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주 입 적   관 상

 

제 1 장 주입적 관상에 대한 일반적 개념


제 1 절

주입적 관상의 본질


1. 주입적 관상의 정의

(가) 옛날의 영성가들은 습득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 사이를 뚜렷하게 특별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나) 현대의 영성가들은 일반적으로 습득적 관상과 주입적 관상의 두 종류 간의 차이를 두고 있다.


2. 주입적 관상에서 하느님의 몫


(1) 하느님께서는 많은 영혼을 관상으로 부르신다.

(2) 물론 관상기도의 방법이나 순간, 그리고 그 기도에 지속되는 시간을 결정하는 것도 하느님이시다.


(3) 관상기도에서 하느님의 작용에 대해, 특히 신비가들이 말하는 것은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또는 우리 의지 안에서 그분이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관상기도에서 지식과 의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즉 지식은 추리하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와 통찰의 은사 아래, 영혼이 단순한 시선으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지식이다. 그러나 의지는 이 기도의 가장 단순한 행위 안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신적인 것을 맛보고 사랑하게 한다.


(4) 하느님께서는 관상기도에서 영혼 안에 사랑과 인식을 동시에 일으키신다. 그런데 이 인식은 긍정과 부정으로 되어 있다.

 

 ㄱ) 관상기도에서 분명한 긍정은 영혼 안에 모호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체험적이기 때문에,  그 영혼을 강하게 충동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관상기도에서 영혼 안에 다음 네 가지 긍정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1. 관상기도는 영혼이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제껏 감명을 받지 않았던 모든 인식에 대해, 은사의 빛을 통하여 주의를 끌게 한다.

 

    2. 관상기도는 영혼 안에서 긍정과 부정의 인식을 이끌어 내면서 똑같은 빛을 준다. 그래서 영혼에게 하느님은 모든 것이고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령은 영혼에게 겸손만이 우리의 절대 의무라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즉, 나는 존재하는 자이며, 너는 무이다!

 

    3. 관상은 영혼 안에 주입적인 것들을 일으키게 한다. 왜냐하면 이 주입적인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 안에 신적인 일들이 가장 완전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관상기도를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명확한 계시, 또는 환시 속에서 일어난다.

 

    4. 성 토마스는 사도 바오로가 인정하고, 몇몇 교부들이 인정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관상기도를 통해 영혼에게 참된 행복의 환시를 일시적으로 허락하시면서 확신을 주신다고 하였다.


  ㄴ) 하느님께서는 관상기도를 통해 영혼 안에 지울 수 없는 사랑을 심으신다. 이 사랑은 영혼에게 직관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유일한 최고선이심을 이해시키고, 자석처럼 끌어당기게 한다. 그러나 관상기도 안에서 이 사랑은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저항 할 수 없는 강한 방법으로 영혼을 끌어당긴다.

 

     영혼은 열렬히 하느님께로 향하게 된다. 관상기도에서 이 사랑의 열정과 함께 영혼은 행복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자유스럽다. 왜냐하면 이 전망은 흐릿하므로 영혼에게서 완전히 자유를  빼앗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의 몫


(1) 영혼은 마치 어린이가 기쁘게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팔에 안기듯이, 하느님으로 감동되고 장악되도록 자신을 자유로이 내버려 둔다. 이 때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은 활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다.

 

  ㄱ) 그러나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은 수동적이다. 이러한 뜻에서 영혼은 묵상 안에서 그전처럼 자발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무능력하다. 그리고 영혼은 주입적 관상 시간에 더 이상 추리적으로 그의 능력들을 실행 할 수 없다. 그로 인하여 영혼은 자신을 지배하는 강한 원리에 종속하며, 그의 시선을 정신과 마음을 관상하는 대상에 고정시키면서 사랑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 관상은 영혼이 해야 할 것을 암시해주고, 더 나아가 영혼이  행동하도록 강한 충동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적 관상의 단계에서 영혼이 완전하게 무기력해 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혼에게 능력들의 연결 현상이 단계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특히 황홀경과 같은 높은 관상에 이르렀을 때, 영혼의 능력은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순수 관상의 시초인 고요의 기도에서, 영혼은 구송기도와 묵상기도를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관상기도에서 하느님께서는 영혼과 일치하시면서 오성을 고정시키지만 완전히 중단시키지는 않으시고, 다만 능력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한 대상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생각을 멈추게 하신다. 그리고 주입적 관상기도는 영혼이 힘든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도록 입술에서 말을 거두 신다.

