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길

 

 

이 글은 "무지의 구름"(클리프턴 월터스 저/ 성찬성 역)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관상기도”라는 신비신학의 이해를 도우고 무지의 구름을 읽기에 도움이 되도록 "무지의 구름"(바오로의 딸)을 인용하였습니다. 단 용어 및 신학적 부분 등 개신교 성도님들을 위하여 필자가 임의로 수정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들어가는 말

 

어떤 사람도 무지의 구름과 같은 책을 '느닷없이 불쑥' 써내지는 못한다. 이런 책을 쓰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외부 영향을 통해 정신이 조형되고 안목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이런 외부 영향 가운데 일부는 수용하여 되새김질하는가 하면 그 밖의 것들은 흡수한 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망각한 것들도 새로 형성되는 것들이나 마찬가지로 거듭해서 끈기 있게 조사하다 보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발견하게 된다. 「무지의 구름」 이면에는 여러 가지 권위 있는 문헌들이 바탕에 깔려 있으나 그 가운데 이 책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문헌이기도 하다.

이름이 지목되고 있지는 않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이런 자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출처가 “성빅토르 수도원”의 리처드로 되어 있다. 파리에 있던 이 유명한 수도원은 12세기에 탁월한 학자들과 시인들과 신비가들을 배출하면서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떨치고 있었다. 리처드의 저서 「소벤자민」과 「대벤자민」은 「무지의 구름」의 독특한 제목은 물론 낱말, 구절, 심지어는 장들까지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지의 구름」 저자가 몹시 애호하던 작품들이었음에 분명하다. 더군다나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저자는「소벤자민」을 영어로 자유롭게 의역하기도 했었다.

그는 히포의 주교이자 신학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노도 아주 좋아해서 마리아와 마르다 주해 부분에다 그의 가르침을 많이 접합시켜놓았다. 대(大)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장 기고 2세의 저서「생명의 성채로 오르는 사다리(Scala Claustralium)」또한 갈리아 치살피나 지방의 베르첼리 소재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 토머스 갈루스(Vercellensis)의 저서들이 그랬듯이 찬사를 받아왔다. 그런가 하면「무지의 구름」과 일반적으로 대알베르토의 저서로 알려진 「하나님의 자리에서 아래로(De Adhaerendo Deo)」는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유사점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사람(70장)은 이른바 아레오파고 법정 판사 디오니시우스가 아니면 그에게 「무지의 구름」이라는 이름을 전수한 성 데니스다. 디오니시우스는 성바오로가 아테네에서 선교할 때 그의 영향을 받아 개종한 사람으로(행 17장) 그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글들이 6세기 초에 나올 수는 없는 것인만큼, 익명의 시리아 수도사가 그의 이름을 빌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남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매우 못마땅한 것이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관례로, 때로 그들의 이름을 빌려 자기의 가르침을 선전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자기네 작품이 읽히고 가르침이 주목받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 가짜(위)-디오니시우스의 사상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간결한 소책자들은 그때까지 공식화되지 않은 것을 구체화하고 대중화시켰으며, 그의 가르침은 이처럼 신약성서 속의 제자라는 가상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그리스도교 신비신학에 이루 헤아릴 수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기본 사상은 하나님의 철저한 불가해성 그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서술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이들을 '긍정적인 방식(via positiva)'과 '부정적인 방식(via negativa)'이라 일컬어 왔다. 동방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같은 구분을 인정하되, 다만 더 정확하고 확실히 하기 위해 이 두 가지를 교감적 언어사용법(cataphatic)과 비교감적 언어사용법(apophatic)으로 구분하며.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거꾸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인 방식'은 긍정에서 시작하며, 인간의 속성을 빌려 하나님을 서술하되 거기에다 무한한 능력을 가미하여 들어 높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능력이요, 권능이요, 신비요, 그밖에 긍정적인 내용이 부여될 수 있는 모든 것이시다. 이 같은 속성들은 인간의 이해 능력 일체를 철저하게 초월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의미와 신적인 의미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이 있으며 차이는 질적이라기보다 양적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성서적 시각이요, 비록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난의 여지는 있지만 그런 여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미덕과 기품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이 보호막이 되어 차단해 주고 있다.

