 가지 활동을 하면서 보내야 합니다.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로부터 오는 생각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입을 다물고서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호흡에 의해서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옵니다. 이 기도는 수실에서 실천하며, 음식과 잠과 감각을 통제하는 전반적인 금욕 및 진지한 겸손을 병행해야 합니다. 초심자는 기도 외에도 시편찬송, 서신서와 복음서와 거룩한 교부들의 글, 특히 기도와 냉철한 정신에 관한 글, 그리고 그 밖에 성령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아픔을 느끼면서 자기의 죄를 기억하고, 심판날이나 죽음이나 영원한 고통이나 영원한 축복 등을 기억하며, 낙담하지 않기 위해서 손노동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 특히 손노동을 한 뒤에는) 아무리 자신을 몰아쳐서 노력하기가 어려워도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정신은 끊임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자주 내면의 방이나 마음의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서 확실히 온전히 주님께 집중함으로써 이러 저리 배회하는 것을 억제하는 방법을 쉽게 배우게 됩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천국의 방을 볼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에게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또 성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은 몸의 모든 기관을 다스립니다. 은혜가 마음의 목장을 완전히 채우면, 마음은 모든 지체와 모든 생각을 다스립니다. 정신 및 영혼의 모든 생각이 그곳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또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성령의 은혜가 그 안에 성령의 법을 새겨 놓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은 다스리는 기관이요, 정신과 영혼의 모든 생각들이 발견되어야 하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46. 지혜로운 침묵의 실천을 시작하는 방법, 그것의 시작, 성장, 발달, 그리고


완성


지혜롭게 침묵을 실천하기 시작한 초심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심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끊임없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실천하고 선한 것이든지 악한 것이든지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믿음, 그들이 하는 일과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철수, 그리고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향하는 진지한 경향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이 신뢰하면서 성장하며, 마음의 기도 안에 거함으로써, 분심됨이 없이 완전히 하나님께 매달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을 향해 뻗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쉬지 않는 영적 기도를 통해서 완전함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완전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갈망의 초점인 하나님과의 연합과 엑스타시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행위를 통하여 관상을 향해 가는 죄가 없는 전진입니다. 우리 주님의 조상인 다윗은 이것을 경험하고 이 복된 변화에 의해서 변화되었을 때에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라고 외쳤습니다(시 116:11). 이러한 상태에 이른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19)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47. 초심자들의 침묵 실천


초심자는 수실을 자주 떠나지 말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피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을 경우에도 되도록 억제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룩한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키는 데서 오는 도움이 일을 하는데서 오는 도움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초심자들뿐만 아니라 진보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러한 만남이나 대화는 생각을 분산시키고 산만하게 만듭니다. 이에 대해서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에 영합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에게만 해를 끼치지만, 통제의 부족은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에게 해를 끼칩니다", "침묵은 외부의 감각을 죽이지만 내면의 움직임을 살립니다. 반대로 외적인 접촉은 외부의 감각을 살리고 내면의 움직임을 죽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헤시카스트는 육신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영혼을 그 육체의 거처의 한계 안에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 "헤시카스트는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다" (아 5:2)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 "당신의 수실의 문을 닫아 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당신의 입술의 문을 닫아 대화를 하지 말며, 영혼의 문을 닫아 악한 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Ch.27).


 


48. 맑은 정신으로 집중하여 행하는 마음의 기도 및 실천 방법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상상도 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하여 영적으로 고요히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실천하는 기도는 우리의 정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에 의해서 정신은 다시 기도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자신에 대해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 둘째 부분(자비에 관한 부분)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완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만 향해 뻗어갑니다(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만 기도합니다).


 


49.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거룩한 교부들 모두가 우리에게 항상 완전하게 예수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부들은 완전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다른 교부들은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과 상태에 따라서 일부만 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거룩한 크리소스톰은 예수기도를 완전하게 하라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이여, 기도의 규칙을 버리거나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교부들은 '하나의 규칙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을 어찌 수도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집에 있을 때나 여행을 할 때, 또는 무엇을 하든지 수도사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자극하여 우리 주님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원수와 싸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혼은 이처럼 주님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선한 것과 악한 것 등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먼저 내면, 즉 마음에서 나쁜 것을 보고, 그 다음에 선한 것을 볼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뱀을 몰아내고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죄를 드러내고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있는 모든 원수들을 몰아낼 수 있고, 조금씩 그것들을 정복하고 근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마음의 목장을 지배하고 있는 뱀을 정복하며, 우리 영혼을 구원하고 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함께 거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음은 주님을 삼키고 주님은 마음을 삼켜 둘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몰아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려면 오랫동안 크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을 억제하고 통제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악한 자의 행동이나 모든 악한 생각을 억제하려면. 자신을 내면에 가두어야 합니다": "몸이 서 있는 곳에 정신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음을 차단하고 정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담과 같은 것이 하나님과 마음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정신이 무엇인가에 매료된다 해도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날에 주님 앞에서 그것이 죄로 간주될 것입니다. 항상 당신 자신을 자유하게 하며 우리 주 하나님이 후히 주실 때까지 그분과 함께 거하십시오. 영광의 주님에게서 구할 것은 자비뿐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능하다면 밤새도록 주님을 부르면서 겸손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자비를 구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정신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게 하십시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므로' (마 7:14) 이 일을 크게 강요해야 하며,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으므로(마 11 :12), 자신을 몰아치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거두어들이지 말며,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지키면 마침내 주님의 이름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당신은 오로지 당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찬송하는 일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복된 크리소스톰 이전에, 사도 바울은 어느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으로"란 성령에 의해서 마음이 활동하게 되고 성령을 통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일에 성공하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부요하게 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성 디아도쿠스(St. Diadochus)도 동일한 사상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정신의 문을 완전히 닫으면, 정신은 그 활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의무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그 때에 정신에게는 우리 주 예수의 거룩한 이름만 주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신의 열심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도록 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듯이, 정신은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신이 산만해져서 헛된 꿈을 꾸지 않으려면, 정신은 그 자체 안에 갇혀서 위의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를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항상 보존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신의 빛(생각의 명료함, 또는 내적 움직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 "주의 깊게 이 놀라운 이름을 생각 속에 보존하면, 그것은 영혼 안에 나타나는 모든 더러움을 아주 효과적으로 태워 죽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악을)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 12:29)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은 영혼을 불에서 꺼내어 주님의 영광을 향한 큰 사랑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정신의 기억을 통해서 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뜨거운 마음속에 자리 잡은 후에는 더 이상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 영광스러운 이름은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억제되지 않는 사랑의 습관을 낳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사고서 크게 기뻐하는 귀한 진주입니다"(Ch.59). 헤시키우스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 문에 도착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계시고 그를 위해 계신다면 원수들이 그를 부끄럽게 하지 못할 것이며, 영혼은 담대하게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것입니다(시 127:5).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밤낮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는 한,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주신 참된 약속에 따라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현세에서와 죽은 후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8)"(Ch.149).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원수들을 채찍질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원수들을 대적하는 데 이것보다 더 강한무기는 없습니다"(Ch.21); '당신의 호흡에 예수기도를 결합하십시오. 그리하면 침묵의 유익을 알게 될 것입니다'(Ch.27).


 


 


50. 거룩한 교부들뿐만 아니라 사도들에게서도 이 거룩한 기도를 발견할 수 있 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의 글에서만 아니라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과 같은 사도들에게서도 이 거룩한 기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합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주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라고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선택을 받았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16:16).그 러므로 우리의 교사들, 특히 망설이지 않고 사막에서의 침묵생활의 삶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교회의 기둥인 이 세 사람의 말을 수집하여 계시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 적법하게 제정된 거룩한 말씀으로서 편집했습니다. 그들은 내면에 거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을 훌륭하게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게 했고, 우리의 거룩한 기도를 인출해 내어 기도의 기둥이라고 명명하고 추종자들에게 전해주어 동일한 형태로 유지하고 보존하게 했습니다.


천국의 지혜의 보증을 지니고 있는 분명한 질서와 순서를 보십시오. 한 사람은 "주 예수"라는 이름을, 또 다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로", 세 번째 사람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치 거룩하게 작용하는 세 개의 단어들이 일치하도록 서로를 따르고 붙드는 것 같습니다. 그들 각 사람은 앞 사람의 말에서 사용된 끝 단어를 취하여 자기가 하는 말의 첫 단어로 사용합니다. 복된 바울은 주 예수라고 말했고, 요한은 마지막 단어인 "예수"를 첫 단어로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로"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첫 단어로 사용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기도는 이렇게 훌륭하게 판단되어 마치 세 가닥으로 이루어진 튼튼한 밧줄처럼 지혜롭게 구성되고 짜여졌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며, 장차 동일한 형태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원을 이루는 표현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교부들이 주로 덕의 일에 있어서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과 초심자들과 불완전한 사람들을 위해서 추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한 사람들과 완전한 사람들은 그러한 형태들 중 어느 것에나 만족합니다: "주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또는 단순히 "예수"는 단어가 그들에게 모든 지성과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초월하는 기쁨과 축복을 충분히 채워주는 완전한 기도의 행위로 여겨 받아들입니다. 지극히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것의 확실한 증거로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그리스도의 말은 곧 행위요, 그분의 말씀은 생명이요 성령이십니다.


