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 거짓된 신비주의 또는 정적주의


  앞서 우리가 소개한 가톨릭 교의, 즉 참된 신비주의와 비교해서, 가끔 다른 형태의 거짓된 신비주의가 있다.

  이 거짓된 신비주의는 영혼들의 수동적 상태의 개념을 변질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윤리적 관점에서, 매우 위험한 오류에 빠졌다. 그 예로서, 몬따누스인들과 베가르드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교의적 오류가 정적주의이다. 이 오류는 다음 세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1) 몰리노스의 외설적인 정적주의,

(2) 페늘롱의 완화되고 영성화된 정적주의,

(3) 반 정적주의의 경향들이다.


(1) 몰리노스의 정적주의

가톨릭의 교의

몰리노스의 오류

1. 하느님께서는 능동적 은총으로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는 수동적 단계가 있다. 그러나 보통 이 단계는 묵상과 덕을 오랫동안 실천한 후에 도달한다.

2. 관상의 실천은 잠시 지속되지만, 영혼의 상태는 몇 날 동안 지속될 수 있다.

3. 관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을 포함한다. 그러나 관상 시간 외에는 이 덕의 명시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 관상의 대상은 하느님이여, 예수님이시다. 관상을 통해 영혼은 우리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5. 거룩한 포기는 영혼에게 완전한 덕이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영혼은 언제나 영원한 구원을 열망하고 희망하면서 간청해야 한다.

6. 상상과 감성은 영혼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여, 내적 시련에 빠트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평화를 누린다. 그러나 의지는 항상 유혹에 저항한다.

1. 일반은총으로,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수동적 관상 또는 내적인 길은 하나뿐이다. 즉 수동의 길로 즉시 들어가야 한다. 이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격정을 없앤다.

2. 관상의 실천은 몇 해 동안, 또는 평생 동안 꿈 속에서조차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3. 관상은 영속적이므로 초보자들을 위한 것과, 덕에 명시된 모든 행위에서 면제된다. 예를 들어, 신덕, 망덕, 경신덕, 고행, 고해성사 등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신비를 생각하는 것은 불완전함이다. 또 신적 본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림이나 이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영과 진리로 흠숭하지 않는 것이다.

5. 관상의 단계에서, 영혼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구원과 성화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되며, 참된 사랑이 사심이 없기 위해서 희망을 버려야 한다.

6. 유혹에 저항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음란한 상상과 그 결과인 행위들은 비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인들조차 시련 당했던 수동적인 시련들이다. 그리고 이를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영혼은 완전한 순결과 하느님과의 내적인 일치에 도달하게 된다.


(2) 페늘롱의 완화된 정적주의


  페늘롱은 프랑스의 대주교로서 신학자이며 저술가였다. 1676년 사제거품을 받고 누벨 가톨릭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된 페늘롱은 카톨릭과 프로테트탄트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가톨릭의 편협성에서 나온 냉혹함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염려하던 그는 정적주의자로부터 해답을 얻었다. 그는 정적주의의 주도적 인물인 귀용부인을 소개받아 그가 지적으로 입증했던 신의 존재를 직접 체험하는 몇 가지 방법을 배웠다. 


  페늘롱의 정적주의는 아직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귀용부인이 저서를 통해 주장한 애정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을 정적주의의 저자인 젊은 과부가 자기 책에 쓰인 사랑의 부도덕한 결과에 대하여 완화 형식으로 계속 주장한다. 귀용 부인은 자신이 순수한 사랑의 길이라고 자칭하면서 상상적이고 감성적인 신심 속에 열성을 바친다. 그녀는 먼저 성 바오로 회원인, 라꼼버 신부를 자신의 사상으로 끌어들이고, 그 다음으로 페늘롱을 끌어들인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오류는 보쉬에의 판단에 의하면 다음 네 가지 제안으로 귀결될 수 있다.

 1. 이 세상의 순수한 사랑에는 일상적인 단계가 있다. 거기서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열망이 더 이상 없다.