'부정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는 한 사람은 실질적으로 그분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한 타자'이시며 피조물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시다. 즉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매여 있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들에게 매이지 않으신다. 창조계는 그분의 충만함이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자체로 완전하시며 근본적으로 창조된 어떤 지성도 그분을 이해할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제아무리 그분을 현양하는 표현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인간의 표현일 뿐이요, 근본부터가 다른 까닭에 결코 정확하거나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거나 '지극히 높으시다.'거나 '위격이시다.'거나 '선하시다.'고 말할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은 인간적인 관계에서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우리 각자를 타인과 구분할 때나 어울릴 따름이다. 우리는 분명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유한하고 덧없는 것으로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맞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어상의 의미에서 위대하거나 높거나 인격적이거나 선할 수는 없다. '긍정적인 방식'에 입각해서 현란한 언사로 수없이 증거하는 그분은 막상 그런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분이라서, 차라리 우리가 그분은 그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한결 더 진실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긍정적으로보다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편이 그분에게 더 걸맞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분에 관한 종교적 진리들은 이해될 수 있지만 그분 자신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다르신 그분과 대면하면 '마비되어' 버린다.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도저히 흡수 불가능한 지식 앞에서는 백지가 되고 만다. 즉 무지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의 이 방식이 명목상으로만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서술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너무나도 긍정적이요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 신비가가 때로는 긍정적인 어휘들을 사용하는가 하면 때로는 부정적인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지성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그것도 지성의 힘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알 수 있으며,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그분과 합일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랑이 표현되고 체험되는 통로가 바로 기도다. 기도는 합일로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친교 그것이다.

 

 

신비의 길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이처럼 인정받을 만한 기록자료들 이면에는 오랜 세월 축적되어 온 교회 전승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전승 가운데 일부분은, 예를 들어 성서와 신경들과 예식서와 정통 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기록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은 그에 못지않게 정형화된 구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뿌리들은, 설령 신플라톤 철학이라는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가 있었다 할지라도, 다름 아닌 신약성서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 첫날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세대는 저마다 걸출한 성인들과 관상가들을 배출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변함없이 이름을 떨치며 존경을 받아왔다. 물론 그들의 명성이 저술들 덕분에 유지된 경우가 아주 많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교회는 문자로된 유품이 있어야만 기억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연표에는 한 단어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었던 이들의 이름도 산재해 있다.

하지만 그 같은 목록들은 각양각색의 능력과 문화와 기질을 지니고서 디오니시우스가 정화 · 조명(照明)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합일이라는 삼중의 길로 지칭했던 바를 실천한, 이름 없는 무수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고작 십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수양이 깊고 독실한 영혼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줄곧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르시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돌진했으며', 그런 절실한 자세로 교회의 말없는 그러나 필요불가결한 전승에 이바지해 왔다. 이 점은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날로 성장해 가는 이 풍성한 전승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 저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기네 가르침의 대부분을 거기에서 끌어냈고, 그들만의 특이한 안목을 거기에 맞도록 조화시켰는가 하면, 특별한 강조점을 거기에다 첨가했다. 만일 그들이 때로 전승을 뒤틀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더라도,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어떤 것을 가미했더라도,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테고 그래서 교회에 위임된 신성한 전통에서 벗어날 의향이 조금도 없었음을 강조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서방교회는 처음 천 년 동안 영성생활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관상은 비교나 묘사가 불가능한 빛과 아름다움 · 지식 ․ 사랑 · 능력 · 충만의 계시로 체험되곤 했다. 후기 신비주의의 독특한 특성들은 (그들이 강조한 점들 모두 다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들 초기 관상가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로 거기에는 중세 계승자들에게서는 어쩌다가 발견되는 솔직성과 균형과 완전성이 담겨 있다.

기도생활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이 같은 방식은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을 계기로 점차 바뀌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아는 이른바 스콜라 철학의 발흥이요, 다른 하나는 서방교회가 이루어 낸 디오니시우스의 발견이다.