 


51. 초심자들은 어떤 때는 예수기도를 완전하게 하고, 어떤 때는 일부만 해도


되지만, 항상 마음으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표현은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초심자들은 때로는 예수기도를 완전하게 하고 어떤 때는 일부만 해도 되지만, 항상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마음 안에 머무는 사람은 현세의 모든 유혹을 멀리합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하므로 육적인 정욕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덕의 보호를 받아 전진하며, 이러한 덕을 자신의 순결의 성문의 문지기로 세워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향한 귀신들의 간계는 실패합니다"(Ch.57).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 시간 자기 영혼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계시에 의해서 기쁘게 됩니다. 정신의 눈을 내면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성령이 나타나심을 봅니다. 산만한 정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서 주님을 봅니다"(Ch.8)


또, 초심자는 예수기도의 표현을 너무 자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이렇게 집중의 대상을 자주 바꿈으로써 정신이 한 가지 안에 집중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하고 그것에서 이탈하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내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여러 번 옮겨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52. 마음으로 드리는 내면의 기도는 오랫동안 강제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일반적 으로 오랫동안 힘써 노력하면 모든 선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즉흥적인 행동이나 쉽게 잠시 행함으로써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 및 그에 따르는 모든 것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방법으로 어떤 사람에게 이런 것을 주시기도 하지만, 몸과 영혼으로 오랫동안 무척 노력하고 수고하며 강하게 추진해야만 그것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여하고자 하는 은혜와 은사는 탁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이것을 하는 시간과 범위를 확정해야 합니다. 거룩한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의 목적은 마음의 목장에서 원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주님이 거하시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에서 주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조명된 마음 안에서 그는 항상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Ch.8). 또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면의 행동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외적인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됩니다. 왜냐하면 통회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내면의 행동은 깨끗함을 가져오고, 깨끗함은 참된 마음의 침묵을 가져오며, 이 침묵은 겸손을 가져오고, 겸손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처가 되도록 예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모든 귀신들과 정념들이 쫓겨나가며, 우리는 거룩함과 빛과 깨끗함과 은혜가 가득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님을 보며 인자하신 주님께 애통하면서 기도를 쏟아내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Answer 210). 성 카르파토스의 요한(St. John of Karpathos)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코 식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새로운 마음의 천국을 획득하려면 오랫동안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자니라'고 말합니다(고후 13:5)."


또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항상 우리 주 예수의 이름과 함께 거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음이 주님을 삼키고 주님이 마음을 삼켜 둘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노력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수고하면 원수가 쫓겨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러 오실 것입니다."


 


 


53, 불순한 마음의 기도에 대해서, 그리고 분심되지 않은 순수한 기도를 획득하 는 방법에 대해서


깨끗하고 분심되지 않은 기도를 습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각과 외적인 접촉에 있어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강요하지 않고서 순수하고 분심됨이 없이 기도하는 습관, 또는 정신이 항상 마음 안에 있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제는 호흡을 통해서 정신을 마음으로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은 그곳에 머물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헤시키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으로부터 해방된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무기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기도란 마음의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여, 은밀하게 공격하는 원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게 채찍질하고 불로 태워 죽이는 기도를 말합니다"(Ch.21) : "공기가 우리 몸을 휘감거나 불길이 장작에 붙듯이, 마음으로 끊임없이 예수님을 부르면서 생각과 더불어 예수기도에 매달리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지구 위로 지나가는 태양은 낮의 햇빛을 만들어내며, 정신 속에서 항상 빛나는 우리 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은 태양같은 생각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냅니다"(Ch.196)


 


54. 분심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의 기도 및 거기서 생겨나는 뜨거움 마음의 기도 란


분심되지 않은 순수한 기도, 시편에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시 39:3)라고 한 것 같은 노래하는 뜨거움을 만들어내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땅에 던지러 오신 불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는 전에는 정념들의 가라지가 자랐지만 이제는 은혜로 말미암아 신령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이 불은 과거에 글로바와 그의 동료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서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2)라고 말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메섹의 요한(St. John of Damascus)는 내 마음 속에서 성모 마리아를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나로 하여금 노래하게 만듭니다'라고 말합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강력한 행동은 마음에서 새로 생겨나는 생각들에 불을 붙임으로써 마음의 뜨거움을 무한히 강화합니다. 관상의 은혜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뜨거움은 눈물을 흐르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영혼 안에 있는 생각들을 잠잠하게 하고 정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깨끗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정신은 선지자 에스겔이 본 것과 같은 계시와 상징들을 보게 됩니다"(Ch.59) ; "눈물은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치고 땅에 구르게 하며 마음 속에 뜨거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마음은 놀라운 엑스타시 상태에서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42:2)라고 외치며 하나님께로 날아오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 들어온 (영적인) 불은 기도를 되살립니다. 기도가 되살아나서 높이 올라간 후에, 거룩한 불은 영혼의 방으로 내려갑니다"(Ch.28); "뜨거움을 유지하며 죽을 때까지 불에 불을, 뜨거움에 뜨거움을, 갈망에 갈망을, 열심에 열심을 더하는 사람은 참되고 지혜로운 수도사입니다."


성 엘리아스 에크디코스(51. Elias Ekdikos)는 이렇게말합니다: "불이 쇠덩어리를 둘러싸서 불덩어리로 만들듯이, 영혼이 모든 외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기도와 연합하면, 기도는 불길처럼 영혼을 둘러쌉니다. 그 때에 영혼은 뜨겁게 달아오는 쇠덩이와 같아서 외적인 것이 영혼에 접촉할 수 없습니다"(Ch.103) :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러한 현상을 선물로 받은 사람, 그리고 본질상 썩어질 자신의 형상이 은혜로 말미암아 불같이 되는 것을 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55. 뜨거움의 근원은 여러 가지입니다. 순수한 마음의 기도에서 나오는 뜨거움이 가장 참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뜨거움의 본질과 근원은 상이하고 다양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교부들의 말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참된 뜨거움은 순수한 마음의 기도에서 나오는 뜨거움입니다. 그 뜨거움은 순수한 마음의 기도와 더불어 생겨나서 자랍니다. 그것은 우리를 충만하게 조명해 줍니다.


 


56. 마음의 뜨거움의 직접적인 결과


이 뜨거움은 순수한 기도의 완전한 실천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몰아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 귀신들과 우리의 정념들의 악한 궤계들을 태우는 불이십니다. 성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귀신들이 쏘는 화살에 맞은 마음이 화살이 찌르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영혼이 정념들을 미워하기 시작한 표식입니다. 이것은 정화의 시작입니다. 만일 영혼이 죄의 몰염치함으로부터 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후에 진리의 은혜를 충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우리 주예수를 기억하여 마음을 불태우며, 주 예수를 기억하는 것은 영적 행동과 생각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에게서 부패함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은 비록 기도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더라도 항상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금을 정련하려면 잠시라도 용광로의 불이 꺼져서는 안됩니다. 불이 꺼지면 광석이 다시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중지하면 기도함으로써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잃게 됩니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저속함을 태워버립니다. 그리하여 이 복된 기억의 불의 작용으로 악은 서서히 제거되고, 영혼은 그 본성적인 광채와 영광을 완전히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Ch.97). 이것이 정신이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에 거하면서 배회하지 않고 순수하게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정신이 마음을 지킨다면, 방황하지 않고 순수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헤시키우스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이 참된 수도사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 자신과 하나님만이 존재합니다"(Ch.159).


 


57. 뜨거운 기도와 정신집중에서 비룻된 갈망과 하나님을 지향함에 관하여


정신을 지중하여 드리는 뜨거운 기도,즉 깨끗한 기도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하려는 갈만 그리고 영원히 기억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낳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3),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 또 막시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덕이 정신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도와주지만, 으뜸이 되는 것은 순수한 기도입니다. 정신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갈 때에 모든 것을 벗어납니다."


 


58. 마음의 눈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려는 갈망에 대하여


그러한 마음은 종종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은 사람을 지치게 하거나 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고 부요하게 해줍니다. 후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오며, 전자는 영원히 기억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강한 갈망과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홀한 기쁨에 빠진 영혼은 이렇게 외칩니다: "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에게 갈망의 기쁨을 주셨으며, 나로 하여금 당신을 향하게 하심으로써 변화하게 하셨습니다" ; "오 나의 구주, 당신은 나의 갈망이시오, 생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이십니다." 그러한 영혼은 사도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8,39).