2. 내적 삶의 마지막 시련 속에서, 영혼은 설득되고, 반박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을 통해 증명된 것이며, 이 확신 속에서 자신의 영원한 행복인 하느님께 절대적인 희생을 드리게 된다.

3. 사랑의 순수한 상태 속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완덕과 덕의 실천에 무관심하다.

4. 관상적인 영혼은 어떤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적인 숙고와 구별되는 관점을 잃어 버린다.


 물론 페늘롱의 정적주의는 몰리노스의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정적주의의 제안은 거짓이며, 영혼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1. 첫 번째, 이 세상에서 희망을 제외시킨 순수한 사랑의 단계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씨 신학교에서 만든 정적주의에 대한 논설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랑의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순간에서든 언제나 하느님이 우리가 영광을 원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분명하게 간청하고 바라고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제안 역시 거짓이다. 물론 많은 영혼들이 거부했던 열등 의식에서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몇몇 성인들이 있다. 이 성인들이 구원을 위해 조건부로 희생을 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희생이 될 수 없다.


3. 세 번째 순수한 사랑의 단계에 있는 영혼에게 덕의 실천과 완덕에는 무관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그 반대로 성녀 예수의 데레사가 완덕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 중요한 덕과 진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권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4. 끝으로 영혼의 완전한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뚜렷한 관점을 잃는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우리는 변모된 일치를 다룰 때,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의 발현을 말하였다.


(3) 반 정적주의자들의 경향

 우리는 이따금 훌륭한 신심 서적들 가운데서, 다소 정적주의적인 경향을 띤 책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의 서적들이 일반 영혼들에게 영성생활의 지침서로 사용된다면, 모두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정적주의 경향이 있는 서적들 안에 스며든 주된 오류는, 관상생활인 일치의 길에서 영혼에게 적합한 수동적인 자세를 모든 영혼에게 빨리 주입하려는 성급함이다.


 이 단순화가 대부분의 영혼에게는 추리 묵상과 세심한 양심 성찰, 윤리덕의 실천을 거친 후에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잊어버리고, 너무 빨리 영성생활을 단축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영혼에게 매우 좋은 영적 자질을 남용하는 처사가 된다. 완덕의 중간 단계를 넘으면서, 초기 단계부터 진보한 영혼에게 같은 성공의 관상 방법을 제시하며, 가능한 빨리 완전한 영혼을 만들려 한다.


 ㄱ) 이렇게 하여, 정적주의자들은 사심 없는 사랑을 조장한다는 미명 아래,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정적주의자들에게 영원한 행복에 대한 열망은 부차적일 뿐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전부라고 가정한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의 영광과 영원한 행복은 서로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인식을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 사랑과 인식은 동시게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적주의자들에게, 이 두 영광과 행복의 요소를 떼어놓는 대신 반대로 일치시켜야 하며, 그들이 어떻게 서로 조화되고 보충되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만일 이 둘을 떼어놓고 생각해야 한다면,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이 주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ㄴ) 게다가 정적주의자들은 신심의 수동적인 면을 너무 강조한다. 그들은 활동적인 신심을 오랫동안 실천한 후에는, 하느님의 팔에 안겨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ㄷ) 정적주의자들은 영혼의 성화에 대한 방법이 있을 때, 언제나 일치의 길에만 적합한 것을 거의 전적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정적주의자들은 세분화된 체계적인 묵상을 비난한다. 즉 영혼들의 세심한 결심은 영성생활의 일치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즉 영성생활에서 상세한 양심 성찰을 단순한 회상으로 대체하려 한다.


  그래서 정적주의를 따르는 초보자들은 보통 체계적인 묵상기도를 통해서만 단순 기도에 도달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보자들에게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결심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 그들의 잘못을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묵상기도의 세부적인 체험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초보자들이 그들의 격정과 과실을 남겨 두고, 그들 자신에 대한 피상적인 시선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영혼에게 위험을 노출시킬 뿐이다.

 한마디로 정적주의자들은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와 수동적인 단계에 이르기 위해 지나야할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