   

   ㄴ)  그렇다고 영혼이 이전처럼 말을 할 수 없는 안일함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신적 움직임의 영향아래, 영혼은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면서 말없이 매우 활동적으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주입적 관상기도에서 영혼은 자신의 힘보다 열 배나 되는 영적인 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관상기도에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자신이 들어 올려지는 영혼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입적 관상기도를 통해 영혼에게 주시는 능동적 은총의 결과이며, 영혼은 이 은총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2) 이와 같은 주입적 관상의 단계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로는 설여할 수 없는 일종의 체험적 인식으로 이해되는 살아 있는 실체로써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이 주입적 관상은 하느님께 대한 명확한 환시가 아닌, 단순한 직관으로 영혼이 하느님을 인식하게 한다.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하느님과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 물론 하느님과 영혼의 이 접촉은 사랑의 열정을 맛보게 하며, 그분의 현존을 느끼게 한다.


(3) 주입적 관상은 영혼이 스스로를 자주 인식하는 것보다 더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한다. 이 관상에서 영혼의 의지는 결국 지성과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께 도달한다. 그리고 이 지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지적인 개념과 표현에 따라서만 진리를 인식한다. 관상기도에서 마음과 의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주입적 관상기도에서 우리의 지성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본성을 발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4) 주입적 관상기도에도 영혼의 기쁨과 고민이 뒤섞여 있다. 귀한 손님의 방문을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고민도 있다. 하느님의 계획과 신비생활의 단계와 성격에 따라, 관상기도에서 영혼 안에는 기쁨과 고민이 서로 교차되기도 한다.

 

   이처럼 주입적 관상기도에서도 영혼의 밤이라 부르는 매우 고통스러운 단계가 있는가 하면, 즐겁고 감미로운 단계가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 과 성녀 샹딸처럼, 신비생활의 시련을 체험하고 특별히 묘사하는 영혼들이 있는가 하면,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처럼 관상에 도취하는 기쁨에 대해 더 호의를 갖고 상술하는 성인도 있다.


(5) 주입적 관상에 대해서는 많은 신비가들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한결같이 고백하고 있다.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이 하느님 체험에서 느낀 것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정신의 측면에서 볼 때, 영혼은 신적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애매하고, 불확실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은, 영혼의 가장 인상적인 현상은 하느님을 향한 강한 사랑인데, 역시 그분을 체험하긴 하지만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6)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저서 ‘어둔 밤’에서 첫 번째 밤에 나타난 주입적 관상 중에 영혼이 메마르고 약할 때, 영혼은 자신의 그 나약함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관상이 감미로운 때, 관상이 아직 약할 때, 초기 상태에 있는 영혼은 이 나약성을 항상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묵상기도와 주입적 관상기도와의 차이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차이점을 영혼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가끔 관상과 묵상기도를 혼동한다.

 그러나 주입적 관상이 영혼 안에 강렬해졌을 때, 그는 나약성을 인식한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가 기술한 초자연적 기도는 모두 이 관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가 말할 주입적 관상의 본질적 요소는,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두 수동적 작용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주입적 관상에서 영혼은 자유와 활동을 잃어버리지 않고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감동하며 그 지도를 받아 행동한다.

 

  그러나 이때 영혼이 느낀 하느님의 현존 또는 하느님 현존의 인식이 모든 관상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은 아직 영혼의 첫 번째 ‘어둔 밤’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기술한 메마른 관상이라고 확실하게 전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 현존 체험은 주입적 관상기도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고요의 기도에서 변모된 일치의 기도까지, 성녀 예수의 데레사가 말한 관상의 모든 단계 속에서 그 기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