 


59. 자기의 능력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권면, 그리고 마음으로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에 대한 지침


그 다음에 임하는 것을 획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규칙을 고수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오게 될 것을 앞질러 구하지 마십시오. 선한 것이라고 행하는 방법이 옳지 못하면 더 이상 선한 것이 아닙니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번째 수행을 실시하기도 전에 두 번째 수행에 대해서 알려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모든 것을 참으며' (고전8:1; 13:7)" 표면적으로나 외부에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충분한 영적 소망이 우리 마음의 은밀한 창고를 열지 못한다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입으로 드리는 제물이 받아들여지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60. 열심에 관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이 나타나심, 그리고 우리에게 완전히 스며 드는 은혜의 빛에 관하여


영적으로 완전함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쉽게 악한 행위들뿐만 아니라 정욕적인 생각과 좋지 않은 상상을 피할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게다가 덕을 향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감각과 정신 안에서 활동하던 모든 악한 영향력 및 모든 악을 선동하는 악한 귀신들을 태워 없애듯이, 그는 모든 생각과 모든 상상을 멈출 것입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서 원수가 심어놓은 가시나무의 뿌리를 제거하는 사람은 귀신들에게는 두려움을 불어넣고,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기쁘게합니다"(Ch.8). 그러한 사람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받게 되며, 자신에게 완전히 스며들어 있는 은혜의 빛의 적극적인 나타남과 거룩한 은혜의 내주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면서 거룩한 세례의 은혜에 의해서 신비하게 주어진 영적 아들의 신분과 고귀한 지위를 회복할 것입니다. 성 이삭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예루살렘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눅 17:21). 이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들어가서 주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영광의 구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을 빛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61. 하나님의 영향력과 원수의 영향력


그러므로 자신이 추구하지도 않을 때에 정신이 빛을 본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마십시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은혜의 작용이 있습니다. 또 진리와 비슷한 모습을 취하는 악한 세력의 작용이 있습니다. 방심과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러한 현상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 진리를 범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저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유익한 것을 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고 판단하는 능력과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조언을 부탁해야 합니다."


 


62.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혜로운 교사에 대해서


거룩한 성경으로부터 배우고 신적 조명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가르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만일 그러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은 그러한 환상을 볼 자격이 없다고 간주하면서 겸손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신비하게 이러한 충고를 받았습니다. 또 부분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63. 참 조명과 거짓 조명, 즉 하나님의 빛과 원수의 속이는


교부들은 방심과 기만이 없는 조명의 상징들과 방심과 기만 자체인 조명의 상징들을 지적합니다. 라트로스의 폴(Paul of Latros)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의 빛은 마치 연기가 자욱한 불길과 같습니다. 정념들을 정복하여 깨끗해진 영혼은 그것을 미워하고 혐오합니다. 선한 영의 빛은 선하고 깨끗하며 기쁨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와서 빛으로 조명해주며 영혼에게 기쁨과 평안을 채워주어 온유하고 긍휼하게 만듭니다."


 


64. 적절한 상상과 부적절한 상상,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태


앞에서 옳지 못한 상상에 대해서 언급했었지만, 이제 그것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하며, 전반적으로 상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옳지 못한 상상은 마음으로 드리는 깨끗한 기도와 정신이 분심되지 않고 일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은 그것에 대해서 자주 다룹니다. 거룩한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며 악한 귀신들이 건너다니며 영혼과 교제하거나 섞이고 영혼을 벌집, 즉 정욕적이고 무익한 생각들의 거처로 만드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종종 회개와 통회, 애통함과 겸손을 위해서, 특히 이 혼란스러운 상상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원치 않아도 이러한 상상을 확실히 몰아내야 합니다. 또 질서정연한 상상으로 그것을 대적하며, 그 둘을 섞어놓아 서로를 대적하여 싸우게 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상상을 꺾고 승리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해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유익을 줍니다. 흠 없이 선하게 판단하여 사태를 처리함으로써 질서정연한 상상에 의해서 혼란스러운 상상을 죽이며 다윗과 골리앗처럼 원수에게 치명타를 가할 것입니다(삼상 17:49).


 


65. 순수한 기도와 단순하고 일치된 행동을 할 때에는 부적절한 상상뿐만 아니 라 적절한 상상도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어린아이나 초심자에게만 적절합니다. 여러해 동안 노력하여 진보한 사람들은 적절한 상상과 부적절한 상상을 모두 몰아내어 흔적도 남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밀랍이 불 속에서 녹듯이, 순수한 기도의 작용 아래서 정신이 영상이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과 연합함을 통해서 상상도 사라집니다. 헤시키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생각은 정신 안에 어떤 감각적인 대상의 영상을 만들어냅니다. 정신적인 세력인 원수는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감각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Ch.180) ; "모든 생각은 감각적인 것을 상상함으로써 마음에 들어오므로(또 감각적인 것들이 정신적인 것들을 방해하므로), 정신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완전히 형태들을 비우면 신의 빛이 정신을 비추어주기 시작합니다). 모든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한 정신 안에 이러한 조명이 나타납니다"(Ch.89). 대 바실도 같은 말을 합니다: "여호와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않듯이, 타락한 영혼을 성벽처럼 둘러싸고 모습을 드러내는 창상이나 정신적인 구조물(환상들) 안에도 거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직접 진리를 바라보면서도 거울이나 점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무력한 일입니다." 거룩한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인정되는 곳에서 하나님이 알려집니다. 그런 까닭에 깨끗한 정신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정신 안에 영상들을 남기는 생각들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영상도 남기지 않는 생각들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정신에 영상들을 새기는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성 막시무스는 위대한 디오니시우스의 글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상은 생각이나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그 움직임의 특성도 각기 다릅니다. 생각은 정신의 작용, 또는 산물입니다. 반면에 상상은 정념의 열매, 감각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나타내는 영상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상상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신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적인 사물들 사이에 흩어지지 않으며 감각에 의해서 세상을 이리저리 배회하지 않는 정신은 자체에게로 돌아오며, 자체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생각으로 올라갑니다. 이 아름다움에 의해 조명된 정신은 본성 자체를 망각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매 시간 환상이나 상상이나 영상이 없이, 완전한 정신과 영혼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 막시무스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6. 정신과 영혼과 마음의 완전함과 깨끗함에 관하여


깨끗한 정신에 관하여: "무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는 정신은 깨끗합니다."


깨끗한 영혼에 관하여: "정념들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끊임없이 기뻐하는 영혼은 깨끗합니다."


깨끗한 마음에 관하여 : "항상 형태나 영상이 없는 기억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인상들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더 자주 나타납니다."


완전한 정신에 관하여 : "모든 지식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간단히 조사해보고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들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은 정신은 완전합니다."


완전한 영혼에 관하여 : "갈망하는 힘이 완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영혼은 완전합니다."


완전한 마음에 관하여 : "어떤 사물이나 영상을 향한 본성적인 충동을 갖지 않은 마음은 완전합니다. 마음은 잘 연마된 돌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돌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십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정신에 관하여 : 성 디아도쿠스는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성령만의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정신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성 닐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정신의 참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든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사파이어나 천국의 모습 같은 그것을 볼 것입니다" ; "정신은 기도하는 동안에 성 삼위일체의 빛이 나타나는 천국의 높은 고지입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이 옛 아담을 버리고 은혜의 새 사람을 옷 입으면, 천국의 모습 같은 깨끗함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산위에서 나타나셨을 때에 이스라엘 자녀들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장소라고 부른 것입니다"(Ch.16).


공상이나 영상이 없이 깨끗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헤시카스트가 아니라 몽상가가 될 것이며, 포도가 아니라 가시를 수확할 것입니다.


 


67. 선지자들이 영상들에 의해서 환상을 본 방법


만일 선지자들이 본 이상과 영상과 계시 등이 공상이었고 자연 질서에 속하는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과거의 선지자들과 우리 시대의 거룩한 은둔자들은 자연 질서나 자연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하는 거룩한 방식에 의해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환상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의 정신이 분심되지 않고 깨끗할 때에,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능력을 통해서 그들의 정신에 영상들이 주어졌고 그들은 내면에서 발언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 "선지자들은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정신에 그들보다 탁월한 영상들을 남겼습니다." 신학자인 그레고리(Gergory the Theologian)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먼저 거룩한 천사들의 세력들 안에서 활동하셨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보거나 알고 있는 선지자들과 교부들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또 성령으로부터 영상들을 받은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미래를 예시했습니다." 깨끗한 기도에 대하여 성 닐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동안에는 정신을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만드십시오. 그렇게 하면 제대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On Prayer, Ch. 11): "기도하는 동안에 아무런 영상이나 공상도 없이 유지할 수 있는 정신은 복됩니다"(ibid., Ch. 117). 필로테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요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게로 이끌어가서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위로로 채우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또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 안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적극적으로 심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은 곧 기억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내면에 확고하게 심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이 기억은 세상의 염려에 의해 방해를 받지않으며, 정신은 우연한 정욕적인 충동들에 의해 어지럽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게서 도망하여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72. 정신의 무정념과 참된 기도는 다른 것입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휠씬 더 고귀합니다. 성 막시무스는 "정신이 다양하고 많은 관상을 행하지 않은 채 바르게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정념들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닐루스의 말에 의하면, 정신은 정념들로부터 자유하면서도 참된 기도를 소유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에 의해 분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머물 수 있습니다. 닐루스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정념을 성취한 사람들 모두가 참된 기도를 소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도 여전히 (사물에 애착하는 정욕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그것들의 이야기(또는 그것들의 영상들과 다양한 관계들)에 의해 분심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Ch.56): "그러나 정신이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들에 매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 기도의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러한 것들에 관한 (철학적) 사변에 사로잡혀 그것들의 우연한 관계들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추상개념들이지만 사물에 대한 생각이므로 정신에 영상을 남기며, 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정신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색 합니다: 이것은 학자의 상태입니다)"(Ch.57).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배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왕의 귀를 소유한 사람들처럼(즉, 가장 신뢰받고 가까운 종들처럼) 주님과 대면하여 대화합니다."