10세기에 시작해서 13세기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스콜라 철학 운동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성장이었다. 이것은 일정한 지적 훈련들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종교적 자료들을 정의하고 분석하고 조정했으며, 그로 인해 구축된 질서 위에서 더없이 과감한 철학적 사색과 이론 정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적인 것은 무엇이나 그 범주에 포함시켰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의 전체 속에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기도생활도 이 같은 분석과 체계화에 종속되었다. 그러면서 밝혀진 사실은 신비가들이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고도로 암시적인 문구들을 통해 서술한 체험들 이면에는 어떤 공통된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신비가들이 동일한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신비가들이 쓴 글들이 체계적이고 분석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 글들은 숨막히는 흥분과 정돈되지 않는 난삽함이 보이고, 바로 그러한 점이 그들이 표현하고자 한 엄청난 체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 글들에는 -물론 두드러진 예외들은 존재하지만- 명확한 체계는 없고, 따라서 기초 설계도는 어차피 완성된 건물을 보면서 추론해 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어쨌거나 당대의 신학적 조류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고 글을 쓴 관상가는 거의 없었으며, 정력적이고 독자적인 정신의 산물인 「무지의 구름」 같은 작품까지도 특히 후반부에 가면 14세기 특유의 흔적들을 많이 보이고 있다.

두 번째 지대한 영향은 서방교회가 디오니시우스를 발견해 낸 데서 기인했다. 라틴교회는 물론 「신비신학」을 비롯한 디오니시우스의 저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고,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그의 감화력은 무시되었다.

하지만 9세기에 아일랜드인인 에리제나가 디오니시우스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그의 가르침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알려졌고 또 인정받았다. 그의 준사도적(準使徒的) 위치는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리하여 그는 머지않아 -16세기에, 당시로서는 아직 보편적이지는 못했지만- '모습이 유사한(pseudo)' 사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무지의 구름」이 쓰여질 당시에는 영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권위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에 이 책 면면마다 그의 영향력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 시대 이래로 영성을 다룬 저자들 가운데 그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비판과 의문의 목소리가 급등하기에 이른 우리 시대에 와서도 디오니시우스는 여전히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철두철미하게 디오니시우스적인) 정교회의 기도방식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조짐들을 볼 때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앞으로도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상의 두 가지 거대한 흐름에서 맺어진 결실들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는 오늘날, 기도생활의 폭넓은 윤곽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직시해 보는 것도 결코 무가치한 일은 아니리라고 본다. 이것은 비단 「무지의 구름」이 현대 상황에 얼마나 훌륭하게 부합되는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기도가 언제 평범한 상태를 벗어나 신비적이 되는가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일정한 기본원칙들이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이 원칙들을 파악하고 나면 전체적인 구도가 심오하면서도 단순해진다. 그 원칙들이란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 능력을 완전히 넘어서는 분이라서 본질적으로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알 수 없는 분은 아니니, 우리는 사랑으로 그분께 도달하고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합일'할 수 있다.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일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는 한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분에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은총 또는 무상의 선물 덕분이라는 것이다.

기도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보통 '소리기도'와 '침묵기로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전자는 소리를 내어 하는 기도요, 후자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라도 거의 언제나 말을 방편 삼아 사고하는 까닭에 솔직히 이 같은 구분은 부적절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실들을 보되 그것들을 서술할 수 없다거나 서술하고 싶어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부르르 몸을 한 번 떠는 순간에' 능히 간파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전하는 이점은 있다. 우리는 일단 보면 알게 된다. 침묵기도는 소리기도보다 더 높은 단계로 간주죄고 있다.

우리가 말을 사용하는 기도는 통상적으로 다섯 가지 구성요소로 나누어진다. 흠숭 · 감사 · 고백 · (남들을 위한) 중재(중보) · (자신을 위한) 청원이 그것이다. 바로 이 포괄적인 범주에 드는 것으로 '화살기도'가 있는데, 이는 정규적인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 마치 하나님을 향해 화살을 쏘아올리듯이 토로하는 은밀한 낱말 또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기도를 말한다.

