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황홀한 일치 기도(영적 약혼)


  하느님과 영혼의 황홀한 일치는 다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 일치는 감미로운 모습과 고통스런 모습이다.


1. 감미로운 황홀한 일치


  황홀경이란 단어는,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공중부유의 놀라운 신비적 현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는 않는다. 황홀한 일치는 영혼에게 다만 외적 감각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영혼의 황홀한 일치는, 앞서 말한 두 모습의 일치를 서로 보완한다. 앞선 두 일치의 요소들 외에도 또 다른 외적 감각들이 이 일치를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황홀한 일치의 본질

  하느님 안에서 영혼이 갖는 전적인 전념과 감각의 멈춤이라는 두 요소는 바로 황홀한 일치를 구성한다. 즉 영혼이 하느님께 완전히 전념해 있기 때문에, 외적 감각은 하느님을 표현하는 대상이나 또는 그분께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가) 영혼이 하느님께 완전히 전념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원인에서 온다. 즉 흠숭과 사랑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영혼으로 하여금 참된 사랑을 만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흠숭은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사랑은 흠숭을 통해 성장한다고 성인은 말한다.


 한 영혼이 하느님 사랑과 흠숭에 사로잡히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매료되어 영혼이 하느님께 사로잡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 황홀한 일치에서 감각의 멈춤은 영혼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몰입한 결과이다. 이 황홀한 일치는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영혼이 같은 일치의 단계에 이르지는 않는다.


ㄱ) 외적 감각과 관계되는 것이다.


    1. 먼저 황홀한 일치에서 영혼의 외적 감각은 다소 눈에 띄게 무감각해지고, 숨쉬기와  육체적인 활기가 저하되며 그 다음은 체온이 떨어진다. “체온이 내리고 육체는 조금씩 싸늘해지는 것을 아주 뚜렷이 느낍니다만, 이에 대하여 매우 유쾌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2. 그 다음 이 일치에서 몸을 사로잡았던 영혼의 모습은 분명하게 부동자세가 되어 버린다. 그로 인하여 영혼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고정된다.


    3. 황홀한 일치는 당연히 몸을 허약하게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영혼에게는 새로운 힘을 준다. 물론 황홀한 일치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는 어떤 무력함을 느끼지만, 잠시 후에는 영혼 안에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4. 이따금 황홀한 일치는 영혼에게 감각의 멈춤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 감각의 멈춤이 때로는 반대로 불완전하게나마 계시를 암시하기도 한다.


ㄴ) 황홀한 일치에서 내적 감각은 우리가 이미 기술했듯이, 신비적 일치 안에서보다 더 완전하게 감각이 멈추어 버린다.


ㄷ)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제 우리는 황홀한 일치가 영혼의 자유마저 마비시키는가를 물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슈아레쯔, 성녀 예수의 데레사, 빠쯔의 알바레쯔 등은 모두 한결 같이 황홀한 일치에서 영혼 안에는 대개 자유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ㄹ) 황홀한 일치에서 영혼이 경험하는 황홀경의 기간은 매우 다양하다. 완전한 황홀경은 일반적으로 영혼에게 순간적이거나 이따금 30분 정도 지속된다. 그러나 이 완전한 황홀경에 불완전한 순간들이 뒤따를 때, 영혼 안에 통과하는 모든 황홀함의 교차는 오래 지속 될 수 없다.


ㅁ) 영혼은 황홀한 일치에서 자연적 또는 자극적인 깨어남을 통해 황홀경에서 벗어난다. 자연적인 경우, 마치 다른 세상에서 되돌아온 것 같은 어떤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영혼은 조금씩 육체적인 활동을 되찾는다.


(2) 황홀한 일치의 세 가지 자세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영혼의 황홀함에는 다음 중요한 세 단계가 있다. 즉 단순한 황홀경, 탈혼, 영의 비상 등이다.


ㄱ) 단순한 황홀경은 일종의 영적 쇠약함으로 서서히 발생하며, 고통스러운 동시에 감미로운 상처를 영혼에게 준다. 이 황홀한 일치에서 신랑은 영혼에게 자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지만, 한 순간뿐이다. 영혼은 이 황홀함을 항구하게 누리기를 원하지만 현존의 상실로 고통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은 고요의 기도에서 얻는 그것보다 더 감미롭다.

 

ㄴ) 탈혼은 영혼이 하느님과의 황홀한 일치에서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성급하고 맹렬하게 영혼을 사로잡는다. 이 때 영혼은 여기에 대항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힘 있는 독수리가 큰 날개를 통해 우리를 데려가는 것과 같다. 더구나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혼이 느끼는 기쁨에도 불구하고, 탈혼의 첫 순간에는 본성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두려운 느낌이 들뿐이다. 하느님과의 황홀한 일치인 탈혼에서 영적 약혼이 이루어진다.


ㄷ) 황홀한 일치에서 탈혼 다음에는 영의 비상이 따른다. 이 탈혼은 너무 맹렬해서 영혼을 육체로부터 떼어놓는 것 같고, 어떻게 저항할 수도 없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가 말하기를, "또 하나의 탈혼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얼의 날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경우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판연히 다른 지역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느낌인데, 거기서 보이는 빛은 세상의 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평생을 두고 별의별 궁리를 다 한다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빛입니다. 이 빛으로써 사람은 일순간에 일체를 한꺼번에 깨우치게 되는데, 평소 같으면 몇몇 해를 두고 상상과 생각을 다하면서 고생을 해도 그 천 분의 일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3) 황홀한 일치의 주된 효과


(가) 황홀한 일치에서 영혼이 갖는 효과는, 이 일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황홀경은 의심을 받게 되고, 영웅적인 위대한 삶에 대한 희망은 없어질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그러므로 묵상기도 때 탈혼하는 사람이 삶 안에서 황홀함이 없다면, 세속적  탐욕을 억제하면서, 자연적인 성향과 의지를 통한 고행의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적 겸손과 솔직함과 온유함을 통해, 특히 항구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일치하면서 삶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면, 데오티모여, 이 모든 탈혼이 매우 수상쩍고 위험천만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탈혼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려는 것이지, 결코 영혼을 성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 황홀한 일치가 영혼 안에 자아내는 주된 몇 가지 덕들은 다음과 같다.


   1. 먼저, 피조물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 하다는 것이다.


   2.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한 아픔이 엄청나다.


   3. 예수님의 거룩하신 인성과 성모께 사랑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4. 끝으로,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보내시는 새로운 수동적 시련을 용감하게 감내하도록,  영혼은 인내를 해야 한다.


   황홀한 일치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에 불탄 영혼은 마치 불화살에 뚫린 것처럼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오직 사랑하는 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영혼이 원하는 진정한 순교의 시작이며, 사랑하는 분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죽고 싶다는 열렬한 열망이 동반되는 영혼과 육체의 순교이다.

 

 이 순교는 영혼을 도취시키는 기쁨으로 이따금 중단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둘째 밤, 즉 영의 밤을 살펴보면서 더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