이러한 말들을 토대로 하여, 두 가지 방식의 삶과 행동의 정확한 차이점을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영향력 아래서 사는 삶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의 능력에 의해 조직되는 삶입니다. 전자의 활동은 학습과 다양한 정신적 사색이요, 후자의 활동은 참된 기도입니다. 또 정신의 무정념과 참된 기도는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참된 기도를 소유한 사람은 무정념한 정신을 소유하지만 무정념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 참된 기도를 소유한다고는 말할 수없습니다.


 


73. 정신의 상상과 공상, 그리고 방심과 기만의 상징과 진리의 상징에 대하여


방심과 기만의 상징들 침묵하며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면서도 내면이나 외부에서 그리스도나 천사의 얼굴이나 어느 성인의 모습이나 어떤 빛나는 형상 등 감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본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기 전에는 비록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해도 믿지 마십시오. 그러한 행동은 가장 실질적이고 유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입니다. 언제나 정신에서 색깔, 영상, 형태, 특성, 모습 등을 비우고 오로지 기도하는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그것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배우십시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의 출발점은 생각들이 나타나는 즉시 몰아내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간 단계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기도의 표현에 정신을 담아두는 것입니다. 기도의 완성은 주님께 매료되는 것입니다"(Ch.28). 성 닐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사람들이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정신이 미료되어 모든 감각적인 것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십니다"(롬 8:26).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펼친 책처럼 들여다보시며 그 안에 기록된 소리 없는 기호들에 의해서 마음의 소원을 암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그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고후 12:2).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행 10:9). 이 단계보다 낮은 기도의 단계는 통회하는 정신이 기도의 대상을 의식하면서 단어들을 발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염려들에 의해 방해를 받고 그것들과 섞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계가 아닙니다." 정욕적인 정신이 정복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말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십시오.


진리의 상징들, 진리의 상징, 생명을 주는 성령의 상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 사도 바울은 이러한 덕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이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은 방심과 기만의 속성 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은 구원에 대해는 바른 길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도 많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도 많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길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계명들 안에서 모든 종류의 덕, 겸손과 사랑과 자비를 발견할 것인데, 이것들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마귀를 대적하는 확실한 무기입니다. 성 삼위께서는 우리에게 겸손과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마귀들의 군대는 그것을 보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겸손의 흔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허영심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불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인류를 계속 증오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는 그들에게 사랑이나 자비의 그림자라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무기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 무기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원수에게 잡히지 않습니다. 성 삼위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이 세 가닥으로 된 밧줄은 셋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명칭과 형태는 셋이지만, 능력과 작용,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끌어가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주며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도와주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입니다. 주님은 그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아니로다' (요일 5:3)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살고 계명을 지키고 이 세 가지 무기를 취함으로써 하나님과 융합된 영혼은 하나님으로 옷 입게 되며, 겸손과 자비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됩니다. 영혼은 유형적인 이원성을 초월하고 율법의 완성인 사랑 너머로 올라가서 빛을 받아들이는 빛에 의해서 초본질적이고 생명을 주시는 삼위일체와 연합하고 직접 대화하며, 한결같고 영원한 기쁨을 누립니다."


지금까지 방심과 기만, 그리고 진리의 상징과 열매를 부분적으로 지적했습니다. 이제는 이것들이 주는 위로에 대해서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즉 은혜에서 오는 거룩한 위로와 원수에게서 오는 거짓 위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거룩한 디아도쿠스는 그것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4. 거룩한 위로와 거짓 위로에 대해서


"정신이 성령의 복된 위로를 느끼기 시작하면, 사탄도 영혼이 밤에 쉬는 동안, 막 잠이 들기 시작하여 기분 좋게 느낄 때에 영혼 안에 사탄의 위로를 슬그머니 밀어 넣습니다. 만일 그 순간에 정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방심과 기만을 대적하는 확실한 무기로 사용한다면, 이 교활한 미혹 자는 즉시 물러가지만 마지막에는 (생각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의 인격으로 영혼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악한 자의 기만적인 방심과 기만들을 정확히 분별하면서 영적인 것들을 분별하는 한층 더 큰 경험을 하게 됩니다"(Ch.31).


"복된 위로는 육신이 깨어 있을 때, 또는 잠이 들어서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매달릴 때에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거짓 위로는 우리가 약간 졸린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을 강력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에 임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위로는 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영혼을 충성한 감정의 발로 속에서 하나님 사랑을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사탄에게서 오는 위로는 방심과 기만의 바람으로 영혼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어느 정도 깨어서 하나님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육신이 잠든 동안에 기분 좋은 것을 맛보게 함으로써 감정들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에 맑은 정신으로 우리 주 예수를 기억하면, 겉으로는 기분 좋은 것처럼 보이는 원수가 내쉬는 숨은 즉시 사라지고, 정신은 칭찬받을 만한 영적 경험 안에서 은혜에 의해서 그것들 대적하는 무기를 부여받아 기꺼이 그것을 장악하게 됩니다"(Ch.32).


"영혼이 망설이거나 헛된 꿈을 꾸지 않고 거룩한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며 육신을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사랑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거룩한 은혜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이 깨어 있거나 잠들 때에 자신이 갈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성령의 작용입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달콤함에 대한 복된 의식이 차고 넘쳐흐르게 된 영혼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끝없이 기뻐합니다. 만일 이렇게 고무된 정신이 의심으로 인한 혼란이나 더러운 생각의 공격을 받을 때에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나아가는 대신에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악을 대적하는 무기로 사용한다면, 그러한 위로는 미혹 자에게서 오는 것이요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영혼의 특성도 아니고 영속적인 성향도 아닙니다. 원수는 영혼으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만일 정신이 자신의 느낌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원수는 영혼이 선한 것처럼 보이는 위로에 현혹되어 자신이 미혹 자와 섞이고 있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선한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위로로 영혼을 위로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식들에 의해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요일 4:6)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자기의 정신 깊은 곳에 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누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없고 또 귀신들의 뻔뻔스러움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한편, 악한 영들은 마음의 지체들 주위에 둥지를 만듭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정신이 이 지식을 확실하게 소유하며 하나님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 영원이 그들을 대적하여 무장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33).


이제 이것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습득했습니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잠 24:16)라고 말한 지혜자의 충고처럼 그 정도에 만족하십시오.


 


75. 마음에서 솟아나는 거룩한 기쁨에 대해서


누가 꿀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꿀의 단맛을 설명하겠습니까? 거룩한 기쁨과 살아있는 기쁨의 초본질적인 샘, 깨끗한 마음의 기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증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76. 이 영적 달콤함에는 여러 가지 표식이 있지만 이름은 없습니다.


이 영적 달콤함, 초본질적인 생명의 샘은 본질적인 빛과 광채,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 갈망 중의 갈망,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비한 신화(神化)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경험하고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도 일부는 알 수 없으며, 어느 정도 이해한 후에도 일부는 불가해합니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빛을 초월하는 이 어두움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보지 않음(non-vision)과 비지식(non-knowle -dge)을 통해서 시각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분을 보고 알기 위해서, 즉 그분의 불가시성과 불가지성을 보고 알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된 특성을 부인함으로써 초본질적인 것을 보고 알며,초본질적으로 그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 "신적 어두움은 접근할 수 없는 빛입니다. 우리는 초본질적으로 빛나시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이 나타나시기 때문에 볼 수없는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과 아는 것을 허락받은 모든 사람은 이 어두움 속에 거합니다. 그것은 그가 참으로 보거나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시각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분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그분이 정신과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한계를 초월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표현할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새벽의 밝음이나 달빛의 깨끗함이나 햇빛의 찬란함에 이름을 붙인다 해도, 그것들은 참 빛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깊은 밤과 어두움이 한낮의 밝은 빛에게서 먼 것처럼 멀리 제거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오직 영혼과 생각만 접근할 수 있는 이 아름다움의 조명을 받고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갈망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세상 생활에 싫증을 느껴서 다음과 같이 소리칩니다: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을꼬' (시 42:2)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2);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거룩한 갈망에 접촉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현세의 삶의 압박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기울이는 노력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충족되지 않는 갈망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일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도했습니다" (vol.5, p.100).


또 신학자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계명을 지킵니다. 계명을 지키면 육신이 정화됩니다. 즉 영혼을 덮고서 거룩한 광선을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하는 구름이 제거됩니다. 육신이 정화되면, 빛이 솟아나오며, 빛이 비추면 모든 갈망들을 초월하는 갈망이 성취됩니다. "니케아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삶에 대한 열심에 의해서 마음에 붙은 더러움을 씻어버리면, 경건한 아름다움이 당신 안에서 빛날 것입니다. 녹슨 쇠를 연마하여 녹을 제거하면 빛나고 반짝이며 태양빛을 반사하듯이, 악한 자의 더러움으로 말미암아 눈동자에 낀 더러운 것을 제거한 우리의 속사람도 원래의 형상을 되찾습니다." 성 닐누스는 "기도와 뗄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이해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깊은 슬픔은 위로를 낳고, 깨끗한 마음은 조명을 받습니다. 이 조명은 보지 않고서 보며 앎이 없이 알게 해주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Ch.7,55).


