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절

주입적 관상의 유익성


정확히 말해,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은 하느님과 더욱 일치하고 가장 효과적인 은총의 작용 아래 있기 때문에, 이 관상은 단순한 묵상기도의 유익함을 능가한다.


(1) 주입적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영혼으로부터 더욱 찬양을 받으신다.

(2) 영혼은 주입적 관상기도를 통해 더욱 거룩해진다.

 이 관상기도는 많은 빛과 사랑의 덕을 영혼 안에 심어주기 때문에 흔히 이 관상을 완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부른다.

 

제 3절

관상으로 부르시는 성소의 징표


1.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관상의 은총을 주시는가?


(1) 관상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영혼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관상의 은총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잘 준비된 영혼에게 관상의 은총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예외로, 특별한 방식으로 악마의 손아귀에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가끔 덕이 없는 영혼들에게도 관상을 허락하신다.


(2) 그런가 하면,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서 관상으로 부르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영혼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녀 리마의 로사와 성녀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바로  그들이다. 또 덕의 진보와는 관계없이 매우 빨리 관상에 진보하고 이끌리는 영혼들도 있다.


(3)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이탈과 덕의 실천, 묵상기도를 위한 수련과 정감적 묵상기도의 실천으로 준비된 영혼을 관상에로 들어올리시기를 좋아하신다.

 

  이것은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윤리덕의 실천을 통해 욕정을 죽인 다음에야 영혼은 관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성 토마스의 사상을 긍정한다. 관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완전한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관상가가 매우 적은 이유는, 영혼이 자기 자신과 피조물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4) 영혼이 관상기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한 덕을 실천해야 한다.

 

   ㄱ) 이 관상은 영혼을 어지럽게 하고 죄를 이끌 수 있는 모든 것은 완전히 끊어 버리는  마음의 순결을 필요로 한다.

 

   ㄴ) 마음의 순결에서 볼 때, 호기심은 영혼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며 불안과 걱정으로 이끈다. 그러기에 관상에 이르기 위해 직무에 충실하는 영혼들은 자주 자신의 호기심을 절재해야 하고, 그 동기를 정화시켜야 한다.

     마음의 순결은 묵상기도 안에서 영혼에게 추리를 버리고 줄일 줄 알게 한다. 그리고 이 순결은 하느님께 단순한 사랑의 시선만을 갖게 하면서, 영혼이 감정을 단순하게 한다.

 

   ㄷ) 관상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기 위해 자기 포기와 의지의 절제를 통한 영혼의 순수성을 확립해야 한다.

 

   ㄹ) 관상을 위해 영혼은 모든 것을 복음적 권고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ㅁ) 관상의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의 모든 행위를 기도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경건한 침묵이 요구된다.

 

   ㅂ) 끝으로, 관상을 위해 영혼은, 특히 모든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기희생과 열렬하고 너그러운 사랑 등을 실천해야 한다.

 

 


2. 관상의 성소에 대한 개인적 징표는?


  한 영혼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상기도를 할 준비가 되었을 때, 추리 묵상을 떠나야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알려 주시는 순간이 온다.

 이 점에 대하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이 이 순간을 알 수 있는 징표가 세 가지 있다고 말한다.


(1)첫 번째 관상의 성소에 대한 징표는 다음과 같다. “상상력을 가지고 추리 묵상을 도저히 할 수 없고 그전처럼 통 맛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전 같으면 으레 감성이 뿌리를 내리고 단물을 빨았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아무런 맛도 없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는 중에 아직도 재미가 있고 추리도 할 수 있으면 그 동안은 묵상을 놓을 때가 아닙니다. 영혼이 평화와 고요 속에 안정 될 수 있는 그 때라야 하는 데 이 점에 대해서는 셋째 징표에 가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 관상의 성소에 대한 징표는. “마음의 안팎을 가릴 것 없이 개별적인 어는 일에 대해 상상하거나 감정을 두기가 딱 싫어짐을 보는 것입니다. 오가는 상상마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일에 일부러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관상의 성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징표는 이것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우러러 보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윽한 평화와 고요와 안식 속에서, 기억, 이성, 의지의 작용이나 이리저리 오가는 추리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하나 우리가 사랑스럽다 일컫는 공번된 지견이 있을 따름, 그 밖의 남은 것들이야 무엇이건 알려고 하지 않는 법입니다.”

  

 

결    론   :   관상의 열망에 대하여


   주입적 관상은 완덕으로 나아가는 탁월한 방법이므로, 많은 영혼이 열망하도록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포기를 통해 겸손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ㄱ) 영혼이 관상을 열망하는 것은, 그 관상 기도에 수많은 영적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관상은 영혼에게 마치 물을 주는 것과 같아서 덕을 자라게 하고, 굳건하게 하며, 거기에서 완덕을 얻게 한다.”

 

ㄴ) 그러나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관상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직 너무나 부당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영광과 선익을 위해서만 관상해야 하기에 참된 겸손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ㄷ) 관상은 영혼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모든 조건을 따른 데 있다. 그러므로 그 조건이 비록 비현실적이라도,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관상은 일반적으로 영혼에게 대신덕과 윤리덕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미 지적한 덕행을 오랫동안 실천하기 전에, 영혼이 관상을 열망한다는 것은 매우 주제넘은 것임을 상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