모든 형태의 기도, 심지어 신비적 기도까지도 '침묵기도'라는 포괄적인 범주에 넣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저술가들은 이 말을 따로 떼어 '묵상'과 동의어로 취급하곤 한다. 묵상은 어떤 진리나 성서구절을 두고 하는 의도적이면서 통상 체계적인 성찰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도에 맞추어 마음을 뜨겁게 데우고 의지를 움직이고 정신을 교화한다는 삼중 목표가 있다. 묵상에는 명백한 지적 요소도 지니고 있는데, 정신을 기도의 통로로 안전하게 이끌어 가지 못할 경우 묵상이 한낱 정신작용(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설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모든 체계는 정신을 그리로 물아가도록 되어 있다. 묵상을 위한 방법은 많지만 그것을 여기에 언급할 필요는 없다. 어떤 기도 지침서를 보아도 중요한 방법은 다 나와 있다. 종이에 적힌 방법들 가운데 일부는 더없이 위압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모두를 네다섯 개의 기본 요소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고 또 초심자도 할 수 있다. 모든 신비가들은 묵상을 기도생활의 초보단계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묵상은 하나님을 배우는 통로요, 따라서 초기단계에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정신이 하나님의 일에 충분히 교화되고 마음이 쉽게 그분께로 향할 수 있게 되면 묵상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필요 없게 된다. 아니 심지어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영혼은 더 이상 이런 초보적인 수련에 의지하지 않고도 곧바로 친교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결 심화된 앎 속에서는 이전 단계들에서 누리던 자유로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간단한 구절들을 자주 반복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렇게 될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는 처음 교제하기 시작한 단계에서는 할 말이 많은 법이지만, 사랑이 깊어지면 서로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진하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말은 갈수록 함축성 있고 의미 깊은 구절로 짤막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때 이전 표현들에 비해 현란한 수식어가 많이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실성이나 진실도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도에도 이와 흡사한 특성이 있어서 갈수록 발전하고 단순화한다.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고, 그러면서 점점 말 수는 줄어든다. 기도의 이 단계를 '애정적' 단계라고 하는데, 그것은 애정이 감성적인 방식으로 솟구치기 때문이 아니라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영혼이 삭막감과 고독감을 느낄 때조차도 기도의 표현에는 기본적으로 애정이나 사랑이 묻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자신의 기도가 완전히 건조해져 버렸다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된 데 대해 적이 당황하는 때가 올 수 있는데 바로 이 단계를 일반적으로 '신비기도'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이때 일어나는 일은 영혼이 스스로 아는 것 일체를 넓은 아량으로 하나님께 바치면서 그분을 가장 우선적으로 구하는 일이다. 그는 지금도 응답은 하고 있지만 이미 너무나도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평소의 정신상태로는 마주하는 체험을 해석하지 못하며, 이런 상황은 평소의 정신상태가 거기에 맞도록 조정될 때까지 이어진다. 이를 알아듣게 표현하자면, 정신의 수신장치가 수신되는 신호음의 강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를 식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대로 조정하는 일은 당장에는 (또는 한동안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이 단계에서 영혼은 무척이나 힘든 고통을 당하게 되는바, 그도 그럴 것이 오직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황량함과 당혹감뿐이기 때문이다. 바라기만 하고 감지하지는 못하는 이 단계는 영혼에게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제거해 주는 더욱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신이 가진 것 일체를 하나님께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단지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하면 되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해야 하는 분으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오감(五感)의 밤'이라 일컫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이제 한결 분명하게 주도권을 잡고 통제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분은 신비가들이 항상 인정하고 있듯이 그 동안에도 줄곧 그렇게 해오고 계셨다. 모든 것은 '은총에서' 기인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앞서지 않는 한 기도생활은 무엇 하나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외부 관찰자 눈에는 지금껏 숨겨져 드러나지 않던 하나님의 활동이 한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같은 '밤'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영혼이 그만큼 순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한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여기에는 때로 영혼이 강도 높은 정화를 거치면서 자신이 철저히 무가치하고 쓸모없음을 깨닫는 가운데 이윽고 하나님을 온전히,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 자신만을 생각해서 섬기고 사랑하기로 분명하게 결심하는 '영혼의 밤'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온통 어둠과 저버림만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빛의 순간도 따른다. 그럼에도 영혼은 참을성을 잃고 돌아서기도 한다. 이때가 기도생활에 있어 위기의 시간이다. 밤이 최고로 어두운 때조차도 영혼은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영혼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 모든 것 이면에는 하나님을 감지하는 이런 필연적인 깨달음과 하나님을 바라는 엄청난 갈증이 자리한다. 이론가들은 영혼이 이미 하나님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의 하나님을 발견했으며,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내고 있다고 보기 쉽지만 이 상태에 있는 영혼에게는 아주 선명하거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신음과 괴로운 산고'만 있을 뿐 '열망에 찬 기대'는 전혀 없다. 꺼지기를 거부하는 가느다란 희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혼은 글자 그대로 자신을 이탈한 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붙잡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정말로 그 힘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을 하시되 영혼의 의지를 좇는 것이 아니라 명령권을 지니고 당신 뜻대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제아무리 오래 지체되더라도 -이 기간은 외관상으로 보면 영혼의 응답이 얼마나 즉각적이고 완전하냐에 비례하는 듯하지만, 어쨌거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 손에 있다- 필연적으로 결과는 나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현존(임재)이 어렴풋하게 감지되던 상태에 이어 무한정한 결실이 맺어지면서 영혼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루 형언할 수 없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 순간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표현이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탈혼의 순간'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훨씬 무난하다.) 또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까닭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만 지속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체험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다가오는 시간과 방식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영혼이 준비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어떻게 아느냐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채로 법열이 됐든 어둠이 됐든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며 바로 그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최선책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어루만지시는 동안에 정신과 오감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영혼이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아하고 육체와 정신이 깊은 행복감에 조용히 자신을 내맡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이 일컫는 이 이른바 '침잠기도'에서는 필요한 노력만 하면 제반 기능들이 발휘될 수 있다.