그러므로 옛날 마리아처럼 좋은 편, 즉 영적인 생활 방식을 선택한 사람, 그리하여 큰 기쁨이 가득한 거룩한 운명을 허락받아서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은 세 배나 복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 :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은 위와 같이 말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해서 살기를 기원합니다.


 


 


77. 침묵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마음이 온유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 먼저, 또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화살을 쏘는 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분명한 과녁이 있을 때에만 활시위를 당겨야 하듯이, 침묵의 실천에 대해 배우려는 사람도 온유한 마음을 과녁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 이시도어(St. Isidore)는 이렇게 말합니다: "덕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덕을 위해 노력할 때에 적절한 한도를 지키는 것(또는 한 종류의 일과 행동을 다른 일이나 행동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온유함을 실천하다가 어떤 반항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그것을 중지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구원을 얻기를 원하면서도 그것으로 인도해주는 일을 행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시도어 보다 훨씬 앞서서 다윗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시 25:9). 또 시락은 "하나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고 말했습니다(집회서 3:19). 또 가장 사랑스러우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회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땅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열매를 맺을 것이며 (초심자와 진보한 사람과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지위에 따라서 어떤 사람의 마음은 삼십 배, 어떤 사람의 마음은 육십 배, 또 어떤 사람은 백 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가 아니고는 결코 괴로워하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78. 온유함을 얻는 방법: 영혼의 세 가지 능력(흥분하는 능력, 갈망하는 능력, 그리고 추론하는 능력)에 대하여


만일 당신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내쫓고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향하도록 압박한다면, 만일 당신이 말을 적게 하고 음식을 삼가며 항상 기도한다면. 당신은 쉽게 노염을 없애고 온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의 도발적인 부분을 사랑에 의해서 억제하십시오. 금욕에 의해서 갈망하는 능력을 정복하고, 기도에 의해서 추론하는 부분에 날개를 달아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정신의 빛이 결코 흐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 "노염을 억제하는 고삐는 시기적절한 침묵이요, 어리석은 욕망을 억제하는 고삐는 빈약한 음식이요, 통제되지 않는 생각들을 제어하는 고삐는 성실한 기도입니다" ; "세 가지 덕은 정신을 드러내 줍니다. 사람들에게서 악한 의도를 보지 말고, 당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당황하지 말고 견디며, 악은 행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이 세 가지 덕은 그것들보다 한층 더 큰 세 가지 덕을 낳습니다. 악한 의도를 보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낳고, 닥치는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은 온유함을 낳고,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화평을 낳습니다" ; "수도사에게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행동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정욕적인 생각이 영혼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인의 얼굴이나 당신에게 범죄한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정신을 정념이 없이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79. 타락한 후에는 속히 회개함으로써, 또 다른 유혹에 대비하여 자신을 튼튼하 게 해야 합니다.


혹시 이따금 불안하거나, 어떤 충동이 생기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즉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당신이 어떤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속히 화해해야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전심으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매사에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장래를 대비하여 자신을 튼튼하게 한 후에, 지혜롭게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 31,32);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 19):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이기라"(롬 12:21). 이것들은 서로 화해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80. 잘못을 범하는 것과 회개


성 이삭은 잘못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잘못을 범한 것을 슬퍼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무감각해지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들도 종종 잘못을 범하지만, 동일한 잘못 안에서 무감각해치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에 느끼는 슬픔은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한 행위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의지하고서 두 번째로 잘못을 범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라던 덕행을 성취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망이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Ch.90) ; "하루 24시간 동안 항상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회개'라는 단어는 '지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청원하며, 통회의 기도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면서 과거를 간과해 주실 것을 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미래를 보호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기도 합니다"(Ch.47). "세례의 은혜에 추가되는 은혜로서 회개가 주어졌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두 번째 탄생입니다. 그 은사, 우리가 믿음에 의해 받은 것에 대한 약속은 회개에 의해서 획득됩니다. 회개는 부지런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문, 자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문을 통해서는 이 자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롬 3:23,24), 회개는 두 번째 은혜이며, 마음 안에서 믿음과 두려움에서부터 태어납니다. 두려움은 아버지의 매로서, 우리가 영적 낙원을 획득할 때까지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가 영적 낙원을 획득하면, 두려움은 우리에게서 떠나갑니다. 낙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모든 복을 누리게 해줍니다"(Ch.83) : '배나 보트가 없으면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없듯이, 두려움이 없으면 사랑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내면의 낙원 사이에 놓인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바다는 회개의 보트를 타고서 두려움이라는 노를 저어야 건널 수 있습니다. 만일 두려움이 회개의 보트를 추진하여 이 세상의 바다를 건너 하나님께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냄새나는 바다에 빠질 것입니다"(Ch.83).


 


81. 회개, 두려움, 사랑, 애통함, 눈물, 자책 등에 관하여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개는 배요, 두려움은 배의 조타수이며, 사랑은 거룩한 항구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회개의 배에 승선하게 하고, 인생이라는 냄새나는 바다를 건너서 거룩한 항구, 즉 사랑에게로 데려갑니다. 회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항구로 옵니다. 사랑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께 도착하게 되고, 항해는 끝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거하시는 다른 세계의 섬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Ch.83).


하나님을 찾는 슬픔에 대해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십니다. 성 이삭은 눈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흘리는 눈물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받아들여졌으며 눈물을 통해서 깨끗한 영역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상징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세속적인 생각들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면, 만일 세상적인 희망을 버리며 세상을 멸시하지 않는다면, 만일 이 세상으로부터의 의로운 이별을 준비하지 않으며 장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을 것입니다. 눈물은 분심됨이 없이 깨끗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빈번하고 확고하게 내면에 거하는 생각들, 정신 속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것에 대한 기억,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주는 기억 등으로부터 한없이 흘러나옵니다"(Ch.30).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나무를 태우듯이, 깨끗한 눈물은 눈에 보이는 더러움과 정신적인 더러움을 모조리 태웁니다"(Ch.7),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깊이 생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방심과 기만이 없는 깨끗한 눈물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눈물이 있으면 더 이상 약탈이나 자화자찬이 없고 오직 죄와 정욕됨을 깨끗이 해주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정화와 진보만 있습니다"(ibid); "정념들로부터 완전히 정화되기 전에는 당신의 눈물의 근원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방금 포도주 틀에서 나온 포도주는 신뢰할 수 없는 법입니다"(ibid.), "두려움에서 나오는 눈물은 두려움에 의해 보존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큰 불이 붙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겨나는 눈물은 쉽게 사라집니다. 두려움에 의한 눈물이 사랑에 의해 흘리는 눈물보다 오래 견딥니다."


 


82. 지혜롭고 신중하게 자기의 길을 유지하며 집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집중과 신중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또 성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 지혜여, 그대는 참으로 놀라우며, 멀리 내다보고 신중합니다. 지혜를 획득한 사람은 복됩니다. 그는 청년의 부주의함에서 해방됩니다. 적은 비용으로 큰 정념들을 치료하는 것은 훌륭한 행동입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행동, 아주 작은 행동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큰 평화라는 보물을 얻습니다. 그는 불길한 것이 자신에게 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잠을 자지 않으며, 그 원인들을 미리 제거합니다. 그는 작은 일에서 작게 고난을 함으로써 큰 고난을 피합니다." "깨어 당신의 삶을 지키십시오. 정신의 잠은 참된 죽음과 비슷합니다." 복된 바실은 "작은 일에 부주의한 사람이 큰 일에 열심을 낼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Ch.75).


 


83. 침묵을 실천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특히 온유하고 고요하며 마음에서 나오는 깨끗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크게 주의하며, 특별히 고요하고 온유하게 지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추진해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영혼 안에 머물 것입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여움, 자만, 위선, 원한 등에 빠진 사람은 침묵의 가장자리에도 접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념들이 없이 깨끗한 사람은 결국 무엇이 유익한지 스스로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완전히 혼자 힘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Ch.27).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영혼 안에 머물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혼도 과거에 영혼을 괴롭히게 부담을 주던 모든 것-귀신들과 정념들-에서 벗어나서 편히 쉴 것입니다. 비록 그것들이 계속 영혼을 괴롭힌다 해도, 아무런 결과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은 더 이상 그것들의 편을 들지 않고 그것들 안에 담긴 쾌락을 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84. 하나님에 대한 순수하고 몰아적인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거룩한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러한 사람의 경우, 마음에서 우러난 몰아적 사랑과 모든 성향은 초본질적이고 지극히 복된 하나님의 아름다움, 거룩한 교부들이 갈망의 모든 대상들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향합니다.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로운 사랑(즉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을 덮으면, 영혼은 모든 형태의 전쟁(즉 영혼을 유혹하려는 시도들)을 비웃게 되며, 큰 고통도 아픔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기쁨이 됩니다" : "하나님의 아름다움보다 더 놀라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생각이 무엇입니까? 모든 악을 깨끗이 씻어버린 영혼 안에 하나님이 심으신 것보다 더 뜨거운 영혼의 갈망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영혼은 내면 깊은 곳에서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 2:5)고 외칩니다."


