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변모된 일치 기도(영적 결혼)

 

   많은 정화를 거친 후, 영혼은 마침내 변모된 일치라고 불리는 지속적이고 고요한 일치에 도달한다. 이 일치는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지복직관을 직접 준비시키는 신비적 일치의 마지막 표현이다.

 

1. 변모된 일치의 본질


(1) 영적 결혼에서 변모된 일치의 주요한 특성들은, 다름 아닌 친밀성, 고요함, 불가해소성이다.


(가) 친밀성

  이 변모된 일치는 다른 일치(황홀, 고요)보다 더 긴밀하므로 이 일치를 영적 결혼이라 부른다. 부부사이는 언제나 가장 비밀스럽다. 그 이유는 두 영혼의 삶을 하나로 합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모된 일치가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존재한다.


(나) 고요함

  이 변모된 일치의 단계에서는 영혼에게 더 이상의 황홀경도 탈혼도 없거나, 있어도 매우 적게 일어난다. 이 일치는 평온하고 고요한 영혼에게 자리를 주기 위해 실패와 나약함을 거의 사라지게 하여, 평온과 고요함 속에서 두 부부는 서로의 사랑을 확신한다.


(다) 불가해소성

 다른 모든 영혼의 일치는 일시적일 뿐이나, 이 변모된 일치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처럼 본질적으로 영원하다.

  변모된 일치의 불가해소성이 영혼을 완전무결한 영적 결혼으로 이끌어 주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관점 사이에 차이가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이 은총 속에 견고해 있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영혼이 은총 안에 견고해지지 않고서는 이 상태(영적 결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더 이상 유혹과 고통으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며, 근심과 걱정을 잊어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영혼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 듯하다고 말할 때, 언제 어디서든 그 말은 하느님이 영혼을 당신 손으로 떠받치고 계시는 동안, 그리고 영혼이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동안만 그렇다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확실히 아는 바로는 영혼이 이런 상태(영적 결혼)에 있고, 이 상태가 몇 해를 계속되더라도, 안전이란 도무지 없다고 믿습니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이 말은, 끝까지 항구한 은총이 자신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학의 이론과 매우 일치하는 듯하다. 영혼은 자신의 구원을 더 확신하기 위해, 현재의 은총 상태에서만 특별한 계시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영혼은 변모된 일치 안에 항구해야 할 것이다.


(2) 변모된 일치에 대한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묘사는 두 발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과 성 삼위의 발현을 포함한다.


(가) 상상과 지성의 두 환시를 통해, 예수님은 영혼을 성녀가 말한 마지막 궁방으로 인도하신다.


  ㄱ)영성체 후 예수님은 상상의 환시로, 성녀에게 나타나신다.


  ㄴ) 곧이어 영혼에게 지성의 환시가 온다.


(나) 성삼위의 환시


  성녀가 말한, “제7궁방에 들어서게 된 영혼은 지성의 보임, 그 어떤 진리의 표상을 통하여 지성하신 삼위일체 세 위 전부가 번쩍이는 구름처럼 먼저 그 정신을 불태우시면서 나타내 보이십니다. 세 위가 똑똑히 구별 지워져 보이면, 영혼은 그  받은 묘한 인식으로 세 위가 모두 하나의 실체, 하나의 힘, 하나의 인식,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을 더 참될 수 없이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신앙으로 믿는 바를 여기서는 영혼이 깨우쳐서 어쩌면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상의 보임이 아니므로 육안이나 영안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혼의 놀라움은 나날이 더 커 갈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삼위는 자기를 떠나시지 않고 자기의 가장 안 쪽, 깊고 깊은 그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한 식으로 또렷이 보기 때문입니다.”


2. 변모된 일치의 효과

 

(1)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모두를 내어 맡긴다.

  변모된 일치에서 영혼은 하느님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한다. 이미 황홀한 일치에서 영혼은 사랑하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죽음을 갈망하였다. 그런데 변모된 일치에서영혼은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만 한다면, 자신이 죽거나 살거나 무관하다는 것이다.


(2) 영혼은 고통 받기를 끝없이 열망한다.

그러나 변모된 일치에서 영혼은 초조해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한다.


(3) 영혼은 욕망도 내적인 고통도 없다.


(4) 영혼에게 황홀함이 없어진다.

   “영혼이 이 궁방에 들게 되면, 어떠한 황홀이던 간에 모조리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감각이 힘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어느 때 황홀이 있다 해도 그전과 같은 탈혼이나 얼의 날음은 없고 어쩌다가 그런 현상이 나타날 때라도 그전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혼에게 완전한 평온과 평화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 당신의 궁방에서 주님과 영혼은 단둘이서 더할 나위 없는 침묵 속에 서로 즐기는 것입니다.”

 

(5) 영혼은 열렬한 열정을 갖는다.

 변모된 일치에서 영혼의 성화에는 열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영혼은 행동하면서 일하고, 고통 당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고, 겸손한 덕을 진정으로 증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계속 실천하지 않으면 곧 퇴보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기도로써 많은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덕을 입히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함께 사는 이들에게나 잘하려 힘쓰십시오. 본분상으로도 더욱 그래야 하는 만큼 이것이 가치있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놀라운 겸손과 인내, 차별 없이 수녀들을 섬기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불꽃으로 그들을 뜨겁게 해서 덕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작은 소득이라 보십니까? 크나큰 소득일뿐더러 주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섬김일 것입니다.”

“주께서는 일의 크기를 보시지 않고 어떠한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십니다.”


제 2 장  개요


  지금까지 우리는 관상의 주요한 네 단계(고요의 일치, 충만한 일치, 황홀한 일치, 변모된 일치)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상에서 영혼은 고통스러운 시련과 황홀한 기쁨의 교차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주입적 관상의 개념을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었다. 주입적 관상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점진적으로 소유하신다.


(1) 하느님께서는 관상하는 영혼을 완전히 점진적으로 사로잡으신다. 먼저 이 관상은 의지를 고요의 기도 안에서 다스리게 한다. 다음으로 내적 또는 외적 모든 능력을 황홀함에서 실행하게 한다. 끝으로 영적 결혼에서 일시적이 아닌, 완전한 방법으로 온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영혼을 사로잡으신다면, 그 이유는 빛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영혼을 완덕과 통교하기 위해서이다.

 

ㄱ) 주입적 관상의 빛은 영혼이 충분히 정화되지 않았을 때는 매우 약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관상의 빛은 영혼의 나약함 때문에, 어둠과 늘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츰 더 강해지고 더욱 위안이 된다. 이 관상의 빛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영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준다. 그리고 계속 영혼에게 창조물의 비참과 허무, 왜소함, 하느님의 무한하시고 선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적 인식을 가져다준다.


ㄴ) 주입적 관상은 영혼에게 주어진 열렬한 사랑과 너그러운 희생을 갈망하게 한다. 이 관상은 영혼이 자신을 송두리째 잊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 희생되기를 원하게 한다.


(2) 주입적 관상은 영혼을 신적 소유에 대해 자유롭게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 관상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 거룩한 신뢰, 깊은 겸손으로 영혼이 기쁨과 자유를 통해 자신을 그분께 드리게 한다. 위와 같은 영혼의 자세를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더욱 정화시키고, 하느님께 일치하며 그분 안에서 변화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이것이 진정한 신비주의 신학이다. 그런데 이 신비신학과는 다른 가짜 신비주의 또는 정적주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참된 신비주의와 거짓된 신비주의 또는 정적주의를 구분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