이 같은 체험들을 더욱 심화시키고 횟수를 늘리는 일은 가능하다. '완전한 합일'은 일치감이 너무나 깊은 나머지 정신이 온전히 사로잡혀 황홀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법열적 합일'은 그보다 더욱 깊은 것으로, 합일의 강도 때문에 정신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도 정지되어 버리는 상태를 말한다. 환희와 법열이 외적으로 발산되는 이 같은 표현들은 영혼이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익숙해짐에 따라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비가는 그것을 더없이 고마워한다. 왜냐하면 신비가는 자신의 탈혼상태가 자기 개인에게는 제아무리 큰 기쁨이 될지언정 거기에서 비롯되는 당혹감을 주변의 동료들 못지않게 곤혹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성생활의 대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법열을 영성의 징표로 삼지 말도록 경고하면서, 절대로 이를 추구하지 말며 설령 찾아오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당부한다. 위대한 신비가들 모두가 이런 정신적-육체적 현상을 체험한 것 같지는 않으며,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현상에 빠져드는 경향은 하나님의 방문 자체보다는 본인의 기질과 심리상태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거짓 탈혼의 위험성은 너무나 자명해서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신비 체험의 극치는 '영적 혼인'이다. 영혼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더없이 긴밀하게 합일할 준비를 갖추는 이 단계까지 도달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상의 보편적인 모형에 훌륭하게 부합될 수 있는 것이 바로「무지의 구름」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후대 사람들의 분석을 미리 예상했다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묵상이 끝나는 자리를 출할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가 두 가지 '밤'을 (비록「무지의 구름」에는 둘 다 나와 있기는 하지만) 구태여 구별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 그 자신은 법열상태에 포함됨직한 더 진전된 단계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다루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후대들이 강조하고 있는 점들을 능히 수용하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무지의 구름"을 읽어야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여겨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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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