 


85. 싸움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에 관하여


그러한 사람도 영적 싸움을 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지만, 학습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가시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얻은 축복들 때문에 정신이 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공격에 의해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를 공격하는 것들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큰 복을 받아 인간의 본성으로써 가능한 한도까지 전진할 수 있습니다. 또 육체라는 피할 수 없는 족쇄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과 무정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이 거룩한 천사들의 거처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눅10:18).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한 종들과 교제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진 사탄이 어찌 인간의 정신이라는 거처를 하나님과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하나님의 뜻이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논거는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학습을 위해서 하나님이 떠나실 때에 영혼은 결코 하나님의 빛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혼이 정신의 악한 영향력에 복종할 때에는 은혜가 정신으로부터 모습을 감춥니다. 이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기 위해서 귀신들의 증오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기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 젖을 빠는 적절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엄마는 아기를 잠시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아기는 주위에 있는 낯선 사람이나 동물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어머니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뻗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귀신들에게 넘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젖을 먹고자라며, 극히 드물게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기도 하지만 종종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엡 4:13) 도달해야 합니다"(Ch.86)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영혼 안에 있는 허영심과 갈망을 모두 죽이기 위해서, 영혼을 적절히 겸손한 상태로 몰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떠나시고 영혼이 홀로 남겨지면 큰 슬픔, 가치가 저하된 느낌, 그리고 어느 정도 무력함이 임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며 가장 탁월한 침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고 떠나가시면, 영혼은 절망과 불신, 오만과 노염으로 가득 찹니다. 하나님이 학습을 위해서 영혼을 홀로 남겨두시는 것과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고 떠나시는 것에 대해서 알았으므로, 우리는 각각의 특성에 따라서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위로를 빼앗아감으로써 우리의 제멋대로 행하는 성향을 자비로이 징계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맹세해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전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돌보시게 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홀로 고독하게 지내야 합니다. 또한,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사탄과 싸우게 하실 때에는 비록 모습을 감추기는 했지만 은혜가 은밀하게 영혼을 도우면서 영혼이 반드시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것을 원수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Ch.87).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가 지혜롭게 되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튼튼해지는 일은 우리가 겪은 시련의 강도에 비례합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서 자부심의 흔적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즉시,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달려가서 하나님을 붙들 때까지 그를 대적하는 시험이 자라서 힘을 얻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신뢰에 의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며, 사랑으로 올라갑니다. 사람이 희망을 죽이는 환경에 처해 있을 때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심으로써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결코 쉽고 자유로이 하나님의 능력을 배울 수 없으며, 하나님은 침묵의 땅과 광야에서, 많은 무리와 소문이 없는 장소에서만 활동하십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소문이 무성하기 마련입니다'(Ch.49)


 


86. 무정념에 대해서; 인간의 무정념이란 무엇인가?


무정념과 완전함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대 바실은 무정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불완전하게라도 하나님의 무정념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 영적 고결함과 평온함과 고요함과 온유함에 참여하며, 그것들에게서 생겨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혼을 괴롭힐 수도 있는 모든 유형적인 정념들로부터 생각을 멀리 이끌어가며 흐릿하지 않은 분명한 눈으로 거룩한 것들을 보며, 거룩한 빛을 즐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습관과 성향을 영혼 안에 심은 사람은 하나님처럼 됩니다. 그리고 용감하게 이 크고 어려운 일을 시작하여 유한한 본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육욕적인 정념들의 혼합물들을 벗어버린 깨끗한 생각을 보냄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그를 하나님은 환영하십니다.


인간의 무정념에 대해서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정념이란 정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이든지 감추어진 것이든지 성도들이 획득한 여러 가지 다양한 덕들 덕분에, 정념들은 그들 안에서 힘을 잃으며, 쉽게 영혼을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생각은 정념들에게 주의를 집중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시간은 온통 의식적으로 정신 안에서 활동하는 가장 완전한 관상을 생각하고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정념들이 움직이지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행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빛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를 썼으므로, 어두운 귀신들의 세력들을 쫓아버릴 것입니다. 장래에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깨끗함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선을 향한 진정한 열심에 의해서 자신에게서 악을 근절해야 합니다"(Ch.98). 성 막시무스는 네 종류의 무정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를 향한 육적인 충동을 행동으로 옳기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무정념입니다. 두 번째 무정념은 영혼의 정욕적인 생각들을 완전히 부인함으로써 정욕적인 충동들이 작용하도록 자극을 받지 않고 시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무정념은 정욕적인 욕망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통은 두 번째 무정념, 즉 깨끗한 생각 안에 위치합니다. 네번째 무정념은 정욕적인 상상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욕적인 심상들을 제공하는 감각적인 상상이 전혀 없는 것으로서, 세 번째 무정념을 발생시기키도 합니다" : "무정념은 영혼의 평화로운 성향으로서, 이것이 있으면 영혼이 쉽게 악으로 이동하지 못합니다."


 


87. 무정념과 완전함


에프렘은 무정념과 완전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념이 없는 사람들이 바라는 가장 높은 선을 향해서 만족을 모르고 나아가면 완전한 것을 불완전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복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에 따라서 판단해보면 완전은 유한하거나 완전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증가하고 하나님을 향해 오름으로써 영원히 더 높나 자극을 받기 시작하면, 정신은 갑자기 자기 안에 들어온 거룩한 것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 그것들을 피하므로 정념들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 마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덕행을 실천하여 지식에 가까이 가면, 영혼의 가장 어리석고 악한 부분에서 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지식이 영혼을 높이 날아오르게 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내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이 오랫동안 침묵을 실천하여 육체가 시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은 순결함, 예리한 통찰력에 의해서, 그리고 행위에 의해서 정화되고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 각 사람에게 관상이 쉽고 신속하게 임하여 그들 안에 거하면서 놀랍게도 그들을 관상하는 대상의 깊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 상태에서 그들의 내면에서는 관상이 크게 증가하며, 그들은 보다 고등한 이해의 주제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내면에는 성령의 열매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오래 경험하면 영혼 안에서 정념들을 선동하는 기억들이 마음에서 지워지며, 마귀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영혼이 다른 관심사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념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정념들의 세력이 영적인 느낌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Ch.48). 거룩한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정념이란 귀신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야할' 것입니다(고전 5:10). 무정념은 공격을 받았을 때에 정복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옷을 입은 용사들처럼 원수들의 공격을 받고 날아오는 화살 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지만, 갑옷의 힘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칼에 의해 보호를 받는 용사들은 전쟁터에서 힘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성 닐루스도 완전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합니다: "세속적인 것과 영원한 것 등 두 종류의 완전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신적인 완전함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바울은 두 종류의 완전함을 알고 있으며, 한 사람이 동시에 완전하기도 하고 불완전하기도 하다고 간주하여, 현세와의 관계에서는 완전하고 내면에 내재하는 참된 완전함과의 관계에서는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빌 3:15)."


 


88. 정념, 주색, 애착, 무정념 등에 관하여


성 엘리아스 에크디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몸에 속한 악하거나 죄악된 것은 정념이고, 영혼에게서 악하거나 죄악된 것은 주색(酒色)이며, 정신에게서 악하거나 죄악된 것은 애착입니다. 정념은 접촉에 의해서 드러나고, 주색과 애착은 다른 감각들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 즉 무정념은 반대되는 성향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 '주색에 빠지는 사람은 정욕적인 사람과 근접하며, 애착하는 사람은 주색에 빠지는 사람과 근접합니다. 무정념한 사람은 이것들 모두를 멀리 합니다"(Ch.71).


 


89. 정욕적인 사람, 주색에 빠지는 사람, 애착하는 사람, 그리고 무정념한 사람: 그들 모두를 다루는 방법


엘리아스 에크디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욕적인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아직 범죄하지 않지만 내면에서는 생각보다 죄의 매력이더 강합니다. 주색에 빠지는 사람은 내면에서 정욕적으로 죄악된 갈망을 맛보지만, 죄악된 행동(범죄하려는 욕망)이 생각보다 약합니다. 전자나 후자와 거리낌 없이 예속될 때에, 사람은 애착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충동이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사람(그것들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무정념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정념은 금식과 기도에 의해서 영혼에서 몰아내고, 주색은 말을 삼가는 것과 철야에 의해서 몰아내며, 애착은 침묵(독거)과 주의 집중에 의해서 몰아내며, 무정념은 하나님을 기억함을 통해서 확립하십시오"(Ch.12,73).


 


90.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처음이요 중간이요 나중입니다. 또는 모든 덕과 축복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세 가닥으로 짠 거룩하게 한 밧줄을 이루며, 사랑이라고 불립니다(요일 4:8). 그러므로 그것들을 언급함으로써 이 글에 부족한 것을 채우지 않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특히 성 이삭은 "사람이 완전한 사랑을 획득하면 성령의 열매가 익습니다"라고 말합니다(Ch.21). 이에 대해서 거룩한 교부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을 연결하고 결합하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 입니다(고전 13:3). 이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요일 4:8). 나는 믿음은 광선이요 소망은 빛이요 사랑은 원반이지만, 이 세 가지가 함께 하나의 빛나는 광휘를 이룬다고 이해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소망을 둘러싸서 부끄럽지 않게 합니다. 사랑은 부족함이 없이 쉬지 않고 흐르며, 또 사람이 사랑에 싫증을 느껴 그 복된 도취 상태를 연기하지도 않습니다'(Ch.30); "사랑의 말은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만, 조명의 행동에 의해 알려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경계를 세우려 하는 사람은 깊은 바다에 있는 모래알을 세려고 하는 소경과 같습니다. 속성에 있어서 사랑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도까지 하나님을 닳는 것이며, 행동에 있어서는 영혼의 도취 상태이며, 특성에 있어서는 믿음의 근원이요오래 참음의 심연이며 겸손의 바다입니다. 사랑은 모든 반대되는 생각을 부인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전 13:5). 사랑, 무정념, 아들 됨 등은 명칭 상으로만 다릅니다. 빛과 불과 불길이 하나의 활동 안에 결합되는 것처럼 이 세 가지도 그렇습니다"(Ch.5-9).


성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영적 관상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우위에 두되, 사랑을 가장 우위에 두십시오. 믿음과 소망은 눈에 보이는 축복들을 무시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 반해, 사랑은 덕을 통해서 영혼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정신적인 인식에 의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이해합니다"(Ch.7) : "본성적인 사랑이 있고, 성령이 영혼에게 부어 넣어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의 갈망에 비례하고 또 그것에 의해 움직이므로, 우리의 의지가 그 안에 거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면 쉽게 악한 영들에 의해 약탈됩니다. 그러나 후자는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므로, 영혼의 모든 부분이 단순한 목적을 가지고서 이 거룩한 사랑의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에 매달립니다. 그 때에 영적 은혜의 활동에 의해서 풍부해진 정신은 사랑과 기쁨의 격류를 내보냅니다. "성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적인 것에 의해 야기된 사랑은 기름을 연료로 하는 등불이나 비가 오면 흐르고 비가 오지 않으면 흐르지 못하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은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과 같아서 쉬지 않고 흐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이 사랑의 근원이며, 결코 부족해지지 않는 양식이시기 때문입니다"(Ch.30).


성 이삭은 "여러 가지 성령의 열매들을 성숙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사랑이 완전한 사랑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을 획득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정신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소생하면, 즉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타오르며 눈물이 한없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쉬지 않고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잘 때에도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러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Ch.2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격렬하며, 그 사랑이 넘쳐흐르게 되면 영혼은 몰아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채우는 사랑의 특성에 따라서 특별하게 변화됩니다. 그 때에 감지할 수 있는 표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즐거운 표정을 짓게 되며 몸이 뜨거워집니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엑스타시 상태에 놓은 사람처럼 됩니다. 정신을 집중시켜 주는 힘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됩니다. 그에게는 끔찍한 죽음도 즐거운 것이 되며, 거룩한 것들에 대한 정신적인 관상이 계속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부재할 때에도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것처럼 대화합니다. 당연히 그의 지식과 시각이 멈추며, 그는 감각적인 대상들 사이에서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의 정신은 관상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의식하지 못하며, 그의 생각은 항상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옛날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이러한 영적 도취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사도들은 사역하고 박해를 받으면서 온 세상을 여행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사지가 잘리고 피를 물같이 흘리며 끔찍한 고문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모든 일을 견뎟습니다. 지혜로운 그들은 어리석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밖에도 어떤 사람들은 사막이나 산이나 동굴이나 절벽을 방황하면서 온갖 무질서 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무질서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Ch.73),


 


91. 깨끗한 양심으로 자주 성찬에 참여하는 데서 오는 거룩한 교제와 축복


영혼의 정화, 정신의 조명, 몸과 성화, 몸과 정신의 거룩한 변화, 그리고 정념들과 귀신들을 몰아내는 것, 하나님과의 초본질적인 연합 및 그분과 결합하고 섞이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거룩하고 순수하고 불멸하여 생명을 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 하나님의 귀한 몸과 피의 성찬에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도까지 되도록 순수한 마음과 성향을 가지고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거룩한 성찬에 참여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 교부들이 많으며,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48,50,51),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 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 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3-8).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에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3-32).


 


92. 성찬의 기적에 대해서, 즉 성찬은 무엇인지, 그것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무슨 유익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찬의 기적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으며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몸이 하나이요'(엡 4:4),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30)고 말합니다. 초보자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려면, 그 몸과 연합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자신의 큰 사랑의 증표로 주신 양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주님은 우리와 연합하시고 자기의 몸을 우리와 섞으셨으므로, 몸과 머리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듯이 우리도 그 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크신 사랑의 표식입니다. 욥은 그를 무척 사랑하여 그의 몸과 결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을 가리켰습니다: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욥 31:1). 그들은 그를 향한 자기들의 큰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인도하여 자신과 연합하게 하시며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주님을 볼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살을 만지고 맛보고 깨물고, 주님과 연합하며 주님을 통해서 모든 소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Discourse on john, 46) ; "이 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영적 무기로 무장하고서 천사들과 천사장들과 다른 높은 세력들과 함께 섭니다. 그들은 왕이신 분 자체를 옷 입습니다. 이 신비가 크고 놀랍기 때문에, 만일 깨끗하게 그것에 다가가면 구원을 위해 그것에 접근하지만, 만일 양심이 악하면 형벌과 괴로움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 11:29). 만일 왕의 옷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그 옷을 찢는 사람들과 동일한 형벌을 받는다면, 더러운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못 박은 사람들과 같은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에 대해서 말하는지 보십시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 28,29)" ;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실 때에, 우리는 높은 곳에 앉아 계시며 천사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 불멸하는 힘 가까이에 계시는 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기의 몸으로 만드셨고 자기의 몸을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악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맹목적이고 무감각한 우리들입니다"(에베소서에 관한 세 번째 설교), "어느 훌륭한 장로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만일 임종하려는 사람이 깨끗한 양심으로 성찬을 받는다면, 죽은 후에 이 성찬 때문에 천사들이 그를 맞이하여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보았다고 합니다."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존재이므로, 우리의 탄생 또한 이중적이며 우리의 양식도 복합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물과 성령에 의한 탄생이주어지며, 우리의 양식은 생명의 떡, 즉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물로 씻고 기름을 바르므로, 주님은 성령의 은혜에 물과 기름을 결합하셔서 영생의 욕실로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흔히 떡을 먹고 물과 포도주를 마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본성적인 것을 통해서 본성을 초월하는 상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것들은 자신의 신성과 결합하셔서 자기의 몸과 피로 만드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던 몸이 내려오시기 때문에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우리 주 하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기 때문에 몸은 진실로 신성과 결합됩니다. 주님이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만드셨던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이러한 일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효과적이고 전능하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하며, 수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죄 사함이요 영생이며, 영혼과 몸의 보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합당하지 못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저주이며 주님의 죽음과 같은 괴로움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요 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과 몸을 튼튼하게 해줍니다. 그것들은 소진되지도 않고 썩지도 않으며, 우리를 보호해주고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해줍니다. 그분에 의해서 정화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영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이 떡은 초본질적인 장래의 떡의 출발점입니다. '초본질적'인 것이란 장래의 떡, 즉 장래의 삶의 떡을 가리키거나 현재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받는 떡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을 주는 성령에게서부터 잉태되었으므로,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입니다. 이것은 몸의 본질을 부인하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요 신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말입니다." 그 장 마지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몸과 피는 앞으로 올 것의 상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것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리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는 정신적으로 행할 일은 지금은 정신을 통해서 그분을 관상함으로써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주가 몸의 모든 지체들을 통과하여 흐르면 포도주는 그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은 포도주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분이 영혼 전체에 퍼지면 영혼은 완전히 그분 안에 거하여 성화되어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 합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되게 성찬에 참여하여 덕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안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며, 그리하여 합당하게 된 영혼들은 생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몸의 생명이 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즉 흙에게서 오듯이, 하나님은 영혼이 고기와 마실 것과 의복을 소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혼 자체의 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영과 빛에게서 오는 생명을 영혼에게 줍니다. 신성에는 생명의 떡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나는 생명의 떡이요'(요 6:35) 생명수요 즐거움을 주는 포도주요 기쁨의 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 이시도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의 나라에 참여하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닐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들이 두려움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을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 바실은 가이사랴에 보낸 편지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매일 성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요 6:54). 끊임없이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풍성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과 금요일과 토요일에 네 차례 성찬을 행하며, 성인들을 기념하는 일에도 성찬을 행합니다"(Vol. Vl, Letter 89). 이 성인은 걱정이 많아서 매일 전례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네번 성찬을 행했다고 생각됩니다.


성 아폴로스(51. Appolo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수도사들은 매일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찬을 멀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항상 성찬을 받는 사람은 항상 구주를 자기 안에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요 6:56). 수도사들은 성찬에 의해서 항상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기 때문에,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수도사들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또한 그들은 날마다 성찬에 참여하여 죄사함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 성 아폴로스의 제자들은 항상 이 규칙을 지켰습니다. 사다리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다른 몸과 접촉하는 몸이 그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면, 깨끗한 손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는 사람이 어찌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Ch.28). Hierondic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을 다스리는 능력을 소유한 거룩한 사람 보스트로스의 존이 귀신들린 처녀들 안에 살면서 날뛰는 귀신들에게 너희들에 기독교인들에게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귀신들은 '당신은 세 가지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들의 목에 걸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에서 당신들이 씻는 물이고, 셋째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들이 나누어 먹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인은 다시 '그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는데, 귀신들은 '만일 당신이 공동체에서 나누어 먹은 것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인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치명적인 원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십자가와 세례와 성찬입니다."


 


93. 요청하는 사람에게 준 상세한 설명과 개인적인 권면의 결말


사랑하는 자녀여,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당신의 요청을 허락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정확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일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배우는 일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수고할 뿐만 아니라, 실제의 행동에서 지혜를 향한 당신의 열심과 사랑을 증명하십시오. 주님의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94. 교부들의 신령한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방법


우리는 우선적으로 교부들이 정한 거룩하고 신령한 법을 바르게 듣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인 주제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신실한 영혼은 성령의 참여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성령의 거룩한 보물들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것들에 입문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들으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당신은 영혼의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현세에서 어떤 축복과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곧 당신이 읽은 것과 들은 것이 크게 증가할 것이며, 또 그것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과 지식을 결합하면 많은 것을 얻을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일에 대한 당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사람들은 지도하고 권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것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과식하면 몸이 불편하듯이, 말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귀를 불쾌하게 합니다. 또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용이 가장 좋으므로, 우리도 지나침을 피하고 중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고 간단히 요약한 후에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95. 기도하는 방법, 그리고 참된 조명과 신적 능력에 대하여


교부들의 말에 의하면, 지혜롭게 절제를 실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호흡에 의해서 마음속으로 내려가며 항상 분심됨이 없이 순수하게 기도하며 기도의 내용을 경험하면서 그것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즉 정신이 마음 속에서 조명을 받을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 디아도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마음 깊은 곳에 정신적으로 보존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정신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Ch.59). 하나님의 손짓에 의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인생의 행로는 오류나 비틀거림으로부터 자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우리는 빛 가운데 걸어가며 빛의 자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주시는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26)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다윗은 주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진실로 신실한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밝은 등불의 인도함을 받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감각적인 것들의 한계 너머를 봅니다. 또 하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모든 고귀하고 거룩한 생활방식과 성향으로 들어가는 천국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태양에게서 빛이 나오듯이 그들을 위해서 빛이 솟아나며,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추론하고 판단하고 보고 예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전반적으로 그분을 통해서 미지의 신비들이 계시되고 드러나며, 그들은 성령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거룩한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초자연적인 능력은 그들의 육체를 보다 가볍고 정교하게 만들어주며 운석처럼 하늘 높이 날게 해줍니다. 어떤 교부들은 몸 안에 있으면서도 성령 안에서 이 빛의 능력에 의해서 넓은 강과 깊은 바다를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넜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여행해야 하는 먼 거리를 한순간에 여행했습니다. 또 하늘이나 땅, 바다, 사막, 도시, 태양 모든 나라와 모든 장소, 짐승들, 파충류, 그리고 전반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모든 요소들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서서 기도할 때에는 그들의 거룩하고 귀한 몸이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죽은 후에도 그들의 몸은 썩지 않았고, 여러 가지 기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한 것처럼 장차 부활한 후에 그들은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살전 4:17).


성 마카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과 모든 덕에 대한 열심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영혼은 자신의 썩지 않는 형상의 거룩한 빛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하늘의 비밀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는 동일하게 영광스럽고 거룩한 형성 덕분에 몸은 그 영광에 있어서 영혼과 동등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의 몸과 일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성령에게 붙들려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96. 요약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것들과 이해의 근원과 출발점은 앞에서 말한 침묵으로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그것의 보호를 받는 기도와 주의 집중과 애착을 완전히 벗어버림 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들, 즉 기도와 주의집중과 애착을 완전히 벗어버림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며 마음 안에서 뜨거움을 만들어내는데, 이 뜨거움은 마치 용광로처럼 정념들과 귀신들을 태워죽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만족을 모르는 갈망과 사랑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마치 우슬초처럼 회개하고 감사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영혼과 몸을 씻어 깨끗이하고 부요하게 해주는 달콤한 눈물의 샘을 열어줍니다. 이것들로부터 이해를 초월하는 끝없는 평화와 생각들의 고요함이 오며, 이것에게서부터 눈처럼 찬란하고 밝은 조명이 옵니다. 이 모든 것의 종착점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도의 무정념 : 몸의 부활 이전의 영혼의 부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취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노력 및 행동과 관상,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의해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연합; 몰아의 상태 및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함 등입니다. 현세에서 이처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이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지만, 장래에는 완전히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원히 그분을 누리면서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97. 교부들에 의해 전해진 바 하나님 안에 있는 생활 양식, 침묵과 순종은 참되 고 오류가 없습니다.


성인들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밀한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영성생활, 참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수행방식은 참되고 오류가 없으며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밀한 생활입니다. 지극히 사랑스러우신 예수,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분이 이 길을 제정하시고 신비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거룩한 사도들 및 그들을 따른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른 우리의 훌륭한 교사들은 생명을 담고 있는 말과 훌륭한 행위의 빛으로 등불처럼 비추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선한 씨앗, 신성한 음료, 거룩한 배아, 더럽혀지지 않은 상징,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은혜, 귀한 진주, 교부들의 유산, 밭에 감추인 보화, 성령의 약혼, 왕의 상징, 흐르는 생명수, 거룩한 불, 귀중한 소금, 선물, 인(印), 빛 등을 서로에게 전달해왔습니다. 이 유산은 앞으로도 대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전달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신 분의 약속은 참됨니다.


 


98.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들이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름길입 니다.


전통적으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 의롭다고 간주되어온 다른 관습들이 있고, 다른 생활방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영혼이 몸을 능가하듯이 다른 모든 수행들을 능가하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며, 성령 안에서 그 사람을 놀랍게 신화(神化)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영혼에게로 돌아가서 생명을 주고, 불멸을 주고, 엎드린 자를 일으켰습니다. 성령의 영속적인 움직임에 의해 움직여진 것은 살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티끌이요 먼지였던 사람이 선지자와 사도와 천사와 하나님의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99. 이 수행은 고결한 것이며, 명칭이 여러 가지입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이러한 생활방식에 여러 가지 명칭을 붙였습니다: 건전한 방법, 칭찬할 만한 행위, 참된 관상, 폭넓은 기도, 정신의 절제, 정신적인 행동, 내세의 활동, 천사 같은 삶. 거룩한 삶, 신적인 행위, 생생하고 신비한 환상의 땅, 매우 완전한 영적 만찬, 하나님이 지으신 낙원,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빛 너머의 어두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밀한 생활, 하나님을 봄, 가장 초자연적인 신화(神化) 등. 우리도 이 거룩한 교부들을 본받아 사랑하는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더러운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서 살고 있지만 당신을 향한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교부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당신이 요청한 것을 부지런히 행했습니다. 이 천사 같은 삶에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분은 불멸하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성육신을 통해서 세상에 세우신 형언할 수 없는 새로운 섭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100. 결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서 힘이 닿는 한 노력하며 행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크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상징으로 받으며, 게으름으로 인해 그것들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람니다. 우리 앞에는 이러한 축복들이 장래에 약속된 것들에 대한 소망으로서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놓여 있으므로, 시간이 있을 때에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시적이고 적은 열심과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전도자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합니다(롬 8:18).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만일 지금부터 바울의 말을 따라서 노력한다면, 출발점이요 하나의 약혼으로서 그것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롬 8:23: 고후 1:22).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왕의 초대를 받으면, 그 목적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아주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을 붙잡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일시적이고 무상한 영광과 영예를 위해서 행하는 데, 종종 그것은 유익이 되지 않고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거하시면서 친척들에게 가장 빛나고 영원한 영광과 영예를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과 결혼하고 연합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얼마나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을 받았을 때에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만, 우리의 뜻을 거슬러 강압적으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강압하게 되면, 악을 악으로 갚기 위해서 강압하는 자에 대한 저항이 일어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옛 주권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의해서 어떤 선한 행동이 완전히 행해진다면, 그것의 성취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열심과 수고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비록 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셨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지으셨고 그것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에게로 가고 믿고 그분처럼 되고, 두려움 없이 열심히 사랑하면서 진실로 사랑하시는 우리의 보호자를 섬기는 힘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악의 아비요 우리의 원수인 마귀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며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후사로 만들고 공동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랍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소하고 단명하고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태만이나 게으름, 또는 허울뿐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그러한 축복과 영예와 기쁨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열심히 행하며,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조차도 아끼지 말고 온갖 종류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그리고 장래에 면류관을 쓰고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고 현세에서도 자신의 초본질적이고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신 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해서 그것들을 얻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지극히 거룩하고 의롭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예배가 지금부터 영원히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